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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농민항쟁 기념탑
진주시농업인단체협의회는 2012. 6. 24일 농업인단체 회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농민항쟁기념탑 준공식을 했다.
농학농민혁명 진주농민항쟁은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언가(諺歌) 류계춘(柳繼春)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또 망건(網巾) 짝 발이 휘양건(揮項巾)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월에 무서리
동지섣달 대서리
1862년, 진주 농민의 피맺힌 함성이 진주를 넘어 한반도 전체에 울려퍼졌다. 수탈과 탐학의 수렁에 빠진 조선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조선 최대의 민중혁명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진주농민항쟁(진주민란 또는 임술민란) 올해로 150주년을 맞은 “진주농민항쟁”을 이끄신 류계춘선생과 초군(樵軍, 농민) 들이불렸던 혁명가 지금의 '임을위한 행진곡'과 같은 '언가(諺歌)'를 조명한다.
류계춘선생의 묘비 - 앞면과 뒷면 1. 류계춘 선생의 묘비명(墓碑銘 ) - 진주시 대평면 당촌리 2006.4.5.세움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진주망건 또 망건 짝 발이 휘양건 도래 줌치 장도칼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이 노래는 1862년 임술 진주농민항쟁 무렵 진주지방에서 비롯되어 농민 시위대가 뜨겁게 소리쳐 불렀던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혁명가로서 뒷날 한국인들이 즐겨 부른 민중가요였다. 이는 진주농민항쟁을 이끄신 선비 류계춘(柳繼春 1818 - 1862) 선생이 손수 노랫말을 짓고 곡을 붙여 한 시대의 아픈 역사를 상징적으로 증언해 주는 귀한 진주의 문화 유산이다.
선생은 진주 무실(수곡) 원당에서 文化柳氏(좌상공파) 28세손 之德과 晉州鄭氏의 3남2녀
중 長男이셨다. 선생의 시대에는 國家 財政의 根本인 三政이 문란하여 農民의 고통이 하늘
에 사무쳤다. 선생은 농민이 겪는 참혹한 수난을 바라 볼 수만 없어 그들의 억울함과 슬픔을
덜어주기 위하여 농민과 한 몸이 되고자 했고 이는 시대의 부름이기도 했다.
곳곳을 찾아다니며 관리들의 비리와 폐단을 질타하는 泣訴(읍소)와 영소(營訴)를 올려 농민
들을 도우자 농민들은 先生을 의지하며 따랐다. 농민들은 선생의 절규(絶叫)를 알아듣고는
마침내 오래 억눌려 온 분노의 함성을 터트렸다. 그 함성은 해묵은 모순 덩어리를 깨뜨리는
천둥이 되어 진주 산하를 흔들고 그 메아리는 온 나라로 퍼졌다. 임술 진주농민항쟁은 東學
이세상에 뿌리내릴 수 있는 土壤이되어 주었고 32년 뒤에는 저 東學農民革命의 꽃이 필 수
있는 歷史의 모체가 되었다. 선생이 순국한지 143년 지나 선생의 숭림(崇臨)한 인간사랑 정
을 기리기 위하여 後孫들의 떨리는 마음을 모아 여기 진보(眞寶)의 작은 등불을 밝혀 세운다.
병술년 서기2006년 봄날 平江 정동주 삼가 짓고 윤효석 삼가 쓰다.
2. 해설
이 노래는 1862년 진주농민항쟁의 주도자 중 한 사람인 <류계춘 선생>이 항쟁을 준비하면서
지어 민간에 퍼트린 노래로서 우라나라 최초의 혁명가(革命歌)<=저항요(抵抗謠)>라고 합니다.
진주농민항쟁을 진압한 정부는 가혹하고 철저하게 응징을 하였는데도 이 노래와 <에나>라는
말은이 지역민의 가슴과 가슴으로 자긍심과 함에 꾸준히 전해져 왔으며 이 노래는 다른 지역
으로도많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이 노래를 諺歌(언가)라 함)
구절구절의 뜻을 살펴보면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농민의 처지를 한탄> 농민이나 천민 등은 양반들의 갓을 걸어
두는 도구(걸이-掛)에 불과하다는 것. 즉, <갓>을 양반이나 벼슬아치의 <권력>을 상징적으
로 표현하고, 농민이나 천민을 갓을 걸어두는 <걸이=도구>(-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에 비유함
으로서 농․천민은 수탈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내용으로 울분을 쌓도록 함.
<진주 망건 또 망건>=<양반, 토호 등 수탈해 가는 놈이 이 너무 많다.- 조선후기 계급사회
폐단을 지적> 망건은 갓을 쓸 때 갓 아래 반드시 써야할 물건인데 따라서 진주지역에는 뇌물
을 주고 산 가짜양반까지 합하여 이들의 횡포가 극심함을 뜻함.
[ 망건(網巾)모습 - 성인 넘자가 상투를 틀 때 머리 털을 위로 걷어 올리기 위해 이마에 두르는 건(巾)]
<짝발이 휘양건>=<지주 등 지방 토호들의 수탈이 극심함을 지적>“짝발이”란 “짝 벌어지다 ”의 변형말이며 “휘양건”은 겨울철 방한모의 일종으로 결국 이 말은 천민이나 농민은 탐학과 폭정으로 엄동설한에 살길이 막막하나, 지주나 토호들은 농민에게 수탈한 재물로 등따시고 배부르다는 뜻임.
<도래미 줌치 장독간>=<양반들의 부정축재를 지적>“도래미 줌치”란 양반들이 차고 다니던
주머니를, “장독간”은 양반•지방관리들이 수탈한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를 뜻하며 천민이나
농민은 아사지경에 있어도 그들의 주머니나 창고는 가득하다는 뜻으로, 농민은 뼈빠지게 일
해도 수탈을 당하여 결국은 그들의 배만 채운다는 내용을 담고 있음.
<머구밭에 덕서리>=<지방관리의 수탈을 지적>“머구”는 음달지고 습한 논두렁이나 받두럭에
봄부터 가을까지 돋아나는 식물로 쌉쌉한 맛이 요즘은 웰빙식품으로 각광을 받지만 자라나는
곳이 음습한 곳이라 천하게 취급되었음.=천민·농민들을 비유함. 이 식물은 서리가 내리면 잎
이 금새 시드는 특징이 있음. “덕”은 몸에 붙은 굳은살이나 때(예 : 때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를 말하고“서리”는 霜(상=서리) 또는 胥吏(서리=아전 벼슬아치를 비유)을 뜻하는바 지방관리
를 말함. <농민(머구)의 등짝에 붙어(덕) 피를 빨아먹는 양반(서리=아전)을 타도하자>는
의미이나, 후절에 “무서리” “대서리”를 넣어 자연재해를 한탄하는 조로 표현함으로서 관청의
단속을 피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칠팔월에 무서리>=<삼정제도의 문란 계급사회의 붕괴 등 사회혼란상을 지적>한 여름에
서리가 내리면 곡식이 다 말라 죽는 것처럼 당시 조세제도의 문란 사회윤리의 붕괴 등이
극심하여 농민은 여름에 서리맞은 곡식처럼 죽게 되었음을 표현하였으며,
<동지섣달 대서∼리>=<구제도를 혁파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동지섣달에 내리는 큰
눈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추하고 더러운 것을 흰눈으로 덮어버리듯 부정과 부조리로 얼룩진
세상을 혁파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
이 민요의 숨은 뜻은 지방의 양반 토호들과 관리들이 이제는 비리와 탐학을 그쳐야 하며 동지
섣달의 희고도 맑은 눈과 같이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계급혁명)>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3. 한 서린 혁명가의 후손들
류계춘(柳繼春,1830∼1862).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 노래이자 혁명가(革命歌) 노랫말
을 순 한글로 짓고 곡을 붙여 널리 퍼뜨렸으며, 농사꾼이 사는 동네라면 함경도에서 제주도
까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사금파리 뾰족뾰족 박힌 골목길을 내달으면서 불렀고,그보다 조금 더 큰
조무래기들은 마을 타작마당이나 마을 앞 빈 논바닥에서 뛰놀며 이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희미한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사랑방에서 새끼줄을 꼬는 머슴들이나,긴긴 겨울밤 무명실 잣는
물레질로 길쌈하는 아낙들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를수록 마음 속에 시퍼렇게 응어리진 일들이 새삼스레 아파오기도 하고,끝 소절에
잔뜩 힘을 넣어 큰소리로 부르면 그 혹독하고 두려운 것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한번 입에 올린 뒤엔 좀체로 떠나지 않는 이 노래를 두고 사람들은 이상한 노래라거나 귀신이
든 노래라고도 했다.이 노래를 만든 류계춘은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수백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일약 인기 작곡가에다 돈방석에 올라 앉는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 농민의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아보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의 이름을 말하
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또한 한국 농민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을 물어도 그를 불러 보인다.
그는 경상도 진주사람이었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또는 ‘언가(諺歌)’라고 부르는 이 노래를 류계춘이 지었다고 단정지은
것은 그가 계획하고 주도한,1862년 ‘진주농민항쟁(일명 임술 진주민란)’에 관한 당시 조선
정부 수사 기록을 통해서였다.
이 노래의 특징은 노랫말이 지닌 고도의 은유와 상징에 있다.이 노랫말 속에는 진주농민항쟁
의 원인과 역사가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다.
빼어난 노랫말 속에는 풍부한 시적 감성과 치열한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는데,이 노래의 두
박자 리듬에서 우러나는 근원적인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역동적인 행진곡으로서의 맛까지
곁들이고 있다.
류계춘 선생과 혁명동지들을 진주형장에서 참수하여 그 목을 진주 남강 건너는 나루터와
장터에 높이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에 반역하면 누구든 저렇게 되고만
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류계춘 선생은 족보에서도 삭제되었고 후손들은 류계춘 후손임을 말 할 수 없었다.
주도자들의 후손들은 일제 때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온갖 핍박을 받아왔다. 한때는 '역적'
내지 '빨갱이'로 몰리기도 했다
후손들은 고향에서 살지 못했다. 주도자 가운데 한명이었던 황개동의 후손들은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정동주 작가는 "일제 때는 친일파에 의해, 그 뒤에도 토호세력들에 의해
핍박을 받다가 다른 곳으로 도망가다시피 가서 살았던 것"이라고 말했다.진주농민항쟁이
지역에서 새롭게 조명된 지는 15년 안팎 정도. 정동주 작가의 소설 <백정>이 나오고,
학술대회가 열린 것도 이맘때부터다. 류계춘 선생의 묘소도 이전까지만 해도 알려지지
않았다. 15여년 전 전교조 진주지부 회원들이 진주농민항쟁 사적지를 찾아 답사를 벌이기도
했다.
류계춘 선생의 증손자 류찬열씨는 "우리가 어릴 때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로 시작하는 노래
를 부르면서 놀기도 했는데, 할아버지께서는 그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셨다"면서 "그때는
왜 그 노래를 못 부르게 하는지 몰랐는데 커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후손들은 철저
하게 진주농민항쟁 주도 인물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숨기면서 살았다. 정동주 작가는 "1980년
대 초 연극(진양살풀이) 대본을 쓰기 위해 후손들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이귀재의 후손인
이내기(작고) 선생은 두번이나 '그런 일 없다'면서 외면했다"며 "세번째 찾아갔더니 인정한
뒤 울면서 이야기를 하더라"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류계춘 선생은 소설가 정동주씨의 소설 <백정>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소설 <백정>은 80년
대 전국에서 공연됐던 진양살풀이의 시나리오기도 하다. 진양살풀이는 유일하게 진주에서만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정동주씨는 당시 상황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당시 민중을 선동한
다는 이유로 거부당한 것도 있지만, 진주지역에서 반발이 심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진주농민
항쟁은 입에 올려서는 안되는 금지된 역사였죠.”
당시 진양살풀이를 펼친 큰들 극단의 주역들도 무언의 핍박을 받아야만 했다. 경상대 재학생
었던 학생은 제적을 당했고 관련 교수는 다른 지역으로 떠나야만 했다.
선생의 묘지는 기가 세 ‘풋심 떼던 묏등’으로 불렸다.
이 마을 노인이 묘지의 전설을 전했다.“밤만 되면 이 무덤가에 사람이 몰려들었지예. 옛날
(약 1950년데)에 학질(말라리아)을 앓는 자가 이 묘지에서 세 번 구르고 ‘내 풋심 떼어가거
라’ 세 번 외치면 낫는다는 소문이 돌았어예.”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으스스한 그 처방전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류계춘 선생의 삶은 그의 주검이 매장 된 묘소와 함께 이 지역 농민들의 삶 속에 녹아
들어 매우 독특한 정서로 자리잡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진주민란이라는 말이 진주농민항쟁으로 바뀌게 되는 날이 왔다.
민란을 주도한 반역자 류계춘을 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로 고쳐 부르자는 민주화의
추세로 마침내 문화류씨(文化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의 족보에 류계춘 선생의 이름이
오르면서 업적을 기리는 기록이 새롭게 추가되기도 했다.
2006. 4. 4. 선생의 묘비석을 세우는 날 류계춘 선생의 손자 류윤특씨(2006년 90세 진주
사봉면)는 "할배 비석을 세운다고 하니까 며칠 전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고 심경을 털어놨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미안하고 슬프네. 이제 저승에 가서 할배를 뵐 면목이 설 것 같네
그려. 자다가 일어나서 몇번이고 시계를 보는지 몰라. 빨리 세웠으면 싶어. 그동안 비석을
세우려고 했지만 돈이 없어서 못한 게 아니었잖아…."
작은 돌 하나도 깎아 세우지 못할 만큼 집안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비석을 만들어
세우자는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때마다 그 따위 돌 하나 깎아 세워달라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아니셨다는 것이었다.
류계춘선생의 증손 류일렬씨는 증조부 산소를 참배 할 때는 신발을 벋고 무덤 앞에 선다고
한다. 일렬씨의 아버지는 비석을 세우자는 주장에 대하여 "조선왕조의 잔혹한 농민 탄압,
가련한 농민의 살점과 피를 짓밟고 올라서서 누린 양반관료들의 교만과 위선으로 꽉찬 모순
을 온몸으로 질타하면서 농민도 인간임을 절규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선생이 과연 후손
들에게 뭘 바라시겠느냐고 되물었다. 빛나는 비석에다 화려한 문장으로 죽은 시대의
허위의식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단청 입힌 사당이며 으리으리한 기념관을 세워 살아남은
자들의 비겁과 죄악을 은폐시키려 하기보다는, 역사 앞에서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싶어하지 않겠느냐고" 했단다. 일렬씨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
가 옳다고 믿고 있었다.
▲ 류윤특옹이 할아버지인 류계춘 선생의 묘소 앞에 서서 묵념에 잠기고 있다.
4. 진주농민항쟁 (출처: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진주농민항쟁이 일어난 19세기 후반을 ‘민중의 시대’라고 부른다.진주지방농민들이 일으킨
항쟁은 ‘민중의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1862년 2월18일의 진주농민항쟁을 시작으로
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이르는 32년 동안 조선전역에 걸쳐 70여 차례의 농민항쟁이
들불처럼 타올랐었다.
그래서 진주농민항쟁을 동학혁명의 씨앗이라고도 하며, 성리학 이념에 봉사한 유생들의
허망한 정치 실패를 입증한 피와 박해의 증거라고도 부른다.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류계춘 원작의 이 노래는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마다의 중요한
쟁점에 따라 약간씩 노랫말이 바뀌는데,그것은 그 지역 농민들에게 공통된 분노와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냄으로써 농민들의 결집을 강화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류계춘 선생의 세상을 읽어내는 통찰력이 또 한번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튼 19세기 후반은 풍양 조씨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 질서의 문란이 극점에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여기에다 조선왕조의 조세제도 핵심인 삼정(三政)의 실패가 겹쳐 조선
은 국가로서의 통제력을 상실하여 가난한 민중의 삶은 참담했다.
●민중 오랜 착취와 압박에 신음
순조,헌종,철종년간 조선사회의 모순은 이미 깊어져 있었고,봉건제도 붕괴 과정에서 민중은
오랜 착취와 압박으로 신음했다.지옥같은 학정의 세월 한 가운데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횃불이 맨 먼저 진주에서 타올랐다.
그 혁명의 전주곡인 나팔소리를 맨 처음 낸 나팔수가 류계춘 선생이었던 것이다.왜 그는
혁명의 나팔소리인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라는 노래를 지어 퍼뜨렸을까?
조선왕조 조세제도인 삼정(三政)은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을 말한다.
전정은 토지세,군정은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환곡은 봄철의 식량부족과 파종기 종자 부족
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 수확 때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제도
였음은 일반 상식이다.
이 같은 국가 조세제도의 골격인 삼정제도가 오랜 모순으로 폐단이 커지자 이에 따른 구체적
인 폐해는 농민들의 부담으로 귀결되었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과 세금은 결국 가장 낮은 계층인 농민들의 육신과 농사 지은 곡식,
베틀로 짠 포목이기 때문이다.양반 사대부는 병역의 의무도 없었고,부역 등 노동력을 바쳐야
할 필요도 없었으며,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세금 낼 까닭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가 어려울수
록 항상 고통받는 것은 농민들뿐이었다.끊임없이 늘어만가는 삼정폐해에 따른 부담은 농민들
을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전정 즉 토지세 모순은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정묘 병자호란으로 더욱 심각해
졌다.오랜 전쟁 때문에 많은 토지가 황폐해진데다 양반,관리,토호들이 고의적으로 토지대장
에 등록하지 않고 숨겨둔 토지와,세금을 안내는 면제토지가 늘어나자 국가의 조세수입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렇게 줄어든 세금을 모두 농민들에게 부담시켰으니 농민들의 삶은 고통뿐이었다.여기에다
관청에 근무하는 관리들이 개인적으로 탕진해버린 공금을 채워넣기 위하여 도결(都結)이라는
이름의 세금을 만들어 마음대로 부과하여 거둬들였다.
●일부 농민들 세도가에 붙어 병역기피
군정,즉 병역의무와 관련된 세금은 군포(軍布)라는 이름의 베를 징수하는 것이다.그런데
양반,아전,관노(官奴)는 병역이 면제된데다 정치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들도 세도있는
양반가문에 붙어서 병역을 기피하는 폐단이 생겼다.
환곡제도는 앞의 두 제도보다 더 심했다.아예 고리대(高利貸)로 변질되어 지방관청 관리들의
탐욕을 키우는 가장 악질적인 농민수탈 방법이었다.처음부터 월급이 없는 아전들은 농민을
착취하고 공금과 관청곡식을 횡령착복하는 협잡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만큼의 부정부패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묵인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이 얄궂은 제도는
오늘날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심판할 때 일정액수 이하의 금액을 뇌물로 받거나 횡령했을
때 이른바 ‘통상적인 떡값 또는 관례’라 하여 면죄부를 주는 원류가 되었다.
이같은 모순이 계속되다 보니 탐관오리의 간악한 작폐로 인하여 농민의 생활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으로 변했고,고통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고,착취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도망하여 유민이 되기
도 했다.유민들 중에는 장길산처럼 도둑떼로 변질되기도 했고,깊은 산중 절간에 찾아가서
절 머슴이나 승려가 되기도 했다.살아남기 위하여 긴급피난한 농민들이 사찰로 몰려들어
승려가 되는 것은 한 때 커다란 유행이었다.실제로 한때 승려 숫자가 조선 인민의 10분의 1
이 된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한때 조선인민 10분의1 승려 되기도
아무튼 참을 수 없는 정도까지 불만이 쌓이자 농민들은 필연적으로 정부에 항거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이래도 죽고,저래도 죽을 바엔 할말이나 해보고 죽자는 공감대가 조선의
모든 농민들 가슴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같은 전 국가적 모순에 저항의 횃불을 맨 처음 쳐든 것이 진주지방 농민들이었다.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조선 어느 지방보다 진주지방의 모순이 더 크고,착취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진주는 진주목사가 다스리는 행정관청 외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다스리는 군사기관인
병영까지 있어서 관리와 아전의 숫자가 그만큼 많았다.아전 숫자가 많다는 것은 곧 농민들을
수탈하는 정도가 그만큼 극심하다는 뜻이다.
또한 향교와 서당이 많아서 향교의 교생(校生),서원의 원생(院生)은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는
데,그 면제액만큼 농민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농민들 존재 양반의 ‘갓걸이’ 에 비유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에서 모든 힘없는 농민들 숫자는 곧 양반들의 갓을 걸어두는 ‘걸이’,
즉 양반을 위해 존재하는 목숨없는 말뚝이나 갓 걸어두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지독하고도
절묘한 은유인 것이다.
1862년 이전 류계춘 선생은 이 같은 진주목과 병영아전들의 혹독한 수탈에 대하여 여러해
동안 문제제기를 했었다.해당 관청에 진정서를 내거나 고발장을 접수시키기도 하면서
폐단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아전들은 류계춘선생을 온갖 방법으로 박해하고
괴롭혔다.구속시켜 매질을 하기도 했다.이런 선생을 지켜보던 진주지방 농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선생에게 직·간접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격려해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농민수탈은 더욱 심해졌다.농민들은 최후의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류계춘 선생이 농민의 대표자로 뽑혔다.그때부터 선생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해 나갔다.
먼저 농민들을 결속시키고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노래를 만들어 퍼뜨렸다.
그런 다음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농민들을 결속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농민들에게 가장 악랄한 아전으로 알려진 자와 양반으로서 가장 탐학과 착취가 심한 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의 구체적인 비리내용과 이름을 적은 일종의 전단을 만들어 사방에다 붙이고
뿌렸다.모두 한글로 적었기 때문에 이를 언방(諺榜)이라 했다.농민들이 더 이상 참기만
해서는 안되는 이유,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왜 농민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소상하게
적어서 비밀리에 돌려 읽히는 회문(回文),거사 날짜가 정해지면 각자의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통문(通文)등 방법으로 농민들과 조직 책임자를 정하고 준비했다.
마침내 1862년 2월 18일 이른 아침부터 농민들은 미리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봉기를 시작
하여 약속된 장터나 공공 집회장소로 집결했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이걸이 저걸이 갓걸이’를 소리높
여부르면서 농민 시위대를 만들어 갔고 시위대의 규모가 순식간에 홍수처럼 불어났다.겁을
먹고 숨어있던 자,반대하던 자,피신해있던 자들까지도 농민시위대의 함성과 노랫소리에
이끌려 합류했다. 이렇게 결집된 농민들은 진주성문을 열고 들어가 우병사 백낙신,진주목사
홍병원으로부터 항복을 받고,악질 관리로 손꼽히던 권준범,김희순을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자진해산하기까지의 4일동안 농민들의 원성을 산 토호들과 양반,부패관리들을 응징
하고 끝났다. 누구의 강압이나 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민들 스스로 정한 목적에 따라
자진해산한 것이다. 그리고 류계춘 선생과 동지들 또한 스스로 관청에 나가 진실을 밝히면
서 잘못된 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그러나 그 대답은 반역죄에 따른 참수형이었다.
그들이 죽은 뒤 조선의 농민들은 32년간의 긴 기간에 걸쳐 정부에
책임을 물었고, 동학농민혁명으로 승화되었다. 선생이 떠난지 14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농민과 농업은 여전히 고난에 처해있다.선생의 초라한 무덤이 자꾸 오늘날 한국
농업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류계춘 선생이 돌아가신 150여년 후 진주의 어느 여류 시인은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선생을
추모했다.
류 계 춘
김 경
수리봉 늑골을 끼고 돈 뒤
떼고함 푸르게 지르며 몰섬으로 간다
버짐처럼 번진 상처 가장자리마다
무명옷 깁는 착한 눈빛들
소리 죽인 오일장 쇠전에서
햇불을 매단 죽창들이
둥 - 둥 -
쇠북으로 일어선다.
갈꽃이 지고
그날 밤
덕천강이 울며 떠나는 소리를
장독간 뒤에 숨어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이하 생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