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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申潤福, 1758년 ~ 1814년경)
신윤복은 조선 후기의 관료이자 화가로서, 산수화와 풍속화를 잘 그렸다. 또한 양반 관료들의 이중성과 위선을 풍자한 그림, 여성들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출생지는 미상.
화공 가문 출신으로 화원 신한평의 아들이며, 그 역시 도화서 화원으로 종삼품 서반 무관(武官)인 첨절제사를 지냈다. 본관은 고령, 자는 입부(笠父), 덕여(德如)이고, 아명(兒名)은 신가권(申可權), 호는 혜원(蕙園)이다. 대표작은 미인도(美人圖)·단오도(端午圖) 등이 있다.
그는 조선 전기 시대의 문신 겸 학자였던 신말주의 후손이고, 일제강점기의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의 8대 방조가 된다.
신윤복은 영조 34년(1758년)에 아버지 신한평과 어머니 홍천 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정확한 생일은 전하지 않는다. 어렸을 적의 이름은 가권(可權)이며 뒤에 윤복으로 개명하였는데, 그의 본명이 가권(可權)으로 밝혀진 것은 그가 그린 유명한 미인도(간송미술관 소장)에서 신가권이라는 도서가 찍힌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아래로 남동생 신윤도(윤수)와 여동생이 1명 더 태어났다.
신윤복은 신숙주의 방계 후손으로, 암헌공 신장(申檣)의 다섯째 귀래정 신말주의 손자였던 신공섭의 다섯째 아들인 신수진의 7세손이었다. 그러나 신수진이 서자였기에, 그의 후손들은 중인(中人)의 신분으로 낮아져 수십 명의 역관과 율관, 운관으로 활동했고, 신세담ㆍ신일흥ㆍ아버지 신한평 같은 화원들이 나왔다. 그의 가계도 20세기 이후에야 몇몇 문헌을 통해 알려졌는데, 이는 그가 서자의 후손이라서 족보에서 생략되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종조부 신일흥과 종증조부 신세담은 도화서의 화원이었으며, 아버지 신한평도 도화서의 화원으로 영조의 어진을 두 번이나 그릴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정조 초기에 와서 그가 그린 그림 중 한 그림이 알아볼수 없다 하여 관료들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기도 했으며, 관직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고, 산수·인물·초상·화훼를 잘 그렸다.
아버지 신한평의 영향을 받은 신윤복도 도화서의 관원이 되는데 관직은 첨정과 첨절제사에 이르렀다. 인물화와 풍경화 외에도 많은 양의 풍속화를 남겼는데, 그 중에는 양반의 위선적인 태도와 이중 잣대를 풍자하고 부녀자들의 자유 연애와 애환을 묘사했으며 해학이 담긴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1800년 정조 사후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사라지면서 그의 작품활동도 쇠퇴기에 접어든다. 그가 남긴 작품은 1813년의 작품까지 전해지는데, 대략 1813년 이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정확한 사망일과 사망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주요 작품으로는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미인도(美人圖)》 등이 있다. 주로 남녀간의 사랑이나 여성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화려한 색을 사용하여 기생이나 무당의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시골 주막의 서민적인 풍속 또한 날카로운 화필로 잘 그려냈다. 이러한 그림들은 양반 사회에 대한 풍자로 여겨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