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로의 이야기 房 124번째
아! 친구가 다녀갔습니다/ 2편/품격있는 늙은이를 위한 토론
2-가
한동안 떨어져 지낸 부부나 친구지간이 오랫만에 실제로 만났을 때 기대와는 달리 할말이 크게 없다는 말이 있다. 상호 이해를 구하거나 조근조근 따져 봐야 할 아젠더(Agenda)나 박수를 치거나 맘껏 웃어 줄 만한 예상가능한 에피소드(Epidsode)가 딱히 없는 것이 이유다. 생활을 공유(共有)하지 못한데서 오는 공감제로의 사정이다 보니 무엇을 묻고 어떤것에 관심을 나눠야 하는지 도통 알길이 없어 서먹하고 데면데면하기 쉽다. 말주변이 앞서거나 재치와 위트가 넘친다면 별 문제인데 그 반대의 경우 오매불망 기다린 해후나 조우도 속에서만 조물조물 거리는 반가운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한채 아쉬움을 삼키고 돌아서는 경우가 왕왕 있고 또 보아 왔다.
친구가 온다고 처음 말을 꺼냈을 때는 마음이 그냥 싱숭생숭 했다. 비행기표를 마련하고 카톡으로 인증샷을 보내오니 마음이 분주해 졌다.나름 준비성과 기획력이 있다고 자부했 왔는데 냅다 마음만 허둥지둥 댔다.한마디로 잘 해 주어야 겠다는 맘이 앞서다 보니 무엇인가 잔뜩 늘어 놓고 주워 담지 못하는 아이처럼 질서가 잡히지 않았다. 무엇을 좋아할까? 어디를 갈까? 여행 스케쥴을 놓고 덤벙거리다가 깨달았다. 너무 오래 떨어져 있던 탓에 친구의 가벼운 기호(嗜好)조차 아는것이 너무 없다는 것을. 결국 호주에서 할수 있는 취미생활과 다양한 먹거리를 종류별로 적고 친구가 좋아 할 만 하다고 판단되는 관광지 이름을 설명과 함께 마구잡이로 나열하여 친구에게 보냈다. 그에게 선택의 자유를 억지 선물로 주었다. 친구는 호텔 기획실장 출신답게 깔끔하게 정리된 일정표를 만들었고 나는 충실하고 센스있는 관광 가이드가 되어 오차없이 서로가 만족한 콜라보(Collaboration) 여행을 성공리에 마쳤다. 오랫만의 해후였지만 우린 서먹하지도 않았고 먼저 치고 들어가는 놈이 임자인 자리다툼 처럼 경쟁적인 수다속으로 매몰 되었다. 하루에 열시간씩 떠들어 대도 두둑한 은행잔고 처럼 할말이 산더미 같이 많아 참 신기했다. 두서너 시간이 넘도록 전화기에 매달리고도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며 수화기를 내려 놓는 여자들처럼 우리 둘은 그렇게 말보다 시간이 모자란 여러 날을 죽였다.
2-나
누구에게나 크게 다르지 않은 인생사가 마냥 좋은 일로 만 채워지지 않는것 처럼 우리들의 굴곡진 삶을 찬찬히 들춰보며 심각해 지기도 하고 안타까운 말을 섞으며 심려한 시간도 있었다 이루지 못한 유년의 꿈 이야기중에는 차라리 울고 싶기도 했다. 짜고 매운 시절을 지내신 부모님들에 대한 회상이 가볍지 않았고 피붙이들의 근황과 안부에도 만만치 않은 부침(浮沈)을 여지없이 확인 할 수가 있었다. 탄식과 감탄이 반반씩 녹아 있는 자신은 물론이고 알고 있는 사람들의 과거와 현주소를 마주하면서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짚어보니 어떤 내일을 살아 내야 하는가? 에 대한 답을 찾아내야 하는 조바심이 바로 가볍지 않은 그것이었다. 엉성하게 모양만 낸 삶 속에서 허겁지겁 생존을 위해 자식과 가족을 위해 전장의 병사처럼 내달린 어제가 장렬한 의무였다면 적어도 노후는 품격있는 삶을 위해 찬찬히 자신만의 플랜(Plan)을 해야 한다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정신줄을 탱탱하게 조여야 경쾌한 몸과 마음이 아름다운 여생을 살아 낼 수 있슴을 알아차린 셈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이나 사업에 몸을 담고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되어 안방 옷장에 걸린 자켓처럼 무색무취한 존재가 되었다. 단내나는 힘겨운 일상에 대한 분노와 좌절 속에서도 책임감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 거리며 닥치는 대로 전진 또 전진을 거듭하며 힘겨운 삶의 무게 앞에 곱사등이가 되어 있는 우리 둘이 이제 막 60고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늙은이 둘이 고심고심하며 같이 공들여 만든 결론이 있다.때맞춰 이루어진 여행이 준 선물처럼 우리는 아름다운 생을 위한 5가지 원칙과 버킷리스트(Bucket List) 다섯개를 퍼즐처럼 맞추고 공동성명 처럼 써서 읽고 꽤 흡족해 했다.아내와 자녀들과의 관계를 담고 있으며 소박하나 단단한 재정계획은 물론 꼭 이루고 싶었던 꿈을 가시화하는 장대한 야심도 들어 있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선언의 마그나 카르타이다. (나의 버킷리스트만은 미구에 밝혀둔다)
2-다
살아 온 날들에 대한 대차대조를 맞춰보니 둘의 현주소는 엇비슷 했다. 경제력도 가족구성도 주변인들과의 인적 구성도 다른듯 닮은 성격따라 틀림이 거의 없었다. 부모님들은 진즉 돌아가시고 형들은 노쇠했으며 조카들이 결혼을 하고 그들의 2세가 태어나는 통에 둘다 막내인우리는 벌써 집안의 어르신이 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 60의 나이는 어르신과 노인의 갈림길이다. 호주에서 60세는 시니어 카드(Senior Card)가 발급되어 4대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한 보상으로 각종혜택이 주어진다. 한국에서는 60부터를 노인세대라고 경칭(敬稱)한다. 존경을 받는 어르신이 될런지 나이만 먹어 버린 옹졸하고 고집스러운 노인이 될 것인지의 키(Key)는 스스로 쥐고 있다. 쉼없이 사색하고 공부하는 스탠스(Stance)를 견지 한다면 전자가 될것이고 이 나이에 하고 맥을 놓고 누워 버리면 영락없는 뒷방 노인이 된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세월도 우악스럽게 바뀌는 변화의 질주 앞에 힘을 못쓰는 이시대에 노년의 삶을 어떻게 살것이며 속이 꽉찬 행복을 누릴 것인가의 묘책에 우리는 꽤 여러시간 매달렸다. 노후의 경제적 씀씀이를 꼼꼼히 계산도 해보고 잠시라도 떨어지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병을 앓던 열정과 사랑의 반쪽인 각자의 아내 이야기에 머물러서는 절망을 강요하는 지친 세월이 만들어 낸 무덤덤한 관계로 내어 몰린 마음이 쓰렸다. 죽을둥 살둥 키워놓은 자녀들과 친구가 되고 싶은 애비 마음을 시큰둥하게 외면하는 성장한 자식들을 향한 야속함에 공감(共感) 했다. 추억에 매몰되어 노변정담에 흥겨웠던 뒤끝에 짚고 넘어가야 만 할 무거운 주제앞에 근심도 하고 걱정도 깊었지만 친구가 있어 덜 외로웠다. 다행스럽게도 그와 나는 늦은 신앙이지만 둘다 개신교 교인이 되어 있었다. 어릴적엔 왜람되게도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을 정신박약집단이라고 비아냥 거리는데 주저함도 죄책감도 없이 꿍짝이 척척 맞았었는데 각자 아내의 권면과 기도 덕에 교회출석이라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최소한 늙어가며 영혼의 문제를 되짚어 보고 생사화복의 근원에 대해 묵상하고 근신하며 살아가는 피조물의 본연에 충실 할 수 있는 동아줄은 쥐고 있어 둘 다 안도 했다. 우린 서로를 위해 기도 할 수 있고 절대자를 향해 찬송 할 수 있는 공통 분모를 기뻐하며 마음 든든해 했다. 아내와 자녀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섭섭한 일이나 야속한 심정도 용서라는 기독교적 가치관의 프리즘을 통해 무장된 사랑의 열매를 맺는 통로를 인식했기에 안심했다. 내친김에 내가 섬기는 교회예배에 참석하여 음악적 달란트가 뛰어난 친구의 등뒤에 매미처럼 들러 붙어 같이 목청 껏 특송을 하고 싶었지만 어이없게도 애창곡이 달라 무산 됐다. 289장(주 예수 내맘에 들어와)을 선곡한 내게 그는 301장 (지금까지 살아 온것)을 극구 들이 미는 고집에 막혀 다음으로 미루고 별이 빛나는 밤 나우라(Nowra)의 농장 한복판에서 번갈아 중창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2-라
공부를 많이한 친구와 책읽기를 즐겨하는 내가 많은 시간 논쟁한 토픽(Topic)중에는 위태위태한 한반도 정치도 메뉴였다. 남자들의 모임이 파(罷)하게 되는 전조가 정치이야기고 마지막이 군대 이야기인데 우리 둘은 정치와 역사를 주제로 신랄하게 파헤치며 한국의 나아갈 바에 열을 올렸다. 하마터면 우정에 금이 갈뻔도 했다. 유럽형 중도 보수로 몰린 나에 반해 친구는 약간 진보적 좌향 좌였다.온몸으로 이겨 낸 그의 삶에 묻어난 한국의 속사정을 이국에서 바라만 보아 온 본 내가 용감하게 마주서서 댓거리를 한다는게 무척 불합리하게 보였지만 물러서기엔 이민자의 애국심에 보태진 오랫동안 모국을 지켜보며 심려하여 공부한것이 아까워 물러서지 않았다. 우린 서둘지 않고 팩트와 진리를 향해 맹렬히 달려 들었다. 틈틈이 대학강단에서 강의도 겸했던 친구의 진보적 논리는 젊고 싱싱했다. 증명 할 필요가 없는 진리에는 대승적 동의가 되었는데 시대에 따라 가변성이 역역한 상식에는 예리한 부딪힘도 피할 수 없었다. 어느길로 가든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의 혁혁한 미래를 향한 신념에는 그나마 같은 곳에 눈길을 모았다. 각자의 소신에 비추어 목적지를 향한 길의 선택은 비대칭이 틀림없었지만 겨레의 흥(興)은 도모하고 망(亡)은 피해가야 한다는 염원앞에서 대칭적 손을 맞잡았다. 말로만 들던 한국사회의 계층간 세대간 양극화를 경험했다.부모자식간사이에 세대간은 물론 진영위로 쏟아진 지난3년 한국사회의 좁혀지지 않은 정치.경제 사회적 대립의 급물살을 절감했다. 42년 친구의 우정도 쉽게 갈라 놓을 것 만 같은 논쟁과 대립이 무섭기 까지 하여 내소신을 접고 친구의 주관에 무릎을 접을까 하는 유혹도 있었다. 각자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일에만 무자비하게 투신하는 확증편향이 객관적 사상(Ideology)과 가치(Value)의 몰락을 담보하는 장애라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논쟁은 그치지 않는다. 장소를 불문하고 침착하게 깊이 있는 자유시장경제와 분배의 양립 가능성을 주고 받았으며 사회주의적 보편적 노동가치를 신봉하는 친구에 대항하여 노동시장의 수요공급이 균형을 이루는 접촉점이 창출하는 경쟁의 역동성과 부가적 고용확대를 역설하며 기탄없이 던지고 받았다. 영토.주권.국민의 3요소가 공식화된 1948년 건국의 국제법적 합리와 현실성(legal reality)을 힘주어 주장하자 친구는 1919년 임시정부의 적통성 선언을 민족사관적 측면의 당위성에 방점을 찍으니 흡사 한치의 양보도 없는 100분토론의 열혈 패널이 된 기분이었다. 세상을 뒤집을 영향력도 없고 위치도 허락되지 않은 우리들이었지만 배운대로 본대로 그리고 마음속에 구체화한 관점을 되새기며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기성세대로서의 책임에 충실하고자 했다. 난해한 3차방정식같은 남.북 문제나 동북아의 역학적 내일을 지난(至難)한 역사의 교훈를 가슴에 의미로 새겨야 하는 관념적이고 사학적인 본질을 넘어 현실적 잣대로 한반도의 운명을 가늠해 보려 기를 썼다. 북한의 핵을 이고 살아야 할게 틀림없는 한반도의 불안정한 안보에 대해 근심가득한 내 얼굴을 향해 친구는 냉전시대의 종식과 평화시대의 업그레이드된 사고의 전환을 강요 했지만 웬지 나는 찜찜했다. 이런저런 이슈에 대한 생각의 부등식에도 불구하고 한껏 조여 놓은 탱탱한 기타줄 처럼 맞서기만 했던 토론도 끝내는 누그러지고 가라 앉았다. 왼쪽만 뚫어져라 보거나 오른쪽에만 한없이 눈길을 빼앗기면 편향적 전문성은 존재하겠으나 닥아 설 미래를 향한 거시적이고 원시안적 (Macro sight)안목의 부재를 초래한다는 동의로 마무리가 됐다. 좌.우가 균형을 맞출때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해방으로 부터 74년동안 정권에 무론(無論)하게 온나라 민심을 지금까지 휘청이게 한 이념 논쟁의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 생래적으로 거칠지만 순수하고 아름다운 호주 자연경관도 외면한 채 얼굴만 빤히 쳐다보며 죽기살기로 덤빈 토론이지만 둘다 아직 살아있는 신념과 자신감을 스스로 반증한 것에 안도했다. 그렇게 우린 한국사람이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고 세상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우리네 정서를 고스란히 드러내면셔 말이다. 다만 한가지 우리는 입을 모았다. 경제는 정치와 사회를 규정한다는 고전에 충실한 나라가 되었으면 했고 경제만큼은 이념(Ideology)을 덧입히지 말았으면 했다. 정부가 바뀌어도 모든 가정은 한결같이 평화로워야 하고 청와대 주인이 새로 열번을 자리바꿈을 해도 국민들의 삶의 질은 어제보다 내일이 더 나아 질 권리가 있는 나라. 영민하고 성실한 대한민국 국민이 흘린땀만큼 마땅히 대접받는 안정된 Korea를 위해 우리는 함께 간절히 기도했다.
2-마
눈이 번쩍 뜨일만큼 고급지고 우람한 집은 아니지만 친구는 우리집에 도착하여 꼼꼼히 집안팍을 돌아보고 33년간 흘린 땀이 배인 보금자리에 경의를 표해 주었다. 28년간 5성급(5 Star) 호텔에서 잔뼈가 굵은 친구에게 안락한 숙소에 대한 동경심은 더이상 없을 터인데도 이튿날 아침 아내가 차려 준 한식 백반을 마주하며 그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잠을 잤노라고 너스레를 떨며 나와 아내를 추켜세웠다. 뉴포트 (New Port) 호텔에서 햄버거로 점심을 나누고 노스헤드(North Head)에서 시드니를 건너다 보며 절벽의 장관을 바라 보노라니 역시 맛나는 음식이나 멋진 풍경은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할 때 기쁨이 두배가 된다는 평범한 진리의 깊은 뜻을 알았다. 지인의 아들이 운영하는 맨리 바닷가 스위스 아이스크림집에서 앙증스런 콘(Corn)에 담긴 피스타시오(Pistachio)와 카라멜맛이 범벅이 된 크림을 사서 맨리 (Manly) 바닷가에 앉아 미풍에 얼굴을 맡기고 바다를 관람했다.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브릿지를 배경으로 둘의 모습이 같이 있는 사진을 남기니 북반구와 남반구로 흩어져 산 33년의 역사가 종장(終章)을 맞이한듯 했다. 이스트우드 한인상가에 들러 친구는 단촐한 선물을 준비한다. 새벽기도 다니는 아내의 시린 발을 뎁혀 줄 어그 부츠(UGG Boots)를 산다.나를 등지고 계산대 앞에 선 아내를 사랑하고 아끼는 친구의 늠름한 등짝을 바라보며 언제나 행복하길 빌었다. 다음날 매우 짙은 안개가 세자매봉을 감춘 블루마운틴의 굽이 지고 높은 길을 자동차로 오르며 새벽발길에 툭툭 채이던 우리들의 고향 춘천의 지독한 안개를 떠 올리기도 하며 짜투리 여정을 부지런히 채워 나갔다. 병풍처럼 어깨동무을 하고 늘어선 블루마운틴의 뒷자락을 한참 내리 달리면 만나는 메갈롱 밸리 (Megalong Valley) 찻집에서 갓 구워낸 스콘(Scorn)에 크림과 라스베리 잼을 듬뿍 바르고 곁들인 카푸치노 한잔에 행복해 했다. 아들 녀석과 사랑하는 조카 민지가 뒷마당 바베큐로아빠와 친구가 견디는 석별의 마지막 밤을 마련 해 주었다. 딱 한잔씩만 하시라고 큰아들이 준비한 고급와인 글라스에 보내는 마음의 어려운 시선을 빼앗기니 고산(高山)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가 마음을 훔친다. 친구는 날이 새야 떠나는데 내마음은 벌써 이별에 운다. <잔들고 혼자 앉아 먼뵈(山)를 바라보니 그리던 님이 온다 반가움이 이리하랴/말씀도 웃음도 아녀도 못내 좋아 하노라>
이튿날 새벽 친구는 대한항공을 타고 떠났다. 차마 여린 마음이 못 미더워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환송객(Departure) 터미널 2층에 팽개치듯 내려주고 작별했다.
친구는 가고 나는 다시 이민자의 허기진 길을 꾸역꾸역 걸어간다. 공기도 맑고 자연도 있는 그대로 썩 괜찮으며 사람들도 이웃으로 삼는데 크게 모가 나지 않은 좋다고 소문난 나라 호주에서 특별한 이변이 없다면 삶을 마감할 것이다. 한살 두살 나이가 깊어지는 만큼 아침에 몸을 일으킴이 예전만 못해 가니 두고 온 모국의 산천 초목이 무척이나 그리웠는데 친구가 불을 지르고 갔다. 그래서 일기(日記)에 이렇게 썼다
<다시 만나 그리움을 지울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친구를 보내고 나니 함께 하지 못하는 세월의 끝에 흘린 사나운 눈물에 심장이 짓무른다. 이름하여 이민자의 회한이고 견뎌야 할 고독이다 . 호주 땅을 찾아 나선 길이 어쩌면 장한 결심이었을 지라도 이제 백발을 쓸어 넘기는 마음속에 웅크린 외로움은 오롯이 내 잘못만 같아 알수 없이 허전하다>
별책부록 /나의 버킷 리스트 ( Bucket List)
1. 책 10권 쓰기 (소설6권/평론.산문4권)
2. 아내와 함께 한국에서 2년 살기
3. 아내와 함께 비엔나에서 6개월 살기
4. 아내와 함께 알래스카 크루즈 1개월
5. 원하던 공부 마치기
첫댓글 공감하는 부분이 많지만 ..."두서너 시간이 넘도록 전화기에 매달리고도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며 수화기를 내려 놓는 여자들처럼...." 요대목에 그냥 웃음이나오네요
서로다른 이념이 좋은 친구관계를 갈라놓지 못하는군요 부럽습니다 그리고 많이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