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 논문이란게 어떤건지 잘 모르지만
영화텍스트를 연구자의 콘텍스트에서 독해해내는
지난한 과정, 고진감래식 글쓰기 효과죠.
때론 엄청 재촉당하며 때론 흥미있어서 나름대로 쓰죠.
일년에 두편, 어떤 땐 세편정도.
작년말 세미나서 발표하고 후에 영상문화학회지에 실린 논문입니다.
오늘 다른 글쓰다 찾았죠.
좀 긴데...억지로 읽지 마시고
이런 글쓰며 지나레인 앓는다는걸 느껴보시라고 올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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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의 국가이미지:
국민동원적 애국심에서 개인과 국가의 충돌로
“진정코 거꾸로 뒤집혀서 있는 세계에서, 참된 것은
허위적인 것의 한계이다”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유지나(영화평론가,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
국가론과 영화사 담론, 그 접점을 찾아서
스크린쿼터제로부터 이라크 파병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설정된 콘텍스트는 국익과 미국이며 그 관계에서 해결방식이 나온다. 이렇게 국익이란 말이 일상의 화두로 작용하는 시기를 살아내면서, 국가와 영화의 관계, 혹은 그 둘이 중층적으로 작동하는 메커니즘과 그 결과로 파생되는 의미작용에 대해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국익을 위해 이라크 파병이 도덕적으로나 세계시민사회 질서상 문제가 있어도 결정되는 지금 이곳, 한국영화산업이 지난 4년간 시장점유율 45%대를 웃돌아 50%대까지 이르자 이쯤해서 국익을 위해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제를 양보하라-일수를 줄이라-는 주문. 이 양자는 다른 영역에서 일어나는 전혀 다른 주제이지만 국익이란 콘텍스트에 공통적으로 설정된다. 국익이란 선험적 주체는 한 분야나 개인의 의사를 앞서는 것으로 국민교육헌장을 비롯한 수많은 국민교육프로그램을 통해 배운 우리들은 국익은 개인, 영화보다 강력한 선험적 주체인 국가의 이익이며 우리 모두와 모든 영역을 관장하는 질서라고 그저 믿어버리는 ‘국가-신화’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국익론 강조 시대에 살면서, 과연 국가란 일반개념, 혹은 실체, 구체적 적용으로서 한국이란 국가와 한국영화의 관계맺음과 연동 메커니즘은 어떤 것인지 분석하고 성찰하는 것이 이 연구의 목표이다.
영화와 국가담론이 마주치는 접점에서 그것을 연동해서 돌리는 메카니즘의 상호 유기적 관계를 점검하는 담론은 영화학 연구의 중요한 한 부분을 구성해왔다. 당장이라도 ‘세계영화사’란 제목을 붙인 영화책을 집어 목차와 구성을 보면 그 점이 곧 드러난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보는 잭 씨 엘리스(Jack C. Ellis)의 <세계영화사A History of Film>는 첫 두 장에서 영화 탄생 초기 현상을 유럽 여러 지역과 미국을 넘나들며 묘사한다. 이어 ‘미국영화의 기원’이란 3장부터 시작하여 이후 스칸디나비아영화, 독일영화, 소련영화, 프랑스영화, 이탈리아영화....등으로 국가별 시기별 이란 기준을 근거로 장들을 구성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나온 영화사책들 세권으로 구성된 가스통 오스트라트(Gaston Haustrate)의 <Le Guide du Cinema>(1986, Syros)는 2차세계대전 종전인 1945년과 68혁명여파로서의 기성질서 파괴를 주목하며 1968년을 세계영화사를 세 가지로 시대구분을 한다. 그러나 시기란 거시적 틀내부로 들어가면 역시 각 시기 주목할만한 영화현상과 영화운동을 국가별이라는 구획선 속에서 논의한다.(이 프랑스 영화사책은 앵글로색슨 공용어 영어권과 차별화를 위해서인지 미국중심-더 정확하게는 할리우드영화산업 중심-의 영화사를 배제하고 영화와 사회의 관계 및 영화사회사나 영화정치사적 경향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보여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틀에서 영화매체의 발달 시기에 따라 대륙별 문화권 이란 경계를 적용하는 한편 대체로 국가중심의 구획선을 준거틀로서 세계 영화사를 정리해나간다.)
연구자의 제한된 경험으로 점검해본 다른 나라, 다른 언어로 쓰여진 영화사책들에서도 이런 사정은 공유된다. 따라서 한 세기 넘게 인간들이 만들고 즐기고 분석하고 연구하고 들여다 본 영화들이란 대체로 어떤 특정 시기, 어떤 특정 지역-국가란 시공간적 틀에서 묶여지고 의미작용화 되고 평가되어 왔고, 그것이 객관적 구획선이란 점에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만든다. 혁신과 이데올로기로서 영화사를 검토한 고다르식 영화사책 고다르의 <Histoire(s) du cinema>(1998, Gallimard)는 제목에서부터 하나 혹은 여러개의 역사들이란 중의적인 뜻으로 영화사를 부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여러 가지 역사들은 결국 하나의 역사이며, 영화사 역시 단 하나인데, 그건 운명적 아름다움, 절대적인 가치로서의 돈, 새로운 흐름, 세계통제(욕망)같은 것들로 집약된다고 설파하고 입증한다. 이런 고다르식 영화사는 국가란 모호한 허위의식을 경계하면서 영화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데 받쳐진다. 이런 시각이 아주 드물게 예외적으로 존재하긴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예외적이다.
한 세기를 넘게 살아남아온 영화(들)에 관한 담론이란 방대한 영역은 이런 영화사담론의 준거틀에 의하여 결국 우리에게 특정국가의 특정 영화운동 혹은 경향, 특성을 고정화시키는 각인효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어떤 국가엔 그 국가를 대표하거나 그것을 표상하는 국민정체성 같은 국민-국가영화가 있으리란 전제를 자명하게 신화화 시킨다. 이를테면 구소비에트의 몽타주영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영화, 프랑스의 누벨바그영화들, 미국-할리우드의 장르영화들..과 같은 식으로....그러나 정작 한국영화사란 관점에서 한국영화들을 들여다보면 한국영화란 이러저러한 영화들의 묶음체이다. 지금 잘나가는 조폭코미디 영화들이나 한 웅큼도 안되는 블록버스터영화들이 한국영화산업 르네상스의 공신이라고 해서 그것들이 한국의 국민영화나 국가영화라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과거엔 멜로드라마가 또 한때는 액션영화들이, 그런가하면 사회풍자풍속 코미디들이 서로 물고 물리며 주류영화들로 열악한 대로라도 영화계와 한국영화라는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차원의 개념을 만들어 온 것이다.
흔히 저널리즘에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문구를 지어내기 위해 특정영화나 특정감독, 스타를 두고 국민영화, 국민감독, 국민배우, 란 수식어를 붙이긴 하지만 이것 역시 매우 단기적인 관점의 홍보화 집중 효과를 노린 저널리즘의 고안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런 현상들은 영화(들)과 국가이미지를 상징적으로 연동하여 작동시키는 메커니즘이 강력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국가-애국심’ 확대/강화 기제로서의 ‘영화-영화현상’
이 연구의 목적은 영화와 국가를 동시에 투사시켜 한국영화가 표상하는 국가이미지를 드러내보고 성찰하는 것이다. 그런 작업을 위해서 우선 ‘국가’란 개념적 실체, 그 적용으로서 한국이란 국가담론의 실체를 가능한 선까지 규명해볼 필요가 있다.
국가란 개념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검토된 바 있다. 영화학에서 집단 무의식화 길들이기용 효과를 분석하는데 유효한 알튀세르적인 의미에서 국가는 억압적 국가기구(RSA)로 설명된다. 군대, 경찰, 감옥처럼 정부가 관장하는 억압적 국가기구는 물론 학교, 교회, 영화를 포함한 대중매체 역시 이데올로기적으로 국가를 강화하는 것으로 알튀세르는 설명한다. 특히 이 후자는 개인의 지적인 성장, 생활의 질 향상과 같은 매우 개인화된 가치로 보이지만 실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경연장이기에 덜 비판적으로 수용되는 혐의를 가질 수 있다.
한편 그람시의 헤게모니론 속에 등장하는 국가는 보다 이상적인 시민사회로서의 국가와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제시한다. 권위주의 국가가 경제력과 물리적 폭력을 기반으로 유지되는 반면, 인류가 지향해야할 국가란 피지배자의 자발적 동의가 지적, 도덕적, 문화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평등사상과 인권에 기초한 공동체를 지향한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국가와 헤게모니론은 다음 책들에서 강력하게 드러난다. <감옥에서 보낸 편지>(린 로너핀편, 2000, 민음사)와 <그림시와 민족국가>(리차드 벨라미, 1996, 사회문화연구).
그람시가 수차례 강조하는 도덕적 문화적인 지도력으로 유지되는 국가란 전지국적 미국식 자본주의화가 밀어붙이는 세계화에 저항하기 위해 국수적이고 민족주의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저항논리로서의 문화다양성을 진흥시키고 유지하는 주권국가론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런 서구 학자의 국가에 대한 논의를 일반론으로 한국이란 구체적 대상을 설정하고 해독해내는 국가론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왜냐하면 서구의 국가는 시민권의 탄생과 함께 근대국가론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만 고대국가에 준하는 왕조들의 부침이후 일본의 강압적 식민지, 분단과 미군정기 신탁통치를 거쳐 군사 독재 권력국가로부터 지금의 민주화된 국가를 이루게 된 한국사회의 복잡다단한 변화과정을 그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게다가 식민지시기에 일기 시작한 민족국가독립론과 분단시대의 민족 통합이란 절대절명의 과제로서의 민족통일 국가론은 민족과 국가를 동일선상에서 혼용하며 형성되왔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구체적인 사실 여부보다 환상적인 가체체계로 기능한다 할지라도 한반도내의 국가는 주로 한민족국가란 전제에서 국가를 확고한 공동체의 근저로 설정해온 정서를 완전히 무시하고 국가를 도입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런 문맥에서 지금 이시기, 한반도 분단 남쪽, 코리아로 국제사회에 등록된 대한민국에서 상식적으로 공론화되는 ‘국가’ 혹은 국가로서의 대한민국(한국)이 작동하는 의미작용을 점검해보자.
우리에게 국가는 개인을 넘어서는, 즉 개인보다 중요한 선험적 집단주체로 설정되고 작동되어왔다. 특히 식민지 경험을 거치면서 한반도에서 국가는 나라, 민족, 자치정부와 동일시되어 국가중심주의를 이 곳에 사는 개인 각자에게 내면화된 가치로 세뇌화시켜 왔다.(권혁범, “우리안의 국가주의-국가주의 문화와 인권”, 2001, 제주 인권회의 발제문.)
'안보없이 국가 없고, 국가없이 국민없다’란 최근의 표어는 식민지경험을 되살리면서 국가가 있어야 국민이 있다는 국가우선주의를 개인에게 주입시킨다. 60년대 이후 쿠데타 군사정부가 독재정권을 유지하면서 반공을 국시로 내걸었을 때, 용공내지 친공은 국가를 망하게 하는 일이며, 대한민국은 반공국가로서 그 정체성이 성립되는 시절을 거쳐오기도 했다.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 학교에서의 애국조회와 군사훈련, 극장에서 보여지던 대한뉴스는 대한민국 국민의 일상을 국가주의속의 구성원으로서 국민의식과 국민문화를 공기처럼 퍼뜨렸다.
군사독재를 청산하고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전부에 이르는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된 현 상황에서도 반공국가주의의 여파는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수퍼파워 강국이 된 미국이 강력히 개입하는 북한 핵폭탄 소지사태와 한반도전쟁 가능론이 나도는 위기의 시대, 국제정치 세력판 속에서 좌지우지되는 한반도문제와 대한민국의 운명을 다각도의 국제정치판도 속에서 보기보다는 과거 군사독재정부 시절 이식된 반공 안보론에 근거하여 국가정체성과 국익을 찾으려는 세력은 미군부대 감축 및 재배치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 군사독재시절 이어진 민주화운동은 마침내 국가와 정부, 민족과 나라에 대한 차별화된 생각을 가능하게 했다. 80년대 말 이후 이루어진 일련의 민주화과정 속에서 과거 권위주의 독재정권 시절에 반국가사범으로 처벌받거나 처형된 이들을 명예회복시키고 그 케이스들을 재론하여 그 과정과 결과를 객관적으로 밝히는 일들이 개인 인권문제와 사상과 표현의 자유, 이에 대치될 수 있는 정부와 국가간의 긴장을 드러내고 있다.
국가에 관한 이런 분열적인 의식, 전근대성을 포함한 근대를 사는 이 시기 이 사회의 모습은 권혁범이 지적한대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측면 서구제국주의의 식민화를 거쳐 개발독재정부를 거치며 체제상 근대국가를 이룬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국가들은 유사한 맥락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가진 국가관, 국민의식으로 식민화된 부작용을 앓고 있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우리사회에서 국민적 정체성은 다양한 요소들의 모순적인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서구 근대국가가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전제로 국가를 성립시키는 반면, 우리사회는 이러한 서구적 의미에서의 근대적 원리가 적용되는 것처럼 이론상 보이지만 실제로는 개인보다 국가 우선, 국가주의가 내면화된 국민으로서 개인인권을 억압하는 식민지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전근대성으로서의 국가개념과 국민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권혁범, “‘우리’는 누구인가?-‘국민’적 정체성의 문화를 넘어서”, <녹두평론>, 2000, 창간호. )
여기서 말하는 국민이란 신민동원주의적인 식민지시절을 거쳐 국민동원주의 군사개발독재에 강고하게 전수된 정치문화의 산물로 개인의 정체성을 압도하는 단일적이고 패권적인 집단 주체로 작동한다.
이렇듯 ‘국가(state 혹은 nation)’, ‘나라(country)’, ‘민족(nation 혹은 ethnic)’, ‘정부(government)’가 혼용되어 대체로 국가로서 대한민국을 설명하고 그 정체성을 포괄하는 국가에 대한 논의는 따라잡을수록 그 근저를 파고들수록 모호해진다. 특히 대한민구처럼 단일민족신화에 근거하여 민족국가론을 수용하는 집단 관습이 있는 경우에는 민족과 국가의 구분, 나라와 국가의 구분, 심지어 변하는 정부와 보다 장기적인 국가의 구분조차 그 경계선이 모호해져버린다. 이런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논의를 위해 국가에 관한 정의를 어느 선까지 확보할 필요가 있다. 국가가 영토와 주권과 국민으로 구성된다는 상식적 논의 로부터 보다 섬세한 크리스토퍼 피어슨의 국가의 범주를 참조로 할만하다. 피어슨에 따르면 국가의 범주란 폭력적 수단으로 독점적 통제권, 영토권, 주권, 입헌성, 비인격적 권력, 공공, 관료제,권위/정당성,시민권과 징세등이다. (크리스토퍼 피어슨, <근대국가의 이해>, (일신사,1997), 23쪽.)
이런 논지에 따르면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해방 후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서 박정희 군사독재를 거쳐 현재 참여정부에 이르는 여러 개의 공화국과 정부체제하의 시스템이다. 그러나 이런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가진 근대국가적인 대한민국에서 국가이미지는 관념적으로 ‘나라’라는 개념이 함축하는 민족공동체로서 먼 과거 한반도에 성립되었던 왕조지배 시스템을 일종의 선조 국가로써 수용하고 있다.
국가영화와 한국영화의 관계
국가영화(national cinema)논쟁에서는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한 국가나 민족에 대한 개념을 차용하여 역사적인 구성 집단이 공유하는 무의식의 얼룩이 번져 나온 구석을 국가영화의 정체성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일정한 문양과 패턴을 지닌 얼룩이기보다 민족과 정체성 개념의 복수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복수의 얼룩들을 구성하는 동인을 국가적 에이전시(national agency)로 파악하는 견해는 흥미롭다. 특정 국가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이 공통적인 형식과 의식을 담아낼 것이라는 전제는 역사적 산물로서의 공동체가 공유하는 속성에 대한 인정이다. 그것은 당연히 역사의 변화를 유연하게 인정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유연한 정체성의 논의로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 프랑스 영화, 호주 영화, 인도 영화, 홍콩 영화, 중국 영화라고 할 때, 그중 어떤 것도 그 민족의 국가적 영토 내에서만 존재해온 전통예술의 현대적 화신을 담아내는 것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인도 영화를 보자. 신분제도의 억압으로 인한 멜로드라마적인 파토스성은 인도의 전통적 카스트제도와 인도 및 여러 나라에서 공유되는 로망스 서사의 결합이며, 흥겹고 때로는 구슬픈 춤과 노래의 만발은 할리우드의 뮤지컬 장르와 인도의 전통적 연희의 결합이다. 스웨덴의 여배우 리브 울만이 할리우드 영화의 정체성에 대해 비웃은 대목을 국가영화논쟁과 연관시켜 새겨보면 시사적인 대복이 있다. “할리우드 영화가 어디 미국 것인가? 그건 유럽이 만들어준 것이다”라는 그녀의 지적은 독일 바이마르의 뛰어난 영화인들, 전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영화인들, 스웨덴, 덴마크 등 북구 영화인들의 할리우드 유입으로 오늘날의 할리우드가 강력한 상업영화를 지구촌에 다국적 세계영화로 전파하게 된 양상을 증명한다. 즉 유럽 여러 나라의 성공적인 내러티브와 촬영방식, 편집술, 심지어는 적대국이었던 소련의 몽타주까지 받아들여 이룩한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영화라기보다 유럽 여러 나라 영화들의 잡식성 아류라는 것이 리브 울만의 언급에 함축되어 있다.
한국영화 역시 그 순수성에 혐의를 들 근거는 있다. 한국영화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의 자본과 테크놀로지 그리고 일본 영화의 장르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시작되었다. 물론 그 가운데 민족자본으로 한국인이 모여 만든 주체적 영화도 존재한 흔적이 있긴 하다. 이후 군사독재의 당근과 채찍 정책, 할리우드와 일본 영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든 것이 한국 영화의 과거였다.
빛과 그림자를 통과하며 시대의 상처와 억압을 돈벌이로만 활용한 영화들, 심지어 홍콩영화로 위장하고 개봉한 한국영화들로부터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해 탐구하는 -‘국민감독’으로 일컬어지는-임권택 감독의 영화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거부할 수 없는 한국산 영화들이다.(임권택 감독은 1998년 동국대학 연출론 특강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남들은 날보고 한국적 영화를 만든다고 하지만 자신은 아직도 한국적 영화가 문지 모르겠다. 그저 할리우드 흉내를 내지도 않을뿐더러 낼 생각도 없는 것 정도에서 평생 그저 이 땅의 사람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 뿐이다”라고. 그건 단순한 겸손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스스로 왜곡된 시대에 국책영화성 영화를 만들고 외화쿼터용 좋은 영화를 만들던 감독이 마침내 자기 자신의 고민을 담아낸 영화들을 만들기까지, ‘이 곳에서 영화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우리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국가, 국민, 그 속에서의 감독이란 자신을 둘러싼 정체성에 대한 고뇌의 한 자락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바로 이런 영화적 사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한국영화 정체성은 하나의 다발보다는 여러 가지 얼룩을 그려내는 복수성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책영화가 가장 자명하게 드러났던 70년대 국가 이미지강화에 받쳐진 영화들과 대중의 자발적 합의에 의해 (분단)국가를 배경으로 삼는 영화들을 통과하며 국가와 영화를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성찰해 보고자 한다.
국가, 국민동원 혹은 애국심-70년대 사극의 경우
역사물 흔히 사극으로 불리우는 장르는 국가와 영화를 가장 근접 조우시킨다. 물론 모든 영화들, 심지어 개인사를 다룬 미시정치학적 영역에 놓인 대중영화라 할지라도 개인과 시스템/집단의 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대전제하에서 집단의 역사를 어떤 식으로건 분절시키며 사유해낸다. 그것은 시간의 거리를 갖고 보면 더욱 자명하게 드러난다. 바로 그런 이유로 영화는 당대 상업시스템의 산물이지만 집단의식의 역사성을 갖는 실체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서도 허구로서 사극은 비록 역사학이 대상으로 삼는 공식역사에 반해 반역사 혹은 대안역사로 분리되더라도 흥미로운 집단의 역사적 기억을 재구성하고 당대 정서로 재해석해내는 점에서 흥미로운 연구자료이다. 러시아 역사의 대가인 마르크 페로는 소비에트혁명기를 조명하는데 있어 러시아영화들을 자료체로 삼아 스탈린 이데올로기를 규명해낸 업적을 이루었다. (참고: 마르크 페로의 <역사와 영화>(까치, 1999)를 보라)
베네딕트 앤더슨의 지적처럼 사회가 위기나 갈등에 직면했을 때, 그 공동체의 상상적 정체성의 확립이 매우 중요하며,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란 허구장치가 국가권력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자연스럽게 실현하는 기제로 작동하게 된다. 한국영화의 암흑기나 쇠퇴기로 불리우는 70년대 사극은 60년대에 비해 양적으로 저조하게 생산된다. 1973년 이후 유신헌법과 그에 준한 영화검열의 강화와 반공영화 새마을영화로 대별되는 국책성 영화는 영화인들에게 정책의 혜택-그 핵심은 돈방석으로 통하는 외화수입 쿼터이다-을 얻도록 자발적 동의하에 이루어졌고, 그 틀에서 정권의 이데올로기 에이젠시로서 사극이 제작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60년대식 사극의 성향과 장르 컨벤션을 변화시키며 애국영웅담으로 체질개선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60년대부터 흥행사극을 제작하던 신상옥/신필름은 10월 유신의 해인 1973년 이전의 궁중 암투와 남녀상열지사 및 한맺힌 여인들의 처절한 이야기를 화려하게 보여주던 극 스타일 (<폭군연산>(1962), <철종과 복녀>(1963), <내시>(1968),<대원군>(1968),<내시, 속편>(1969), <이조괴담>(1970)등)에서 애국영웅담으로 급격한 변화를 보여준다. 그 시작은 <삼일천하>(1973)이다.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당의 핵심인 김옥균(신영균분)의 개혁운동 과정과 그의 애국심을 드러내는 이 내러티브의 초점이 맞춰진다. 비록 그와 그가 주도한 개화당의 근대화 혁명이 삼일천하에 그치는 좌절담으로 그려지지만, 영화는 무력한 조선의 근대화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매진하고 고뇌하는 애국자 김옥균의 영웅화에 받쳐진다. 10월 유신이 혼란에 빠진 국가를 새롭게 개혁하는 제2의 박정희식 혁명이고 애국적 결단이자 지도자로서 그의 애국적 결단이란 것으로 당시 이루어지던 국민교육을 상기한다면, 이 영화의 소재와 의도 내러티브 욕망의 방향성이 추동하는 바는 국민동원적 기능으로 작동함을 보여준다. 이런 목적성과 의도는 기존 사극, 혹은 신상옥표 사극이 가졌던 상업장르 영화로서의 흥미-권력자와 그의 여인들과의 관계를 선정적으로 그려내는 것등...-를 제거하는 부작용을 가져오며, 대중적인 지지를 얻는데 실패한다.
임권택 감독의 <임진란과 계월향>(1977)은 당시 에로틱한 이미지를 표상하는 정윤희를 주인공 계월향역으로 캐스팅하여 대중성(?)을 추구하지만, 내러티브는 그녀의 몸을 조금 보여주는 미끼를 사용하면서 그녀의 애국심에 방점을 찍는다.
제목대로 시대적 배경은 임진왜란, 계월향은 군사인 김경서(신성일분)의 연인이다. 왜군과의 싸움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건진 김경서는 숲속으로 도피한다. 그는 숲에서 살아남은 군사들을 모아 평양수복의 기회를 노리며 훈련을 한다. 조선군사의 대패로 그가 죽은줄 알고 있던 계월향은 왜군의 총사령관인 소서행장의 첩으로 들어가지만 그것은 여인과 조국의 한을 불려는 전략, 즉 그를 암살해 복수하려는 계략이다. 그러던 중 김경서의 생존이 비밀리에 계월향에게 알려지고, 김경서는 그녀의 모자란 오빠노릇을 하며 왜군의 심중에 숨어들고 그녀는 소서행장의 침실을 알려준다. 계월향이 스스로 하려던 복수는 이제 김경서의 지시와 그가 해내는 전략으로 바뀐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막판의 대결이다. 김경서의 게획은 빗나가 결국 계월향은 소서를 죽이는데 온몸을 던지게 되고 칼에 맞아 장렬한 죽음을 맞는다. 바로 이 부분에서 그녀의 애국적 죽음을 찬양하는 웅장한 목소리의 내래이션이 오프 사운드로 내러티브를 정리하고 메시지를 정확히 정박시킨다. ‘임진란은 한 여인의 순결과 행복을 불태웠다. 그녀는 국난 극복의 커다란 힘이었으며, 그녀는 여장부이다’라는 식으로... 전통적으로 사적영역에 갇힌 여성은 남성보다 공적영역에 해당하는 국가주의나 애국심에 덜 동원되는 선입견을 전복시키면서 이 영화는 ‘하물며 이 순결하고 사랑밖에 모르는 여자도 국난에 임해 자신을 희생하며 나라를 지킨다’라는 성차별코드를 통해 국민동원적 애국심 찬양론을 편다.
장일호가 연출한 70년대 후반 세편의 사극들-<오계>(1976), <세종대왕>(1978), <호국팔만대장경>(1978)-은 위 두 편보다 더욱 명시적으로 국민동원성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한다. <호국팔만대장경>은 나라를 빼앗긴 시절의 국난극복담이란 점에서 영화가 만들어진 유신시대의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투사한 텍스트로 보인다.당시 영화로는대규모인력이 동원된 몹씬이 다른 사극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도수가 높게 등장하는 대작이다. (70년대 특히 유신헌법이후 박정희 군사독재시절의 영화들 중 대작은 대체로 국책성영화로 국가-정부-적 차원의 협력을 받은 결과 완성된 것들이다.)
몽고군의 침입으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고려의 고종에게 살레탑은 항복을 강요하지만 고종은 이를 거부한다.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고종에게 한 신하(김희라분)는 팔만대장경을 제작해 흩어지고 불안한 민심을 하나로 묶어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간절한 청을 지속적으로 올린다. 이후 고종의 명령을 수행하는 김희라의 집행하에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팔만대장경을 간행하는 역사적인 구국적 일에 동원되고-참여하고(?)- 결국 이것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이 내러티브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한 글자씩 목판에 새겨넣는 고되고 긴 작업에 혼신을 받치는 사람들의 이미지는 아주 길게 이어진다. 심지어 목각작업중 건강이 상하고 힘이 딸린 노인은 숨을 멈추지만 바로 그 자리에 그의 아들이 이어서 이 작업을 이어받는다. 대를 이은 애국심은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목가 하나씩을 머리에 이고 나르는 장면들도 목숨을 건 애국심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씨퀀스를 구성한다. 이들의 작업과 다른 곳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몽고군의 지속적인 침략을 주로 몹씬으로 담아내 교차편집하는 부분은 이 영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또한 16년에 걸친 팔만대장경 제작 작업은 고려인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사실화하기위해 다큐적인 순서나열과 역사적인 정보를 덧붙이기도 한다. 결국 고려인의 이 애국적 결집은 불심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클라이맥스를 이끌어낸다. 경판을 진주에서 강화도로 옮겨가는 고려인의 행진은 몽고군에 의해 차단되고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한다. 이때 고려인을 차단하고 처단하려는 몽고군의 눈에 사찰을 지키는 사천대왕상이 어지럽게 환영으로 나타나 그의 시야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이 판타지 장면의 반복은 결국 애국심이 침략군을 이겨내는 기적으로 국민동원 애국의 기적적 능력을 입증한다. 그것은 모순되게도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의 제국주의 일본이 구사했던 황국신민동원령과 자유당정부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란 이승만식 리더쉽 명제를 이어받으면서 유신으로 연장되는 군사독재정권의 국민 동원식 애국심 독려 프로그램으로 기능한다.
분단시대/국가와 개인의 갈등-한국영화 르네상스 블록버스터의 경우
광복이후 한국영화가 가장 억압된 시기가 70년대 특히 유신이후 군사독재 말기까지라면 90년대 블록버스터와 등급제 실시로 인한 소재자유화가 구가하는 현시기는 한국영화 르네상스, 혹은 50년대 말로부터 60년대 제1 황금기에 이어 제2의 황금기로 불리워진다.
70년대 억압적인 군사독재정권이 어느 때보다 애국심에 초점을 맞춘 대형사극을 생산해낸 반면 9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된 정권하에서 한국영화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불리우는 대작 규모로 그간 제대로 못 다룬 분단문제를 내러티브전면에 드러내게 된다. 첩보액션 장르영화로 한국영화관객동원 신기록 행진에 단초를 제공한 <쉬리>로부터 사회문제영화내지는 심리추리극으로 풀어간 <공동경비구역 JSA>이 그것이다.
<쉬리>의 디노테이션 차원의 내러티브는 비밀첩보원의 특수공작 임무와 그 파국을 다룬다. 이런 디노테이션 차원의 내러티브는 남측 특수부대원과 이중신분을 가진 북측 특수부대 저격수의 가면에 쌓인 정체성에 기반 한 러브스토리라는 코노테이션 차원의 내러티브와 얽히면서 복잡해지고 문제를 발생시킨다.
첩보물에서 첩보원의 신분위장은 컨벤션화된 설정이다. 특수요원이 아닌 척 가장함으로써 가장 성공적으로 특수요원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이런 특수업무 조직의 특성은 ‘자기자신이 아닐 때 가장 자신답다’는 정체성의 모순을 임무완수라는 궁극적 목적 속에서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기만적인 행위를 요하는 첩보조직의 존재근거는 국가안위, 즉 애국심이 개인의 사적인 삶보다 우선되는 국가중심주의에 의해 정당화된다.
이 파국적 드라마에서 유중원(한석규)는 남한정부의 안보를, 박무영(최민식)과 이방희(김윤진)는 북한 정부의 통일공작을 수행하는 에이젠시이다. 이들의 임무와 목적은 오로지 국익에 받쳐지고, 그것은 이들이 담보하는 애국심으로 확보된다. 허나 남과 북의 국익은 서로 상충한다. 따라서 이들의 공격과 방어로 이루어지는 첩보전은 일종의 제로섬게임이다. 어느쪽이건 죽어야만 끝나는 게임. 아니 그 이상으로 네거티브 섬이다. 막판에 죽은 이방희나 박무영보다 살아남은 유중원이 이겼다고 보기에는 속은 사랑에 대한 상처, 배신감으로만은 환원되지 않는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분단시대 히드라론이 여전히 얼룩으로 남겨진다. 그건 국가와 개인의 갈등, 개인의 욕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국가와 애국심에 대한 절망감이기도 하다.
북측 특수요원 이방희는 남한 여자 이명현으로 위장하여 남측 특수요원 유중원에게 접근하고 이 둘은 사랑에 빠진다. 서로 적대적이어야 할 남과 북의 특수요원이 사랑에 빠지는 척 하는 건 한쪽의 매우 꾀바른 전술이지만 실제로 그/그녀가 사랑에 빠진다면 이건 최대의 딜레마이다. 바로 이 지점은 국가와 개인, 애국심과 이성애가 갈등을 벌이며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참혹한 드라마가 발생한다. 물론 특수요원이기에 임무에 충실하려면 개인적 가치인 사랑보다 애국심, 사적인 삶보다 임무완성을 택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억압된 개인적 삶, 사랑에의 욕망은 파국적 결말을 예고한다.
러브스토리 속에선 유중원을 사랑한 가짜 이명현 속에 오히려 진실이 깃들어 있고, 그를 노린 진짜 이방희는 사랑으로 인해 흔들리는 진실을 감춘 거짓이라는 모순이 전화응답기와 눈물 젖은 얼굴 속에 펼쳐진다. 가짜 이명현은 분명 원본을 모사한 시뮬라크르지만 그것 자체가 진짜 이방희의 본질이라는 모순된 진실. 결말에서 유중원은 그것을 분단이 낳은 히드라-몸 하나에 전혀 다른 인격을 가진 머리가 6개인 여신-로 받아들인다.
이방희의 이중 신분 속에 파국을 내재하고 추동되는 서사는 객관성을 가장한 남측의 시선으로 이방희/이명현을 보여준다. 따라서 가면을 쓰고 벌이는 그녀의 사랑, 또 다른 가면/위장으로 그녀가 벌이는 테러 저격수 역할은 다중 가면성을 강화한다. 여기서 그녀의 이중성은 두 개의 ‘국가-정부’ 하나의 민족이란 이중적이고 분열적인 분단시대를 함축한다.
그러나 이방희-이명희의 이중성만을 부각시키는 서사전략에 휘말리지 않고 이 둘의 관계를 생각하면 유중원 역시 가면을 쓴 존재이다. 가까운 주변사람에게도 자신의 신분을 노출할 수 없는 특수요원인 그는 곧 결혼을 앞둔 사랑하는 여자 이명현에게 자신의 직업을 숨긴다. 이런 가면쓰기는 임무수행상, 즉 애국적인 행위이기에 정당화된다.
그리하여 이 둘의 이중관계-연인이자 적대자-는 특수임무란 신분, 애국적 임무이기에 상대방의 가짜 신분을 알고도 모른 척 하거나(이명현/이방희처럼), 정말 모르고 속아넘어가야만(유중원의 경우) 성립하는 국가들의 경합장에서 벌어지는 개인의 가면무도회를 만들어낸다. 이 가면쓰기 게임에서 유중원을 의심하고 또 그에게 의심을 받다가 가장 먼저 진실을 알게 된 유중원의 파트너 이장길(송강호)은 죽음을 당한다. 너무 많이 아는 자에 대한 처벌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거나 마지막 순간까지 진실을 모르는 것이 오히려 살아남는데 유리하다. 이명현/이방희는 그가 첩보요원임을 알고 속아주는 척하면서 의도적으로 접근하지만 진짜 사랑을 느낀다. 그녀는 “중원씨와 같이 있던 일년간이 내 삶의 전부”라고 전화응답기 속에 고백한다. 이어서 그녀는 자신은 이방희도 아니고 이명현도 아니었고 “그냥 나였다”라는 표현을 통해 이름 없는 주체인 나/제 3의 정체성, 아마도 남한국가에도 북한국가에도 속하지 못한 무국적자, 개인을 자신의 본모습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개인은 생존할 공간이 없다. 적어도 이 한반도란 공간 내에서는 그렇다.
이런 기이한 다중 주체의 모순과 혼란은 애국과 국익을 지상목표로 삼는 조직의 임무로 야기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개인을 통제하는 조직의 질서 속에서도 끝내 개인의 욕망과 양심을 죽이지 못하고 드러낸 ‘진정한 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위해 사는 ‘나’가 아니며, 인민해방 반제국주의 통일 임무원으로서의 ‘나’가 아닌 무국적자로서 부유하는 나를 드러내는 좌절의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눈물 젖은 총을 겨누며 연인에게 총을 맞아 죽은 이방희/이명현은 임무수행상 진짜로 사랑에 빠진 것, 즉 애국적 집단의 한구성원이 아니라 개인욕망을 느끼고 표현한 비애국적 개인 주체를 인정한 것에 대한 죄과를 받은 것처럼 보인다.
이명현의 가면 속에 이방희가 있었다는 점은 유중원에겐 절망이다. 그는 이명현의 수족관-도청기가 내장된 물고기들-을 소개한 장본인이다. 그래서 그는 조직을 파탄에 빠트린 엄청난 실수로서 직무유기를 범했다. 그러나 그 이방희 역시 가면을 벗기면 그 속에 자신이 만난 건 이방희가 아니라 이명현이었다고 항변하며 히드라론을 편다. 그런 문맥에서 그녀는 분단현실의 희생양이라고 유중원이 얼버무린다. 그러나 그는 정말 이명현의 가면 속 이방희, 또 그 이방희란 가면 속에 감춰진 사랑했던 여자(이명현/이방희의 말대로 ‘그냥 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가 제시하는 분단현실의 문맥에서 던져진 히드라론은 이 꼬인 내러티브를 단순하게 풀기엔 매혹적이지만 그것은 ‘그냥 나’일수가 없어서 가면을 쓸 수밖에 없는 이들에겐 문제이 해결보다는 더 큰 질곡, 개인의 억압과 숨막힘으로 확보되는 전근대적 단일 집단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기만적 인간 존재, 개인아닌 집단체의 일부를 강요하고 정당할뿐이다.
한편 <공동경비구역 JSA>는 분단상황 자체를 지리적으로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관한 것이다. 북한병사 두 명 사살, 총상을 입은 또 한 명의 북한병사, 그리고 용의자인 남한병사는 총상을 당했다. 남한 병사의 기습테러라는 북측의 주장과 납치되었던 남한병사가 탈출과정에 벌인 영웅적 행위였다, 라는 남측의 주장. 그리고 살아남은 두 병사의 전혀 다른 주장, 거짓말 탐지기를 언급하는 순간 입안에 총알을 박아 자살하는 증인에 불과한 남한병사. 그리고 현장에서 사라진 총알 하나가 관건이다.
남과 북 모두를 거부한 반공포로 아버지, 중립국 스위스 국적 어머니를 둔 소피 장소령(이영애)가 이 미스테리를 푸는 관찰자, 중개자로 나온다. 그녀는 국가가 개인보다 우선인 분단시대 두개의 국가-정부로부터 자유로운 제3국 시민이기에 이 미스테리, 개인들의 애증과 애국심이 분열적으로 중층화된 이 미국에 빠진 사건을 풀 객관성을 담보한 채로 내러티브에 던져진다. 내러티브는 양쪽 모두 조직의 질서를 위반한 네 병사의 훈훈한 인간관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중심이 옮겨간다. 그들이 어떻게 만났는지, 또 어떻게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는 금지된 장난을 얼마나 즐겁게 벌였는지가 플래쉬백으로 보여진다. 네 병사는 조직의 질서와 명령 그리고 개인적 욕망 사이에서 낮과 밤을 나누어 이중적으로 행동하면서 사적인 인간관계를 만들어간다.
이수혁(이병현)은 지뢰에서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 북한군 오경필 중사(송강호)를 형이라고 부르며 따른다. 이수혁의 부하인 남성식(김태우)는 이수혁에게 인도되어 북측 초소에 놀러갔다가 북한군 정우진(신하균)을 동생처럼 귀여워하면서 우정을 쌓게 된다.
오경필은 비인간적인 냉혹함을 보여주는 상위로부터 정우진을 보호한다. 정우진은 상사가 금지한 개를 초소에서 기르는가하면 오경필을 형처럼 따르고 인간적으로 존경한다. 이수혁과 남성식의 관계도 일반적인 군 조직의 상하관계치고는 매우 인간적으로 그려진다.
겉으로는 조직의 질서에 맹종하지만 속으로는 그 조직 속에서 사적관계를 따뜻하게 풀어 가는 이들이기에 조직이 금지한 선을 넘어가는 것이 내러티브상 그런대로 설득력을 보여준다. 이들은 여러 밤을 같이 보내며 아이들처럼 닭싸움도 하고 한 입에 초코파이를 먹는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들의 만남은 금지된 것, 즉 반 조직적인 일을 즐기는 아슬아슬함으로 인해 더욱 흥미진진해 보인다. 남한병사끼리 달밤에 닭싸움을 하고, 음악을 듣고, 구두를 닦아주고, 초코파이를 나누어 먹는다면 이런 흥미로움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만나서 같이 노는 순간만은 남한병사, 북한병사, 분단현실, 분단국가, 두개의 적대적인 정부의 병사란 사실을 가면처럼 쉽게 벗어 던진다. 그런 국가질서로부터 해방된 나 자신, <쉬리>에서 이명헌이 말하는 ‘그냥 나’란 국가억압을 해체한 개인이 된다. 그런 개인은 좋은 사람을 만나 형, 아우하며 지낼 수 있는 좋은 인간이며,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나 자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들 중 누구도 이런 금지된 사귐을 반국가적 행위리고 생각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선을 넘어 친하게 지내는 것은 개인의 윤리적 차원에서 전혀 거리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가 부여한 질서가 개인의 윤리 도덕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은 감시의 눈이 없을 때는 무력해지는 거짓진실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국가 시스템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는 걸릴지도 모른다는 점 때문에 걱정이 되지만 아무도 모르게만 한다면 개인-‘그냥 나’-에 대한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쾌감도 있다. 그러나 이 쾌감은 공동경비구역 양쪽에 근무하는 이들에겐 정부-국가 차원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위법이다. 자기 정체성을 군번으로 대신하는 군대라는 조직, 국익으로써의 국가안보를 담보하는 군대조직의 규칙을 어겨야만 이들의 사귐과 ‘그냥 나’를 드러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국민동원적 애국적 존재로서가 아닌 ‘그냥 나’로서 만들어간 개인적 진실을 끝까지 은폐한다. 살아남은 각자는 엇갈린 진술을 강변하는 양측의 대립적 입장으로 인해 영웅 취급을 받을 정도로 국가를 속이고 개인적 비밀을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심지어 오경필은 자신의 상사의 생명보다는 남한 병사들의 생명을 더 보호하는 반국가적인 시나리오를 몸소 짜서 끝까지 실천한다.
이렇게 국가의 심문을 잘 속여낸 이들이지만 개인적 진실이 조금씩 밝혀지는 순간 국가기구의 처벌 이전에 스스로를 처벌하는 자살을 택한다. 거짓말 탐지기란 말과 함께 입 속에 총알을 박는 남성식, 정우진을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역시 입 속에 총알을 박는 이수혁. 결국 두 남한병사는 개인적 진실이 폭로되는 순간 스스로를 처벌한다.
가장 가까이 진실에 접근한 소피중령은 결국 또 다른 개인적 진실(아버지가 반공포로였던 북한군)의 폭로와 함께 의문의 살인사건의 진실을 덮는다. 이건 분명 진실게임이지만 거기 다가가면 모순되게도 추방당하거나 자살로 끝나는 패자가 되는 게임이다. 초코파이를 한 입에 넣고 먹는 오경필만이 살아남고 그가 살리려 한 두 남한병사는 입 속에 총알을 박는다. 오경필의 살림의 시나리오는 죽음의 시나리오가 되고, ‘그냥 나’를 잠시 드러내고 서로 그러함으로써 개인적 인간적 관계를 만들어 냈던 이들은 개인에 우선하는 국가의 감시망, 여전히 전근대적 비개인적 주체를 선험적으로 강요하는 분단국가에서 개인됨이란 죽음과 같은 절망적 현실임을 드러낸다.
가장 억압적인 시대의 영화들 속에서 국민동원적인 애국심이 강조되고, 보다 자유로운 시대에 국가의 개인억압에 대한 질곡과 갈등이 드라마의 핵심이 되는 것은 언뜻 보면 역설적이지만 좀더 들여다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업영화의 내러티브와 이미지 기호는 국가주도 지배담론의 가이드 라인과의 긴장관계에서 설정된다. 현실의 억압과 욕망, 저항과 이탈, 상상해낸 현실과 존재하는 현실 사이의 긴장감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영화는 비동시성으로서의 동시성으로 존재하는 국가와 개인의 갈등을 중층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런 중층들의 균열로부터 배어나오는 얼룩을 통해 자기성찰적인 한국영화 들여다보기의 가능성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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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논문에서 쓰는 미주가 여기선 중간에 들어가 문장 맥락이 끊기는데...거참~ 나중에 여유있을 때 다시 고쳐보죠. 당장 나가야 해서 좀 힘드네요. 양해해주시길...
시간나는데로 틈틈히 읽어보려 프린트하니 9장이네요.허허.또 먹물기질이 발휘된듯.쫌어려워요.굿데이!지나레인!
하하 읽으려면 대단한 인내심과 끈기가 필요할듯. 하지만 율리우스 곰과 같이 끈기있죠. 단군신화에 나오는 호랑이보다는 곰에 가깝죠. 아마도 이 카페에서 여성성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듯. 천천히 읽을게요. 감사합니다. 눈문도 올려주시고.
막 수정했죠. 각주를 괄호속에 정리하는 식으로...여전히 오자는 있을걸요. 영화로 공부하는게 어떤 건지 그냥 구경만 하셔도 되죠. 넘 심각하게 읽으시라고 올린건아니죠.
또 다른 문체의 지나레인 선생님을 만나네요^^...천천히 다 읽어볼께요^0^...
지나레인님으로 인해 권혁범 교수님의 아직 어설픈(?) ㅋ 팬이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