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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으로서의 존재 김정란
결핍으로서의 존재
나는 신(神)을 믿지 않는다
나는 신(神)을 꿈꾼다
신(神)은 내게 모랄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내게 욕구의 대상이다
신(神)을 꿈꾸기
나는 시(詩)를 쓰며 욕구로서의 자아를
갈망한다
한 쪽 어깨는 너무나
아래로 기울어져 있고
한 쪽 어깨는 너무나
위로 날아 올라가는
나의 시(詩) 쓰기
나는 뒤뚱거리며 그러나 어쨌든
앞으로 나아간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갈망의 순수함만이
닫혀진 봉인의 비밀처럼
빛나고 있을 뿐
오늘 내가 몇 번이나
존재의 현기증으로
되돌아서는, 이
어두움 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나비의 꿈 김정란
나비의 꿈
나비를 보았다.
깊은 밤, 내 숨소리 허공을 향해 올라갔을 때.
우리의 기질이 나비의 날개를 가진다면
우리는 다만 있는 일만으로 족하리라. 왜냐하면
버려버릴 것을 모두 가벼운 날갯짓으로 벗어버린 뒤에
우리는 알몸으로 비로소 남아 있을 수 있으므로.
그때에 내가 내 육체를 향해 새삼스러이 말을 걸리라.
ꡒ안녕! 예쁜 나여!ꡓ
나비는 언제나 내 영혼의 깊은 곳을 찾는다. 그가 말했다.
ꡒ가능하면 더 깊은 곳을ꡓ
어느 날인가 나는 그가 수줍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ꡒ나는 금이 간 영혼을 사랑해.ꡓ
어째서지?
ꡒ잘 몰라, 하지만 어쨌든 그들에게선 좋은 냄새가 나.ꡓ
그리고 그는 날아갔다.
나는 덜덜덜 흔들렸다.
그리고 조금 뒤엔 바람이 칠흑이 그리고 핵이 남았다.
꿈꾸는
핵
나는 다시 나비를 보았다, 아니 오히려 가졌다.
내가 모든 여행길의 돌짝밭에서 돌아올 때
조심스러운 비상으로
다시 시작하는 나비.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나의 시 -1- 김정란
나의 시(詩) -1-
부제 : 삶은 각질이다. 따라서 언어도 각질이다.
정해져 있는 모든 테두리들을 향해
또는 체제라고 불리는 모든 삶의
딱딱한 껍질들을 향해―나의 시(詩), 오 빨개벗은 연체동물
나는 시(詩)의 혓바닥으로 `아니'라고 말한다.
그대는 꼬물대며 기어간다―비효율적!
어느 천년에……아닌게아니라 걱정스럽기는 하다.
그 기약 없는 절대성의 존재 놀이……
나는 축적된 생명의 모든 물량적 양식(樣式)을,
형태를 내용을 빠져나온다. 나의 달팽이는
속살만으로 성벽을 기어내려온다……오 그대에게
내 궁극의 기원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나의 달팽이는 알고 있다. 이 삐그덕댐이
긍정적 징조라는 것을, 혼, 안개 무리, 또는
언어, 또는 우리가 신(神)이라고 부르는
존재의 궁극에 대한. 감(感)만으로 나의 달팽이는
최소한 지향(指向)한다
(길은 도처에 있고 길은 아무데도 없지만)
따라서 시(詩)여 나는 그대의 덕성으로
삶 앞에 막바로 맞선다…… 나,
앞뒤로 인연의 끈을 주렁주렁 엮어든,
축적된 만큼의 행위로 결정되는
구체적 삶과 무관한 (내)가.
나의 영혼의 대벽이여 잠재태여 물렁살이여,
그러므로 갈망하는 만큼 네가 되기를,
너, (너)의 창세, 그리고 동시에 (너)의 말세인 너,
그러므로 되기를―될 수 있는 것이.
(집―우리는 꼭 한 채의 집만 짓는다 조갯살인 존재여
네 영혼의 크기에 꼭 들어맞는 집 한 채―
절대의 집―될 수 있는 것=되어야 할 것)
꿈꾸며, 시(詩)여, 나는 무너진다.
삐그덕거림, 나는 목마름으로
사막을 건넌다, 사막―나는
텅 빈, 태고의, 무관한 집을 꿈꾼다.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나의 시 -2- 김정란
나의 시(詩) -2-
그때 천사의 날개로 퍼덕이며 무형의 공간을 헤집으며 날아오르던
너의 힘센, 순결한 움직임을, 그 상향의,
형태 없는, 존재로의 비약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잡히지 않는 유령이여.
몸을 얻기 위해 내 깜깜한 비천한 창고 속
와글거리는 흐느낌 속을 뒤척이던 아
순결이여, 내가 그대를 향해 일껏
퍼줄 수 있는 것이 이 덜덜 떨리는 예감뿐인 것을,
어쩌면 그대 자신 진즉부터 알고 있었던가.
내 가난한 넝마의 혼 안에서 울부짖는 날개,
피투성이로. 피투성이로.
울며, 뒤채며, 안으로만 날이 서는 이
끔찍한, 삶이라는, 내향성의, 양날의 톱니 사이에서
으깨어져라 시여 죽어라 시여,
내가 그대를 이렇게 지겹게 떠나지 못하므로,
죽어라 시여, 적어도 그렇게
그대 내 필멸의 뻔한 삶을
더불어라. 퍼렇게 살아 눈뜬 채로
잠자지 않는 나의 기(氣), 오 성스러운 망할 끼여.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내가 아무렇게나 죽인 여자 김정란
내가 아무렇게나 죽인 여자
한 여자 어떤 여자 혹은 여자 다른 여자가
(감추어진)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똑똑히 보았다 왜냐하면
나는 내 타락한 말로 그녀를 향해 원한의 독침을
쏘아댔었으니까 나쁜 년 너 때문이야
내 썩은 침이 그녀 위로 날아갔다
그녀가 힘없이 쓰러졌다 나는 그녀의 눈빛이
얼핏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오월의 미풍 어느 오후 나른한 부재(不在)의 감미로움
등교길의 플라타나스 감꽃목걸이… 그리고 순결한
헤매임에게… 안녕, 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그녀가 당장에 푹푹 썩기 시작했다 알게 뭐야
나는 되는대로 지껄였다 지겨워 난 지쳤어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덜덜 떨렸다 오 아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나는 엉엉 울며 다가가
타락한 말의 독즙(毒汁) 밑에서 썩어가는
한 여자 어떤 여자 혹은 여자 다른 여자를
꼭 껴안았다 부패의 냄새가 확 풍겨왔다
(오 아냐! 어떻게든 널 살려볼 방법을 찾아볼께)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눈 김정란
눈&
눈이 내리고,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맨발로
달려가는 소리를 듣는다.
태초에, 우리가 꿈이었을 때,
우리가 애벌레의 날개이며, 봄의 움이며,
신(神)의 숨결이었을 때,
그때, 그렇게 작은 소리로 속살거렸듯이.
ꡒ오 근원이여 우리의 배반을 허락하소서.
오 뭉텅이여 우리가 개체(個體)가 됨을 허락하소서.ꡓ
솜덩이인 우리가 당신을 창조의 시간으로
밀어붙였듯이.
꿈이여 나는 그대를 본다.
끊임없이, 차가움의 뿌리에서 보드라움을
일구어내는 오 빈 몸들이여.
깃털들,
우리가 완벽한 영혼이었을 때 그때
참을 수 없어 버스럭대던
말[言]들,
말들의 뾰족한 비상,
꼭대기에서 가볍게 흩어져버린.
이제 내가 우리의 그림자를 본다.
깃털들,
가벼운 것들이 우리 곁에 있으니
어떻게 태초와 하늘에
굶주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당신의 어깨 김정란
당신의 어깨
당신의 어깨는 좁은 뜨락이다.
꽃이 피어 있다.
누구의 입깁으로 여기에 남은 흔적
이토록 현란하게 흔들리다가
붉은 백 겹의 혓바닥으로 꽃피어난 걸까.
꽃은 또한 발자국이다.
우리가 큰 소리로 아, '확인'이라 외치며
남기는 발자국,
우리는 떠나도 뒤에 남아 홀로 피어나듯.
춤추는 발자국의 길,
당신은 언제나 아프다.
언제나 두고 와 돌아보는 어제처럼
당신의 완결(完結)된 어깨의 길,
어쩌면 쓸쓸하게 하늘에 닿아 있을까.
당신의 어깨 너머엔
날아가는 커다란 눈, 참 여러 개.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매복 김정란
매복
우리는 모든 것들의 등뒤로 돌아선다
시대가 우리에게 잘 맞지 않는
의복처럼 우리를 건드리고 지나간다
안녕 누더기여 안녕
`건강하게'
정신이 되친다 `건강하게'
원칙이여 `건강하게'
깜깜하다 바람 소리
우리는 숨어서 키웠다 언젠가는
함께 있고 싶었다 어떤 날 미친 듯이
축제를 벌이고 싶었다 순진한 혼(魂)들,
나는 눈물이 나왔다
귀여 문을 열어라 편재(遍在)하시는 귀여 문을 열어라
열려라 콩 참깨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요정처럼 자유로웠다
상한(上限)과 하한(下限)까지 하루에
골백번 드나드는 요정 우리는 모든 것들
뒤에서 또 새로이 또 하나의
등이 되었다 흐느끼며
우리는 효율을 건져내려고
많이 삐걱거렸다 저마다 혼자만큼씩
각각, 구체적으로, 삶의 사건과,
만났다, 할 수 없이, 지치며,
우리의 깜깜한 배경 위로
파랗게 불꽃이 지나간다
손톱이 자라고 시대가 흔들린다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베로니카, 두 겹의 삶 김정란
베로니카, 두 겹의 삶
높이 아득히 멀리 허용된 밀도 안에서
한번의 숨쉬기로 가능한한 균질의 단정한
갈증을 끌어올리기, 봐, 순수란 얼마나 위태한가
툭, 생의 끈이 끊어진다, 기어이
그리고 사자들이 웅성인다 존재의
앞, 뒤, 옆, 위, 아래, 어디에서도
그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햇빛 무수히 날지 그 아래로 모든
어른거리는 환상들 너무나 생생하게
우리의 한 겹의 삶을 건드리고 지나가는
가득찬 암시 미묘한 뒤틀림 아주 작은
밀도의 변화 그리고 삶은 갑자기 위험스러워진다
아름다움 또는 너무나 설득력이 강한 유령들의
스침……감미로운, 다른, 생의, 맛, 쓰라린,
순결한 퍼덕임, 죽음, 너무나 다정한 친구같은 부재
나는 가만히 고개를 쳐든다 햇살, 가벼운 손가락
내 거의 빈 육체에 부서질듯 부서질듯 스치는,
오 미묘해라, 내가 어느덧 겹쳐진다, 베로니카,
죽은 다른 나, 나들, 무수한, 가벼운……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봄 김정란
봄&
날개. 봄날. 감기의 뒤끝.
비발디. 초원.
그리고 하느님 나는 당신을 생각한다, 참을 수 없이
이 날개들의 버석임들
작게작게 기원을 향해
저토록 보시락거리는 저 가여운
딱한 갈증들을
감기가 나를 외국 땅에 데려다 놓았지
그리고 내게 속삭였어
잊어라 네 조국을
그래서 하느님 나는 감기의 꼭대기에서 가볍게 튕겨 올랐어 그리곤
버리는 거야 안녕 무게여
비발디. 초원. 흐느끼듯이. 봄날
아모로스―내 안의 날개들이
아모로스―추었어. 봄날. 망명중인 육체의 춤을.
하느님 아아 이 가벼움을, 나는 울면서 하느님이라고 불러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부재의 습격 김정란
부재의 습격
오르페, 그대인가요?
이 목소리, 내 귀가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몇 겁 시간들의 커튼을 흔들며, 말들을 넘어서,
말들 밖의 말로 나를 부르는?
그러나 당장에 내 영혼 속으로 쳐들어와
모든 사물들의 뿌리를 뒤흔드는?
오 내 삶이 다름으로 겹쳐져요
아라베스크 무늬 몇개, 뼈가 비추어보이는
내 지워지는 살 위에 드러나요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불면 김정란
불면
잠이 안 온다. 까치머리. 둥둥
마흔 살이 다 되어서도
스스로의 추함을 다스리지 못하는. 둥둥
내 사는 모양. 밤중에, 까치머리를 하고.
삶? 소문? 꿈?
잠이 안 온다. 장자씨, 나비,
혹은 듣던 대로, 나비씨의 장자?
둥둥 떠돌며, 나는 꾼다(또는 꾸어온다),
이 난장의 꿈.
오, 나의 나비여 그러면 얼마나
그대는 악몽을 꾸고 있는가
이 추악한 내 중년의 몸뚱이를
떠도는 더욱 흉악한 나비여.
용서하지 말아라. 죽여버려라.
잠들지 못하며 나는 다시
나의 생존에 침뱉는다.
죽여버려라, 냄새나는
까치머리의 여자. 둥둥
떠돌수록, 오, 생생하게 체적을 탈취하는
오 자아. 지옥의 볼륨. 삶.
죽여버려라. 저, 끔찍한 괴물.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 또는... 김정란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 또는...
원제 :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 또는 막가는 나의 시법(詩法)
나는 줄거리를 참을 수 없다. 나는 일상을, 역사를 참을 수 없다.
즉 나는 발단과 결말을, 원인과 결과를, 요컨대 얽힘을 참을 수 없다.
말은 궁극적으로 무엇에 봉사해야 하는가.
부재(不在)에…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는 자유에…라고 나는 생각한다.
체적에 대한 혐오. 상대성에 대한 혐오.
내용과 거기에 가슴 얽어넣기,
구질구질한 연연함에 대한 혐오.
본질의 가출, 존재의 가출.
나는 빈집 앞에서 잉잉 운다…하느님…어디 있는 거야.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시, 1992년, 서울 김정란
시(詩), 1992년, 서울
그 여자, 어떤 여자, 분명히 내 삶의 옷자락을 끌고,
모호하게, 뒷모습만 보이며, 걸어갔다
뻘밭, 전쟁터, 목매죽은 귀신들, 거기
푹푹 썩어, 호박빛나는 누르끼리한 점액 속에,
통곡―숨죽인, 거부당한 형태들―웅웅 흔들리고
그 여자, 뒷모습의, 철벅철벅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알 수 없는, 말릴 수 없는,
오만함, 혹은 무모함―사랑이라는 이름의
투기―그 여자 아주 낮게 몸을 숙이고
죽은 자들의 점액 속에 손을 넣고 휘저었다
그 여자, 천천히, 분명히 내 삶의 옷자락을 끌고,
돌아섰다, 너무나 어슴푸레한, 작고 빈약한 구슬 한 개,
그러나 분명히 구슬이라고 부를 수 있을, 작은 알갱이
한 개, 그 여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울렁이는 욕지기를 꾹꾹 참으며 그 여자를 마주 보았다
움푹 파인 두 개의 구멍 그리고 너덜너덜한 살
나는 그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고 불쾌한 끈적거림
나지막한 음산한 웃음 그리곤 들릴락말락 그 끝에서
방울소리, 아가야, 나오너라, 달마중가자
무엇인가 나를 힘차게 공중으로 튕겨 올렸다
맹렬히 부푸는 존재―내 안에서 나를 패대기치는
1992년 7월 서울의, 달빛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장미 화환을 쓴 암흑 김정란
장미 화환을 쓴 암흑
어느 날인지 내 리듬이
몽땅 허물어졌다, 그 사이로
어떤 손이 나를 잡아 끌었다.
그 커다란 손이 나를,
운명적으로 만들었다.
암흑과 절망이 내 사지를
눌렀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내가 암흑 속에서 울면서
하느님을 생각했다. 언제나
내 존재의 깊은 상처에
별빛 눈길이 남아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깊이깊이 어두움을 헤집고 다녔다,
그곳에서 졸음이 왔다.
그리고
딩동딩동 노랫소리를 들었다.
멀리 달려갈수록 더 멀리 반대편의
몫이 가까워진다, 삶과 유머.
외계로 내 긴장한 혼을 열 때마다
들리는, 랄라,
엉뚱한 노래들, 악의에 찬 노래들.
나는 암흑에게 장미꽃 화환을
둘러 주었다, 나는 요정처럼 즐겁게
`나의 암흑'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 내 것인 암흑을 잘 알아보기 위해.
어느 날 내 것인 절망을 부리며 살기 위해.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죽은 `엄마'에 의한 엄마의 교정 김정란
죽은 `엄마'에 의한 엄마의 교정
□ 1
엄마가 죽었다. 사실적인 죽음의 예증(例證)이
눈앞에 나열되었다.
염(殮), 입관(入棺).
그리고 드라이하고 선연하게
머릿속 수레바퀴가 멈추고
사고가 선언한다.
ꡒ엄마는 죽었다.ꡓ
□ 2
아버지는 아프다. 중풍이다.
엄마가 곁에 앉아 있다, 정성스러운 엄마.
아버지가 아기처럼 칭얼거린다.
엄마가 다독거려준다.
둥둥 내 아기 자장자장 내 아기.
□ 3
아버지의 병이 낫는다, 말끔히.
시냇가의 조약돌 같은 아버지, 아버지는
꽃밭을 거닐고 있다. 국화꽃의 향기가
가슴을 흔든다. 엄마가 곁에서 웃고 있다.
작은 불꽃처럼 흔들리는 따스함.
□ 4
수퍼마켓, 팝콘을 사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엄마! 아, 엄마가!
여지껏 깨닫지 못했다니!
아! 죽은 엄마가!
□ 5
엄마가 바느질을 한다, 늘 하듯이
입에 하나 가득 노랫소리를 문 엄마,
내가 문간에 선다. 엄마……
엄마가 쳐다본다, 시선이 부딪치고
우리 사이에서 아, 강처럼 소리내어 흐르는
이승과 저승의 아픔.
□ 6
아버지는 진찰을 받고 있다.
병원 복도에서 엄마가 나비처럼
걷고 있다. 내가 다가선다.
엄마……
응?
그곳은 어떤 곳이유?……사뭇 다르우?……
글쎄, 무어랄지……형식의 저 너머……안개 무리랄지……
우리가 생각나서 온 거유, 엄마?……
……낮은 소리의 웃음, 작게, 아주 작은 메아리 같은……
우리가 보고 싶었수?
그래, 하지만 그곳에선 그 때문에 시달리지는 않는단다.
길다란 복도가 명부의 편안한 웃음으로 감싸였다.
흰 옷을 입은 닥터가 천사처럼 스르르 미끄러져갔다.
재미있어, 내 가슴에서 아주 작은 솜털들이
즐겁게 바시락거렸다.
□ 7
잠이 깨었다. 가슴이 떨고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일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
명부(冥府)를 생각하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햇살로 가득찬 명부(冥府)를……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지하철에서 김정란
지하철에서
낮에 애들 앞에서 어설픔으로 진저리치며 그러나 꾹꾹 눌러참으며 글쓰기와 꿈꾸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리고 나는 참을 수 없어서 종일을 굶었다, 견딜 수 없었다, 이, 수없는 말들, 허망함으로 이빨을 가는, 오 떠도는, 우리가 만들어 낸, 저 넝마들을.
이 턱없는 삶. 나는 밥풀딱지같이 세계라는 밥그릇의 가두리에 붙어 있다, 용서해다오, 세계여 또는 밥이여,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들어낸다, 바깥쪽으로?
밤에, 지하철 창에 비치는 어떤 한 여자, 안의 짐승이 울부짖었다. 맞아? 틀림없어? 너냐구, 그래? 그리고 묵시처럼 찾아오는 눈물…… 우리가 이름붙이지 못하는 어떤 알맹이를 향하여 나는 떨며 떨며 서 있었다.
나는 그 여자를 향해 기어갔다, 날지 말자, 어쨌든 당분간은. 나는 통곡하며 그 여자에게 빌었다, 제발, 너라도 되어야 해, 그렇게 하자, 그것으로라도 나 스스로의 유령이 되지 말아야 한다.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타인들과의 관계 김정란
타인(他人)들과의 관계
나는 그들 곁에 있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참을 수 없이
이것봐, 두부들아
그리고 나는 조심성 없이
아무데나 그들을 푹푹
찔러보았다
(언제나 내 뒤에는 내가 지나온 시절의 바람이 불었다 뒤돌아보면 내 발자국들이 나를 규정하며 펄럭이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핵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들이 무형일수록
더욱 초조했다
내 뼛속에서 악마들이
달그랑대고 있었다 그들은
그 작은 영토가 답답해서
종일 뒤척였다 나쁜년
악마들이 말했다
나는 나이가 먹었다
그래도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었다
그러나
문득문득 내 손끝에 팽팽히
긴장한 감촉이 왔다
그들이 내 손끝을 깨물었다
그리고 나는 몇몇 얼굴들을 식별해냈다
아직도 분명치는 않지만,
그들은 두부가 아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파롤, 가난한 말 김정란
파롤, 가난한 말
부제: ꡒ언어의 본질은 `결핍'이다ꡓ라는 명제를 기쁨의 이름으로 뒤집기
아이들의 팔랑이는 옷
나는 옷의 확실한 물질성에 마음을 빼앗긴다
하지만 그애들의 드러나지 않은 순결한 밀빛 살 위에
아, 저렇게 어두운 빛의 옷이, 어째서?
아줌마, 아이들이 다가와 말했다
봄, 아줌마, 그래요, 우리는 봄이에요
우리의 봄의 몸에 입혀진 가을의 옷
그게 딱해서 그래요?
하지만 어때요, 결핍으로 인해
우리의 봄의 존재 이유는 한결 돋보이는걸
어떤 이가 말했다, 아주 딱딱한 자로
우리의 몸을 탁탁 두들겨서
일렬로 서게 만든 뒤에,
ꡒ애구 딱해라 간난한 족속들ꡓ
우리는 결핍의 옷을 마구 흔들어댔다
모르시는 말씀 우리는 뒤서거니 앞서거니
마구잡이로 대열을 흩뜨렸다
우리가 묶여 있다니!
터진 옷 틈새로, 별빛, 진주빛,
살들이 마구 삐져나왔다
안에서 파열하는 존재,
가난한 집안의 숨겨진 재산들
나는 아이들이 예뻐 죽을 지경이었다
다시 말하면 삶이…
아니면 가난해도 이토록 당당한
아이들의 실존이, 또는 그것을
지키는 어느 시인들의 밤샘이…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
파비안 김정란
파비안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달려갔다. 어머니, 착한 어머니.
길이 우리 앞에 있었다. 시간이 죽은 거리.
우리는 나비처럼 옷을 벗었다. 어두움.
뱀처럼 꿈틀대는 길. 그것은 우리보다 강했다.
누가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진실보다 아름다웠다. 진실을 향해 옷을 벗어던진 여자.
진흙이 일어섰다. 안녕.
ꡒ너무 늦었어요. 너무……ꡓ
그녀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삼켜졌다.
인류의, 타락한 종족의 방황이 신(神)을 겨누고 흔들렸다.
도처를 향(向)한 표적.
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