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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코 평화의 날
차코 평화의 날(Paz de chaco)은 원래 6월 12일(목) 이였으나 6월
16일(월) 옮겨 연휴를 만들었다. 12일을 공휴일로 할 것으로 보고
11일(목)저녁에 밤차로 차코에 가서 차코 평화의 날 행사모습을 구경
하고 토요일에 내려와서 주말을 비야리까에서 보내려고 했으나 공휴
일이 변경되는 바람에 행사는 보지 못하게 되었다.
Chaco라는 말은 원래 옛날 남아메리카의 인디오들이 원을 만들어
좁혀 가면서 했던 몰이 사냥을 일컫는 말인데 파라과이의 북쪽에
있는 보케론(Boqueron)주와 아제스(Presidente Hayes)주를 부르는
말로 통한다. 파라과이 남쪽은 기온이 높고 비가 많이 오는 아열대성
기후이지만 차코지방은 비가 적게 오고 기온이 높아 땅이 매마르고
수목이 적어 농사는 어렵고 목축을 주로 생업으로 하는 이 땅의 원
래 주인인 인디오들이 사는 곳이다. 이 두 개 주의 넓이가 우리 남한
의 면적만큼 되고 인구는 파라과이 650만명의 5%정도인 30만명밖
에 안되니 인구밀도가 굉장히 낮다고 할 것이다.
근무지 이탈 신청을 하고 12일 오후 5시에 아순시온 가는 버스를
김숙선생과 같이 가기로 했다. 그런데 아순시온에 사는 동료단원에게
만약을 대비해서 이날 밤 10시 버스표를 예매하려고 하니 여권번호
등을 알려 달라고 한다. 다른 사람은 다 미리 전화해서 순조롭게
여권번호를 일러 주었는데 유독 나만 체육관에 있어 전화가 안되니
김승현단원이 체육관까지 오는 헤프닝도 있었다. 같은 통치권이 미치
는 나라안에 가는데 주민등록증 같은 것이 필요하다니 잘 이해가
안 된다. 저녁을 아주 일찌감치 먹고 비야리까에서 오후 5시 버스를
타고 아순시온에 도착하니 9시가 조금 지났다. 배로라선생 등과 10
시 정각에 차코행버스를 타고 머나 먼 차코를 향하여 밤새 달려서
내일 아침8시 경에 차코에 도착할 예정이란다. 물론 중간 어디쯤에
휴게소 같은 곳에 멈추어 화장실에 가고 배고픈 사람들은 요기를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멀기는 먼 모양입니다. 차장
이나 운전수의 안내 이야기도 한마디 없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달리면서 군데군데 차코가는 사람을 태워 어느덧 차는 차코 손님으
로 가득 찼다. 차를 탄 손님은 추워서 담요를 덮고 잠을 청하는 사람
이 많은데 차장이나 운전수는 여름으로 잘못 알고 있는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차 안은 춥기까지 하였다. 춥기도 하거니와 피로하여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자고 눈을 떠보니 차는 쉼 없이
달리고 있었다. 모두 다 담요를 덮고 잠을 자는 모양이다. 새벽 3시
쯤에 버스는 헐떡거리던 숨을 멈추고 어떤 휴게소 같은 곳에 정차하
였다. 차장의 안내가 없어도 현지인들은 몇 분을 쉬는 지 알기라도
하는듯 화장실 갈 사람은 가고 야식을 먹을 사람은 먹는 모양이다.
30여분을 쉬더니 차장이 차를 운전하고 운전수는 내가 탄 앞자리에
와서 의자를 뒤로 젖히더니 코를 골며 자기 시작합니다.
나도 의자를 뒤로 젖혀 잠을 청하였으나 잠이 잘 오지 않아 창밖을
보니 어둡기는 하지만 길에는 간혹 불빛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인가
가 있는 모양이다. 북쪽으로 북쪽으로 달려 새벽 6시경에 필라델피아
에 도착하였다. 밤새 화장실 한번 안가고 있었더니 내려서 화장실을
가니 이 추운 날씨에 신발도 없이 아스팔트를 걷는 모습이 보였다.
대합실은 매우 작아 새벽 차를 타기 위하여 기다리는 사람들이 흙바
닥에 배낭을 베개삼아 베고 누워 있다. 동료 단원에게 물어보니 앞으로도 두어 시간 더 가야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한다. 날이 밝아 창 밖을 보니 끝없는 평원에 키가 작은 나무가 군데군데 서 있고 목초지에서 아침 일찍부터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은 늦가을 우기라서 그런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풍요로워 보였다. 들판은 온통 풀과 나무로 덥혀 있어 차코는 매마르고 척박한 사막 같은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8시 20분경에 버스는 조그만한 도시에 들어 갔다. 여기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마리스깔(Mariscal)이란다. 터미날에 내려 이곳 마리스깔에 근무하는 강창훈단원(협력)에게 전화하니 자기가 터미날 쪽으로 가고 있으니 우리 보고 어느 쪽으로 오라고 말한다. 간선도로는 벗어나자 온통 흙 길이며 모래가 풀풀 날린다. 옆으로 차가 지나 가면 모래바람이 일어 손으로 입을 가려야 할 정도이다. 사막에서나 볼 수 있는 모래 바람이 일어 그런지 파라과이 같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파라과이 같지 않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한참을 가니 저 멀리서 손 흔드는 사람이 있다. 강창훈단원 이다. 오다 말고 까미오네타(짐을 실을 수 있는 무소 밴 같은 차)를 잡고 한 참을 이야기 한다. 강단원 말이 운전수를 아는데 우리를 편하고 빠르게 모실려고 짐칸에 태워 달라고 섭외를 하고 있었단다. 호의는 고맙지만 차코 분위기도 느낄 겸 걸어서 가겠다고 고집하여 서로 이야기
나누면서 한참을 걸어서 가니 저기가 내가 사는 집이라고 소개한다.
집이라고 하는데 보니 대문도 없다. 가까이 가서 보니 철조망이 덤성
덤성하게 쳐져 있고 현관문도 없이 문을 여니 바로 거실 겸 주방이
다. 화장실과 안방을 둘러보니 곳곳에 모래가 날아 들어 자욱하여
몇 년을 청소라고는 안 한 것처럼 보인다. 강선생 말로는 요즘은 우
기라서 모래바람이 안 불어 좀 살 것 같다고 한다. 창문이라고 있는
데 파라과이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로 문틈이 5cm정도 되어 그 사이
로 모래가 날아 들어 며칠만 지나도 이렇게 된단다. 5명이 잠깐 솔선
하여 탁자랑 식기 등을 닦고 가지고 온 반찬들을 내려 놓고 각자
한 두가지씩 스스로 일을 맡아 밥을 준비한다. 강선생말로는 불과 몇
십m 옆에 나와 같은 86기 동기인 성정은기장선생(대구, 컴퓨터교육,
2014년 3월 허리가 아파 중도 귀국)이 살았단다. 이렇게 멀고 환경이
열악한 곳이라 것도 모르고 내 앞 가리기에 급급하여 아파서 고생하
는 동기를 면회 한번 못하고 중도에 귀국하게 되었으니 동기를 얼마
나 원망했을까? 성선생은 우리 86기중 파라과이로 온 7명의 국장(기
장)이며 개인적으로는 나의 마니또(비밀 친구라는 이탈리아 말)가 되
는 선생이었다. 부디 고국에서 허리 아픈 것을 고쳐서 좋은 일 많이
하고 앞으로 더 큰 영광있으시고 동기인 우리가 소흘한 점이 있더라
도 다 잊고 좋은 추억만 간직하길 바란다.
밥을 해놓고 번갈아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가지고 온 반찬을
식탁에 놓고 먹으니 차코에서 이런 좋은 반찬에 밥먹기가 처음이라
고 강선생이 말한다. 나는 어제 오후 4시 이후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
여 더욱 밥이 맛있게 느껴졌다. 작은 밥솥에 옹골차게 많이도 해서
5명이 식사를 다하고 강선생의 안내로 인디오 학교와 인디오마을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참고로 내가 학교에서 인디오 마을과 인디오
학교에 간다고 하니 교장과 부교장이 차코에 가서는 인디오라는 말
을 사용하면 활로 사람을 쏘는 시늉을 하고 손바닥으로 목을 자르는
흉내를 내 보였다. 흑인을 보고 네그로(검둥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이치인 모양이다. 뭐라고 부르느냐고 하니 친절하게 써
주었다. 인디헤나(Indigena)라고 부르란다. 그들이 이 땅의 주인이니
주인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강선생 집에서 강선생이 근무하는 인디헤나 학교까지는 걸어서
1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시내버스도 없고 승용차도 없이 그 먼 길을
어찌 다녔느냐고 하니 처음에 도저히 걸어 다닐 수가 없어 500달러
를 주고 말을 한 마리 샀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도 문제가 있다고
하데요. 말이라는 게 살아 있는 짐승이라 아침 저녁으로 풀 먹여야지
요, 물 주어야지요, 털 다듬어 주어 야지요, 운동 시켜야지요, 친구 집
에도 못 갔답니다. 말 돌보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매일 타지도 못하
고 학교에 끌고 가서 학교 뒤뜰에 매어 놓고 오후에 집에 올 때 또 모시고(¿) 와야 하니 상전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다른데 있다고 하데요. 말이 자연 상태에서는 사람을 싫어하고 자기들끼리 떼지어 생활하기를 좋아하여 몇 번을 가출(도망)을 했더랍니다. 무작정 찾으러 해도 찾을 수 없어 이웃 주민들에게 물어 보니 인근 기마부대에
말이 많이 있으니 한번 가 보라고 하더래요. 기마부대 정문 초소에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말들이 있는 곳을 가니 말들이 자기가 보기에는 똑 같이 생겨 찾을 수가 없더랍니다. 우리가 보면 외국인은 모두 닮은 것처럼 보이듯이, 이 말이 내 말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저 말이 내
것 같기도 하여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더랍니다. 그런데 현지 군인은 정확히 저 말이라고 하면서 데리고 가라고 하더래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말을 잡으려고 하니 잡을 수 없어 고생하는 것을 본 현지군인이 말을 타고 들어와서 말을 잡아 주더래요.
말은 달리는데 사람의 걸음으로 따라 갈 수가 있나요? 자기 친구가 모여 사는 곳이 좋은데 사람에게 얽매여 살고 싶은 말이 있겠습니까? 말도 찾았고 군인이 고맙기도 하여 먹는 것을 많이 사 주고 말을 모시고 왔답니다. 그 뒤로도 애마가 몇 번 가출하여 찾아보면 어김없이 기마부대 말들과 같이 있더랍니다. 없는 돈에 (일반 단원은 월 생활비가 시니어의 절반)말 구입 했지요, 자기는 먹고 싶은 것 못 먹어 가면서 말에게 사료 사서 먹여야지요. 말은 타보지도 못하고 이래 저래 돈만 엄청 들어가서 5개월 정도 키우다가 본전을 손해보고 팔고 말았다고 합니다. 저 처음에 말을 한 마리 사서 키우고 타고 할까 생각했지만 필요하면 돈을 주고 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하면서 흙길을 걸어가니 길 좌우로 가난에 찌든 것 같은 인디헤나의 집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디헤나의 마을은 학교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기로 하고 부지런히 걸어서 학교에 도착하니 1시간이 넘게 걸어서 왔다. 저기가 학교라고 가르쳐 준 곳을 보니 학교건물은 보이지 않고 웬 성당만 커다랗게 서 있는 것 같네요. 교문에 학교이름도 따로 없고 교문을 통나무 몇 개와 철조망으로 허술하게 만들어 썰렁합니다. 교문을 들어서니 학교 안에 커다란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을 지나 가니 학교건물이 직사각형으로 배치 되어 있고 중앙은 운동장입니다. 축구경기장 규모의 운동장이니 학교는 평지에 잘 짓고 배치도 아주 좋습니다. 교장실에 가서 강선생의 친구라고 하니 매우 반가워한다. 강선생이 평소에 얼마나 잘 하고 있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강선생은 도서관 현장사업을 잘하고 관리를 잘해서 한눈에 보아도
장서 관리가 잘 되고 있음을 알 정도이다. 특히 한 것은 이 학교가
인디헤나(토착인이라는 뜻)를 위한 학교이다 보니 중앙정부나 외국에
서도 형식적이긴 해도 많은 지원을 하는 것 같고 장학관을 파견하여
상주하며 감독하고 있다고 한다. 학교 안에 있는 성당의 신부님이란
다. 초등, 중등을 둘러 보아도 우리네 동양인과 너무나 닮은 인디헤
나들이 살기 좋은 땅은 외국인에게 전부 빼앗기고 이 척박하고 매마
른 땅으로 이런 저런 이유로 쫓겨와서 이제는 그들이 먹다 던져 주
는 것에 의존하여 살아 가는 모습을 보니 측은하기가 그지 없다.
그래도 학교에 오는 인디헤나들은 행복하고 복 받은 것이란다. 많은
인디헤나 어린이들이 기초적인 문자해독과 계산능력도 없이 살고 있
다고 한다.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잘 못되어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내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알고 있는 것은 1492년 10월에 콜롬
부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였다고 배우고 시험에도 이 문제
가 많이 나왔다. 이것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왜냐구요?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가기 전에 벌써 인디헤나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가서 살고 있었던 것인데 콜롬부스가 발견하였다고 가르치고 배웠으
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가?
바르게 말하면 1492년 10월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침입하였다
가 옳은 말이다. 남의 나라를 무단으로 침입한 날짜와 사람의 이름을
외우고 이를 지식인양 떠벌리고 다녔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럴진대
대도 조세형이가 남의 집에 들어가 물방울 다이어를 훔친 날짜와 그
것을 도둑 맞은 사람도 외워야 옳지 않은가!
각설하고 수업하고 있는 학교 교실을 모두 둘러 보고 인디헤나들이
살고 있는 마을 둘러 볼 차례다. 가는 길가에 공동묘지가 있어 들어
가 보았다. 파라과이에서는 공동묘지를 세멘따리오(Cementario)하는
데 내가 사는 비야리까는 공동묘지인 세멘따리오가 도시의 중앙에
있고 새로 생기는 세멘따리오는 동네에서 좀 떨어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만들고 보통의 경우 세멘트로 조그마하게 무덤을 만들어
앞에 꽃도 놓고 죽은 사람의 넋을 기리고 한다.
파라과이는 날씨가 더워서 시신의 부패가 빨라 그런지 죽은 익일에
매장하고 일가 친지들이 문상하는데 일체 부조는 받지 않고 묘지에
매장하러 가기 직전까지 시신을 입관만 하고 뚜껑을 덮지 않고 친지
들이 문상 오면 고인을 보기 쉽게 허리 높이의 평상에 관을 열어
두어 문상 온 사람이면 누구나 볼 수 있게 하고 어떤 사람은 고인
의 시신을 얼굴이며 손 등을 만지면서 고인과의 영원한 이별을 슬퍼
한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세멘따리오(장지)까지 따라 가서 죽은
사람과의 마지막 이별을 한다. 죽은 날부터 시작하여 매일 4시경에
9일 동안 기도를 하는데 이때 망자가 살아 있을 때 덕을 쌓은
경우에는 많은 사람이 같이 기도하고 같이 애도한다고 한다.(이를
Rezo, 또는 Rezado라고 함) 매번 기도할 때마다 상주가 간단한
음료와 다과를 대접하는데 마지막 9일째는 기도가 끝나고 나면
우리 나라의 49제 회향일과 같이 상주가 음식을 크게 내어
(파라과죠는 점심을 가장 그럴듯하게 잘 먹으니 보통은 점심, 즉
알무르소를 대접함) 문상오신 것에 대한 답례를 한다.
한참을 걸어 인디헤나 마을에 들어가니 양철판에 페인트로 인디헤나
마을임을 알리는 간판이 서 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우리의 공회
당이나 마을회관인양 같은 곳에 동네사람이 모여 있는데 주로 여자
와 어린이뿐이고 남자어른은 보이지 않는다. 추운 겨울(6월 15일경)
인데도 불구하고 양말을 신고 있는 사람은 아예 없고 발가락 사이에
끼워 신는 슬리퍼를 신고 때에 찌던 여름옷을 입고 바람을 조금
막아 주는 울타리 아래에 옹기 종기 모여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마을회관 역할은 하지만 건물이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사진을 좀 찍고 마을을 둘러 보고 싶다고
말하자 좋다고 하였다. 아주머니 중에서 강선생을 아는 분이 있어
사진도 같이 찍고 마을 둘러 보는데 그 곳에서 놀던 어린애들이
전부 우리를 따라 나서는 바람에 그들에게는 우리가 큰 구경거리가
되어 버렸다. 내가 어렸을 때 미국인 평화봉사단이 우리 마을에 왔을
때 졸졸 따라 다니던 생각이 났다.
국도(파라과이에서 볼리비아로 넘어 가는 국도)변의 집은 정부에서
지어 주었는지 똑 같은 크기에 구조도 똑 같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집들은 더욱 볼품이 없고 사람의 생활 수준도 형편이
없는 것 같다. 조금만 더 들어 가면 지금도 사냥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말 그대로 수렵으로 생활하는 주민을 만날 수 있으나
안전을 고려하여 돌아 가자고 하였다. 나오는 길에 마을 회관 광장에
서 마을 사람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마을 구경 잘 했다고 정중히
인사하였다. 좀 늦게 점심을 먹고 다음 목적지인 필라델피아로 가기
위하여 배낭을 정리하고 쉬기로 하였다.
그런데 강선생은 7월 중순경에 귀국하는데 물건을 다 어떻게 하느냐
고 묻자 대부분 다 팔았다고 한다. 코이카에서 내 준 잠바는 소매가
못에 걸려 찢어졌는데도 4만과라니에, 심지어 프라스틱 세수대야도
5천과라니에 팔았다 하여 내가 유대인과 중국의 비단장수 왕서방도
강선생한테 와서 좀 배워야 할 것 같다고 하자 모두 웃었다.
대부분 다 현지인에게 팔아서 짐 쌀게 별로 없다고 하니 참 부럽기
까지 하다. 저녁까지 배부르게 잘 대접받고 8시에 필라델피아로 가는
버스를 타고 2시간이 걸려서 필라델피아에 도착하니 박종환 선생이
나와 있다.
박종환선생은 일부러 터미날까지 나와 영접하고 미리 예약한 호텔
로 나와 안내를 자청하였다. 걸어서 호텔로 가니 차코에서 제일
좋은 호텔이란다. 규모도 크려니와 청소 등 제반 시설이 아순시온에
있는 특급호텔에 손색이 없다. 차코는 비가 적게 와서 사막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왔으나 우기라서 그런지 호텔에 찬물, 더운 물도 잘
나오고 침구도 깨끗하였다. 박선생께 거듭 고맙다고 하고 술 한잔씩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약속시간에 프론터에 가니 박선생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외곽에 위치한 근무학교부터 먼저 구경하고 시내 관광을 하기로
하였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아스팔트는 고사하고 돌도 깔지 않은
흙 길을 걸어서 30여분 거리라서 차코에 근무하는 우리 단원들의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학교는 평지에 지었으나 좀 설렁한 기분이 들었고 학교건물 지붕에
홈통을 설치하여 운동장 한쪽에 위치한 우물 같은 곳에 까지 연결
되어 있다. 무엇이냐고 물어 보니 물이 귀하기 때문에 빗물을 받아
운동장 한 쪽의 우물 같은 곳에 모아 두었다가 세수도 하고 생활
용수로 쓴다고 한다. 박선생은 도서관을 잘 꾸미고 관리도 잘 해
두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운동장 가에 세워진 화장실인데 완전
풍덩식인데 목조로 되어 있고 물이 귀하기 때문에 땅바닥에 인분이
흩어져 있다.
학교 구경을 잘 하고 나니 박선생이 점심은 자기 집에서 대접하겠다
고 한다. 홈스테이하기 때문에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
가는 길은 독일인 마을을 가로 질러 가는데 몇 천평 대지에 한 집씩
지어 일반인들과는 대조적 이였다. 차코가 아직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로 있을 때 (엄격히 말하면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나치독일
을 피하여, 또는 2차대전을 피하여 이곳에 온 독일인들이 파라과이
정부에 이 황무지를 자기들에게 주면 개발하여 살겠다고 하자 인구
가 적어 이민을 적극 추진하던 정부에서는 이를 허가하자 독일인들
은 조합을 만들어 계획적으로 도시를 개발하였다고 한다. 조합원들의
자치규범이 따로 있어 차코를 방문하는 방문객은 법령뿐만 아니라
이 자치규범도 준수해야 한다. 파라과이 법령에는 규제가 없는데
조합규범에는 남자가 반바지를 입으면 벌금 5만원, 길거리를
다니면서 노래를 부르면 1인당 3만원 벌금 등이 있다고 한다.
이들 독일인들은 일정하게 집터를 몇 천평씩으로 하고 왕복 4차선
도로를 만들고 지금도 부모 양쪽이 독일인이 아니면 자기들의 거주
지역 안으로 이주하는 것을 제한하고 자기들끼리만 결혼하고 무덤도
따로 만들어 파라과이의 양반처럼 살고 있었다.
박선생집은 독일인 마을 옆에 있었는데 나이든 아주머니와 딸이
같이 산다고 한다. 박선생이 처음 홈 스테이 할 때는 주인 아주머니
와 사이에 무제가 많았다고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화장실인데
주인은 물이 귀하니 소변이든 대변이든 몇 번을 모아서 물을 한번씩
내리는데 박선생은 한국에서의 버릇대로 소변이든 대변이든 일만
보고 나면 냄새 난다고 물을 내리니 자연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몇 개월을 지나고 나서 주인과 타협하기를 소변만 볼 때는 물을
내리지 않고 대변을 보면 물을 내리기로 하였으니 우리 보고도 그렇
게 좀 해달란다.
점심을 든든히 먹고 시내 관광을 가기로 하였다. 가는 길가에 호화로
운 공동묘지 무덤이 있어 물어보니 독일인 무덤이란다. 어제 차코의
원주민 공동묘지와 비교하니 하들과 땅이다. 죽어서도 돈이 있어야
사람구실을 하는 모양이다.
시내 곳곳의 관광할 만한 곳은 전부 독일인들의 개척의 역사이다.
성문법의 전형이 독일인데 그 국민성이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기록을 남기고 후손에게 알리기 위해서 하찮은 나무 젓가락
하나도 버리지 않고 박물관에 전시 해 놓았다. 박물관 관리도 잘되어
있고 나이든 어른이 일일이 우리에게 설명도 해 주고 있었다.
독일인 차코 박물관 Parque de Memoria 정원에는 중간이 볼록한
배불뚝이나무가 많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배흘림기둥과 비슷한데
이 나무를 유럽에서는 술주정뱅이 나무, 현지인들은 사무우나무라고
한다. 독일인 전용 교회에 가니 내일(일)이 마침 추수감사절 행사를
한다고 하며 자기 집에서 가장 좋은 수확물을 교회 성전에 진열하여
하나님께 먼저 보이고 일반인에게 판매하여 이웃 돕기를 한단다.
시내구경을 열심히 하고 어두워진 거리를 걸어 차코의 유명한
로미또를 먹으려 간단다. 저녁 먹으면서 맥주 한잔씩 하고 아순시온
가는 버스를 타니 차비 계산이 참 묘하다. 어제 저녁 칼 마리스에서
2만원을 주고 필라델피아까지 왔는데 차비는 한 푼도 줄어들지 않고
아순까지 10만원이란다. 밤새 달려 아침 7시경에 아순시온 터미날에
도착하여 비야리까에 도착하니 14시가 다 되었다.
이번 차코여행에 안내를 해준 강선생, 박선생께 이 자리를 빌어 고마
움을 전하고 7월에 귀국하여 한국에서 더 큰 성과 있기를 기원한다.
원주민 인디헤나의 무덤들 ,벽돌로 표시만 되어 있고 아무 장식이 없어 무덤이 아닌
것 처럼 보인다.
독일인의 무덤, 공동묘지 인데 겨울인 6월임에도 온갖 꽃들이 피어 있고 잘 정비되어 있어 죽어서도 빈부가 느껴진다.
차코의 황량한 거리 모습 , 바람이 불면 이 길바닥 같은 모래 바람이 앞을 가린다.
어느 독일인 가정집의 모습, 엄청나게 넓은 땅에 큼직하게 집을 짓고 양반부자 처럼 살고 있다. 집안 청소부터 온갖일은 인근에 사는 인디헤나들이 한다.
학교 운동장 가에 세워진 화장실 모습 , 밑에는 대변을 모으지 않고 땅바닥에 그대로 두어 방목하는 돼지가 먹기도 하고 워낙 건조해서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고 한다.
학교지붕에 떨어지는 빗물을 모으기 위해 홈통을 연결하여 건물옆에 우물처럼 파고 그기에 빗물을 저장하여 건기에 생활 용수로 쓴다.
인디헤나 마을의 한 아가씨, 겨울인데도 양말도 없고 입고 있는 옷도 여름옷 그대로 이다.
우리나라 중학교 과정의 학생이다. 책상은 코이카에서 현장사업으로 마련하였고 교실에 있는 여학생의 표정이 밝다.학교에 오는 인디헤나는 행복한 사람들이란다.
독일인 박물관 정원에 있는 배불뚝이 나무,현지인은 사무우나무라고 하고 유럽인은 술 주정뱅이 나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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