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의 정체
고대의 한일관계에 가장 큰 논쟁점인 임나일본부설은 대개 일본서기(日本書紀) 49년 (A.D. 369년으로 본다)조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를 요약해 보면「왜군이 대구(卓淳)에 집결하여 신라군을 격파하고 창녕(比自火), 김해(駕洛), 경산(押督), 함안(安羅), 합천(多羅), 대구(卓淳), 고령(大伽倻)등 낙동강 방면의 7국을 평정한 뒤 서쪽으로 돌아 강진(康津)을 치고 이를 백제에 주었다. 이때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과 왕자 근구수(近仇首)가 군대를 이끌고 나오니 전남 방면 4개 읍이 백제에 항복하였다. 다음 해에 왜왕이 백제에게 하동을 주었다.」라는 기사이다.
이를 근거로 하여 일본 사가들은 왜가 360년대에 남한지역에 진출해서 가야와 신라를 항복시키고 또 백제까지 제압하여 남한 전체를 지배 경영하고 이를 다스리는 관청으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임나일본부는 562년 신라에 타멸(打滅)될 때까지 마치 총독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임나일본부설이란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약 200년 동안 야마토(大和)왕국이 남한을 지배했다는 것인데, 양심적인 일본사가인 쯔다(津田左右吉)는 엄격한 사료 비판 끝에 이들 기사의 대부분을 날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유력한 금석문 자료로 이용하려는 것이 앞에서 열거한 바 있는 광개토대왕릉 비문이다.
바로 이 A.D. 369년은 백제 최성기인 근초고왕 24년이다. 그런데「이때 낙동강유역 7국을 비롯하여 전남 해안까지 진격한 병력이 일본서기의 서술과 같이 과연 왜병이었을까? 또 왜군이 애써 정복한 지역을 백제에 주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인심 좋은 국제관계가 동서고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렇게 의문을 제기한 천관우씨는 이어「낙동강 방면의 7국을 평정한 병력이「일본서기」의 주장대로 왜군이었다고 하면 왜가 해안도 아닌 내륙의 대구를 최초의 집결지로 삼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부연했다.
또 그는 이 작전에 파견되었다는 왜장(倭將)들 가운데 한 사람인 무쿠라콘시(木羅斤資)를 일본서기 자체가 백제장군이라고 주기(註記)하고 있다. 왜군의
중요한 지휘관의 한 사람이 백제군이란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그보다 더 결정적인 자료는 일본서기 흠명기 2년조에 백제 성왕의 말이라 하여 「옛날 나의 선조인 근초고왕, 근구수왕 때 아라(함안), 카라(고령), 토쿠준(대구) 수장들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백제의 자제(子弟)가 됐다」라고 했다. 이것은 근초고왕 때 함안 고령 대구 등 낙동강 유역 7국을 왜군이 정복했다는「일본서기」신공기 49년조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고 천관우씨는 복원가야사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의 기사는 실지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백제는 A.D. 369년에 그 병력을 낙동강 방면과 전남해안 방면으로 나누어 보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전남해안을 장악하는 동시에 낙동강 방면을 그 세력권 내에 편입시켰다. 그 이듬해 백제는 전남 방면과 낙동강 방면의 연결을 위해 다시 하동(河東)을 확보하였다. 이 무렵 백제의 세력권이 가야제국에 미쳤음은 광개토대왕의 능비에도 나타나 있고 삼국사기에도 나타나 있으며 실제로 백제는 근초고왕의 치세 때 가장 큰 세력을 펼쳤다.
-원전 : 1995년 김시우저 가락국 천오백년 잠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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