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Time
Aretha Franklin & Louis Armstrong
Smmertime and the livin’is easy Fish are jumpin’ and the cotton is high Oh your Daddy’s rich and your ma is good lookin’ So hush little baby, don’t you cry So hush little baby, don’t you crySummertime and the livin’is easy Fish are jumpin’and the cotton is high Oh your Daddy’s rich and your ma is good lookin’ So hush little baby, don’t you cry One of these mornings You’re gonna rise up singing Then you’ll spread your wings And you’ll take the sky But till that morning There’s a nothin’can harm you With daddy and mammy standin’by One of these mornings You’re gonna rise up singing Then you’ll spread your wings And you’ll take the sky But till that morning There’s a nothin’can harm you With daddy and mammy standin’by With daddy and mammy standin’by With daddy and mammy standin’by
여름, 삶은 평온하구나물고기는 뛰어오르고, 어느새 길게 자란 목화들오오, 네 아빠는 언제나 넉넉하고엄마는 정말 미인이란다그러니 아가야 울지 말고 조용히 해보렴어느날 아침, 너도 크게 노래를 부르겠지활짝 나래를 펴고,하늘을 날게 될거야그 아침이 오기 전까지이곳에선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 한단다아빠와 엄마가 언제나 네 곁을 지켜 주잖니
Janis Joplin
작 사 : Du B. heyword 작 곡 : G. Gershwin 유명한 작곡가인 조지 거쉰(George Gershwin)이 [포기와 베스]라는 오페라를 위해 1935년에 만든 곡으로. 오페라를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가수는 정해지지 않아서 훗날 빌리 할리데이, 프랭크 시나트라, 엘라 피츠제럴드,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해서 마일즈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샘 쿡, 빌리 할리데이, 재니스 조플린 ,판테이시아등 수 많은 가수와 작곡자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불려지고 편곡 되어저 왔다고 합니다. Summer Time은 원래 아이를 잠재우는 자장가. 거슈윈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서 어부의 젊은 아내 클라라가 아이를 잠재우며 부르는 노래.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 나와서 유명해진 곡으로 "듀보스 헤이워드"의 가사에 "조지 거쉬인"이 곡을 붙인 1935년 작품입니다. "거쉬인"은 이 곡이 흑인 영가로 인기있었던 곡에서 힌트를 얻어 작곡된 것임을 밝혔습니다. "피곤한 흑인들에게 여름은 더욱 힘든 계절입니다. 더위에 맞서 싸우며 하는 일도 훨씬 고되고 또한 자연재해(폭풍우) 등도 이들의 고통을 더해줍니다. 이런 그들에게 유일한 오락은 저녁나절의 주사위놀음이죠. 그러나,이 놀음판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며 이야기는 전개됩니다. 바로 이때 1막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아기를 재우며 클라라가 부르는 노래가 가장 유명한 "Summertime"인데, 폭풍 전야와도 같은 극적 효과를 줍니다.
Sylvester Austin, 1929 ~ 2001
미국플로리다출생 재즈 색소포니스트 1945년 16세나이에 Danny Boy 연주로 주위를 놀라게 함, 콜맨 호킨스,레스터 영,소니 스티트 등의 악단에서 활동 30 여장의 독집 앨범 발표 1950년대 중반부터 자신의 악단으로 전국 투어공연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 나와서 유명해진 곡으로 "듀보스 헤이워드"의 가사에 "조지 거쉬인"이 곡을 붙인 1935년 작품입니다. "거쉬인"은 이 곡이 흑인 영가로 인기있었던 곡에서 힌트를 얻어 작곡된 것임을 밝혔습니다.
"피곤한 흑인들에게 여름은 더욱 힘든 계절입니다. 더위에 맞서 싸우며 하는 일도 훨씬 고되고 또한 자연재해(폭풍우) 등도 이들의 고통을 더해줍니다. 이런 그들에게 유일한 오락은 저녁나절의 주사위놀음이죠. 그러나,이 놀음판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며 이야기는 전개됩니다. 바로 이때 1막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아기를 재우며 클라라가 부르는 노래가 가장 유명한 "Summertime"인데, 폭풍 전야와도 같은 극적 효과를 줍니다.
Louis Armstrong, 1901년 8월 4일 ~ 1971년 7월 6일
재즈의 천재 루이 암스트롱. 그에 의해서 재즈는 세계인이 사랑하는 음악이 된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다. 재즈의 발상지는 뉴올리언즈였는데 미국에서 유일하게 홍등가가 있는 곳이었다. 미국이 제1차대전에 참가하게 되면서 해군기지였던 뉴올리언즈의 홍등가는 폐쇄되고 이를 계기로 그곳에서 활동하던 뮤지션들이 미시시피강을 거슬러 올라가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캔사스시티 등지로 흩어졌다. 이런 현상은 재즈를 미국 전역에 보급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공업이 급속도로 발달하는 북부의 여러 도시에 남부의 흑인들이 이주하여~ 남부의 흑인문화가 북부 도시의 흑인문화로 옮겨갔다.
1920년대에는 재즈의 중심이 뉴올리언즈에서 시카고의 사우스 사이드 흑인가로 옮겨졌다. 이 시대의 주인공은 뉴올리언즈 출신의 King Oliver와 그의 제자인 Louis Armstrong 이었다. 특히 루이 암스트롱이 20년대에 보여주었던 연주 기법은 혁명적인 것으로 그 자유분방한 애드립 플레이와 편곡이 낳은 허구적인 로맨티시즘은 소박한 뉴올리언즈 재즈를 근본에서부터 바꾸는 작용을 하였다. 미국 뉴올리언즈에서 1901년 8월 4일 태생으로 빈민굴에서 자란 소년이 미국의 국보급 존재로 성장해 소외된 흑인들에게는 우상이었고, 미국인들의 자존심이었다.
열세살의 어린 루이는 1912년 새해 전야축제의 들뜬 마음으로 의붓아버지의 권총을 들고 거리로 나와 신나게 방아쇠를 당겨 곧바로 소년원에 수감된 것이 음악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드럼을 배우다가 트럼본을 거쳐~ 코넷( 트럼펫과 비슷한 악기)을 불게 되었다. 이 악기를 배우게 되며 뮤지션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된다. 출감후 고향인 뉴올리언스에서 직업적인 음악인으로 출발해 곧 최고의 연주자로 떠오른다. 1922년 시카고로 이주하고 1925년에는 코넷에서 트럼펫으로 악기를 바꾼다.
초창기에 거쳐간 밴드로는 King Oliver Fletcher Henderson 등의 오케스트라가 있었으며~ 1927년부터 그의 주악기로 알려진 트럼펫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후 인기는 더해갔다. 화려한 트럼펫 사운드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재즈의 대명사가 되어 달러 박스에 앉게 된다. 1944년에는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오르는 신화를 창조한다. 그는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아티스트가 된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 소리는 어느 음역에서나 고르게 따뜻했다. 고음에서도 그의 소리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그는 이러한 사운드로 한없이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냈다. 그는 급작스러운 느낌으로 애들립을 시작한다. 그의 찬란한 솔로가 시작되면 누구든 쉽게 그의 소리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개성적인 사운드로 제시-전개-반론-긴장-결론으로 이어지는 논리가 뚜렷한 음악적 대화를 펼친다. 이러한 논리를 박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펼치는 것이 그의 천재성이다. 그가 남긴 업적으로 트럼펫계에 준 영향은 절대적이다. 테너 색소폰의 oleman Hawkins의 스타일 형성 등 다른 악기 주자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빅밴드 어레인저에 영향을 주어 오늘날의 Buddy Rich 악단에까지 계승되고 있다.
재즈 보컬리스트에게 끼친 영향으로 흥얼거리는 Scat Vocal과 가사를 자유롭게 바꾸거나 반복하는 특이한 창법을 개발했다. 스캣 싱잉은 "라라라", "우우우" 등 의미없는 의성어를 사용하는~ 보컬 임프로비제이션 형태인데, 루이 암스트롱이 녹음 도중 악보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즉흥적으로 "두비두비두"라고 흥얼거린데서 비롯한 것으로~ 오늘날 재즈 보컬에서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재능은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재즈인들은 자신만의 소리를 내야 한다는 자각을 갖기 시작했다. 스타일리스트들이 탄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재즈는 집단적인 예술에서 독주자의 예술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루이 암스트롱은 더블타임주법 (정해진 템포보다 배가 빠른 속도로 펼치는 애들립, 반대로 하프타임주법도 있다.)을 활용했고~ 일반화된 부가화음 수법과 스캣 창법 등을 창시, 보급했다. 40년대 후반부터 가수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그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대중을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이기를 원했다. 때로는 구수한 만담으로 사람들을 웃기기도 했다. 이것이 오히려그의 위대성을 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트럼펫 연주 외에 허스키한 목소리를 앞세운 보컬리스트로도 맹활약했으며 영화 `굿모닝 베트남`을 통해 히트한 `What A Wonderful World`는~ 특히 한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루이의 대표적 히트곡으로 꼽힌다. 아쉽게도 1971년 7월 6일 뉴욕에서 숨을 거뒀다. 1920년대 후기부터 1930년대 초기에 '핫 파이브'(Hot Five)의 이름으로 취입된 수십곡은 재즈 사상(史上) 불멸의 명반(名盤)이라 하겠다. 재즈 사상의 거인이며 희대의 솔리스트였던 그는 재즈 보컬리스트로서도 제1인자였다. 70세가 넘기까지 현역으로 활약했던 그는 일찍이 한국에서도 연주 공연을 가진 바 있고 영화에도 자주 출연하였다. 재즈의 산 역사이며 증인이기도 하였던 그의 절정기는 1930년을 중심으로 한 몇해 동안이었다.
Janis Joplin, 1943년 1월 19일 ~ 1970년 10월 3일
남성 중심의 세계에 던져진 세이렌(Sirens)의 마녀록 음악이 대중음악의 한 주류로 자리잡은 시기는 불과 5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으며 그 기간 동안 록 음악의 역사는 위대한 저항과 승리의 시간이자 동시에 패배와 굴종의 시간이기도 했다. 많은 음악평론가들이(특히 국내에서는 '강헌' 같은 음악평론가에 의해) 록(rock)이 마치 민중가요이자 저항가인 양 높이 추켜세워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어쩌면 꿈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록 음악이 반항적 메시지 전달자로서의 전성기는 사실상 60년대로 한정해야 하기 때문이다.그후 너바나(Nirvana)의 커트 코베인 같은 인물은 일종의 오파츠(Out Of Place ARTifactS)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철저히 상업적이고 체제 내 반항적인 구두선(口頭禪)에 멈춰 있었다. 그 대단했던 록의 황금기를 빛낸 록커들 중에서도 사람들은 압축해서 '3J' 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3J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들은 앞서 이미 다룬 바 있는 The Doors의 짐 모리슨(Jim Morrison),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그리고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제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이다.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미국은 아직 대통령 선거의 승자가 누구인지 결정되지 않았다. 이른바 미국판 '고부갈등(고어와 부시)'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번 선거는 미국이란 나라가 아직까지 WASP가 지배하는 사회이자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 사회 내의 마이너리티(Minority)들에겐 아직도 그 문호가 닫혀있는 사회라는 것을 엿볼 수 있게 한다.(이 부분은 나중에 기회가 닿는 데로 '바람구두의 세상읽기'에서 다룰 것을 약속드린다.) 대통령 후보 중 한 사람으로 미국 백인사회 주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인물이자 보수적인 미국사회에서도 보수적인 지역인 텍사스 주지사 출신인 부시 후보를 살펴보는 것으로 제니스 조플린을 이해하는 한 축으로 삼는 것 역시 재미있을 것 같다.미국에서 가장 완고하고 보수적인 남부의 한 주인 텍사스주에서는 작년(1999년)에 일단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흑인을 차에 매달아 찢어 죽이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미국이란 사회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 보수적이고, 전근대적이자 소수에 대해서 관용적이지 못한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의 일단에 불과하다. 제니스 조플린은 그런 미국 텍사스의 소도시 포트 아더(PORT ARTHUR)에서 태어났다.텍사스에서 가장 못생긴 계집애에서 발퀴레로제니스 조플린은 생전에 그녀 특유의 개방적 성격 탓에 성장기에 그곳의 완고한 분위기 로 인해 많은 갈등과 불만을 가지고 살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유난히 보수적인 텍사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조플린은 어려서부터 별난 아이로 취급받기 일쑤였고,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텍사스는 남성중심의 사회(가부장적)였다. 그림 그리기와 시를 좋아했으며 오데타와 레드벨리 같은 흑인 음악을 즐겨 들었다. 자신의 말대로 "주말이면 남자애들과 어울려 영화 보러가고 콜라나 좋아하는 텍사스 여자 아이들"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녀는 또래 친구들로부터 늘 따돌림을 당했고, 거기에는 못생긴 그녀의 외모도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친구 말을 들어보자."순진한 애라서, 아마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경험이 없었을 거예요. 조플린이 고등학교를 돌업할 때까지는 처녀였다고 확신해요. 그런데도 그 애는 무슨 대단한 경험이라도 해본 것처럼 굴었어요." 그녀는 그럴수록 점점 더 자기 속으로 파고들었다. 조플린은 이때부터 이 세상에 기댈 곳은 없다고 생각했으며 평생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점차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것에 익숙해졌다. 제니스 조플린은 18세 되던 61년 고향 텍사스를 떠나 휴스턴에서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5년간 여기저기 떠돌며 일하고 노래하는 고된 시절을 경험했다.그녀는 이 기간 동안 세상살이의 힘겨움과 더러움을 절감했고 세상이 점차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아예 저버리게 되었다.(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믿음마저 없는 사람들은 체념하고 현실순응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가 바라고 또한 적극 퍼뜨리는 인간상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진보의 이상은 어둡다.) 희망을 버린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더러운 세상을 저주하거나 술과 약물에 젖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당시 록음악계 역시 남성중심의 세계였던 탓도 역시 크게 작용한다. 그녀의 말투는 점점 거칠어졌고 행동은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오직 노래만이 그가 완전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불멸의 진주(Pearl), 제니스 조플린최초의 백인 여성 록커로 평가되고 있는 그녀는 최고의 백인 여성 블루스 싱어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10대 때부터 블루스(BLUES)와 포크뮤직(FOLK MUSIC)에 심취한 그녀는 61년 텍사스에서 시작된 CLUB 생활을 62년 샌 프란시스코로 옮겨 활동 중 대학을 다니기 위해 다시텍사스로 온 뒤 66년 샌 프란시스코에 다시 정착한다. 이때 LOCAL BAND인 BIG BROTHER & THE HOLDING COMPANY를 만나 그녀가 VOCAL을 맡아 활동을 시작하였다. 66년 6월에 데뷔 공연을 갖고 소규모 레코드사인 MAINSTREAM과 계약을 맺은 후 이들은 67년 8월 MONTEREY POP FESTIVAL에 참가하여 JANIS JOPLIN의 폭발적인 창법과 육감적인 무대 매너에 의해 인기를 얻었다.
이에 힘입어 주로 DEMO TAPE으로 구성되어 졸속 제작된 첫 앨범이 9월에 발표되어 호평 받았으나 앨범 제작의 질은 형편이 없었다.(이 ALBUM은 71년 COLUMBIA에 의해 재발매 되었다.) 68년 초 새로운 매니저와 함께 COLUMBIA사로 이전한 이들은 곧 2집 ALBUM인 CHEAP THRILL을 발표한다. 여기서 PIECE OF MY HEART가 HIT하고 지금까지도 인기가 있는 SUMMER TIME,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노래한 BALL AND CHAIN등이 수록되어 곧 엄청난 판매가 이루어졌다. 허나 GROUP 해체 설이 나돌더니 그 해 말에 해체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평론가들이 가장 이상적인 조합이라 말하는 빅 브라더 & 더 홀딩 컴퍼니와의 결별은 서로에게 음악적인 손실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고정 BAND 없이 여러 BACK BAND를 구성해 그때그때 공연 및 녹음 활동을 하였다. 이때 KOZMIC BLUES를 취입하여 다시 한번 대성공을 이룩한다. 이후 HOLDING COMPANY와 재결합, 또 결별 후 새로운 BAND "THE FULL TILT BOOGIE BAND"를 구성해 ALBUM PEARL의 녹음을 끝냈으나 당시 약물복용과 알콜을 탐닉하던 그녀가 1970년 10월 4일 HOLLYWOOD HOTEL방에서 헤로인 과용으로 사망하고 말아 소위 ROCK & ROLL VICTIM이라는 명단에 오르고 말았다.
그녀 사후에 발매된 이 ALBUM에는 ME & BOBBY MCGEE가 HIT되었다. JANIS의 음악은 보통 SUMMER TIME을 들어보고 좋아지지만 곧 그녀의 다른 노래에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이다. 최초의 여성 ROCKER라 할 수 있는 그녀의 음악은 GREATEST HIT이라도 한번 꼭 들어보기를 강권한다.<싸이키델릭 블루스의 여왕. 닉네임 "Pearl"(그녀의 대표앨범 수록곡을 따서) 66년 샌프란시스코로 진출."Big Brother & The Holding Ccompany" 에 가입. 68년 솔로활동 병행, 베트 미들러 주연의 'The Rose'는 그녀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불후의 여성 록 보컬리스트그녀는 시대를 앞서간 여장부로서 뿐만 아니라 세계 대중음악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여성 록 아티스트였다. 스물아홉이라는 길지 않은 생을 그야말로 불꽃처럼 살다간 예술가이자 반역자이기도 했다. 그녀의 등장 이후 록음악을 하겠다는 모든 여성은 그녀를 뛰어넘고자 하는 이나 그녀를 무시하고자 하는 이나 상관없이 모두 제니스 조플린이란 거대한 그림자와 비교되거나 싸워야만 했다. 조플린은 68년 타임지와 같은 인터뷰에서 "나는 노래할 땐 마치 아주 강한 약을 먹은 듯한 기분이 된다"고 털어놓았다. 이 말은 그가 이미 강한 약의 느낌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인 동시에 그에게 노래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다. 또한 자유기고가 필립 제이콥스는 그녀의 노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그녀의 고통스런 외침은 단지 노래부르기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그것은 귀신쫓기 의식이었다."제니스 조플린은 1966년 블루스 밴드 Big Brother & The Holding Company에 가입하고 활동 무대를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다. 이때부터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록계의 스타였다. 당시 그녀는 겨우 23세였지만 고향인 텍사스로부터 든든한 블루스 음악의 토대를 지니고 왔다. 그리고 이듬해 몬터레이 페스티벌을 통해 조플린 신화의 막을 올렸다. 그녀의 등장은 이제까지 소파에 누워 듣던 음악인 백인 여가수의 노래가 아닌 광란의 이미지였다.
이제까지의 존 바에즈나 주디 콜린스 같이 맑고 고운 소프라노 음색이 여가수의 전부인 줄 여겼던 당시 사람들에게 조플린의 목소리는 충격 그 자체였던 거이다. 갈라진 벽 너머로 쏟아지는 얻어맞으며 절규하는 여자의 갈라진 목소리 같은, 노래라기 보다는 절규나 비명에 가까우며 몸 속의 고성능 화약을 폭발시키는 듯한 엄청난 에너지는 도무지 여자 가수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몸 안의 모든 힘을 일시에 쏟아져 내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헝클어진 긴 금발머리를 미친 듯이 흔들어대는 무대 위의 모습 역시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뭐 요새는 남자 가수들도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헤드 뱅잉에 열심이긴 하다. 그러나 헤드 뱅잉만 한다고 록은 아니다.) 아주 가끔 느린 블루스를 부를 때 보이는 육감적인 목소리와 몸놀림에서만 그가 여자임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껍데기를 벗고 느껴보라" 고 외쳤다.
그가 말하는 껍데기란 위선과 가식 뿐 아니라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도덕 관념이나 상식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켜 나갔다. 누구도 어떤 것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베시 스미스의 음악을 가슴 속 깊이 새겨두고 있었으며 별 어려움 없이 베시의 스타일을 모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우상과 자신의 미래가 비슷하게 될 것이란 사실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하고 싶은대로 말하고 행동했다.당시까지만 해도 여자가 섹스를 언급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그의 노골적인 섹스 얘기는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여자가 말한다는 것 자체로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그녀는 공공연히 무수한 남자와 성관계를 갖고 있다고 밝혔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그녀는 폭음과 환락을 마구 즐겼다. 폭음과 환락이 그녀의 인생을 망칠 것이라는 충고에도 그녀는 "술에 취하는 것이야말로 못난 내게 가장 잘 맞는 행위"라고 응수하곤 했다고 한다.)
조플린은 이내 자유와 금지되지 않은 것, 거침없음의 상징이 되었다. 그녀는 블루스를 통해 열정과 절망, 저항을 한꺼번에 표현했고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강력한 힘과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쾌락에 대한 갈망을 노골적으로 담아냈다. 샌프란시스코의 필모어 극장이나 애벌런 볼룸 같은 곳에서 하늘을 찌르는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실제 생활은 고독했다. 약물중개상은 그녀의 돈을 갈취해갔고, 친구들은 그녀를 속였다. 그녀의 삶은 블루스 그 자체였다. 이제 펄(제니스 조플린의 애칭)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가수였다. 그러나 조플린은 대중 속에서 더욱 진한 고독을 느꼈다. 그녀는 "나는 무대에서 2만5천명의 사람들과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갈땐 늘 혼자다"라는 말로 자신의 고독을 드러내곤 했다. 조플린은 자신이 거대한 남성 사회에 갇힌 불쌍한 괴물임을 알지 못했다. 조플린은 68년 빅 브라더를 탈퇴함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사실 조플린은 다른 밴드의 여성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그 중요도에 걸맞는 위치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남성 위주의 록계에서 몇 안되는 여성 록 가수들이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했던 구조적인 문제였다. (그녀는 이에 대한 반발로 새로 조직한 Kozmic Blues Band를 자신의 백밴드로 한정했다. 그러나 빅브라더의 탈퇴는 그녀에게 더한 고통을 주었을 뿐이었다. 빅브라더는 제니스 조플린을 제니스 조플린답게 해주는 그 무엇이 있었다. 제니스 조플린의 음악을 들으면 프로가수라기 보다는 어딘가 설익은 아마추어의 느낌이 난다. 빅 브라더&홀딩 컴퍼니는 그 생생함과 함께 그녀의 극단적인 감성의 표출을 일정 부분 자제하게 해주고 악기와 선명한 대비를 이뤄 보컬을 뒷받침해 주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제 그녀는 혼자서 현실에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70년대 이후 활동한 모든 여성 로커들은 제니스 조플린을 모델로 삼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였다.
그녀의 인생은 마지막까지 극단을 달렸다.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었고, 크리스 크리스토퍼슨과도 잠시 사귀었다. 제니스 조플린은 마치 자신이 관계를 갖은 남자들을 정복이라도 한 것처럼 말했지만 대개의 남자들은 자신이 너무나 술과 마약에 너무 취한 탓인지 다음날 아침엔 그녀와의 관계 사실 자체를 까맣게 잊곤 했다. 조플린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렇게 투덜댄 적이 있다. "기차에는 165명이 타는데, 나는 65명하고밖에 잠을 못잤어!" 라고 말이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변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세스 모건이란 뉴욕 출신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버클리 대학생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가정을 갖고자 하는 그녀의 열망은 대단한 것이어서 이제까지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고자 했다. 그녀는 꿈에도 그리던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평온한 가정을 일굴 수 있다는 소망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몸을 혹사하던 블루스록, 사이키델릭 록의 열창일변도에서 벗어나 소울 발라드를 시도하려 했고 그 음반이 현재까지도 불후의 명반으로 기억되고 있는 <진주(Pearl)>이었다.
그녀 자신도 자신의 이런 시도와 음반의 완성도에 대해 흡족해 했다. 그러나 제니스 조플린은 지미 핸드릭스가 세상을 떠난지 며칠 후인 70년 10월 4일 할리우드의 한 호텔에서 사망했다. 급하게 결혼식을 서두르고 있던 중에 생긴 일이었다. 그녀의 사인은 헤로인 과용이었지만 실제 그녀의 죽음은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제니스 조플린 자신은 행복해지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거나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 재학 시절 학생들 사이에서 "캠퍼스의 가장 못생긴 남자"로 뽑혔던 못생긴 백인 계집애. 제니스 조플린! 그녀는 불안하고 즉흥적이며 이기적인 동시에 자기파괴적이었던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제니스 조플린, 그녀가 입을 떼는 순간 이제까지의 노래부르기 역사는 사기였음이 드러났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그녀가 록 음악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크다.제니스 조플린은 그 음악과 인물이 같은 비중으로 중시되는 몇 안되는 록 스타이자 넘쳐나는 물질적 풍요 속의 빈곤을 보았고, 자유의 여신으로 대변되는 미국 주류사회의 폭력성을 이론이 아닌 감성으로 깨우쳤으며 갖은 반항과 대담한 실험을 통해 개인적인 자유와 문화 혁명을 꿈꾸었다. 그녀는 플라워 무브먼트의 역사와 신화였으며 남성 중심의 사회와 록 음악계 속에서 성 해방까지 포괄하는 여성의 자유를 공개적으로 소통될 수 있도록 했다. 비록 제한된 틀 안에서나마 기성 사회의 성을 맹공한 페미니스트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 제니스 조플린은 최고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기존의 남성과는 별도의 여성 록이라는 개념을 처음 만들어냈고 이후 모든 여성 록 가수들은 크든 작든 조플린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출처: 정문규 미술관 원문보기 글쓴이: 미술관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