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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오사메후다 사용(100회 이상 순례)이 가능한가
츠야도의 열쇠를 그가 받았기 때문에 반납 책임도 그에게 있는데, 신새벽에 떠나겠다며
열쇠를 내게 맡겼던 옆방 젊은이.
실제로 그렇게 떠났던 청년이 어느 틈에 돌아왔는지.
그가 온 줄도 모르도록 내가 곤히 떨어졌던가.
이토록 숙면에 들다니 자축이라도 해야 할 경사(?)다.
반납의 의무를 청년에게 돌려주고 츠야도를 나왔다.
높은 산이 없고 들이 넓으나 마츠야마 시의 외곽이기 때문인지 발전의 사각지대 같다.
시코쿠섬에서 레이조마을로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인연이 깊은 헨로마을이지만 주민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복지와 편의시설 등에서는 낙후된 마을이라는 느낌이니까.
밤길일망정 간밤에 걸었고 하쿠이(白衣)에 스게가사(菅笠) 차림의 헨로상 안내판과 빨간
화살표가 곳곳에서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방황하는 일 없이 몬주인(文珠院)에 당도했다.
이미 언급했듯이 에몬사부로와 탁발승 코보의 악연이 시작된 곳이며 20벳카쿠레이조(別
格靈場) 중 7번째라는 사찰이다.
헨로 '발상(發祥)의 절'이 왜 88레이조에서 제외되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볼멘 소리도
있는듯 한데 까닭은 코보대사만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오하요고자이마스"(おはようございます/안녕하세요)
야사카지~몬주인 1km쯤에서 자전거로 등교하는 남녀 중학생들로부터 받은 아침인사다.
곧곧한 자세로 패달을 밟다가도 내 앞에 접근하면 고개숙여 인사하는 소년소녀들.
이 아이들은 정상 등교시간의 한참 전인데 왜 이리 일찍 등교하는 것일까.
조용한 교실에서 예습하기 위함인가 청소 당번이기 때문인가.
나는 후자라고 단정한다.
일본 학교들의 아침 시간이 예습에 알맞는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교실 안팎의 청소를 학생들이 했는데 그 청소당번 제도가 지금도 변함없이 시행
되고 있는 일본의 학교니까.
거듭 말하지만 내가 소학교학생 때 메던 책가방, 그 때 등교하던 방식, 당시의 청소당번제
등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 일본의 소학교.
그들이 20c 이전부터 시행하고 있는 이 제도를 21c에도 고수하고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한국의 학부모들은 어떤가.
귀한 자식들이 배우기 위해서 학교에 가지 집에서도 하지 않는 청소하러 가는 것이냐.
학부모가 몇푼 더 부담하면 자녀들이 깨끗이 청소된 교실에서 공부하고 청소원 일자리도
늘어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두고 억하심정이냐고 항의할 것이 뻔한 한국의 학부모들.
한국인의 진취적이고 번뜩이는 지혜와 일본인의 고루하고 정체된 사고로 규정할 것인가.
과연 그들의 머리는 정지되어 있고 우리는 섬광처럼 번쩍거리는가.
이른 아침의 소년소녀들, 중학생들이 달리며 밝은 표정으로 하는 인사는 반갑고 고맙지만
부수되는 생각들이 걸음을 무겁게 하는 아침.
에바라마치(惠元町)에 있는 몬주인에서 후다하지메대사당(札始大師堂)을 거쳐가는 48번
사이린지(西林寺) 길을 시작했다.
현도194번을 따르다가 미사카강(御坂川)을 건넌 후 헨로마크의 안내를 받으며 마을길과
논길을 반복하여 후다하지메대사당에 당도했다.
코보대사를 만나기 위해 추적을 계속하고 있던 에몬사부로는 이 곳에서 코보대사가 새긴
존상(尊像)을 발견한다.
대사가 돌아오리라 믿고 존상 앞에서 참회하며 대사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는 대사.
끝내 대사를 만나지 못한채 순회를 계속하기 위해 떠나야 한 에몬사부로는 자신의 이름과
바람(所望) 등을 적은 표(札)를 그 집 기둥에 붙여 놓고 떠났다.
이 표가 오늘날 순례(遍路)에서 휴대, 사용하고 있는 이른바 오사메후다(納め札)로 발전
했으며 이 집은 오사메후다의 효시라 해서 후다하지매대사당이라 했단다.
당시에는 규격이 없고 무료 메모지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정한 규격에 순회수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유료 표찰이다.
1~4회는 백색, 5~7회는 녹색, 적색은 8~24회, 은색 25~49회, 50~99회는 금색이며 100
회 이상은 비단(錦)이라는데, 비단 오사메후다를 사용하는 헨로상의 탄생이 가능한가.
일본인이 장수한다 하나, 태어나서 걸르는 해 없이 매년 1회를 순회해야 가능한 수치다.
요람기(搖籃期) 외에도 보행불능의 말년이 있을 수 있으므로 2회이상 순회하는 해(年)도
다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럼에도, 단순 수치로는 상당수가 배출될 수 있다.
헨로 순례 100회는 120.000km에 불과하다.
체력이 왕성한 기간을 100세의 3분의1로 간주하고 이 기간에 연간 3650km를 걸으면 120.
000km를 거뜬히 넘긴다.
연간 3650km는 매일 10km를 걷는 것이므로 비단 오사메후다가 그림의 떡은 아니다.
내가 걸은 거리도 120.000km를 넘어선지 꽤 되었다.
다만, 내가 말하는 120.000km는 일상의 활동거리를 모두 포함한 총량이다.
그러므로, 시코쿠헨로처럼 특정 구간만으로 그 수치를 달성하는 것은 범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며, 따라서 비단 오사메후다의 사용자가 아직 없는 것 같다.
비단 오사메후다는 주문 제작하게 되어 있는데 제작 사실이 아직 없다니까.
야사카지(八坂寺), 야츠즈카(八っ塚)군집고분, 다음의 '八 . . . .'은?
에몬사부로는 비록 구두쇠지만 그의 이름은 조루리지, 야사카지 등 시코쿠레이조 외에도
몬주인에 이어 후다하지메대사당까지 미쳤는데 하나 더 늘어나는 중인 것 같다.
몬주인 소유로 되어 있는 '야츠즈카(八っ塚)군집고분'이 품고 있는 사연 때문이다.
즉, 마츠야마 시의 지정기념물(史跡)인 이 고분 8기가 시코쿠헨로의 원조로 불리는 에몬
사부로의 여덟 아들 무덤이라는 설이다.
에몬사부로가 헨로의 원조가 된 직접 계기는 여덟 아들이 차례로 죽었기 때문이었다.
아들들이 모두 죽는 변이 없었다면 이 구두쇠가 88레이조를 20번이나 돌았겠는가.
조루리마치는 그의 고향마을이고 조루리지와 야사카지는 고향마을에 있는 레이조다.
몬주인이 에몬사부로가 탁발승(코보)의 쪽박을 깬 곳이라면, 후다하지메대사당은 헨로의
오사메후다의 효시가 된 곳이다.
여덟 아들의 무덤이 더해진다면 이 지역이야말로 에몬사부로의 성지가 될 것이다.
하나 더 인연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八'이라는 숫자다.
여덟 고개를 깎아서 지은 절(八坂寺)이 헨로의 레이조가 되었고 여덟 아들이 죽어서 헨로
(遍路)가 태어났는데 팔(八)자를 첫자로 한 어떤 일이 더해질지 주목해야겠다.
코무라마치(小村町)의 후다하지메대사당에서 현도207번으로 나온 헨로.
207번에서 40번으로 바뀐 현도와 함께 가는 헨로미치가 긴 쿠타니 대교(久谷)로 광폭(廣
幅)의 시게노부 강(重信川)을 건너 마츠야마자동차고가도로 밑을 가로지른다.
각종 수변 공원과 골프장(森松Golf Club)까지 설치되어 있는 광대한 강변.
지금은 다목적 공원으로 변신했지만 예전, 이요강(伊予川)이었던 때는 애물단지였단다.
홍수와 범람의 악순환때문이었는데 센고쿠(戰國)의 무장 가토요시아키(加藤嘉明)의 거성
(居城)이었던 분로쿠(文祿/1592~96) 4년에 대대적으로 개수했단다.
요시아키의 명을 받아 시행한 가신(家信) 아다치시게노부(足立重信)의 공적을 치하해 강
이름을 그의 이름인 '시게노부'로 바꿨다는 것.
시게노부 강을 건너 십자로를 직진하면 40번현도 우측의 사이린지(西林寺)에 당도한다.
타카이마치(高井町)에 있으며 야사카지에서 상거가 4.5km쯤 되는 위치다.
그러나, 48번레이조의 헨로는 이 넓고 짧고 편한 길을 거부한다.
우측의 이면도로와 전 일본명수(名水) 100선(選)에 든다는 '조노후치'(杖ノ淵) 길이 헨로
미치라며 그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조노후치는 마을에 들른 코보대사가 큰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는 마을인들을 구하기 위해
지팡이로 땅을 쳐서 맑은 물이 솟아나게 함으로서 만들어진 못이라나.
산 이름 세류잔(淸瀧山)도 이에서 비롯되었고.
아무튼, 40번현도가 생기기 전에는 그 길 외에는 없기 때문에 헨로는 그 길이 될 수 밖에
없었겠지만 좋은 새 길이 개통되었는데도 옛길만을 고집하는 까닭을 설명할 수 있는가.
나는 작은 대사당 우측으로 난 이면도를 택했으며 길 우측의 절(長善寺)을 지나서 청류가
흐르는 수로를 건너(西林寺橋) 사이린지에 진입했다.
텐표(天平) 13년(741), 쇼무천황(聖武/재위724~49) 때 칙명에 따라 이요국(伊予國)에 간
교키보살이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을 조각, 본존으로 안치하고 당우를 세웠다는 사찰에.
현 위치의 동북쪽(현 松山市小野播磨塚부근 '徳威の里')이었는데 코보대사가 다이도(大
同) 2년에 현 위치로 옮기고 시코쿠 레이조로 정했다는 것.
그의 진언종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평생 현역을 목표로 하지 않겠습니까"(生涯現役を目指しませんか)
- 일본 만의 문제인가 -
49번레이조 조도지(淨土寺)까지는 3.2km.
바둑판 같은 길이므로 잘못 들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으나 아루키 헨로미치를 관철하려
한다면 시코쿠 석주와 작은 헨로마크들을 주시해야 한다
잠시 40번현도를 따르다가 Y자 삼거리에서 좌측 길에 붙는다.
주로 반듯하게 정지된 논길인데 고노강(小野川)의 헨로교(遍路橋)를 건넌다.
한동안 계속되는 직진이 11번국도를 가로지른다.
쿠메(久米)소학교를 지나 북진을 계속하면 조도지 후다쇼 앞이 될 것이다.
통째로 오류를 범한다 해도 3km에 불과한데 쿠메소학교가 조도지의 도중인 것 만은 분명
하므로 자신만만한 걸음이었다.
소학교 이후 헨로석주의 안내를 받아 골목길에 들어설 때 한 영감의 큰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스쳐갔던 영감인데 왜 저리 소란을 떨고 있는지.
그가 내게 다가와서 물은 것은 사카우치(逆打ち) 헨로상이냐는 것.
내가 현재(당시) 선택한 길은 반시계방향(사카우치) 헨로라는 것이다.
내게 골탕을 먹일뻔 한 석주는 역코스 안내용이란다.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마모되어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사카우치 안내석이 분명했다.
없느니만 못한 역코스 안내석은 내 시코쿠헨로에서 처음이며 유일한 안내석이다.
까미노에서도 특정 구간에는 반(反) 시계방향(anticlockwise) 안내 화살표가 있다.
특히 파띠마(Fatima/뽀르뚜길) 구간에는 순 방향과 대등하게 있으나 색이 다르다.
순 방향이 노랑(amarillo)인데 반하여 파랑(azul)이라 명확하게 구분된다.
목례로 고마움을 표한 후 골목을 바꿔 걷기 시작했을 때 불쑥 나타난 중년 여인.
십자 골목길 한 모서리 집의 열린 문 안으로 끌어들이듯 하였으며 안에 있는 여인이 합세
하여 자기네의, 소위 오모테나시(お持て成し)를 시현해 보이려 하는가.
한 여인이 내 목과 어깨를 안마하는 사이에 차와 군것거리를 준비한 다른 여인.
차 1잔을 접대받고 휴식을 취한 후 가시라는 이 여인들의 정체는?
길손을 홀릴 만한 미모가 아니며 평범한 실내 분위기다.
'쿠메 아이아이사롱(久米愛あいサロン)'
"생애 현역을 목표로 하지 않겠습니까"(生涯現役を目指しませんか)
비치된 전단들로 보아 실버 그레이(silver gray/은퇴 고령자)를 상대로 프로그램을 운영
하는 소규모 단체인 듯 한데 잘못 짚은 것 같다.
주간프로그램표가 우리 지자체의 노인복지센터가 운영하는 내용과 대동하나 회비를 징구
하는 유료 회원의 회비로 운영하는 듯 하니까.
일본의 소도시, 한 마을에서 일본의 현실과 고민을 읽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세계에서 유례 없이 빠르고 높은 고령화 현상의 나라가 일본 뿐인가.
우리나라의 80생애에서 60세 정년이라면 취업 적령기는 2분의 1인 40년도 되지 못한다.
출생에서 군 복무까지의 25년과 퇴직 후 20년을 뺀 35년에 불과한데 취업 전 단계가 기약
없이 늘어나는 이 시대에는 일 다운 일을 보람 있게 할 수 있는 기간이 얼마나 되는가.
'평생 현역을 목표로'라는 일본의 캐치 프레이즈(catch phrase)는 차용할만 하지 않은가.
내가 이 지역에 살지 않음은 물론 한국 할아버지임을 알았을 때 내색은 숨겼지만 실망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말을 잘해서 일본 할아버지인 줄 알았다고 했지만 거짓말이다.
내가 일본 말을 할 기회가 없었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도, '타케치 노리코'는 한 움큼의 사탕류를 내 주머니에 넣어주고 자기 수예품이라는,
실로 만든 미니(miniature) 헨로상을 내 숄더백에 걸어주는 등 정겨운 오셋타이를 했다.
타카노코마치(鷹子町)의 '아이아이사롱'을 나와서 직선 골목길을 따라 이요철도(伊予)의
건널목과 코마츠카이도(小松街道)를 횡단했다.
도심의 철도건널목에 위험 대책이 허술하고 공해도 심할 듯 하여 주위를 살펴보며 일본의
공무원은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이라면 관계 공무원을 비롯하여 관련자들이 몸살을 앓을 정도로 시달리고 있을 텐데
그런 흔적이 전혀 없으니까.
마을 이름 happening
같은 마을의 49번조도지(淨土寺)에 당도한 시각은 10시48분.
레이조와 벳카쿠레이조, 타이시도를 거쳐왔으며 아이아이사롱의 오셋타이를 받았는데도
아직 아침나절이다.
도고온천(道後溫泉) 지역인 51번레이조(石手寺)가 오늘의 목표지인데 4.5km쯤 전방이다.
여유다운 여유를 부리며 헨로상 옷을 잠시 벗어도 되겠다는 뜻이다.
조도지의 창건에 대해서는 설이 많으나 경내에 서있는 마츠야마시 교육위원회 안내판에
따르면 텐표~쇼호시대(天平~勝寶/729~757)에 승(僧) 케이메이(慧明)가 창건했단다.
여제(女帝) 코켄천황(孝謙/재위749~758)의 칙령으로.
케이메이는 창건전문(?)인 교키(668~749)가 조각한 석가여래상을 본존으로 했고, 이즘의
경제용어로는 사찰의 M&A전문가 코보가 손질하여 인수했으니 정석을 밟은 셈이다.
법상종(法相宗)에서 진언종으로 소속이 바뀌고 번창했다니까.
조도지를 떠난 시각은 11시 25분쯤.
골목길인 헨로미치는 레이조에 접해 있는 진자(日尾八幡神社)를 지나서 40번현도에 흡수
되어 11시방향으로 북상한다.
50번레이조 한타지(繁多寺)까지 1.7km의 반쯤을 현도에 편승한 후 남은 반의 반쯤은 12시
방향 골목길이 되고 남은 부분은 현도에서 올라오는 차로와 합친다.
현도에서 상당히 먼 곳(한타지)을 우회하는 도로의 수혜자는 누구일까.
도로는 현대의 사찰 경영에서 필수다.
88레이조의 최고 상위에 있다 해도 대형 버스가 닿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특단의 조치로 로프웨이(rope way)를 만들고 케이블카(cable car)도 설치했지만 차도를
당할 수 있는가.
한타지를 경유하는 환상(環狀) 도로는 누가 누구를 위해 만들었건 한타지와 마을, 양편에
윈윈(win-win)을 주는 도로임이 분명하다.
천황의 칙령으로 교키보살이 세운 후 1c 전후에 쓰러져 가는 절을 코보대사가 수리한다.
그리고 이름을 바꾸기도 하며 레이조로 승격되고 소속이 바뀐다.
한타지도 시코쿠헨로 88레이조의 대표적인 진화 방식에 따른 후다쇼다.
49번레이조와 같은 시기니까 동일한 천황(孝謙)이다.
교키보살은 소형(90cm) 약사여래상을 조각, 본존으로 하여 코묘지(光明寺)를 세운다.
코보대사는 사명을 한타지로 바꾸고 레이조로 선정한다.
그리고 한타지는 밀교인 진언종의 계열사(寺)가 된다.
마츠야마 시 하타데라 마치(畑寺町)의 해발80m로 높지 않은 구릉지대에 자리하고 있으나
경관은 일품이다.
배후는 막혀 있으나 울창한 수목이 답답함을 커버하는 듯 하고, 경관수림보호지구(景觀樹
林保護地區) 지정에 동의한다.
그러나, 절 입구에서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는 영감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노상 아이스크림을 200y에 팔면서 10년 이상 아루키헨로상에게 오셋타이하고 있다고?
"10년 이상이라면 20년은 됨직한데 이런 일도 헨로여행이니까 가능하다"고 어느 일본인이
추켜올렸는데 그 상행위를 적선으로 보는가.
헨로미치는 한타지에서 환상 차도를 따르다가 차도를 떠난다.
40번현도의 이면도로를 따라서 쇼엔지(正円寺)까지 가거나 아예 현도를 따라도 된다.
한데, 이 지역은 내게 어이없는 해프닝(happening)을 안겨준 마을들이다.
하다테라(畑寺), 쇼엔지(正円寺), 후크온지(福音寺) 등 '寺' 자를 끝자로 하는 이름을 가진
마을에서 있을 리 없는 절의 실체를 찾고 있었으니.
쇼엔지(마을)에서 쇼엔지(사찰)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으니 질문을 받은 사람이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상대편이 나를 일본영감으로 봤으니 다행인가?
혼슈(本州) 북쪽이나 홋카이도(北海道)에서 왔기 때문으로?
이 해프닝은 그 때로부터(지금 이 순간에도) 나로 하여금 늘 고소 짓게 했으며 아마 두고
두고 그럴 것이다.
이시테지(石手寺)와 도고온센(道後溫泉)
40번현도를 따라서 이시테강(石手川)에 도착해 헨로교(遍路橋)를 건넌 내가 51번레이조
이시테지(石手寺)에 당도한 시각은 13시 30분쯤.
헨로교 끝에서, 8시 방향에서 오는 317번국도를 만나 T자 도로까지 잠시 함께 한 후 국도
는 3시 방향으로 떠나고 나는 이시테지로 들어가고.
진키(神龜) 5년(728), 꿈에서 25보살의 강림을 본 이요(伊予)의 코쿠시(国司/越智玉純)가
이 곳에 진호(鎭護)의 도량을 지어 쇼무천황(聖武/재위724~49)의 칙원소로 했는데, 다음
해(天平 원년/729)에 교키보살이 약사여래상을 깎아 본존으로 안치, 창건하고 법상종(法
相宗)의 안요지(安養寺)라 했다는 절이다.
이 사찰 역시 코보대사와 관련이 깊은 '에몬사부로의 재래(再來)' 설화에 의해 이시테지로
개명되었고(메뉴 '시코쿠헨로'(4) 글 참조) 51번 레이조가 되었다.
소속이 밀교의 진언종으로 바뀌는 것은 당연한 정석이고.
10월 1일의 일본 시코쿠,
위도(緯度)로는 제주도와 같은 지역이지만 서울과 다르지 않게 높푸른 가을이 펼쳐지고
있는 이시테지의 너른 뜰.
어느 초등학교의 사생(寫生)대회장인지 고만고만한 애들의 발랄하면서도 진지한 모습이
싱그럽게 보이는 것과 대조되는 지구촌의 한 신(scene)이 바야흐로 전개중이었다.
해외에 무력행사, 자위권 발동 등 심상하지 않은 일본 정국을 향해 '모두 다 평등'(皆一緖
平等)을 부르짓는 민초들의 호소가 잠드신 부처님을 깨울 수 있을까.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맨 먼저 들른 곳은 후다쇼 사무실.
내게는 츠야도 사용을 안내받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방 답게 꾸며진 츠야도에서는 미안안 감이 없지 않으나 전체(88) 레이조 중에서 츠야도를
운영하는 곳이 얼마 되지 않으며 그 중에서 제대로 꾸며진 방이 몇이나 되는가.
이즘에는 까미노에도 사이비 도나띠보(寄附)가 성행하고 있지만 츠야도에 기부제 도입을
권하고 싶다.
사용자가 고마운 마음에서 스스로 적당한 기부를 할 수 있도록.
방의 품격이 업그레이드 되어야 하고 이름도 바꿔야 함을 의미한다.
장례식에 부수, 사용되는 방을 의미하는 이름(通夜堂)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직원의 설명만으로는 찾아가기가 쉽지 않은 이시테지의 츠야도.
건물들의 배열이 복잡하기 때문인데 묻고물어 찾아낸 2층 츠야도는 충격적(?)이었다.
관리가 소홀하기 때문인지 산만하지만 수십명을 수용할 만큼 너른 다다미(畳) 방.
깔려 있는 다다미로 보아 숙소용인 듯 한데 무슨 연고로 유휴건물이 되었는가.
시코쿠헨로 최대의 츠야도지만 헨로상의 츠야도로 지은 건물일 리 없으니까.
내가 시코쿠헨로에서 하루의 걷기를 한낮에 끝내기는 오늘(10월 1일)이 유일무이다.
이유가 일본 최고(最古)라는(3古중 1라고도) 도고(道後)온천에서 목욕하는 것이다.
헨로상에게 필수일 리 없는 목욕을 생략하면 13km 정도의 전방인 53번레이조 엔묘지(円
明寺)까지 더 갈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어간에는 츠야도가 없으며 다른 비박 조건도 나쁘다.
헨로상이라는 이유로 여유롭게 온천욕을 하고 좋은 조건의 츠야도에서 잠도 자는 행운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은 극기라기 보다 자학이다.
국내에서는 산과 들, 강과 바다의 모든 길에서 가장 많이 애용하는 곳이 찜질방이다.
온종일 걸어서 굳어진 근육을 풀어주는데 찜질방 이상의 선이 없으니까.
까미노에서는 일과의 피날레가 샤워지만 시코쿠헨로의 경우 츠야도와 젠콘야도, 비박 등
에서 목욕은 커녕 간단한 샤워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간혹 오는 목욕의 기회야 말로 절호의 축복이 아닐 수 없는데 스스로 포기한다?
즉시, 1km내외의 전방인 도고온천으로 갔다.
이시테지가 1국보(二王門/山門), 7중요문화재(本堂, 三重塔, 鐘樓, 五輪塔, 訝梨帝母天堂,
護摩堂,銅鐘)와 현(県)지정유형문화재, 마츠야마시지정문화재 지정기념물, 지정천연기념
물 등 문화재 아닌 것을 찾기가 쉬울 만큼 문화재의 보고라는데 도고온천의 본관도 중요
문화재란다(1994년 지정)
2014년현재 건축한지 120년(明治27년/1894년에 신축)된 3층의 본관 건물은 우아하다.
도고의 근대 건축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건물이라고.
시설 중에서 시선을 끌어가는 것은 '신로카쿠'(振鷺閣)다.
본관 3층 옥상의 시설이며 꼭대기에는 백로 1마리가 날아갈 자세로 있다.
도고온천의 생성에 얽힌 '백로 전설(The legend of white heron)의 주인공이란다.
발에 상처를 입은 백로 1마리가 바위틈에서 솟아나고 있는 온천을 발견한다.
백로는 매일 날아와서 상처난 발을 그 물에 담근다.
어느날, 완치되어 날아가는 백로를 보고 온천의 효험을 깨닫게 된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온천이 개발된다.
하나 더 놀라운 것은 유신덴(又新殿).
메이지32년(1899)에 만들었다는 황실전용 욕실이다.
갑신정변(1884)이 실패로 끝난 후 일본의 정한론(征韓論)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씨조선은 시아버지(이하응/흥선대원군)와 며느리(민비/명성황후) 간의 싸움 끝에 일본
에게 곧 먹히지만 당시에도 일본의 황실전용 욕실을 꾸미는데 조선의 자재가 사용되었다.
다다미(畳 )와 천정의 자재가 조선산임을 밝히고 있으니.
'원숭이문명'이라고 비꼴 정도로 모방의 귀재라는 일본이 변화에 대해서는 부정적인가.
내부시설도 아름다운 건물을 신축한 120년 전 그대로인가.
솟아나는 물과 수도꼭지 외에는 모두 건물과 같은 나이를 먹은 듯 하니.
팬(fan)이 부족한지 자욱한 수증기에 분간이 잘 되지 않는데도 임신 8개월쯤 되어 보이는
초로남(初老男)이 말을 걸어왔다.
니혼진데와 나이토오모이....(日本人ではないと思い.../일본인아니라고 생각...)
말끝을 흐려버리는 그에게
예, 아임 코리언.(yea, I'm Korean/그렇소 나는 한국인이요)
이렇게 해서 말 나누기가 시작되었는데, 벌거벗은 내 몸을 보고 짐작했다는 것이다.
70넘은 일본인으로 나처럼 날씬한 할아버지는 없다는 그의 말은 과장일 것이다.
하지만, 살펴보라는 그의 말대로 돌아본 탕내의 늙은이들은 하나같이 배불레기들이다.
부럽다며 비결을 묻는 그에게 돌아간 내 대답은
"와타시와 시코쿠헨로상데스(私は四国遍路さんです/I'm Shikoku pilgrim)
30일째 걷고 있다는 말에 기겁하는 그를 넉다운(knock down)시켜버렸다
지구를 2.5바퀴 이상 돌았는데 내년에는 6개월에 4.000km를 걸으러 까미노에 갈 것이라고.
그의 오셋타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다면 굼뜨고 만만디했을 리 없다.
느릿하고, 느긋하게 마치고 나온 것이 아무에게도 지장될 일이 아닌데 미안하게 되었으니.
나를 선망하던 초로남이 한국의 헨로상 할아버지에게 셋타이를 하기 위해 마냥 기다리고
있었으니 어찌 미안하지 않겠는가.
종종 겪어온 한국이라면 이상할 일이 아닌데, 일본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니.
(이듬해인 2015년 여름에 Sevilla에서 올라오는 1.000km Plata길의 Salamanca에서 58세
일본인의 극진한 공대를 받았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물론 2차세계대전에 대해서도 모르는 이름만 일본인이지만)
내가 제주도 한라산을 매년 올라 30번을 훌쩍 넘는 동안에 단 1번도 오르지 않은 제주도민
이 허다한 것 처럼 시코쿠헨로의 단 1구간도 걷지 않았다는 이 일본인.
그래서 더 일본인이 아닌 지이상(祖父さん/할아버지)에게 셋타이를 하려 한 것?
욕탕에서 술을 마시는지 물었을 때 건강과 관련지어 물은 것이려니.... 했는데 그는 시원한
맥주 2캔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을 받았는데 어디론가 사라졌다.
관리 소홀을 자책해서 찾게 된다면 몇날이라도 하겠지만 부질없는 짓이니 유감이다.
편의점에서 저녁식사거리를 구입할 때 코일 모기향 1box도 샀다.
최고의 향을 풍기는 모기약(mosquito coils)이 있는데도.
37번 이와모토지 마을에서 앳된 여인으로부터 받은 오셋타이라 아끼고 싶으며 삭막함을
느낄 때만 향을 맡고 모기도 퇴치하는 일석이조에 사용하고 싶어서.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여느 후다쇼와 달리 환하게 불을 밝힌 곳이 많은 이시테지.
헨로상들이 참배하는 레이조인데다 문화재가 많은 사찰이며 유명 온천장이 이웃에 있는
관광 요지까지 삼위일체가 불러들이는 관광객으로 성시를 이루고 있다.
관광지의 특성답게 밤으로 이어지는 성시는 밤을 몰아내는 각종 프로그램으로 더욱 활성
적이 되고 그래서 관광지는 낮과 밤 없이 생동적이다.
허전한 분위기의 츠야도.
20평이 넘어 보이는 너른 방에 단 2명이 마음껏 자유를 구가하고 있는 형국이다.
나도 전등 불빛 가까운 곳에 아무렇게나 자리를 깔았다.
나를 포함해 총원 3명인 이 밤의 이 츠야도에서는 세상 룰(rule)이 모두 기능을 상실해도
아무 불상사도 없을 것 같은 밤이었다.
까미노라면 거리로도, 일시로도 프랑스 길 하나가 완전히 끝났을 만큼이다.
우여곡절에도 정상궤도 진입을 100% 완성했고 외형적 개념으로는 3분의 1일이 남았지만
구체적 난이도와 정신적 부담으로는 귀국 카운트다운(countdown)에 들어간 느낌이다.
어제(9월30일)와 오늘(10월 1일)사이에는 한 순간이 있을 뿐이지만 하루가 다르고, 하루에
불과하지만 1개월의 차가 있다.
그래서 시간(hour)과 날(day)과 주(week), 달(month)과 해(year)의 구분이 필요한가.
<계 속>
2열 종대로 걸어가고 있는 등교길의 저 아이들(위)의 모습이 어떤가.
자유 발랄한 우리 아이들과 달리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군국주의의 잔재라고 매도하겠는가?
사람도 차량도 모두 안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데도.
마츠야마시교육위원회가 다른 시군의 같은 기관에 비해 활동적인 것 같다.
문화재에 속하지 않아도 관내의 시코쿠레이조들에 대해 해설판을 세웠고, 명사들을 소개하는데 적극적이다.
하이쿠(俳句/5·7·5의 3句17音으로 되는 일본 短型詩)의 마을을 자처하며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위)를 소개하고 있다.
하이쿠를 비롯해서 일본의 근대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메이지시대의 대표적 문학가 중 하나라는데.
생애가 1867년~1902년 이라는 소개판에 따르면 35세에 요절한 사람이다.
애석한 마음에서 알아봤을 뿐인데 더욱 짠한 기분이 되었다.
1c 전에 불과한데 7년간이나 결핵을 앓다가 사망했을 만큼 의학이 원시적이었다는 사실이.
"평생 현역을 목표로 하지 않겠습니까"(生涯現役を目指しませんか)
이 작은 건물 안에서 이 두 여인이 일본이 당면한 가장 어려운 현안을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지만
이것이 일본만의 문제인가 ?
일제시대의 작품은 물론, 대한민국 정부에서 만든 것을 포함하여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는 기찻
길이 전국적인 현상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당초에는 애걸복걸하거나 온갖 줄을 동원해 끌어왔지만 지금은 이설(移設)을 관철하기 위해 갖은
짓을 다하고 있으니 선하심후하심?
그 때는 필요했고 지금은 장애물이라는 것.
한데, 일본은 어떤가.
비록 소도시지만 도심을 관통하는 철로의 건널목을 자주 횡단하는 헨로.(아래)
내가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인지 주민들의 어떤 요구도 없는 것이 되레 신기하게
느껴지는 일본땅이다.
불만이 어찌 없으랴만 이해 관계가 얽힐 때 선공후사(先公後私),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대승적인
일본인들의 애국주의는 인정할만 하지 않은가.
지나쳐서 제국주의에 빠져들고 이로 인해 자멸은 물론 남까지 곤경에 처하게 하는 것이 문제지.
다른 레이조들과 달리 깨끗하게 정리 정돈된 느낌을 주는 50번한타지(繁多寺)에서 주목되는 곳은 종루.
겐로쿠(元禄) 9년(1696)에 보운율사(法雲律師)가 사회의 각계 각층을 망라하여 빈부의 차이 없이 지원을
받아서 지었다는 특이한 종루다.
중국 고래의 '24효'를 소개하고 있는 오토기조시(御伽草子/ 室町시대에 성행한 童話風의 소설)의 삽화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24컷으로 된 이 종루의 특이한 천정회(鐘樓天井繪)다.
그림 해설서에 따르면 첫 주제는 24효자 중 하나인 순(舜帝).
선제(先帝)인 요(堯)가 제위(帝位)를 아들 아닌 순에게 선양(禪讓)한 까닭이 묘사되어있다.
순의 아버지는 편애하는 완고한 외고집이고 계모(생모는 死去)는 심성이 포악하고 우매하며 이복동생은
오만한 게으름뱅이로 4가족중 순만이 열성으로 농사를 지어 효도를 하고 있다.
순의 이같은 생활을 지켜본 코끼리가 밭을 갈아주고 새들은 풀을 뽑아주는 등 자연의 혜택을 받게 된다는
것이 이 그림의 메시지다.
유능한 농사꾼이 세상을 잘 다스리며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경세제민에 심혈을 다하는 위정자의 전형이 순(舜)이라는 것.
그림 중에는 24효자중 다른 하나인 요코(楊香)의 이야기도 있다.
산에 올랐다가 호식의 위기에 처한 부자(父子)의 이야기다.
내 목숨을 줄 테니 아버지만은 무사하게 해달라는 아들의 절절한 기원에 감동한 하늘이 호랑이로 하여금
꼬리를 내리고 떠나도록 했디는 것.
가톨릭교회의 회랑을 연상하게 하는 긴 회랑이 있는 51번이시테지(石手寺)다.(위1.2)
시코쿠88레이조의 51번째까지 중에서는 최초의.
(허망한 야욕임을 깨달았는가.
다아토아쿄에이켄(大東亞共榮圈) 운운하며 전쟁을 일으켰다가 크게 당한 후 호시탐탐, 다시 들썩거리고 있는
위정자들 때문에 불안한지 다른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위)
('천년학'이라는 표현대로 학은 천년 장수한다는 길조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사사키사다코(佐々木貞子)는 2살이었으며 피폭 10년인 12살때에는 급성
백혈병으로 진단되었다.
학 천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 믿고 질병 극복을 위해 학 접기를 계속했지만 천년은 9개월로 끝났고,
히로시마에는 '原爆の子の像'이 자리한 평화기념공원이 들어섰다.
이후, 천마리의 학은 비핵화의 상징이 되었단다.
다른 레이조들과 달리 왜 이시테지의 곳곳에만 무수한 천마리학이 모여 있을까/위)
(동남아 사원양식이라 88레이조와 조화되지 않는 이 건물은 버마(現미얀마)전전사추도비/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버마를 비롯하야 동남아의 고무생산국들을 점령한 후 천황의 이름으로 소학교의 모든
학생에게 승전 기념 고무공을 선물했다.
고무가 없는 일본으로서는 경사가 아닐 수 없지만 너무 이른 축배였다.
당시, 수술받고 간신히 사경을 벗어난 나는 반년간의 입원생활중에 그 공을 받았는데 그 때의 전사자들 추도비라니
묘한 감정이었다)
넓은 경내를 모든 계층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듯.
진보집단의 집회장소로 활용되고 있는가 하면 소학교학생들의 사생대회(?)가 진행중인 듯.(위)
다양한 전시회(현재는 석가님의 일생)장으로도 활용되고(아래)
츠야도(위)에 배낭을 맡기고 홀가분한 몸으로 걷기 1km안팎.
당도한 곳은 도고온천(道後/아래)
온천 매표소(위)
120년(2014년현재) 세월이 믿기지 않을, 잘 관리되고 있는 미려한 건물이다.(아래)
중앙부의 작은 지붕 위에 날아갈 자세로 서있는 백로 1마리.(위1.2.3)
도고온천 탄생설화의 주인공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