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출처: ☆아름다운시와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태양빛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전2권 중 제1권 지은이: 정호승 (저자 약력) * 정호승 1950 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대구 계성중, 대륜 고등학교와 경희대 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3 년 대한 일보 신춘 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 년 조선 일보 신춘 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1989 년 제3 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 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전3권) 등이 있다. (책머리에) 사람은 사랑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게도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사랑이 없으면 결코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정작 사랑의 본질과 실체에 대한 깨달음은 부족하다. 이 책은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사는 사랑의 참모습이 무엇인가를 함께 찾아보고 깨닫기 위하여 씌어진 책이다. 천천히 길을 걷다가 잠깐 커피 전문점에라도 들러 차 한잔을 드는 마음으로,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보다 더 깊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밤은 누군가가 잠들지 않고 깨어 있기 때문에 밤이다. 사랑도 그렇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 한 가지 독자들께 양해를 구한다. 당초 이 책은 '차 한잔의 사색 1'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4.6 판 양장본으로 발행했던 것인데, 출판사 측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 13 편을 추가 집필, 보완하여 새 판형의 신간으로 발간하게 되었음을 밝혀 둔다. (1) 문어의 사랑 깊은 바다 속 바위에 붙어 참문어와 풀문어가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어부가 자기들을 잡아 올리는 줄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엉킨 다리를 풀고 서로 몸을 떼었을 때에는 햇살이 눈부신 부둣가였다. "여기가 어디지?" "육지야." "왜 우리가 육지로 나오게 되었지?" "어부한테 잡힌 거야." "어머! 어떻하지?" "걱정하지마. 무슨 좋은 방법이 있을 거야." 참문어가 풀문어를 위로해 주었다. 어부는 곧 그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 커다란 항아리 속에 집어넣었다. 우선 그들이 죽기를 기다렸다가 바람 잘 불고 햇볕 잘 드는 곳에서 말린 뒤, 겨울밤 술안주로 삼거나 제삿날 제상 위에 올려놓을 작정이었다. 항아리 속에 갇힌 참문어와 풀문어는 무서웠다. 순간 순간 몰려오는 죽음의 공포에 서로의 몸을 껴안고 떨었다. "졸지마, 졸면 죽어!" 그들은 기진하여 쓰러지지 않도록 서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려고 애를 썼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몇 날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이거 먹어. 먹고 기운 차려. 죽으면 안돼." 참문어는 풀문어에게 자기의 다리 하나를 잘라 주었다. 풀문어는 배가 고팠지만 차마 참문어의 다리를 먹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먹어. 난 무엇이든지 줄 수가 있어." 참문어는 풀문어에게 자꾸 자기의 다리를 먹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풀문어는 먹지 않았다. 그 대신 자기의 다리를 잘라 참문어에게 주었다. "이거 먹어. 너도 배고프잖아?" 참문어도 풀문어의 다리를 먹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다리를 먹이려고 둘 다 여덟 개나 되는 다리를 모두 잘랐다. 며칠 뒤, 어부가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보았을 때 그들은 둘 다 죽어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문어들은 단지 속에 갇히면 제가 제 다리를 뜯어먹으며 연명하다가 서서히 죽어 가는데, 그들은 다리를 잘랐으면서도 먹지 않고 그대로 굶어 죽어 있었다. 그들이 서로 사랑한 나머지, 서로 상대방에게 제 살을 먹이려고만 하다가 그만 그대로 굶어 죽은 줄을 어부는 알지 못했다. 우물 밖의 세상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우물 안에 늘 우물 밖의 세상을 그리워하는 한 젊은 개구리가 있었다. 낮이면 구름이, 밤이면 별들이 우물에 비치는 것을 보고 그는 늘 어떻게 하면 우물 밖의 세상에 나가 살 수 있을까 하는 꿈을 꾸었다. 그는 날마다 우물에 비치는 구름과 별들을 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친구들이 거울처럼 잔잔한 물결을 흩뜨려 놓으면 다시 물결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물에 비치는 하늘을 들여다보았다. 하루는 우물 안으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바람에게 물었다. "바람아, 우물 밖의 세상은 어떤 세상이니?" "햇살이 눈부신 넓은 세상이야. 여기처럼 이렇게 어둡고 좁은 곳이 아니야. 바다도 있어." "바다? 도대체 바다가 뭐니?" "이 우물보다 수천 배, 수만 배 넓은 곳이야. 멀리 수평선이 있고, 커다란 고래도 살아." 그는 바람의 말에 바다가 보고 싶어 가슴이 뛰었다. "바람아, 날 바다에 데려다 줄 수 없겠니? 난 이 우물 안이 너무 춥고 답답해." "글쎄, 난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아무런 방법이 없어. 그건 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야." 바람은 그 길로 황급히 우물을 빠져나갔다. 우물 밖에 바다가 있고, 바다에 고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더욱더 우물 밖의 세상이 그리웠다. 그는 허구 한날 어떻게 하면 우물 밖으로 나가 보다 넓은 세상에서 살아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을 거듭했다. 그러나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이웃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몇 번이나 우물 한 귀퉁이를 기어올라가 보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어느 날 그는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엄마, 전 우물 밖의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여길 빠져나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좀 가르쳐 주세요."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라. 우물밖엔 나쁜 놈들이 많아. 특히 뱀이란 놈은 우리 개구리들을 한입에 잡아먹는단다." "엄마, 뱀이 무서워서 한평생을 여기에서 살수는 없어요." "아니냐, 우리가 살 곳은 여기야. 여기가 제일 안전한 곳이야." 어머니는 우물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는 우물 밖에 나가 살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 어느 해, 가뭄이 극심한 여름날, 사람들이 하나둘 우물을 찾기 시작했다. "다른 우물은 다 말라 버렸는데, 이 우물만은 마르지 않았어. 이건 정말 고마운 일이야." 우물엔 하루종일 물을 길으로 온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은 우물 안으로 계속 두레박을 드리웠다. 그것은 그가 우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어머니와 헤어질 것을 생각하자 눈물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작별 인사를 고했다. "엄마, 결코 엄마 곁을 떠나고 싶진 않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아요. "그래 알았다. 난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섭섭하구나. 그렇지만 난 내 아들을 언제까지나 이렇게 좁은 곳에서 살게 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들이 우리 우물을 늘 찾아왔을 땐 두레박을 타고 많이들 밖으로 나갔다. 이거 한 가지만 명심해라. 나가면 두번 다시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마라. 우리 나라엔 우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법으로 정해 놓고 있다. 돌아오는 날이면 사형을 받게 돼. 알겠지?" "네 엄마." 그는 새벽이 오기를 기다려 물을 길으러 온 어느 여인의 두레박을 타고 우물 밖으로 나왔다. 우물 밖의 세상은 바람이 말한 그대로였다. 눈부신 햇살 아래 끝없이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그 들판 끝에 푸른 바다가 있었다. 그는 바닷가 가까운 강기슭에서 매일 바다를 바라보며 살았다. 멀리 수평선 아래로 고래가 물을 뿜는 모습을 볼 때마다 더 없이 행복했다. 우물 밖에 사는 개구리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들도 낳아 더 이상 부족함이 없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몇 년이 지나갔다. 그는 문득 우물 속에 사는 어머니가 그리웠다.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좁은 우물 속에 갇혀 사는 형제들이 불쌍했다. 그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위해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우물 속으로 돌아가 세상에는 우물 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른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 행복하게 사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결코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잊고 다시 우물 안으로 들어갔다. "돌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네가 돌아오다니! 이 일을 어찌 하면 좋을꼬!" 어머니는 그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우물 밖으로 나가 살자고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설득했다. "너는 국법을 어긴 죄가 크다. 우물 밖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국법을 어긴 너를 용서할 수가 없다!" 그는 곧 체포되어 많은 형제들이 보는 가운데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더구나 평화롭게 잘 사는 형제들에게 유언비어를 퍼뜨린 죄, 우물 밖으로 나가 살자고 감언이설로 유혹한 죄는 죽어 마땅하다!" 재판장의 목소리는 서릿발같았다. "재판장님! 우물 밖에는 여기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습니다." "그런 세상은 없다." "저는 우리 형제들에게 우물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넌 도대체 어떤 세상을 보고 와서 그따위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느냐?" "바다가 있는 세상입니다." "이놈아, 바다라니? 그런 세상은 없다. 여기보다 더 좋은 세상은 없다." "재판장님! 우물 밖에는 분명 바다가 있습니다. 우물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습니다. 이제 우린 우물에 갇혀 살 것이 아니라 망망대해가 있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모두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맙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재판장은 그에게 사형을 명했다. "너는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아직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단 한번의 기회를 주겠다. 지금이라도 우물 밖에 바다가 없다고 말하라. 네가 살아본 바깥 세상보다 여기가 더 좋은 세상이라고 말하라. 그러면 너를 용서해 주겠다." 사형대 위에 선 그는 잠시 망설였다. 울음을 삼키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아직도 우물 밖에 바다가 있느냐?" 서릿발같은 재판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는 말했다. 또박또박 힘있는 목소리로. "네, 우물 밖에는 바다가 있습니다." 생화와 조화 백화점 특별 선물 조화 코너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미꽃이 있었다. 그는 너무나 아름다워 백화점을 들락거리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늘 경탄의 대상이 되었다. "어머! 이쁘다. 정말 장미꽃 같다!" "어쩜 이렇게 잘 만들었을까? 정말 생화하고 구별할 수가 없네." 보는 사람들마다 놀라움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이 없을 만큼 그는 생화와 똑같았다. 아니, 생화보다 더 아름다웠다. '조화 코너'라는 안내판만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모두 그를 생화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는 백화점 진열대에 처음 나왔을 때에는 사람들의 그런 찬탄이 내심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의 그런 찬탄쯤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오히려 그냥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생화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조금도 못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생화나 조화나 출생 과정이 다를 뿐 똑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꽃의 궁극적 가치가 아름다움의 창조에 있다면 생화나 조화나 그 아름다움의 창조적 차원은 똑같다고 생각했다. 다른 조화들은 조화로 태어나 자신을 원망하고 부끄러워했으나 유독 그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다른 조화들을 심히 나무랐다. 한 송이 꽃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고 무가치하게 생각하는 조화야말로 세상을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힐난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꽃이면 되는 거야. 왜 자꾸 생화하고 비교하는 삶을 살려고 그러는 거야? 생화나 조화의 구별이야말로 참으로 무의미한 거야. 지금까지 나는 나 자신을 조화라고 해서 부끄러워해 본 적은 없어.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는 거야. 우리 스스로 우리의 가치를 부정하면 우리 앞엔 고통과 죽음 뿐이야. 우리 자신이 먼저 우리를 인정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해야만 다른 꽃들도 우리를 아름답게 생각하는 거야. 우리의 아름다움은 우리 스스로 깨달아야 돼. 누가 깨닫게 해주는 것이 아니야." 그는 다른 조화들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의 가치를 깨달을 줄 아는 꽃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뒤 그가 백화정을 떠나 혜미 아빠라고 불리는 한 남자의 집에 가서 살게 된 것은 백화점에 진열된 지 약 한 달 뒤였다. 어느 날 혜미 아빠가 백화점에 들러 "결혼 기념 선물로는 이게 제일 좋겠군." 하고 번쩍 그를 안아 들었다. "여보 고마워요." 혜미 엄마는 그를 껴안은 채 혜미 아빠에게 키스를 퍼부어 대었다. "여보 너무 이뻐요. 이렇게 이쁜 장미는 처음 봤어요." 혜미 엄마는 마치 그를 생화처럼 대했다. 아침마다 분무기로 물을 뿌려 주는가 하면, 혹시 먼지라도 묻을까 봐 호호 입김으로 불어 주기까지 했다. 가끔 혜미 집에 놀러 오는 이웃들도 혜미 엄마가 쏟는 정성을 보고는 대부분 그가 생화인 줄 알았다. 어쩌다가 직접 손으로 만져 보고 조화인 줄 아는 사람이 있어도 그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터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행복했다. 세상에 사랑 받는 일만큼 행복한 일은 없었다. 그는 조화로 태어난 것을 신에게 감사했다. 그러면서 차차 생화보다 조화가 더 아름답다는 생각을 신념화해 나갔다. 조화로서의 아름다움과 자존심을 오직 자기만이라도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혜미가 한 남자로부터 청혼의 선물로 받았다면서 장미꽃 한 다발을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 물론 그것은 생화였다. 혜미는 기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장미의 가지를 자르고 적당히 잎을 떼내어 화병에 꽂아 놓았다. 그날 밤, 밤이 깊어지자 생화인 장미꽃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넌 나보다 네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그럼, 내가 더 아름답고 말고." "난 너처럼 오만한 조화를 본 적이 없어." "넌 나보다 네가 더 아름다운 줄 아는 모양이구나." "그럼, 그건 당연한 일이야. 난 생화거든." "하하, 넌 참으로 어리석구나. 난 지금까지 너처럼 어리석은 생화를 본 적이 없어. 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모르는구나. 난 너처럼 시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아. 나에겐 죽음이라는 게 없어. 그러나 넌 이제 곧 죽을 거야. 네가 큰소리 칠 날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어." "하하, 너야말로 네 자신을 잘 모르겠구나. 넌 명색이 장미이면서도 향기가 없잖아?" "향기?" 순간, 그는 말문이 막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장미에게 향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그의 처지를 잘 알고 있다는 듯 혜미 엄마가 그에게 장미향 나는 향수를 뿌려 주었다. "내게도 향기가 나. 자, 맡아 봐. 네 몸에서 나는 향기보다 더 향기로울 거야." 다시 밤이 되자 이번에는 그가 먼저 생화에게 말을 걸었다. 생화는 그에게서 정말 장미 향기가 나자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서서히 시들어 흉한 꼴을 하고 죽고 말았다. 그는 혜미 엄마에 의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생화를 보고 고소를 감추지 못했다. 생화보다 자신의 삶이 더 아름답다는 것은 이제 정말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는 이제 아픔도 늙음도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이 세상에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한 해가 지났다. 청혼의 의미라 받쳐진 장미는 시들어 버렸으나, 혜미와 그 남자와의 사랑은 시들지 않아 혜미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혜미가 첫 친정 나들이를 하면서 장미꽃 한 다발을 엄마에게 건네주었다. "엄마, 그 동안 날 잘 키워 주신 고마움에 대한 내 마음의 표시예요." "그래, 그래, 고맙다. 남편 잘 받들고, 아들 딸 낳고 잘살아라." 그는 웃음이 쿡쿡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조금 있으면 시들고 말 장미를 사 가지고 와서 혜미가 원 별소릴 다한다 싶었다. 그날 밤, 그는 잠도 오지 않고 해서 혜미 엄마가 정성 들여 꽃병에 꽂아 놓은 장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그 장미는 지난번에 같이 얘기를 나누었던 바로 그 장미가 아닌가. 그는 반가운 김에 먼저 말을 걸었다. "정말 반갑구나. 시들어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네가 다시 살아나 이처럼 아름답다니, 정말 신기하구나." 그 장미도 당장 그를 알아보았다. "응, 정말 반가워. 난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날 줄 알았어." "그게 무슨 말이니? 넌 그때 분명히 시들어 쓰레기통에 버려졌어." "넌 정말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구나.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우린 그렇지 않아. 우린 죽음을 통해서 끝없이 다시 태어나.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죽어야 하거든. 죽음으로써 다시 새 생명을 얻을 수가 있어." "나는 새 생명이 필요 없어. 이대로 영원히 변하지 않아." "변하지 않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야. 변화 속에 아름다움이 있는 거야. 고정돼 있다는 것은 이미 추함이야. 아름다움이 어떻게 고정될 수 있겠니?"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다시 입을 떼었다. "그럼 나도 죽어야 하니?" "아니야. 넌 죽을 수가 없어. 그건 슬픈 일이야." "난 하나도 슬프지 않은데?" "그건 너에게 죽음이 없기 때문이야. 죽음이 없다는 것은 바로 생명이 없다는 것이고, 생명이 없는 꽃은 아름다운 꽃이 아니야." "아니야, 난 아름다운 꽃이야. 사람들이 다들 나를 아름답다고 해." "그건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야. 영원히 죽지 않는 너를 통하여 그 두려움을 위안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야. 사람들도 참으로 살아 있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잘 모르는 거야." "그렇지만 난 아름다워." "그래, 너도 네 나름대로는 아름다워. 그러나 네가 진정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네 자신이 누구인가를 진정 깨닫지 않으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 넌 아름다워질 수가 없어.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해야만이 아름다워질 수가 있어. 넌 조화로서의 아름다움을 지닐 때만이 진정 아름다운 거야." 생화 장미는 이번에도 며칠 가지 않아서 곧 시들어 쓰레기통에 버려지고는 말았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그 장미를 보고 웃지 않았다. 그 대신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꿈꾸었다. 그리고 분수를 지키는, 가장 겸손한 조화 장미가 될 것을 그에게 약속했다. 마부를 길들인 말 어느 마부가 일 잘하기로 소문난 말 한 마리를 사 왔다. 그런데 소문과는 달리 말은 마부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다른 말들은 채찍으로 등허리를 두어 번만 후려쳐도 말을 잘 들었으나 그 말은 그렇지 않았다. 마부는 주인이 바뀐 탓으로 말이 아직 길이 들지 않아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엔 기둥에 묶어 잡도리를 해보기도 하고, 생당근과 익은 콩을 여물로 먹여 보기도 하고, 들에 나가 풀을 뜯어먹게 해 보기도 했다. 또 마구가 몸에 맞지 않아서 그런가 싶어 마구를 바꾸어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꼬박 사흘을 굶겨 보기도 했다. 그러나 말은 여전히 마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이번에는 말을 마구 두들겨 패 주었다. 주먹으로 패고 발로 차다 못해 채찍과 몽둥이로 온몸에 몸이 시퍼렇게 들 정도로 두들겨 패 주었다. 그래도 말은 마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날 밤, 마굿간에 있던 조랑말이 참다못해 그 말을 보고 말했다. "넌 정말 어리석구나. 네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쭉 지켜봤다만, 너 어쩌자고 그렇게 맞기만 하는 거니? 나처럼 주인한테 두어 대 맞고 말 잘 들으면 더 이상 얻어맞지도 않을텐데, 제발 그러지마. 옆에서 보고 있기에 참 딱해." 그러자 조랑말을 보고 그 말이 말했다. "넌 맞는 게 몹시 두려운가 보구나." "응, 두려워. 넌 두렵지 않아?" "나도 두려워. 매가 두렵지 않은 말이 어디 있겠니?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 일을 할 수는 없어. 무조건 때리기부터 먼저 하면서 일을 시키는 마부의 나쁜 버릇을 고쳐 놓아야만 해. 그래야만 내가 맞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어. 난 그 버릇은 꼭 고쳐 놓고야 말 테야." "그러지 마. 그러니까 네가 주인한테 자꾸 맞는 거야." "아냐, 맞아야만 일을 하면 계속 맞게 되는 거야. 난 맞고 살진 않을 거야. 맞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국 맞고 살 수 밖에 없어. 그러니까 맞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돼.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중엔 결국 맞을 일이 없게 돼." "글쎄, 주인한테 늘 맞고 있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구나." 말은 여전히 마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부가 아무리 채찍과 몽둥이로 두들겨 패도 말은 고분고분 마부의 뜻을 따라 주지 않았다. 마부는 고민이 되었다. 비싼 돈을 주고 사 온 말이 말을 듣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말을 때리는 데에도 지친 마부는 어느 날 말을 판 전 주인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내가 속아서 산 것 같소. 일을 잘하기로 장안에서 소문난 말이라고 해서 다른 말의 두 배나 되는 비싼 값을 치르고 사 온 말이 도대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이게 어찌된 일이오? 아무리 때려도, 심지어 채찍으로 피멍이 들도록 때려도 말을 듣지 않으니 난 이 말을 도로 당신한테 팔고 싶소. 나를 속인 대가로 이 말을 당신이 사시오. 내가 준 값 그대로 다 쳐서 말이오." 그러자 전 주인이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 "아뿔사, 내가 당신한테 아주 중요한 말을 해주지 않았군요. 그 말은 채찍 앞에서는 절대로 말을 안 듣는 말입니다. 그 말은 절대 때려서는 안 돼요. 내가 그 말을 해준 다는 게 그만 깜박 잊고 말았군요." 그 말을 들은 마부는 얼른 집으로 돌아와 말이 보는 앞에서 채찍과 몽둥이를 분질렀다. 그러자 그날부터 말은 마부의 말을 잘 들었다. 소문대로 그 말은 아주 일 잘하는 말이었다. 사랑과 우정 경애는 당장 남편의 수술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가진 돈이라고는 한푼 없었다. 그나마 조금 있는 돈마저 아들 대학 입학금으로 낸 지가 바로 어제였다. 경애는 어디 마땅히 돈을 빌릴 데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장 친한 친구인 은숙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독신인데다 약국을 경영하는 은숙에게 다소 여유 돈이 있을 것 같았다. 경애는 은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한 사이일수록 돈을 빌리는 일을 삼가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은숙아, 영우 아빠가 쓰러지셨어. 심장에 이상이 있대.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데." 정작 돈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경애가 머뭇거리자 은숙이 입을 열었다. "알았어. 어느 병원이야? 나 지금 곧 갈께." 은숙은 급히 수술비를 마련해 가지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경애는 그런 은숙이 고마웠다. 그러나 경애의 정성과는 아랑곳없이 경애의 남편은 죽었다. 장례를 다 치른 뒤 경애는 은숙을 찾아갔다. "은숙아, 고맙다. 네가 돈까지 빌려줬는데, 그만 그런 보람도 없이 그인 가고 말았어. 빌린 돈은 내가 꼭 갚을께." "갚지 않아도 돼. 난 네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한 것만 해도 고마워. 경애야, 실은 나도 영우 아빠를 사랑했어. 이제 영우 아빠가 세상을 떠났으니 우리 사이에 굳이 숨길 일도 아닌 것 같아. 네가 여고생 때부터 영우 아빠를 사랑하는걸 보고 난 그만 단념하고 말았어." 경애는 놀라 잠시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말했다간 너랑 나랑 싸움 나게?" 경애는 활짝 웃는 은숙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은숙이 지금껏 왜 독신을 고집하고 살아왔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자 그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품위 있는 죽음 그녀는 쉰 다섯 되던 해에 목 왼쪽 임파선에 암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남편과 상의한 끝에 그녀는 곧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수술은 받은 지 일 년도 채 안 돼 이번에는 오른쪽 배에 암이 전이되었다. 암세포가 너무나 넓게 퍼져 있어 의사가 개복을 했다가 그대로 덮어 버렸다. "앞으로 석 달을 더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의사는 그녀에게 희망을 주지 않았다. 막막했다. 스스로 고난을 참고 견디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녀였으나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억울한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죽고 나면 남편과 자식들이 차차 자기를 잊게 될 것이란 생각에 분한 마음도 일었다. 어떻게 하든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다. 대부분의 암 환자들이 다들 그러한 듯 그녀도 막막한 채로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방사선과 약물 치료를 병행하는 가운데 머리카락은 빗을 갖다 대기만 해도 한 웅큼씩 빠져나갔다. 눈썹도 성글어져 얼굴을 곧 나환자의 몰골을 닮아 갔으며, 차차 신경마저 둔해져 걸음을 걷기가 불편해졌다. 그래도 그녀는 안성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에 있는 병원까지 일주일에 다섯 차례씩 오고갔다. 그런데 의사가 선고한 시한부 기간이 석 달을 넘기고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여덟 달쯤 된 날이었다. 그녀는 그날도 치료를 받으러 가기 위해 서울 가는 버스에 발을 올려놓았다. 물론 머리카락이 다 빠져 가발을 쓴 채였다. 그런데 손으로 한쪽 다리를 들어 버스에 올려놓고, 다시 다른 쪽 다리를 들어올리는 순간, 머리에서 가발이 툭 떨어졌다. 동시에 그녀의 흉한 맨머리가 그대로 들어났다. 그녀는 얼른 가발을 주우려고 했으나 주울 수가 없었다. "할머니, 빨리 안 타고 뭐하는 거예요? 에이, 참, 재수없게스리." 젊은 차장이 도와주기는커녕 짜증부터 부렸다. 차안에 탄 사람들이 모두 킥킥거렸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고 모멸스러웠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렇게 저열한 것이라면 차라리 죽고 싶었다. 당장 흔적도 없이 잦아들고 싶었다. 그 길로 그녀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길 밖으로 굴러 떨어진 가발을 주워 들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와 병원에 발길을 끊었다. 어차피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내일 당장 죽더라도 오늘 하루만이라도 인간답게 품위를 지키며 살고 싶었다. 그녀는 모든 생활을 병들기 전처럼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 희망을 만드는 일이었다. 의사는 그녀가 얼마 못 가 앉은뱅이가 되고 마침내 심한 고통 속에 숨질 것이라고 했으나,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기를 쓰고 일어나 울안의 남새밭을 가꾸었고, 책상에 꼿꼿이 앉아 책을 읽었다. 그것이야말로 옳은 투병이며 주어진 목숨에 대한 독실한 태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뒤 이태가 지났다. 그녀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누가 암이 어찌 되었느냐고 물으면 그녀는 간단히 이렇게 대답한다. "모릅니다. 병원에 안 가니까 알 수가 없지요. 다리가 좀 저린 것 말고는 별로 자각 증세가 없습니다. 어떤 탄원서 존경하옵는 검사님, 저는 지난달 20일 세상을 떠난 허영수의 어미 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글을 드려야 할 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이 글을 드립니다. 저는 태룡이를 용서하고 싶습니다. 검사님께서 태룡이를 용서해 주시면 영수 대신 태룡이를 아들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비록 하나밖에 없는 제 아들을 숨지게 한 태룡이의 죄는 밉지만, 그렇다고 그 어린것을 교도소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태룡이를 용서해 주십시오. 친자식을 잃은 제가 아들 친구마저 어두운 골방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친자식을 잃은 대신 태룡이를 양아들로 맞게 해 주십시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제 자신이 정말 제정신인지, 그게 정말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 정작 제 자신도 잘 알 수 없어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어쩌면 제 자신을 속이는 일인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강하게 고개를 흔들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한번 그런 생각을 하자 그 생각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태룡이를 미워하던 마음이 없어지고 태룡이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만이 일었습니다. 태룡이는 엄마가 없는 아이입니다. 엄마도 없는 아이가 친구를 죽인 입장이 되어 지금 재판을 받고 있으니 그 마음이 오죽하겠습니다. 태룡이도 아마 죽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검사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태룡이는 그날 영수를 일부러 숨지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지만, 그 원인은 단순한 사고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영수와 태룡이는 교회 앞마당에서 장난기가 발동해 서로 장난을 치다가, 싸움이 된 것뿐입니다. 태룡인들 장난 끝에 영수가 콘크리트 바닥에 넘어져 숨질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둘은 아주 친한 친구 사이였습니다. 중학교를 같이 다닌 둘은 또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를 다니게 돼 아주 형제 같았습니다. 둘은 늘 같이 붙어 다녔는데, 주로 태룡이가 우리 집에 자주 오는 편이었습니다. 태룡이는 인사성도 밝고 영수보다 의젓했습니다. 지금도 교회에 다녀오겠다고 꾸벅 인사하고 나가던 두 녀석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둘이 장난을 치다가 한 사람이 죽을 줄이야 그때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저는 영수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태룡이를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아들 앨범을 뒤적이다가 영수와 태룡이가 다정한 모습으로 찍은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둘이 어찌나 다정해 보이던지 저는 태룡이만이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수는 이제 제 곁으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시신을 대전 화장터로 보낼 때만 해도 금방이라도 영수가 눈을 뜨고 '엄마!'하고 제 품안으로 파고들 것 같았습니다만, 이제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영수가 이제 제 곁에 있지 않다는 것이 더욱 확실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검사님, 영수의 죽음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잘못이 있다면 어미인 저의 잘못만 있을 뿐입니다. 모든 걸 제 잘못으로 알겠습니다. 그러하오니 태룡이를 저의 품으로 돌려주십시오. 태룡이를 그대로 감옥에서 썩게 할 수 는 없습니다. 아들을 먼저 보낸 이 어미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검사님께서 태룡이를 용서해 주시면 태룡이를 아들 삼아 세 딸과 함께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지금 태룡이를 받아들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태룡이는 평생 고통스러운 일생을 살게 될 게 뻔한 일입니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제 딸들도 다들 제 뜻에 따른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탄원서를 검사님께 보내고 나서 아이들을 데리고 8 년 전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의 묘에 다녀올까 합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따라 죽고 싶었던 마음을 아들이 다 잡아 주었는데, 이제 제 아들이 죽어 흔들리는 마음을 남편을 통해 다잡고 싶습니다. 검사님, 부디 아들 잃은 이 어미의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나도 돈을 줍고 싶다 한 사내가 우연히 퇴근길에 돈을 주웠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 입구 계단을 내려가다가 뭔가 발에 툭 채이는 것이 있어 보았더니 지갑이었다. 그는 얼른 지갑을 주워 양복 상의 안주머니 속에 넣고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갑자기 남의 물건이라도 훔친 것 같아 아까와는 달리 계단을 거의 뛰어내려가다시피 했다. 그러나 막상 표를 끊고 개표구를 빠져나가려고 하자 얼른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이 지금쯤 두리번거리며 지갑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시 지갑을 주웠던 장소로 가 보았다. 급히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만 있을 뿐 아무도 지갑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 좀더 기다려 보면 지갑 주인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싶어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어 보았으나 누구 하나 지갑을 찾으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제서야 그는 은근히 마음을 놓았다. 잃어버린 물건이란 어차피 누가 주워 가도 주워 갈 것인데 내가 주워 가면 어떠랴 하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는 '만남의 장소'라고 씌어진 나무 의자에 앉아 슬며시 지갑을 꺼내 보았다. 지갑은 까만 고급 가죽 지갑으로, 그 속엔 10 만원 짜리 자기앞 수표 두 장과 만원 짜리 지폐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지갑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명함이나 주민등록증, 운전 면허증 따위는 없고 그저 돈만 달랑 들어 있었다. '이건 정말 행운이야. 행운의 여신이 나를 도와준 거야. ' 그는 속으로 가만히 소리쳤다. 어젯밤 돼지꿈도 꾸지 않았는데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내가 이걸 마다할 리가 없지. 그래도 난 지갑을 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스스로 그 지갑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곧장 집으로 퇴근하려던 생각을 바꾸어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다. "야, 기태야, 퇴근 안하냐? 내가 술 한잔 살 테니까 만나자. 내가 그쪽으로 갈까? 북창동? 그래, 그래, 북창동 입구에 있는 커피 숍에서 일단 만나자." 기태는 커피 숍에 먼저 나와 있었다. '구두쇠 같은 네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술을 다 산다고 그러냐'하는 표정으로 기태가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런 기태를 창동 갈비 집으로 데리고 갔다. "보라구. 이 돈 이거, 조금 전에 길에서 주운 거야." 술이 몇 순배 돌자 그는 주운 돈 자랑부터 먼저 했다. "오늘은 정말 재수가 좋았어. 가끔 가다가 이런 횡재수도 있어야 살맛이 나는 거야. 돈이란 사람이 직접 찾아 나서서는 안 되고, 이렇게 제발로 사람을 찾아와야 되는 거야. 이거, 주운 돈으로 먹으니까 술맛이 아주 좋군 그래." 기태가 멍하니 부러운 듯이 쳐다보다 그는 더욱 신이 나서 떠들었다. "내가 국민학교 4 학년 때쯤이었을 거야. 우리 동네 다리 위에서 돈을 한번 주운 적이 있어. 지금 돈으로 치면 한 몇 십만 원쯤은 될 거야. 난 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가까운 파출소에 갔다 주면 주인한테 돌려줄 수 있다고 배웠거든. 그래서 파출소 순경한테 돈을 주었어. 순경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어디서 주웠느냐, 이름은 뭐냐, 어느 학교 몇 학년 몇 반이냐 하고 일일이 묻고 적더군. 그래서 난 기다렸지. 이런 착한 학생이 있다고 학교로 연락이 와서 틀림없이 선생님께 칭찬을 받을 줄 알고 말이야. 그런데 그러고는 그만이야.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소식도 없는 거야. 난 다시 파출소를 찾아가서 그 돈을 어떻게 했느냐, 정말 주인을 찾아 주었느냐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어. 그렇지만 난 순경들이 그 돈을 어떻게 했는지는 늘 궁금했어. 차차 나이가 들고 세상 돌아가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난 순경들이 그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지만 말이야. 그 돈을 그냥 내가 갖는 건데, 지금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후회가 돼. 아마 순경들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그 돈으로 자기들끼리 술 먹고 치웠을 거야. 아예 처음부터 주인을 찾아 돌려줄 생각조차 안했을 거야. 그래서 내가 지금 그때 일을 보상받기 위해 이렇게 또 돈을 주웠는지 몰라. 나로서는 정말 기분 좋은 일이야. 그는 안주 먹는 일에는 크게 신경도 쓰지 않고 술잔을 홀짝거리며 내내 살맛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날, 기태는 자기도 한번 돈을 줍는 기쁨을 맛보고 싶었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일찍 퇴근하게 된 그는 돈을 줍기 위해 이리저리 거리를 쏘다녔다. 특히 돈이 떨어져 있음직한 버스 정류장이나 택시 정류장, 지하철 매표구 입구 등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밤늦게까지 돌아다녀도 길 위에 떨어진 돈이라고는 없었다. 다음날 일요일에도 가족들과의 나들이 약속까지 취소하고 거리를 쏘다녀 보았으나 그 어디에도 10원 짜리 동전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그런 자신이 우스웠다. 더 이상 우스워지기 전에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나선 김에 돈을 줍는 기분만이라도 한번 맛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호주머니 속에 든 만원 짜리 한 장을 꺼내 길에 던져 놓고 남의 돈을 줍는 척하고 집어 보았다. 그러나 별로 신통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몇 번이나 그 짓을 되풀이해 보았다. 역시 신통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칫 잘못하다가는 다른 사람이 먼저 주워가 버릴까 염려되었다. 염려 끝에 그는 한강 고수부지로 나갔다. 마침 저녁때라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팔짱을 끼고 데이트를 하는 남녀 몇 명과 무심히 흘러가는 유람선만 눈에 띄었다. 그는 그곳에서도 자기 돈을 떨어뜨려 놓고 줍는 일을 되풀이해 보았다. 혹시 무슨 특별한 기분이라도 드나 했으나 역시 별다른 기분이 들지 않았다. 도무지 싱겁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해보고 그만 두자' 하는 생각을 하고 다시 돈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때 강한 바람이 획 불어왔다. 떨어뜨린 돈이 강물 쪽으로 급히 굴러갔다. 그는 얼른 돈을 주우려고 달려갔다. 그러나 그때 다시 한번 획 강한 바람이 불어 돈이 그만 강물 속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군밤 장수를 찾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이었다. 서울 하월곡동 어두운 골목길에 허름한 신사복 차림을 한 한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마침 성탄 전야인데다가 날씨마저 추워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쓰러진 채 도움을 구하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이미 탈진 상태에 빠져 신음 소리만 내었을 뿐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행인들이 한두 명 지나갔으나 그들은 노인을 못 본 척했다. 무심코 길바닥에 쓰러진 노인을 보고는 달아나듯 그 자리를 피해 갈 뿐이었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어 있었다. 노인은 더욱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 노인은 이대로 길에서 객사하는구나 하는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한 군밤 장수 사내가 리어카를 끌고 가다가 노인 앞에 멈춰 섰다. "할아버지, 무슨 일입니까?" 노인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내는 급히 노인을 잡아 일으켰다. 노인은 거의 사색이 다 돼 있었다. 사내는 리어카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로 노인을 들쳐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워낙 당뇨가 심하시군요." 응급 처치를 하고 나온 의사가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의사의 말대로 조금 있자 사람을 알아볼 정도로 기력을 회복했다. "할아버지 전화번호를 말씀해 주세요. 제가 집에 연락해 드리겠어요." 사내는 노인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면서 연락처를 알아내 가족들에게 전화를 해주었다. "여보게, 고맙네, 고마워. 어디 사는 누구인가?" 가족에게 연락을 하고 오자 노인이 사내의 손을 잡고 입을 열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그런 말씀은 마시고, 속히 안정을 취하시도록 하십시오." "집이 어딘가? 좀 가르쳐 주게." "그런 건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빨리 나으실 생각이나 하십시오." "아니야. 집이 어딘지 꼭 좀 가르쳐 주게. 그래야 내가 나중에 인사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아닙니다. 전 그저 군밤 장수일 뿐입니다. 몸이 불편하신데 말씀 자꾸 하지 마시고 안정을 취하십시오." 노인이 몇 번이나 집을 가르쳐 달라고 했으나 사내는 자신이 군밤 장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노인의 가족들이 병원으로 달려왔을 때에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노인은 건강이 회복된 후 군밤 장수를 찾아 나섰다. 하월곡동 시장 일대는 물론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골목이나 지하도 입구를 샅샅이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다녀도 군밤 장수를 찾을 수가 없었다. 노인은 찾다 못해 일간 신문에다 광고를 냈다. "하월곡동 군밤 장수만 보시오. 요즘 보기 드문 한 군밤 장수를 찾습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 자정 넘은 시각에 하월곡동 골목에서 쓰러진 노인을 구해 준 고마운 군밤 장수에게 꼭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신문에 광고가 나가도 군밤 장수한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날 밤 노인을 돕느라 골목에 그대로 두었다가 리어카를 잃어버린 사내가 다시 리어카를 장만하기 위해 막노동을 하고 있는 줄을 그 노인이 알 리 없었다. 노다지의 주인 신씨는 조상 대대로 물려 오던 밭뙈기를 팔아 금광 한 구덩이를 산 일이 후회되었다. 광산에서는 중요한 몇 몇 광구 외에 나머지 광구는 '분광'이라고 해서 몇 구덩이씩 나누어 파는데, 다른 분광에서 금이 나오는 것을 보고 신씨는 밭을 팔아 분광 하나를 샀다. 신씨는 노다지를 캐겠다는 다소 허황된 꿈이었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 집에서 자는 일보다 금광에서 자는 일이 더 많았다. 남들처럼 힘든 일을 한다고 술에 의지하는 일도 드물었다. "신씨는 노다지 캘 거야. 틀림없어. 두고 보라구.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신씨가 안 캐고 누가 캐겠어."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하는 신씨를 보고 다들 그렇게 말했다. 그의 성실성을 봐서 군소리 없이 돈을 빌려주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했다. 신씨는 3 년째 구덩이를 파고 들어갔으나 금줄이 박힌 광석 하나 나오지 않았다. 이웃한 다른 구덩이에서는 가끔 노다지를 발견했다는 말이 들려 왔으나 신씨한테만은 그런 행운이 따라 주지 않았다. 신씨는 낙망한 나머지 몸과 마음이 차차 지쳐 갔다. 술을 마시지 않던 신씨가 차츰 술청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이제는 노다지를 캐는 일보다 이리저리 빌린 돈을 갚는 일이 더 급선무였다. 신씨는 고민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걸 팔아 치우고 당장 빚잔치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아냐, 난 할 수 있어! 해낼 수 있어!' 신씨는 딱 한 해만 더 열심히 해 보기로 하고 부지런히 구덩이를 파 나갔다. 그러나 스스로 약속한 한 해는 또 아무런 소득 없이 지나갔다. 신씨는 나머지 남아 있던 농토를 다 팔아 우선 급한 빚을 갚았다. 그리고 또 한 해를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그 한해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신씨는 그제서야 자신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금광에 매달리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신씨는 즉각 금광을 팔려고 내놓았다. 금광은 내놓자마자 당장 임자가 나섰다. 신씨로서는 금도 나오지 않은 금광을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런데 신씨가 금광을 판 뒤 한 일 주일쯤 되는 날이었다. 주막에 나가 술을 들고 있는데 김씨가 노다지를 캤다는 말이 들려 왔다. 신씨는 놀라 술사발을 팽개치고 김씨에게 달려갔다. "아니 내가 5 년이나 파도 안 나오던 구덩이에서 금이 나왔다니, 그게 정말이오?" "정말입니다. 이걸 한번 보십시오!" 김씨는 흥분한 목소리로 주먹만한 금광석 하나를 신씨에게 보여주었다. "일을 시작한 지 이틀만에 한 1 미터쯤 파고 들어가자 이렇게 노다지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신씨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자신이 피땀 흘려 파던 구덩이만 쳐다보았다. 1 미터만 더 파면 될 것을 그것을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금광을 판 자신이 너무나 어리석게 느껴졌다. 아파트 동 대표 회의 서울 강남 H 아파트에서 임시 동 대표 회의가 열렸다. 그날 의제는 주차장 확보에 관한 문제였다. 갈수록 차량 대수가 늘어나 지하 주차장이 없는 H 아파트로서는 이제 주차 문제가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오늘 편히 쉬어야 할 일요일날 우리가 굳이 모여 이렇게 회의를 갖게 된 것은 여러분들도 다 알다시피 우리 아파트의 주차 문제에 대한 그 심각성 때문입니다." 101 동 대표이자 동 대표의 회장인 김씨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심각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떼었다. "차량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데도 아파트들이 충분한 주차 면적을 확보하지 않고 있어서 곳곳에서 주차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요즘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요즘 새로 짓는 아파트들은 법적으로 지하 주차장을 확보하도록 되어 있어서 그래도 괜찮지만, 우리처럼 오래된 아파트들은 갈수록 주차 전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우선 각 동 대표들의 의견을 먼저 들어 볼 생각으로 이렇게 임시회의를 소집하게 되었습니다. 각자 좋은 의견이 있으시면 기탄 없이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회장의 의제 설명이 있자 어느 자리에서건 먼저 나서기를 좋아하는 201 동 대표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먼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정말 적절한 시기에 이 회의가 소집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제 생각엔 104 동과 105 동 뒤편에 있는 자연 녹지를 주차장으로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거길 주차장으로 이용하면 차량 60 대는 너끈히 댈 수가 있습니다." 201 동 대표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104 동 대표가 벌컥 화를 내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그렇지 않아도 우리 동은 도로변과 인접해 있어서 밤에 차소리 때문에 안면 방해를 받고 있는 실정인데, 주차장까지 들어선다면 그 소음과 매연은 어떡합니까? 전 반대합니다. 자기들 편하자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104 동 대표는 104 동 주민들을 위해 결사 반대를 하고 나섰다. 그러자 201 동 대표가 입을 열었다. "정 그렇다면, 단지 내 어린이 놀이터 옆에 있는 녹지를 전부 없애 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면 차를 90 대는 더 주차할 수 있어요. 난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되는데,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문제는 어떻게 하든 이 주차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우리가 도달해 있다는 것입니다." 201 동 대표의 그 발언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다가 주차 시설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오래 전부터 바라 왔던 터였으므로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임시 동 대표 회의에서 결의된 사항은 즉각 시행되었다. 각동 주민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형식적으로나마 주민 의사를 수렴한 후 보름도 채 되지 않아서 어린이 놀이터 옆에 있던 녹지를 없애 버렸다. 사철나무와 단풍나무와 백목련과 쥐똥나무가 다 뽑혀 나가고, 백목련과 넝쿨 장미가 피던 자리엔 사고 방지 턱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H 아파트는 다시 예전처럼 심한 주차 난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 그 동안 아파트 주민들의 보유 차량 대수가 더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H 아파트에서는 다시 임시 동 대표 회의가 열렸다. 회장인 김씨가 주차장 확보 문제에 관한 안건을 내어놓고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하자 이번에도 201 동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주차장이 없다고 차를 없애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이것저것 생각할 필요 없이 어린이 놀이터를 없애도록 합시다. 물론 어린이를 두고 있는 집에서는 반대하시겠지만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201 동 대표의 발언이 끝나자 동 대표들은 당장 두 패로 나뉘어졌다. 한 패는 어린이 놀이터를 없애서라도 주차 난을 해결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한 패는 차량 대수를 줄였으면 줄였지 어린이 놀이터만은 없애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우리 아파트에는 국민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많아요. 놀이터를 없애 버리면 도대체 그런 아이들은 어디에 가서 놀란 말입니까? 아이들이 없거나 다 큰애들만 있는 집에서는 그래도 괜찮겠지만, 한창 아이들을 키우는 집에선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한쪽이 이런 주장을 하면 다른 한쪽이 또 다른 주장을 했다. "요즘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된다고 그러십니까? 요즘은 학교에 갔다 오자마자 과외를 한다. 텔레비전을 본다 해서 정작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은 몇 명되지 않아요. 우리가 그런 몇 명의 아이들은 위해서 그런 공간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서로의 의견은 팽팽했다. 어느 한쪽에서도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201 동 대표의 주장은 더욱 강력해졌다. "우리 집에도 아이들을 둘이나 키우고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놀이터를 없애는 한이 있더라도 주차장 확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개인적인 이해 득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아파트 전체 손익에 관련된 문제로, 잘못하다간 집 값마저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까 어느 분의 말씀처럼 아이들이 실제로 공부하느라고 노는 시간도 별로 없지만, 논다 하더라도 놀이터보다는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비디오를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꼭 밖에서 놀고 싶으면 학교 운동장을 이용하면 됩니다. 꼭 아파트 단지 안에서 놀 필요가 없어요. 여기는 시골이 아니라 도시입니다. 도시 아이들은 도시 아이들답게 자랄 수밖에 없어요." 회장은 골치가 아팠다. 어느 쪽도 편들 수가 없어서 표결에 부치는 수밖에 없었다. "저로서는 하는 수가 없군요. 회칙에 따라 다수결로 정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표결 결과는 어린이 놀이터를 없애자는 쪽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젊은 층보다 중년층이 더 많이 살아 어린이를 키우는 집이 많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H 아파트엔 곧 어린이 놀이터가 없어졌다. 미끄럼틀과 회전 그네가 있던 곳에는 대형 승용차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그후 몇 달이 지나 어느 일요일이었다. 210 동 대표 집의 아들이 아파트 앞 골목길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놓친 공을 주우려고 큰길 쪽으로 뛰어가다가 그만 차를 피하지 못한 탓이었다. 201동 대표는 그제서야 어린이 놀이터를 없애자고 주장한 일이 크게 후회되었다. 그러나 그 후회는 이미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람은 인간입니다 국민학교 1 학년 수업 시간. 교단에 선 지 10 년만에 다시 1 학년 담임을 맡게 된 최규동 씨는 마치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처음으로 교단에 선 듯한 느낌이었다. "자, 오늘 첫 시간엔 '슬기로운 생활'을 꺼내세요." '슬기로운 생활'은 선수와 자연을 통합한 교과서로, 오늘은 조류와 짐승의 차이점에 대해서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여러분, 모든 동물은 누구한테서 태어납니까?" 최 교수는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망울을 쳐다보며 가장 쉬운 질문부터 던져 보았다. "엄마한테서요." 아이들이 모두 입을 모아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새들은 어떻게 태어납니까?" "알에서요." "그러면 돼지는 어떻게 태어나지요?" "제 모습 그대로요." 최 교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최 교사로서는 예상할 수 없었던 대답이었다. 제 모습 그대로 태어난다니! 1학년 아이의 대답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이 얼마나 명쾌한 답인가. "새들은 꼬리 깃이 있는 대신 동물들은 꼬리가 있어요. 그리고 새들은 날 수 있는데, 동물은 날 수가 없죠, 또 새들은 부리가 있고 발은 한 쌍인데, 동물들은 부리가 없고 다리가 두쌍이에요." 최 교사는 조류와 짐승의 특징을 설명을 해주다가 아이들에게 또 물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태어날까요? "제 모습 그대로 태어나요." "네 맞아요. 그러면 사람은 무엇입니까?" 최 교사는 아이들이 "동물입니다." 하고 대답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사람은 인간이에요." 최 교사는 다시 한번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한 기분이 되었다. "왜 그러지요?" 최 교사는 다시 물었다. "동물은 꼬리가 있는데, 선생님은 꼬리가 없잖아요?" 아이들은 다들 선생님이 그것도 모르느냐는 표정이었다. 최 교사는 잠시 말을 잃고 있다가 속으로 말했다. '그래 맞아. 사람은 짐승이 아니고 말고. 인간이어야 하고 말고. 고맙구나 애들아, 너희들이 나를 깨우치는구나. 우리는 정말 인간답게 생각하고, 인간답게 대접받고, 인간답게 살아가야 한다.' 송이 할머니의 죽음 송이는 여고생이 되자 자기만의 방을 하나 갖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남동생 훈이와 한방을 써 왔으나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엄마, 내 방 하나 마련해 주세요." 송이는 틈만 나면 엄마를 졸랐다. "나도 다 컸단 말이에요. 여동생이라면 또 모를까, 남동생하고 같은 방을 쓰는 애들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 네 말이 맞긴 맞다. 이제 너도 다 컸는데, 남동생하고 같은 방을 쓸 수는 없지. 그렇지만 송이야, 지금 당장 어떡하니? 좀 기다려 봐. 이건 돈이 많이 드는 일이야." 송이 엄마는 송이 말대로 방을 하나 마련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서울 강남 땅에서 방 하나가 더 있는 40 평짜리 아파트로 이사하려면 적어도 수천만 원 돈이 더 필요해서 당장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다 송이는 참고 기다려 보라는 엄마의 말을 믿고 엄마가 어떤 조치를 취해 줄 것을 고대했다. 그러나 한 학기가 지나도록 엄마는 아무런 조치를 취해 주지 않았다. 송이는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친구들은 다들 자기 방이 있어요. 우리 이 집 팔고 분당으로 이사가요. 분당엔 집 값이 강남보다 싸잖아요? 나 분당에서 학교 다녀도 돼요." "아니야, 살아도 강남에서 살아야지, 경기도 땅엔 왜 가니? 좀더 기다려 봐." "그 동안 많이 기다렸잖아요?" "글쎄, 좀더 기다려 보라니까!" 송이는 자기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엄마가 섭섭했으나 하는 수 없었다. 그 뒤 새학기가 시작된 어느 가을날이었다. 독서실에서 밤늦게 공부하고 돌아온 송이는 다시 엄마한테 방을 마련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송이 엄마가 획 신경질을 내면서 말했다. "할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그 방을 네가 쓰면 되잖아?" 다음날 밤이었다. 일흔이 넘은 송이 할머니가 그만 극약을 먹고 돌아가셨다. 송이 할머니가 송이 엄마의 말을 들은 것이다. 썩지 않는 고무신 그날 이후 나는 지금까지 땅 속에 파묻혀 있다. 낮이면 맑은 햇살, 시원한 바람 한 줄기 온몸에 맞고 싶고, 밤이면 따스한 별빛 한번 바라보고 싶어도 컴컴하고 습기찬 이곳 흙 속에 파묻혀 있다. 이제 나와 함께 파묻힌 것들은 모두 다 썩어 버렸다. 내가 사랑하던 소년의 노트도, 일기장도, 책가방도, 어머니한테 쓴 편지도 이제는 모두 썩어 흔적조차 없어졌다. 그러나 아직 나는 썩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것은 내가 아직 그 소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그 소년에 대한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80 년 5월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년의 발에 신겨 있었다. 소년은 수업을 일찍 끝내고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소년은 논둑 옆 개울가를 걷고 있었고, 마을에는 손에 총을 든 군인들이 진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이 땅에 또다시 악독한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섰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야, 우리 개구리 잡으면서 놀다 갈까?" 소년의 친구가 소년에게 말했다. "개구리가 불쌍하다. 우리 종이배를 만들어 띄우자." 소년들은 개울가에 앉아 종이배를 만들었다. 나의 소년은 허드레 연습장 종이로 만든 종이배를 띄웠고, 다른 소년들은 영어나 수학 시험지로 만든 종이배를 띄웠다. 소년들은 우르르 종이배를 따라갔다. 종이배는 온몸에 햇살을 가득 싣고 기우뚱기우뚱 거리며 흘러갔다. 나는 신이 났다. 나도 종이배를 따라 푸른 바다로 흘러가고 싶었다. 총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느닷없이 소년들의 웃음소리가 총소리에 파묻혔다. 소년들은 냅다 뛰었다. 나의 소년도 얼른 논둑길로 뛰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내가 그의 발에서 벗겨졌다. 순간, 소년이 나를 뒤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즉시 나에게 향해 달려왔다. "돌아가!"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잘못하면 죽어! 돌아가란 말이야!"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소년은 나의 고함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계속 나를 향해 달려왔다. 아, 총알 하나가 소년의 가슴을 뚫고 지나간 것은 그때였다. 개울가에 벗겨진 나를 막 주우려는 순간, 소년은 "아!"하는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푹 거꾸러졌다. 소년의 어머니는 개울가에 앉아 나를 안고 통곡했다. 군인들이 마을을 떠난 뒤, 나는 소년의 책가방과 함께 개울가에 파묻혔다. 세월이 흘렀다. 이제 소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나만은 아직도 소년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소년이 이 땅에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썩지 않았다. 기다림은 우리를 썩지 않게 만든다. 작은 기적 고아원에 양식이 떨어졌다. 굶은 지 벌써 사흘째인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이었다. 원장은 아이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백방으로 쫓아 다녀 보았으나 어디에서든 쌀 한 톨 구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전쟁 직후라 할지라도 이렇게 몰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자꾸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원장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이들이 배가 고파 우물가에서 물을 퍼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떤 아이들은 허기진 배를 안고 병든 병아리처럼 오종종하게 양지쪽 담벼락에 기대 있었다. '아, 저 아이들을 저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 원장은 마음이 탔다. 그 누구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싶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찾아보지 않은 하느님을 향해, "오 하느님, 제발 좀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그러자 원장은 갑자기 기도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기도해 본 적이 없었으나 그는 얼른 다락방으로 올라가 무릎을 꿇었다. "하느님, 저는 기도할 줄을 모릅니다. 저의 기도가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제발 좀 들어주십시오. 지금 우리 아이들이 배가 고파 울고 있습니다. 제가 돈이 있어서 쌀을 살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도 잘 아시겠지만 제 형편이 그렇지 못합니다. 제겐 지금 돈 한푼 없습니다. 이젠 아무도 도와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이번엔 제발 하느님께서 먹을 것을 좀 보내 주십시오." 그는 마치 옆에 있는 사람의 팔을 붙들고 간절히 부탁하는 사람 같았다. 그는 기도를 다 마치고 마당으로 나가 허기에 지친 아이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 주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먹을 것이 생길게다. 아무도 우리를 이대로 굶어 죽도록 하지는 않을 거다." 하고 다독다독 등을 두드리며 위로해 주었다. 그때 트럭 한 대가 고아원 대문 앞에 와서 멎었다. 젊은 남자 두 명이 급히 트럭에서 내리면서 원장을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제가 원장입니다만." 원장은 갑자기 무슨 일인가 하고 대문을 열었다. "저희들은 제빵회사 직원들입니다. 오늘 우리 공장에서 구워 낸 빵이 시중에 상품으로 내놓기에는 좀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빵을 고아원에 기증하려고 싣고 왔습니다. 배불리 먹는 데에는 아무 부족함이 없습니다. 자, 받아 주십시오." 그들은 말을 마치자마자 트럭 하나 가득 싣고 온 빵을 내리기 시작했다. 금전 두 닢 우애 좋기로 소문나 형제가 돈을 벌기 위하여 고향을 떠났다. 병든 어머니마저 약 한 첩 써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형이 먼저 아우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천해의 고아가 되었다. 부모님 안 계신 고향에 사느니 차라리 고향을 떠나자. 우리가 이대로 고향에 산다면 나중엔 자식들이 아파도 약 한 첩 제대로 먹일 수 없을 게다. 서울로 가자. 서울에 가서 무슨 짓을 하든 돈을 벌러 사람답게 살아보자." 아우는 형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아우도 어머니 약 한 첩 지어 드리지 못한 가난이 원망스러웠다. 형제는 탈상을 하자마자 길을 떠났다. 마침 봄날이어서 괴나리봇짐을 걸러 메고 길을 떠나가기는 안성맞춤이었다. 형제는 부지런히 노력해서 큰 부자가 될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길을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곧 노잣돈이 떨어졌다. 뱃속에 곡기를 채우지 못한 지 이틀이나 된 몸으로 문경 새재를 넘었다. 보릿고개인데다 봄가뭄에 인심이 흉흉해서 어디 가서 밤 한 그릇 얻어먹기가 힘들었다. 몇 켤레 봇짐에 매달고 온 짚신마저도 다 헤어져 이젠 길을 걷기조차 어려웠다. "형님, 배가 고픕니다." "나도 고프다. 참고 견디어라. 저기 저 강 건너 마을에 가서 어떻게 밥을 한번 얻어 보자." "형님 발도 아픕니다." "어허, 참으래두." 형제는 간신히 강나루에 닿았다. 그런데 배를 기다리다가 나루턱에 황금 동전 두 닢이 떨어져 있는 것을 아우가 주웠다. "형님, 하늘이 우리를 도우셨는가 봅니다. 정말 사람이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군요." 형제는 뛸 듯이 기뻐하다가 서로 한 닢씩 동전을 나누어 가지고 배를 탔다. 배는 물살을 가르며 재빨리 강 한가운데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때 아우가 갑자기 아까 나누어 가졌던 금전을 꺼내 강물 속에다 던져 버렸다. "너 왜 그래? 갑자기 그게 무슨 짓이야?" 형은 놀라 소리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닿자 형이 아우한테 물었다. "도대체 네가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구나. 그 연유라도 한번 말해 보아라." 아우가 형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금전을 줍기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금전을 나눠 갖는 순간부터 형이 무척 미워졌습니다. 형이 없었으면 금전 두 닢이 다 내 차지가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래서 차라리 돈을 버리고 형을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돈보다 형님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더 중요하지요." (2) 우리 동네 샘물 내가 살던 고향 마을에는 늘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었다. 사시사철 그 어느 때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평생 물 걱정을 하며 사는 일이 없었다. 논바닥이 거북 등처럼 쩍쩍 갈라지는 여름 가뭄 때에도 유독 그 샘물에서만은 차고 맑은 물이 퐁퐁 솟아났다. 겨우내 눈이 내리지 않아 몇 십년 만에 겨울 가뭄이 들었다고 난리가 나도 우리 동네 샘물만은 결코 마르는 법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이 샘을 자랑하였으며 또한 사랑하였다. 어른들은 들에 나가 김을 매다가 돌아와서는 꼭 이 샘물에다 손발을 씻었다. 나와 같은 조무래기들도 하루 종일 땡볕에서 뛰어 놀다가 저녁 먹을 때가 되면 그 샘가에 가서 땟국을 씻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보자기에 싼 책 보따리를 등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10리나 되는 읍내 국민학교에서 지쳐 돌아올 때면 나는 으레 이 샘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 나서야 다시 힘을 얻곤 했다. 동네 아낙네들은 매일같이 그 샘물을 길어다가 밥을 지었으며, 그 샘가에 와서 빨래를 하는 젊은 아낙네도 있었다. 샘은 바로 마을 사람들의 젖줄이었으며, 마을 사람들 중에 이 샘을 애지중지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물론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내가 청년이 되어 고향 마을을 떠날 때까지 그 샘은 나를 키워 준 또 하나의 어머니였다. 그런데 나는 늘 흘러 넘치는 그 샘물이 아깝다고 생각되었다. 이웃 마을 사람들이 그 샘물을 길어 가는 것조차 아까워 어떤 땐 속이 상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 물을 일부러 몇 바가지씩 떠서 물배를 채워 보기도 하고, 아무 쓸데도 없이 물을 길어다가 그냥 길가에 버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물을 몇 동이나 길어다가 뒷간을 말끔히 청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물은 언제나 흘러 넘치기만 할 뿐 조금도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 아까운 샘물이 훌러 넘치지 않도록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궁리를 해도 별달리 뾰족한 수는 없었다. 나의 그러한 생각은 내가 고향을 떠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도시에서 돈을 주고 물을 사 먹을 때마다 그러한 생각은 점점 더 깊어 갔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때의 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던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샘물이 흘러 넘치지 않으면 그대로 썩고 만다는 것을 이제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은 죽고 만다는 것을. 사람도 늘 그 샘물처럼 서로 사랑이 흘러 넘쳐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물찾기 한 시골 국민학교 뒷산에서 보물찾기 대회가 열렸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지 30여년 만에 모교를 찾은 졸업생들이 재학 시절의 은사님을 모시고 소풍을 간 것이다. "자 동창생 여러분, 오늘의 마지막 순서로 보물찾기를 실시하겠습니다. 오늘의 이 보물찾기는 아주 이색적인 것으로, 우리들의 영원한 스승 김판영 선생님께서 제안하신 것입니다. 김 선생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난 후 지금까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보물들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하시면서 이제는 그것들을 다시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동안 잃어버리고 만 그 소중한 것들을 다시 찾고자 합니다. 자, 다들 보물을 찾으러 출발하십시오. 지금이 오후 세 시니까 오후 네 시까지 딱 한 시간 동안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우리들이 소풍을 와서 보물을 찾았던 저 산꼭대기까지 바위틈이나 나뭇가지 등을 살펴보십시오. 그곳에 보물을 가리키는 종이쪽지가 숨어 있을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아오시는 분께 가장 큰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20여 명의 졸업생들이 5월의 신록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마에 주름살이 깊게 패인 김판영 선생은 보물을 찾으러 떠나는 제자들을 지켜보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졸업생들은 대부분 손에 종이 쪽지 한 장씩을 들고 다시 사회자 앞으로 모여들었다. 사회자 앞에는 예쁘게 포장된 많은 상품들이 쌓여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가장 큰상을 받기를 원했다. "자, 여러분. 지금부터 여러분이 찾은 보물에 대한 시상이 있겠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아오신 분께 김 선생님께서 직접 시상을 하시겠습니다. 한 사람씩 차례대로 종이 쪽지를 건네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가 말을 마치자 임산부처럼 배가 툭 튀어나온 졸업생이 먼저 쪽지를 내밀었다. 거기엔 '우정'이라는 말이 씌어 있었다. "네, 그렇군요. 그 동안 우리들은 정말 소중한 우정을 잃어버리고 있었군요." 사회자는 그 사내에게 조그만 탁상시계 하나를 상품으로 주었다. 다음은 대머리가 된 사내가 쪽지를 내밀었다. 거기엔 '인내'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 쇠꼴을 먹이면서부터 길렀던, 가난을 참고 견디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말았군요." 그 다음은 청바지에다 남방셔츠를 입은 사내가, 또 그 다음은 십자가 금목걸이를 한 아주머니가 '희망'이나 '시간'이니 하는 쪽지를 내밀었다. 그때마다 자그마한 상품들이 주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쪽지를 찾아온 사람이 가장 큰 상품을 차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트 형태의 커다란 귀걸이를 한 아주머니가 '사랑'이란 글귀가 씌어진 쪽지를 내밀어도 그 아주머니에게 돌아간 상품은 고작 압력 밥솥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궁금해했다. 누가 일등을 할 것인가, 누가 가장 큰 상품을 탈것인가 하고 시상대 위에 놓여 있는 가장 크기가 큰 상품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시상식이 다 끝날 때까지 그 상품을 가져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보물찾기를 제안한 김판영 선생이 나서서 제자들 앞에 한 말씀뿐이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을 만나서 퍽 반갑기도 하지만, 또한 퍽 유감이기도 합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가장 소중한 보물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분명 사랑입니다. 잃어버린 사랑은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희생이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랑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머니들의 희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머니의 사랑, 그것은 바로 희생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이 '희생'이라는 보물을 꼭 찾아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순한 양과 풀밭 맞대기가 하면 싸움을 하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아내가 늘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하기를 원한 반면, 아내는 남편이 늘 푸른 풀밭처럼 넓고 아늑하기를 원했다. "여보, 제발 순한 양이 좀 돼 봐요." "그럼 당신이 먼저 풀밭이 돼 보세요. 당신이 풀밭이라면 나는 순한 양이 될 수 있어요." "나는 이미 늘 풀밭이야." "나도 늘 순한 양이에요." 그들은 이런 식으로 늘 상대방의 원하는 것이 먼저 되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서로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당신도 이젠 나를 좀 사랑해 봐. 사랑을 받으려고만 들지 말고 먼저 사랑할 줄도 좀 알란 말이야." "그런 당신은?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당신이야말로 나를 좀 사랑해 봐요." "허허 참. 난 당신을 사랑해. 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하하, 당신도 참, 그건 바로 내가 할 소리예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나마 이렇게 이혼까지 가지 않고 살고 있는 거예요. "여보, 이젠 그런 쓸데없는 말장난을 그만하고, 정말 나를 좀 사랑해 봐. 부탁이야. 사랑을 얻으려면 먼저 사랑을 해야 해. 사랑을 받기만을 원하면 결국 사랑을 잃게 돼. 주지 않으면 얻을 수가 없어." "여보, 나도 정말 부탁이에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면 그 사랑이 모두 다 당신한테 돌아가는 거예요." 그들의 이런 식의 싸움은 늘 되풀이되었다. 서로 상대방에게 싸움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자 싸움의 양태가 갈수록 격렬해졌다. 남편이 고함을 치고 욕을 하면 아내도 소리를 지르고 욕을 했다. 남편이 화를 참지 못하고 물건을 내던지면서 아내도 화를 참지 못하고 물건을 내던졌다. 자연히 그들은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하루는 그들 사이에 하나의 협상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도중에 누가 "순한 양!" 하고 소리치거나 "풀밭!"하고 소리치면 일단 입을 다물고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는 협상이었다. 그들은 이 협상을 잘 지켜졌다. 정신없이 한창 싸우다가도 남편이 먼저 "순한 양!"하고 소리치면 아내도 "풀밭!"하고 소리치고는 싸움을 중단했다. 그러나 일단 싸움이 중단되기는 했으나 싸움의 회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이 바라는 대로 '순한 양'과 같은 아내가 되기는커녕 '성난 양'과 같은 아내가 되어 갔으며, 아내가 바라는 대로 '풀밭' 같은 남편이 되기는커녕 '폐허'와 같은 남편이 되어 갔다. 그런데 그들 부부가 사는 아파트 202 동에도 그들과 똑같이 "순한 양!", "풀밭!" 하고 소리치며 싸우는 부부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 부부와는 달리 그렇게 소리치면 칠수록 그들은 정말 '순한 양'과 '풀밭'이 되어 갔다. 갈수록 싸움의 회수도 줄어들고 부부 사이의 금실도 좋아졌다. 그들은 202 동에 사는 부부가 부러웠다. 그래서 한번은 202 동에 사는 부부한테 가서 물었다. "참 이상하군요. 우리 부부도 당신들처럼 싸움을 하다가 '순한 양!', '풀밭!' 하고 소리치는데, 부부 사이가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기만 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그렇지 않군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러자 202 동에 사는 부부가 빙긋 웃음을 주고받으면서 말했다. "아, 그건, 우리가 상대방에게 무엇이 되라고 소치 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되라고 소리치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남편이 자기 자신에게 '풀밭'이라고 소리치고, 아내가 자기 자신에게 '순한 양'이라고 소리칩니다.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지요." 바람이 하는 말 해와 달이 싸웠다. "나뭇잎들은 초록색이야." 하고 해가 말하니까, 달이 "아니야, 은색이야."하고 대받았다. 달이 "사람들은 일도 하지 않고 주로 잠만 자지."하고 말하니까, 해가 "아니야, 사람들은 주로 움직여." 하고 말했다. "그럼 왜 지구가 그렇게 조용하니?" 달이 지지 않고 다시 해에게 말했다. "넌 누구한테 그런 소릴 들었니? 지구는 늘 시끄럽기 짝이 없어." "아니야, 너야말로 누구한테 그런 소릴 들었니? 지구도 다른 별들처럼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어." 그들의 싸움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바람이 나타나 말했다. "너희들이야말로 정말 우습구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싸우니? 나는 해가 떠 있을 때도 불고, 달이 떠 있을 때도 불어, 낮에 해가 떠 있을 때는 바로 해가 말한 대로야. 지구는 시끄럽고, 사람들은 모두 정신없이 움직이지. 나뭇잎은 초록색이고 그러나 밤이 되어 달이 떠 있을 때는 모든 게 달라져. 사람들은 잠을 자고, 고요함이 온 누리를 다스리지. 물론 나뭇잎은 달빛을 받아 은빛을 띠게 돼. 간혹 구름이 달을 가리면 검은빛을 띠기도 하지. 그러니까 해 너도, 달 너도 사실은 다 알지도 못하는 거야. 세상은 자기 주장만이 다 옳은 게 아니야. 세상을 자기 입장에서만 이해하면 안 되는 거야." 작은 꽃게의 슬픔 동해안에 사는 큰 꽃게 한 마리가 작은 꽃게 한 마리가 바닷가 모래밭 위로 올라왔다. 바닷가 모래 속이 너무나 춥고 답답해서 바다 구경도 좀 하고 햇빛도 좀 쐬고 싶어서였다. "밖으로 나온 일은 정말 잘한 일이야. 아이 시원해." "저길 좀 봐, 아이들이 발가벗고 파도를 타고 놀잖아. 아, 정말 멋있어."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감탄의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데 그때 작은 꽃게가 밖으로 나올 때 만든 자기의 모래 구멍을 보고 큰 꽃게한테 말했다. "큰 꽃게야, 참 이상하다. 내가 만든 구멍은 이렇게 작은데 네가 만든 구멍은 왜 그렇게 크니?" 그러자 큰 꽃게가 말했다. "아, 그건 내 몸이 크기 때문이야. 네 구멍이 작은 것은 네 몸이 작기 때문이고. 우리는 우리 몸에 맞추어서 구멍을 파야 돼." 작은 꽃게는 큰 꽃게의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도 큰 꽃게처럼 큰 구멍을 파고 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큰 꽃게보다 더 큰 구멍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밤, 작은 꽃게는 큰 꽃게 몰래 다시 바닷가로 나와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발가락과 집게 다리를 열심히 놀려 자기 몸보다 몇 배나 되는 큰 모래 구멍을 팠다. 파도가 밀려와 기껏 파 놓은 구멍을 무너뜨려도 실망하지 않고 다시 또 큰 구멍을 파 놓았다. '이만하면 큰 꽃게가 판 구멍보다 몇 배나 더 클 거야. 나도 이제 큰 꽃게가 부럽지 않아.' 작은 꽃게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제서야 만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작은 꽃게의 더듬이를 따갑게 찌르는 한 불빛이 있었다. "야 찾았다! 여기 있어!" 아이들의 목소리가 발자국 소리와 함께 한꺼번에 들려 왔다. 작은 꽃게는 덜컥 겁이 났다. 얼른 자기가 파 놓은 모래 구멍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작은 꽃게는 구멍이 너무 커서 자기의 몸을 다 숨기지 못하고 전깃불을 든 한 아이의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봄을 기다린 두 토끼 겨울 산 속에 두 마리 토끼가 살고 있었다. 한 마리는 양달진 산비탈에 살고 있었고, 또 한 마리는 응달진 산비탈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나깨나 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의 소원은 하루 속히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는 일이었다. 허옇게 산을 뒤덮은 흰눈이 녹고 계곡의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산과 들에 막 새로 돋기 시작한 이파리들을 마음껏 뜯어먹는 일이었다. 그러나 겨울은 좀처럼 지나가지 않았다. 조금 따뜻한 기운이 돈다 싶어 굴 밖으로 머리를 조금 내밀면 이내 한풍이 휘몰아쳤다. 지난 해 첫눈이 내리기 시작한 이래로 내내 굴속에 갇혀 겨울잠만 자고 있기란 정말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었다. "아아, 언제 봄이 오려나?" "춥고 배고파서 못 살겠네."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 봄은 오겠지." 그들은 하루하루가 1 년 같았다. 겨우내 먹을 양식마저 곧 떨어질 것 같아 아끼고 또 아껴 먹었다. 땔거리마저 모자라 한밤중에 기온이 뚝 떨어져도 불을 지피지 않고 참고 견뎠다. 그러나 봄은 오지 않았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 누구와 살이라도 맞대고 사랑을 나누고 싶었지만 봄은 돌아올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함부로 굴 밖으로 나가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칫 잘못 굴 밖으로 나갔다가는 토끼 몰이 나온 마을 사람들이 산 위에서부터 몽둥이를 들고 몰아쳐 내려오면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잡혀 버릴 게 뻔한 일이었다. "하는 수 없구나. 참고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봄이 오겠지." 그들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다시 깊은 겨울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양달진 산비탈에 살던 토끼는 이따금 깨어나 건너편 응달진 산비탈을 바라보았다. 봄이 와서 눈이 녹았나 해서였다. 그러나 그곳엔 눈이 허옇게 쌓여 있었다.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게로군. 깨어날 때가 아직 멀었어." 그는 다시 겨울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얼마 안 가서 다시 눈을 뜨고 건너편 응달진 산비탈을 바라보았다. 눈은 여전히 녹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어머나! 아직도 눈이 녹지 않았네. 눈이 다 녹으면 나가야지." 그는 아직 겨울잠에서 깨어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는 이러기를 몇 차례나 거듭했는지 모른다. 눈을 떠서 건너편 응달진 산비탈을 바라보면 언제나 눈은 녹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 토끼는 양달진 굴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굶어 죽고 말았다. 응달진 산비탈에 살던 토끼도 문득 겨울잠에서 깨어나 건너편 양달진 산비탈을 바라보았다. 볕바른 그곳엔 어느새 눈이 다 녹아 버리고 없었다. "아, 내가 잠든 사이에 벌써 봄이 왔구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이 왔구나!" 그는 얼른 굴 밖으로 뛰어나와 눈 녹은 양지쪽을 행해 힘껏 달려갔다. 그러나 바람은 살을 에는 듯 차가웠다. 그는 결국 굴속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찬바람 몰아치는 산 속에서 얼어죽고 말았다. 양달과 응달에 살던 두 토끼가 봄을 기다리다가 그만 둘 다 죽고 만 것이다. 대통령이 된 가시나무 민주주의를 해 보고 싶은 남해안 어느 섬에 나무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직선제 대통령을 뽑기로 의결하고, 서둘러 대통령 선거법을 정했다. 그리고 그 선거법에 따라 선거일을 공고하고 후보 등록을 받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무도 후보 등록을 하지 않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나무들은 다시 모여 문제점을 검토했다. 후보 자격 기준을 너무 까다롭게 정하지는 않았는지, 후보 등록 신청금을 너무 많이 책정한 것은 아니었는지 여러 가지 문제점을 검토, 보완해서 다시 후보 등록을 실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단 한 나무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나무가 없었다. 나무들은 다시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번에는 '대통령 추대 위원회'를 만들어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 중에서 한 나무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추대 위원장은 나무들 사이에서 가장 젊고 인기가 있는 사과나무가 맡았다. 사과나무는 먼저 가장 나이 많은 동백나무에게 찾아가 대통령이 돼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동백나무는 빨갛게 얼굴을 붉히고 손을 내저으면서 거듭거듭 사양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동백기름을 만드는 일만 해도 벅차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과나무는 다시 오동나무를 찾아갔다. 그러나 오동나무도 "사람들이 즐기는 거문고의 좋은 재료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에 마음이 바쁘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사과나무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심 대통령이 되고 싶어도 선뜻 나서기가 거북해서 다들 겸양의 미덕을 발휘라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러나 사과나무는 다시 용기를 내어 포도나무를 찾아갔다. "이웃 섬을 보십시오. 일찍이 민주주의를 꽃피워 우리보다 더 평화스럽게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루 속히 민주주의를 꽃피워 이웃 섬보다 더 잘 사는 섬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포도나무 역시 "사람들에게 맛있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는 일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사과나무는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하는 나무들의 그런 태도가 정말 싫었다. 나무들은 오직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사과나무는 자신이 인간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열매를 맺는 일이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삶을 열심히 성실하게 산 하나의 결과라는 데에 보다 더 큰 의미를 두었다. 사과나무는 마지막으로 가시나무를 찾아갔다. 가시나무는 사과나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대통령 직을 수락했다. "그래 내가 너희들의 대통령이 되어 주마. 너희들은 다들 내 그늘에 와서 마음껏 먹고 쉬도록 하여라." 가시나무는 거들먹거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사과나무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가시나무가 독재자가 될까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수락해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다른 나무들도 걱정이 되는 눈치였으나 다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사과나무의 그런 걱정은 적중되었다. 대통령이 된 가시나무는 자신의 분수를 알지 못했다. 자기가 가장 잘나서 대통령이 된 줄 알고 왕성한 번식력만을 자랑해 나갔다. 섬은 점점 가시나무 숲으로 뒤덮여 갔다. 포도원도 과수원도 다들 못 쓰게 되었다. 나중에는 가뭄으로 불이 나 섬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몽땅 다 불타 버리고 말았다. 시인과 장미 한 젊은 시인이 있었다. 그는 한 여인을 깊게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그 여인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든 삶은 오직 그녀를 사랑하기 위한 하나의 준비 과정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루하루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새로왔다. 풀잎을 스치는 바람도, 어린 나뭇가지에 어리는 햇살도, 푸른 하늘을 나는 작은 새도, 그녀를 사랑하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아름다움과 경이의 세계였다. 그는 비로소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가 진정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와 함께 하지 않는 혼자만의 삶이란 정말 무의미한 삶이라고 생각되었다. 어느 날, 그는 청혼을 하기 위해 붉은 장미꽃 몇 송이를 들고 그 여인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청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인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미안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이해해 주세요." 눈앞이 캄캄했다. 갑자기 천지가 뒤바뀌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끓여 준 커피도 채 들지 못하고 집을 나왔다. 그런데 그가 그녀의 집 대문을 막 나섰을 때였다. 여자가 창문 밖으로 장미꽃을 획 집어던졌다. "미안해요. 청혼의 의미로 주는 장미꽃은 받을 수가 없어요." 그는 엉겁결에 발 앞에 떨어진 장미꽃을 주웠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후, 그는 장미꽃을 몹시 싫어하게 되었다. 실연의 원인이 마치 장미에게 있었던 것처럼 꽃 중에서 장미꽃만은 극도로 싫어하는 병적인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는 장미를 볼 때마다 그 여자한테서 받은 마음의 상처가 되살아나서 싫었다. 그 여자를 잊으려고 노력하였으나 결코 잊을 수가 없어서 괴로웠다. 마음의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는 장미가 있는 곳은 어디든 피해 다녔다. 그러나 장미는 어디에든 있었다. 꽃집이나 이웃집 담벼락뿐 아니라 무심코 들른 레스토랑의 탁자 위에도 장미꽃은 피어 있었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하면 장미가 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만 골몰했다. 그의 소원은 이 세상의 모든 장미를 없애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연구해도 장미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문득 장미의 이름을 바꾸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언어학자를 찾아갔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장미라는 이름을 바꿀 수 있을까요?" 늙은 언어학자가 말했다. "그건 아주 간단합니다. 언중이 장미를 장미라고 부르지 않으면 됩니다." "그럼 언중들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글쎄요, 그건 언중들의 마음입니다. 학자인 우리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언어학자의 집을 나오면서 자신의 일생을 장미의 이름을 바꾸는 일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 우리가 장미라고 부르는 이름은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려져야 한다고 주장해 나갔다. 그러면서 열심히 장미의 부정적 이미지를 드러내는 시를 써서 발표했다. 언중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서 자신이 쓴 시를 들려주었다. 어느덧 많은 시간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젊은 시인이 늙은 시인이 되었고, 마침내 사람들은 장미를 장미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은 장미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다들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미의 이름이 바뀌어도 단 한 가지만은 변하지 않은 게 있었다. 그것은 장미의 향기였다. 금붕어의 죽음 서울 영희네 집 어항 속에 세 마리의 금붕어가 살고 있었다. 두 마리의 이름은 붉은 붕어이고, 나머지 한 마리의 이름은 검은툭눈금붕어였다. 붉은 붕어는 마음이 곱고 서로 형제처럼 잘 지냈으나, 검은툭눈금붕어는 마음이 사납고 욕심이 많아 툭하면 붉은붕어를 못 살게 굴었다. 붉은붕어의 소원은 어떻게 하면 검은툭눈붕어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으며, 검은툭눈금붕어의 소원은 어떻게 하면 이 좁은 어항에서 혼자 좀 넓고 편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붉은 붕어 한 마리가 뭘 잘못 먹었는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헤엄을 치다가 수초 사이에 꼬리가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는가 하면 물레방아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듯이 누워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하룻밤 사이에 그만 붉은 붕어 한 마리가 죽어 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수면 위로 배를 뒤집고 떠 있더니 어느새 어항 밑으로 깊게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나머지 한 마리 남은 붉은 붕어의 슬픔은 컸다. 좁은 어항 안에서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더니 결국 먼저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검은툭눈금붕어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하느님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생각에 시종 마음이 즐거웠다. 영희 엄마가 죽은 붉은 붕어를 땅에 묻어 주려고 어항에서 꺼내갈 때는 살며시 돌아서서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그는 나머지 한 마리 남은 붉은 붕어마저 하루빨리 죽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보다 많은 먹이를 먹을 수 있고, 보다 맑은 신선한 물과 공기를 마음껏 혼자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나머지 한 마리 붉은 붕어 죽지 않았다.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도 언제나 용기를 잃지 않고 행복하게 잘 지냈다. 검은툭눈금붕어는 속이 상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하고 밤낮 머리를 싸매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으나 적당한 때에 기회를 봐서 붉은 붕어 죽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검은툭눈금붕어는 호시탐탐 그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그 기회는 왔다. 영희네 식구들이 집을 비우고 모두 영희 이모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 버린 것이다. 그는 바로 그날 붉은 붕어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물론 승리는 그의 것이었다. 그는 승리감에 취해 하루 종일 노래를 불렀다. 먹이도, 물론 혼자 다 먹고 마셨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사흘쯤 지나자 어항의 물이 차차 탁해지기 시작했다. 죽은 붉은 붕어 몸이 썩기 시작한 것이다.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검은툭눈금붕어는 갈수록 숨쉬기가 곤란해져 갔다. 영희네 식구들이 1주일만에 부산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금붕어 두 마리가 다 함께 죽어 있었다. 집을 비우기 전에 물을 갈아주고 먹이도 알맞게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사람이 된 연탄재 함박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새해를 축복하는 서설이 내렸다고 다들 기뻐하면서 거리를 쏘다녔다. 아파트 단지 한 모퉁이에 가득 쌓여 있던 연탄재들도 기쁜 마음은 사람들과 똑같았다. 연탄 아궁이로 들어갔다가 희멀겋게 볼품없이 된 그들에게 함박눈이 하얀 옷을 입혀 준 것은 더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아이들은 눈발이 가늘어지자 너나없이 밖으로 나와 눈사람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눈 뭉치를 만들어 눈싸움을 하다가 나중에는 누가 가장 빨리, 가장 큰 눈사람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시합을 벌였다. 눈은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습기가 없는 탓인지 잘 뭉쳐지지 않았다. 그러자 어떤 아이 하나가 아파트 뒤뜰에 쌓인 연탄재 하나를 집어들었다. 난생 처음 눈을 보고 마냥 신기해하기만 하던 연탄재는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그 아이에게 끌려갔다. 아이는 연탄재를 눈 위에 놓고 굴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눈 뭉치가 금방 다른 아이들의 눈 뭉치보다 더 크게 되었다. 아이는 신이 났다. 아무도 자기를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 기뻤다. 연탄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탄으로 태어나 결국 여기에서 죽나 보다 하는 절망감에 눈물이 났다. 그러나 차차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비록 눈 뭉치 속에 갇혀 갑갑하기는 했으나 그리 싫지는 않았다. 연탄재의 신분에서 눈사람의 신분으로 바뀐다는 사실이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말로 스스로 운명을 바꾸어 볼 때라는 생각도 들었다. 연탄재는 이리저리 굴려질 때마다 온몸에 멍이 들었으나 조금도 싫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눈덩이가 커지면 커질수록 중압감에 못 견뎌 연방 입 밖으로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으나 아프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신분이 상승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고통쯤은 참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눈사람을 가장 빨리, 가장 크게 만든 아이는 연탄재를 굴려 눈사람을 만든 아이였다. 아이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느새 아이의 아버지가 카메라를 가지고 나타나 기념사진까지 찍어 주었다. 연탄재는 이제 자신은 연탄재가 아니라 눈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영원히 순결한 눈사람으로 살게 해준 아이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예전의 자기처럼 아파트 담벼락에 더덕더덕 추한 모습으로 쌓여 있는 연탄재들에게는 연민의 정을 품었다. 다음날, 눈이 그치고 햇살은 빛났다. 또 그 다음날에도 햇살은 내리쬐었다. 자연히 햇살에 눈사람이 녹아 내렸다. 연탄재는 예전보다 더 흉한 몰골을 하고 다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햇살에 눈사람이 녹는다는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었던 연탄재는 그만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잘려진 바지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한 늦가을 밤.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하는 이씨는 그날 일을 끝내고 함바집에 들러 밤늦게까지 막걸리를 한 잔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노점상에서 작업복 바지를 하나 샀다. 낮에 공사장에서 바짓가랑이가 못에 걸려 길게 찢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내일 일할 생각은 안하고 왜 이렇게 늦었어요?" 대문을 열어준 이씨의 아내가 피곤해 죽겠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는 것조차 잊은 채 하품을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울로 파출부 일을 나가는 그녀는 밤 10시만 넘으면 쏟아지는 잠을 잘 이기지 못했다. 이씨는 그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노모에게 인사를 하고 얼른 바지를 아내에게 내주었다. "여보, 나 오늘 작업복 바지가 찢어져서 새 바지를 하나 사 왔어. 내일 입고 갈 수 있도록 바짓단 좀 줄여 주지 그래." 그러자 이씨 아내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바짓단을 줄여 달라고 그래요? 우선 잠이나 좀 자요. 정말 피곤해 죽겠단 말이에요. 내일 다른 걸 입고 가면 되잖아요." "아, 참 그래, 그러지." 이씨는 아내가 몹시 피곤해 하는 것 같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도 피곤을 이기지 못해 씻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곧 곯아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씨의 아내는 잠을 자지 않고 남편이 사 온 바지를 집어들었다. 솜에 물이 배듯 온몸에 잠이 쏟아졌으나 아무래도 남편이 내일 새 바지를 입고 가는 게 좋겠다 싶어 애써 바짓단을 줄여 놓았다. 그 뒤 새벽 1시 무렵이었다. 노처녀인 이씨의 동생이 그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있다가 살짝 마루로 나와 오빠의 바짓단을 줄여 놓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또 새벽 5시, 이씨의 노모가 일어나 살그머니 아들의 바짓단을 줄여 놓고는 산에 약수를 뜨러 나갔다. 그날 아침, 이씨의 아내가 이씨한테 그 작업복 바지를 내놓았다. "오늘 이 바지 입고 가세요. 어젯밤 당신이 곯아떨어지고 난 뒤에 내가 바짓단을 줄여 놓았단 말이에요." "야아! 역시 당신이야." 이씨는 어머니라도 볼세라 재빨리 아내의 뺨에 살짝 키스를 했다. 그리고 바짓가랑이 속으로 얼른 다리를 집어넣었다. 그 바지는 이씨의 복숭아뼈 위에까지 바짓단이 성큼 올라와 있었다. 유씨 부인의 사랑 천성이 어질고 생각이 깊은 유씨 부인이 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쇠고기 한 근을 사 오라고 계집종 꽃분이를 저잣거리로 내보냈다. 그런데 꽃분이가 사 온 고기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빛깔이 지나치게 검고 썩은 내가 났다. 유씨 부인이 그 고깃덩어리를 찬찬히 살펴보았더니 그것은 분명히 상한 고기였다. 부인은 다시 꽃분이를 불렀다. "꽃분아, 네가 지금 다녀온 푸줏간에 고기가 얼마나 남아 있더냐?"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부인은 곧 안방으로 들어가 급한 일이 있을 때 쓰려고 소중히 간직해 두었던 돈을 모조리 꺼내 왔다. 그리고 그 돈을 모두 꽃분이에게 주었다. "꽃분아, 이 돈을 가지고 가서 그 고기를 몽땅 다 사 오너라. 너 혼자서는 무거워서 못 가져올 테니 행랑아범을 데리고 가거라." "아니, 마님, 그 많은 고기를 다 어디다 쓰시려고요?" "그건 네가 걱정할 바가 아니다. 빨리 다녀오기나 하거라." 얼마 후, 꽃분이와 행랑아범이 거의 한 짐이나 되는 쇠고기를 지게에 지고 돌아왔다. "수고했다. 사람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뒤뜰 한 구석에 구덩이를 깊게 파고 고기를 전부 그곳에다 묻어라." 꽃분이와 행랑아범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꽃분이는 마님이 무슨 까닭으로 그런 분부를 내리시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님, 왜 아까운 고기를 모두 파묻으라고 하십니까?" "그건 상했기 때문이다." "그런 줄 아시면서도 왜 많은 돈을 들여 상한 고기를 사 오라고 하셨습니까?" "꽃분아,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 고기를 모르고 사 먹는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리고 천상 그 고기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푸줏간 주인은 또 어떻게 되겠느냐. 살림이 넉넉지 못할 게 뻔한 푸줏간 주인이 그 많은 고기를 버리게 되면 손해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니지 않겠느냐. 그리고 마음 또한 얼마나 상심이 되겠느냐. 그래서 내가 모두 사서 땅에 묻으려 한 것이다." 우물과의 대화 물동이 하나가 우물에 가서 물을 가득 채운 뒤 우물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물을 길으러 오는 일이 미안해서 은근히 물동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을 가져가지만 했을 뿐, 내가 당신에게 해 드린 것은 아무도 없군요. 내일부터는 매일 오지 않고 하루씩 걸러서 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주저하지 마시고 찾아오세요. 나는 당신이 내게 오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다. 나는 늘 당신 것을 가져가기만 할뿐인 걸요. 다음부터는 나를 반쯤만 채워 가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매일 나를 찾아 주시는 것이 곧 당신이 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내가 자주 물길으러 오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하하, 정말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내게 오는 수많은 물동이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정말 마음이 좋고 관대하시군요. 당신은 당신을 찾는 다른 모든 물동이들에게도 이렇게 내게 대하듯이 하시나요?" "그렇습니다. 나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합니다. 차별하지도 않고 거절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마를 때도 그렇게 하나요." "나는 결코 마르지 않습니다. 항상 차고 넘치고 있어서 내게 오는 모든 물동이들을 늘 찰랑찰랑 채워 줍니다." "하긴 그렇군요. 아직 당신이 마른 걸 본 적이 없군요." "나는 나를 찾는 물동이들을 참으로 사랑한답니다. 내가 만일 물동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마르지 않는 건 바로 물동이 당신들 때문입니다." 그때 머리에 또아리를 얹은 아주머니 한 분이 머리 위에 물동이를 얹었다. 물동이는 급히 우물에게 눈인사를 하고 우물가를 떠났다. 우물은 멀리 굽은 논두렁길을 가는 물동이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우물 속에 달빛이 비칠 때까지. 산울림 사소한 일로 형이 동생과 싸웠다. 그걸 보고 어머니가 형을 야단쳤다. 어린 동생을 귀여워해 주지는 못할망정 때리기는 왜 때리느냐고 나무랐다. 분을 참지 못한 형이 집 뒷산에 올라 "나는 너를 미워한다."고 소리쳤다. 앞산에서도 "나는 너를 미워한다."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한테 말했다. "엄마, 산너머에서 누군가가 내게 나는 너를 미워한다고 소리 지르는 아이가 있어요."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말이야. 다시 산에 올라가서 이번에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한번 소릴 질러 봐." 아이는 다시 뒷산으로 올라가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소리쳤다. 앞산 너머에서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는 기뻤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자꾸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소리쳤다.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한테도 고민이 있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 사는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다 찾아다녀야 하는 일이 늘 고민이었다. 사람들마다 문제없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하느님은 단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이 항상 사랑의 기쁨과 평화 속에서 살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바람일 뿐 에덴 동산을 떠난 사람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늘 사랑보다 증오를 가지고 살았다. 삶보다는 죽음이, 행복보다는 불행이, 화해보다는 분열이, 평화보다는 전쟁이 늘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보다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고통에 휩싸이는 일이 더 많았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을 그냥 그대로 못 본 척하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처음 인간을 창조할 때 지녔던 사랑과 평화의 마음을 가지고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병들어 아픈 사람은 아픈 데를 어루만져 주어야 했으며,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자에게는 그 눈물을 닦아주어야만 했으며, 쓸쓸하고 외로워하는 자에게는 그 쓸쓸함과 외로움을 달래 주어야 했다. 그리고 분노에 들떠 잠 못 이루는 자가 있으면 새벽이 올 때까지 그와 함께 밤을 지새 주어야만 했다. 하느님은 하루하루가 정말 바쁘기 그지없었다. 아무 불평 불만이 없도록 그 많은 사람들을 골고루 다 찾아다니기에는 하루해가 너무 짧았다. 하느님은 곰곰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내 대신 사랑을 골고루 나누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찾아갈 수 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하느님은 "맞아, 바로 그거야!"하고 무릎을 탁 쳤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바로 어머니를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누구나 다 한 사람씩 어머니를 갖게 되었다. 낙타의 모성애 세 사람의 상인이 낙타를 타고 사막을 가고 있었다. 그들이 집을 떠나 사막을 걷기 시작한 지는 이미 두 달째였다. 그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넉넉하게 준비했던 물과 음식조차 바닥난 지 오래였다. 그들은 갈수록 갈증과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늘 다니던 길이었건만 어디가 어디인지 방향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다. 가도 가도 모래언덕만 나올 뿐 길을 잃은 지도 이미 오래였다. 그들은 차차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머지않아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아시스를 찾는 길뿐이었다. 물이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하면 곧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오아시스가 보여 겨우 달려가 보니 한낱 신기루 현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 중 가장 나이 어린 셋째 대상이 낙타의 등에 앉은 채로 정신을 잃었다. 이어 곧 나머지 두 사람도 정신을 잃었다. 태양 빛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들은 그렇게 낙타 등에 실린 채 뜨거운 사막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나 신은 그들의 편이었다. 신은 그들을 그대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이 낙타 등에 실려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낙타로 하여금 그들을 물가로 인도해 주었다. 그들은 곧 원기를 회복했다. 그러나 신은 완전히 그들을 돕지는 않았다. 셋째 대상이 하룻밤 열에 들떠 앓다가 그만 죽고 만 것이다. 나머지 두 대상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사막의 모래 속에 묻었다. "이제 동생의 무덤을 찾을 길이 없겠군요." 둘째 대상이 눈물을 흘리며 더욱 슬퍼했다. 그러자 첫째 대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낙타 새끼를 죽여 동생과 같이 묻고 떠나자." "낙타가 우리를 살렸는데, 어떻게 그 새끼를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둘째 대상은 첫째 대상의 제의를 반대했다. 그러나 첫째 대상은 둘째 대상의 말을 묵살하고 낙타 새끼를 죽였다. 어미 낙타 보는 앞에서 낙타 새끼를 죽여 셋째 대상과 함께 묻었다. 그리고 멀리 사막의 언덕을 바라보며 말했다. "낙타는 자기 새끼가 죽어 사막에 묻히면 오래도록 그 장소를 기억한다. 우리 대상들 가운데 누가 죽어 사막에 묻을 때는 낙타 새끼를 죽여 함께 묻는다. 나중에 어미 낙타를 데려오면 그 무덤을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낙타는 자기 새끼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
첫댓글 일겠습니다...좋은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