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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마창진 공동르포모임 2기의 여름 철 모임 장면. /이일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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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도 있었고 커리큘럼도 있었다. 그러나 책은 나오지 않았다. 글을 써야 한다는 의지가 점점 약해졌고, 1기처럼 힘들 때 지도했던 김하경 작가 같은 존재가 없었다."
2005년 1기에 이어 2006년 1월에 구성됐던 마창진 공동르포팀 2기가 결과적으로 성과를 내지 못했던 표면적인 이유였다. 표면과는 또다른 이면은 없었을까. 회원이었던 정윤(본명 강종철·마창환경운동연합) 씨와 신미란(경남여성회) 씨로부터 2기 활동과정을 들었다.
구성원은 1기 멤버였던 정윤 팀장과 신미란, 박미영 씨 외에 3~4명이 때에 따라 결합됐다. 이들은 7월까지 등락 속에서도 어느 정도 진척을 이루었다.
2~3월에는 르포책 읽기와 다큐영화 감상, 인물과 공간묘사 집필법 등을 함께 공부했고, 4월에는 1기 때의 마산·창원·진해 골목탐사에 이어 '마산의 골목'에 집중한다는 주제도 설정했다. 5월에는 새 멤버 2명이 합류했다.
약간의 부침 끝에 7월에는 7명의 멤버가 마산의 골목을 7개 지역으로 나누어 취재하기로 했다.
그러나 예정됐던 지역별 기초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기로였다. 이후, 모임 횟수가 한달에 한 차례 정도로 줄었다. 9월에는 단합 겸 등산을 잡았지만, 참석자는 3명에 불과했다.
공동작업의 장점 못 살려…취재 단계서 벽에 부딪혀
경남도 문예진흥기금 지원신청을 하려 했으나 당시의 부진한 모임 분위기로 인해 이것도 포기했다. 모임은 다음 해 1월까지 규칙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하강곡선, 총무였던 신미란 씨의 기억이다.
"일정을 잡는 것 자체가 힘들었어요. 회원들이 르포모임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직장일이나 개인사가 많아지기도 했고. 물론 한두 분 열심히 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를 끌어올리지는 못했어요. 결국 개인별로 취재가 안 됐고, 기초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죠."
◇실패한 '자유 주제' 실험 = 마창진 공동르포 2기 모임이 이 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이들은 2007년 2월에 다시 만났다. 이 때 정윤 팀장은 독특한 제안을 했다. "회원 각 자가 자유주제로 르포작업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정윤 씨는 그렇게 제안했던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같을 필요가 없다고 봤어요. 각자 자기 주제를 취재하고 글을 써서 매번 발표하고, 또 고치고, 나중에 완성작을 묶어서 책을 내면 됐다고 봤죠. 주제를 달리 해도 공동르포의 장점은 살 것 같았죠."
회원들도 이 제안에 동의했고, '유흥업 종사 노동자'나 '국제결혼 이민자들', '삼미특수강 마지막 노조 위원장' 같은 개별 주제가 제시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자유 주제' 공동르포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은 어떨까.
서울에서 삶이보이는창 공동르포팀을 2004년 이후 현재 6기까지 운영하고 있는 김순천 작가는 부정적이었다.
"그렇게 하면 공동작업을 할 필요가 없죠. 접점을 찾고 어려움에 함께 대처하는 공동작업의 장점이 살 수 없으니까요. 모임은 공동으로 하면서 무장해제를 하는 격이죠. 혼자서 르포를 하기 힘드니까 공동르포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신미란 씨의 수첩에 깨알같이 적힌 르포모임 기록이 2007년 2월 이후 중단됐다. "2기가 운용될 때는 분명히 주제가 잡혔고, 커리큘럼도 있었죠. 그런데 정작 밖으로 취재를 나갈 단계에서부터 일이 안 됐어요. 이를 바로잡을 계기나 활력소가 없었고, 점점 더 의욕도 없어졌죠." |
첫댓글 얼마나 힘들었을까...짐작만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