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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완 섬의 악마들 : 학살 중간에 밥 먹기
불운한 사람들
태평양 전쟁 초 일본군에 의한 엄청난 수난을 당한, 미국, 영국, 네덜란드인
수천 명이 일본군에 포로가 되었다. 필리핀에서 잡힌 미군 포로들은 최초에
매우 불결한 상태였다. 그리고 마닐라 근처의 포로수용소로 모이게 되었다.
결국 많은 수가 배를 타고 가서 일본제국의 노예노동자가 되었다.
필리핀에 남아 있던 346명의 미군 포로는 마닐라 북쪽 350마일 떨어진 카바나
-투안 수용소로 갔고, 1942년 8월 1일 이들은 다시 팔라완(Palawan) 섬으로 갔다.
그들은 거기서 비행장을 건설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에 따라서 포로
숫자도 변동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 보초들로부터 항상 잔인한 대접을 받았다.
보초들은 몽둥이로 맞고 차이는 일이 일상이었다. 탈주자는 즉결 처형되었다.
팔라완 수용소
팔라완 수용소는 Camp 10-A로 언급된다. 그곳은 원래 필리핀의 경찰서 부속
건물로 애처롭게 황폐화된 상태였다. 음식은 너무 적었다. 포로들은 매일 벌레
가 끓는 캄보디아 산 쌀로 만든 죽을 수통컵에 받았다. 나무 넝쿨과 같이 끓인
것이었다. (넝쿨은 필리핀 산 감자 과의 줄기). 포로가 일을 하지 않으면 그들은
하루 정량의 30% 만을 주었다.
1942년 12월 6명의 미군 포로가 음식을 훔친 일이 생겼을 때, 포로들을 코코넛
나무에 묶고, 철사로 만든 채찍과 굵기 7-8센티미터의 나무곤봉으로 포로들을
때렸다. 이 야만적인 행동 후에, 일본군은 포로들을 부동자세로 세운 뒤 의식을
잃을 때까지 다시 구타했다. 정신을 회복하자 다시 더 때렸다.
일본군 일병 니시타니는 두 명의 미군 포로가 막사 근처에 있는 파파야 나무
열매를 땄다는 이유로 쇠막대기를 이용 포로들의 왼쪽 팔을 때려 부러트렸다.
의무치료는 존재하지 않았고, 아이오와 출신의 해병 상병 글렌 맥도일은 국소
마취도 없이 맹장수술을 해야 했고, 아무런 항생제도 주지 않았다. 포로들은
말라리아, 괴혈병, 옥수수 홍반 피부병, 각기병과 열대성 괘양에 시달렸다.
심각한 중노동으로 인한 부상과 일본군 보초의 육체적 학대에 포로들은 시달려야
했다. 마침내 1944년 국제 적십자사의 물품이 1월 도착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
물품 꾸러미에서 의약품과 약을 탈취했다.
한 미군인 J. D. 메리트는 특별히 탈출한 경우였다. 그는 팔라완으로 가는 선박에
짐 싣는 일을 하다가 탈출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일본군들이 동료의 물건을 강탈
하거나, 적십자사의 꾸러미를 강탈하기도 했다고 했다. 메리트는 팔라완 수용소의
포로들을 ‘작은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자신들보다 훨씬 힘든 곳이 팔라완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마닐라 선창에서 일하는 미군포로 노동자들을 일본군이 협박할 때,
‘팔라완 포로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가끔은
각서도 쓰게 했다고 한다.
비행장 노동
일본군은 포로들을 팔라완 비행장의 일본군 131비행장대대에 인계했다. 131 대대장
은 나가요시 코지마 대위였고, 미군들은 그를 족제비라고 불렀다. 중위 쇼 요시와라가
병영 중대장, 중위 료지 오자와가 보급장교였다. 오자와의 부대는 타이완에서 출발해
1942년 7월 10일 도착했다. 그 전에 그는 만주에 있었다.
타이치 데구치 상사가 팔라완 섬의 켐페타이(일본군 헌병 및 정보부대)의 책임자
였다. 켐페타이(kempeitai)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누구나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말로 잔인했기 때문이다.
1944년 9월 팔라완에 있던 159명의 미군 포로는 마닐라로 돌아왔다. 일본군은 이
미군포로 150명을 힘들게 일 시키면 활주로 건설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포로들
은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않고 산호자갈을 맨손으로 끌어내서 부수는 작업을 했다.
그들이 청소해야 하는 활주로 구역은 길이가 약 2킬로미터에 폭이 200미터였다.
실제 활주로는 그보다 더 작았다. 포로들은 이외에도 트럭을 수리하기도 하고, 또한
벌목 등의 다양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9월 말이 되자, 시요쿠 코우 장군이 필리핀
전체 연합군 포로의 책임자로 부임했다. 그는 팔라완의 미군포로 150명을 마닐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명령은 10월 중순까지 실행되지 않았다. 그들을 운송할
수단이 비록 없었을 지라도...
희망
당시 미군의 B-24 람브레터 폭격기가 1944년 10월 19일, 팔라완을 단독으로 공격
해서 두 대의 일본군 배가 침몰하고 항공기 몇 대가 피해를 입었다. 다른 람브레터
폭격기들이 10월 28일 다시 나타났고, 지상에 있던 일본군 항공기 60대를 파괴했다.
그래서 미군 포로들의 사기가 높아지자, 일본군은 포로들을 좀 더 나쁘게 다뤘고,
배식을 중단했다. 그들은 포로들 요구를 거절했고, 수용소건물 지붕에 페인트칠을
하는 것은 허락했다. 그렇게하면 미군항공기들이 공격하지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
이었다. 그래서 일본군들은 보급품을 포로 막사 밑에 넣어 놓기도 했다.
다가오는 맥아더
미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10월 19일, 필리핀 레이테 만에 성공적으로
상륙했다. 그걸 모르는 포로들은, 매일 미국 항공기가 날아다니는 걸 보고 해방이
멀지 않았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맥아더는 필리핀 주둔 일본군 사령관 히사이치 테라우치에게 미군 포로학대
에 대한 책임을 물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는 전투원 포로와 비전투원 억류자
모두에 해당되었고, 맥아더는 이를 공식명령으로 하달했다. 맥아더는 일본군에게
전쟁의 관례를 지키고 군인의 신성한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고, 엄숙한 문구로 내용
을 만들어, 이 내용을 담은 전단이 1944년 11월 25일 필리핀 일본군진영에 살포됐다.
변치 않는 미군 항공기의 출현으로 포로들은 공습에 대비하여 세 개의 방공호를 만들
었다. 150피트 길이에 4피트 깊이였다. 일본군은 각 방공호의 입구를 한 사람이 통과
할 크기로 만들라고 했다. 방공호의 지붕은 통나무와 흙을 개어 만들었고 위치는 캠프
주변의 해변 쪽이었다. 아직 완벽한 방공호의 모습이 아닌 상태에서, 의미가 함축된
수평 보강 공사를 시켰다. 그곳에는 또한 여러 개의 2-3명이 들어가는 호가 있었다.
운명의 그날
12월 14일, 일본군 항공기가 미군의 선단의 존재를 알려왔고, 그것은 민다나오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 선단의 목적지가 팔라완 섬이라고 생각했다.
정오에 작업중인 포로들이 모두 수용소로 불려왔다. 그때 두 대의 록히드 P-38
라이트닝 전투기가 시야에 들어왔고, 포로들은 방공호로 들어가라고 명령받았다.
그리고 얼마 뒤 그들은 다시 나왔다. 그러나 요시카즈 사토 중위는 포로들에게 수용소
안에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오후 2시에 경보가 울렸고 포로들은 방공호에 들어
갔으며 보초가 입구를 닫았다.
일본군의 학대가 문화권의 차이라고?
그리고 갑자기, 영화와 같은 일이 진행되었다.
사토 중위의 지휘를 받는 50-60 명의 일본군들은 방공호에 휘발유를 끼얹기 시작
했다. 그리고 횃불로 불을 질렀다. 이어 수류탄이 투척됐다. 덫에 걸린 자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가운데, 일본군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사토 중위를 보고 웃었다. 죽음의
혼란과 고통은 불길 속에 사라져버렸고, 일본군은 그곳에 기관총을 쏘았다.
그리고 대검으로 죽였다. 대부분의 미군 포로들은 그곳에서 나오지 못했고, 야만스런
살해행위가 있었다. 일본군과 가까운 곳에 있던 미군 포로 몇 명은 죽음을 앞두고 그들
에게 달려들어 육박전을 벌였다. 그렇게 해서 몇 명의 일본군도 죽었다.
미 해병 출신 생존자인 루퍼스 스미스 상병은 사다리를 타고 그 지옥을 탈출했다. 4명
의 미군 장교, 중위 헨리 찰스 나이츠(해군 치과의), 대위 프레드 브루니, 칼 망고 소위
(미 육군 군의관), 준사관 글렌 터너. 일본군이 휘발유를 끼얹을 때 이들은 참호를 탈출
했다.
망고 소위는 당시 옷에 불이 붙었고, 일본군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살려달라고 애원
했으나 일본군은 기관총으로 그를 쏴 죽였다.
약 30-40명이 미군이 이 학살장소를 탈출했고, 높은 철조망 밑을 파놓은 곳이 있었다.
그곳은 비상탈출용 도주 루트였으나, 탈출은 비상시에만 하기로 포로들은 합의를 봤
었다. 그들은 해변 위의 벼랑에서 떨어지거나 혹은 뛰어내렸다. 그리고 바위와 숲에
몸을 숨겼다.
더글라스 보규 해병 병장의 회고
“약 30-40명의 포로가 담장 밑을 통해서 물가로 탈출했다. 그리고 일부 인원은 곧
물에 뛰어들어 푸에르토 프린세사 만으로 헤엄쳐서 건너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물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나는 작은 바위틈에 몸을 숨겼고, 그곳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리고 위쪽에서 학살의 소리들이 계속 들려왔다. 그들은 다른 방공호에 다이나마이트
를 터트리기도 했다. 난 그곳이 끝나면 곧바로 바위들을 조사하러 내려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발견되면 바로 총으로 쏠 것이었다. 사람의 살이 타는 악취는 매우
강했다. 잠시 후, 일본군들은 바위틈에서 발견된 포로들을 다시 끌고 갔고, 끌려나
오는 즉시 살해되었다. 신의 은총으로 나는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있었다."
유진 넬슨은 59해안포병대였고, 그는 해안의 숨은 곳에서 일단의 포로들이 절벽의
중간에 숨어 있는 것을 봤다. 그들이 바위에서 나오더니 일본군을 향해 달려가 머리
를 쏴달라고 했다. 일본군들은 웃었고 총검으로 그들의 복부를 찔렀다. 그들이 비명을
지를 때 다른 총알이 그들의 불행의 끝을 주었다.
일본군은 항상 명랑한 기분을 유지하고 있었고, 포로들의 고통을 내버려두었다. 12명
이 이런 상태로 죽었고, 넬슨은 세 시간이나 숨어 있었다. 일본군은 미군 시체들을 땅
구멍에 발로 차 넣었다. 넬슨은 완전히 몸을 숨긴 상태는 아니었으나 한 일본군은 그를
발견했다. 그리고 동료들을 향해서 또 한 명의 죽은 미군을 발견했다고 고함을 질렀다.
그때 일본군의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고,
뜨거운 음식을 좋아하는 그들은 살해 추적을 중단하고 막사로 밥 먹으러 돌아갔다.
얼마 뒤, 일본군이 그가 있는 장소로 가까이 왔고, 넬슨은 물속으로 뛰어들어 얼마간
물속으로 잠영을 했다. 그가 수면으로 떠올랐을 때, 약 20명의 일본군이 그를 향해 총
을 쏘았다. 넬슨은 다리와 갈비뼈, 머리에 총을 맞았다. 그 상태에서 넬슨은 물에 떠서
조류에 떠내려갔다. 넬슨은 결국 만의 남쪽 해안에 다다랐다.
무전병 조셉 바타(Barta)는 가족의 양계를 하다가 1934년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난 처음에 방공호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군 장교가 군도를 들고 안에 들어
가라고 했다. 약 5분이 지나서, 나는 소총과 기관총 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는 몰랐다. 난 밖을 내다보았고 몸에 불이 붙은 몇 명에게 일본군이 총을 쏘는 것을
봤다. 그 중 한 명은 내 친구인 론 허바드였다. 그래서 나와 몇 명은 담장 밑을 파놓은
곳으로 갔다. 담장 밖을 나오자, 그때 뒤돌아보니 일본군이 방공호에 횃불을 던지는 게
보였고, 다른 어떤 일본군은 휘발유통을 던졌다.
학살은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 되었다. 일부 부상 미군 포로들은 산채로 화장 당했다.
수영으로 도망치는 포로들은 총에 맞았고, 일본군은 상륙용 바지선을 타고 돌아다녔다.
그 바지선 위에는 일본군 상상 토루 오가와가 있었다. 생존자인 미 해병 글렌 맥도일은
(마취 없이 맹장수술을 받았던) 수용소의 쓰레기 더미에 다른 두 명과 같이 숨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헌병이었던 찰스 스트리트였고, 그는 해변으로 도망치다가 일본군의 총
에 맞아 죽었다. 다른 한 명은 어빙 어거스트 이반스로 59해안포병대 소속으로, 일어
서서 일본군을 향해 말했다.
“좋아, 이 개 같은 일본 새끼들아. 내가 여기 있다. 그리고 나를 잊지 말아라!”
그 역시 총에 맞았고 몸은 불태워졌다. 웬일인지 맥도일은 발견되지 않았고, 그때
일본군 5-6명이 부상당한 미군을 대검으로 찌르는 것을 목격했다. 난 그들이 총검
에서 찌른 몸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다른 일본군이 와서 쓰러진 자에게
휘발유를 부었고 불을 붙였다.
난 한 동료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었고, 역시 그들은 총으로 쏘고 불태
웠다. 일본놈들은 그의 발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다른 일본군들은 웃었고,
또한 총검으로 다시 찔렀다. 같은 식으로 다른 포로들의 발과 손에 휘발유를 부었다.
포로가 쓰러지면 휘발유통을 통째로 그에게 던져서 불태웠다.”
일본군이 생존 포로 수색을 끝냈을 때, 여전히 몇 명이 발견되지 않고 살아 있었다.
몇 명은 하수구에 숨어 있었다. 그 하수구에 일본군이 불을 비추자 하수구물에 잠수
하여 발견되지 않았다. 밤이 오자 그들은 수영으로 건너서 탈출하려고 시도했다.
거기서 5마일을 수영해야 뭍에 닿을 수가 있었다. 몇 명은 성공했다. 그 중에는
루퍼스 스미스도 있었다. 그는 상어에게 왼팔을 심각하게 물어뜯겼으나 간신히
건너편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146명의 병사와 4명의 장교가 팔라완 섬 수용소에 있었다. 이 1944년 12월
14일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자는 단 11명이었다.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바다를 수영
으로 건너서 팔라완 식민지 관할 유형지를 만났다. 다행히도 이곳의 일부 장교는
(필리핀인 것 같음) 지역 반일 게릴라 활동과 연계된 사람들이었다.
다른 미 해병 상병 도날드 마틴은 성공적으로 수영을 해 나갔으나, 섬에 도착하자
북쪽으로 갔고 그 이후로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팔라완 섬의 건너편에는 서양의
식민지 정부가 만든 필리핀 민간 수감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건너 온 미군 포로들
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옷을 주었다. 그리고 필리핀 항일 게릴라들에게 연결시켜
주었다. 그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릴라들은 이 미군포로
들을 모서리 해안으로 데려갔고, 거기서 미군 수상항공기를 불러 레이테만으로 탈출
시켜 주었다. 그리고 포로들은 미군 당국에 있었던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바타(Barta)는, 일본군 켐페타이가 지구상에 걸어 다니는 인간들 중에서 가장 비인간
적인 것으로 묘사했다. 그는 수영으로 건너온 뒤에, 10일간 정글을 헤매다가 일본군
보초 1미터 부근까지 통과하면서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필리핀 인들에게 도착하여
잘 숨었다. 지역의 무당이 그의 상처를 펼쳐 놓고, 회색 닭 깃털을 넣은 구아바 잎을
끓인 물을 상처에 뿌려주었다. 무당은 춤을 추면서 주문을 외웠다. 그는 탈출자인
보그와 맥도일을 만났다. 그리고 항일 게릴라들의 도움으로 해안 모서리에서 수상
항공기로 탈출했다.
팔라완의 증언들
이 팔라완 수용소의 미군 포로 학살에 대한 민간인 증언이 부재한 상태에서, 일부
필리핀인들이 그날 밤, 수용소장인 나가요시 코지마 대위와 켐페타이 병사들이
축하행사를 했다고 미군에게 증언했다. 이때 이 필리핀인들은 일본군에게 미군
포로들이 어디 갔냐고 물었고, 한 일본군이 미군 폭격에 죽었다고 발산적으로
말했고, 다른 어떤 일본군은 다른 수용소로 갔다고도 서로 상이한 대답을 했다고
증언했다.
이런 일본군의 잔인한 짓의 증거가 있었다.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포로수용소에
그것을 기록한 일기장을 두고 간 것이다. 12월 15일, 상황은 갑자기 바뀌었다.
150명의 포로는 학살되었다. 포로들은 죽기 전에 활주로 작업을 하고 기계수리를
하는 등의 중노동을 했다.
현재 그곳에서는 “좋은 아침입니다. 상사님,”이란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지난 (1997년) 1월 9일, 오랜 부재 끝에 그 난 자동차 수리소를 방문했다. 현재의
수리소 자리는 그저 쓸쓸한 모양이었다. 우리 전쟁포로들은 그 수리소 소속되어
일했었고, 이제는 세월의 파도 속에 씻겨 내려가 해변의 하얀 뼈대만 남아있을 뿐
이었다. 더욱이, 많은 포로들의 송장이 있었고 그 냄새는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나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 흔적들
팔라완이 미군 41사단 186연대에 의해서 해방되자, 찰스 사임스 소령이 지휘하는
601병참중대는 그곳에서 살해당하고 불타고 파괴된 방공호 자리에서 미국인 사체와
시체일부를 발견했다. 병참 중대는 1945년 3월 동안 초오 79구의 개인 사체를 발견
했다고 보고했다. 보고서는 이렇게 규정했다.
“26개의 골격, 일부는 뼈에 살이 아직도 붙어 있었고, 그 골격들의 해골에는
총알구멍이 나 있거나, 강한 도구에 충격을 받아 짓뭉개진 상태다. 일본군은
학살 후에 사체를 모아 한 곳에 던져놓은 듯 하다. 대부분의 사체는 방공호
에서 뒤죽박죽인 상태로 발견되었고, 방공호 입구에서 몰려 있었다. 이는 포로
들이 불을 피해 최대한 밖으로 나가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두 개 방공호의
사체들은 엎드린 상태로 있었고, 팔은 늘어져 있었고 손가락은 땅을 판 듯 하다.
자유를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일본군의 연합군과 민간인들에 대한 잔학행위는 전쟁 후에 많은 정확한 문서들
로도 발견되었다. 당시 독일에 대해서는 누렌베르크 재판이 전 유럽인들에 초미의
관심사였다. 연일 언론이 떠들었다. 이로 인해 극동에서 잡힌 미국인들에 관해서도
군사법정이 준비되고 있었다.
맥아더가 본질적으로 이 태평양 전선 전쟁범죄를 공판을 담당하고 있었다.
법정에서는 부인하는 용감한 황국용사들
1948년 8월 2일, 팔라완 학살 재판이 요코하마에서 시작되었다. 몇몇 하급장교가
이 재판에 출석했으나 그러나 학살명령권에 관해서는 그 최종 명령자를 확인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 문제로 기소된 일본군 대부분은 직접 가담했던 인물들이
아니었고, 또한 푸에르토 프린세사 사건에도 연루되어 있었다.
그들도 책임을 명령을 내린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태도를 취했다. 또한 그들은 재판
에서 자신들의 손에 죽은 포로들의 운명에 관해 매우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확실한
것은 1944년 5월에 다른 수용소에도 이러한 지시사항이 똑같이 내려진 것으로 밝혀
졌다.
그때 연합군은 수용소들을 습격하기 시작했었다. 연합군은 이 연합군 포로수용소를
정확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일본군들은 이 포로들이 연합군에 해방될 경우 자신들
에게 총부리를 겨눌 것으로 두려워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이 자진해서
송환한 포로는 단 1명도 없다. 자세히 보면, 이런 학살행위는 결국 포로수용소장의
직접 명령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몇 명이 미군 생존자들이 이 공판에서 팔라완 학살을 증언하기 위하여, 그리고 전
학대자들을 대면하기 위하여 극동으로 돌아왔다. 질의에서, 해병 병장 보규(Bogue)
는 좁은 감옥 안에서의 상등 일병 토미사부로 사와의 학대행위를 고발했고, 기소의
이유를 묻자, 보그 병장은 “그들을 교수대에 목을 걸어버리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공판이 시작 즈음에, 기소 내용에, 필리핀 세이치 테라다 소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2공중사단의 본부에서 보내는, 12월 13일, 팔라완 131비행장대대에 ‘미군 포로
150명을 절멸시켜라,’는 무전기 송신 훈령이 청취되었음을 포함시켰다. 이에 따라
각 일본군 병사들에게 30발의 실탄이 분배되었고, 대대장은 대원들을 모아놓고, 곧
연합군의 침공이 임박하여 유감스럽지만 연합군 포로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했
다고 한다.
그 다음, 쇼 요시와라 중위가 대원들에게 착검을 명령했고, 실탄 다섯 발을
삽탄시켰다. (일본 제식 소총의 기본 삽탄 용량) 그리고 이어서 학살이 일어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요시와라 중위는 전쟁 후에 발견되지 않았다. 수용소장 코지마
대위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실상, 팔라완 포로수용소의 군인 모두가 찾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당시 필리핀 전투에서 일본군은 8만 명이 죽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후
전투나 질병으로 죽은 것이 분명하다. 이들 중 많은 수는 일본군 퇴각 속에서 사라
졌다.
일본군이 항복하고 몇 주가 지나서, 연합군은 많은 서류를 노획하여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의 전함 미조리호에 실었다. 그 몇 주 동안, 수백만 장의 일본군 전시 서류가
파괴되었다. 파괴한 자들은 일본의 군인과 민간인들이었다. 연합군 전쟁범위 공판의
참모들은 일본의 동원해제 사무소에, 전쟁범죄가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한 동원해제
중지 요청을 요구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연합군은 조금 더
나은 결과를 얻었을 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났고, 미국인들은 그들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1941년부터 시작된 전쟁범재 행위에 관한 그 어떤 책임감도 현재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들의 행적에 관한 정보를 드러
내는 사람들의 것을 부정하고 있는 입장이다. 미국이 현재 일본에 준비시키고 있는
일본의 새로운 방어시스템이 새로운 국가주의적 팽창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사람들은
걱정하고 있다. 150명의 미군포로에 대한 야만스런 학살은 분명히 정략적인 우선순위
로 자행된 건 아닌 것 같다. 몇 명의 생존자는 그들 정부에 여전히 올바른 정의를 탄원
하고 있다.
재판의 마지막에 관련된 6명의 피고는 학살과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선고를
받았고, 10명은 2년 형을 받았다. 이미 죽은 켐페타이의 하사관 타이치 데구치는
1950년 7월, 30년 중노동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중형을 받은 일본 전쟁
범죄자들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모두 감형되고 석방된다. 그렇게 한 사람은 다른
아닌 맥아더였다.
1949년 3월 23일, 토루 오가와 131비행장대대의 중대장은 300명의 미군 포로를
남용하여 138명을 죽음으로 몰게 한 이유로, 또한 그 포로들을 갑작스런 공격으로
학살을 명령한 이유가 유죄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2년의 중노동형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이후 더 감형 받게 된다.
감옥에서 보그 병장을 구타했던 토미사부로 사와는 팔라완에서 미군포로를 학살
하는데 가담했고 적어도 3명의 포로를 죽였다고 자백했다. 그는 1949년 3월 1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 또한 감형되었다.
전쟁 중의 야만적인 행위로 선고를 받고 복역하던 2차대전의 일본군들은, 전쟁이
끝난 13년인 1958년 12월 31일 모두 사면되었다. 그들은 도쿄의 수가모 감옥에서
일반 특사로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에 분노한 태평양 전쟁 미군들은 미국정부
가 이것을 공무상을 완전히 종료시키고 잊었다고 분개했다.
1952년 수습된 팔라완 희생자 시신 123구는,
미조리의 세인트루이스 근처 제퍼슨 군사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그곳에 단체 무덤이 있고, 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글은 데니스 라인이 1997년에 발표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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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 넷, 미국인들의 리플)
나는 그 학살 장소를 매일 걸어 다닌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해 조용히 기도한다.
그 일본군들은 그렇게 공판에 회부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다. 필리핀인들은 그들은
개처럼 사냥해 거리에서 죽였다. (의사 제러드)
2008년 베테랑 데이 전까지 나는 이런 사실을 몰랐었다. 참전자들의 “우리는 여전히
결코 잊지 못한다.”라는 강렬한 문구를 나는 봤다. 이 희생자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
를 빈다. 고문, 질병, 기아, 그리고 무자비한 학살. 그들의 삶은 헛되지 않았다. 우리가
절대 잊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스콧 홀리데이)
내 남편의 삼촌인 제임스 듀이 그래너트가 이 팔라완의 학살에서 죽었다. 그들의 가족들은
1947년 미 해병대에서 편지를 보내기 전까지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는지 자세하게 몰랐었다.
그 편지 안에는 3명의 생존자의 주소와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 편지에는 8명의 미군 포로가
건너편으로 수영해서 건너갔고 필리핀 게릴라들과 만났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미군 수중
으로 돌아왔다. 그 편지에 나온 3명의 이름은, 더글라스 보그, 글렌 맥도일, 루퍼스 스미스
였다. 이글에 감사한다. 더 자세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내 남편이 이 글을 읽으면 눈물을
흘릴 것이다. (카렌 마일즈)
얼 잭슨 밀스: 내 아버지다. 아버지는 해병대로 1941년 12월 스코필드 병영에 배속됐다.
그리고 아버지는 태평양의 여러 섬들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아버지는 전쟁에 관해 말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어릴 적 친구 새미 리 콜드웰이 있었다. 그들은
텍사스 샌 앵겔로에서 같이 자랐다. 난 아버지가 친구 샘이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하게는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샘이 일본군에 잡혀서 죽었다는 것만 알고 계신다. 여전히
기억하고 계신다!!! (마이클 리 밀스)
내 할아버지는 제위트 아담스이고 해병대 병장이었다. 그리고 팔라완에서 학살된 사람
중에 하나다. 영화 ‘The Great Raid’는 그 학살을 일부 보여주고 있었고, 우리 아버지는
그 영화를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영화내용을 자신에게 말하면 고통스러우니 우리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 아버지가 여덟 살 때 할아버지는 그 학살에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러한 글의 사실에 여전히 굉장히 분노하신다. 매장식에서 할머니가 깃발을
받으셨고, 나도 그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랜디 아담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관해서
같이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pay back이었다. 우리 옆집의
아저씨도 30세의 나이로, 바탄의 죽음의 행진과 그 이후의 짐승 같은 대접 때문에
죽었다. 구타, 질병 등의 이유로 죽었다. 한가지는 확실하다. 만약 그 아저씨가 포로가
되었을 경우 그런 일을 겪을 줄 알았다면, 한 명이라도 일본군을 더 죽이고 싸우다
죽는 걸 택했을 것이란 점이다. (제임스 그린)
내 이름은 윌리엄 문디이고, 글렌 맥도일은 내 친척 아저씨다. 그는 팔라완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전쟁포로 용사다. 정말 믿을 수가 없다. 난 공판의 끝에 그들이 받은 쉬운 처벌
에 분노한다. 이런 조크가 어디 있나. 1981년 난 일본의 육군 캠프 ‘자마’에서 근무했다.
내가 그 섬을 떠날 때 박살내야 했었다. (윌리엄 문디)
내 아버지는 윌리엄 볼처스이고 팔라완의 생존자다. 지금은 캘리포니아 유바에서 살고
있다. 아버지는 올해 88세이고 팔라완 출신이다. 아버지는 포로시절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냥 코레히도 60포병대의 병사였다는 것만 알고 있다. (조 볼처스)
그 시간들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야만적으로 된다. 전쟁은 야만성을 드러내게 했다. 사람
속의 악마는 또한 명예, 용기, 아량이 되기도 한다. 아버지는 미 육군이었고, 태평양전쟁
동안 동굴에서 싸운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전쟁 이야기를 딱 한번 하셨다. 내 딸과 나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7월 4일의 열병식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본군을 동굴 쪽으로 밀어붙였다. 우리 지휘관이 일본군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했다. 그래서 휘발유 통을 굴려 넣고 불을 질렀다. 그때 그들이 지르던
비명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그것이 아버지로부터 들은 2차대전에 관한 모든 것이다.
전쟁은 지옥이다! 신이여, 우리가 서로 죽이지 않고 평화롭게 해 주소서. (빌 덕워스)

첫댓글 우리민족의 가슴아픈역사 여명의눈동자 최대치역에 최재성님이 잘그려냈던것 같습니다
여명의눈동자나 모래시계연출자 김종학pd님 혹시 군과인연이
유독 왜놈들은 정도가 심한거 같습니다..저런 놈들과 바다 하나 사이를 두고 있으니(그나마 다행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