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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구간(유랑과 정착)
망지리(望智理) (2)
지리산 둘레길에서 벗어나 있지만 금대암(金臺庵)과 상무주암(上無主庵)을 빼놓고는 이야기를 이어갈 수 없을 것 같아 이 두 암자의 이야기부터 하면서 제4구간을 시작하련다.
금대암은 4구간의 출발점인 금계마을의 뒷산인 금대산 8부 능선에, 상무주암은 삼정산 정상 부근에 각각 자리 잡고 있는 암자이다.
이 두 암자 모두 오래된 고찰이라는 점 말고도 닮은꼴의 공통점이 많다.
그 중에서 하나만 꼽으라면 망(望)지리의 빼어난 조망처라는 것을 들고 싶다.
금대암과 전나무
금대암은 656년(신라 태종무열왕 3) 행우(行宇)가 창건하였으며, 도선(道詵)이 나한전을 지어 중창한 뒤 나한도량으로 이름이 났다고 하며, 1430년(조선 세종 12)에 천태종 판사도대선사(判事都大禪師) 행호(行乎)가 인근 안국사(安國寺)와 함께 중창하였고 한다.
금계마을에서 60번 지방도를 따라 마천면 소재지를 지나서 산내 방면으로 가다보면 오른쪽 금대암 진입로를 만날 수 있다.
시멘트포장길의 오름길을 따라 오르면 금대암 주차장에 이르게 되는데 자동차로 접근할 수 있는 편리함 때문에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어쨌든 이곳은 지리산 천왕봉의 조망처로서 최고의 자리이다.
금대암 앞마당에 서면 바특이 다가서 있는 창암산 너머로 지리산 능선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는데, 형제봉에서부터 벽소령, 덕평봉, 칠선봉, 영신봉, 촛대봉, 연하봉, 제석봉, 천왕봉을 거쳐 중봉, 하봉까지의 지리산 주능선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손에 잡힐 듯 친숙하게 다가선 천왕봉의 실체를 여과 없이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린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이다.
천왕봉 조망의 명소로 이곳보다는 창암산 전망대, 삼봉산, 금대산, 오도재 전망대 등이 우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오히려 이곳을 천왕봉 조망처로 최고의 자리라고 꼽은 이유는 이곳의 전나무 때문이다.
이 나무는 수령(樹齡) 약 500년, 높이 약 40m, 경상남도기념물 제212호로 지정된 금대암전나무라고 이름 붙여진 나무이다.
나는 이 금대암전나무의 수령이나 크기, 도기념물 지정연유에 대하여 논할 지식도 없거니와 이 나무를 품평하고자 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 천왕봉을 조망하려면 이 나무를 빼놓을 수 없는데, 그것은 이 나무가 금대암 앞마당의 바로 밑에 자리 잡고 있는 위치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곳에서는 등등(騰騰)하면서 장엄한 천왕봉의 풍광위에 쭉 뻗어 오른 늠름한 이 나무의 힘찬 모습이 겹쳐지는 그림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나의 발걸음에 따라 이 나무는 하봉이나 중봉에 살짝 걸쳐지기도 하고, 제석봉이나 연하봉과 어울리면서 주인공인 천왕봉을 더 돋보이게도 한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천왕봉 조망은 이 전나무와의 절묘한 구도로 인하여 빼어난 그림으로 다가서게 되는 것이며, 그래서 나는 어울림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게 된 이곳을 최고의 조망처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조망처로서 빼어난 장소 금대암을 찬미하면서 이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를 끄집어내어야 할까를 한참 망설였다.
사실 문화재나 명승에 대한 안내판을 읽다보면 이외로 오류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나는 안내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어지간하면 그것을 외면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그것을 비판할 만한 식견을 가지지 못한 것도 이유이지만 둘레길 자체의 이야기만 해도 벅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금대암에서 만큼은 예외로 하기로 작심하면서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금대암에는 금대암, 금대사 삼층석탑, 그리고 금대암 전나무에 대한 3개의 안내판이 있다.
그대로 인용해 보면, 금대암 안내판에는 “이 사찰은 신라 태종 무열왕 3년(656)에 행호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라고 설명하고 있으면서 금대사 3층석탑 안내판에는 “금대사는 656년(신라 태종 무열왕 3)에 행평조사가 창건하였다....”라고 설명한다.
이 암자의 창건주가 과연 누구라는 말인지?
또한 금대암 전나무 안내판에는 “.... 이곳 전나무는 1403(태종 3)에 행호조사가 창건한 금대암 입구에 서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암자의 창건 년대가 신라시대가 아니라 조선시대라는 것인지 헛갈리게 하고 있다.
금대암의 경내에, 그것도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에서 이렇듯 각각 다른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이들 안내판이 없다면 헛갈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관리자들의 무책임하고 무성의한 작태를 거론해 보지만 마음은 편치 않다.
상무주암
상무주암은 금대암처럼 자동차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영원사까지는 차량으로 접근이 가능하지만 이곳에서부터는 등산길로서 약 1시간 정도 올라야 도달할 수 있는 곳으로, 지리산에서 법계사 다음으로 높은 해발 1,100m 고지에 자리 잡고 있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보조국사 지눌이 이 암자를 창건하고 일체의 바깥 인연을 끊고 내관(內觀)에만 전념하여 크게 깨달았다는 기록을 미루어 1,200년 전후가 아닌가 한다.
보조국사의 대오 이후 이 절은 성지화되어 많은 승려들의 수행처가 되었으나 역사는 뚜렷이 전하지 않는다.
근래에는 조계종 10대 종정을 지낸 혜암스님이 수행하기도 했던 곳이다.
현존하는 당우는 6. 25이후에 건립한 것으로 인법당(因法堂)과 아주 작은 산신각이 전부이다.
그리고 마당 한편에는 자그마한 3층 석탑이 있는데, 고려 말의 고승 각운이 이곳에서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 30권의 저술을 완료하였을 때 붓통 속에 갑자기 사리가 떨어져 그 사리를 봉안한 탑이라 하여 필단사리탑(筆端舍利塔)이라 한다.
상무주(上無住)의 불교적 의미는 부처님도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경계(上)이고, 머무름이 없는 자리(無住)라는 뜻이라고 한다.
어째든 이 암자의 마당 앞에 서면 현란한 모습으로 펼쳐진 지리산의 연봉들의 환상적인 풍광을 접할 수 있다.
이 앞에 펼쳐진 연봉들을 상무주암의 잘 정돈된 정원이라는 글을 접한 적이 있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상무주를 ‘이곳 이상(上)의 머물 자리는 없다(無住)’라고 엉뚱하게 해석하면서 지리산을 조망처로서 걸맞은 이름이라 주장해본다.
원래적 의미를 훼손함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사실 상무주암에서의 지리산 조망은 암자 마당에서보다 암자 동쪽 능선 상의 소나무가 있는 너럭바위에서 보는 풍경이 압권이다. 이곳에서는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연하봉, 촛대봉, 영신봉, 칠선봉, 덕평봉, 형제봉 그리고 삼각고지 너머의 명선봉까지의 지리연봉의 파노라마를 여과 없이 조망할 수 있다.)
상무주암에서 약 10분 정도 오르면 삼정산(1,225m) 정상이다.
사실 상무주암에서의 조망도 조망이지만 지리산의 조망처 중에서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사방이 확 트인 이곳에 서면 능선들의 현란한 굴곡의 역동적인 모습이 시원하다.
이곳에서의 지리산 능선의 조망은 한눈에 담을 수 없다는 스케일의 크기에 첫 번째 놀라게 된다.
동남쪽 천왕봉(물론 하봉, 중봉도 포함해서)부터 시작하여 서남쪽의 반야봉까지의 이어지는 주능선과 서쪽으로 만복대⋅세걸산⋅바래봉⋅덕두산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을 보기 위해선 몸을 반 바퀴 이상 돌려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동남에서 서북까지 정확하게 180도의 반원으로 이어진 지리산의 능선이 이 산을 중심으로 도열하여 있는듯한 모습을 보노라면 가슴 벅찬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리산의 중심이 바로 이곳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곳에서 나는 ‘더 이상의 머물 자리가 없다(上無住)’라고 근거 없이 해석한 문구를 한 번 더 차용해 본다.
삼정산 – 조망처 복원에 대한 간절한 소망
삼정산을 지리산 제1의 조망처라 꼽은 나의 이야기를 철회(또는 수정)하여야 할 것 같다.
내 자신이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내가 삼정산을 마지막으로 오른 것이 1990년대 후반이었고, 내가 이글을 쓴 것은 2013년 10월 27일 둘레길 4구간을 걷고 난 후였으니, 15년이 훨씬 지난 옛 이야기를 쓴 것이었다.
2017년 8월 5일, 지리산 둘레길 3구간의 두 번째 순례를 하면서 일행들에게 건너편에 마주한 삼정산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누군가가 삼정산 등산을 제안하였고 그 자리에서 9월 넷째 주 토요일인 23일로 날짜까지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약 20년 만에 삼정산을 오르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지리산 제1의 조망처라고 입에 침이 마르듯이 찬양해온 삼정산 정상은 지리연봉은커녕 빼곡히 둘러쳐진 잡목 숲에 갇혀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날 나는 황당하고 허망스런 감정에 한참을 하늘만 처다 보았다.
그동안 나는 거짓말을 늘어놓은 셈이 되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강산이 얼마나 변한지를 확인하지도 않고 옛 추억의 그림을 현재의 사실인양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한 꼴이 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삼정산은 오랫동안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하여 왔던 것 같다.
그 결과 정상부에 잡목들이 우거지게 되었고, 더 이상 지리산 제1의 조망처가 아니었다.
내 기억 속에서만 조망처로서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었을 뿐 일반인들에게는 잊혀진 산이 된 것이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글을 내려놓지 않는 이유는 지리연봉과 서북능선을 가감 없이 조망할 수 있는 위치로 이곳만큼 탁월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우거진 잡목만 제거하면 조망처로서의 기능을 회복할 것이고 예전의 그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놓을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내 자신이 이곳 정상부의 잡목을 전부 베어버리려는 생각까지도 해 보았을까. 어떠한 처벌을 감수하더라도 말이다.
삼정산은 지리산국립공원구역 내에 있으며, 지금도 비정규 탐방로로 지정되어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다만 영원사에서 빗기재, 상무주암을 거쳐 문수암으로 넘어가는 칠암자 순례길만 열어 놓았을 뿐이다.
지리산 국립공원 내 비정규 탐방로의 출입통제라는 제도의 취지는 지리산의 무분별한 훼손과 위험구간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자연보존과 사고예방을 위하여 불가피한 경우에 탐방로를 통제한다는 최소한의 규제를 전제로 하여야 한다.
자연보존과 사고예방의 판단기준은 명승탐방과 비교형량하여 부수적인 측면에서 판단하여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누구든 지리산의 빼어난 명승을 탐승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설혹 약간의 자연환경침해나 위험요소가 있더라도 이를 보완하여 개방할 가치가 있다면 탐승을 허용하여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삼정산의 출입통제가 타당한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검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출입을 통제하여 자연환경보존과 위험구간의 사고예방을 우선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조망처로써 빼어난 명승을 누구든 탐승할 수 있게 허용할 것인가를 비교형량하여 판단해 보자는 것이다.
사람들이 출입하게 되면 자연환경은 오염되거나 훼손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관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경우에는 당연히 출입을 통제하여야 할 것이나, 일반의 출입으로 인한 통상적인 훼손인 경우에는 관리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개방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출입이 통제된 삼정산의 탐방로는 상무주암 화장실 옆의 오름길인데, 현재 오름길 초입에는 가로지른 밧줄에 출입금지의 표지판을 걸쳐 놓았다.
그 내용인즉 추락위험지역으로 출입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삼정산 정상까지는 500m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이며, 경사가 심한 약20m의 로프 구간이 있지만 출입금지의 문구처럼 추락할 위험은 전혀 없다.
이렇게 볼 때 삼정산 탐방로를 열었을 경우 예상되는 환경훼손의 정도는 통상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며, 방치된 탐방로를 정비를 한다면 경사구간 역시 크게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삼정산은 지리산 주능 전체는 물론 태극능선까지도 조망할 수 있는 기막힌 조망처이다.
뿐만 아니다. 람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서 횡으로 뻗은 투구봉, 삼봉산, 법화산으로 이어지는 외지리의 능선도 원 없이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말하자면 지리산 조망처로써 이만큼 빼어난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참에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닫아걸었던 삼정산 탐방로를 정비하고 정상부의 잡목도 제거하여 누구든 출입 할 수 있게 개방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삼정산에 대하여 이처럼 장황하게 이야기를 이어온 것은 지금까지 우긴 것이 아까워 계속 우기고 싶은 뻔뻔함이 아니라, 지금까지 확신해온 망지리 명승으로 놓치고 싶지 않은 절실함이라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삼정산 탐방로가 활짝 열려 장대한 지리능선을 원 없이 조망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하고 또 소망해 본다.
유랑 그리고 정착
의탄리에는 금계(金鷄), 의평(義坪), 의중(義仲)마을이 있다.
지리산 둘레길 4구간의 출발점 금계마을에서 의탄교를 건너면 의평이고, 좌측으로 오르면 의중마을, 직진하여 조금가면 추성마을이 나온다.
의평마을은 평정말(평정몰)이라고도 부르는데 평평한 곳에 위치한다고 해서 이르는 이름이라고 하며, 의중마을은 의탄리의 가운데 마을이라 하여 중말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계곡을 따라 도로가 나 있어 의중마을을 거치지 않고 추성이나 벽송사로 갈 수 있지만 과거에는 이 마을을 거쳐 산 쪽으로 난 숲길이 유일한 통로였는데, 둘레길 때문에 이 길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의탄리(義灘里)의 ‘탄’이 ‘여울 탄’자이다.
여울이란 물이 얕고 빠르며 돌이 많아 배가 다니기 위험한 곳을 일컫는 말로서 이곳의 지형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예전에 숯을 굽는 곳이었다 하여 ‘숫 탄(炭)’이 원래의 표기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것의 한자 표기가 ‘여울 탄’으로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곳의 옛 이름은 의탄소인데, 소(所)란 신라에서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하층 특수행정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를테면 종이를 만드는 지소(紙所), 숯을 굽는 탄소(炭所), 그릇을 만드는 자기소(磁器所), 철을 만드는 철소(鐵所), 기와를 굽는 와소(瓦所), 소금을 생산하는 염소(鹽所) 등을 일컫는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세종실록지리지에 마천에는 마천소(所)와 의탄소(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마천소는 종이를 만드는 지소, 의탄소는 숯을 굽는 탄소였다는 것이다.
마천소의 위치는 현재의 면소재지에서 가흥교를 건너 북서쪽에 있는 도마부락 일대라고 한다.
향(鄕), 부곡(部曲)과 마찬가지로 소(所)는 천민이 살던 곳으로, 죄지은 자, 전쟁 포로자, 반역죄인의 유족 등을 따로 정한 곳에 모여 살게 하면서, 주로 나라에서 소용되는 종이나 철, 숯 따위를 만들어 나라에 바치게 하였다.
조선 초기 행정구획의 정리로 소가 사라지게 되었으나 여전히 힘없는 하층 천민들이 모여 들어 사는 곳이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마천을 두고, “이곳에는 망하여 들어온 유민들이 많고, 때때로 도적이 나오기도 한다. 또 온 산에 귀신을 모시는 사당이 많아서 매년 봄⋅가을이면 사방 이웃 무당들이 구름같이 몰려와서 기도를 드린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오랜 전란으로 급격히 늘어난 유랑민들이 이곳까지 밀려 들어와 새로이 정착하게 된다.
죄지은 자, 망한 자, 쫓겨난 자들의 고단한 유랑의 길을 접으면서 정착하게 되는 곳이 이곳 마천이었다.
변강쇠와 옹녀의 유랑의 끝도 이곳 마천이었다.
무엇보다는 유랑민으로 이곳에 정착한 원조는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이라 할 수 있다.
추성마을은 구형왕이 이곳에 들어와 추성(楸城)이라는 성을 쌓고 군마를 훈련시키며 피난처로 이용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며, 지금도 그 성터가 남아 있고 높이가 10미터나 되는 망석이 있다.
성의 안쪽에 있다하여 성안마을, 그리고 성안마을 위쪽 계곡이 국(國)골인데 가락국의 왕이 피난 생활을 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들이라 한다.
또한 칠선계곡을 따라 오르면 두지(뒤주)터를 만나게 되는데 왕이 이곳에 창고를 짓고 군량미를 비축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곳 사람들은 구형왕이 신라에 쫓겨 이곳에 정착하였다는 구전을 믿고 있다.
그래서 마천은 슬픈 유랑민들을 기꺼이 품어주는 정착지였던 것이다.
벽송사(碧松寺)
벽송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서암정사이다.
이곳은 폐사에 가까웠던 벽송사를 중창하신 구한원응(久閒元應)스님이 1989년부터 불사에 착수하여 화엄도량으로 창건하였다.
원래는 벽송사의 부속암자였으나 지금은 독립된 사찰로 주위의 자연 암석에 무수히 많은 불상을 조각하여 불교예술의 진미를 보여주고 있다.
추성에서 벽송사로 올라가는 길의 주차장에서 좌측으로 돌아가면 서암정사를 만날 수 있는데 경내에 조각된 불상들을 친견하면서 한 바퀴 돌다보면 과연 불국정토가 이런 곳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곳이다.
특히 석굴법당에는 사방의 벽과 천장에 아미타부처님과 8부신중, 10대 제자 그리고 비천상 등을 빼곡히 조각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환열(歡悅)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연중 내내 참배객들이 끊어지지 않는 곳이다.
다시 돌아와 주차장에서 직진의 경사진 길을 오르면 벽송사이다.
雲居天上(운거천상) 구름 위 하늘 세계
別有天地(별유천지) 인간 세상 밖에 따로 있는
芙蓉淨土(부용정토) 연꽃이 활짝 핀 극락정토에
祖印萬代(조인만대) 조사의 깨달음을 만대에 이어 지리
풍수지리학적으로 연꽃(芙蓉)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芙蓉滿開)의 형국에 자리 잡은 벽송사를 적절하게 표현한 고인(古人)의 문구를 인용해 보면서 벽송사를 이야기 할까 한다.
벽송사(碧松寺)는 1,520년(조선 중종 15) 벽송지엄(碧松智嚴)선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서 우리가 잘 아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이다.
벽계정심(碧溪正心)의 선맥(禪脈)을 이어받은 벽송지엄에서부터 부용영관(芙蓉靈觀), 청허휴정(靑虛休靜:서산대사), 부휴선수(浮休善修), 송운유정(松雲惟政:사명당), 청매인오(靑梅印悟) 등 이름 있는 정통조사들이 이곳에서 수행 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으며, 대 종장들을 109분이나 배출하여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이라는 별명을 가진 곳이다.
벽송지엄선사는 간화선 수행법(看話正宗)에 의해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은 조선의 첫 번째 조사가 되었고, 따라서 벽송사는 간화선 제일의 한국 선불교의 근본 도량이라 할 수 있다.
벽송산문의 제2대 조사에 오른 분은 부용영관(芙蓉靈觀)선사인데, 도가 높고 학문이 깊어 배우러 오는 승속제자가 문전성시를 이루어 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선비가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전단향나무를 옮겨 심으니 다른 나무들도 향기가 난다”라고 하는 말이 널리 유행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부용영관의 제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이다.
우리들에게는 서산대사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는 청허휴정은 벽송산문의 제3대조사가 되어 행화(行化)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군을 일으켜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전력을 다하였으며, 자신의 문하에 송운유정(사명당)과 청매인오도 이곳에서 오도하여 크게 불법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부용영관의 다른 한 사람의 제자인 부휴선수 또한 이곳에서 오도하여 벽송산문의 조사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불교 출가스님의 모두가 서산문파와 부휴문파에 속한다고 할 정도로 벽송사가 조선불교의 종가(宗家)로 약 300년 동안 조선 제일의 총림이 이루어져 선교겸수(禪敎兼修)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벽송사를 가리켜서, “조계조정(曹溪朝庭), 벽송총림(碧松叢林), 선교겸수(禪敎兼修), 간화도량(看話道場)”이라고 불렀으며, 벽송사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6.25때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면서 국군의 방화로 소실되는 슬픈 역사를 맞게 되었다.
그 후 60년대 들어 구한원응(久閒元應)대사의 원력으로 중건되었고, 따라서 내면의 역사적 무게와는 달리 외면적으로 고즈넉하고 정갈하다는 감상 외에 고찰의 둔중한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그러나 벽송사 3층 석탑과 벽송사 목장승 그리고 도인송(道人松), 미인송(美人松)을 일견하면 외피적으로도 벽송사가 그리 녹녹하지 않은 내공의 장소라는 것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경남민속자료 2호로 지정된 벽송사 목장승(碧松寺 木長丞)은 원래 벽송사 입구에 서 있었던 것을 보호각에 옮겨놓고 원래의 자리에는 복제품을 세워 놓았다.
보호각에는 머리의 일부가 불에 타버린 금호장군(禁護將軍)과 그나마 온전한 호법대신(護法大神)인 한 쌍의 장승을 나란히 세워 놓았다.
금호장군이란 잡귀의 출입을 통제하는 장군이란 장승이고, 호법대신이란 불법을 지키는 신이라는 장승으로 사찰 법역의 청정과 존엄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장승들이다.
튀어나올 듯 돌출된 왕방울 눈과 큼직하면서 뭉특한 코, 그리고 꽉 다문 입 주위의 굵고 꼿꼿한 수염의 호법대신 장승을 보노라면, 오랜 세월 풍상에 패인 밤나무 특유한 골의 질박한 모습과 과장된 표현이 무섭다기보다 오히려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머리의 일부가 불에 타버린 금호장군 장승은 눈 한쪽과 코의 가운데 부분, 그리고 이마와 그 윗부분 전체가 파손되어 주삣주삣한 잔형(殘形)의 나무결을 보노라면 괴기스럽다기보다 오히려 처연(悽然)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혹자는 변강쇠가 불태운 목장승과 이 장승을 연관 짓는데, 아마 변강쇠전의 무대가 이곳 마천 일대라는 데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벽송사의 또 하나의 명물, 도인송(道人松)과 미인송(美人松)은 푸른 소나무라는 벽송(碧松)의 의미와 묘하게 일치한다.
벽송사 경내에 들어서면 가람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도인송과 미인송은 당우의 제일 뒤쪽 언덕바지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음을 볼 수 있다.
원통전 뒤쪽의 비탈길을 조금 오르면 도인송을 만난다.
그 비탈에서 쭉 뻗어 오른 도인송을 밑에서 올려다보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한 당당한 기세에 눌리지 않을 수 없다.
그곳에서 조금만 오르면 3층 석탑이 있는 널찍한 평지이다.
원래의 절터가 이곳이었는데 6.25때 소실되고 아래로 이동하여 새로 지은 것이 현재의 당우이다.
보물 제747호로 지정된 3층 석탑 앞에는 미인송이 민틋한 모습으로 서있다. 약간 거리를 두고 옆에서 보면 늘씬하게 휘어진 자태가 고혹적인 여인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미인송인가 보다.
이곳에서는 미인송과 도인송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아야 한다.
미인송의 늘씬함과 도인송의 당당함이 어울리면서 한 폭의 잘 짜여진 그림이 되는 것이다.
또한 도인송을 향하여 기울여 있는 미인송의 모습에서 애절한 구애의 스토리텔링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도인송과 미인송에 가까이 다가서면 상처투성이의 줄기를 볼 수 있는데, 특히 미인송은 줄기의 상단까지 길게 이어진 상처가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운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이 모두 일제 때 송탄유를 추출하기 위해 송진을 채취하면서 만든 상처이란다. 이 나무들이 겪었던 역사적 아픔의 상처인 것이다.
역사적 아픔은 이 뿐만 아닐 터, 그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6.25때 국군의 방화로 실상사가 소실될 때 이들은 이 자리에서 화마에 휩쓸려 목숨을 잃을 긴박한 상황을 겪기도 한 것이다.
그러한 아픔을 침묵으로 채곡채곡 쌓아둔 내공이 오늘날의 미인송, 도인송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승화된 것이리라.
변강쇠 이야기
변강쇠전은 판소리계 소설의 하나다.
이를 다른 말로 가루지기타령이라고도 하는데, 죽은 변강쇠를 뎁득이 등이 거적으로 말아 ‘지게에 가로로 지고 묻으러 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며, 한자어로 횡부가(橫負歌)라고도 한다.
강한 쇳덩어리 기물(器物)의 난봉쟁이 강쇠와 하체가 항아리 같은 옹녀의 만남,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가 변강쇠전(가)이다.
도입부(導入部)부터 걸쭉한 옹녀에 관한 사설을 인용해 본다.
“열다섯에 얻은 서방은 첫날밤의 잠자리에서 급상한(急傷寒)에 죽고, 열여섯살에 얻은 서방은 당창병(매독)에 튀고, 열일곱에 얻은 서방 용천병에 펴고, 열여덟에 얻은 서방 벼락맞아 식고, 열아홉에 얻은 서방 포청에 떨어지고, 스무살에 얻은 서방 비상먹고 돌아가니, 서방에 퇴가나고(싫증나고), 송장치기 신물난다.”
그 줄거리를 계속 이어 가보자.
뿐만 아니었다. 간부, 애부, 새흘유기, 입 한번 맞춘 놈, 젖 한번 만진 놈, 눈 흘레한 놈, 손 만져본 놈, 그리고 심지어는 옹녀의 치마귀 상처자락 얼른 대한 놈까지 모두 죽었다.
이렇게 하여 수천 명의 남자들이 옹녀 때문에 죽자 삼십 리 안팎에 상투 올린 사내는 고사하고 열다섯 넘은 총각도 다 쓸어버리고 없어 계집이 밭을 갈고 처녀가 집을 지으니 황해도, 평안도 양도민이 공론하기를 이년을 그냥 두었다간 남자 놈은 한명도 없는 여인국이 될 터이니 쫒아내자고 의논하고 그길로 그녀를 쫓아내었다.
쫓겨난 옹녀는 남행하다 천하의 잡놈 변강쇠를 개성 땅의 청석관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른바 대사를 치르면서 수작 나누는 ‘기물타령’부터 질퍽하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19금으로 처리한다.
어쨌든 두 남녀는 서로 뜻이 맞아 부부로 인연을 맺고 각처를 떠돌다 변강쇠의 노름질, 싸움질, 난봉질 때문에 못살게 되자 옹녀의 간청으로 지리산으로 들어가 정착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지리산에 들어와서도 낮에는 잠만 자고 밤에는 배만 타니 옹녀가 “굶어 죽기 고사하고 우선 얼어 죽을 테니 오늘부터 지게 지고 나무나 하여 옵소”라고 당부한다.
마지못해 나무하러간 강쇠는 낮잠을 자다가 날이 저물 무렵 목장승 하나를 뽑아서 지게에 짊어지고 돌아오자, 옹녀는 장승을 패어 때면 장승동증에 걸려 죽는다고 진언하지만, 강쇠는 가장이 하는 일에 아녀자가 끼어들지 말라고 하면서 도끼로 장승을 패어 군불을 때었다.
강쇠에게 뽑혀서 불에 때어진 장승 목신이 너무나도 원통하여 대방장승을 찾아가 사정을 하소연하자, 이에 팔도의 장승들이 다 모여 병을 하나씩 가지고 가서 강쇠의 정수리에서 발톱까지 온 몸의 오장육부 안팎으로 겹겹이 병을 바르자고 결정하고, 실행하여 강쇠는 선채로 장승 죽음을 당하게 된다.
강쇠가 죽자, 옹녀는 강쇠의 송장을 치장해 주는 자가 있다면 그와 함께 살겠다고 하였다. 먼저 중이 나섰으나 강쇠의 시체를 만지자 말자 죽고 만다.
그다음 초라니, 풍각장이 등 모두 여덟 사람이 죽게 된다.
서울 재상댁 마종(馬從) 뎁득이가 그곳을 지나다 남편 송장을 쳐주면 함께 살겠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 옹녀의 집을 들렀다.
그는 앞에 죽었던 자들과 달리 서서 죽은 강쇠의 시체를 만지지 않고 떡메로 뒷벽을 쳤다. 그러자 서있던 송장들이 벽에 치어 덜퍽 자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설이패 셋을 삯꾼으로 얻어 한 사람이 두 송장씩 짊어지고 북망산에 이르게 되어 각설이들은 송장짐을 다 내려 묻어주었으나, 뎁득이가 진 강쇠와 초라니 송장은 등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뎁득이가 꾀를 내어 두 소나무 사이로 돌진하여 송장을 상중하로 동강내었으나, 남은 송장 한 부분은 그래도 안 떨어져서, 바위 절벽에 등을 대고 갈아서 없애 버렸다.
그리고 뎁득이는 옹녀를 취하려 하였던 음심을 버리고 그녀에게 부디 풍류남자를 가리어서 잘 살라고 당부한 후, 자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처자와 함께 살 것이라 하면서 하직한다.
변강쇠전은 ‘성(性)’과 ‘죽음(死)’을 노골적으로 다루고 있으나 난잡한 음란문학이나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 작품은 크게 전반부(前半部)와 후반부(後半部)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는 두 사람이 만나서 떠돌다 지리산에 정착하기까지의 이야기로서 ‘성’에 관한 질퍽한 사설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으며, 후반부는 변강쇠가 죽고 그 송장을 묻으러 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사실 변강쇠전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발생한 유랑민이 유랑에도 실패하고 정착에도 실패하여 죽어갔던 슬픈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전반부에서 성을 전면에 내세웠던 것은 삶의 극한에 내몰린 유랑민의 슬픈 이야기를 해학적으로 풀어가기 위한 방편이라 생각된다.
후반부는 장승들의 징벌에 의한 강쇠의 죽음과 자신의 송장을 치러 오는 사람들을 죽게 하고 또 송장들끼리 붙게 하고 나중에는 땅에 달라붙게 하는 강쇠의 처절한 저항도, 그 내면은 굶어죽고 얼어 죽은 시체들이 즐비했던 그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상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변강쇠전의 지역적 배경에 대해 그동안 전라북도 남원시와 경상남도 함양군이 서로 자기네 지역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함양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어 거의 정설(定說)로 되고 있다. 그 이유로 운봉⋅인월⋅산내의 장승은 석장승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이에 반해 함양 마천에서는 목장승이 유명하였다.
실재로 변강쇠가 뽑은 장승이 서 있던 곳도 ‘등구 마천 가는 길’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벽송사(碧松寺)의 목장승은 예전부터 유명했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는 함양, 등구 마천, 백모촌(백무동) 등의 지명이 많이 나온다.
따라서 나도 변강쇠가 정착한 곳이 함양이라는 견해에 동의한다.
최창조 박사의 ‘땅의 눈물 땅의 희망’이라는 책의 ‘<변강쇠 타령>이 살아 있었네’를 인용하면서 끝을 맺을까 한다.
“이 타령에 나오는 등구 마천은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로 벽송사로 보는 사람도 있다. 즉 이를 옥녀개화형(玉女開花形)으로 판단한 것인데, 밤 살림 때문에 낯 살림이 기울자 팔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을 찾아든 곳이 지리산 등구 마천이며 천왕봉에서 칠선계곡을 보면 또한 옥녀개화형이란 것이다.”
용유담(龍遊潭) 이야기
산과 계곡이 이 같이도 좋아서 / 천천한 걸음으로 나 다시 찾아왔네
은은하게 피어난 꽃 아름다운 빛 / 망망한 하늘에는 새 그림자 돌아오네
높은 벼랑은 영지 못에 떨어지고 / 맑은 낮 바람 소리 높이 우누나
놀란 용들아, 낮잠에서 깨어라 / 그대 불러 한 바탕 웃어 보리라.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 선생이 용유담에 대해서 읊은 시이다.
용유담은 지리산물들이 급류를 이루면서 흐르다 이곳에서 잠시 멈추면서 만들어 낸 맑고 깊은 담(潭)으로서 예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지리산의 명승 중의 하나이다.
실재로 이곳에는 유호인의 스승 점필재 김종직을 비롯하여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탁영 김일손, 그리고 남명 조식선생이 이곳을 다녀간 흔적으로 ‘문헌공 점필재 김선생(文忠功 佔畢齋 金先生)’, ‘일두 정선생(一蠹 鄭先生)’, ‘탁영 김선생(濯纓 金先生)’, ‘남명 조선생(南冥 曺先生)’이라고 각자(刻字)한 바위가 있다.
지리산 골골에서 나온 물들이 말처럼 빠르게 쏟아져 내려오다가(馬川), 이곳에 이르러 숨을 고르고 그 다음 쉬어가면서 흐른다(休川).
그래서 이곳이 마천과 휴천의 경계인가 보다.
이곳에서의 관망 포인트는 용유교이다.
다리 중간에서 상류 쪽으로 바라보노라면 용유담의 시리도록 맑은 물도 물이지만 그 물속에서 유영하듯 떠있는 거북바위와 물그림자는 나로 하여금 별유천지의 선경에 와 있다는 착각을 들게 한다.
이곳의 전설 중 마적도사와 당나귀의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용유담 근처 마적사에 마적도사가 있었는데, 식량이나 생필품이 떨어지면 마적도사가 당나귀 등에 쪽지를 써서 달아주면 당나귀는 어디론가 가서 이것을 등에 싣고 용유담에 도착하여 크게 울었고, 그 울음소리를 들은 마적도사는 쇠막대기로 다리를 놓아 당나귀가 건너오게 하였다.
하루는 당나귀를 장에 보내놓고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용유담의 용들이 눈먼 용 한 마리만 제하고 서로 먼저 여의주를 물고 등천하겠다고 싸우고 있었다. 당나귀가 물건을 싣고 도착하여 울었는데도 마적도사는 용들이 싸우는 소리에 듣지 못하고 장기만 두고 있었다.
당나귀는 소리 내어 울부짖다가 그대로 지쳐 쓰러져 죽게 되었다.
뒤늦게 나귀가 죽어있음을 보고 마적도사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장기판을 팽개쳤는데, 그 조각 한쪽이 지금도 마적사에 남아있고 다른 한 조각은 용유담 건너 나귀바위에 떨어졌단다.
그리고 마적도사는 아홉 마리 용 가운데 눈먼 용 한 마리만 남겨놓고 여덟 마리는 모두 쫓아버렸다는 이야기다.
마적도사에 관한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아주 오랜 옛날 이곳 마적사에 마적도사라는 법우화상이 살았다.
하루는 천왕봉에서 흘러내리는 엄천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인데도 붉은 황톳물이 홍수 져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강을 따라 올라가 보니 지리산 천왕봉의 마고할멈이 앉아 오줌을 누고 있음을 보았다.
화상은 이 여자가 바로 천생배필임을 알고 부부의 인연을 맺고 결혼을 하였다. 부부는 딸을 아흔아홉이나 낳았는데, 모두가 무당이 되었다.
그리하여 마고할멈인 어머니까지 합쳐 백 명의 무당이 되어 백무동이 생겨났고, 그들이 조선 팔도에 흩어져 팔도 무당의 씨가 되었다고 한다.
(출처 함양역사관)
조선시대 지리산 3대 기도터(천왕봉 성모사, 백무동, 용유담) 중 하나인 이곳은 지금도 무당들의 굿터로서 분주하다.
점필재 김종직은 “···· 구름은 신모사(神母祠)를 덮었고 / 우뢰는 용연(용유담)에 깊이 움츠렸네 / 수목 우거진 사당에 지전이 걸려 있고 ····”라고 당시의 이곳을 묘사하였으며, 실재로 선생이 함양군수로 재직할 당시에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현재 이곳은 정신없이 시끄럽다.
무당의 굿 때문이 아니라 지리산 댐 때문이다.
한때 정부와 함양군에서는 이를 적극 추진하려고 하였고, 환경단체 등은 이를 적극 저지하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시끌벅적하였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는가 싶더니, 근래 들어 다시 무당의 굿판처럼 요란하게 이곳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2011년 12월 문화재청이 용유담의 국가 명승지 지정예고를 하였으나, 2012년 6월 수자원공사와 함양군의 요구에 따라 심의를 보류하고 재검토에 들어가게 된다.
댐 건설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정부가 지리산 댐을 추진하려는 의도가 아니면 명승지 지정을 보류하고 재검토할 이유가 없다면서 하루빨리 명승지 지정을 촉구한다고 소리 높이고 있다.
한편으로 이곳의 주민들은 명승지가 된다고 해서 나아질 것도 없거니와 오히려 규제나 제약이 늘어나기 때문에 명승지 지정을 적극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개발과 보존. 이 두 간극(間隙)은 결국 제로섬(zero-sum)의 메커니즘으로 귀결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마적도사를 모시든지, 아니면 앞에서 인용한 김종직 선생의 시의 ‘지전이 걸린’ 용유당 사당에 개발담론, 보존담론을 걸어놓고 팔도의 무당을 모두 불러 굿판을 벌이든지….
이억년(李億年)과 백년동 억년터
지리산 댐 때문에 유명세를 치루는 곳은 용유담 말고도 또 있다.
세동마을에서 송문교까지의 둘레길은 임천과 나란히 하는데, 강의 건너편 마을들(백련⋅문하⋅문상⋅도정마을)을 이름하여 문정리라고 한다.
이 문정리가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지리산 댐 때문이다.
이곳은 지형적으로 골이 좁은 협곡으로 댐 제방을 쌓기에 좋은 조건을 가졌다.
그리하여 지리산 댐의 시발점으로 회자되었고, 실재 댐의 이름도 지리산 댐이 아닌 문정댐이라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지리산 자락의 은서지(隱棲地) 문정이 세상에 나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고려 말 어수선한 세류를 등지고 이곳을 찾아든 선비가 있었다.
요산재(樂山齋) 이억년(李億年)이다.
고려시대 후기의 문신으로 개성부 유수(開城府 留守)를 역임하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당시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정이 어지럽게 되자 벼슬을 사양하고 형님 이백년(李百年)을 모시고 이곳에 찾아들어 은거하면서 도정정사(道正精舍)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형님 이백년(李百年)은 1258년 문과에 급제, 봉익대부로 밀직사사를 역임하였던 분이다.
그리하여 이 두형제의 이름을 따서 백년동 억년터라는 이야기가 현재까지도 이곳에서 구전되어 오고 있다.
그리고 백련마을은 이백년의 이름을 따서 백년(百年)으로 부르다가 후에 백련(白蓮)으로 바뀌었으며, 도정마을은 도정정사가 있던 자리라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이억년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동생 이조년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매운당(梅雲堂) 이조년(李兆年)은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을 차례로 모신 고려 말 충신이다.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조정의 치열한 왕권쟁탈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침을 거듭한 인물이기도 하는데, 무엇보다도 우리가 익히 들었던 시조 다정가(多情歌)의 작자이기도 하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억년과 이조년 두 형제가 길을 가다가 우연히 황금 두 덩이를 발견하여 하나는 형 억년이 갖고 다른 하나는 동생 조년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배를 타고 양천(지금의 한강 지류)나루를 건너던 중 느닷없이 조년이가 황금덩이를 물속으로 던져버렸다.
억년이가 깜짝 놀라 왜 그랬냐고 묻자 조년이는 황금을 본 순간 형의 황금도 탐하려는 마음이 생겨서 강에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이 말에 형 억년도 감동하여 황금을 물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후에 사람들은 이 양천나루를 금덩이를 던진 여울이란 뜻으로 투금탄(投金灘)이라 했다. 형제투금(兄弟投金)의 일화이다.
이들 형제는 5형제인데 모두다 문과에 급제하여 그들 일가의 이름은 당대에 떨쳤다.
제일 위로부터 이백년(李百年), 그리고 천년(千年), 만년(萬年), 억년(億年), 조년(兆年)이다.
비운의 왕자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
임천의 물길은 송문교를 지나면서 급하게 좌측으로 꺾었다가 다시 우측으로 휘감아 돌아서 한남마을 앞을 지난다.
이곳의 휘어 돈 모롱이가 새우등처럼 꼬부라졌다하여 새우섬이라 한다.
과거에는 섬이었는지 모르나 현재는 천변의 삼각형 퇴적지이다.
아무튼 이곳은 한남군 이어의 유배지로 그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한남군 이어는 조선 세종의 열두째 아들이다.
왕의 아들로 태어난 이상 정치와 무관할 수는 없지만, 그에게는 정치적 격랑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주변의 환경과 인물들이 운명적으로 엮어져 있었다.
먼저 세종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격랑에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세종의 뒤를 이은 첫째 아들 문종은 병약한 몸을 견디지 못하고 재위 2년 만에 사망하자(1452년) 12세의 어린 세자 단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이때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조선왕조는 거대한 정치적 격랑을 맞게 된다.
세종은 소현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문종과 수양대군을 비롯한 셋째 안평대군, 넷째 임평대군, 여섯째 금성대군, 여덟째 영응대군 등 8명의 적자와 후궁들과의 사이에 화의군 등 10명의 서자를 두었다.
왕권을 탈취하려는 수양과 신권(臣權)에 힘을 실어 현재의 왕위를 유지하려는 안평과의 피할 수 없는 대결 구도에서 나머지의 형제들은 어느 편에 서느냐의 피할 수 없는 선택만 있을 뿐이었다.(여기에서 다섯째 광평대군과 일곱째 평원대군은 이전에 사망하였으므로 제외한다.)
한남군은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서 태어났다.
이 점 또한 그가 정치적인 격랑에 헤어날 수 없다는 운명적 근거가 된다.
혜빈 양씨는 내명부의 궁인으로 병약한 세자(후에 문종)를 보살피던 중 세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자식으로는 한남군을 비롯하여 수춘군(이현)과 영풍군(이전)을 두었다.
문종의 세자빈이 단종을 낳은 후 이튿날 갑자기 죽게 되자 세종은 혜빈 양씨에게 단종을 양육케 하였다.
그녀는 생모 이상의 지극한 사랑으로 단종을 보살폈다.
그런 연유로 혜빈 양씨와 단종은 형식적으로는 계조모(繼祖母)와 계손(繼孫)의 관계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생모와 친자의 끈끈한 관계였다.
1452년, 문종의 사망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 단종은 혜빈 양씨를 가까이 모시면서 정신적으로 의지하려 했던 것 같다.
정치의 중심에서 순간순간의 접하는 냉혹함을 감내하기에는 12살 어린나이의 단종에게 너무나 벅찬 현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젖 먹여 키운 혜빈 홍씨의 푸근한 가슴에 안기고 싶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심정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유약한 단종의 왕권을 두고 세종의 둘째인 수양대군과 셋째인 안평대군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게 되는데 두 사람은 성격이 아주 달랐다.
수양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주변에 문무에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모은 반면, 안평은 정치적인 관심보다는 문학·예술을 좋아하여 이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렸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은 조선조 가장 비극적인 살육의 정쟁을 유발하게 된다.
1453년, 수양은 권람, 홍윤성, 한명회, 신숙주 등과 계유정란(癸酉靖難)을 일으켜 단종의 보위 세력인 김종서, 황보인, 조극관 등을 살해하고 자신과 대척점에서 김종서 등과 가깝게 지냈던 아우 안평을 강화도에 안치했다가 곧바로 사사(賜死)하였다.
수양은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조정의 1인자로 등극하면서 단종을 허울뿐인 허수아비 왕으로 밀어내었다.
실질적인 왕권의 탈취였다.
이러한 단종의 처지에 대하여 가장 안타깝게 생각한 사람은 혜빈 양씨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손에서 키운 애지중지한 단종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1455년, 수양의 전횡을 바로잡고 단종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움직임이 수양의 아우 금성대군을 중심으로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는데 화의군(세종의 후궁 혜빈 심씨와 사이에 태어난 첫 번째 서자)과 혜빈 양씨 그리고 그녀의 아들인 한남군과 영풍군 등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나 결국은 발각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금성은 삭녕으로, 혜빈 양씨는 청풍으로, 한남군은 금산으로, 영풍군은 예안으로 각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 직후 수양은 정식으로 왕위를 선양받아 세조로 등극하였지만 계속하여 이에 대한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해 11월, 수양은 단종과 밀접한 혜빈 양씨부터 교수형으로 처단하였다.
1456년,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복위의 거사를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런 연유로 세조는 금성을 경상도 순흥으로, 한남군을 충청도 아산으로, 영풍군을 경기도 안성으로 각각 이배(移配)시켰다.
1457년, 금성이 유배지 순흥에서 순흥부사 이보흠과 단종복위운동을 벌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으로 금성과 이보흠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리고 한남군은 경상도 함양으로, 영풍군은 전라도 임실로 각 이배되었고 영풍군은 유배지에서 살해 달했다.
1459년, 한남군은 유배지 함양에서 병사하였다.
한남군.
그는 수양에게 줄을 섰던 다른 형제들과 달리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화의군 그리고 자신의 친동생 영풍군과 함께 조카 단종을 지키려 했던 6종영(六宗英) 중의 한 사람이었다.(6종영이란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킨 6명의 왕실종친을 말한다)
다만 안평, 금성, 영풍군처럼 사사되거나 교수되거나 살해되는 끔찍한 죽음은 피했지만 지리산 임천의 새우섬에서 위리안치(圍籬安置)의 고통스런 유배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차라리 자신의 어머니처럼 교수형으로 죽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위리안치란 담장 밖에 탱자나무를 둘리고 조석거리는 10일에 한 차례씩 주며 외부인과 철저히 격리시키는 형이었다.
그렇게 그는 새우섬에서 새우등처럼 웅크린 삶을 잇다가 쓸쓸히 병사하였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후기 (구간전체 11km) 2017. 9. 2
(금계 ⇨ 의중마을 : 0.7km)
9시 30분, 지리산 둘레길 함양센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등산화 끈을 조이는 일행들에게 오늘의 4구간을 설명하면서 의중마을에서 곧바로 용유담으로 가는 코스와 의중마을을 거쳐 서암정사, 벽송사를 탐방하고 다시 의중마을로 돌아와 용유담으로 향하는 코스, 그리고 벽송사에서 곧바로 상내봉 능선을 치고 올라 송대마을로 내려서 용유담을 거치는 코스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였다.
일행들은 멀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체적인 비교 설명도 없이 코스를 선택하라는 자체가 그들에게는 황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장황하지만 설명을 덧붙였다.
의중마을에서 곧바로 용유담으로 가는 첫 번째 코스는 간명해서 좋으나 4구간의 가장 중요한 명소인 서암정사와 벽송사의 탐승을 빼먹는다는 문제점이 있고, 그렇다고 의중마을에서 서암정사와 벽송사를 탐방하고 다시 의중마을로 돌아와 용유담으로 향하는 두 번째 코스는 갔던 길을 다시 돌아오는 중복의 지루함이 단점이고, 마지막으로 서암정사, 벽송사에서 상내봉 능선을 거쳐 송대마을로 내려서는 코스는 변화 없이 힘들었다는 4년 전의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일행 중 누군가가 기막힌 절충안을 내어 놓았다.
첫 번째 코스를 택하여 순례를 마친 후 차로써 이동하여 서암정사와 벽송사를 탐방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막힌 절충안의 행로를 따르기로 하였다.
금계마을에서 의탄교를 건너면 의평마을이다.
둘레길은 의평마을 초입에서 직진길을 버리고 좌측 농로로 꺾어들었다가 다시 농로를 버리고 우측 산길로 오른다.
오름길은 의평 마을 뒷동산이자 의중마을 초입으로 연결된다.
짧지만 호젓한 숲길이 끝나는 의중마을 초입엔 수령이 600년 된 거대한 느티나무가 둘레꾼 나그네를 맞는데, 보호수로 지정된 마을 당산나무이란다.
이곳에서 그대로 직진을 하면 서암정사로 향하는 서누대길이고, 좌측으로 꺾어 내려서면 의중마을이다.
(의중마을 ⇨ 모전마을(용유담) : 3.1km)
우리가 결정한 절충안의 행로를 따라 우리는 직진의 서암정사길을 버리고 좌측 의중마을길로 내려섰다.
길은 의중 마을을 관통하고 한참을 내려섰다가 우측의 농로로 꺾어든다.
마을을 벗어나는 산기슭엔 옻나무가 지천이다.
이곳 주민들은 옻나무에서 여름에는 생칠을 채취하고 겨울에는 화칠을 채취하여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생칠이란 살아있는 옻나무 줄기의 껍질에 V자형으로 상처를 내어 그 자국에서 흘러나온 옻 진액을 말하며, 화칠은 옻나무 가지를 잘라 외피에 일정간격으로 홈을 둘러 파내어 불 위에 돌려가며 구우면 파인 홈으로 보글보글 끓으면서 흘러나오는 옻 진액을 말한다.
생칠이나 화칠은 우리에게는 친숙한 자개장 같은 나전칠기의 도료용으로 많이 사용되는데, 근래 들어서는 옻의 효능이 탁월하다는 것이 회자되면서 약용으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그 유명한 마천 옻나무의 원산지이다.
맞은편 마천석재에서 생산되었던 오석(烏石)의 빛깔 역시 옻칠한 것 같은 흑요색(黑曜色)이다.
지금은 생산하고 있지 않지만 한때는 마천의 옻만큼 마천석 또한 유명하였다.
마천석재의 채석장에는 거대한 석불이 조성 중에 있는데 현재는 두상만 부조되어 있는 상태이다.
둘레길은 임천까지 켜켜이 내려앉은 다랭이의 상단부를 지나 숲길로 이어진다.
참으로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길이다.
모랭이를 오르고 내리고 돌아서 이어지는 이 길은 4구간 최고의 명품길이다.
물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내리막을 내려서면 모전마을 입구이다.
오른쪽으로 틀면 둘레길이고 역방향 왼쪽으로 틀면 용유담이다.
용유담은 지리산의 서북쪽의 골골에서 발원한 물길이 합류하여 이룬 별천지의 비경을 간직한 곳으로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던 명승이다.
나는 용유교 다리 위에서 일행들에게 용유담에서 놓칠 수 없는 명물인 거북바위를 가리키면서 “현재 저 거북은 입수하려는 것이냐, 아니면 입수하여 유영하려는 모습이냐?”라고 물었는데 아무도 답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 질문은 4년 전의 것을 그대로 리바이벌하고 있었다.
(모전마을 ⇨ 세동마을 : 2.4km)
우리는 용유담에서 되돌아 모전마을 입구의 정자에 자리 잡고 점심을 준비하였다.
누군가 가져온 야관문 담근주를 삼겹살 안주로 하여 몇 순배 돌리고 김밥과 라면으로 점심을 마무리하였다.
오전의 서정적인 숲길과 달리 오후의 여정은 햇볕에 노출된 포장로의 딱딱하고 뜨거운 길이다.
원래의 내 계획은 마적도사의 장기판 전설이 있는 세진대에 올라 마적송 아래의 널찍한 너럭바위에서 시원하게 펼쳐진 엄천의 풍광을 보고 다시 둘레길을 이어가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전마을을 지나 세진대를 향하는 우측의 오름길 입구에서 일행들의 얼굴들을 보는 순간 그 계획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심때 먹었던 반주 탓도 있지만 직사의 햇볕에 노출된 그들의 얼굴은 이곳의 아스콘포장로만큼 달구어져 이미 지친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래서 그대로 통과하였다.
여기서부터 세동마을까지는 아스콘포장로이다.
(세동마을 ⇨ 운서마을 : 3.3km)
우리는 세동마을을 지나면서 아스콘포장로를 버리고 임천으로 내려서는 길을 택하였다.
짧지만 임천의 역동적인 물길과 함께하는 길이다.
사람들은 이곳의 물줄기를 임천이라 부르기도 하고 엄천강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나는 그냥 임천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될지 모르지만 내 나름 정리하자면 이렇다.
운봉에서 시작된 람천(濫川)이 달궁ᐧ뱀사골에서 내려오는 만수천(萬壽川)을 산내에서 받아들이고, 백무동ᐧ삼정골에서 내려오는 덕전천(德田川)을 마천에서 받아들이면서 그 이름을 임천(臨川)으로 바꾼다.
말하자면 전라도 남원에서의 람천이 경상도 함양에 유입되면서 임천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이 임천은 칠선계곡ᐧ국골에서 내려오는 의탄천(義灘川)을 받아들여 흘러내리다 용유담을 지나는데, 여기서부터 엄천강(嚴川江)으로 그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용유담을 거친 후 임천이 엄천강(江)으로 이름을 바꾸어야 할 이유나 근거가 명확하지 않고, 더욱이 국립지리원 지도에는 그대로의 임천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이 내가 그대로 임천으로 부르기로 한 이유이다.
그리고 임천이든 엄천이든 이미 천(川)이라는 접미어를 붙여 물길을 표시하였는데 또다시 강(江)이라는 접미어를 중복하여 붙일 필요가 있을까하는 것 또한 부수적인 이유가 된다.
그리하여 이 물길은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강정마을 두물머리에서 경호강에 합류하면서 정식의 강으로 대접받아도 늦지 않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엄천강으로 부르고 있는 분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곳에 신라 때의 대찰 엄천사가 있었는데(현재의 휴천면 남호리 동호마을 일대), 그것에 연유하여 엄천강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 근거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이곳의 주민들은 엄천강으로 부르기도 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강과 천의 구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 일반적으로 그 규모가 천보다 큰 것을 강이라 구분하지만 실재 유역과 폭이 강보다 규모가 큰 천이 있고 천보다 작은 강이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강과 천의 기준이 더욱 모호하다. 그래서 하천(河川)이라 통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으로 끝난 이 물길의 원래 이름에 단지 등급(?)을 높여 보고 싶은 생각에서 어미에 강을 다시 붙인 것이 아닐까 사료되는데 이 경우 원래의 명칭으로 환원하여 천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간명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이에 대하여 산청군 시천면에서 진양호까지의 덕천강도 천 뒤에 강이 붙었으나 강으로 대접받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으나, 이 역시 원래의 이름은 덕천이었으며, 이참에 원래의 덕천으로 환원되었으면 하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다시 원래의 포장로로 올라섰다.
임천 건너편 법화산 자락에 띄엄띄엄 산촌의 인가들이 보이는데 지리산댐으로 시끌벅적한 문정리이다.
고려말 이백년, 이억년이 찾아들어 백년동 억년터라는 이름을 남긴 은서지가 곳이 바로 저곳인 것이다.
그런데 도로변의 이상한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커피 무료입니다. 한 잔하세요…”
그리고 입간판의 하단에는 화살표로써 입구까지 친절하게 표시해 놓았다.
우리는 긴가민가하면서도 그 화살표 방향을 따라갔는데 냉온수기, 믹스커피, 종이컵 등이 비치파라솔의 빨간 원탁 위에 비치되어 있었다.
누구든 마실 수 있게 누군가가 배려한 것이다.
아마도 이곳에 있는 건물주가 셋팅을 해 놓은 것이라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보시심(布施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그 아름다운 보시심의 잔향을 머금고 다시 발을 옮겼다.
임천에 걸쳐진 송문교는 문정리 문하마을을 가리키는데 둘레길은 그것을 쳐다만 보고 그대로 직진이다.
그리고 임천이 왼쪽으로 급히 꺾어지는 그 끝자락에 있는 한남군의 유배지인 새우섬이 보이는데 그곳은 비운의 왕자 한남군의 유배지였다고 한다.
여기서도 둘레길은 휘어진 임천을 따르지 않고 그대로 직진이다.
그리고 산자락 농로로 들어선다.
(운서마을 ⇨ 구시락재 ⇨ 동강마을 : 1.5km)
둘레길은 운서마을 후면의 고샅길을 지나서 다랑이 논길을 따라 오른다.
운서마을은 산자락에 포근히 안겨 있는 듯 평화롭기 그지없는 전형적인 산촌마을이다.
오름길은 구시락재로 이어지는데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눈 아래 동강마을과 임천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내림길은 따르다 보면 4구간의 종점 동강마을에 이른다.
우리는 동강횟집의 평상에 앉아 아이스크림으로 목을 축이면서 택시를 기다렸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출발점인 금계로 갔다가 서암정사·벽송사를 탐방할 것이다.
당초의 기막힌 절충안대로 실현할 것임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