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캠페인 – 부러움 vs. 】
기성세대와의 갈등은 늘 예기 된 것으로 보지만,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시대가 계속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지만, 기성세대가 대응하는 방식은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는 새삼스레 근래 TV를 장악한 오디션프로그램에서 그 답 하나를 찾은 것 같아 그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오는 참가자들 중 절반 정도는 하고 싶은 일인데 집에서 반대를 하기에 그 반대를 무릅쓰고 나왔다고 한다. 일명 ‘딴따라’가 되겠다는 자식을 부모들이 눈뜨고 볼 수 없다는 말일 것이다. ‘아이돌’이라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적부터 사용된 단어인지, 아직도 ‘딴따라’라는 말이 사용된다. 끼가 없고 실력만 있어도 탈락, 끼만 있고 노력이 없어도 탈락, 재주라도 부려서 심사위원 마음을 사야 하는데, 심사위원이 딱히 변덕을 부리는 것도 아닌데, 어른들이 말하는 ‘딴따라’짓을 업으로 삼기에도 넘어야 할 산이 참으로 많아 보이더라. 분명 딴따라가 연예인을 얕잡아 부르는 말인데 이는 그 어떤 감정보다도 ‘부러움’이 지배적이란 생각이 든다. 대인배의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면 부러움에 울컥 소인배가 되어버려서는 마치 포도를 따먹지 못하고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여우의 모양새를 하고서는, ‘그까짓 것 누군 못해서 안 하나’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그만 ‘연예인이라서 좋겠다. 인기 많아서 좋겠다. 예뻐서 좋겠다.’라는 마음을 한 순간에 돌려서 ‘이그 저 딴따라들’이라고 하는 것 같다. ‘밥 먹고 할 짓이 그렇게 없나’라는 말 속에는 ‘나는 밥 챙겨 먹는 게 걱정이라 이러고 사는데 너는 어째 밥도 챙겨먹고 인기도 많냐?’라는 마음이 녹아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외모가 준수한데 공부도 꽤 한다는 프로필 소개에 단순히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사람을 조금 더 눈에 띄게 만든다. 공부 잘 하는데 왜 여기에 있느냐 라는 질문처럼, 공부를 포기하고 여기 온 것 같지도 않으니 열심히 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의구심이 들면서, 공부하느라 노래 대충할거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서릿발 선 눈빛들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말 그대로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보니, 오디션 형식에 제대로 적응을 하고 발전을 하는 사람들이 프로나 아마추어세계에 있다 온 사람들 보다 눈에 띠는 것은 사실이다. 즉, 공부를 잘 하는 아이가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여 집중하여 매순간 무대에 서다보니 그 모습이 이미 갖추어진 화려한 자들의 조명세례보다 더 두드러지는 것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것에 꾸준히 집중을 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성장을 보는 것이 시청자들의 즐거움일거란 생각이 든다. 부모가 아이들을 키울 때 ‘옆길로 새지 않게’ 키우고자 한다. 그건 자신의 경험칙에서 나온 ‘내가 만약 그 길로 제대로 잘 갔다면’이라는 지나온 시간에 대한 후회에서 비롯된,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와 ‘갔더라면 얻었을 성공에 대한 미련’일 것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는 자식을 보며 부모들의 태도에 변화가 왔다. 부모로서 내 자식의 재능을 부정하고 인정해 주지 않았던 예전의 모습에서 타인들에게 박수 받고 잘 한다 소리를 듣는 자식을 보면서 끝내 “이제는 반대하지 않겠다”라는 메시지를 자식에게 공개적으로 보내는 모습으로 말이다. 아이가 무대에서 활약할 때 그 부모의 모습을 종종 비추어 주는데, 그 표정은 마치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이것보다는 “내 자식이다. 잘 봐라~ 내 자식이다”라는 모습으로 보인다. 이는 무슨 마음이 튀어나온 것일까?
부모로서의 성공이 과연 자식이 잘 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일까? 우리 생의 전체에 걸쳐서 어디까지가 성공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것일까? 자식을 낳아놓고서는 그 아이가 부모 속을 썩이지 않고 공부 잘해서 보란 듯이 대학진학하게 하고 취업하게 하고, 좋은 배우자 만나서 양가가 흡족해 하는 결혼식을 올리고, 난임이라는 말이 오가는 세태와 무관하게 손주를 낳았다고 으슥해 하고, 여기까지 가야지만 우리 내 부모로서의 삶이 어느 정도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일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길을 가겠다는 자식을 부모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아마도 일단은 내가 그래도 잘 아는 것을 앞세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전달하며, 실패에 대한 가능성이 얼마나 높을지를 제시하며 단지 그 길로 가고자하려는 아이를 붙드는 것이 시작일 것이다. 자식은 단지 그 길에 매력을 느끼고 가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일 뿐인데, 성공과 관련된 그럴듯한 청사진이 나오지 않으니 부모가 더 확고하게 자신이 가진 청사진을 들이밀게 되는 것이다. 실제 한 아이가 성인되어 머리에 남은 것은 안 되는 것과 되는 것 중에 부모가 된다 하는 것에만 자신의 삶을 걸어 그 부모가 제시한 직업을 갖게 되었다. 그 부모는 된다 안 된다의 잣대로 아이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고, 결국 부모의 뜻대로 그 길을 갔다. 그 부모는 성공한 즉, 자식을 잘 키운 부모라 칭 할 수 있을까? 정말은 자신의 길을 찾은 우리의 아이들이 더 대단한 것은 아닐까? 그 아이의 무엇이 그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부모로서 혹 나의 무엇이 우리 아이에게 영향을 주어 그 아이가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을까? 라는 자연스러운 생각보다는 나 자신은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시도하지 않았기에 이정도로는 살아갈 수 있음을 곱씹으며 자식도 그렇게 자신처럼 감당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염원을 주입하는 것은 아닌지. 그 무대 위에서 반짝 반짝 빛나는 자신과 성(性), 성(姓)이 같은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눈빛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밀어준 것 하나 없고 부모로서 한 것은 반대만을 했을 뿐인데, 모든 사람이 그 아이에게 박수를 쳐주고 사랑을 해주고 있다는 것. 내 평생 상상조차 못했던 삶을 나의 자식이 이렇게 누리고 있다는 것. 부모로서 자신이 제시하며 투자해 주었던 진로가 어느 정도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였는데, 자식이 스스로 개척한 길이 자신은 꿈꾸어 보지도 못했던 인정과 사랑을 받는 길로 가고 있으니, 그 부모가 어찌 한 사람으로서 그 자식이 안 부러울 수가 있을까? 그 부모는 부러움으로 가득차선 어느 샌가 당장에 “우리 자식 이제 당당히 가라” 라는 말을 전한다. 그러나 못내 필자에게는 아쉬워지는 멘트였다. 그래. 모두가 그런 점에 대해서는 그 무대 위의 아이에게 박수를 쳐줄 것이다. 그런데 혹 그 아이는 부모가 틀렸음을 증명해 보이려 했던 것은 아닐까… 수능 당일 날, 9시 종이 침과 동시에 교문 밖으로 나온 아이가 말 했던 것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조금 더 높이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을까? 이렇듯 부모들은 “성공”에 노예가 되어 극단적인 생각을 자식 앞에서 생각보다 자주 드러내는 것 같다. 그간 많았던 기회 앞에 하나의 선택을 한 삶을 살고 있는 부모와 무수히 많은 기회가 놓인 자식과는 성공보다 미래를 함께 꿈꿔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행가래로 1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