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않겠지만 나는 미래에서 왔다. 오늘은 2010 남아공 월드컵이 개막한 지 딱 100년이 지난 2110년 6월 11일이다. 재개발 지역 정보나 로또 번호를 알려주는 것도 좋겠지만 오늘은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보여줬던 한국 축구의 활약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물론 이건 나도 1993년에 태어나신 할아버지께 전해들은 이야기다. 난 박지성이나 이청용이라는 선수의 이름만 들어봤지 그들이 뛰는 걸 본 적은 없다. 재미를 위해 결과는 빼고 살짝 경기 내용만 리뷰하겠다. 내가 결과를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다. ![]() 그리스 공격수 사마라스의 모습. 이 예수님, 아니 사마라스는 그리스에 축복을 내릴 수 있을까. ⓒ연합뉴스 한국 vs 그리스 - 머리를 막고 발밑을 활용하라 그리스는 2010 남아공 월드컵이 두 번째 도전이다. 1994 미국 월드컵에서 나서 조별 예선 세 경기를 치르면서 단 한 골도 넣지 못하고 무려 10골이나 내줬던 그리스는 한국과의 경기에서 역사적인 월드컵 첫 골을 노린다. 자국 프로 리그 명문 클럽 파나시나이코스에서 뛰는 선수들이 대표팀 명단 중 절반에 달해 조직력이 강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단점도 있다. 팀 전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해외파 선수들이 월드컵을 앞두고 주전 경쟁에서 밀렸다는 점이 가장 큰 단점이다. 게오르기오스 사마라스(셀틱)는 로비 킨에 밀려 교체 멤버로 전락했고 세오파니스 게카스(헤르타 베를린)와 앙겔로스 카리스테아스(뉘른베르크)도 소속팀 주전 경쟁에서 밀려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팀 주축 선수들의 무뎌진 경기 경험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유로 2004 챔피언다운 면모는 이미 사라진 상태다. ‘크로스에서 시작해서 크로스로 끝나는 팀’이라는 비아냥도 듣고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리스의 높이에 한국이 고전했다고 전하셨다. 조용형-이정수로 이어지는 중앙 수비 라인은 평균 신장이 192cm에 이르는 그리스의 고공 공격을 막는 데 꽤나 고생했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그리스의 약점인 느린 스피드를 공략해 이청용과 박주영 등 발 빠른 공격진이 큰 역할을 했다고 귀띔해 주셨다. 중앙 수비수 소티리오스 키르기아코스(리버풀)와 반겔리스 모라스(볼로냐)가 부상을 당한 것도 그리스 수비진 붕괴의 한 요인이 됐다는 이야기도 할아버지를 통해 들었다. 박진감 넘치는 승부와는 다르게 경기장은 텅텅 비어 있어 시청 앞 서울광장의 응원 분위기와는 큰 대조를 이뤘다고 한다. 처음 듣는 ‘부부젤라’라는 피리 소리에 자신의 새로 산 3D 텔레비전이 고장 난 줄 알고 경기 다음날 가전제품 수리점을 찾은 사람들로 인해 거리가 북새통을 이뤘다는 사실도 무척 재미있다. 5D 텔레비전을 보는 시대에 태어난 나는 그깟 3D 텔레비전을 보고 열광했던 100년 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 도토리 키 재기 중인 리오넬 메시와 디에고 마라도나. ⓒ연합뉴스 한국 vs 아르헨티나 - 체력전이 될 고지대 맞대결 그리스와의 1차전에서 16강 진출 가능성을 잡은 한국은 2차전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했다. 경기 시작 전부터 양 팀 감독의 신경전이 대단했다고 한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격렬한 경기를 펼쳤던 허정무 감독과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이 눈싸움을 하면서 시작된 경기는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의 현란한 개인기로 전세가 급격히 아르헨티나 쪽으로 기울었고 메시뿐 아니라 카를로스 테베스(맨체스터시티)와 곤살로 이과인(레알 마드리드)도 아르헨티나의 파상공세를 이끌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도 단점은 있었다. 풀백인 31세의 가르비엘 에인세(마르세유)는 예전과 같은 날카로움이 줄어들었고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있었다. 남미 예선 내내 불안했던 골키퍼 로베르토 아본단시에리(보카 주니어스)를 밀어낸 후안 파블로 카리소(사라고사)는 경험이 적어 약점으로 지적됐다는 이야기도 할아버지께서는 빼놓지 않으셨다. 메시가 소속팀에서와는 다르게 아르헨티나 대표팀 유니폼만 입으면 부진하다는 점도 서서히 문제로 들어났다. 설악산 대청봉(1708m)에 버금가는 해발 1750m 고지대에서 벌어지는 경기라는 점이 이 경기의 가장 큰 변수였다. 아르헨티나가 고지대에서 열린 월드컵 남미 예선서 대패하는 등 졸전을 펼쳤지만 나이지리아와의 첫 경기를 같은 장소에서 먼저 치르게 돼 한국보다는 적응이 수월하다는 점도 경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경기가 끝난 뒤 박지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쓰러질 정도로 힘겨운 고지대 경기를 치렀다고 회상하셨다. 할아버지로부터 아르헨티나전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웃음부터 나왔다. 170cm도 안 되는 선수에게 쩔쩔 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또한 ‘부부젤라’로 인해 청력에 문제가 생긴 이들로 아르헨티나전 다음 날에는 전국의 이비인후과가 인산인해를 이뤘다는 것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할 정도였다고하니 ‘부부젤라’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들어보진 않았지만 대충 짐작이 간다. ![]() 김정우와 김남일은 상대팀 미드필더를 바짝 긴장하게 만들 수 있을까. ⓒ연합뉴스 한국 vs 나이지리아 - 터프하게 경기하라 한국은 16강 진출을 놓고 조별 예선 최종전인 나이지리아와의 대결에 나섰다. 현지 교민과 100여 명의 붉은악마 등 소수가 응원에 나선 한국과 다르게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한 나이지리아는 마치 안방에서 경기를 치르는 것처럼 든든한 응원을 등에 업고 이 경기에 임했다. 특히 조셉 요보(에버튼), 오바페미 마틴스(볼프스부르크), 존 우타카(포츠머스), 은완코 카누(포츠머스) 등 국내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나이지리아의 유럽파들은 한국을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조직력에서는 나이지리아보다 한국이 더욱 나았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라스 라거백 감독이 월드컵을 앞두고 부임하기 전까지 오랜 진통을 겪었던 나이지리아는 라거백 감독 부임 이후에도 감독의 독단적인 선수 선발에 선수들은 물론 언론까지 크게 반발하고 나서 팀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미켈과 요보가 월드컵을 앞두고 부상에서 완벽히 벗어나지 못한 것도 나이지리아의 고민이었다. 존 오비 미켈(첼시)은 부상으로 아예 월드컵에 나서지 못했단다. 문제는 흥이 나면 무서워지는 아프리카 선수들 특유의 특성을 한국이 어떻게 잠재우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은 2009년 벌어진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 월드컵과 17세 이하 월드컵에서 훌륭한 경기를 펼치고도 주도권을 넘겨주며 각각 가나와 나이지리아에 무릎을 꿇고 4강 진출에 실패한 바 있다. 할아버지께서는 김남일과 김정우가 중원에서 나이지리아의 기세를 꺾어놓기 위해 터프한 플레이를 펼쳤다고 전하셨다. ‘부부젤라’ 소리에 경악한 사람들은 이후 FIFA에 ‘부부젤라 사용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등 무척 예민한 반응을 보였고 FIFA는 이를 수용해 이후 월드컵부터 ‘부부젤라’는 퇴출됐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후부터 현재인 2110년 월드컵까지는 ‘부부젤라’의 자리를 꽹과리가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도 100년 전 사람들에게는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께서는 2010 남아공 월드컵을 떠올리며 이런 말씀을 마지막으로 하셨다. “공은 둥글다. 무엇을 상상하든 남아공에서는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조별 예선 이후부터 결승 진출까지의 한국팀 리뷰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하겠다. 절대 결과를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다. ![]() “가서 삽 좀 가져와라. 저 피리 다 땅에 묻어버리게.” ⓒ연합뉴스 그밖에… 미래에서 와 과거 이야기를 하면서 몇 가지 더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김현회라는 축구 기자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펠레에게 한국 축구는 4강 진출이 어렵다는 인터뷰 받아내기’라는 ‘김현회의 무한도전’에 성공했다. 펠레가 “한국 축구는 강합니다. 다시 한 번 4강에 올라갈 가능성은 충분합…”이라고 말하자 입을 틀어막고 유도심문을 했다. 그리고는 결국 펠레로부터 “한국 축구는 조별 예선에서 일찌감치 탈락할 것”이라는 답변을 들어냈었다. 훗날 김현회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