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와 아우라지
2013. 10. 30.~10.31.
백마고지(白馬高地)전투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쟁(’50. 6. 25. ~ ’53. 7. 27.)기간 중 가장 치열하게 고지 쟁탈전을 전개했던 1952년 10월. 이곳 철원에 위치한 작은 고지를 놓고 국군 보병 제9사단과 중공군 제38군 3개 사단이 전력을 기울여 쟁탈전을 벌인 끝에 제9사단이 승리한 전투를 말한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 동안 불과 395m밖에 되지 않는 고지를 빼앗기 위해 혈전을 벌이는 사이, 중공군 1만 여명이 전사상 또는 포로가 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3,5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발사된 포탄 수는 아군 219,954발, 적군 55,000발 등 총 274,954발이다. 12차례의 공방전으로 철원, 평강, 금화를 잇는 중부 전선 일대의 적 병참선을 차단. 확보해야 한다는 작전상의 이유 뿐만 아니라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양 국가의 명예를 건 일전으로변하여 더욱 처절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결국 세계 전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 처절한 포격전, 수류탄전, 백전병을 10일 주야 반복한 끝에 이 고지를 아군이 차지했는데, 그후 이곳에는 백마고지를 빼앗긴 김일성이 3일 동안 애통해하며 식음을 전폐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백마고지 전적비
철원군 북방에 있는 백마고지는 6.25동란 당시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였다. 1952년 10월6일. 중공군의 대공세에 의해 10일간이나 계속된 백마고지 전투는 약30만발의 포탄이 이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고지의주인도 24번이나 바뀌었다. 이 전투에서 1만4천여명의 사상자를 낸 중공군 2개 사단이 완전히 와해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은 백마고지 전투의 대승을 계기로 백마사단이라고 명명되었다. 격렬한 전투 끝에 남은 흙먼지와 시체가 뒤섞여 악취가 산을 뒤덮을 정도였고 서로의 포격에 의해 고지가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는데 마치 백마가 옆으로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그 이름을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이 백마고지 사수를 위해 용감하게 싸운 국군 제9사단 장병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철원군 철원읍에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가 건립되었다. 이 비에는 당시 전투의 격렬함과 많은 사람이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했는지를 알려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백마의얼
모 윤 숙
풀섶에 누워 그날을 본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갈라지듯 적들이 몰려오는 저 산과 강에서
우리는 끊는 피로 용솟음 치며 넘어지려는 조국을 감쌌다.
이 한몸 조개 같이 바치려 숨찬 목소리로 다 – 같이
강물을 헤치고 산을 부수며 달려오는 적들을 막았노라
수 많은 적을 따라 소탕하고 조국의 얼로 내달려
떡갈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원수의 고함을 눌러 버렸나니
쓰러지며 죽으면서도 다시 일어나 숨결을 돌리고
숨지려는 조국을 살리었노라
나의 조국 영원한 땅이여 만세를 가도록 그 얼은 살았으니
지금도 그때처럼 귀를 기울이고 저 몰려오는 적을 막고 있노라
푸르러 푸르러 영원한 젊음 우리는 그 품에 안겨 안식하리라
어머니 조국에 이 혼을 맡기며 후회없이 더 강하게 앞으로 앞으로 달려 가리라.
저기 북녘땅이 보인다. 이곳에서 鍾을 치는 이들 그 念願 그 精誠 모아 祖國統一 이루리라
백마고지 유래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군 모장면 산명리에 위치한 해발 395m의 야산으로 전쟁 전에는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무명고지에 불과했으나 전선이 고착되면서부터 철의 삼각지 좌견부를 감제하는 중요 지형지물로 유명해진 곳이다. 명칭의 유래는 작전기간 중 포격에 의해 수목이 다 쓰러져 버리고 난 후의 형상이 누워있는 백마처럼 보였기 때문에 백마고지라는 이름을 붙였단다는 설과 당시 참전했던 어느 연대의 부연대장이 외신기자의 질문에 “화이트 호스 힐(White Horse Hill)”이라고 대답하여 비롯되었다는 설 또 전투 중 9사단을 방문 격려한 바 있는 이승만 대통령이 조선시대 임경업 장군이 평북 의주군에 백마산성을 쌓고 중국 오랑캐에게 저항하였던 지명을 따라 백마산이라고 명명했다는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격전을 치루고 난 후 산의 모습이 백마가 누워있는 형상 같아하여 백마고지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전투를 계기로 중공군의 공세를 결사적으로 분쇄한 한국 보병 제9사단은 그 용맹을 세계에 떨치게 되었고 부대 애칭도 백마부대라고 부르고 있다.
서울 북방106Km지점에 위치한 북한의 기습남침용 지하땅굴은 1973년 11월 20일 푸른별 청성부대 상병이기태, 일병 김효섭이 경계근무 중 지하로부터 폭음을 청취한 것이 계기가 되어 수십일간 끈질긴 굴착작업 끝에 1975년 3월 24일 발견되었다. DMZ일대에서 두 번째로 발견 제2땅굴은 총 연장 길이 3.5Km에 달하며 지하 50-160m의 견고한 화강암층을 뚫고 군사분계선 남쪽 1.1Km까지 파내려 왔으며 유사시 높이 2m의 아치형 터널을 통해 북한군 부장 병력 16,00여 명이 한 시간 동안 0.8M의 간격을 유지한 가운데 2열 또는 3열 종대 대형으로 침투가 가능한 엄청난 도발현장으로 땅굴발견시 내부 수색작전에 투입되었던 선배 전우 중사 김호영 외 7명의 대원은 북한이 차단벽에 설치해 놓은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해 산화됐다. 땅굴은 유사 시 아군 후방으로 병력을 침투시켜 국가혼란을 조장하고 국군의 방어태세를 무력화하여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한 기습남침용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 엄청난 도발현장에서 분단의 고통과 아픔의 주범인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을 깨닫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경각심을 갖고 긴장의 고비를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월정리역은 서울에서 원산으로 달리던 경원선 철마가 잠시 쉬어가던 곳으로 현재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철책에 근접한 최북단 종착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역의 바로 맞은 편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간판아래 6.25동란 동시 이 역에서 마지막 기적을 울렸던 객차의 잔해와 유엔군의 폭격으로 부숴진 인민군 화물열차가 앙상한 골격을 드러낸 채 누워있어 분단의 한을 실감케한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속으로만 몸부림일 뿐 60년을 늘상 그 자리에서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 원래 경원선은 한일합방 이 후 일인들의 강제동원과 당시 러시아의 10월 혁명으로 추방된 러시아인들을 고용 1914년 8월 강원도내에서 제일 먼저 부설되었는데 서울 – 원산 간 227Km를 연결하는 산업철도로서 철원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을 수송하는 간선철도 역할을 했다.
청량리역에서 만난 우리의 영원한 친구 김유식을 만나다
아우라지
정선읍으로부터 19.4Km 거리에 위치한 아우라지는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서 송천과 골지천이 이곳에서 합류되어 한데 어우러진다 하여 “아우라지”라 불리고 있다. 합류된 물줄기는 조양강과 동강을 지나 남한강으로 흐른다. 이곳 강변에 서면 언재나 푸르게 흘러가는 강물의 싱그러움을 느끼게 된다. 이곳은 주위에 노추산, 상원산, 옥갑산, 고양산, 반론산, 왕재산 등이 둘러싸여 땅이 비옥하고 물이 맑아서 예부터 풍요로움과 풍류를 즐기던 문화의고장이다. 오래 전 남한강 상류인 아우라지에서 물길따라 목재를 한양으로 운반하던 유명한 뱃목터로 각지에서 모여든 뱃사공의 아리랑 소리가 끊이지 않던 곳으로 정선아리랑의 가사 유래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어물치
잉어과(一科 Cyprinidae)의 한반도 고유종
임진강. 한강, 금강에서만 분포가 보고되어 있다. 금강에 서식하는 것은 천연기념물 제238호로 지정 되어 있으나 근래에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어름치 종(種) 자체도 천연기면물 제259호로 지정되어 있다. 몸은 옆으로 약간 납작하고, 전반부는 굵으며, 후반부는 가늘다. 주둥이는 길지만 뾰족하지 않고 입술은 두껍지 않느며, 1쌍의 입수염이 있다. 옆줄의 전반부는 배쪽으로 휘어 있지만 후반부는 중앙에 직선으로 나있다. 등쪽은 암갈색이고 배쪽은 은백색이다. 몸의 옆면에는 눈보다 크지않은 7~8줄의 흑점열(黑點劣)이 세로로 나 있다. 가슴지느러미와 배지느러미는 담색(淡色))이고, 등지느러미와 꼬리지느러미에는 지느러미살을 가로자르는 훅색 줄무늬가 3줄 이상씩 있다. 하천 중상류의 물이 말고 자갈과 암석이 깔려있는 비교적 깊은곳에서 산다.
아우라지 유래
이곳은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인 정선아리랑 애정편 가사의 주요 무대가 되는 곳으로 평창 발왕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송천가 중봉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골지천이 합류하여 어우러진다에서 우래하여 아우라지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적 배경에서 송천을 양수(陽水), 골지천을 (陰水)라 부르며 여름 장마시 양수가 많으면 대홍수가 나고, 음수가 많으면 장마가 끊긴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남한간 1천리 물길따라 목재를 서울로 운반하던 뗏목터로 조선말 대원군의 경북궁 중수시 사용된 많은 목재를 떼로 엮어 한양으로 보냈다 하며, 이때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뗏꾼들의 아리랑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숱한 애완과 정한을 간직한 유서깊은 곳입니다. 또한 님을 떠나보내고 애닮게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과 장마로 인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지 못하는 남녀의 애절한 사연이 정선아리랑 가사에 진하게 녹하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상의 한과 얼이 얽힌 내용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아우라지 강변에는 처녀상, 가사비, 정자(여송정)등이 건립되어 있으며, 매년 8월초에는 아우라지 뗏목축제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아우라지
1. 아우라지 강가에 수줍은 처녀 그리움에 설레어 오늘도 서있네
뗏목타고 떠난님 언제 오시나 물길따라 긴 세월 흘러 흘러 갔는데
(후렴)
아우라지 처녀가 애태우다가 아름다운 올동백 꽃이 되었네
2. 아우라지 정선에 애닮은 처녀 해가 지고 달떠도 떠날줄 모르네
뗏사공이 되신님 가면 안오나 바람따라 흰 구름 둥실 둥실 떴는데
이 가사의 지(池)장구는 장구를 잘 쳤던 사람의 성이 지씨였으며 본명은 지유성으로 1960년대까지 살아있던 실존 인물이다. 지장구는 20세에서 63세까지 40여년간 아우라지에서 뱃사공으로 있으면서 장구를 잘 치고 정선아리랑도 잘 부르는 명창이었디고 한다.
아우라지 처녀상
이곳은 송천(松川)과 골지천(骨只川)이 어우러지는 “아우라지”다 여기서부터 남한강(南漢江) 1천리 물길을 따라 처음 뗏목을 출발한 곳으로 정선 아리랑의 숱한 애환(哀歡)과 정한(情恨)을 간직한 유서(由緖) 깊은 곳이다. 또한 뗏목을 타고 떠나는 님과 헤어진 곳이며 강을 사이에 두고 사랑하는 님을 만나지 못하는 애절한 사연을 담아 불리워진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라는 정선아리랑의 ‘애정편’이 전해오는 곳이다. 이를 전하고자 처녀상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