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초가 되니 꾼의 밭에도 콩꽃이 만발했다. 꽃이 너무 작아 만발했다는 표현이 부적절하긴 했지만 꾼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풀과 어울려 살면서도 흰색 작은 꽃들을 달고 있는 녀석들을 보면 신기했다.
<콩심은 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난다>
꾼이 어려을 적 동네어른들이 새마을 운동으로 퇴비베고 부역하는 시절이 있었다. 부역이 끝난 후 동넷분들이 둘러앉으면 넓었던 집이 좁아보였다. 어린 꾼은 어른들 막걸리 자시는 옆에서 누렇게 바랜 달력에 적힌 <콩심은데 콩나고>를 읽었다. 열 몇 번을 읽었을 때 까무룩하게 잠이 들었던가 보다.
“이 눔의 자식 또 오줌쌌어. 다 큰 놈이.”
엄마의 호통소리에 잠깨었을 때 시끌벅적한 어른들은 없고 엉덩이밑 이불이 뜨듯하고 축축했다.
콩밭에는 바랭이와 피, 별꽃종류들이 우거져 있었고 언제 찾아왔는지 모를 여러 가지 벌레들이 시끌벅적했다. 메뚜기, 여치, 방아깨비, 사마귀, 거미줄... 그 외에도 몸을 완전히 접었다가 펴며 다니는 녹색 애벌레가 있는데 그놈 이름이 뭐더라?
<이 놈들도 무슨 부역나온 거겠지?>
부역나온 것들을 보던 꾼은 갑자기 똥이 마려웠다. 밭 한가운데서 내갈긴들 지나가는 사람없는 고즈넉한 곳에서 흉볼사람 없겠으나 부역꾼들에게 튀는 것이 미안하여 밭둑으로 걸어가 모래톱이 쌓인 곳에 엉거주춤 앉아서 볼일을 보았다.
모래톱 앞에 늘어진 버드나무에도 개미들이 줄곧 오르내리고 있었고 사마귀 두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동생에게 500만원을 빌려주어야 하는데 마눌에게 뭐라고 얘기하나?>
소소한 이야기는 아내에게 이야기를 잘하는 편인데 돈이야기는 잘하지 못했다. 결혼 후 아내몰래 빚보증 섰다가 수천만원 날려버린 후에 한 아내의 이야기가 커다란 연이 날아가지 못하게 하는 굵은 말뚝으로 마음에 박혀 있었다.
“이제부터는 부모든 형제든 빚보증은 없어요.”
스물다섯병이었나? 일주일 전 동생과 마셨던 맥주의 숙취냄새가 올라오는 듯 했다. 그 놈의 냄새 정말 지겨워. 맥주는 시원하게 한두잔 마셔야지 그것으로 취해 놓으면 숙취가 삼일은 갔다. 끄윽 트림할 때는 지겨운 맥주냄새가 올라왔다.
공상에 잡혀있던 꾼이 버드나무를 보았을 때였다.
큰 사마귀가 작은 사마귀 앞쪽을 찍어 눌렀다. 빠지직, 분명히 꾼의 귀에 그런 소리가 들렸다. 미물들끼리 내는 소린데도 꾼의 귀에는 크게 들렸다. 큰 놈이 작은 놈의 머리를 깨무는 소리였다. 그것은 한순간이었다. 앞쪽을 찍어누르는 동작과 머리를 깨무는 동작이 연결되어 일어난 것 같았다. 아니 거의 한꺼번에 일어난 것 같기도 했다. 머리를 물린 작은 놈은 격렬하던 몸짓이 파르르 떨리더니 고장난 로봇모양으로 서서히 정지했다. 작은 놈의 머리를 베어먹고 몸통과 다리를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다고 했다. 수컷이 암컷과 짝짓기 후 제때 피하지 못하면 잡아먹힌다고 하던데 아마도 짝짓기가 끝나면 수컷이 너무도 홀망하여 암컷에게 먹혔을까? 암컷에게 잡아먹혔지만 생식을 끝낸 수컷이 더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으니 차라리 암컷에게 흡수되어 2세를 키우는 양분이 되라는 자연의 섭리겠지.
<버리자. 동생이든 아내든 머리 아프게 하는 생각들은 그냥 버려>
꾼은 자신의 머리에게 고민스런 생각을 지워버리라고 명령했다. 잡아먹혀 그들의 양분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누구 때문에 골치아픈 문제는 모두 삭제해 버리고 싶었다.
풀은 대단했다. 그놈의 여뀌.
3천평의 산밑밭을 동생이 할머니 일꾼들을 데리고 풀을 맨지 한달 반만에 찾은 콩밭은 온통 풀밭이었다. 밭을 맬 때 제법 깨끗하게 김맸는데 비가 내리는 장마철이 찾아오니 놈들이 다시 콩밭을 모두 덮어버렸다. 콩보다 40일을 늦게 출발했는데도 풀들은 잘 자랐다. 콩꽃이 필 때 놈들도 붉은 이삭꽃을 피웠고 콩꼬투리가 달리는 시기에도 그들은 콩보다 키를 더 키워 열심히 씨를 만들어냈다.
<무비닐, 무경운 농사법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 여뀌 한 종류만 해도 이렇게 대단한데.>
“형 풀감상 그만 해. 노린재가 벌써 많이 생겼네. 빨리 약 쳐주어야겠어.”
“뭐 노린재? 내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저기 날아간다. 저거 안 보여?”
어디어디 허둥지둥 동생의 눈에는 녀석의 정체가 보이는 모양인데 꾼에게는 뭔가 잽싸게 날아다니는 것만 보았지 실체확인을 하지 못하니 허둥대기만 댔다.
동생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온 몸이 누렇다. 머리, 날개, 몸통부분이 개미처럼 날씬했고 길이는 3센티정도 되었다. 살짝 건드렸더니 녀석이 불쑥 날아 꾼에게 덮쳐왔다.
"어쿠."
돌연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하 조그만 벌레에게 놀라다니 하하하하."
와하하하하하하 에헤헤헤헤헤
동생의 웃음과 머쓱해진 꾼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오랫만에 들어보는 동생의 큰 웃음소리였다.
“다음 주에 약을 쳐야겠어. X삼이라는 약인데 친환경살충제가 있어. 형은 분무기 줄만 잡아주면 돼.”
“그래? 내가 특별히 제조한 핵폭탄이 따로 있어. 자리공뿌리와 마늘, 목초액 숙성액이 있는데 한번 실험해 보아야겠다. 커피가루와 식용유로 만든 난황액을 치면 벌레들이 잘 죽는다고 하니 다음주에 만들어 올게.>
“X삼이만 치면 웬만한 충이 다 해결되는데 형은 왜 또 다른 방법을 찾아?”
“네가 치는 약제는 친환경이긴 하지만 너무 비싸잖아. 농사짓는데 값만 잘 받으면 뭐하니? 차떼고 포떼고 남는 게 뭐냐구. 일단 내가 제조하는 핵폭탄 실험 좀 해보자.”
“그래? 그럼 한번 만들어 와봐.”
동생이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꾼이 왜 또 이러나. 동생이 하자는 대로 할 것이지. 초보 친환경농부 꾼의 이야기 앞으로도 많은 성원바랍니다.
21부에 계속합니다.
첫댓글 개미허리 노른재~`~징한놈.
나쁜 넘, 무서운 넘!!!!
ㅋ
작년에 처음으로 콩조금 심었을때 이벌레가 많이있길래 갑짜기 뭔벌랜가 했다 이벌래는 오줌에도 잘반응한다 망에다 오징어나 멸치넣어 어항처럼 만들면 잘 잡힌다던데
그런 방법도 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