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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대 강좌 10 - 1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
회향 법회 인만큼 그 동안의 경과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불교인재개발원에서 해마다 진행하는 대중강좌. 이번 강좌를 무비 큰스님을 모시고, 서장 강의를 듣는 순서였습니다. 불기 2551년, 6월부터 시작해서 불기 2552년, 3월이 마지막 10번째 강의가 됩니다. 이 강의를 마치기 전에 저희는 3월 10일부터 중국 선적지 순례를 떠났습니다. 거기에서 무비 큰스님께서 불편하신 몸을 이끄시고, 저희들을 인도하시는 모습 속에서 이 가르침이 ‘책 속에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니구나!’ 참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대혜스님께서 15년간 주석 하셨고, 고봉스님께서 목침 떨어지는 소리에 안심입명 법 화두를 깨뜨린 경산사 선방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선방에서 무비 큰스님과 함께 20분의 짧은 시간이지만 참선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참선을 마치고 무비 큰스님께서 단 한 마디를 하셨습니다. 이번 순례 길에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 한 마디가 지금도 저희 가슴을 헤엄치고 있습니다. 1000년 동안 문자로서 책 속에서 잠들어 있던 서장 내용이 큰스님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자후를 던져 주셨는가! 여러분들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덕 ♪높으신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사♪ ♪사자후를 ♪하소서 ♪감로법을 ♪주소서♪
♪옛 ♪인연을 ♪이어서 새 ♪인연을 ♪맺도록♪ ♪대자비를 ♪베푸사 ♪법을 ♪설 ♪하옵소서♪
잠시 入定(입정)이 있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에서 불교를 말씀드린다면, 불교가 발생하고 오늘 날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간단하게나마 첫 시간에 밟아봤습니다. 그리고 선불교 중에서도 오늘 날 우리나라에서 간화선 불교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왜 지금 간화선인가?] 하는 타이틀로 간화선을 중심으로 공부를 했고, 또 간화선의 지침서의 제일교재라고 할 수 있는 서장을 가지고 지금까지 공부했습니다. 하면서 비록 서장을 量적으로 3분의 1정도 공부하게 됐습니다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 화두는 어떻게 드는 것이고, 선은 어떤 것인가? 선불교는 불교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간화선” 할 때 “선은 화두를 살펴본다.”는 뜻이니만치 화두는 어떻게 살펴보는 것인가? ←이런 것들도 충분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 나름대로는 이야기 할 수 있는데 까지 해드렸다고 생각이 들고, 그 안에서 “화두를 지어간다.”는 표현을 우리는 합니다.
화두를 지어가는 길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서장을 읽으면서 강의를 들으셨다면 얼마든지 화두를 지어가는, 다시 말해서 화두를 들고 선에 임하는 길은 충분히 터득 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서장강의 마지막 시간으로서 그 동안 말씀드렸던 것. 대강 짚어볼 것은 짚어 보고, 그 다음 오늘도 참으로 귀한 분에게 대혜스님이 답하는 내용을 살펴보면서 미진한 부분을 좀 더 보충하는 입장으로 강의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불자들의 숫자가 남 녀 비율로 따지면, 여성 불자들이 훨씬 많지요. 그런데 다행히 이 서장강의에는 남성 불자들이 반을 차지하는 것 같아서 상당히 ‘서울은 좀 다르구나.’하는 생각도 느꼈고, 미래에 한국불교에 대해 아주 고무적인 현상을 보는 것 같아서, 여기 와서 강의를 하고, 여러 불자님들과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저도 참 보람도 있고 흐뭇하다는 말씀도 아울러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서장에서 거사님들에게 대혜스님께서 편지를 보내는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여기는 소위 우리나라에서 여성 불자를 표현하는 보살입니다. 보살님에게 편지를 보내는 내용인데요. 여기서 진은 왜 진자를 썼는지 모르겠어요. 성은 허 씨인데 국태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아들이 재상이거나 아니면 부마거나 그런 상당한 위치에 있고, 또 아들의 위치도 위치려니와 당사자가 그만치 나라에서 존경을 받을만한 인격을 갖춘 분에게 천자가 내리는 아주 영예스러운 호칭입니다. 국부인 이라고도 하고 국태부인이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마침 바로 뒤편에, 이 분에게 보내는 편지 다음에, 재상을 지낸 아들이 나옵니다. 재상을 지낸 이가 둘째아들이고, 그 다음 편지가 첫째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글쎄요.
鄕堂莫如齒(향당막여치). 朝廷莫如爵(조정막여작)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어머니가 있고, 둘째아들이지만, 작위로 봐서 재상이니까 편지순서는 먼저 놓고, 맏아들이지만 재상을 지낸 둘째아들 다음으로 편지순서를 배열을 했더라고요. 그래서 이것을 괜히 저의 속된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편집자는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했는가? 그것은 알 길이 없으나 어쨌든 저의 속된 마음으로는 어머니 다음에 그래도 조정엔 막여작이라. 벼슬이 최고니까요. 재상을 지낸 둘째아들을 놓고 그 다음에 맏아들이지만 맏아들의 지위가 동생보다 낮으니까 맏아들 편지를 뒤에 놨는가? 이런 것들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매일 도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이런 속된 생각. 또 사사로운 생각도 간혹 끼어드는 것이 도를 공부하는데 또 하나의 재미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아무튼 허 보살님은 그 밑에 주해에 자세히 설명이 있습니다만, 아주 일찍이 30대에 과부가 돼서 불교에 신심이 아주 장해서 염불을 하고 예불을 하고, 경을 독송하고 일반적인 불교신행을 열심히 하시는데, 마침 대혜스님과 인연이 되어서 편지와, 대혜스님의 도겸이라는 상좌가 심부름을 하는 것을 통해서 다른 어떤 문제들을 다 철폐를 하고, 화두만 들라고 가르쳤어요. 그래서 경 읽는 것도 철폐 하고, 예불하는 것도 철폐 하고, 염불하는 것. 절하는 것. 모든 것을 다 철폐해 버리고, 화두만 든지 얼마 아니 되어, 一念相應(일념상응)이 돼서 본명원심을 깨닫고, 대혜스님으로 부터 점검을 받은 그야말로 깨달은 사람의 반열에 오른 그런 서장에서는 유일한 보살님이십니다.
일반 여성보살님 뿐만이 아니고, 또 비구니스님들도 훌륭한 도인이 역사상으로는 사실은 많았습니다. 그 숫자가 아무래도 남자 쪽이 더 많고, 또 스님들 쪽이 좀 더 많아서 역사적으로 기록한 것이 스님들 중심으로 기록이 된 것 같이 보입니다만, 보살님들이나 비구니스님들 쪽에서도 도를 크게 이루신 분들이 적지가 않다는 것들도 이 기회에 생각할 수 있는 여념이 되겠습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선불교는 불교의 완성이라고 저는 그렇게 표현합니다. 앞으로 또 어떤 불교가 또 등장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까지의 불교역사로서 볼 때, ‘선불교는 불교의 완성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이러한 최고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결국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 최고의 가치를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지고한 가치를 우리가 깨달아 아는 것이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일러서 “부처다.” 또는 “조사다.”이렇게 아주 높이 명칭을 높여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니 보살이니 조사니 ←이런 표현이 있게 된 것입니다.
“禪”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인간 최고의 가치를 알게 되면 우리 삶은 무엇인가? ‘매일매일 축제의 연속이다.’ ‘매일매일 축제의 연속이다.’ 정말 우리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보면, 우리 삶이 보통 소중하고 값지고 정말 행복하고 즐겁고, 이런 모든 것들을 포함해서 저는 그렇게 표현합니다. “인간본래의 지고한 가치를 우리가 제대로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은 매일매일 축제의 연속이다.” 속된 표현으로 하면 “수백억짜리 로또 복권이 매일 한 번씩 터지는 것과 같은 삶이다.” ←이렇게 감히 표현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는 표현이 아닐까?’ ‘지나치지 않는 표현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p. 185. 25. 진국태부인 에게 답함
道謙禪師(도겸선사)가 돌아와서 준 편지와 아울러 친히 쓴 몇 수의 게송을 받고 처음에는 심히 의심했는데, 도겸에게 자세히 물어 보고서야 바야흐로 스스로 속이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도겸이라고 하는 이는 대혜스님의 제자이고, 대혜스님의 편지를 신도들에게 전하고, 그들의 편지를 받아오고, 그들이 공부하는 것을 대혜스님을 대신해서 지시를 하고, 공부의 상태를 알아서 대혜스님에게 아주 자세히 알려주기도 하는 그런 도 심부름꾼이 도겸 이라고 하는 상좌입니다. 그래서 편지하고 시 몇 수를 보고는 약간 의심했는데, 제자 도겸에게 자세히 물어보니까 이것이 결코 남의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자신의 살림살이가 그 쯤 됐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曠劫(광겁)에 밝히지 못한 일이 시원하게 앞에 나타났으나 남을 따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늘 처음부터 말씀드리기를 여기에 남을 따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본래의 것. 우리가 이미 있는 억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무한 가치. 무한한 보물. ←이것이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고, 인간의 아주 지극히 고귀한 가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결국 이 문제를 드러내는 것을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하고, 수행이니 무슨 기도니 참선이니 하는 그런 어떤 수행 방편은 결국은 이 문제에 대해서 확연히 내가 알고, 확연히 내가 깨닫자고 하는 것이지 그 외에 다른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역사적인 부처님. 이미 2600여 년 전에 살다 가셨고, 그 분의 가르침만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불상을 아무리 조성을 잘 해 놨다 하더라도, 세계적인 아주 유명한 석굴암 불상. 더 이상 웃을 줄도 모르고, 더 이상 울 줄도 모릅니다. 화도 낼 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중생이라고 하든지, 사람이라고 하든지, 부처라고 하든지 관계없이 바로 웃을 줄 알고, 바로 화낼 줄 알고, 좋은 것 보면 욕심낼 줄 알고, 슬픈 일 보면 슬퍼할 줄 아는 이 기가 막힌 부처가 우리들의 진실한 모습이라고 하는 것. 우리의 실상이라고 하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불교지요. 그런데 우리는 설명하는 것 가지고는 도저히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설명이 안 되니까 이것은 정말 100% 자기 것이 되기까지는 이것은 모두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그저 이 선불교가 됐든 화엄불교. 법화불교가 됐든, 무슨 불교가 됐든 그것은 일종의 안내서에 불과한 것이지요. 안내서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 대혜스님의 말씀 속에서도 남을 따라 얻은 것이 아니다 그랬습니다. 法喜(법희)와 禪悅(선열)의 즐거움이 세간의 즐거움에 견줄 것이 아님을 비로소 알았다고 하니, 제가 당신을 위하여 여러 날 기뻐하여 침식을 다 잊었습니다. 진국태부인이 불교의 진정한 의미를 맛보고, 그것을 소위 “법희 선열”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가 서장을 보든지 기타 기도를 하든지 아니면, 경전을 좀 읽든지 이런 데에 맛을 들이고 그 이치에 눈을 좀 뜨게 되면요? 세속적인 즐거움하고 비교가 안 되지요. 이 보살님은 정말 마음을 밝혔습니다. 광겁에 밝히지 못한 일이 시원하게 앞에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조금만 불교에 취미를 가지고 맛을 들여도 이것이 보통 맛이 아닌데, 이 보살님 같이 이렇게 깨달음을 얻었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아들은 재상이 되고 본인은 국부인이 된 것이 족히 귀한 것은 아닙니다. 세속적으로 보면 대단한 일이지요. 아들이 재상이 되고 자기는 나라로 부터 국태부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는데, 그것이 귀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뭐냐? 거름 무더기에서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를 거두어 백겁 천생에 받아쓰되 다함이 없어야 바야흐로 참으로 귀한 것이 될 뿐입니다. 거름 무더기가 뭡니까? 우리 씨앗 되어있는 육신이지요. 정말 별 가치 없는 육신을 흔히 거름 무더기라고 표현을 합니다. 거름 무더기에서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배를 거두었다. 그러니까 우리 육신 속에서 무한한 생명의 가치. 그야말로 내 생명이 부처님의 진실 생명이라는 가치를 거기서 발견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는 것이고, 귀한 것이다. 다음은 대혜스님께서 깨달은 사람. 또는 불교를 많이 공부하신 분에게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간절히 이 귀함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만약 귀함에 집착하면 존귀하다고 하는 데에 떨어져서 다시는 자비를 일으키고 지혜를 일으켜서 有情(유정)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기억하고 기억하십시오. 부디 기억하라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면 잘 써야겠지요. 잘 써야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 쓰든지 아니면, 사업을 더 번창 하게 하든지 아니면, 자선사업에 쓰든지 무엇에 쓰든지 간에 잘 쓰는 것이 목적입니다. 대혜스님이 깨달은 사람들에게 늘 부탁하기는 “당신이 그 만치 공부가 되었으면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교화하는 데에 진력하라.”이런 당부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하지 아니하면 자기 혼자 돈을 벌어서 혼자 쓴다거나, 깨달음을 이뤄서 자기 혼자 누리다가 그만 둔다거나 하면 이것은 附 佛法外道(부불법외도)라. 불법에 붙어사는 외도. 마구니라고 표현했습니다.
불교는 예를 들어서 1을 알면 1을 전하는데 있습니다. 100을 알면 100을 남에게 가르쳐주는데 있습니다. 세속 돈이야 그것 좀 인색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불교를 알아서, 부처님의 재산을 조금이라도 정말 자기의 것으로 자기 것으로 했을 때는 그 고귀한 재산은 세속적인 재산 하고는 비교가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가슴에 안고 있다가 그냥 가면 안 되는 겁니다. 크게 잘못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서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자비요, 이것이 지혜입니다.
서장 대 강좌 10 - 2
우리가 부처님께 귀의를 해서 불교를 믿고, 불교공부를 하면서 불교공부를 제대로 해서 부처님 재산을 제대로 나의 재산으로 만들어서 그 재산을 가지고, 다시 말해서 불법의 이치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됩니다. 그런 길이 불자의 길입니다. 근래에 자선사업도 불자들이 많이 하고, 스님들도 많이 하고, 복지회관이라든지 병원이라든지 노인 요양소라든지 복지시설을 많이 해서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라든지, 참 좋은 일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부처님제자가 그 일까지 아니해도 됩니다. 부처님제자는 그 보다 더 바쁜 일. 급한 일. 더 고귀한 더 가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부처님제자에게 한 번도 그런 일 하라고 권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가르친 진리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해서 진리를 세상에 전하라고 했지, 그 외에 다를 것을 세상에 보탬이 되도록 하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그것은 쉬우니까 그런 쉬운 일을 하나봅니다. 불교는 어렵고요. 복지문제라든지 배고픈 사람들에게 의식주 제공하는 일은 쉬우니까 그 일을 하는 것 같은데, 불교를 아는 것도 어려운 것 같고, 알고 전하는 것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닌가 봅니다.
그래서 여기서 깨달은 허 보살님. 국태부인에게 최후로 당부하는 말씀을 우리는 유의해야 됩니다. 자기 깨달은 것에 도취해서 그냥 지내면 안 된다. 꼭 자비와 지혜를 일으켜 가지고서 유정들을 불쌍히 여겨야 된다. 유정들을 불쌍히 여기라는 말은 중생제도를 해야 되고, 교화를 해야 된다. 부처님 법으로서 교화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그 아들 장승상 덕원에게 답한다고 그랬어요. 이 분도 역시 깨달으신 분입니다. 승상에게 답하는 편지라서 그런가? 처음부터 대혜스님도 자세가 좀 다른 것을 느끼게 됩니다.
p. 187. 26. 장승상 덕원에게 답함 공경하여 생각하니 편안하게 고요한 곳에서 생활하여 저 국태부인과 더불어 한 곳에 함께 모여서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즐겨서, 마땅함을 따라 불사를 하되 병도 없고 고뇌도 없어서 당신의 생활이 萬福(만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도 깨달았고 형님은 깨달음에 거의 가까워 있는 사람이라고 또 이 승상은 승상벼슬을 하는 사람으로서 깨달음을 이뤘으니까 그 집안은 세속적으로나 불교적으로나 참 부러운 집안이네요. 위로부터 모든 성인께서 다 그렇지 않은 분이 없으셨습니다. 깨달은 사람들은 깨달은 사람들끼리 정말 제대로 복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이른바 모든 생각 가운데 일체법이 滅盡(멸진)한 삼매에 들어서 이것은 일체 중생으로서의 어떤 사량 분별은 다 소멸된 상태에서라는 말입니다. 다음에도 그 얘기입니다. 菩薩道(보살도)에서 물러나지 않았으며, 菩薩事(보살사)를 버리지 않았으며, 대자비심을 버리지 않았으며, 바라밀을 닦아 익히되 일찍이 쉬지 않았으며, 일체의 불국토를 관찰하되 싫어하고 게으름이 없었으며,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버리지 않았으며, 법륜을 굴리는 일을 단절하지 않았으며,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가진 바 훌륭한 소원에 이르기까지 다 원만함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말이 달라서 그렇지 아주 여러 번 반복해서 같은 이야기입니다.
보살도가 무엇이며 보살사는 무엇이며 대비심은 무엇입니까? 누구에게 해당 됩니까? 일체의 불국토를 관찰한다고 하는 일. 중생을 제도한다는 일 법륜을 굴린다는 일. 중생을 교화한다는 일. ←이것이 전부 중생교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교화로서 회향하라. 재상쯤 돼서 도를 통하면 그 자리에서 중생교화 하기 참 좋을 겁니다. 권력 있지, 돈 있지, 그 다음에 중생 교화할 원력만 있으면 아주 마음껏 할 수 있을 겁니다.요즘하고는 다르잖아요. 요즘 국무총리가 그런 것 한다고 하면 당장에 비판 받지만, 옛날에 재상이 한다면 감히 누가 뭐라고 합니까? 임제스님도 보면 거기 부주. 도지사쯤 되는 사람이 관원들에게 “공무들 하지 말라. 오늘은 휴업이다.”하고 임제스님을 초청해서 전부 법당에 불러놓고 일체 관료들, 오늘 공무집행 아니해도 된다고 하고 전부 불러서 “임제스님의 법문을 들어라.” 임제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이 공무집행 하는 것 보다 더 급한 일이다 이겁니다. ←이렇게 해서 수 천 명을 모아놓고 법문을 듣게 했습니다. 도지사쯤만 되어도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옛날부터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 자리를 얻으면 그 일을 할 수 있다.” 자리가 그렇게 중요한가 봐요.“그 자리를 얻으면 그 일을 할 수 있다.” 참 함축성 있는 말이지요. 그래서 자리 차지하려고 그렇게 혈안이 되어있나 봐요. 그것을 이렇게 중생을 깨우치고 교화하는 데에 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것이 비록 옛날 군주국가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이 민주사회에서는 용납이 될 수 없는 일이라고 우리가 얼른 생각을 하지만, 이런 권력을 잘 활용을 해서, 사람들에게 더 큰 이익이 돌아가게 한다고 하면, 이것은 더 바람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교화로 회향하라.” “중생교화로 회향하라.”
보살도. 보살사. 중생을 제도하는 일. 법륜 굴리는 일. 중생을 교화하는 일. 불교 중에서는 완전한 불교 선불교. 그리고 불교 최고의 공부를 하는 여러 불자님들은, 상당히 불교에 대한 안목과 소견이 갖춰졌을 줄 믿습니다.그렇다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길이 있는데, 거기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길을 찾아서 부처님 법을 펴는 일. 배고픈 사람에게 밥 주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부처님 법을 한 그릇 준다고 생각해 볼 때, 밥 한 그릇 하고 어찌 비유가 되겠습니까? 그 생각을 좀 해보세요. 그러면 뭐가 복이 되지요? 철 한 근 주는 것 하고, 다이아몬드 한 근 주는 것 하고, 도대체 비교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우리 불자들은요. 최소한도 그 정도 불법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셔야 됩니다. 불교공부는 그런 겁니다. 그 만치 가치가 있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을 때 시시하게 살지도 않고, 남 보기엔 모르지요. 겉으로 보기엔 몰라도 정신적으로 차원이 다른 삶을 결국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체 국토의 차별을 통달해서 알며, 부처 종자의 성품에 들어가 피안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대장부가 네 가지 위의 가운데 수용한 가풍일 뿐입니다.네 가지 위의는 행 주 좌 와.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누우나 할 것 없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대거사께서 大자를 하나 더 붙여 줬네요. 大居士(대거사)께서 여기에 힘써 실천하고 게으름이 없으므로 저도 여기에 또한 동참합니다. 또 알지 못하겠습니다. 도리어 외부인이 간섭하는 것을 허락합니까?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중생제도 하는데, “나도 동참합니다. 우리 다 같이 합시다. 내가 거기에 거사와 더불어 중생교화 한다고 하는데 당신이 간섭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뜻이지요. 외부인이 간섭하는 것을 허락합니까? 그러니까 대혜스님의 법력이 아무리 높다한들 일개 재상이 재상의 자리를 빌어서 중생교화를 한다고 하면, 그것이 비교가 안 되지요. 그런 뜻입니다.
傳法偈(전법게)에 假使頂戴經塵劫(가사정대경진겁) 身爲床座遍三千(신위상좌변삼천). 若不傳法度衆生(약불전법도중생) 畢竟無能報恩者(필경무능보은자). ←이런 말이 있지요. 가령 부처님을 위한답시고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수 억만 년의 세월을 지내고, 또 부처님을 위한답시고 부처님을 모시는데, 내가 큰 넓고 넓은 평상이 되어서 내 몸의 평상위에서 부처님이 앉고 눕고 자고 걸어 다니고, 할 수 있도록 내 몸을 그렇게 까지 희생을 하고 봉사 한다 하더라도, 若不傳法度衆生. 만약에 부처님의 법을 배워서 부처님의 법을 전해서 사람들을 교화하지 못하면 결코 불교를 안다고 할 수가 없고, 부처님께 공덕을 짓는다고 할 수도 없고, 또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다고도 할 수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얼마나 명확한 말입니까?
우리 몸을 희생해서 부처님이 앉고 눕고 걸어 다니고 하는 평상이 되고 길이 되고 우마가 되고, 설사 이 몸을 가지고 그렇게 희생 하고 봉사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공이 아니다 이 겁니다. 그것이 부처님한테 복 짓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법을 배워서 그 법을 사람들에게 전할 줄 알아야 그것이 부처님이 알아주는 일이고, 부처님이 고마워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도 사실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그야말로 이 순간에 우리는 다이아몬드의 큰 광맥을 발견한 겁니다. 어디 가서 봉사하고 남을 위해서 배려하는 일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하지만 그것은 한 근의 철을 가지고 보시하는 것이라면, 부처님의 가르침. 진리의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일깨워 준다면, 이것은 다이아몬드를 그 사람에게 한 근을 주는 것 하고 맛 먹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와 같은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 가치를 우리가 얼마만치 가슴에 와 닿게 이해하고 새기고, 내 살림살이가 되느냐 하는 것이 물론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들으니 장사에 이르러 곧 비야에서 입을 막고 깊이 둘 아닌 데에 들어갔다고 하니, 이것은 장사라는 지명이지요. 장사라는 곳에 들어가서비야에서 입을 막고 깊이 둘 아닌 데에 들어갔다. 이것은 거사분의 대표로서 유마거사는 유마경에서 잘 나타났는데, 그 분이 바이샬리 라고 비야리 성에서 사셨고, 거기가 유마경의 무대가 되었는데 그 유마경의 내용은 말하자면 不二法門을 나타내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둘이 아닌 이치를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에 문수보살이 둘이 아닌 이치를 아주 현묘한 논리로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최후로 유마거사보고, “둘이 아닌 도리를 한 번 표현하십시오.”라고 하니까 입을 막고 하는 말이 아무 말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둘이 아니라면 하나인데 이것은 숫자로서의 하나가 아니고, 통일된 하나. 전체로서의 하나. 그런 뜻입니다. 전체다 이겁니다. 그렇다면 굳이 나누어서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라고 하는 말도 벌써 때가 묻은 것이고, 흔적이 남는 것이고, 군더더기가 되어버리지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라고 하는 ←이 말도요. 그러니까 유마거사는 그 이치를 알기 때문에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비야리성에서 입을 막고 깊이 둘 아닌 데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 분. 장승상도 그렇게 묵묵히 지내시나 봅니다. 그 소식을 들었으니 이 역시 분수 밖이 아닙니다. 물론 분수 밖의 일은 아니다. 아무 말 없이 지낸다는 것. 그것도 이해는 해줄 수 있다 이말입니다.
법이 이와 같은 연고로 원컨대 거사는 이와 같이 수용한다면, 모든 마군과 외도가 정히 와서 법을 지키는 선신이 될 것입니다. 그 나머지 갖가지 차별되는 다른 뜻도 다 스스로 마음에 나타난 경계이고, 또한 다른 물건이 아닙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 거사는 어떻습니까? 앞의 내용을 보면 보살도. 보살사. 중생제도. 법륜 굴림.중생교화. 이런 말을 잔뜩 늘어놓고, 나중에 “아, 이것은 어떻습니까?” 이 거사하고 길이 다른 이야기지요. 길이 다른 이야기를 앞에 잔뜩 많이 해놓고, 마지막에는 거사가 입을 막고 조용히 지낸다고 하니까 그것을 그냥 인정해 주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 대혜스님이 이 장승상에게 경책 내지 꾸중을 충분히 이해하시겠지요. 이것은 꾸중입니다. 보통 꾸중이 아닙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도 당신이 깨달았다고 하는 그 깨달음에 도취해 살지 마십시오. 그것은 일종의 집착입니다. 깨달았으면 중생교화 해야지요. ←이렇게 표현했고 또 이 장승상이라는 사람에게도 앞에 그렇게 여러 낱말을 중복 써 가면서 중생교화. 불교는 사람들을 교화하는 데에뜻이 있는 것이지, 교화가 없는 것이라면, 당신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도통 했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라는 뜻이거든요. 앞에서 그래 놓고는 사실 이 거사는 입을 막고 조용히 사니까 그 태도가 옳지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편지로 읽을 수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아셔야 됩니다. 이것이 맞장구치는 식 표현을 했습니다만 사실은 아닙니다. 전반부의 글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어쨌건 이와 같이 해서 장승상 덕원에게 답하는 내용은 이렇게 됐습니다.
p. 190. 27. 장제형 양숙에게 답함. 이분은 형입니다. 형인데 제형이라고 하는 벼슬은 재상보다는 훨씬 낮은 벼슬이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분도 가당치 않은 분입니다. 비록 어머니하고 동생처럼 그렇게 확연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은 아주 대단한 경지에 이른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거사의 행동하는 바가 그윽하게 도에 합치되지만, 다만 한번 “와!” 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뿐입니다. 일상생활은 그야말로 도에 합치된다. 그랬습니다. 제가 서장 강의 서두에 禪의 일곱 가지 정신을 거론한 적이 있습니다. 깨달아서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우리의 일상생활이 선의 정신에 부합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그랬습니다. 저는 늘 선을 얘기할 때 그 얘기를 합니다.
簡素(간소). 簡潔(간결), 소박한 삶. 선이 좋다면, 선을 좋아하는 특히 선불교는 불교의 완성이라고 했으니까 불교의 궁극은 결국은 그 삶이 어떠하냐? 일곱 가지로 표현될 수 있다. 간결 소박한 모습. 脫俗(탈속)한 모습. 俗氣(속기)가 덕지덕지 묻어 있어서 속된 모습. 그것은 불교도 아니고 선불교는 더욱 아니다 이겁니다. 탈속해야 됩니다. 그리고 지극히 自然(자연)스러워야 됩니다. 저절로 그러해야지, 조작 되어 있으면 이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선불교는 더욱 아닙니다. 자연을 제가 강조를 했지요. 그리고 悠然(유연)해야 됩니다. 깊이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孤高(고고)함이있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어수선하고 부산함이 있어선 아니 됩니다. 靜寂(정적). 정적한 모습. 할 일 다 하면서도 어딘가 고요한, 흔들림이 없는, 動搖(동요) 없는, 요지부동의 그런 자세. ←이것이 선을 하는 선불교를 하는 사람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變化(변화). 자기 삶이 절대적이라고 옹고집이 되어서 도대체 융통성이 없는 그런 인간은 그것은 불교를 하는 인간이 아닙니다. 선불교를 하는 인간은 더욱 아니지요. 변화무쌍해야 됩니다. 그야말로 한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런 상황에 그 상황보다도 아주 더 빨리 대처할 수 있는 그런 능력. 그런 정신이 선불교를 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것이 삶이지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일상생활이 도에 계합한다는 것이 禪의 일곱 가지 정신이 충분히 잘 갖춰진 삶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와!” 라고 하는 것은 뭐냐?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와!” 일상생활은 행동하는 바가 그윽하게 도와 합치되지만, 다만 한번 “와!” 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그랬어요. “와!” 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런 간소 · 탈속 · 자연 · 유연 · 고고 · 정적 · 변화. ←이런 일곱 가지 정신을 충분히 나의 삶으로 엮어가더라도, 지고한 인간의 가치를 알아야 됩니다. 앞서 서두에 말씀드린 지고한 인간의 가치를 알면 우리의 삶이란 축제의 연속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처지가 어떻든 병이 들었든 늙었든 아니면 젊었든,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 상황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어떤 조건도 필요치 않는 그런 입장에서 정말 인간의 지고한 가치를 제대로 알면 우리의 삶은, 지금 현재 어떤 처지에 있던지 간에 우리의 삶은, 매일 매일 어마어마한 축제의 연속이다 하는 것.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행복이라는 낱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겁니다. 매일 매일 수백억짜리 로또 복권이 터지는데 그것을 어떻게 감당 하겠습니까? 감당 못 할 정도의 축제. 축제의 분위기. 우리의 삶은 축제의 연속이다 이겁니다. 이 가치를 정말 확신하는 것이지요. 눈으로 바로 보는 것이고요. 순간순간 느끼게 되는 “와!”하는 그 도리입니다. “와!”하는 그 도리가 뭐겠습니까? 그 사실을 깨닫는 것. 인간의 그같이 지고한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제스님 같은 이는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있는 것이 아니다.” 一步一拜(일보일배) 하면서 수년을 거쳐서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가고 있는 아주 유명한 무착문희 선사를 보고 꾸짖는 소리입니다.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있는 것이 아니고, 친견하러 가는 당신이야말로 내가 보니까 진짜 살아있는 문수구나.” 오대산에 문수는 일보일배 할 줄 몰라요. 피곤하면 잠 잘 줄 몰라요. 석굴암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화 낼 줄도 몰라요. 속에는 화나도 참는 그런 것이 아니고, 무엇같이 다 잊어버리고 화내고, 통곡할 일이 있으면 통곡하고, 웃을 일이 있으면 그냥 허벌나게 웃고, 그것이 살아있는 부처지요. 그보다 더 존귀한 존재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 어디 어떤 부처가 그럴 줄 압니까? 여러분들 말고 어디에도 그런 부처는 없습니다. 그렇게 바로 보입니다. 이런 사실을 스스로 확연히 깨달아 아는 것. 이것이 “와!”하는 그 소리입니다.
금강경만 하더라도 一切法(일체법)이 皆是佛法(개시불법)이라는 말을 하지요. 일체법이 뭡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일체법이란 것이 뭡니까? 탐욕부리고 좋은 것 있으면 탐심 나고, 화 날 일이 있으면 화내고, 이치를 몰라서 그냥 캄캄하고 어리석고 어리석은 행동 막하고 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는 일체법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일체법은 그것이라고요. 우리가 뭘 하든지 간에 우리의 상황이 어떻든 간에 처해진 상황에 따라서 내 나름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나에게는 일체법입니다. 그것 말고 다시 일체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과정에서, 울고 웃고 온갖 희로애락이 뒤범벅이 되어 있는 그런 하루하루의 삶. 이것이 일체법입니다.
一切法이 뭐라고요? 皆是佛法이라고 했잖아요. 平常心(평상심)이 是道(시도)다. 이런 말 많이 들었지요? 여러분, 평상심이 뭡니까? 좋은 것 보면 탐심 나지요? 이것이 우리 평상심입니다. 마음에 안 들면 화나지요? 이것이 평상심이라고요. 탐 진 치 삼독 말고 우리 평상심이 있으면 뭐가 있는가 또 내놔 보세요. 자기 허물 덮으려고 하고, 쥐꼬리만 한 잘한 것 있으면 그냥 자랑하려고 하고, 이것이 우리 살림살이고 우리의 평상심입니다. 그것 말고 무슨 평상심이 있냐고요. 평상심이 도다. 하니까 이것을 어떻게 해석을 못해서 “텅 빈 마음이다.” 텅 빈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텅 빈 마음은 없는 겁니다. 그것은 도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탐 진 치 삼독과 8만4천 온갖 번뇌. 희로애락이 그대로 우리 평상심이 아닙니까? 그 마음이 도입니다.
서장 대 강좌 10 - 3
오늘 종강 기념으로 제가 아주 존경하는 영명연수선사의 “보살계를 받는 길”이라고 하는 책을 선물하게 되어서 참 다행이다 싶은 생각을 합니다. 뒷면에 보면, 탐욕이 곧 道다. 진심내고 어리석음도 또한 도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법 안에 일체의 불법을 모두 갖추었다. 그랬습니다. 이것이 제가 하는 소리라면 여러분들이 ‘어디서 마구니가 와서 저런 소리한다.’고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아미타불의 後身이라고 하는 영명연수선사의 말씀입니다. 또 그것도 이 안에 본문에 보면, 諸法無行經(제법무행경)이라고 하는 경전의 말씀을 빌어서 영명연수선사가 하신 겁니다. 부처님경전에 있는 말씀을 영명연수선사 같은 뛰어난 안목을 갖춘 이가 그것을 인용해서 “보살계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을 설명하면서 여기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제법무행경 내용을 여기 상당히 장황하게 인용을 했습니다.
어느 절에 어떤 비구와 법사가 살았습니다. 법사라고 해서 비구가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아주 고집불통 비구가 있었고, 아주 대승적인 삶을 사는 법사가 있었습니다. 법사는 자기가 늘 중생들에게 불교를 가르친다고 시중에 나가서 설법도 하고, 포교도 하고, 신도들도 만났습니다. 자신만 한 것이 아니고 제자들도 늘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구가 ‘저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절대 산문 출입도 하지 말고, 세상이 돌아가는 어떤 것도 보면 안 되고 들으면 안 되고, 이렇게 해야 수행인 줄로 아는 비구입니다. 그래서 비구가 공사를 붙였어요. 목탁을 쳐서 대중들을 다 모았습니다. 어떤 법사가 교화한다고 하면서 계속 시중에 들락날락 하고,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시중에 들락날락 하면서 온갖 볼 것 안볼 것 다 보고 다니고, 이것이 수행이라고 하면서 지금 하고 있는데, 절대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엄명을 내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법사가 있다가 “내가 스님을 위해서 아주 뛰어난 게송을 하나, 법문 한 마디를 일러 줄 텐데 이 법문을 들으면 당신은 틀림없이 당신 마음에 들지 않고, 당신이 아는 불교가 아니기 때문에 비방할 겁니다. 비방을 많이 해서 비방을 하는 인연으로 지옥에 갈 겁니다. 하지만, 지옥에 가더라도 내가 일러주는 그 고차원적인 아주 차원 높은 훌륭한 대승법문을 들은 인연으로 지옥에 갔다가 얼른 나와서...” 그러니까 받을 것은 받고 줄 것은 주는 것이지요. 세상 이치와 똑 같은 겁니다. “당신은 나보다도 어쩌면 더 빨리 성불을 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식입니다. 좀 과장된 표현을 하면. 과장된 표현도 아니지요. 지금 거의 비슷하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게송을 하나 일러주는데, 바로 이겁니다. 탐욕이 곧 道다. 진심내고 어리석음도 또한 도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법 안에 일체의 불법을 모두 갖추었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구는 그냥 펄쩍펄쩍 뛰는 겁니다. 탐욕은 버려야 하는 것이고, 진심과 어리석음도 제거해야 하고, 오매불망 버려야 하는 그것이 우리의 적 인데, 그것이 도라니 도대체 이것이 마구니도 보통 마구니가 아니고 이것은 외도다. ←이래 가지고 그냥 입에 거품을 물고 비방을 막 하고, 그냥 비방을 해도 보통 하는 것이 아니지요.
여러분들, 기존의 불교공부는 그렇게 알았지요? 탐 · 진 · 치. 삼독 내지 108번뇌. 8만4천 번뇌는 다 버려야 하는 것이다. 지금 수천수만 곳에서 불교 강의를 하고 있는데 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 영명연수선사가 제법무행경에서 인용하기를 이렇게 부처님이 가르쳤고, 또 영명연수선사의 마음에 아주 맞아서 그것을 여기에 소개를 했고, 저도 그것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 결국은 이 책을 번역하고 해석을 하게까지 이르러서 오늘 여러분들께 법공양을 올리게 되었는데요.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불교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그런 기존의 불교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지요.
여기에 “와!”라고 하는 이것이 뭐냐? 一切法(일체법)이 皆是佛法(개시불법)이다. 平常心(평상심)이 是道(시도)다. 일체법도 탐 진 치 삼독 8만4천 번뇌요. 평상심이 탐 진 치. 삼독과 우리가 늘 화내고 울고불고 하는 이것이 평상심이다 하니까 그냥 간단하게 해결 되는 것을 가지고 정말 그것을 알기 전에는 저는 평상심이 무엇인지 몰랐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평상심이 공한 마음인가? 참 마음인가? 뭔가? 그것은 공한 마음이다. 참 마음이다. 진실한 마음이다. 텅 빈 마음이다. 진여다. 불성이다. ←이렇게 해 봐야 그것은 名字일 뿐입니다. 도대체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법무행경에 이 말씀을 보고는 야~ 영명연수선사는 정말 훌륭한 선지식이고 그 말이 진짜 맞다. 평상심이 바로 탐 진 치 삼독 부리는 것이 우리의 평상심이라고요. 그것 외에 평상심이 무엇이 있습니까?
또 그것 외에 우리들에게 일체법이 뭐가 있습니까? 그것 외에 우리들에게 일체법이 없습니다. 평상심도 그것입니다. 우리 평상심도 그것 아닙니까? 좋은 것 보면 갖고 싶은 것이 평상심이지요. 마음에 안 들면 화나는 것이 평상심이지요. 내 잘못한 것을 덮어 버리고 싶은 것이 평상심이지요. 남 잘못한 들추어내어 꼬집고 싶은 것이 평상심이지요. 우리 일상이 계속 그 일이 아닙니까? 그것이 평상심이라고요. 그것이 도입니다. 그런 것을 더 이상 없애려고 하지 마세요. 없앤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탐 진 치 삼독 없앤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저도 그렇지만 여러분들 불교공부 4~50년 한분들도 있지요? 만약에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라면, 한 반쯤은 없어져야 될 것이 아닙니까? 다는 안 없어졌다 하더라도 한 반은 없어져야 될 것이 아닙니까? 아니, 한 10분의 1은 없어졌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아니잖아요? 그대로잖아요. 그대로. 저만 그대로인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그대로입니다. 제가 보니까 선배. 선배. 대선배. 훌륭한 분의 구체적인 이름을 들지 못해서 그렇지 면밀히 보아 왔습니다. 제가 첫 시간에 소개할 때 禪房(선방)을 다니면서 會衆(회중)을 가지고 있는 선지식은 제가 다 가서 한 철씩 두 철씩 살았다는 표현을 했는데, 똑 같습니다. 왜 똑 같으냐? 그것이 평상심이기 때문에 똑 같은 겁니다.
그것이 도이기 때문에 똑 같은 겁니다. 단 특수한 분들이 몇 분 있다면, 그것은 그 분들이 탐욕 부리는 방향이 달라요. 중생을 많이 제도하고 싶은 그 탐욕이. 돈 많이 벌고 싶은 그 탐욕. 그것이 약간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탐욕이 아니라고 해도 좋고요. 그럼 돈 버는 것은 탐욕이고, 중생제도는 탐욕이 아니라고 해서 설득이 되겠습니까? 다 원력이면 똑 같이 원력입니다. 돈 벌어서 세상에 많이 기여 하고 싶은 것도 원력이지요. 중생제도만 원력인가요? 그것이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탐욕 버리려고 아등바등 애쓰지 마십시오.
절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도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살림살이입니다. 평생 가져갑니다. 평생 가져가더라고요. 저만 가져가는가? 했더니 우리 선배. 선배. 대선배들도 다 평생 가져갑니다. 그래서 이 선불교는 서두에도 말씀드렸듯이, 불교의 완성이다. 불교는 최소한도 이 시대에 있어서는 더 나아갈 데가 없습니다. 최극단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최소한도 불교 최 극에 달했는데, 이 자리에서는 이렇게 밖에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경전에 있는 말이고 알고 보면 눈 뜬 사람은 다 똑 같이 이야기 하니까요.
그래서 여기서 이 거사가 일상생활에는 선의 일곱 가지 정신에 계합한 삶을 살고, 단 “와!” 하는 이것 하나만 못했을 뿐이라는 것은 인간이 탐욕을 부리면 부리는 데로, 진심을 내면 내는 데로, 그 나름대로 지고한 가치라고 하는 것. 그리고 또 여기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질문하기를 “보살계 같은 것은 상당히 수준 높은 문수보살. 보현보살 같은 이들에게 해당 되는 것인데,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 그것은 너무 과분한 것이 아니냐?” ←이런 질문을 하니까 영명연수선사가 “만약에 자신이 문수보살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보현보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당신 속에 있는 불성종자를 말살하는 것이다. 죽여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부처가 아니라고 만약 생각한다면 三世의 모든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놨습니다. “보살계를 받는 길”이라고 하는 이 책에요.
자신이 부처가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탐 진 치 삼독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우리를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탐 진 치 삼독이 없는 저~기 석굴암부처님 같은, 나무로 깎은 부처님. 돌로 깎은 부처님. 철로 만든 부처님 같은 그런 부처님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탐 진 치 삼독과 8만4천 번뇌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우리를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당신이 만약에 부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三世의 모든 부처님을 비방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대교에서 화엄경에서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 아니냐? 화엄경에서 분명히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고 똑 같은 것이고, 하나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화엄경에서 그 말 아니 했을 것 아니냐? 그 말 왜 했느냐? 이겁니다. 어디 알지도 못하고, 문수 보현에게나 해당되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따위 소리를 어디서 하고 있느냐고 ←이러고 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진짜 부처요, 당신이야말로 진짜 문수 보현이다. 거기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 갖지 말라. ←이런 말까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그 법사가 비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그 비구는 그렇게 비방 했어요. 사정없이 비방을 해서 결국 지옥에 갔고, 지옥에 갔다가 얼른 나와서 그 법사보다도 더 먼저 성불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여부는 놔두고,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正信이 우리가 취할 바인데, 그런 이야기가 “보살계를 받는 길”이 책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경전에 있는 이야기를 영명연수선사가 인용을 했습니다. 영명연수선사는 아미타불 後身이라고 할 정도로 송나라 때 아주 뛰어난 분입니다.
p. 190. 비록 한 번 “와!” 하는 것을 얻지 못했더라도 죽는 날에 염라대왕이 또한 모름지기 손을 모아 공경하고 돌아와 항복할 것이거늘, 설사 그런 인간의 지고한 가치를 확철히 깨닫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당신의 삶이 간소하고 탈속하고 자연스럽고 유연하고 고요하고 정적하고 변화한 그런 삶이 충족되어 있다면 그야말로 염라대왕도 당신에게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그랬어요. 그런데 하물며 한 생각이 상응하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서 한 생각이 상응하다. 라고 하는 말은 그렇습니다. “와!” 하는 그 소리지요. 그야말로 인간의 지고한 가치에 대한 눈뜬 그것입니다.
제가 비록 목격하지는 못했으나 그 일하는 것을 보건대 크고 작은 일에 맞게 하여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습니다. 다만 이것이 문득 도가 합치되는 곳입니다. 뭐든지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또 分대로 척척 물 흐르듯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를 이론적으로라도 좀 알아서 그것이 자기의 삶에 녹아든 사람들은 큰 도는 그만 두고라도 그 사는 태도가 이 사람처럼 자연스러워야 됩니다. 또 分을 따를 줄 알아야 됩니다. 인연을 따를 줄 알아야 됩니다. 절대 분에 지나치거나, 인연을 거스르거나, 이치에 역행하거나, 이렇게는 안 산다고요. 순리대로 살 줄 알아요. 자기 분대로 살 줄 알아요. 무리수를 안 둬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자기 처지가 어떻든 자기 위치가 어떻든 거기에 큰 불만 없고, ‘아, 이것이 내 인연이다.’ 좀 더 큰 삶을 살려면 거름을 좀 더 하고, 노력을 좀 더하고, 그래서 좀 더 큰 삶을 사는 길이 거기에 얼마든지 열려있으니까 그런 것이지, 자기의 현재에 있는 이 처지에서 ‘나는 왜 이런가?’ ‘내 팔자는 왜 이런가?’ 우리 불자들은 팔자타령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지요. 자기가 인연을 그렇게 지어놓고는... 인연의 이치를 알기 때문에...제가 불교공부. 선불교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은 인연이야기로 돌아가고 그러는데 쉬우니까요.
부처님 제자 중에 마승이라는 비구가 있었지요. 아주 점잖은 분입니다. 인격이 아주 고매한 분입니다. 어디서 탁발을 하고 노오란 가사를 입고 척 걸어가는데, 너무 고상하고 품위가 있어 보여요. 그래서 사리불과 목건련이라는 사람이 다른 종교를 믿다가 저기서 노란 가사를 입고 있는 사람을 봤는데, 아, 벌써 풍기는 태도가 너무 근사하거든요. ‘야~, 저 사람은 어떤 스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일까? 어떤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일까?’ 그것이 궁금하거든요. 이 사람들은 지혜가 워낙 뛰어난 사람들이니까요. 그런 사람을 보고는 그만, 넋 나간 사람처럼 멍~ 하게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옆으로 지나가기에 붙들고는, “와, 당신 같은 사람을 나는 처음 봅니다.”
나도 이 인도 사회에서 “내노라.”하는 사리불이야, 그런데 당신 같은 인격자 처음 본다 이겁니다. 당신은 도대체 어떤 가르침을 따르고, 어떤 종교를 믿고, 어떤 스승을 모시고, 무엇을 공부하고 일상생활은 어떠냐고 그냥 따발총처럼 한꺼번에 질문을 쏟아 붓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승이라는 비구가 (5비구 중의 한분이라고 그러지요?) “나는 싯달태자가 출가를 해서 깨달음을 이룬 그 분의 제자이고, 그 분에게 가르침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런 분이 있느냐?”고, “그 분은 무엇을 가르치느냐”고 “나는 초보자로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도 들은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한 마디만 일러주세요.” 사리불. 목건련이 얼마나 학구적인 사람입니까? 놓칠 사람이 아니지요. 붙들고 떼를 쓰니까, 그러면 당신이 그렇게 떼를 쓰니까 하나만 딱 일러 주겠다고, 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제법종연생 제법종연멸). 我佛大沙門 常作如是說(아불대사문 상작여시설). 모든 것은 사물이 됐든 사건이 됐든,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계절이 바뀌는 일이 됐든, 사람이 출세하고 실패하는 일이 됐든 전부가 인연으로부터 이뤄지는 것이다. 또 인연으로부터 소멸하는 것이다.
우리 부처님 대 사문께서는 항상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랬어요. 이 이치를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아주 큰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가 전부 연기의 도리이고, 인연의 도리거든요. 이 현상은 연기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전부 인연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 불자들은 큰 것을 건진 겁니다. 그러면 부를 따라서 사는 방법이 거기 나오지요. 인연 따라서 사는 방법이 거기 있지요. 무리수 두지 않는 방법이 거기 있지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사는 길이 거기에 다 있습니다. 그 인연이라는 낱말 한마디 속에 다 있는 겁니다.
선불교는 그런 차원이 아니고, 높은 차원으로 이야기하다가 괜히 다른 데로 흘렀습니다만, 어쨌든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일하는 것을 보건데 크고 작은 일에 맞게 하여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습니다. 다만 이것이 문득 도가 합치되는 곳입니다. 이 속에 이르러 세속 생각을 하지 말며 또한 불법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뭐 세속적인 일이다. 불법이다. 그것을 굳이 나눌 것이 없다 이 겁니다. 그것을 괜히 이름 붙여서 그렇지 어디 불법 따로 있고, 세속 법이 따로 있나요? 一切法이 皆是佛法 이라는데요.
불법과 세속법은 모두 바깥일입니다. 명칭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또한 바깥일이라는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다만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기를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또 행동할 때에 무슨 모양이 있으며, 하는 바를 이미 판단하고는 나의 마음과 뜻을 따라 두루 주선하지 않음이 없으며, 모자람과 남음이 없다.정히 이런 때가 되어 누구의 恩惠를 받았는가?’라고 하십시오. 이 “은혜력” 하는 것도 다른 타력 신앙 같은 것을 떠올리지 마십시오.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누구의 恩惠力을 받았는가? 내가 하는 것입니다. 전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기기묘묘한 그 존재가 나인데, 나 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웃을 줄 알고 울 줄 알고 화 낼 줄 알고, 그런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겁니다. 그 恩惠力을 받은 것이라고 하십시오. 그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공부하여 날이 가고 달이 깊어지면, 사람이 활쏘기를 배움에 저절로 적중하는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여기 이 분은 깨달음이 말하자면 999까지는 됐는데, 1이 모자라는 표현도 나오지요. 그런데 종합적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들 인생은 이대로 완성품이다.’ ‘이대로 완성품이다.’ 불교공부해서 더 완성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완성품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뿐이다.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도통해도 그 것을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아~! 내주머니에 있었던 것을 가지고...’ ←이런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대로 완성품이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것을 경전에서는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선불교에서는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래서 선불교는 불교의 완성이라고 저는 스스럼없이 씁니다.이 사실을 아는 일이 간화선입니다. 우리들 인생은 현재 이대로, 현재 이대로 아무리 탐욕이 많든 그것은 따지지 말라고요. 아무리 어리석든 그것도 따질 필요 없습니다. 현재 이대로 완성품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일. 그것을 알기 위해서 그냥 한 마디에 알면, 육조스님 같이 그냥 한 마디에 알고, 두 마디에 아는 사람도 있고, 세 마디에 아는 사람도 있고, 네 마디에 아는 사람도 있고, 그것도 모르는 사람도 있고, 30년 40년 앉아서 공부해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고요. 그런데 그것을 아는 가장 좋은 방편이 간화선이라는 것이지요. 결국은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요? 도인들제자를 제일 많이 길러낸 마조스님은 馬駒踏殺天下人(마구답살천하인)이라고 그런 표현을 쓰는데, 말 망아지가 천하 사람을 다 밟아 죽인다는 말입니다. 선불교에서 죽인다는 말은 참 아주 고급스럽고 좋은 말이거든요. 유치원생들에게 그런 말을 쓰면 안 되거든요. 선생님이 그런 말을 어린 아이들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고 되어 있지만, 선불교에서는 죽인다는 말이 아주, 殺佛殺祖. 죽여도 파리를 죽이고 모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 ←이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부처니 조사니 하는 것이 설사 내 가슴 속에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그야말로 그것은 우상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우상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부처고 조사고 그것은 죽어야 됩니다. 그것이 부정 되어야 된다고요. 철저히 부정 되었을 때 내 부처. 내 조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조스님이 그야말로 천하 사람들을 다 밟아 죽인 사람이다. ←이런 정도로 표현되는 것은 최고의 칭송입니다.
“말 망아지가 천하 사람들을 다 밟아 죽인다.” 이것은 최고의 칭송입니다. 더 이상의 칭송이 없습니다. 그런 분의 많은 제자 중에 “대주혜해 선사”라고 유명한 분이 있지요. 그 분이 처음에 마조스님이 유명하다는 소리를 듣고, 아주 먼 길을 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자네 어디서 왔는가?” “어디서 왔습니다.” 상당이 먼 데서 왔거든요. 몇 달이 걸려서 온 겁니다. 노자 돈도 많이 썼고요. “왜 여기 왔나?” “제가 먼 길을 많이 투자를 해서 이렇게 여기까지 온 것은, 스님한테 불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이러니까. “자기 보물창고는 돌아보지 아니하고, 자기 보물창고 버려버리고 여기까지 왜 왔느냐? 내가보기에 너무 안타깝다”는 겁니다. “그래요? 저에게 보물창고가 있습니까? 보물창고가 뭔데요?” 이러니까 “자네가 지금 나에게 묻고 것 있잖아? 자네가 나에게 불법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왔다는 이 말할 줄 아는 사실이 이것이 그대의 보물창고야. 이것을 일러서 부처라고 하든지 조사라고 하든지 아니면, 문수라고 하든지 보현이라고 하든지 별별 이름을 지어서 부르는 거야.” ←이 말 한 마디에 그냥 눈이 환하게 밝아져버렸잖아요.
선불교는 바로 이러한 사실. 우리들에게 완전무결한 현재 내 처지가 어떻든, 내가 탐욕이 아무리 많든, 어리석음이 아무리 많든, 화를 아무리 잘 내든, 걸핏하면 비관에 빠지든, 걸핏하면 잘 웃든 아무 상관없이 이 모습 이대로 완전한 작품입니다. 더 이상 손댈 곳도 없는 완전한 작품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선불교입니다. 그것이 얼른 가슴에 와 닿지 않으니까 “이 뭣꼬?” “이 뭣꼬?” “이 뭣꼬?”하고, 그렇게 참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옥아” “소옥아” 아무리 불러봤자 소옥이를 부르는 데는 별 볼일 없습니다. 婢奴素玉은 別無事(비노소옥별무사)라. 소옥이를 아무리 불러봐야 소옥이는 별 볼일 없다. “소옥아”라고 불렀든 뭐라고 불렀든, 그저 소리 내는 바로 그 신호. 뭐라고 불렀든, 소리 내는 그 신호가 중요한 겁니다. 소리 낼줄 아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라고요. 종을쳤든 꽹과리를 쳤든 소옥이라고 불렀든 개똥이라고 불렀든, 그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냥 소리 내는데 의미가 있어요.
서장 대 강좌 10 - 4
회향강의에 징검다리 식으로 공부를 해도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낫지요? 그렇지요? 하하하하하하 간화선 이라고 하여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입장에서 이야기가 되어야 되는 것이 이 서장내용의 거의 주된 흐름이고, 거의 7~80%가 화두를 참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회향을 하는 마당에서 앞에서 누누이 이야기했던 우리 인간이 本有한, 본래 있는 존귀함이라고 할까? 지고한 가치에 대한 눈뜬 이것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그렇게 쉽게 되지 않으니까 제가 늘 말하듯이 재수 있는 사람은 말 한 마디 듣고도 눈 뜨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수십 년을 참구해도 잘 안 되는데, 그래서 참구하는 방법이 사실은 후대에 와서 이렇게 개발이 된 것입니다.
대혜스님이 하도 답답해서 이런 방법을 만든 것입니다. 그전에는 그냥 말 몇 마디 주고받으면 그것으로 끝났고, 끝 안 나면 그뿐이고요. 그랬었습니다.그러니까 하나라도 더 건져야 되겠다. 건지려면 무슨 방법 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최선의 방법이 화두를 참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져서, 오늘 날 우리가 화두 참구하는 시간을 많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토요 참선 회 라든지, 철야정진이라든지, 시민선방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성행하게 되고, 또 우리가 여기서 “왜 지금 간화선인가?”하는 간화선 붐을 조성하게 되고, 거기에 따라서 이런 다행한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여사인 거인에게 답함. ←이 짧은 편지 하나가 서장의 전반적인 내용을 어떻게 보면, 대표적으로 들어서 소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부러 최후로 이 대목을 살펴보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 되겠다고 제가 생각을 했습니다.
p. 226. 32. 여사인 거인에게 답함. 천 가지 의심과 만 가지 의심이 다만 하나의 의심입니다. 우리 인생문제. 이 의심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인생사. 자식에 대한 문제든, 사업에 대한 문제든, 무슨 문제든 간에 어떤 문제를 막론하고,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온갖 문제들이 하나의 의심으로 귀결될 수가 있다. 그것은 화두 위에서 의심이 타파되면, 천 가지 의심과 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타파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사 개개인의 장사 안 되는 문제까지, 자식이 말 안 듣는 문제까지도, 바로 이 화두하나 깨트리면 그 문제까지도 해결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화두를 제대로 깨달아 버리면, 자식이 왜 부모 속을 썩이는가? 나라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세상은 왜 갈수록 자꾸 험해지는가? ←이런 문제까지도 이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화두를 타파하지 못하면 또 화두 위에 겨루어 나가십시오. 다른 것. 그 문제에 나아가서 거기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 이 겁니다. 이번에 저는 대운하 문제가지고, 우리 선불교의 종주 시찰인 봉암사에서까지 그 문제를 들고 일어나는 것은 참 섭섭한 일이더라고요. 시류에 왜 봉암사까지 그렇게 동조를 하고, 이러고저러고 옳다 그르다는 소리를 봉암사까지도 그런 데에 관심을 써야 하는가? 거기가 최후의 보루인데요. 최후의 보루가 그 문제에 휘말리면 어떻게 되는가? 물론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다 뜻이 있겠지요. 또 옳은 일이겠지요. 하지만 우리 선불교. 한국불교의 최후의 보루가 봉암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거기서 그런 문제를 들고 일어나는가? 그다음에 이젠 갈 곳이 없는 겁니다. 피난처가 없어요. 더 이상 피난처가 없다고요. 거기서까지 그렇게 세상일에 왈가왈부 하면 어쩌자는 말입니까?
만약 화두를 버리고 도리어 별도 문자 위에 가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경전의 가르침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고인의 공안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일상의 번뇌 가운데서 의심을 일으키면 다 이것은 삿된 마군의 무리입니다. 천 가지 문제. 만 가지 문제가 오직 이 화두 하나의 문제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간화선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간화선이라고요. 그러면 화두 하나 해결하면 대운하 문제도 그 속에 해결된다고 봐야 됩니다. 이것이 그 소리입니다. 부연 설명하면 그 얘기라고요. 자식이 말 안 듣는 문제도 이속에 다 포함되어요. 세상이 저렇게 험하고 곳곳에서 이해득실 가지고 날뛰고, 그것도 전부 이 간화선을 하는 정신으로는 그렇게 문제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그 모든 문제를 화두라고 하는 이 문제에 귀결시켜서 여기에서 답을 얻자고 해야 그것이 간화선 하는 사람이라고요. 그것이 선입니다. 선의특징은 거기에 있습니다.
첫째 화두를 드는 자리에서 알아채려고 하지 말며, 또 알음알이로 헤아리지 마십시오. 다만 유의하여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나아가서 의심하면, 마음이 갈 곳이 없는 것이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 문득 넘어지고 끊어지는 곳을 만나는 것과 같아질 것입니다. 온갖 문제. 세상문제. 무엇 때문에 무슨 자연 파괴다. 뭐다. 뭐다. 도덕성 문제. 정직성 문제. 진실성 문제등등 물론 많지요. 그렇지만, 이 선불교. 불교의 최후의 보루가 또 선불교입니다. 불교의 완성이면서 최후의 보루가 선불교입니다. 한국에서는 선불교의 최후의 보루는 봉암사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신. 간화선의 근본정신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차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 오차가 없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쥐를 잡는데 큰 물소 뿔 안에 냄새나는 좋은 먹을 것을 하나 떨어뜨려놓으면, 쥐가 냄새 맡고 거기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들어갈수록 차츰차츰 좁아지니까 들어갈 때는 쉬웠는데, 들어가서는 옴짝달싹 못하는 겁니다. 마지막 미끼는 저~안에 있고요. 머리는 아직도 끝까지 닿지 않고요. 고소한 냄새가 풍기니까 욕심은 계속 미끼에 가 있고, 들여 밀려니까 머리가 받쳐서 못 들어가지만, 들어가려고 계속 머리를 들이밀고, 들이밀고 하다가 결국은 거기서 죽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쥐 잡는 틀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생을 몰아가는 겁니다. 이것이요. 간화선법이라는 것이 인생을 몰고 가는 겁니다. 죽든지 말든지 그냥 그것입니다. 아주 냉정하게 이야기 하자면 인생을 그렇게 걸고 하는 것이 간화선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시한 아마추어들이 함부로 덤빌 일이 아니라고요. 전문적으로 하는 수좌들도 그저 시간이나 보내고, 가서 시간이나 채우고, 철 채우고, 앉았던 시간 채우고, 죽비 치면 앉고, 방선죽비 치면 일어나는 이런 허수아비 식으로 해서는 꿈에도 못봐요. 꿈에도 못보는 겁니다. 화두 하나에 올인해야 됩니다. 인생 다 걸어야 된다고요.
이보십시오. 이것이 그런 이야기 아닙니까? 천 가지 문제 만 가지 문제가 오직 화두 하나에 달려있다. 이것이 간화선의 정신입니다.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 문득 넘어지고 끊어지는 곳을 만나는 것과 같아질 것입니다.옴짝달싹 못하는 겁니다. 내 모든 인생을 거기에 다 걸고, 거기에서 해결을 보자는 것이지요. 또 마음이 만약 시끄럽거든 다만 어떤 문제로서 마음이 시끄럽던 간에, 이 간화선 하는 사람은 다만 ‘개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의심할 뿐입니다. 만약 이 無字를 꿰뚫으면, 부처님의 말씀과 조사의 말씀과 모든 노숙의 말씀과 천 가지 만 가지로 다른 것을 일시에 꿰뚫어서 남에게 묻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한결같이 남에게 묻되, 부처님의 말씀은 또 어떠하며, 조사의 말씀은 또 어떠하며, 모든 노숙의 말씀은 또 어떠한가 하면, 영원히 깨달을 때가 없을 것입니다.
정치를 어떻게 하든, 운하를 10개를 파든 100개를 파든, 자연을 훼손을 하든 만들든, 화두납자. 참선납자는 그런 데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급인생을 사는 사람이 무슨 세상사 정치 어떻게 하고, 자연 파괴 어떻게 하고, 그런 데에 관심 하는 것은 딴 사람 몫입니다. 사실은 통탄할 일입니다. 운하가 파지는 것이 통탄할 일이 아니고, 그 문제를 문제시 하는 간화선의 보루. 최후의 보루인 봉암사에서까지 그 문제를 문제시 한다는 이 사실이 제가 보기에는 통탄할 일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거기서 아니 해도 되잖아요. 그것 좀 보호됐으면 좋겠어요. 최후의 성역으로 보호됐으면 좋겠어요. 그 동안 신도들을 초파일 날 하루 외에는 받아들이지도 않는다고 그렇게 산문폐쇄 해서 수행자들끼리만 딱 산다고 그렇게까지 해놓고, 스스로 세상의 정치를 거기서 앉아서 끌어들여요? 이것은 앞뒤가 안 맞잖아요?
봉암사를 제가 어릴 때 좋아해 가지고 거기 가서 산판하고 사는 어떤 대처승들. 우리가 작당해서 쫓아내고 제2정화를 거기서 한 것이지요. 그래가지고 오는 날 선방을 만든 겁니다.그 때 우리가 정화한 스님들이 “우리가 영원히 뼈를 봉암사에 묻자.” 이렇게 결의를 했었습니다. 옛날 신라 때 구산선문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그 정신. 그래서 오늘 날, 우리 종단에서 정한 종립선언 아닙니까? 평소에 신도도 안 받고 초파일 날 하루만 개방하는 걸로 국가에서도 허락을 해주고, 종단에서도 그렇게 하고, 종단에서 상당한 지원을 하며 보호되어온 곳인데, 어떻게 돼서 거기서 정치적 바람이 들어가서 그러고 있는지 참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운하를 100개를 파도 안타까운 일이 아니고, 봉암사라고 하는, 간화선최후의 보루가 무너지고 있다는 이 사실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 서장을 보십시오. 간화선 제일지침서가 서장 아닙니까? 이렇게 해놨잖아요. 이것이 간화선을 하는 모든 정신입니다. 세상의 일체 천 가지 문제. 만 가지 문제는 오로지 화두 하나로 올인 하라 이겁니다.
오늘 서장강의 10회에 걸쳐서 회향을 하면서 쓴 소리도 좀 하고, 마음에 있는 소리도 좀 하고, ‘이것이 禪機. 선의 기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 좀 이해해 주시고 간화선의 정신은 나는 못 해도, 최소한도 간화선의 정신은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우리가 이해한다면 서장공부를 부족하지만, 부족한대로한 의미와 보람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또 그 동안 제가 서장강의를 이렇게 하노라고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의 견해이고, 서장을 대혜스님의 마음에 들게 시원스럽게 제대로 해석을 했는지 그것은 저도 상당히 의문입니다. 대혜스님이 칭찬을 하실지 꾸중을 하실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만, 어쨌든 이 좋은 가르침을 가지고 우리 불자님들과, 또 여러 스님들과 이런 좋은 시간을 10회에 걸쳐서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말세에 아주 무량대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감사합니다.
- 끝 -
무비 큰 스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1년에 걸쳐서 먼 거리를 마다하시지 않고, 여기까지 오셔서 저희에게 명품불교. 최상의 선불교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희는 선불교가 어떤 내용인가를 이때까지 의심을 가졌었습니다만, 명쾌하게 명품 선불교는 “평상심이 도이다. 우리 모두가 문수보살이고, 보현보살이고, 또한 부처이다.” 하는 시원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스님께서 저희에게 “이 시간이 기다려진다.” 여러분들 모두 스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근기를 가지고 있으셔서 여기 오시는 것이 기다려지시고, 이런 좋은 만남을 가진 것이 너무 즐거우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그 말씀은 저희를 ‘제자로서 인가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저 나름대로 해봅니다. 여러 불자님들도 아마 그런 생각을 하셨고, 또한 스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고 스님께서 저희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우시지만, 저희 제자들이 원한다면 오셔서 저희에게 또 더 좋은 가르침을 주시리라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거의 1년을 작년 6월부터 한 달에 한 번, 횟수로는 10회이지만, 우리 일상생활 24시간을 모두 이끌어 주십니다. 중국 선적지 순례를 저희들을 이끌어 주시느라고 건강이 더 안 좋아지셔서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서 곧 바로 다음 달부터 무비 큰 스님의 강좌를 또 들었으면 굉장히 좋겠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어서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진행합니다.” 이 말씀을 이 자리에서 드릴 수가 없지만, 다음 강의는 금강경으로 무비 큰 스님께서 우리들을 가르쳐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제 예상으로는 두 달 정도는 쉬셔야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약속받는 의미에서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큰 스님께 삼배 올립시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_()_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_()_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_()_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_()_
성불 합시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