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매일 기획특집
이재창 시인, 남도문학 현장을 가다 (2) - 송선영 시인
“어쩔거나, 滿月일래 부풀은 앙가슴을”
송선영(본명 宋泰洪)씨는 선비 시인이다. 남도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자신만의 문학스타일을 구사하는 점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는 1959년 한국일보와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休戰線'과 '雪夜'가 동시에 당선돼 당시 혜성처럼 나타난 시조시단의 원로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크게 보아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다. 분단현실과 일제강점기, 신라시대, 작자의 소년기, 그리고 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의 갈래 모두가 그의 시적 모태가 되고 있다. 현재 그의 문학적 작업과 성과물들은 한국시조시단에 돋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가 태어나고 여지껏 생활기반을 갖고 있는 곳이 광주시 북구 운암동이다. 그의 생가 위치는 광주․전남지역에서 몇 안되는 명당중의 명당 '황계포란형'에 위치해 있다. 그 곳은 백명의 재상이 태어난다는 풍수적 해설의 길지처럼 매우 아늑하고 포근한 주변산세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남들처럼 달변이 아니고 언제나 조용하고 고요한 시인이다. 그것은 그의 유년시절의 생활과 삶의 방식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별로 말이 없었고,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해 더불어 어울리는 생활보다는 외톨이 생활에 더 익숙해 있었다는 사실과 고샅의 죽마부대에 합류하기 보다는 홀로 뒷 대밭에서 놀거나 대밭 너머 동산에 올라가 무등산 달돋이나 운암산 해넘이를 즐기며 시심을 키워왔다.
그의 생가를 찾았을 때 넓다란 마당이 있다는 것을 어림짐작 할 수 있었다. 지금은 형님 노부부가 기거하고 계시지만 그 마당에 별채를 건립해 놓아 어느 시골집과 다를 게 없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송시인은 어릴적 그 앞마당에서 동네 처녀들의 강강수월래 민속행사가 매년 열렸다 한다. 일제강점기 30년대부터 해방직전까지 계속 이어져오다가 6․25 후에는 그 행사가 없어졌다고 아쉬워 하기도 했다.
그의 추억과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해마다 추석을 유난히 그리워하며 가다려왔다. 햅쌀밥, 송편, 햇과일 등도 한 요인이었지만, 그보다는 매년 앞마당에서 열리는 강강수월래가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쩔거나, 만월(滿月)일래/부풀은 앙가슴을//어여삐 달맞이꽃/아니면 소소리래도……//목 뽑아/강강수월래/청자 허리 이슬 어려.//얼마나 오랜 날을/묵정밭에 묵혔던고//화창한 꽃밭이건/호젓한 굴헝이건//물 오른/속엣말이야/다름없는 석류알.//솔밭엔 솔바람 소리/하늘이사 별이 총총//큰 기침도 없으렷다/목이 붉은 선소리여//남도(南道)의/큰애기들이/속엣말 푸는 잔치로고.//돌아라 휘돌아라/메아리도 흥청댄다//옷고름 치맛자락/갑사(甲紗) 댕기 흩날려라//한가위/강강수월래/서산마루 달이 기우네."(강강수월래)
초기작품 '강강수월래'전문이다. 그는 휘엉청 달밝은 한가위 져녁이면 으레 곱게 차린 마을처녀나 아낙네들이 집마당으로 몰려들어 마치 난장판과도 같은 것을 경험했다. 그녀들은 외아들인 송시인에게 관심을 보였을 것이고, 시인 자신은 어린왕자가 되어 그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어린적 경험들이 그의 시창작 할동에 큰 역할을 한 것 임에 틀림이 없다.
이 작품은 90년대에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게재돼 많은 어린이들에게 읽힌 작품이며, 그의 대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조의 가락과 리듬을 이만치 살리면서 풀어낸 작품을 과연 발견할 수 있을까. 또한 그 비유와 상징들이 얼마나 화려하고 정다운가. 그저 읽기만 해도 저절로 강강수월래를 하듯이 두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뛸 것만 같다.
"요 며칠을 휘파람새가 심상치 않게 울었다//뒷강 나루터 기슭 잠을 잃은 휘파람새가//날마다/운암동(雲岩洞) 변두리의/첫새벽을 열었다.//고요한 산번지(山番地)에 미증유의 파도가 일어//나는 휩쓸리다가 또, 노을을 태우다가//마침내/꽃상여 타고 온/한 청년을 보았다.//그 해 그 아픔 이후 한결 잦던 휘파람새가/비, 비를 맞으며 어둠을 치는 저 소리……//오늘도/아파트에 와/단조(短調)로 와 날고 있다."(휘파람새에 관하여)
송시인은 비관적인 시대적 현실 앞에서도 그다지 좌절만을 말하지 않았다. 항상 그 좌절을 새롭게 승화시키기는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위 작품은 많은 점을 암시해 준다. 그것은 그의 역사적 통찰 감각과 의식의 폭을 말해 준다.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그후로 계속된 민주화운동은 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졌었다. 그 시대 문학인들에게 많은 갈등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그는 '귀성록'이나 위 작품 등을 통해, 억눌려 있던 다른 시조시인들처럼 숨죽이고만 있지 않았다.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의 죽음과 그의 장례식날 운구차가 서울에서 광주로 진입하던 곳이 바로 그가 태어나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 운암동이다. 그리고 이열사가 다녔던 고등학교가 바로 운암동에 위치한 광주진흥고이며, 그 학교 바로 밑에 그가 어릴적 뛰놀았던 생가가 위치해 있다. 전국에서 수많은 추모 인파들이 몰려들어 그가 살던 운암동을 꽉메우고 있었던 그 함성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다. 그게 바로 '휘파람새에 관하여'의 작품이다. 웅변과 사설적 이야기들이 풍조를 이루던 시대에 이른바 '의식의 서정화'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깨우쳐 주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의 대표적 작품 2편을 소개 했지만 작품세계는 댜양하다. 등단작품의 분단조국에 대한 아픔과 이의 극복을 위한 형상화 작업과 '하늘눈''화랑소고'에서 일제강점기의 만주벌과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도로 몰입하는 대서사시를 보여줬다. 또한'겨울비망록'연작에서는 고독한 소년기와 이를 이겨내려는 극기의 몸짓을 보여준다. 그리고 80년대 '귀성록'과 '노지의 불빛', '휘파람새에 관하여'에서 현실인식의 세계로 눈을 돌리게 된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게 나타나는 것은 항상 신인의 자세로 부단한 변모를 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등단한지 45년이 되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놀랄 것이다. 대부분 시인들이 그 정도의 연배에 들면 작품들이 구부러들기 마련인데 그의 작품은 언제 보아도 신선하도 참신한 감각을 보여준다. 늘 실험하는 정신과 태도를 스스로 후배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언어적 특징 하나만 보더라도 시어의 채택과 배치, 호흡을 말 더듬듯 끊고 거듭 끊으면서 연결시키는 그 만의 가락은 송선영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특유함이며 이례성이다. 이 호흡법은 시조만이 가지는 지극히 절제된 언어의 경제적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45년이란 문단시절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항상 최정상의 실력과 역량을 인정받아 왔다. 앞으로도 많은 날 그의 작품을 대할 수 있다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글=이재창 편집부국장
사진=오종찬 기자
송선영 시인이 문학과 인연을 맞은 것은 사범학교 재학시절이다. 학교신문 '횃불'에 시를 발표 하면서 그의 문학적 재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시절 그는 학교 수업만 마치면 서점가는 달려가 주인 눈치를 살피며 이 서점 저 서점을 돌면서 책읽는 갈증을 풀었다. 또한 그의 문학적 스승은 당시 학생들 사이에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잡지 '학원'지 였다. 그때 당시 학생층의 대표주자격인 정규남, 마삼렬, 최승호 등과 만나며 문학적 역량을 키웠다.
그가 학교 졸업직전 지방신문 신춘문예에 宋船影이란 필명으로 응모했었는데 최종 결심에서 낙방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송선영이란 필명을 사용해 왔다. 그 필명은 친구가 살던 소록도에 가서 머물면서 생각한 필명이라고 한다.
사범학교 졸업후까지도 그는 시조에 관심은 없었다. 두메산골 교직에 있던 어느날 방안구석에서 우연히'제2회 개천절 경축 전국백일장'이라는 광고를 보고서 였다. 참가는 했지만 당연히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이 우연으로 시조와 인연을 맺었다.
그당시 그는 송기숙, 최승호, 마삼렬 등과 '음지'라는 동인회를 조직해 문학수업을 했고, 신춘문예나 종합문예지에 응모하기 시작해 최종심에 오른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시절 그는 시조를 혁신하겠다는 뜻을 안고 58년 가을 시조쓰기에 전력, 한국일보와 경향신문 두 곳에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다.
한국일보 당선작 '休戰線'은 59년 1월1일자 신문 1면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큰 휴전선 사진위에 시가 실리기도 했다.
또한 15년동안 광주․전남 고등학생들의 문학모임인 '전남학생시조협회'에서 지도교사로 많은 후배들을
가르쳐왔다. 김종섭, 이재창, 오종문, 이근택, 최양숙, 윤희상, 박정호, 박현덕, 김행주 등의 제자들이 문단에 등단 활동하고 있다.
그는 1936년 10월 7일 광주 운암동에서 태어나 광주서중,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했다. 59년 한국일보와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했다. 시조집으로는 '겨울비망록''두번째 겨울''활터에서''휘파람새에 관하여' 등이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퇴직해 현재 글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