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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아침 시간 - 헤세
비는 엷게 베일 드리우고, 굼뜬 눈송이들이
잿빛 베일에 섞여 짜여
위쪽 가지와 철조망에 드리워져 있다
아래쪽 창유리에 오그리고 앉아 있다
서늘한 물기 속에서 녹아 유영하며
축축한 땅 냄새에
뭔가 엷은 것, 아무 것도 아닌 것 어렴풋한 것을 준다
또 물방울들의 졸졸거림에 머뭇거림의
몸짓을 주고, 대낮의 빛에게는
마음 상하게 하는 언짢은 창백함을 준다
아침에 눈먼 창유리들의 열 가운데서
장밋빛으로 따뜻한 흐린 광채가 어렴풋이 밝아 온다
외롭게 아직 창문 하나 어둠의 조명을 받아
간호원 하나 온다 그녀는 눈雪으로
눈眼을 축인다, 한동안
서� 응시한다 방으로 되돌아간다
촛불이 꺼진다 잿빛의
빛바랜 날 속에서 장벽이 늘어난다
12월 - 오세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12월의 시 - 이해인
또 한 해가 가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
한 해 동안 받은 우정과 사랑의 선물들
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 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
솔방울 그려진 감사카드 한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띄우고 싶은 12월
이제 또 살아야지요
해야 할 일들 곧잘 미루고
작은 약속을 소홀히 하며.......... 나에게 마음 닫아 걸었던
한 해의 잘못을 뉘우치며
겸손히 길을 가야 합니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제가
올해도 밉지만
후회는 깊이 하지 않으렵니다.
진정 오늘밖에 없는 것처럼.시간을 아켜 쓰고
모든 이를 용서하면 그것 자체가 행복일 텐데
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하는 것...너무 많아 멀미나는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기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게 마음은 맑게 지니도록
고독해도 빛나는 노력을 계속하게 해주십시오.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 날이여~
나를 키우는 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마지막 달력을 넘기며 - 金 石 林
흐릿한 새벽종소리
차갑게 식어버린
열망의 찌꺼기를 토해낸다
덜 깬 잠 탓인지
혼미한 의식이 촛불에 흔들리고
겨우 눈 비비고 일어나
지난 밤 꿈의 흔적을 더듬는다
메모 한 줄 벽에 걸어놓고
기어이 떠났구나
하늘의 은총으로 주신
삼백예순 날
이제 마지막 남은
조촐한 식탁
차마 접기 아쉬워, 아쉬워
창문 두드리는
아침 햇살
문 밖에 세워둔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찬란한 새날이
내 고향 왜목마을 갯벌에서
잉태하고 있는데
빛으로 오실
새 주인을 위하여
기꺼이 자리를 비워야겠다
12월 - 강성은
씹던 바람을 벽에 붙여놓고
돌아서자 겨울이다
이른 눈이 내리자
취한 구름이 엉덩이를 내놓고 다녔다
잠들 때마다 아홉 가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날 버린 애인들을 하나씩 요리했다
그런 날이면 변기 위에서 오래 양치질을 했다
아침마다 가위로 잘라내도
상처 없이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자라나 있었다
휴일에는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검은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동네 영화관에서 잠들었다
지루한 눈물이 반성도 없이 자꾸만 태어났다
종종 지붕 위에서 길을 잃었다
텅 빈 테라스에서 달과 체스를 두었다
흑백이었다 무성영화였다
다시 눈이 내렸다
턴테이블 위에 걸어둔 무의식이 입 안에 독을 품고
벽장에서 뛰쳐나온 앨범이 칼을 들고
그래도 얼어붙었다
숨죽이고 있던 어둠이 미끄러져내렸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음악이
남극의 해처럼 게으르게 얼음을 녹이려 애썼다
달력을 떼어 죽은 숫자들을 말아 피웠다
뿌연 햇빛이 자욱하게 피어올랐지만
아무 것도 녹진 않았다
12월 - 박재삼
욕심을 털어 버리고
사는 친구가 내 주위엔
그래도 1할은 된다고 생각할 때,
옷벗고 눈에 젖는 나무여!
네 뜻을 알겠다
포근한 12월을
친구여! 어디서나 당하는 그
추위보다 더한 손해를
너는 저 설목雪木처럼 견디고
그리고 이불을 덮은 심사로
네 자리를 덥히며 살거라
12월 - 유강희
12월이 되면 가슴 속에서 왕겨부비는 소리가 난다
빈집에 오래 갇혀 있던 맷돌이 눈을 뜬다 외출하고 싶은 기미를 들킨다
먼 하늘에서 흰 귀때기들이 소의 눈망울을 핥듯 서나서나 내려온다
지팡이도 없이 12월의 나무들은
마을 옆에 지팡이처럼 서 있다
가난한 새들은 너무 높이 솟았다가
그대로 꽝꽝 얼어붙어 퍼런 별이 된다
12월이 되면 가슴 속에서 왕겨 타는 소리가 나고
누구에게나 오래된 슬픔의 빈 솥 하나 있음을 안다
12월 - 장석주
해진 뒤 너른 벌판,
하늘엔 기러기 몇 점.
처마 밑
알록달록한 거미에게
먼 지방에 간 사람의 안부를 묻다
12월 - 황지우
12월의 저녁 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가산 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생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12월의 거리는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고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간다
12월, 방랑자여 슈파로 가려는가 - 박정대
펄럭인다 또 몇 개의 바람을 흔들며
너는 펄럭이고 있다 겨울의 문 앞에 서서
외로운 파수병처럼 너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다
눈발이 날린다 하얀 기절의 눈발이 날린다
밤의 한기류 속으로 사랑이 흐른다 낯선
느낌표를 찍으며 굴뚝새들이 날아가고 아마
누군가 너에게로 다가가고 있다 잠시
기다려라 춥게 올지라도 사랑은 아름답다
시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바람이 분다
밤이 빛난다 몇 개의 등불을 달고 너는
물음표처럼 웅크려 잠잔아 오늘밤은
별이 없다 그래도 하늘은 있다
젖은 하늘을 덮고 네가 잠들 때
저 성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강물 소리
바람에 귀를 대어보면 멀리서
네게로 다가오는 소리 들리리니 잠시
기다려라 멀리서 올지라도 사랑은 아름답다
살아가는 데는 제목이 없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살아가는 데는 제목이 없다
너의 가슴팍에서 필사적으로 타오르는 불꽃
너는 외롭지 않다 다만 홀로 있을 뿐이로다
시간은 어디에서도 읽혀지지 않고
불면의 외로운 마침표를 찍으며 너는
아직 오지 않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로다
바늘 끝에 맺힌 핏방울을 보듯
우리의 생활은 가끔씩 아프지만
시간이 있는 곳에서는 늘 바람이 불고 잠시
기다려라 아프게 올지라도 사랑은 아름답다
12월 저녁의 편지 - 안도현
12월 저녁에는
마른 콩대궁을 만지자
콩알이 머물다 떠난 자리 잊지 않으려고
콩깍지는 콩알의 크기만한 방을 서넛 청소해두었구나
여기다 무엇을 더 채우겠느냐
12월 저녁에는
콩깍지만 남아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늙은 어머니의 손목뼈 같은 콩대궁을 만지자
12월의 기도 - 목필균
마지막 달력을 벽에 겁니다
얼굴에 잔주름 늘어나고
흰 머리카락이 더 많이 섞이고
마음도 많이 낡아져 가며
무사히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세상살이
일 초의 건너뜀도 용서치 않고
또박또박 품고 온 발자국의 무게
여기다 풀어놓습니다
제 얼굴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지천명으로 가는 마지막 한 달은
숨이 찹니다
겨울 바람 앞에도
붉은 입술 감추지 못하는 장미처럼
질기게도 허욕을 쫓는 어리석은 나를
묵묵히 지켜보아주는 굵은 나무들에게
올해 마지막 반성문을 써 봅니다
추종하는 신은 누구라고 이름짓지 않아도
어둠 타고 오는 아득한 별빛같이
날마다 몸을 바꾸는 달빛 같이
때가 되면 이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의 기도로 12월을 벽에 겁니다
12월의 숲 - 황지우
눈맞은 겨울 나무 숲에 가보았다
더 들어오지 말라는 듯
벗은 몸들이 즐비해 있었다
한 목숨들로 連帶해 있었다
눈 맞는 겨울나무 숲은
木炭畵 가루 희뿌연 겨울나무 숲은
聖者의 길을 잠시 보여주며
이 길은 없는 길이라고
사랑은 이렇게 대책 없는 것이라고
다만 서로 버티는 것이라고 말하듯
형식적 경계가 안 보이게 눈 내리고
겨울 나무 숲은 내가 돌아갈 길을
온통 감추어 버리고
인근 산의 積雪量을 엿보는 겨울나무 숲
나는 내내, 어떤 전달이 오기를 기다렸다
12월이란 참말로 잔인한 달이다 - 천상병
엘리어트란 시인은
4월이 잔인한 달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12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다
생각해보라
12월이 없으면
새해가 없지 않는가
1년을 마감하고
새해가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새 기분으로
맞이하는 것은
새해뿐이기 때문이다
12월의 노래 - 이효녕
한해 마무리해 보내는 겨울
12월이 다시 돌아오네
인생은 나이를 한 살 더 먹고
나뭇가지에서 놀던 참새는
어디론가 날아간 그 자리
나이테를 하나 더 만들어
겨울안개 뒤에 서있네
북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안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섣달눈은
가장 가벼운데도
달력 맨 끝에 서있다가
허공의 허파에서 계속 숨쉬네
차가워진 가슴과 들녘에 앉은
하얀 눈 사이로 다른 세상을 향하여
언제나 따스하게 안아주려는
또 한 세월을 향하여
그 숱한 생각들의 깊이를 향하여
한 해를 마무리해 보내는
겨울12월이 다시 돌아오네
지금껏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숨겨진 향기가 겨울안개 뒤에 서서
떠도는 바람이 가슴을 두드리네
오가는 세월을 안고
오 지워지는 세월을 안고.
12월의 노래 - 박종학
마침내 달랑 한 장
그렇지만 마지막은 싫어요
처음 시작이라 불러 주세요
차가운 손길
하지만 마음만은 아니랍니다
누구보다 따뜻한 가슴입니다
나를 보면 행복해 합니다
나를 보면 추억으로 여깁니다
나를 보면 삶을 느낍니다
나는 행복입니다
나는 추억입니다
그래서 나는 12월입니다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소년 소녀 가장과 함께
외로운 무의탁 노인들과 함께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사랑하는 가족들과함께
한해를 뒤 돌아보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기쁨의 합창을 하고 싶습니다
나는 마지막이 아닙니다
나는 희망이고
기쁨이고
사랑이고 싶습니다
나는 12월입니다
12월의 노래 - 이해인
이해인
하얀 배추 속같이
깨끗한 내음의 12월에
우리는 월동 준비를 해요
단 한 마디의 진실을 말하기 위하여
헛 말을 많이 했던
빈 말을 많이 했던
우리의 지난 날을 잊어버려요
때로는 마늘이 되고
때로는 파가 되고
때로는 생강이 되는
사랑의 양념
부서지지 않고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음을
다시 기억해요
함께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의 시간
땅 속에 묻힌 김장독처럼
자신을 통째로 묻고 서서
하늘을 보아야 해요
얼마쯤의 고독한 거리는
항상 지켜야 해요
한겨울 추위 속에
제 맛이 드는 김치처럼
우리의 사랑도 제 맛이 들게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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