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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 아내가족이라는 ‘제도’를 벗다 | |
⑨ 임상수 <바람난 가족>: 당신, 아웃이야!
1. 이건창(1852~1898)의 문집을 보면 젊어 과수로 살던 충청도의 어느 이씨 부인이 스스로 자신의 유방을 잘라내어 마을의 무뢰배들을 경계하고 일부종사의 절개를 지킨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애너벨 청(Annabel Chong)은 <애너벨 청 스토리>(1999)에서 251명의 남자들과 연속적으로 섹스를 벌이는 퍼포먼스-다큐를 찍으면서 “여성이 성욕을 표현하고 그 결정권을 갖는다면 어떤 형식이든 문제될 게 없다”는 취지의 발명을 합니다. 두 여인은 공히 자신의 육체를 도구적으로 사용합니다. 전자의 경우 그 행위는 남자를 향해서 남자를 위해서 남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후자는 여자를 향해서 여자를 위해서 (그러나 실은) 남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자들의 행위는 급격히 바뀌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 행위를 작동하게 하는 틀은 여전히 남성들의 세속이라는 말이지요. 반항과 탈주의 (여)성적 욕망이 기획되고 표출되는 기회와 방식이 얹혀 있는 지점과 지형을 살피지 못하는 한, 남성주의 체계 속에서 지속가능한 불화의 생산성은 없습니다. 한편 쾌락과 진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에서 이씨 부인과 에너벨 청은 진자(振子) 운동의 양 끝 점을 가리킵니다. 호정도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지만 그러나 아직 그 행위는 그저 자기 자신만을 가리킬 뿐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쾌락은 진리와 전혀 무관합니다. 체계 안팎의 구심이나 원심을 가리키는 신호가 될 수 없는 호정은 여전히 바람일 뿐입니다. 2. 다음주에는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를 살펴보겠습니다.
남성주의 가족 안에서 여성의 반란이 성해방의 형식을 띤다는 사실은 더 이상 새롭지 않지만 그 반란조차 체계 속에서 되먹임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호정은 기존의 제도를 온존시키는 데로 귀결하는 무능한 불화에는 관심이 없다. 그녀는 몸을 던져 다른 생산성을 꿈꾸는 것일까.
가족은 자연적인 것도 더구나 필연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임상수의 <바람난 가족>은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처럼 현실적이다. 가족제도를 철저하게 세속화한 <가족의 탄생>은 그 세속적 어긋남의 신호를 “너 나한테 왜 그래?/ 넌 나한테 왜 그러는데?”와 같은 문장 속에 집결시킨다. 그들은 불화하면서 조율하고 갈등하면서도 화해의 씨앗을 뿌렸던 것이다. 어쨌든 그들의 싸움은 때늦은 깨우침에 대한 안타까움과 겹친다. 그러나 <바람난 가족>은 가능한 변화와 조절을 염원하거나 기대하는 <가족의 탄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들이 불화하는 풍경은 시쳇말로 ‘쿨’해 보인다. 그 불화는 단지 가족이라는 제도적 틀 속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불화, 그러므로 결코 기존의 그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능한 불화가 아니다. (이 무능한 불화란, 가령 윤종빈의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고참이자 친구인 태정의 존재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승영의 항의가 결국은 불모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연상하면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바람난 가족이 부린 불화의 생산성이 영화 속에 충분히 묘사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제도적 틀에 응석을 부리는 불화의 종류를 벗어났다는 점에서만큼은 분명 새롭다. 그렇기에 <가족의 탄생>이 “너 나한테 왜 그래?”라는 화두 속에서 움직였다면 <바람난 가족>의 화두는 앞으로 잘하겠다는 남편을 향해서 던지는 호정의 ‘쿨’한 한마디에 압축되어 있다: “당신, 아웃이야!”
그런데 도덕이 당대의 제도와 결합한 현실적 힘이라는 사실 속에 이데올로기는 서식한다. 당대에 ‘눈치보기’를 거부했던 니체와 같은 미래인들이 도덕의 저편과 선악을 넘어선 지경을 ‘눈치 없이’ 떠벌리는 것은 그러므로 넉넉히 이해할 만도 하다. 일상적으로 현실의 제도를 인준하고 좇게 만드는 최종심급의 장치는 대체로 도덕이므로, 적절한 제도로써 이 도덕을 선점하고 전유할 수 있는 기술과 인력은 당대를 지배하려는 세력에게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숱한 이데올로기 비판가들이 국가와 가족 사이의 제도적 공모를 경계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종교나 국가도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가족을 잡아놓아야 하며, 마찬가지로 시장의 일차 타깃도 늘 가족인 것이다. 밀레트(K. Millett)에서 알튀세르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지적하듯이 적절하게 순치된 가족은 국가체제의 이데올로기적 단말기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제도가 된다. 그 제도를 감시 감독하는 원격의 장치가 곧 당대의 도덕이며, 많은 인류학자들과 정신분석학자들이 입을 모으듯 그 도덕의 바닥에는 성도덕(성을 분배하고 배치하는 서열)이 자리한다. <바람난 가족>은 바로 그 제목처럼 성을 분배하고 배치하는 서열이 바뀌어가는 풍경과 그 사정을 잘 드러낸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까지는 우리같이 극히 도덕적인(?) 사회에서는 거의 정상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그 남편에 대처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처리하는 아내의 태도에는 뭔가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 아내는 조루(早漏)한 남편 곁에서 자위를 하고, 이웃집의 고딩에게 섹스를 가르치고, 바람기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아웃’(out)을 선언한다. 앞서 말한 대로, 아내는 기존의 제도적 틀을 온존시키는 데로 귀결하는 무능한 불화에는 관심이 없다. 단지 기존의 제도를 전제해서만 가능해지는 불화, “그러므로 결코 기존의 그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능한 불화”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기존 제도와의 소모적 불화를 넘어 다른 생산성을 꿈꾸는 것일까? 그래서인가, 영화 말미에서 남편이 “잘할게!”라고 다가들자 아내는 “이 애기, 당신 애기 아니야!”라고 내뱉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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