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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영혼이
머물다 가는 곳
영달산
靈達山
목포의 또 다른 이름으로 청호(靑湖)라는 게 있다. 목포 주변 다도해의 풍경이 푸른 호수를 연상시킨다는 의미를 시적으로 표현한 애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옛 문헌에 ‘여기 와서 바다로 들어가는 까닭에 통칭 목포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어 통상 지리적인 위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 목포라는 의미는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 강과 바다의 경계를 이루는 목'이라는 뜻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목포 수호신 유달산신
온금동 좁은 골목길 두루 돌아 산기슭으로 오르면 유달산 신당집을 만날 수 있다. 산신 숭배 사상은 자연물에 정령(精靈)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에서 비롯된 것이다. 명산에는 영험한 신이 살고 있다는 산정강림을 믿고 있어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마을의 무사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대체로 산신은 산꼭대기, 산허리, 산 밑 세 곳에 거처한다고 한다. 산 아래 평야와의 접경에 세워지는 산신당은 인간생활과 매우 밀접해진 경우로, 산신이 이미 산뿐만 아니라 농경생활까지 관장하게 되어 농사의 풍흉과 마을의 안녕, 사람들의 질병과 기자(祈子) 등 인간생활 전반을 기원하는 대상이다. 유달산 신당은 유달산 중간 아랫자락에 위치하고 있기에 인간과 아주 가까운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산제 당이 헐어지기 3일전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제주로 가겠다! 하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부터 마을에는 좋지 않은 일이 자주 발생하자 1994년 9월 9일 ‘산신맞이 굿’을 거행하여 제주도로 가버린 유달산 신을 다시 맞아들였다고 한다. 한으로 찌들고 눈물로 절여진 목포의 한을 유달산신이 풀어주어 환의와 희망의 새 얼굴로 힘찬 웅비를 펼쳐주길 기원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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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마리 학을 타고 극락세계로
유달산에는 또 다른 신령한 이름이 있다. 즉,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靈達山)’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 하여 이름 지어진 일등바위(율동바위), 심판을 받은 영혼이 이동한다 하여 생긴 이등바위(이동바위)라고 불렀다.
율동바위에서 죽은 영혼이 심판을 받아 일단 이동바위로 옮겨져 대기하고 있다가 저승길에서 극락세계로 가는 영혼은 3마리의 학이나 고하도 용머리의 용에 실려 떠나간다는 전설을 안고 있다. 산에 올라 조망하면 우선 앞으로는 탁 트여 보이는 목포시 전경과 뒤로는 아름다운 다도해 풍광을 한꺼번에 안고 있다. 돌산의 기괴한 기암들도 누각들도 아름답다. 섬 사이를 오가는 크고 작은 선박들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그 아래로 보이는 고하도의 용머리가 물안개 끼면 조명 빛과 더불어 환상의 풍경을 느낄 것이다. 가슴 설레게 만드는 낙조풍광도 빠트려서는 안된다.
대성전 터와 수수께끼 조각상
일등봉에서 해양대학 가는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석축을 쌓아놓았던 흔적이 보이는데 이곳으로 찾아 위로 조금 올라서면 석굴 하나가 보인다. 이곳이 대성전 터로 들어가는 입구다. 굴벽에는 천정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우측에 있는 샘을 말하는 것 같다. 이름에서 보여주듯이 얼마나 물맛이 좋았으면 향기 품어내는 물이라고 했겠는가.
바닥이 평평한 굴 통로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면 대성전 터가 있었다는 입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원래 대성전이라는 이름이 대성전(大聖殿)을 뜻하는지 아니면 대성전(大成殿)을 뜻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아담한 빈 공터에는 터였음을 알리는 주춧돌만 쓸쓸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터는 성전이 있었다는 곳일까? 터의 규모로 보아 사찰보다는 일종의 전각이 아니었겠는가.
주변의 벽을 살펴보면 여러 조각상들과 암각 문자가 조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조각상의 자세도 마찬가지다. 위치도 정면으로 위치하고 있지 않고 바닷가 쪽을 향하고 있다. 이 점도 묘한 수수께끼이다.
아마 이 조각상들은 도교식 발상에서 만들어 진 것 같기도 하다. 불교·유교의 교지를 융합하고 대중을 교도로 삼아내려온 도교는 사회 표면에 뚜렷하게 부각되지는 않고 있으나 민간신앙 속에 뿌리가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와 하나의 토속종교로 자리잡고 있기에 그 흔적은 아닌지. 지금도 영험력 있는 기도처로 이용되고 있다.
부정한 사람을 알아보는 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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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정 탄생은 1928년 초대 주지인 노대련 선사가 영암 출신 현기봉 거사와 함께 암굴 30척을 굴착하여 백일기도 영험을 입어 100일 만에 용출되었다. 17년 전 일이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관광객들이 샘에서 목욕을 하는 등 추태를 보이자 샘물이 말라버리고 말았다.
절에서는 용왕제를 지내고 100일 기도를 올린 후에 다시 물이 나왔다. 지금도 부정한 사람이 사용하면 일시에 물이 말라버린다고 전해온다.
보광사 짓샘의 신비한 효험
용화전의 영험하기로 유명했다는 석조미륵좌대 앞의 마룻바닥 밑에 있는 신비의 '짓샘'이다. 짓샘을 보기 위해서는 석조미륵 좌대 앞의 마룻바닥 덮개를 열어야 한다.
짓샘은 여인이 산고(産苦)가 들었을 때 효험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짓샘의 소문을 알고 있는 사람은 지역뿐 아니라 전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물에 관한 과학적 자료의 입증은 없지만 오래전부터 경험하고 실제 목격했던 당시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그런 얘기가 더욱 깊은 물의 신뢰를 더해준게 아닐까? 자유기고가
<여행정보-TIP >
은빛갈치축제
목포시가 개최하는 체험관광축제로 해마다 9월이나 10월이면 평화광장 일대 목포 앞바다에서 낚시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연다. 올해 일정은 10월 3∼4일. 갈치낚시 무료체험을 할 수 있고 상품도 푸짐하다.
먹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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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음식은 다양한 해산물이 풍성하다. 밴댕이회, 병어회, 준치회, 아귀찜, 먹갈치와 꽃게무침, 꽃게살 비빔밥, 게장백반, 해물찜 등등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나오는 서민 백반집들도 수두룩하다. 특히 목포에서 홍어요리를 빠트리면 꼬집어 뜯기고 몰매 맞는다. 신안 비치호텔의 특선회정식(061-243-3399)과 인도양 일식횟집(061-243-6888), 매운탕 맛이 일품인 북항관광횟집(061-244-8562) 등이 명성이 있다.
목포항 제주 여객선 터미널 근방에 있는 다요미(011-9608-9155)는 흑산 홍어와 해물의 명가이다. 현대식으로 개조를 했지만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의 고풍스러움을 지니고 있다. 이 가게의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자랑은 전복 넣은 미역국이다.
김옥의 新 남도기행-해남, 임란과 영웅들의 기상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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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대첩
민족존망의 기로에서
신화의 깃발을 세우다
3대 해전중의 하나인 명량 대첩은 1597년(선조 30) 정유년에 왜군이 재차 칩입하여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킴으로써 전무후무한 대승의 금자탑을 쌓는 명량대첩의 신화가 탄생한다.
(정유년 선조 30년(1597년 4월 1일~12월 30일))
충무사와 명량 대첩비
우수영 학동리에서 이 충무공의 발자취를 가장 먼저 만난다. 길 왼편 돌계단 언덕에 충무사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옛 우수영 터로 우수영 성지의 동문 밖이다.
충무사를 오르는 돌계단에는 눈물겨운 사연이 있다.
충무사를 자기 몸처럼 정성으로 지키고 이 충무공을 하늘처럼 받들어 섬겼던 박포엽 할머니(2002년도에 작고)가 목포 유달산에서 가져온 돌로 85 계단을 쌓았던 계단이다. 계단 중간 오른편에는 전라좌수영내 주둔했던 장수들의 선정과 공적을 담은 영세불망비 30여기가 자리하고 있다.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마멸되었지만 숙연한 마음으로 비를 쓰다듬는다.
전라수영이 우수영(전라우도수군절도사영)으로 된 것은 성종10년(1479)에 여수에 좌수영이 개설되면서 이곳은 우수영이 된 것이다.
우수영 온 마을 일대가 우수영 성터이다. 대부분 토사에 묻혀 황폐되었거나 분실, 훼손 되고 말았으며 북벽(北壁) 중간 부분에 북문터만 남아 있다. 북문터 성내에는 건항(乾降) 17년 임신(壬申) 9월, 가경(嘉慶) 9년 갑자(甲子)년에 세운 우물 건립비와 중수비 그리고 여섯 개의 돌기둥이 세워진 육각형의 우물이 남아있다. 돌 지주는 우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통제를 했단 것으로 보인다. 비석군 앞에는 제를 지냈던 돌 제단이 남아있다.
해남군에서는 성지 복원 사업계획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니 반가운 일이다. 복원 공사가 완성되면 충무공의 충혼의 기상이 우리들 가슴깊이 되살아날 것이다. 새로이 단장된 성루에 올라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우수영 팔경을 되찾게될것이다.
명량 대첩 기념비는 나라에 큰일이 생기려고 하면 물방울이 맺힌다고 한다. 6 25전쟁 때, 1980년 5·18 민중항쟁 때 이 비에서는 두 말이 넘은 량의 땀이 나왔다고 한다.
우수영 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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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가 보이고 다리 아래에는 늘 거센 물살과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울둘목(해남 화원 반도와 진도군 녹진 사이를 잇는 명량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기를 통하여 해전 사상 유례 없는 가장 위대한 전투로 역사에 길이 남을 명량대첩기념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정유재란 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배를 격파해 명량 대첩을 승리로 이끈 우수영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공원에 들어서면 명량대첩 탑과 어록비가 있다. 충무공 을 중심으로 관군과 의병들의 전투모습이 조각된 군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거북선의 실제모형과 판옥선의 모형, 명랑해전에서 사용했던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각종 무기류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 때의 활약상을 담은 슬라이드를 상영해 주고 있다.
진도대교와 명량(울돌목)
진도대교는 길이 384m, 폭11.7m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이다.
해남 문내면 학동리에 머리를 베고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에 두발을 뻗고 누워있다. 진도대교에서 내려다보는 명량 해협의 물 흐름은 폭포 소리와도 같다. 흰 거품을 일으키며 회오리 물결을 보면 가슴이 섬뜩하다. 물길은 동양 최대의 시속을 지닌 11노트의 조수가 흐르며 해협의 폭이 좁은데다가 해구가 깊은 절벽을 이루고 있어 물살이 이에 부딪쳤다가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거칠게 휘감아 돌아 흐른다. 물빛조차 지독하게 차갑다. 굉음은 수장된 왜군들의 넋들의 처절한 아우성일까?
명량 대첩의 신화
1597년 7월 15일 칠천량(거제시 하청면의 칠천도와 거제 본 섬 사이의 만) 해전에서 원균(1540∼1597)의 패전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가 되자 1597년(선조 30)에 백의종군 하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로 기용하였다.
이순신은 8월 18일 회령포에 이르러 칠천량에서 패해 온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 후 2척이 더 회수됨으로써 12척을 정비하고 또 1척을 수리하여 총 13척으로 왜병과의 싸움에 대비하였다. 9월 14일 적의 함대가 해남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9월 15일 13척의 전함을 이끌고 진지를 진도 벽파진에서 우수영 명량해협으로 옮기고 울돌목 유속을 이용한 작전을 짰다.
독굴산(노적봉)에 짚이엉을 엮어서 노적더미로 만들었고 망금산 동편 산자락에 터를 다듬어 군세를 과시할 목적으로 부녀자를 동원 강강술래를 시키고 녹진 뒤의 백토지 흙을 바다에 흘려 쌀뜨물인양 위장 전술을 펼쳐 적을 속였다.
적 함대는 9월 15일 야간을 이용, 벽파 앞바다에 출현한 것은 9월 16일 오전 들물 때였다.
왜장들은 은빛, 금빛 휘황찬란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사령함 가장 자리에는 해상 전투 중 전함이 불에 타는 일이 없도록 막아준다고 믿는 부적으로 금빛 찬란한 ‘사치호코’(몸은 호랑이요 몸은 물고기 형태를 지닌 전설의 동물)를 조각하여 호기를 부렸지만 불멸의 영웅 이 순신 거북선 전함 앞에 처절하게 무너지게 되는 응징의 심판을 어찌 예견이라도 했겠는가. 거북선의 귀두는 용이 아닌던가. 천지조화를 일으킨다는 전설의 동물이 조선 수군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왜장들은 패배의 고배를 마셔야 될 자신들의 정해진 운명을 모르고 오로지 승리에 취한 듯 비웃었다.
이 충무공은 수척의 병선으로 벽파 앞바다에서 대항하다가 도망하는 척하며 우수영으로 유인했다. 왜적은 지형이 어떠한지 전혀 모르고 이순신이 이끄는 13척의 전함을 보고 크게 비웃고 깔보며 달려들었다.
패배의 고배를 마셔야 될 자신들의 정해진 운명을 모른 채…….
조수가 썰물로 바뀌는 순간 도망치지 못하도록 미리 바다에 쇠줄을 걸었던 것을 끌어올려 퇴로를 차단시키고 지리적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학이진 전법을 펼치며 화포를 쏘고 비 오듯 한 활을 쏘아 날리니 왜군은 맥도 못 추리고 우왕좌왕 하다가 활에 맞고 화포에 배가 깨져 물에 빠져 죽은 왜군 수는 그 얼마나 많았던가. 이때 이오죠오의 성주였던 왜장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는 화포를 맞고 배가 깨져 물에 빠져 죽었으며 그의 친동생 도지우끼도 함께 전사했다.
불과 13척의 전함으로 불과 2시간 만에 300여 척의 왜선을 수장시킨 신화 같은 승리를 거두게 된다. 아군 피해는 고작 70명, 왜군 사상자는 최소 8천명이라고 하니 참으로 경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주변 여행정보 TIP>
임란의 빛난 별들의 넋을 기리며
명나라 진린(陳璘) 제독의 후예 촌과 황조별묘(皇朝別廟)
산이면 덕송리에는 광동 진 씨 도독공파 진린 제독의 후예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황조 마을이 있다. 황조 마을에는 70여호 가구를 이루고 있다. 황조별묘는 명나라 도독 진린을 향사하는 곳이다.
충절사(忠節祠)―임란의 빛난 별 충장공 정운 장군.
충절사는 그의 고향인 옥천면 대산리에 있다. 충장공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정운 장군(1543~1592)은 공조판서 정응정의 장자로 해남군 옥천면 대산 리에서 태어났다. 불과 7세 어린 나이 때 집안 대대로 내려온 보검에 '정충보국'이라고 새겨 스스로 나라에 충성할 것을 맹세할 만큼 우국충절 의 인물이었다. 1952년 9월 1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부산포(다대포) 해전에서 왜적선 500여 척과 싸워 100여 척을 대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 장군 함대의 휘하 참모인 우부장으로 가장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는 길에 왜군의 철환에 맞아 순절하고 말았다.
만의총(萬義塚-몰 무덤)―의병들의 외침이 들리는가?
나라를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온몸으로 항거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고 잠들어 있는 커다란 봉분은 옥천면 성산대교들 길가에 있다. 정유재란 시 소서행장이 이끄는 3만 왜군을 맞아 성산대교들 전투에서 산화한 만인의 영웅들의 넋이 고이 잠들어 있는 합장묘이다.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일만 의병들이 몰살당하고 말아 온 들판을 벌겋게 피로 물들이고 말았다. 왜군들의 시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산을 이루었고 엄청난 손실과 피해를 입고 살아남은 적들은 모두 퇴각하고 말았다.
이들의 희생으로 왜적들에게 대 타격을 입혀 마침내 대규모의 군사력을 약화 시켰기에 명랑대첩의 대승의 물꼬를 텄다. 명량대첩을 대승으로 이끈 이순신 장군도 왜군을 막아낸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 "만일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영세귀감이 된 일사보국의 정신은 후세토록 길이 빛날 것이다.
별미여행- 명가 용궁 해물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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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점이 여사는 강인하고 부지런하다. 매일 새벽부터 목포 완도 여수 등 20군데가 넘는 수산시장을 누비며 신선한 재료를 구입한다. 부지런함은 타고난 자신의 운명이라도 한다. 맛의 승부사 근성이 따로 없다. 오직 싱싱한 생물만 올리는 게 그의 철학이다.
30여 가지의 싱싱한 해물을 이용한다, 조리과정에는 일절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시원한 맛을 해치기 때문이라고 일러준다.
과연 남도의 명가다운 맛이 펄펄 살아있다.
문의-061-535-5161
메뉴-3만원(2인분), 4만원(3~4인분), 5만원(5~6인분) 해물탕 대(5만원) 중(4만원)
위치-해남읍내
김옥의 新 남도기행-나주 영산강 추억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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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최대의 포구 영산포
그 애환,
일제 강점기의 근대문화유산.
황포돛배의 추억 나들이
영산강 젖 먹고 자란 영산동, 물길 따라, 세월 따라 더듬는 추억. 육운의 활기 먹고 남해의 교류 집결지이었던 황금 항구였던 영산포는 호남최대의 포구였다.
한창 번성기 때에는 호남 및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어물 배들, 객잔, 상인, 면포점, 정미업, 미곡상, 어물전, 정육장 등이 꽉 들어차 해상 교통의 요충지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명성 휘두르고 살았던 그 시절, 풍류가 깃들었던 역사의 마을, 과거 찬란했던 호남제일의 교류 항이었던 영산포 동네를 찾아 가 본다. 그때 그 시절 추억 풍경들이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영산대교를 건너 곧 바로 오른쪽으로 돌면 강둑에 '홍어거리'를 알리는 커다란 표시판이 보인다. 영산포 홍어의 유명세를 아직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이곳 어물전들에는 스무 곳이 넘는 식당과 홍어 판매장을 겸한 도매상들이 밀집 돼있다.
이 지역의 식당들에 가면 잘 삭힌 홍어의 별미를 맛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근대문화유산
영산포는 전국적으로 일제 강점기 건축물이 잘 보존돼 있는 동네다. 1915년에 영산포 일대의 토지는 80% 정도 일본인이 점유하고 있었다고 하니 한국 속의 일본국이었던 것이다. 시대적 배경과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 '장군의 아들'도 이곳 일대에서 촬영했다.
지금도 영산동에는 당시 영라관 이라는 요정 건물과 정미소 건물, 가항 종점이었던 영산포 선창에는 1915년에 만들어진 옛 등대가 남아있다. 우리나라 유일의 강변 등대로 항구의 파수꾼이었다. 영산포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던 등대는 1978년 영산호 물막이 공사로 영산포가 선창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자 지금은 퇴물이 되어 동네 한복판으로 밀려나 있다.
현재 나주시 관내에 있는 일제 강점기 건축물중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등록문화재 제34호 구(舊) 나주경찰서(나주시 금성동)와 등록문화재 제44호 노안천주교회(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기념물 제183호인 구(舊) 나주역 등이 있다. 구 나주경찰서 건물은 일제 때 일본인에 의해 건립된 붉은 벽돌의 조적조 2층 건물로 일제 때에는 민족 운동가들이 많은 고초를 겪은 곳으로 현제에도 유치장 등 시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 외 동양척식주식회사 사장이었던 흑주저태랑(黑住猪太郞)의 주택과 동양 척식주식회사의 문서고도 둘러 볼만하다.
황포돛배! 그때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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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게 하는 명물
황포돛배 체험 여행은 전라남도가 당시 황포돛배를 타고 흑산도, 영산도, 칠산도 등을 거쳐 영산포까지 홍어는 물론, 소금, 미역, 소금, 곡물, 젓갈등 생필품 등을 싣고 나르던 황토돛배를 복원 운항함으로써 영산강의 옛 정취를 되살리고 남도 고유의 관광 상품으로 개발해 나간다는 계획에서 탄생되었다. 영산강을 오르내리던 황포돛배가 모습을 감춘 지 장장 30년 만에 부활이다.
영산강의 잔잔한 비단물결을 따라 흐르며 좌우로 펼쳐지는 습지대와 기암. 풍류 깃든 정자의 고고한 모습, 웅장한 주몽 드라마 세트장, 습지대에 자리 튼 왜가리 모습들을 무수히 볼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노을에 물든 영산강 줄기 따라 유유자적 즐기는 낭만여행길이 최고의 백미가 될 것이다. 이미자 씨의 ‘영산강 처녀’/‘영산강아 말해다오’ 노래 기념비라도 세워진다면 한층 분위기가 멋스러울 것이다.
<<뱃길코스안내>> 문의-(061)330-8714.
다야뜰에서 중천포 주몽 드라마 세트장에 이르기까지 왕복 6㎞.
소요시간-왕복 40여분.
승선료
- 개인 : 성인 5천원, 청소년/군인 : 4천원, 어린이 3천원
- 단체(20인 이상) : 성인 4천원, 청소년/군인 : 3천원, 어린이 2천원
찾아가는 길
영산대교→이창삼거리에서 우회전(영암 방면으로)→영암방면 고가 아래
-우회전(왕곡·공산방면)→왕곡면→박포삼거리→우회전→황포돛배 가는 길
<여행 T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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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면 볼거리는 우선 삼한지테마파크'인 주몽 드라마 세트장과 금광토굴, 신곡리 전통테마마을, 형제방죽, 그리고 우습제를 꼽는다. 우선 마을길마다 연이어 이어지는 교통의 편리성 때문에 순서에 의하여 두루두루 둘러볼 수 있어서 편리하다.
●삼한지테마파크-주몽촬영지
우선 장중한 규모에 놀라고 만다. 형식적으로 꾸며놓은 세트장이 아니다.
거의 완벽한 수준과 시대적 사실감에 맞추어 지었기 때문에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각되어 많은 이들이 호기심으로 찾아오곤 한다.
입장료-성인 3천원. 청소년 2천5백원, 어린이 1천원
문의-(061) 335-7008 . 061-330-8108
●공산면 남창리 월호 마을 출신 육탄용사 박평서씨 묘
1949년 5월 4일 송악산 전투에서 81mm 박격 포탄과 수류탄을 장치한 폭탄을 가슴에 두르고 적진지에 뛰어들어 진지를 분쇄하고 18세의 어린 나이로 장렬하게 산화한 10명의 용사 중 한 명이다.
●공산면 동촌리의 우습제
우습제는 13만평의 홍련화 단지다. 가을에는 방죽의 제방에 갈대와 억새가 여지없이 파고들어 군락을 이루니 그 풍경 또한 아름답다.
●운흥사 신비의 연화감
10월이 되면 자라는 감나무에서 빨갛게 익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감속에 또 하나의 작은 감이 들어있다는 연화감이 열린다. 전국에서 오직 이곳뿐이라고 한다. 덕룡산 신이 특별히 내려준 열매라고 믿고 있으며 이 감을 만지거나 먹으면 소원성취 한다고 하며 아들 못 낳는 여인네들에게는 효험이 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가을 산사의 그윽한 풍경 속에 빠져보자.
문의-운흥사 061-337-2622
<별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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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으뜸은 먹는 즐거움이다.
주몽식당-가을의 진미-우렁이 추어탕
가을철 보양 음식은 추어탕을 들 수 있다. 우렁이 추어탕의 진하고 개운한 맛, 생태탕과 생태전골이 식객들의 칭찬을 얻는다. 그 외 ‘오리버섯전골, 나주곰탕, 시골 우거지탕, 한우생고기 비빔밥도 역시 밥도둑님이다. 더불어 기막힌 묵은 김치맛. 하나의 별미는 둘이 먹다가 한사람이 집에 가도 모를 만큼 맛깔난 2년 숙성김치를 들 수 있다. 한정식에 버금가는 백반의 풍성한 상차림에 눈이 돌아간다. 양식과 한식 조리사 자격증 취득한 부부 요리사들이 만들어 내기에 더더욱 맛의 질감이 남다르다. 미식가들의 칭찬을 이어가는 집이라 맛의 특별함이 있다.
문의-(061)―337-6363
위치-왕곡면 정산리 영신주유소 옆
김옥의 新 남도기행 - 담양,신비의 전설 여행을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경종울린 석당간과 석인상
관리안된채 먼지만 흠뻑
담양 여행길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즐거운 풍광 길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로 선정된 메타세쿼이아 숲길이다.
담양에서 남원이나 순창 나가는 길목과 장성서 담양 읍내로 들어서는 24번 국도변까지 연이어진(담양읍 석당간~금성면 석현교) 길목. 그 길에 가을 단풍과 백옥 설경 때를 맞춰 지나보면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 할 정도다.
이곳에서 만추의 풍경 길을 음미하면서 순창으로 나가는 도로를 따라가면 밭 중앙지점에 오층석탑(보물 제506호)이 세워져 있다. 탑이 있으면 절이 있게 마련이다.
고려시대에 이곳에 동정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담양읍에는 남산리 동정 마을이 있다. 사찰 이름도 이 마을 지명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탑은 부처의 신체로 여기며 그 자체가 신성시 된다. 눈으로만 보고 스치는 무례함을 벗어야한다. 알고 보는 관광은 느낌에 두 배 이상의 가치가 있다. 여행은 소비하는 게 아니다. 지혜와 활력을 얻는 법을 배우는 게 진짜 여행의 묘미다.
탑이란 범어(梵語)로 스투우파(Stupa), 또는 팔리(Pali)어 투우파(thupa)의 음사에서 유래된 약칭으로 사리의 봉안 유무에 따라 탑파, 또는 지제(차이티야, Chitya)라고 하는 별개의 용어가 있다. 먼저 사리를 봉안한 탑을 '스투우파' 라고 하며 사리가 없는 탑을 '차이티야' 라고 구별하기도 했다. 즉, '스투우파'는 방분(方墳), 원총(圓塚) 또는 고현처 (高顯處) 등의 뜻으로 부처님의 신골을 봉안하는 묘소다. '차이티야'는 신령스런 장소나 고적을 나타내는 기념탑적인 것으로 영묘(靈廟), 정처(淨處), 복취(福聚) 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탑에 부처의 육신이 담겨있지 않더라도 부처의 정신이 담긴 부처의 몸이라고 생각해 탑이 세워진 곳은 반드시 부처가 계신 신성한 곳으로 여긴다. 이 탑은 남원의 만복사지 오층석탑과 강진 월남사지 석탑과 같은 백제양식의 조형을 지니고 있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고, 지붕돌은 밑면 전체가 위로 들려 있어, 마치 목조건축의 지붕을 보고 있는 듯하다. 특이한 점은 각 지붕돌 위에 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네모난 돌이 끼워져 있는 것으로, 당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준다.
전탑의 외모를 하였다 하여 모전 석탑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탑이란 점토로 빚어서 말린 다음 구운 재료로 쌓아 올리는 것을 말하는데 이 탑의 결구 수법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여러 개의 판 석형 석재를 끼어 결구했으니 전탑이라고 할 수 없다.
석당간(보물 제505호) 신비
석탑 왼편 도로변에는 짐대(또는 종대)라 불리는 높이 10여 미터 석당간이 세워져있다.
석당간은 절 문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당을 말한다.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석당간은 길고 가는 팔각석주 3개를 결구하여 그 위에 원형당간을 올렸다. 상단부에는 금속으로 만든 원형의 보륜이 달려있으며 삼지창의 2원철에는 3개의 풍경이 달려있다.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면 요란하게 풍경이 소리를 낸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세계를 알아보자.
1894년 음력 정월 초, 한 밤중에 풍경소리가 울린 이후 몇 차레 풍경이 울렸다는데 이럴 때면 어김없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거나 자연 재해가 일어났다고 한다.
풍경소리가 처음 나던 날 아침, 마을사람들이 불안한 마음으로 그곳으로 달려 나갔다. 석당간 아래에는 수백 마리의 까치들이 죽어있었다. 머리를 풍경에 부딪쳐 죽은 것이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동물들이 먼저 안다고 했다.
마을의 위기를 구하려고 보은의 희생을 한 것일까?
그러나 지금은 풍경 한 개만 외롭게 달려있다.
분실의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소리 박자 맞춰 줄 짝을 잃고 말았으니 소리조차 사라 질수 밖에...
불길한 일이 생길 때만 소리를 낸다고 했으니 오히려 소리 짝을 잃은 게 불길한 운을 떼어 내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석당간 옆에 있는 비석들은 조선 헌종 5년(1839)에 태풍이 불어 당간이 넘어지자 이를 복원하는데 쓰인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석당간은 마치 배의 돛대와도 같다. 배가 있으면 사공이 있어야 하는 법. 석인상(사공 불이라고도 한다)과 관련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사공은 바로 천변리 경로당 옆 김종신 할아버지 집 담장 끝에 두 석인상이 허리까지 흙에 묻힌 채 세워져있다. 보살펴주는 손길, 눈갈 조차 없는 구석지에 내몰려 긴 세월 외롭고 쓸쓸히 서있다. 표정도 심통만 잔뜩 묻어있듯 보인다.
안내판에는 버젓이 신비한 설명문 까지 쓰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접 치곤 너무 심하지 않은가. 담양의 번영과 운세를 저어나가는 중요한 인물상이 아닌가.
잘 대접하고 받들어 모시어 담양 고을의 영광과 번영의 노를 힘차게 저어주게 해야 할 것이다. 관리와 개선이 무에 그리 어렵겠는가.
이 석인상은 조선 헌종 4년(1838) 당시 담양부사 홍기섭이 담양의 지세는 전체가 배의 모양이기에 석당간은 배의 돛대가 되며 사공 불은 뱃머리 지점에 서있는 뱃사공이 되는 것이다. 화순 운주사의 원형 탑이 있는데 이것도 배 형국의 지세와 관련되어 배 돛을 상징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이해하면 된다.
여행정보-TIP
<담양읍 삼다리 내다 마을>
약 500여 년 전부터 다전리(茶田里)라 불려오다 동다(東茶), 서다(西茶), 외다(外茶) 등 3개 마을을 통합하여 삼다리라 개칭하였으며 다시 내다 마을과 외다 마을로 구분되었다. 현지주민들은 삼다리라는 지명에 익숙해있다.
대나무 숲과 소나무 군락으로 빙 둘러 싸여 자리한 마을은 흡사 푸른 대나무로 엮은 소쿠리 안에 마을이 들어 있는듯하다. 대나무와 농촌풍경과 멋진 교합이다. 지형으로 보아 이곳 주민들은 소쿠리 만드는 일이 타고난 숙명인가 보다.
40분 정도 코스의 7만여 평의 대나무 숲에서 죽림 욕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
(마을문의 061-381-3990)
<금성 산성>
내성으로 들어가면 금성사 터와 당간지주 민가터, 우물, 석비, 절구통 같은 유물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여유로운 성곽 산책을 하려면 마음의 인내를 지니고 둘러보아야 할 만큼 4시간 30여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다. 성벽을 거닐며 과거 역사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으로 더듬어보면 색다른 감회에 젖어 볼 수 있다.
동자암
금성 산성에 터를 잡고 백제의 호국의 얼을 되새기며 산성을 지키는 동자 암이 있다. 스스로 금선산성의 지킴이라고 하는 청산스님을 비롯하여 보리스님, 그리고 아기 스님(구봉. 황룡, 청룡)등이 한 가족을 이루며 수도정진과 무예수련을 하고 있다.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창술, 검술, 권법 등 다양한 무술의 묘기를 보여주고 있다. 소림 무술을 보는듯하다.
<국내 유일 노천법상-연동사>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노천 법당에 봉안된 고려시대 후기작품 지장보살입상(문화재자료 제188호. 높이 2.7m)이 있다. 지장보살입상 오른쪽에 삼층석탑(문화재재료 제200호)이 서있으며 동굴법당에는 비로자나불좌상과 산 신상을 모셔 놓았다.
원행스님이 그려내는 달마대사 그림에는 무언가 특별함이 있다고 입소문이 파다하다.
먹을거리
와룡사슴가든식당
약용사 최현철 쥔장은 96년 사슴 농장과 식당을 경영하면서 때 순수함의 상징인 사슴처럼 인상부터 정직과 소박함이 얼굴에 도장 찍은 듯 보인다.
가격의 부담 없이 다양한 맛으로 사슴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지론이다. 지금은 건강과 웰빙시대이다.
보양음식중 하나인 사슴요리는 고단백 저지방 식품으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인기음식이 되고 있다. 부인 하영애 씨는 요리 솜씨가 따봉이다.
신선한 육회.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갈비찜. 사슴 뼈로 고아낸 진한 육수와 혀끝에 살살 녹는 샤브샤브. 요리 맛을 잊지 못하여 단골 고객이 되고만 다고 한다.
정갈한 반찬 중에서 고추조림과 김치 맛은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혀를 내두를 만큼 맛이 환상적이다.
위치-담양군 금성면 대나무 테마공원 가는 길
문의-061-382-4315. 011-644-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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