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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연기암, 화엄사상, 의상대사, 성삼재
지리산 서부 지역 지도
지리산하면 떠오를 만큼 크고 이름난 사찰.
노고단 자락이 흘러내리다 멈춘듯한 길상봉
그 아래 자리한 화엄사의 건축미가 일품이다.
특히 일주문에서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진입공간에 있는 건축물들
사찰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듯한 진입로의 느낌
사찰 경내 마당에 이르러 고개를 들어 보면
웅장한 지리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바라보이고
그 산세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당당한 건축물
다음으로 빠뜨릴 수 없는 화엄사의 성보는
효대(孝臺) 언덕에 있는 4사자 3층 석탑이다.
연기조사가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한 탑
불국사 다보탑과 함께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이형석탑
각황전 뒤뜰 백팔계단 위로 올라 송림에 둘러싸인 이 탑
천년 세월의 벽을 뛰어 넘은 4사자 3층 석탑
네 마리 사자가 다소곳이 앉아
머리 위에 탑을 이고 있는 형상
4 사자 얼굴에 새겨진 희노애락
사자는 우리나라에 없는 동물이다.
몸집이 크고 기운이 세어 '백수의 왕'
아시아에서 사자가 살 수 있는 곳은 인도
그러므로, 연기조사는 인도 승려
4사자 3층탑이 그 사실을 알려준다.
그로부터 백년후 지눌이 들여온 화엄경
.................화엄경...................
동아시아에서 화엄종을 대성시킨 법장(643~712)
60권본을 바탕으로 〈화엄경탐현기 華嚴經探玄記〉
4세기 중엽 중앙 아시아에서 그 완본이 이루어졌다.
많은 보살이.,가르침을 베푼다는 경전.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명을 만나 도를 추구
선불교와 신유학의 발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선불교 지눌의 선교합일에 결정적인 기여
일본에서도 화엄종은 크게 성행했는데,
동대사(東大寺) 대불(大佛)은 그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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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일대에는 여행할 관광 명소가 많다.
남해대교, 충렬사, 남해 금산 보리암, 해금강
외도, 거제 포로 수용소, 충무공 유적지 등등.
'2박 3일 승용차 여행지로서 환상적 코스.'
예전에 화엄사는 지리산 종주의 들머리 지점.
성삼재 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더욱 그랬다.
화엄사는 백제에서 호국불교의 목적으로 건립.
삼국통일후 통일신라 사찰이 된.,화엄사.
하여, 화엄사 창건연대를 신라 연호에 둔다.
그러나, 근본 뿌리는 백제 불교에 있는 사찰.
중국 왕조들은 불교부흥을 통해 통치권 강화.
백제 역시 왕실 통치권 강화를 위해 사찰 건립.
백제는 국력에 비해 무리할 만큼 화엄사를 건립.
.....................찾아가는 길...................................
노고단 산장 -1Km- 무넹기 -2.5Km- 집선대 -1Km- 중재 -4Km-
제3야영장 -1.5Km-화엄사( 총10Km, 하산 2 +1/3, 등반 3 +2/3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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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진주행 밤기차를 타고
다음날 새벽 구례구역에서 내려
역앞에서 국밥 한그릇 사먹는다.
역앞 택시를 타고 화엄사 입구에서 하차.
그곳부터 노고단을 향해 올라가는 새벽길.
화엄사를 지날 무렵이면 떠오르는 시 한수.
낙 화(落花) - 조지훈(趙芝薰) 作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선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 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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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는 지리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
544년(백제 성왕22년) 연기조사가 창건했다.
화엄경의 두글자를 본따 지은 사찰이 화엄사.
화엄경은 대승불교 사상의 근간이다.
석가모니불 本佛 = 비로자나불 變化身
화엄사상에서는 시간의 개념이 초월된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 서로 하나.
서로 원인이고 대립을 초월해 융합된 일즉일체(一卽一切),
즉 하나의 티끌 안에도 우주 시방세계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찰나도 영겁을 품는다는., 화엄경 사상.
하여, 비로자나불은 천엽(千葉) 연화좌에 백억(百億)의 석가
그 변화신(變化身)이 설법한다는 세계관을 부처님이라고 한다.
화엄사는 처음에 해회당과 대웅상적광전만 건축.
그후 643년(선덕여왕 12년) 자장율사에 의해 증축
875년(신라 헌강왕1년)에 도선국사가 또 다시 증축.
임진왜란 때 소실 1630년(인조 8년)에 벽암선사가 재건.
그로부터 7년만인 인조 14년(1636년)에 복원공사를 완공.
사찰 내에는 각황전을 비롯하여 국보 4점, 보물 5점,
천연기념물 1점, 지방문화재 2점 등과 20동 부속 건물
일주문 지나 약 30˚꺽어 북동쪽으로 들어가면 금강역사,
문수, 보현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에 다다르게 건물 배치
천왕문은 금강문과 달리 서쪽으로 빗겨 배치한 것이 특징.
천왕문을 지나 올라가면 보제루에 이르고
보제루 옆을 돌아 대웅전 가는 길이 독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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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대의 목조건물인 각황전
뛰어난 건축술과 조형적인 아름다움
그 앞에 서면 압도 당하는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석등이 있고,
대웅전 마당에는 5층 석탑이 좌우에 있다.
각황전 뒤 동백이 울창한 곳으로 올라가면
사자 네마리가 탑을 바치고 있는 4사자탑.
전설에 의하면 화엄사를 창건했던 연기스님이
어머니를 위해 이 탑과 석등을 조성했다고 한다.
화엄사 뒤로 보이는 웅장한 봉우리는 노고단이다.
지리산 도로를 따라 성삼재휴게소까지 올라가
거기에서 30/40분 걸어가면 노고단의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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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은 지리산 종주 들머리이자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다.
우리나라 10대 사찰, 화엄사(華嚴寺)
백제 성왕 22년(544년) 연기조사 창건.
선덕여왕 12년(643년) 자장율사가 증축.
그후 의상(義湘)이 화엄십찰(華嚴十刹)을 두며
화엄사는 많은 대중이 모이는 큰 사찰이 되었다.
화엄사는 정유재란(1597년) 때 왜병의 방화로 전소
이때 장육전과 화엄경 80권을 새긴 석경(石經)도 파괴.
30년간 폐허가 된 후, 벽암선사가 1630년에 복구하였고,
숙종 25년(1699년)에 계파선사가 각황전을 재건하였는데.
6.25 전란에 부속암자는 폐허로 변했는데 화엄사만 모면.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으뜸인 각황전
각황전 석등, 국보 35호 4사자 3층석탑
일본 벚꽃 원조 올벚나무(천연기념물 38호)
'조선 왕자' 李珖이 쓴 '智異山 華嚴寺'
화엄사-국수등 -중재- 코재-노고단 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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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벚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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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 경내에 있다.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175㎡ 1 그루. 정수령 310년. 지정사유 노거수.
올벚나무는 꽃이 매우 아름다운 장미과에 속하는 수종이다.
약 80년 전만 하더라도 2그루가 있었는데 1그루는 베어서 이용.
무기제조 원료를 공급하기 위해서 심은 것 중 살아 남은 것이다.
벚나무는 칼자루·마구 무기의 장식에 쓰이는 귀중한 자원.
이 나무를 피안앵(彼岸櫻)이라 하며 벽암선사가 심은 것이라
사홍목(四弘木)이라고도 하며 이 근처에는 여러 수종이 자란다.
서어나무, 동백나무, 팽나무, 갈참나무, 수리딸기 등의 수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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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선사가 불교의 사홍서원(四弘誓願)을 표시하려 심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세상의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한다."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20의 1 번지 '올벚나무'.
나무높이 15m, 가슴높이 줄기둘레 5m, 가지퍼짐 동쪽 4m,
서쪽 5m, 남쪽 7.5m, 북쪽 2m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
면적 175㎡ 수량 1그루. 정수령 310년.
화엄사 옆 시냇가 근처 암자 앞 바위틈.
올벚나무는 꽃이 매우 아름다운 장미과에 속하는 수종이다.
꽃은 산방꽃차례이며 잎보다 먼저 피고 열매는 6∼7월에 결실
현재 있는 올벚나무는 무기제조 원료공급을 위해 심은 것이다.
벚나무는 칼자루·마구 무기 장식에 쓰이는 귀중한 자원.
하여,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벚나무는 무기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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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벚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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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봉개동 산78-1 천연기념물 159호
<지정일 1964.01.31>인 그것은 '왕벚나무'.
올벚나무와 같은 이유로서 천연기념물 지정.
왕벚은 장미과에 속하는 나무로 일본의 국화이다.
꽃은 4월경에 잎보다 먼저 피는데 백색 또는 연홍색
높은 곳에서 자라는 산벚나무와 낮은 곳의 올벚나무
왕벚나무는 우리나라 제주도와 전북 대둔산이 원산지.
왕벚나무는 한 때 일본의 국화라 하여 베어지는 수난
일본에는 왕벚나무 자생지가 없고 우리나라 향토수종.
봉개동 왕벚나무는 제주시 동부산업도로변에 위치.
동서로 100m 쯤 떨어져, 15m 높이 두 그루가 자생.
왕벚나무는 우리나라가 원산지고 매우 희귀종이다.
왕벚나무는 앵두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 교목
수피가 평활하며 회갈색이고 어린가지에 털이 있다.
꽃은 4월에 피며 담홍색 꽃이 점점 흰색으로 변한다.
열매는 둥글고 지름이 7-8cm로서 6-7월에 검게 익는다.
1900년초 프랑스의 타케 신부가 한라산 왕벚나무를 채집
독일로 보내어 왕벚나무 원산지가 제주도로 판정 받았다.
왕벚나무는 해발 500m 쯤 되는 곳에 분포하는 것이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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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화인 왕벚나무는 제주도가 원산지이고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 벚나무는 그 사실을 입증.
무기를 만드는 목재는 가벼워야 하기에 왕벚이 적격.
왕벚은 일본의 세계정복의 야욕을 충족시켜 주는 나무.
일본은 단순하게 왕벚나무의 꽃을 즐긴 나라가 아니었다.
일본에는 우리나라의 향토수종 올벚나무가 한그루도 없다.
'화엄사의 올벚나무'와 '제주도 봉개동의 왕벚나무.'
일본 왕벚나무의 원산지가 우리나라 임을 알리는 나무.
일본의 세계정복 야욕을 우리에게 항상 일깨워주는 나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두 벚나무는 우리나라의 자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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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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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계곡 = 화엄사 - 국수등 - 중재 - 코재.
불교문화 최고 탐승지이자 지리산 종주 시발점
성삼재 도로 개통 후 조용한 산행 코스로 변모.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9km는 4시간 도보 거리.
거의 일자로 뻗은 계곡은 굴곡이 심하지 않아,
코재(무넹기고개) 근처부터 숨가쁜 돌밭 비탈길.
'코가 닿을 듯 급경사라., 코재!!!'
중재에서 집선대 거쳐 코재 오르는 돌밭길.
소가 달구지 끌고 오르듯 거세게 품는 콧김
80리터 배낭메고 돌밭길 오르다 보면 힘들다.
중재를 지나면 멀어졌던 계곡이 가까워진다.
이곳부터 투박한 돌길이 열리며, 가팔라진다.
등산로 오른편 자그마한 폭포 집선대는., 샘터.
집선대에서 눈썹바위에 이르는 2㎞의 돌밭길.
그 탓에 코재는 '덜거덕골'이란 또 다른 이름.
앞 사람 궁둥이가 코에 걸린다 하여 '궁둥이 골.
'코재 = 덜거덕골 = 궁둥이골.'
이 힘든 길을 오르면 전망 좋은 휴식처 눈썹바위.
볼일보는 등산객 뒷모습에 눈쌀이 찌푸려지는 곳.
눈썹바위에서 좀 더 비탈길을 오르면 무넹기 고개.
경사 급해 힘든 너덜지대라.. 집선대.
코가 땅에 닿을 듯 가팔라 힘든.. 코재.
무넹기는 노고단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
원래, 심원계곡으로 흐르게 되어 있었다.
개울 물줄기를 화엄사계곡으로 넘겨 무넹기
무넹기 넘어 성삼재 도로와 마주치는 곳
그 길 따라 걸으면 노고단 산장이 나온다.
요즘, 천은사 - 성삼재 - 달궁 도로가 개설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오르는 사람이 더 많다.
화엄사계곡 등산로는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실제로 화엄사 입구에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코재 가파른 비탈지나 무넹기 고개에 올라서면
성삼재에서 노고단가는 길을 만나면 허탈해진다.
'성삼재까지 노고단까지 40분 도보거리.'
성삼재 주차장에 주차하고 산책하는 젊은 여성들.
미니스커트 차림에 양산 든 모습도 마주치게 된다.
화엄사부터 묵직한 배낭을 멘 등산객과 비교가 된다.
어느 산이든 걸어 올라야 느낄 수 있는 산행의 묘미.
화엄사계곡 코스 독특한 경관은 한번쯤 찾아 볼만 하다.
이 코스의 산행기점은 화엄사 집단시설지구가 있는 황전리.
구례읍에서는 군내 버스로 10분 만에 닿는 위치.
황전리 지구는 지리산에서 가장 정비가 잘 된 곳.
상가, 식당, 콘도, 민박업소, 야영장이 조성돼 있다.
매표소 안쪽에는 지리산 유일의 프라자 호텔도 있다.
원래, 여관촌은 사찰 입구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아래.
현재는 '시의 동산'이라고 하여 시비들이 세워져 있다.
여관촌은 매표소 바깥쪽의 집단시설지구로 끌어내고,
예전에 없던 호텔과 콘도 건물은 매표소 안쪽에 신축.
그 뜻 이해 어렵지만 산행은 황전리 버스종점에서 시작.
화엄사 절 옆에서 운영하는 반야다원(061-782-0096)
계곡 따라 왼쪽으로 반듯하게 자연석이 깔린 등산로
취사 야영 금지 조치로 폐쇄된 야영장 지나 된 비탈.
국수등 지나 중재에 이를 즈음 가파른 계단길
이 계단을 올라서야 노고단 능선이 좀 보인다.
그러나 이도 잠시, 다시 숲의 터널로 접어든다.
중재에서 멀지않은 집선대폭포 지나 코재 급경사
몇 번 쉬며 오르면 성삼재에서 노고단 가는 도로
능선과 만나는 곳에 목조로 지어진.. 넓은 전망대.
화엄사주차장→(2.0km)→화엄사→(2.0km)→
연기암사거리→(0.5km)→참샘터→(1.0km)→
국수등→(2.0km)→눈썹바위→(0.2km)→코재→
(1.0km)→노고단대피소→(0.36km)→노고단고개
연기암.
화엄사 일주문 앞에서 오른쪽 화엄교 지나
4km 쯤 오르면, 노고단 연기암이 나타난다.
멀리 아련하게 흐르는 섬진강이 보이는 암자.
해저물고 구례읍 불빛들이 보석처럼 빛날때
밤하늘에도 별빛이 쏟아져 내릴듯 반짝인다.
연기암 풍경소리에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른다.
'연기암을 창건한 인도의 승려.. 연기조사.'
연기조사가 지리산에 처음 자리잡은 곳이 연기암.
그후 화엄사, 연곡사, 대원사, 귀신사 등을 창건.
지리산 곳곳에 사찰을 열어 화엄사상을 널리 폈다.
연기조사는 문수보살 화엄사상을 널리 편 인도 승려.
당시 국제 도시 경주의 황룡사에서 화엄경을 설했다.
그러던 어느날, 성모산 지리산에서 본 문수보살 모습.
예전에 꿈속에서 만났던 그 후덕한 부인의 모습이었다.
결국 연기조사는 그 부인 형상을 본곳에 암자를 짓고
고향의 어머니를 모셔와 지리산에 자리잡은 곳이 연기암.
그후 연기조사는 문수보살을 원불로 삼아 화엄경을 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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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래 삼천 제자가 가르침을 이어 꽃핀 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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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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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 5년(544) 연기조사가 창건한 화엄사.
연기조사는 범승(梵僧), 즉 인도 스님이라고만 기록
그에 관한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알 도리가 없다.
연기암에 인연을 세웠다고 하여 <연기(緣起)>로 쓰지만
<연기(烟氣)> 혹은 <연기(烟起)>라고 쓴 기록도 없지 않다.
화엄사를 창건할 때 해회당과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지었다.
연기조사가 창건 당시 화엄사는 소규모 절 집이었을듯.
화엄사 창건 100년 후 신라 선덕여왕 11년(642) 크게 증축.
자장율사가 연기조사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사사자탑과 함께 석등을 세운 것이 창건 당시 기록의 전부.
연기조사는 왜 신라 경주에서 백제 구례로 왔을까?
문수보살께 화엄을 널리 펴겠다는 원을 세운 때문.
하여, 멀리 타국으로 건너와 경주 황룡사에서 설법.
그러던 어느날 문득 비몽사몽간 한 모자를 만났는데,
후덕해 보이는 여인의 손을 잡고 온 귀여운 동자 왈.
"본디 스님께서 제 앞에서 세운 원(願)은
널리 화엄의 가르침을 펴는 것이었는데,
어찌하여 새 인연처를 찾지 않으십니까?"
그말을 남기고 난 후 홀연히 사라진 두 모자.
연기조사는 새 인연처를 찾아 지리산에 입산.
아름다운 지리산 경치에 취해 있던 연기조사
멀리 보이는 봉우리들이 한 부인의 모습과 같아
자세히 보니, 예전에 황룡사에서 만난 부인 모습.
그때서야 연기조사는 그곳이 새 인연처임을 깨닫고
어머니를 모셔와 그 부인의 형상을 보았던 산등성이에
조그만 암자를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날 연기암이다.
그후 직접 친견했던 지리산 문수보살을 원불로 삼아,
널리 화엄일승지도를 펴며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
연곡사, 대원사, 귀신사 등 지리산 곳곳에 사찰을 연다.
화엄사상[華嚴思想]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은 의상대사로부터 시작되었다.
당나라에 가서 법장과 함께 지엄 밑에서 화엄을 공부
귀국후 화엄교학을 널리 펴서 화엄종의 초조가 되었다.
화엄사상의 정수가 담긴 법계도(法界圖)를 지었고
독창적 법계이론으로 화엄사상(화엄종)을 널리 폈다.
고려시대에는 균여(均如) 의천(義天) 등.
고려 중기 지눌(知訥)은 화엄사상을 연구
선종과 교학을 함께 닦는 정혜쌍수를 주장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모든 종파가 통합
화엄교학은 쇠퇴했으나 유정(사명대사)
성총(性聰) 상언(尙彦) 유일(有一) 등이
꾸준히 화엄학을 연구하여 명맥을 이었다.
하여, 불교의 3요소 = 염불. 참선. 화엄사상.
대승경전 화엄경에 근거하여 성립된 불교사상.
대표적인 것으로 중국 화엄종(華嚴宗)의 교학.
화엄종의 종파적 기초를 닦은 사람은 두순(杜順)
교학적 기초를 마련한 사람은 지엄(智儼)이며,
최종 집대성한 사람은 현수대사 법장(法藏).
화엄종의 교판(敎判)은 오교십종판(五敎十宗判).
.........오교........
① 소승교(小乘敎):부파불교,
② 대승시교(大乘始敎) 공(空)사상
법상종(法相宗)의 유식(唯識)사상,
③ 대승종교(大乘終敎) 천태종(天台宗),
④ 돈교(頓敎):〈유마경 維摩經〉의 교설,
⑤ 원교(圓敎):〈화엄경〉및 화엄종의 사상
여기에서 원교는 앞의 4교를 모두 포섭하고
동시에 가장 궁극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
십종
① 아법구유종(我法俱有宗):독자부(犢子部)의 사상,
② 법유아무종(法有我無宗):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사상,
③ 법무거래종(法無去來宗):대중부(大衆部)의 사상,
④ 현통가실종(現通假實宗):설가부(說假部)의 사상,
⑤ 속망진실종(俗妄眞實宗):설출세부(說出世部)의 사상,
⑥ 제법단명종(諸法但名宗):일설부(一說部)의 사상,
⑦ 일체개공종(一切皆空宗):오교의 대승시교,
⑧ 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오교의 대승종교,
⑨ 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오교의 돈교,
⑩ 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오교의 원교 .
앞의 5종은 모두 오교의 소승교에 속한다.
십종판은 법상종의 팔종판(八宗判)을 개정
...화엄종 중심사상..
삼성동이의(三性同異義)·
연기인문육의법(緣起因門六義法)·
십현연기무애법(十玄緣起無法)·
육상원융의(六相圓融義).
법장은 서까래와 집의 비유로 이것을 설명.
집은 총상이며, 서까래 등의 각 부분은 별상
서까래가 서로 합쳐 집을 형성하고 것은 동상
그것들이 서로 다른 것은., 이상.
서로 다른 서까래가 집이 이루는 것은 성상
이들이 각각 자신의 모습을 지닌 것은 괴상.
이상의 연기사상과 연관된.. 성기(性起)사상
그것은 현상계 그대로 참된 성품의 드러남
그러므로 현상 외 진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절대적으로 긍정함을 뜻한다.
의상대사.
신라에 불교가 공식 전래된 지 1백 여년 당시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불교사상가이자 학자
大·小乘, 性·相, 頓·漸 대립적인 교의를 융회
불교의 종파의식을 떠나 뭇 경전을 통합한, 원효
원효와 같은 시대 고승으로 화엄경을 전파한, 의상.
오늘날까지 원효와 의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승
의상은 진평왕 47년(625) 진골 귀족의 후예로 출생.
스물에 출가해 섭론(攝論), 지론(地論)등 교학 탐구
출가 사찰 황복사(皇福寺)는 황실과 관계가 깊은 사찰
현장이 인도에서 들여온 신유식(新唯識)을 배우고자
교유를 가진 원효와 함께 26세인 650년 중국 유학길
육로로 중국에 들어 가려다가 고구려 국경에서 좌절
그대신 구구려 열반의 대가 보덕(普德)에게
대승교학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된, 원효 의상.
의상은 37세에 661년 해로를 통해 당나라 유학.
662년 의상은 장안(長安) 남방의 종남산(終南山)에서
당대 교학을 집대성한 지엄 문하에서 화엄경을 배웠다.
644년(선덕여왕 13) 황복사에서 승려가 된 의상
661년(문무왕 1) 당에서 화엄종 연구, 671년 귀국.
676년(문무왕 16) 왕명에 따라 부석사(浮石寺)를 창건.
화엄종을 강론, 해동(海東)화엄종 창시자., 의상.
전국에 10여 화엄종 사찰 건립, 화엄 교종을 확립
문하에 오진(悟眞) 지통(知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 '의상십철(義湘十哲)’10대 고승이 배출된다.
고려 숙종 때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 시호를 받았다.
저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勝法界圖) 백화도량발원문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입법계품초기 소아미타경의기 등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는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 개조(開祖).
성은 김씨이고, 한신(韓信)의 아들이다.
의상 이전 우리나라에 화엄사상이 있었지만,
화엄사상이 크게 유포된 것은 의상에서 비롯
중악 팔공산 미리사 (美里寺),
남악 지리산 화엄사 (華嚴寺),
강주 가야산 해인사 (海印寺),
웅주 가야현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등을 창건
의상대사(625~702)는 원효대사와 함께
신라때 가장 존경 받았던 유명한 고승.
의상은 귀국 후 관세음보살님이 머문다는
양양 낙산사 앞 바닷가에서 목욕 재계하고
절벽에 있는 굴 입구를 향해 7일 동안 기도.
7일째 새벽, 의상대사 방석을 물 위에 뛰우자
불법 수호 신장들이 의상대사를 굴 속으로 인도
관세음 보살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수정염주 한 벌만 의상에게 하사 하였다
의상대사가 수정염주를 받아 굴 밖으로 나오려는데
동해 용이 나타나 여의보주 한개를 바치는 것이었다
정성이 부족해 관세음보살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듯.
이렇게 생각한 의상대사는 다시 7일을 더 기도한 뒤에
굴 안으로 들어가 3일 동안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려 기도
그러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의상대사를 향해 말씀
"그대가 서있는 위 산 꼭대기에
대나무가 두 그루 솟아 있을 것.
그 곳에다가 절을 짓도록 하라."
이 절이 바로 관음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지금의 강원도 양양 낙산사(落山寺)이다
의상대사는 낙산사를 창건한 후
관세음보살님 소상(塑像)을 조성
법당에 모셨는데 살아 움직이는 듯
그러자 대나무는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뒤, 원효가 관음진신을 친견하려 낙산사 방문
처음 원효대사가 남쪽 동구 밖에 이르렀을 때였다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대사는 농담삼아 그 여인에게 벼를 달라고 하자
그 여인도 흉년이 들어서 쭉정이 밖에는 없다고 답변
원효는 그곳을 지나, 낙산사 인근 시냇가에 이르렀다
다리 밑에서 한여인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원효는 그 여인에게 물 한 모금을 청하였다
그런데 그 여인은 빨래헹군 물을 떠 주었다
원효는 그물을 버리고 위에서
다시 맑은 물을 떠서 마셨다
그 때 푸른 새가 지저귀었다.
"제호(훌륭한 음료수)를 버리다니,
화상은 관음보살 친견은 단념하시오,"
원효대사는 깜짝 놀라서 뒤돌아다보니
새는 간 곳이 없고 여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새가 울던 나무아래 벗겨진 신발 한짝
원효대사는 이상하다고 여기며 낙산사에 도착
법당으로 들어가 관세음보살님께 합장하고 절
관음보살상 좌대 아래에 있는 또 한짝의 신발
원효는 비로소 앞서 만났던 두여인이
관세음보살님의 화현임을 알게 되었다
하여, 새가 울던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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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화엄종을 처음 도입한 신라 의상대사(625-702)
왕족으로 경주 황복사에 출가해 20세에 불문에 귀의
진덕여왕 4년(650년) 26세 때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
처음 당 유학길은 고구려 요동반도 국경 루트
고구려군 검문을 받아 첩자혐의로 체포되어 고생
이들은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지 않고 재차 시도
의상이 36세 되던 해에 원효와 함께 서해안 당항성 도착.
남양(경기도 화성군 해안 추정)에서 무역선을 기다렸다.
의상이 귀국한 시기는 46세가 되던 해이고
처음 세운 사찰이 양양 낙산사, 영주 부석사.
신라 삼국통일 완수하던 해에 당나라 유학길.
백제가 멸망하며 서해 바닷길이 열렸으나
아직까지 고구려는 건재하였던 때였으므로
뱃길을 택하여 중국 산동반도 등주로 떠났다.
산동반도 황해 연안은 신라방이 있었고
의상이 잠시 머문 곳이 적산 법화원이다.
경도 근처 고산사에는 아름다운 신라 여인상
이 여인상은 당나라 처녀 선묘라고 보고 있으며,
이 절에는 화엄연기라는 불교서적이 전해오는데
이 책에 의상과 선묘에 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의상이 원효와 함께 도착한 서해안 당주계(당시 당항성)
배를 기다리다가 산중에서 노숙하며 비를 만난 두 사람.
어둠 속에서 민가를 찾지 못하고 움집에서 밤을 지냈다.
의상과 원효는 갈증을 느껴
가까이 고인 물을 달게 마셨다.
먼 여행길에 지쳐 불편을 잊고 단잠을 잔 뒤
이튿날 자신들이 잠잔 자리에 놓여있는 해골
그들이 하룻밤을 보낸 곳은 피폐해진 무덤 속
의상은 해골 물을 마신후 더러움을 느꼈으나
원효는 태연작약 오히려 환희에 젖어 있었다.
이튿날도 비가 멎지않자 무덤 속에서 보냈다.
원효는 이틀동안 무덤 속에서 크게 깨달았다.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이라고 갈파
"마음이 있어야 온갖 사물과 형상을 인식하게 되고
마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도 없어지게 된다"는 뜻.
"나는 깨달았으니 경주로 돌아가겠다." - 원효.
한편, 의상은 홀로 험한 뱃길로 중국을 향했다.
699년 산동반도 등주 불교신자 집에 도착한 의상.
아름다운 처녀 선묘가 의상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의상이 적산에 있는 법화원으로 옮겨 머무는 동안
아침 저녁으로 탁발을 나설 때 선묘가 멀리서 흠모
선묘가 마음을 전하려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던 의상.
얼마 후 의상은 이곳에서 당 수도 장안으로 떠났으며
종남산 지엄 문하에서 10년간 삼장(경 율 논)을 배웠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려 등주 항구에 다시 나타나자
선묘는 손수 지은 법복을 전해주고자 바닷가로 갔으나
안타깝게도 의상을 태운 배는 항구를 벗어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그리워하는 의상에게
법복이 전달되도록 선묘가 마음 속으로 빌자
그 법복은 놀랍게도 의상의 품안으로 날아갔다.
선묘는 독실한 불교신도로써 의상을 그리워하면서도
의상이 득도하고 무사히 귀국하도록 부처님에게 기원.
의상이 떠나자 함께 따라갈 수 없게된 선묘 낭자
스스로 용이 되기를 기원하며 황해에 몸을 던졌다.
하늘도 감읍해 용이 된 선묘는 의상이 탄 배를 호위
이 사실을 모르고 신라까지 도달한 의상
나중에서야 선묘의 보살핌을 깨닫게 된다.
의상이 귀국 후 처음 세운 절은 양양 낙산사
그 다음 태백산 근처 봉황산 아래 지은 부석사.
문무왕 10년(676년)에 이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으나
이미 5백여명의 다른 종파의 불승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의상은 마음 속으로 부처님에게 어려움을 호소
이때 하늘에서 나타난 선묘낭자 용이 돌로 변해
3일 동안 반대하던 불승들을 향해 내리칠듯 위협
그들은 두려워 달아나고 굴복해 절을 짓는데 협조
선묘의 넋이 의상을 보호하고 불법을 지키는 수호용
선묘가 땅에 내려와 돌로 변한 곳에 지은 사찰 부석사
현재 부석사에 부석, 선묘각, 선묘정, 석룡.
절 동쪽에 선묘정 서쪽에 기우제처 식사용정
부석사 무량수전 아래 묻힌 석룡은 절의 수호신
아미타불 불상 아래에 용머리가 묻혀있고
절 마당 석등 아래 꼬리가 묻혀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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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게」 - 의상대사.
한티끌 속에 시방세계 담겼어라
법의 성품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나니
모든 법이 움직임이 없어 본래부터 고요하다
이름 없고 모양도 없어 온갖 경계 끊겼으니
깨달은 지혜로만 알 뿐 다른 경계 아니로다
참된 성품 깊고 깊어 지극히 미묘하나
자기 성품 지키잖고 인연따라 이루더라
하나 중에 일체 있고 일체 중에 하나 있으니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
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세계 담겨있고
일체의 티끌 속도 또한 다시 그러해라
끝이 없는 무량 겁이 곧 일념이요
일념이 곧 끝이 없는 겁이어라
구세 십세가 서로서로 섞였으되
잡란 없이 따로따로 이뤘어라
처음 발심 하온 때가 정각을 이룬 때요
생사와 열반이 서로 서로 함께 했고
이와 사가 그윽히 조화하여 분별할 것 없으니
열 부처님 보현보살 큰 사람의 경계더라
부처님의 해인 삼매 그 가운데
불가사의 무진 법문 마음대로 드러내며
보배의 비로 생명을 이롭게 한 일 허공에 가득 차니
중생들이 그릇 따라 갖은 이익 얻음이라
이 까닭에 수행자들이 마음자리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망상을 쉬지 않곤 얻을 수 없네
인연 짓지 않는 좋은 방편으로 마음대로 잡아 쓰니
마음자리에 돌아가매 분수 따라 양식 얻네
이 다라니 무진 법문 끝이 없는 보배로써
온 법계를 장엄하여 보배궁전 이루고서
영원토록 법의 중도 자리에 편히 앉아
억만 겁에 부동함을 이름하여 부처라 하느니라.
성삼재
예전에 지리산종주 들머리는 화엄사 입구였다.
요즘, 지리산종주 들머리로서 각광받는.,성삼재.
노고단에서 가까운 성삼재까지 도로가 개통된 때문
서울역 밤기차를 타고 새벽녁 구례구역에서 하차.
택시로 성삼재휴게소까지 간 다음 노고단을 오른다.
'성삼재 휴계소에서 노고단까지는 30~40분 도보거리.'
성삼재는 백두대간 2 구간 들머리이자 역사적인 유적지.
성삼재 도로가 개통된 이후 가장 많은 등산객이 찾는 곳.
성삼재 도로가 지리산 야생동물 통로까지 차단한 것이 흠.
'성삼재 도로는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을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갖게되는 공통적인 의문점.
이 도로가 백두대간 1구간 끝 부분부터 동강낸 탓.
하여,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도로이기 때문.
이 도로는 건설당시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납득하기 어려워진 사연,
1952년 빨치산 대몰살 현장이었던 지리산 일대.
대성골, 거림골, 빗점골, 의신부락등은 잿더미.
오늘날까지도 대성골에서는 인골들이 목격된다.
당시 빨치산 토벌 명목으로 헤일 수 없는 죽음들.
죄없는 양민들도 학살된 현대사의 비극적인 역사.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으로 만든 도로
'지리산 서북능선을 주능선과 뚝 떼어놓는 잘못.'
노고단 턱밑을 깎아 만든 성삼재 861번 지방도로
거기에 주능선마저 갈라 놓으려던 벽소령 작전도로
관광도로로 포장되지 않고 남아있게 되어 대행이다.
그러나, 정령치 도로에 짤려진 만목대 아래 서북능선.
'마치, '지리산의 섬'과 같이 느껴지는.. 서북능선.'
백두대간 1구간(천왕봉~ 성삼재) 날머리 성삼재.
백두대간 2구간 (성삼재~여원재) 들머리 성삼재
백두대간 2구간은 지리산 태극종주 코스 중 1/3.
성삼재-작은고리봉 -묘봉치 -만목대 -정령치 -큰고리봉
- 고기 삼거리 - 덕치리 도치마을 -가재마을 -대간석 정자
-도치샘 - 수정봉 - 입망치 - 주지사 부근 - 여원재 -
<도상거리 19.Km, 실거리 20.6Km, 소요 시간 10 시간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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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 진한, 변한이 부족국가를 형성하고 있던 삼한시대
마한과 진한 간 전쟁이 일어나 진한에 쫓기던 마한의 왕.
신하들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신해 오랫동안 피난생활 중.
마한의 왕은 피난처에 도성을 쌓고 마련한 궁전이 달궁.
뱀사골 반선에서 도계 사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달궁은 지리산의 깊은 협곡에 분지 형태인 천혜의 요새이다.
마한 왕은 달궁 서쪽 10리 밖 정장군을 배치한 정령치.
달궁의 동쪽 20리 밖에 황장군을 배치하였다는, 황령치.
달궁의 남쪽 20리밖에 성이 다른 세 장군을 배치한 성삼재.
북쪽 30리밖 8명 장군을 배치
진한군을 방어한 곳이 팔랑치.
<성삼재>는 성이 각각 다른 마한의 3 장군이 지킨 고개마루.
정령치는 정장군이 지킨 고개, 황령치는 황장군이 지킨 고개,
팔랑치는 8명의 젊은 장수가 지킨 고개를 말한 것이라고 하는데
현재 달궁에는 이름만 있을 뿐
옛 궁터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성삼재에서 정령치까지는 옛 마한의 자취.
마한의 역사적인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코스.
성삼재 - 3Km -작은 고리봉-1Km-묘봉치-2Km-만목대-4Km-정령치
총 9 Km, 어느 방향에서 출발하든
걷는데 소요 시간은 3시간 40분 쯤.
노고단 및 지리산 종주 들머리이자 백두대간 2 구간 출발점.
성삼재-묘봉치-만복대-정령치-가재마을-수정봉-여원재 코스
성삼재 도로 개통 이후로 노고단까지 예전보다 접근이 편리한 점.
그러나, 백두대간 1구간과 2구간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허리가 끊겼다.
그로 인해, 야생동물의 통로가 끊기고
먹이사슬 고리가 끊겨, 환경에 악영향.
만복대 아래에서 정령치 도로에 끊겨
동떨어진 섬처럼 변해버린, 서북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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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온천지구-성삼재-노고단 5㎞
구례군에서 케이블카 설치를 검토 중.
환경부가 반대하자 구례군은 3㎞ 구간으로 축소 수정 안
구례군 산동면 골프장 건설과 맛물려 섬진강 오염 가능성.
2004. 6.18 지리산 순환도로 개통에 이어,
관광시설이 들어서면 지리산이 몸살할 듯.
지리산 순환도로에 차에 치어죽은 야생동물 시신들.
야생동물 서식처가 좁아지면 근친교배로 멸종의 위기.
먹이사슬이 끊긴 야생동물들에게도 생태적으로 악영향.
야생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통로복원 및 대책이 시급.
지리산 야생동물들은 먹이찾아 목숨걸고 도로를 횡단.
이미 수많은 등산로와 도로에 의해 산산조각 난 지리산.
야생동물이 마음놓고 살 만한 보호구역
자연환경을 위해 반드시 조성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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