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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陶淵明, 365~427 (62세))
◈ 도연명(陶淵明, 365~427 (62세)) 이름은 잠(潛).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연명은 자이다.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 劉宋이라고도 함) 초기에 걸쳐 생존했다.
당나라 이후 남북조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동진 시대 지방 하급 관리로 관직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일평생 은둔하며 시를 지었다.
술의 성인으로 불리며, 전원시인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대표작으로는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도화원기(桃花原記)', '귀거래사(歸去來辭)' 등이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시인 중에는 술을 사랑했던 시인이 많다.
술을 좋아한다는 데서 유래한 별명도 부지기수다.
이백(李白)은 술의 신선(神仙), 소식(蘇軾)은 술의 친구, 육방옹(陸放翁)은 술 미치광이,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유령(劉伶)은 술의 귀신으로 불린다.
마지막으로 술로 평가된 시인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의 대표적 시인 도연명으로, 그는 술의 성인(聖人)으로 표현된다.
그는 술을 열렬히 칭송했는데 그가 남긴 약 130여 수의 시 중 절반 정도에는 술에 관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도연명은 중국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은둔자, 전원시인(田園詩人)의 최고로 꼽히는 인물이다.
365년 강서성 심양(潯陽)에서 태어난 그는 본명이 잠(潛), 자가 원량(元亮) 또는 연명(淵明)이다.
그의 선조 도간(陶侃)은 동진 시대 초기 공신이었지만, 문벌귀족이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귀족 계급으로 신분이 상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부친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방의 하급 관리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도연명이 열두 살 때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도연명은 집안의 농사일을 거들며 학문을 익혔다.
농사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웠던 도연명은 집안과 노모를 돌보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출사했고, 강주 제주(祭酒), 진군참군, 건위참군 등의 지방 하급 관리를 지냈다.
하지만 그의 관직 생활은 대부분 일 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그의 자유로운 성품이 관리 생활에 맞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관리 사회의 혼탁함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관직 생활을 꾸준히 하지 못한 덕에 도연명의 가난은 계속되었다.
그의 곤궁한 생활을 보다 못한 친척이 그를 팽택현(彭澤縣)의 현령으로 추천했고, 405년 그는 팽택령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팽택령에서의 관직 생활도 약 80여 일 만으로 끝을 맺었다.
'송서(宋書)'의 '도연명 전기'에는 이와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도연명이 팽택령으로 부임한 그해 겨울에 상급 기관의 감찰관 독우(督郵)가 팽택현을 시찰하러 나왔다.
현사(縣史)가 급히 달려와 의관을 갖추고 맞이할 것을 재촉하자 문득 도연명은 그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도연명은 "내 어찌 다섯 말의 쌀 때문에 시골뜨기 아이에게 허리를 굽힌단 말인가!(吾不能爲五斗米折腰(오불능위오두미절요))"라고 탄식하며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도연명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은거에 대한 염원을 밝혔다.
그는 작품 서문에서 시집간 여동생의 죽음으로 관직을 버린다고 했지만,
"돌아가자! 전원이 황폐해지려고 하는데 어찌 아니 돌아갈소냐(歸去來兮 田園將蕪 胡不歸(귀거래혜 전원장무 호불귀)."라는 문구로 은둔을 선언했다.
'귀거래사(歸去來辭)'는 모두 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장에는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 관직 생활을 그만두고 귀향하게 된 동기와 상황이 서술되어 있다.
두 번째 장에는 집으로 돌아온 후 비록 비좁은 공간이지만 벼슬살이를 할 때처럼 마음 쓸 일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술도 마시고 정원도 산책하는 등의 생활이 그려져 있다.
세 번째 장은 혼탁한 관직 생활에 다시는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고 거문고와 독서를 즐기는 외에, 농사도 지으며 가끔 수레를 타고 산길을 달리거나 배를 저어 깊은 계곡을 찾아가는 등 전원생활에 대한 감흥을 담았다.
마지막 네 번째 장은 짧은 인생의 여정에서 벼슬을 하거나 그만두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어차피 신선이 되지 못할 바에는 가끔 밭에 나가 김매고, 언덕에 올라 크게 노래 부르고, 맑은 물가에 나가 시를 읊는 등 자연에 순응하며 하늘의 뜻에 따라 소박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도연명은 다시 저작랑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도연명은 이후 20여 년간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산수와 시와 술을 벗 삼아 전원생활을 했다.
은거는 개인적인 성향과 현실에 대한 소극적 도피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동진(東晉, 317~420) 왕조에 대한 충성심과 송 왕조에 대한 저항이 내포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도연명이 은둔 생활을 시작할 무렵 동진 왕조는 멸망의 기운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진 시대의 혼란은 훨씬 전인 4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다.
347년에는 명제의 사위인 환온(桓溫, 312~373)이 반란을 일으켰고, 402년에는 손은(孫恩, ?~402)이 오두미도(五斗米道: 도교 교파 가운데 하나) 교단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환온의 아들 환현(桓玄, 369~404)이 반란 진압을 핑계로 제위에 올랐으나, 장군 유유(劉裕, 363~422, 남조 시대 송나라의 건국자 고조, 재위: 420~422)가 이 두 난을 진압하고 420년에 남조 송나라를 세웠다.
도연명이 은둔한 지 15년이 지난 해였다.
421년 도연명은 송나라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농사에만 전념했다.
한때 그는 생활이 궁핍하다 못해 걸식 행각까지 할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생활은 그의 사상에 변화를 가져왔다.
도연명은 백성들이 빈곤한 원인을 세상의 혼란스러움에서 찾았고, 더 나아가 수탈과 억압이 없는 이상 세계를 꿈꾸게 되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原記)'는 이런 사상적 변화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도화원기(桃花原記)'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내용은 한 어부가 길을 잃고 헤매다 도화원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한다.
도화원에서 사람들은 외부 세계의 흥망성쇠를 모른 채 유유자적하고 태평한 나날을 보낸다.
어부는 도화원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지만 아쉬운 이별을 하고 돌아왔다.
그 후 태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도화원을 찾아 나섰지만 끝내 찾아내는 사람이 없었다는 내용이다.
'도화원기'는 도피하고 싶다는 도연명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유의 왕권 교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도연명은 현실에 실망할 때마다 술로 자신을 위로하고, 국화를 기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의 후기 작품에는 국화를 읊은 시들이 많은데, '음주飮酒)' 중 특히 다섯 수가 뛰어나다.
❋ 도연명의 '음주(飮酒)' 20수 중 제5수
結廬在人境 (결려재인경) 오두막 지어 사람들과 더불어 사니
而無車馬喧 (이무거마훤) 수레 시끄럽게 찾아오는 사람 없네
問君何能爾 (문군하능이) 묻노니 그대는 어찌 그렇게 살 수 있는가?
心遠地自偏 (심원지자편) 마음이 벗어나니 땅도 저절로 한적해지네
采菊東籬下 (채국동리하)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따서
悠然見南山 (유연견남산) 유연하게 남산을 바라보노라.
山氣日夕佳 (산기일석가) 산 기운은 해질녘에 더욱 아름답고
飛鳥相與還 (비조상여환) 날던 새들도 무리 지어 돌아오네
此間有眞意 (차간유진의) 이러한 가운데 참다운 뜻 있으니
欲辯已忘言 (욕변이망언) 말하려다 도리어 말을 잊었네.
도연명은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마음껏 술을 마시지 못했는데, 이러한 그의 처지를 헤아려 종종 친구들이 술자리를 만들어 그를 초대했다고 한다.
그러면 그는 거리낌 없이 실컷 마시고 취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427년 그는 가난과 질병을 이기지 못하고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후세는 도연명의 삶에 대해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았다고 평하기도 하며, 이기적인 삶을 살았다고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솔하고, 담담하게 전원생활의 풍취를 담고 있는 그의 시는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그 또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원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도연명은 중국 역사상 거의 유일한 본격적인 은일시인(隱逸詩人, 隱逸: 속세를 떠나 숨어 지냄)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매우 높다.
그의 친구였던 안연지(顔延之, 384~456)의 '도징사뢰(陶徵士誄)'는 그의 고결한 인품을 칭찬한 것이었고, '송서' 은일전을 비롯한 각 정사(正史)에 있는 도연명의 전기와 양(梁)나라 소통(簫統, 501~531)의 '도연명전(陶淵明傳)' 등도 마찬가지였다.
또 이상하게도 화려한 남조 문학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궁체'(宮體)의 시종(詩宗)이었던 양나라의 간문제(簡文帝, 503~551)도 형인 소통과 마찬가지로 열렬한 도연명 숭배자였다.
도연명의 인품과 시문은 이미 육조시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양나라 강엄(江淹, 444~505)이 한(漢)부터 진송(晉宋)까지의 시인 30명의 시를 모방해서 지은 '잡체시(雜體詩)' 30수에서는 도연명을 조식(曹植)· 육기(陸機, 261~303) 등의 유명한 시인과 나란히 열거하고 있다.
같은 양나라 사람 종영(鍾嶸, 468~518)의 '시품(詩品)'에서도 도연명의 5언시에 중품(中品)의 품격을 매겨놓고 또 "고금 은일시인(隱逸詩人)의 으뜸"이라고 판정하고 있다.
그러나 특히 도연명을 중국 역사상 최고의 시인이라고까지 절찬하여 결정적으로 높이 평가한 사람은 북송(北宋)의 위대한 시인 소식(蘇軾, 1037~1101, 호는 東坡(동파))이었다.
이렇게 하여 은일의 성자(聖者), 세속을 초월한 대시인으로서의 이상적 도연명 상은 확립되었다.
◈ 귀거래사(歸去來辭)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
관직을 버리고 떠나면서 읊은 시로, 노장사상(老莊思想: 무위자연을 도덕의 표준으로 하고, 허무를 우주의 근원으로 삼는 노자와 장자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전원에서 자연과 함께 지내는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도연명은 중국 강주 출생으로, 뒤늦게 관리가 되어 십여 년을 봉직했으나 끝내 "어찌 오두미(五斗米: '쌀 다섯 말'의 뜻으로 얼마 안 되는 녹봉을 뜻)때문에 허리를 굽히겠느냐"라는 말을 남기고 관직을 그만두었다.
이후 남촌에 은둔하면서 문단과 교류했다.
줄거리
'귀거래사(歸去來辭)'는 도연명이 41살 때 마지막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가는 소회를 운문으로 쓴 작품이다.
초사체(楚辭體)의 형식을 따른 전문은 모두 240여 자(字)이며, 각운(脚韻)이 다른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귀거래혜(歸去來兮, 돌아가노라)"로 시작되는 첫째 장은 관리생활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읊었고, 둘째 장은 집에 도착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셋째 장은 고향에서의 생활과 그곳에서 느낀 철학을 담고 있으며, 마지막 장은 자연 속에서 자연의 섭리에 몸을 맡겨 살아가려 한다는 자신의 다짐과 소감을 드러내고 있다.
"귀거래혜"라는 감탄사가 중간에 반복되면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흐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초속(超俗: 세속의 일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함)의 은자(隱者: 세속을 벗어나 숨어사는 사람) 도연명이 시와 사랑했다는 사실은 훗날 중국문학과 버들과의 연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은 그의 자전(自傳)이다. '오류선생전'에서는 스스로의 전기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보고 읽으면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의 가공인물의 초상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도연명의 사후 사람들은 '오류선생전'을 도연명의 자서전이라고 생각해 왔다.
'오류선생전'은 겨우 170자 정도의 짧은 문장으로 전체를 '출신성분· 성명 / 성격 / 독서 / 음주 / 의식주 / 문장 / 죽음 / 이상(理想)의 요약' 등 여덟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다.
선생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또 그 성자(姓字)도 상세히 나와있지 않다.
집 주변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그것을 따서 호를 삼았다(先生不知何許人. 亦不祥其姓字. 宅邊有五柳樹, 固似爲號焉).
■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
- 도연명(陶淵明. 365~427 (62세)) -
先生 (선생)은 : 선생은
* 先生(선생) : 도연명이 자기 스스로를 가공적인 인물로 그려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한 것이다.
不知何許人 (부지하허인)이오 : 어디쯤의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 何許(하허) : 어디. 어느 곳.
亦不詳其姓字 (역부상기성자)나 : 그 성명과 자(字)도 자세하지 않다.
宅邊有五柳樹 (택변유오류수)하여 : 집 주변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었으니,
因以爲號焉 (인이위호언)이라 : 그것으로 호(號)를 삼았다.
閑靖少言 (한정소언)하며 : 한가롭고 조용하여 말이 적었으며,
* 閑靖(한정) : 한가하고 고요하다.
不慕榮利 (부모영리)하고 : 명예나 실리를 바라지 않았다.
好讀書 (호독서)하되 : 책읽기를 좋아했지만,
不求甚解 (불구심해)요 :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 不求甚解(불구심해) : 독서를 할 때 요지를 이해할 뿐 자구(字句)를 지나치게 따지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
每有意會 (매유의회)면 : 매번 뜻이 맞는 글이 있으면
便欣然忘食 (편흔연망식)이라 : 즐거워하시며, 밥 먹는 것도 잊곤 하셨다.
* 欣然(흔연) : 매우 즐거워함.
性嗜酒 (성기주)하되 : 성품이 술을 좋아하지만,
家貧不能常得 (가빈부능상득)하니 : 집이 가난하여 항상 즐기지는 못하였다.
親舊知其如此 (친구지기여차)하고 : 친구들이 이와 같은 처지를 알고는
或置酒而招之 (혹치주이초지)면 : 간혹 술을 준비하여 그를 부르면,
* 置酒(치주) : 술자리를 마련하다.
造飮輒盡 (조음첩진)하여 : 마시는 데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다 마셔버려
* 造飮(조음) : 술먹는 자리에 나가다.
* 輒盡(첩진) : 매번 있는 것. 모두를 다하다.
期在必醉 (기재필취)요 : 반드시 취하고야 말았다.
旣醉而退 (기취이퇴)하여 : 취한 뒤에는 물러나는 데 인색하지 않아,
曾不吝情去留 (증부린정거유)라 : 가고 머무름에 미련을 두지 않으시었다.
* 不吝情去留(불린정거류) : 떠나거나 머무르는 데에 미련을 두지 않음.
環堵蕭然 (환도소연)하여 : 방은 좁아 쓸쓸하고 조용하였으며,
* 環堵蕭然(환도소연) : 환(環)은 동서남북의 사방(四方). 도(堵)는 오판(五版), 판(版)은 일장(一丈). 따라서 사방 일장 약간 넘는 방. 정확히 말하면 사방의 길이를 합치면 오장(五丈)이 되는 방. 곧 작은 방을 뜻함.
* 蕭然(소연) : 쓸쓸하고 조용함.
不蔽風日 (부폐풍일)하고 : 바람과 햇빛을 가리지도 못하였다.
短褐穿結 (단갈천결)하며 : 짧은 베옷을 기워 입으시고,
* 短褐(단갈) : 갈(褐)은 베옷. 단갈(短褐)은 가난한 사람들이 입은 짧고 거칠게 짠 베옷.
簞瓢屢空 (단표누공)하되 : 밥그릇이 자주 비어도
* 簞瓢(단표) : 단(簞)은 대나 고리로 짠 바구니. 옛날에 가난한 사람들이 밥을 담아 먹었다.
표(瓢)는 표주박. 역시 가난한 사람들이 음료나 국을 담아 먹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기(飮食器)를 단표라고 통칭했다.
晏如也 (안여야)러라 : 태연하시었다.
* 晏如(안여) : 편안하다.
常著文章自娛 (상저문장자오)하여 : 항상 문장을 지어 스스로 즐기면서,
頗示己志 (파시기지)하고 : 자못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었다.
忘懷得失 (망회득실)하여 : 득실(得失)에 대한 생각을 버리시어,
以此自終 (이차자종)하니라 : 그러한 상태로 일생을 마치려 하시었다.
贊曰黔婁有言 (찬왈검루유언)하되 : 논평하시기를 검루의 말에
* 贊(찬) : 전기문(傳記文) 뒤에 붙여서 주인공을 칭찬하는 글.
* 黔婁(검루) : 춘추시대 제나라의 은사(隱士). 청렴결백하여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
그가 죽자, 그의 시체는 누더기가 걸쳐진 상태였고, 시체를 덮은 헝겊이 짧아 발이 다 드러났다.
문상을 간 증자(曾子)가 헝겊을 비스듬히 돌려서 손발을 덮으려하자, 검루의 처가 "고인께서는 바른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헝겊을 비뚤게 놓는 것은 사(邪)라 좋지 않습니다.
또 고인께서는 빈천을 겁내지 않으셨고, 부귀를 부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고 했다 한다.
不戚戚於貧賤 (부척척어빈천)하고 : "가난하고 천함을 근심하지 않으셨고,
* 戚戚(척척) :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것.
不汲汲於富貴 (부급급어부귀)라하니 : 부하고 귀한 것을 애쓰지 않으셨다."라고 말씀하셨다.
極其言 (극기언)이면 : 그 말씀을 잘 새겨보면
* 極其言(극기언) : 그 말의 뜻을 깊이 생각하면.
玆若人之儔乎 (자약인지주호)인저 : 이 사람 검루는 오류선생과 같은 무리일 것이다.
酣觴賦詩 (감상부시)하여 : 술을 즐기고 시를 지어
* 酣觴(감상) : 술잔을 돌려가며 실컷 마심.
以樂其志 (이락기지)하니 : 그 뜻을 즐기셨으니,
無懷氏之民歟 (무회씨지민여)아 : 무회씨의 백성인가?
* 無懷氏(무회씨) : 갈천씨(葛天氏)와 함께 중국 전설상 상고(上古)의 제왕(帝王). 무회씨는 도덕으로 세상을 다스려 당시의 백성들은 모두 사욕이 없고 편안했으며, 갈천씨 때는 교화(敎化)를 펴지 않아도 저절로 교화가 이루어져 천하가 태평했다 한다.
무회씨의 백성 또는 갈천씨의 백성이라는 것은 욕심 없이 순박한 사람들을 뜻한다.
葛天氏之民歟 (갈천씨지민여)아 : 갈천씨의 백성인가?
* 歟(여) : 어조사 여
* 해설(解說) : 이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은 탁전(託傳: 작가 자신의 일생을 가상의 인물에 가탁하여 서술한 글)으로 도연명이 자신을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고 스스로 호(號)하고 자신의 생활관과 인생관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글이다. 매우 해학적인 문체로 후세 전기체(傳記體)의 규범 중의 하나가 되었다.
◈ 桃花源記(도화원기)
흔히들 세상과 멀리 떨어진 별천지를 비유적으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 칭하는데, 중국의 후난성(湖南省)에는 실제로 '무릉'이나 '도원'과 같은 이름을 가진 지역이 있다.
창더시(常德市)의 타오위안현(桃源縣)과 장자제시(張家界市)의 우링위안(武陵源) 자연풍경구가 그것이다.
이밖에도 중국의 남방에서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자랑하는 지역이라면 대개 '세외도원(世外桃源)'과 같은 별칭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지명은 모두 도연명(陶淵明)의 유명한 산문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유래했다.
'도화원기'는 진(晉)나라 때 무릉의 한 어부가 복숭아꽃이 아름답게 핀 숲 속의 물길을 따라갔다가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온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도화원기'는 동양적 이상향(理想鄕)을 보여주는 문장으로 유명하며, 서양적 이상향을 보여주는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와 비교해 볼 때 한 가지 선명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서양의 이상향이 '어느 곳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유토피아'라는 말에서 나타나듯 실존하기 불가능한 완벽한 곳임에 비해, 동양의 이상향은 지금도 중국 어디에 있을 것만 같은 아주 소박한 곳이라는 점이다.
■ 도화원기(桃花源記) 줄거리- 중국 진대(晋代)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유기(遊記).
진(晉)나라 태원연간(太元年間: 376∼396), 무릉(武陵)이란 곳에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작은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홀연히 복숭아나무 숲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숲은 강의 양쪽 기슭 안쪽으로 수백 걸음에 걸쳐 이어져 있었고 잡목 하나 없었다.
향기로운 풀이 싱싱하고 아름다웠으며, 떨어지는 꽃잎이 어지러이 나부끼고 있었다.
어부는 무척 기이하게 여겨 다시 앞으로 나아갔고, 숲의 끝까지 가보고자 했다.
숲이 끝나는 곳은 강의 발원지였으며, 바로 그곳에 산이 하나 있었다.
산에는 작은 동굴이 있는데 마치 무슨 빛이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곧 배를 버려두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무척 좁아서 사람 한 명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시 수십 걸음을 더 나아가니 갑자기 환하게 탁 트이며 시야가 넓어졌다.
땅은 평탄하고 넓고 가옥들은 가지런하게 지어져 있었다(평화경(平和境)). 비옥한 밭, 아름다운 연못, 그리고 뽕나무와 대나무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남북과 동서로 난 밭두렁 길은 서로 교차하며 이어져 있었고,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며 씨를 뿌리고 농사짓고 있는데, 남녀가 입고 있는 옷이 모두 외지인이 입는 것과 같았다. 머리가 누렇게 변한 노인과 더벅머리를 한 어린아이가 함께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곳 사람 하나가 어부를 보고 깜짝 놀라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어부는 상세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어부를 집으로 초대했고, 술상을 차리고 닭을 잡아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였다.
마을에서는 어부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서, 모두 몰려와 이것저것 물었다.
마을 사람이 말하길 "선대 조상들이 진(秦)나라 때의 전란을 피해 처자와 고을 사람들을 데리고 세상과 격리된 이곳으로 왔고 다시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외부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지금이 어느 시대냐고 물었는데, 위(魏), 진(晉)은 물론 한(漢)나라가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부는 하나하나 자세하게 자기가 아는 것을 말해주었고, 마을 사람 모두 감탄하며 놀라워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어부를 자기 집에 초대하였고, 모두 술과 음식을 내어서 대접했다.
며칠간 머물다가 작별을 고하였는데,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말했다.
"외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어부는 그곳에서 나와 배를 찾았고, 곧 이전에 왔던 길을 따라 곳곳에 표시해 두었다.
그리고 군(郡)에 도착하자 태수를 찾아가 이와 같은 일이 있었노라고 알렸다.
태수는 곧장 사람을 파견하여 어부가 갔던 길을 따라가 이전에 표시해 둔 곳을 찾게 했다.
그러나 끝내 길을 잃어 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남양(南陽) 땅 류자기(劉子驥)는 고상한 선비인데 이 이야기를 듣자, 흔연히 찾아가 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곳을 찾지 못하였고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이후로 아무도 길을 묻는 이가 없었다.■ 도화원기(桃花源記) 원문 해석
晉太元中(진태원중), 武陵人捕魚爲業(무릉인포어위업)。
緣溪行(연계행), 忘路之遠近(망로지원근)。
忽逢桃花林(홀봉도화림), 夾岸數百步(협안수백보), 中無雜樹(중무잡수),
芳草鮮美(방초선미), 落英繽紛(낙영빈분)。
漁人甚異之(어인심이지), 復前行(부전행), 欲窮其林(욕궁기림)。
林盡水源(임진수원), 便得一山(변득일산), 山有小口(산유소구), 髣髴若有光(방불약유광)。
便捨船(변사선), 從口入(종구입)。
初極狹(초극협), 纔通人(재통인)。
復行數十步(부행수십보), 豁然開朗(활연개랑)。
동진(東晉) 태원(太元) 연간에, 무릉(武陵) 사람으로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배를 타고 시냇물을 따라 갔다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도 몰랐다.
홀연히 복숭아꽃 숲이 홀연히 나타났는데, 양쪽 강을 끼고 수백 보의 거리에 온통 복숭아나무뿐이며 다른 잡목은 하나도 없었으며, 향기로운 풀들이 싱싱하고 아름답게 자랐고, 복숭아 꽃잎이 펄펄 바람에 날려 떨어지고 있었다.
어부는 매우 의아하게 여기고 다시 앞으로 나가 그 복숭아 숲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 했다.
복숭아 숲은 강 상류에서 끝났고, 그곳에 산이 보였으며 산에는 작은 동굴이 있고 그 속으로 희미하게 마치 빛이 있는 것 같았다.
어부는 즉시 배에서 내려 동굴 속을 따라 들어갔다.
동굴은 처음에는 몹시 좁아 겨우 사람이 통과할 수 있었다.
다시 수십 보를 더 나가자 갑자기 탁 트이고 넓어졌다.
○ 晋太元中(진태원중) : 태원(太元)은 동진(東晋) 효무제(孝武帝)의 연호로 376년부터 397년까지 사용하였다.
○ 武陵(무릉) : 군명(郡名). 지금의 무릉산구(武陵山區) 혹은 호남상덕(湖南常德) 일대.
○ 緣(연) : ~에 따르다.
○ 落英(낙영) : 낙화(落花).
○ 繽紛(빈분) : 꽃잎이 휘날리는 모양.
○ 復(부) : 다시. 또.
○ 便(편) : 그래서.
○ 髣髴(방불) : 어렴풋하다.
○ 舍船(사선) : 배를 벗어나다.
○ 纔(재) : 才와 같다. 겨우. 조금.
○ 豁然開朗(활연개랑) : 확 트이다.
土地平曠(토지평광), 屋舍儼然(옥사엄연)。
有良田美池桑竹之屬(유량전미지상죽지속)。
阡陌交通(천맥교통), 雞犬相聞(계견상문)。
其中往來種作(기중왕래종작), 男女衣著(남녀의착), 悉如外人(실여외인)。
黃髮垂髫(황발수초), 竝怡然自樂(병이연자락)。
見漁人(견어인), 乃大驚(내대경), 問所從來(문소종래)。具答之(구답지)。
便要還家(변요환가), 設酒殺雞作食(설주살계작식)。
村中聞有此人(촌중문유차인), 咸來問訊(함래문신)。
自云先世避秦時亂(자운선세피진시란), 率妻子邑人來此絶境(솔처자읍인래차절경),
不復出焉(불부출언), 遂與外人間隔(수여외인간격)。
問今是何世(문금시하세), 乃不知有漢(내부지유한), 無論魏晉(무론위진)。
此人一一爲具言所聞(차인일일위구언소문), 皆歎惋(개탄완)。
땅은 평평하고 넓었으며, 집들이 정연하게 서있었다.
기름진 논밭과 아름다운 연못, 뽕나무와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
논두렁은 사방으로 길이 트였고 닭과 개 우는소리가 서로 들려왔다.
이 마을에서 오가며 농사를 짓는 남녀의 옷차림은 모두 바깥세상 사람들과 꼭 같았다.
노인이나 어린아이나 다들 즐거운 듯 안락하게 보였다.
어부를 보자 크게 놀라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어부가 자세히 대답했다.
이에 어부를 집으로 초대하여 술을 내놓고 닭을 잡아서 대접을 했다.
마을 사람들도 어부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와서 저마다 물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 선조가 진(秦)나라 때 난을 피해 처자와 마을 사람을 이끌고 이 인적 없는 땅으로 와서 다시 나가지 않았으므로 결국 바깥세상 사람들과 단절됐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지금은 어느 왕조(王朝)냐고 물으며, 뜻밖에도 한(漢)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 그 뒤로 위(魏)나라와 진(晉)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부가 자신이 아는 역사를 하나하나 자세히 이야기해 주자 모두들 감탄하며 아쉬워했다.
○ 儼然(엄연) : 정연하다. 가지런하다.
○ 阡陌交通(천맥교통) : 논두렁이 사방으로 통하다. 阡陌(천맥)은 논두렁.
○ 鷄犬相聞(계견상문) : 닭과 개의 소리가 서로 들리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 80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웃한 나라가 서로를 바라보며 닭과 개의 소리가 서로 들리는 곳에 있을 지라도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鄰國相望,雞犬之聲相聞,民至老死,不相往來.)”
○ 種作(종작) : 농사짓다.
○ 衣着(의착) : 옷차림.
○ 悉如外人(실여외인) : 모두 바깥세상 사람들과 같다. 外人(외인)은 도화원 이외의 고장에 사는 사람. 즉, 어부가 사는 현실 세계에 사는 사람.
○ 黃髮垂髫(황발수초) : 노인과 어린아이들. 黃髮(황발)은 노인. 垂髫(수초) 머리를 아래로 땋아 내린 아이들. 즉, 어린아이들.
○ 怡然(이연) : 즐거운 모양.
○ 要(요) : 초대하다.
○ 先世(선세) : 선조(祖先).
○ 絶境(절경) : 인적 없는 땅. 세속을 떠난 경지.
○ 世(세) : 왕조의 연대.
○ 乃(내) : 뜻밖에도.
○ 歎惋탄완) : 감탄하며 아쉬워하다.
餘人各復延至其家(여인각부연지기가), 皆出酒食(개출주식)。
停數日(정수일), 辭去(사거)。
此中人語云(차중인어운) : 「不足爲外人道也(부족위외인도야)。」
旣出(기출), 得其船(득기선), 便扶向路(변부향로), 處處誌之(처처지지)。
及郡下(급군하), 詣太守(예태수), 說如此(설여차)。
太守即遣人隨其往(태수즉견인수기왕), 尋向所誌(심향소지), 遂迷(수미),
不復得路(불부득로)。
南陽劉子驥(남양류자기), 高尙士也(고상사야), 聞之(문지), 欣然規往(흔연규왕)。
未果(미과), 尋病終(심병종)。後遂無問津者(후수무문진자)。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 또 어부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모두 술과 밥을 대접했다.
어부는 며칠을 묵은 후 작별하고 떠났다.
마을 사람 중에 누군가가 말했다. "바깥세상 사람들에게 말하지 마십시오."
어부는 마을을 벗어 나온 후 그의 배를 찾아 타고 곧 종전의 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에 곳곳에 표기를 했다.
군에 이르자 태수에게 가서 그대로 이야기했다.
태수는 즉시 사람을 파견하여 어부가 간 곳을 따라가 전에 표기를 한 곳을 찾아가게 했으나, 결국 길을 잃고 다시는 도화원으로 통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
남양의 유자기(劉子驥)는 고결한 은사였는데, 그 일을 듣고 기꺼이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실현하지 못하고 오래지 않아 병들어 죽었다. 그 후로는 뱃길을 묻는 사람이 없었다.
○ 不足(부족) : 하지마라. ~할 필요가 없다.
○ 道(도) : 말하다.
○ 便扶向路(편부향로) : 종전의 길을 따라 가다. 扶(부)는 ~을 따라, 向(향)은 종전.
○ 處處誌之(처처지지) : 곳곳에 표기(標記)를 하다. 誌는 표기.
○ 郡(군) : 태수가 있는 곳. 무릉군을 말한다.
○ 詣(예) : 이르다. 다다르다.
○ 尋向所誌(심향소지) : 이전에 표기한 곳을 찾다.
○ 劉子驥(유자기) : 유아(劉雅). 이름은 기지(驥之)이며 자(字)는 자기(子驥)이다. 도연명의 먼 친척이다.
○ 規(규) : 계획.
○ 尋(심) : 오래지 않아.
嬴氏亂天紀(영씨란천기), 賢者避其世(현자피기세)。
黃綺之商山(황기지상산), 伊人亦云逝(이인역운서)。
往迹浸復湮(왕적침부인), 來逕遂蕪廢(내경수무폐)。
相命肄農耕(상명이농경), 日入從所憩(일입종소게)。
桑竹垂餘蔭(상죽수여음), 菽稷隨時藝(숙직수시예)。
春蠶收長絲(춘잠수장사), 秋熟靡王稅(추숙미왕세)。
荒路曖交通(황로애교통), 雞犬互鳴吠(계견호명폐)。
俎豆有古法(조두유고법), 衣裳無新製(의상무신제)。
童孺縱行歌(동유종행가), 斑白歡遊詣(반백환유예)。
진왕(秦王) 영정(嬴政)이 하늘의 질서를 흩트리자 현자들이 세상에서 몸을 숨겼다.
하황공과 기리계 등은 상산(商山)으로 갔고, 이 사람들 역시 이곳으로 피해 왔다.
은신해 갔던 발자취도 점차 다시 묻혀 졌고, 도화원으로 오던 길은 결국 황패해졌다.
서로 도와 농사에 힘들여 일하고, 해가 지면 제집에서 쉬었다.
뽕과 대나무가 무성하여 그늘을 짙게 드리우고, 콩과 기장을 때에 맞춰 심었다.
봄누에 쳐서 비단실 거두고, 가을에 추수해도 왕에게 세금을 안 바쳤다.
황폐한 길이 희미하게 틔었고, 닭과 개가 서로 우짖고 있었다.
제사도 여전히 옛 예법 대로이고, 의복도 새로운 형식을 따르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은 제멋대로 다니며 노래하고, 백발노인들은 즐겁게 서로 오가며 놀았다.
○ 嬴氏(영씨) : 진시황((秦始皇) 영정(嬴政)을 말한다.
○ 天紀(천기) : 하늘의 질서. 여기서는 정상적인 사회질서를 말한다.
○ 黃綺(황기) : 상산사호(商山四皓) 중 하황공(夏黃公)과 기리계(綺里季)를 말한다.
상산사호(商山四皓)를 가리키는 바, 상산(商山)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상현(商縣) 동쪽에 있는 산이며, 사호는 진(秦)나라 말기 진 시황제의 학정을 피해 상산에 은둔했던 네 노인으로 동원공(東園公)ㆍ하황공(夏黃公)ㆍ기리계(綺里季)ㆍ녹리선생(甪里先生)을 이르는데, 나이가 80을 넘어 머리가 희었으므로 사호(四皓)라 칭하였다.
○ 伊人(이인) : 이 사람들. 즉 도화원(桃花源)에 사는 사람들.
○ 亦云逝(역운서) : 이 사람들 역시 갔다. 云은 의미 없는 조사(助詞), 逝(서)는 가다.
○ 往迹(왕적) : 그들이 간 발자취
○ 浸(침) : 점점. 차츰.
○ 湮(인) : 묻히다. 매몰되다.
○ 來逕(내경) : 도화원으로 왔던 길.
○ 蕪廢(무폐) : 황폐하다.
○ 相命(상명) : 서로 알리다. 서로 도와주다.
○ 肄(이) : 힘들여 일하다. 노력하다.
○ 日入從所憩(일입종소게) : 해가 지면 각자 제집에서 쉰다. 所憩(소게) : 쉬는 곳.
○ 菽稷(숙직) : 콩과 기장.
○ 藝(예) : 심다.
○ 靡(미) : 없다.
○ 荒路(황로) : 황폐하고 풀에 덮인 길.
○ 曖(애) : 희미하다.
○ 俎豆(조두) : 제기(祭器). 제사를 말한다.
○ 童孺(동유) : 어린아이.
○ 斑白(반백) : 머리가 횐 노인.
○ 歡遊詣(환유예) : 즐거운 낯으로 오가며 서로 논다.
草榮識節和(초영식절화), 木衰知風厲(목쇠지풍려)。
雖無紀厤誌(수무기력지), 四時自成歲(사시자성세)。
怡然有餘樂(이연유여락), 于何勞智慧(우하로지혜)。
奇蹤隱五百(기종은오백), 一朝敞神界(일조창신계)。
淳薄旣異原(순박기이원), 旋復還幽蔽(선부환유폐)。
借問游方士(차문유방사), 焉測塵囂外(언측진효외)。
願言躡輕風(원언섭경풍), 高擧尋吾契(고거심오계)。
초목과 꽃이 피니 봄이 왔음을 알고, 나무 시드니 바람이 매서운 겨울임을 알았다.
비록 달력 같은 기록은 없어도 사계절 변천으로 한 해가 이루어졌다.
기쁜 낯으로 즐거움이 끝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꾀나 재간을 부리겠는가?
기이한 종적은 은폐된 지 오백 년, 하루아침에 신비의 세계가 열렸다.
순박한 도원경과 경박한 속세는 근원이 다르니 이내 다시 신비 속에 깊이 숨었다.
잠시 속세에 노는 사람에게 묻노니, 시끄러운 속세의 밖을 어찌 헤아리겠는가?
원컨대 사뿐히 바람을 밟고 가서 높이 올라 나의 길동무를 찾으리라.
○ 草榮(초영) : 초목과 꽃이 피다.
○ 節和(절화) : 절기가 순조롭다. 즉 봄철이 되었다는 뜻.
○ 風厲(풍려) : 바람이 매섭다. 즉 겨울이 되었다는 뜻.
○ 紀厤(기력) : 년, 월, 일을 기록한 역서. 달력.
○ 成歲(성세) : 한 해가 되다.
○ 怡然(이연) : 즐거워하는 모양.
○ 餘樂(여락) : 즐거움이 끝이 없다.
○ 于何(우하) : 무엇 때문에. 왜.
○ 勞智慧(노지혜) : 고생스럽게 잔재주나 꾀를 부리지 않는다.
○ 奇蹤(기종) : 도화원의 자취.
○ 五百(오백) : 오백년. 진시황제(秦始皇帝)로부터 진(晉) 태원(太元) 연대까지 약 500년이다.
○ 敞(창) : 트이다. 열다.
○ 旋(선) : 이내. 아주 빨리.
○ 幽蔽(유폐) : 깊이 가리어지다。
○ 借問(차문) : 잠시 묻겠다.
○ 游方士(유방사) : 속세에 살고 있는 사람.
○ 焉測(언측) : 어찌 헤아리랴.
○ 塵囂(진효) :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속세.
○ 躡(섭) : 밟다.
○ 吾契(오계) : 나와 의기가 투합하다. 길동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