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시: 2021. 6. 15.~17.(화~목) - 음력(5. 6.~8.), 일출 05:07~일몰 19:37
●산행지: 문수지맥 2구간(예고개-합수점)
●산행코스: 예고개-오운터널위-월봉산/초소-404.5m봉-선황재-봉서사갈림길-금계도로-금계산-큰두무재-417.4m봉-옥산(562m)-천등산갈림길-백현고개-조운산갈림길-운곡고개-새터고개-무시골재-학가산(난가대, 유선봉, 국사봉)-당재-광산-원통재/산성재-보문산-중대바위-오치고개-506m봉-백봉현-대봉산-수박골-독점산-장판재-검무산-진천고개-비접고개-224m봉-만촌고개-나부산-마산고개-사림봉-사림재-범등-삼강앞봉-합수점-원산성-비룡산-장안사
●먹거리: 생수2리터, 빵2(단팥크림빵, 왕만쥬), 홀스1, 사탕15, 알마겔3, 팩소주1, 캔맥대자1, 안주, 예고개 매점(롯샌, 땅콩, 포카리캔), 우방아이유셀 gs편의점(빵3, 콜라, 팩소주, 안주)
●준비물: 춘추잠바, 스틱, 헤드랜턴, 구급약, 피부연고, 부직반창고, 마스크3, 충전지2, 충전짹, 반장갑, 손수건, 면수건, 휴지, 물티슈, 스패츠, 팔토시, 말방울, 망또우의, 비닐우의, 매트, 안대, 귀마개, 머리띠, 긴팔, 양말, 여분의류, 띠지39
●거리: 약 71.98km (탈출 2.72km, 1.25h 제외)
●소요시간: 51.46h
●누구랑: 나홀로
●경비: 무궁화13,200, 예고개매점4,700, 우방아이유셀 gs편의점9,680, 식당15,000, 용궁택시10,000, 용궁순대뒤풀이11,500, 시외버스11,800
●날씨: 18~28, 첫날 중간에 비, 둘쨋날 구름 많음, 세쨋날 구름 많음
●산행경과:
* 6. 15.(화)
- 10:02 : 예고개
- 11:07 : 월봉산(532.7m)/산불감시초소
- 11:32 : 선황재/ 금계도로
- 11:47 : 봉서사갈림길
- 11:56~02 : 금계산(506m)/ 평상2, 헬기장
- 12:05 : 497m봉/ 면계(평은면-북후면 → 북후면)
- 12:39 : 큰두무재/ 아스팔트/ 좌측 인가 수도
- 13:04 : 옥산사갈림봉(430m)
- 13:56~14:34 : 천등산(575.4m)갈림길/ 면계(북후면 → 서후면-북후면)
- 14:18 : 천등산(574m)/ 1등삼각점(안동11)
- 14:55 : 백현고개/ 아스팔트/ 과수원
- 15:22~45 : 조운산(634.5m)갈림길
- 15:34 : 조운산(634.5m)
- 15:53 : 운곡고개/ 좌측 인가 수도
- 16:29 : 새터재
- 16:58 : 무시골재
- 18:00 : 난가대
* 6. 16.(수)
- 05:02 : 난가대
- 06:06 : 안동 학가산(882m)
- 06:10 : 능인굴
- 06:19~31 : 당재갈림능선/ 삼면경계면(안동시 서후면, 북후면 → 예천군 보문면)
- 06:24 : 예천 학가산(881.8m)
- 06:26 : 어풍대
- 06:56 : 당재/ 과수원
- 07:10 : 삼면갈림능선(560m, 예천군 보문면, 안동시 서후면 →풍산읍)/ 알바 주의 지점
- 07:39 : 원통재/ 산성고개/ 과수원
- 08:55 : 보문산(642.6m)/ 헬기장/ 산불초소
- 09:30 : 중대바위
- 10:37 : 오치고개/ 보문터널 위
- 11:36 : 삼면봉(501m, 안동시 풍산읍, 예천군 보문면 → 호명면)
- 11:41 : 507.5m봉/ 옛날 대봉산
- 12:59 : 백붕현/ 수도
- 13:41 : 자죽고개
- 14:05 : 대봉산(217.5m)
- 14:15 : 뱃재
- 14:42 : 수박골마을/ 신득골고개/ 팔각정자(장수정)
- 15:26 : 독점산(248.4m)/ 가시밭
- 15:47 : 장판재
- 15:56 : 오미봉(187m)
- 16:09 : 대덕사갈림길(218m봉)/ 면계갈림봉(호명면 → 풍산읍)
- 16:38~17:05 : 개고개
- 17:39~56 : 검무산(331.6m)/ 면계(풍산읍-풍천면)
- 18:35~19:35 : 식사, 편의점
- ?1:10 : 삼면봉(풍천면, 풍산읍 → 호명면)
- ?0:20 : 거무산(226.9m)
- ?0:41 : 진천마을
- ?0:20 : 시군계/면계갈림봉(146m, 안동시 풍천면 → 예천군 호명면)
- 21:10 : 비접골고개
* 6. 17.(목)
- 05:00 : 비접골고개
- ?0:?0 : 삼면경계면/ 지보면 면계(호명면, 풍천면 → 지보면)
- 05:50 : 한어고개/ 수도
- 06:10 : 갈포고개
- ?4:?0 : 면계(142m, 호명면-지보면 → 지보면)
- 06:57 : 봉우재/ 신설임도
- 07:32 : 무인산장
- 07:57 : 동막고개/ 수도
- 08:26 : 247m봉/ 신설 전망데크
- 08:49 : 우봉(279.3m)
- 09:11 : 만촌고개
- 10:05~22 : 산불초소봉(332m)/ 신설 2층 팔각정자
- 10:37 : 나부산(333.4m)
- 10:59 : 가산고개
- 11:34 : 마산고개(215m)
- 12:16 : 사림봉(256.2m)/ 전망데크
- 13:11~14 : 용포대(제2전망대)
- 13:17 : 면계갈림봉(지보면-용궁면)
- 13:34 : 범등(174.0m)/ 면계(지보면 → 용궁면)/ 전망데크
- 13:45 : 삼강앞봉
- 14:10~46 : 내성천합수점
- 15:35 : 비룡산 봉수대
- 15:46~51 : 팔각정(회룡대)
- 15:56 : 용왕각
- 16:01 : 장안사 매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구간 세부거리
예고개-1.1km-오운터널위-2.1km-월봉산(404m)-1.2km-금계도로-1.2km-금계산-1.7km-큰두무재-0.8km-417.5m봉-1.8km-옥산(561.6m)-0.7km-천등산갈림길-0.5km-백현고개-1.4km-조운산-0.6km-운곡고개-1.7km-새터재-1.3km-무시골재-1.5km-난가대-1.4km-유선봉-0.2km-학가산-1.2km-당재-0.8km-광산(623.5m)-1.2km-원통재/산성고개-1km-참꽃봉(575.1m)-1.5km-보문산-2.3km-오치/보문터널-0.2km-301m봉-1.1km-삼면봉(501m)-0.1km-대봉산(507.5m)-2.3km-백봉현-1.1km-뱃재고개-0.4km-자죽고개-0.7km-대봉산-1.2km-신득골고개-0.3km-수박골버스정류장-0.8km-독점산(248.4m)-0.8km-장판재-1.6km-개고개-1.1km-검무산-2.5km-진천마을-3.5km-비접고개-2.5km-갈포고개-5.5km-동막고개-2.3km-만촌고개-3.5km-나부산-2.3km-마산고개-4km-내성천 낙동강합수점 ....... 도상거리 114.5km, 실거리 135km
* 구간거리
- 예고개~경북경찰청 약 46km
-. 예고개~학가산 약 21.4km
-. 학가산~검무산 약 20.5km
-. 검무산~나부산 약 20.5km
-. 나부산~합수점 약 10.6km
- 선황재~백붕현 31.5km
- 큰두무재~오치고개 22.5km
-. 큰두무재~무시골재 9.5km
-. 큰두무재~원통재 15.9km
- 예고개~새터재 14.9km
- 새터재~진천고개 27.8km
- 진천고개~합수점 30.8km
- 오치고개~동막고개 30.1km
- 백붕현~마산고개 32.5km
-. 원통재~개고개 16.9km
- 개고개~합수점 31.9km
-. 개고개~동막고개 16.9km
-. 동막고개~합수점 15.5km
-. 마산고개~합수점 8.26km
* 사전 정보 및 식수보충
- 큰두무재: 좌측 인가 수도
- 옛 운곡고개: 좌측 아래쪽 인가 수도
- 학가산: kt, 군부대 지나서 약수터
- 능인굴: 석간수 고인물
- 백붕현: 농막 입구 수도
- 수박골마을/ 첨 만나는 인가 수도
- 검무산 아래 우방아이유셀아파트 앞 gs편의점, 상가단지 식당, 모텔
- 한어고개: 첨 만나는 인가 수도
- 동막고개: 첨 만나는 인가 수도
- 마산고개: 첨 만나는 인가 수도, 마산리 경로당 식수보충
- 비룡산 장안사 용왕각 옆 수도, 해우소/ 매점
* 서울에서 예고개 가는길
- 청량리역~영주역: 06:50(2.19h), 09시(1.42h), 11시(1.40h), 13,200~21,800
- 동서울~영주: 08:20, 10:05, 10:40, 11:30, 13:10, 2.30h, 19,500
- 영주시내버스터미널 30번버스: 07:40, 09:30, 11:25, 13:45, 0.30h
※ 새터고개 진출입 대중교통편
- 신진리마을~안동: 농어촌버스
- 신안동역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인 구안동역 근처 교보생명버스정류장 맞은편 버스정류장 06:10분 출발 354번버스 신전리마을 방면행 버스
* 회룡포에서 서울 올라오는길
- 장안사~용궁버스정류소: 8km, 10분, 택시 1만원 (장안사~예천: 택시 3만원)
- 용궁버스정류소~점촌터미널: ~17:50, 18:15, 18:30, 0.25h, 1,500 (터미널 맞은편 정류소에서 내림)
- 장안사~예천: 농어촌버스 시간당 1회( 아랫마을까지 3~40분 도보)
- 용궁택시: 010-6533-3331, 010-4802-9243, 010-5138-6171, 010-4522-6477, 010-3527-8818
- 점촌터미널~서울(동서울, 강남): 자주 있음. 2h, 11,800
* 예천에서 서울 올라오는길
- 예천~동서울: 11:40, 13:40,14:40,15:40, 17시, 18:50, 2.30h, 21,600
* 안동에서 서울 올라오는길
- 안동역~청량리역 18:18, 19:00, 21:25, 3h, 25,100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저는 항상 최소한의 경비 원칙이기에 택시비와 숙박비는 1순위로 피해갑니다.
그리고 가능한 예측된 위험은 피하고, 종주하기 적합한 최고의 조건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불안하게 흐리기는 했지만 해가 나는 것보다는 낫다고 안도하는 사이 일정에 없던 비가 들었습니다.
예측된 어려움은 피해가는게 산행의 능력이라지만 막 당해서 이러면 웬만한 비는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학가산 3대3봉에서 난가대에 정자가 있네요.
원래 일정은 국사봉에 올라가 비박할 예정이었지만 난가대를 목표로 진행합니다.
시간도 오후시간에 출발을 오전으로 앞당깁니다. 예상 강우시간은 18~21시, 다행히 많은 비는 아닙니다.
물론 새터재에서 신전리로 빠져 안동에서 자고 들어오는 방법도 있지만 출발시간이 2시간 정도 지체됩니다. 최소한의 경비원칙에도 맞지 않습니다. 난가대에서 오래 머물러야 하는데 보온대책이 따로 있어야 할까요? 밤에 추워서 잠자기 곤란하면 안되는데.....
출발하기 이전에 미리 예상하고 최적의 조건을 찾아야 합니다. 예상되는 위험은 가능한 피해야 하고, 맞닥트린다면 그에 맞는 대비가 있어야 합니다. 무턱대고 산에 간다면 아마츄어일 뿐입니다.
첫날 오후에 비가 들어 시간을 앞당겨 진행했습니다만 비 또한 앞당겨 정오 전후로 내렸습니다. (망할~ )
그렇게 많은 비가 아니었고, 서너 시간 오고말 비였더라면 신발에 비닐카바를 씌우는건데... 젖을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반 포기 상태였네요.
문수지맥!
합수점과 지맥의 끝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분란이 없으니 다행이었고, 걸어보니 결코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산불피해지역을 지나기까지 방심하면 안 되겠고요. 이후론 문수지맥 안내 표지를 따르면 무난합니다.
동막고개 내리기 전 용도를 알 수 없는 목조건물은 무인산장이었습니다. 페인트냄새가 너무 심해 창문 약간 열어두고 나왔네요.
산불잔해지역을 통과하면서 사무 장쾌한 백두대간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나부산 직전 신설 2층 팔각정에서 보는 맛에 비기지 못했습니다. 남쪽에 보이는 낙동강이 빠져 나가는 우측으로 속리산에서부터 소백산과 문수지맥의 출발점 옥석산까지 치올리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오롯하게 살펴 볼 수 있는 천혜의 명당이었습니다. 2구간 약 74.7km를 걸으며 사람을 만난건 검무산에서 예닐곱, 그리고 마지막 장안사로 나가다가 회룡대로 올라오는 서너 명이 전부였습니다.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학가산에서 동쪽 멀리 덕산지맥 일월산을 알아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학가산은 지나면서도 온전한 모습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산불지역을 통과하며, 검무산에서 남쪽으로 펼쳐진 산해, 나부산에서 마지막 기회를 주었지만 단지 비봉산 하나로 만족하고 멀리 팔공산 마저도 긴가민가 할 정도로 의성과 상주의 새띠마을을 향하는 보현과 팔공지맥을 알아보지 못한 점은 능력 밖의 한계였습니다. 지도를 맞춰볼 여유가 있었드라면 좋았겠지만 현실이 그러하지 못 했습니다. 백두대간에서 흘러내리는 자구지맥, 국사지맥, 운달지맥은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문수지맥은 합수점에서 인증이 끝난게 아닙니다. 합수점에서 다시 원산성으로 올라 봉수대를 걸쳐 무제봉에서 장안사로 약 2.72km를 빠져나와야 합니다. 회룡대에서 다시 회룡포를 내려다 보며 건너편 하트산까지 찾아보고 장안사로 내려선다면, 온전하게 문수지맥의 모두를 다 취해보고 대미를 장식할 수 있답니다.
162지맥 탐방은 오롯이 나를 위해 자신에 투자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속도의 문제는 아니고요. 하나하나 지맥을 진행해 나가며 어떻게 하면 좀 더 내실있게, 풍족하게, 행복하게 지맥을 즐길 수 있을지 더욱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문수지맥을 지나는 동네
* 영주시
경북 중북쪽에 있는 시이다. 조선 중기의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에서, 전쟁이나 천재지변을 피해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열 곳의 지역인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첫 번째로 꼽히기도 했다. 현재는 경북 북부 지방의 교육·문화의 중심지이며, 강원도와 영남지방을 연결해주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특산물로 인삼·사과·직물이 유명하다. 행정구역은 1개읍 9개면 9개 행정동 13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소재지는 경상북도 영주시 시청로 1이다. 삼한시대에 날이국이었던 이 지역은 신라의 파사왕이 점령하고 군(郡)을 설치함으로써 신라의 세력권에 들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 내령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선곡현(지금의 예안)·옥마현(지금의 봉화)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강주로 개칭했다가 995년(성종 14)에 단련사를 두었다. 1018년(현종 9)에 안동의 속현으로 병합되었으나, 1143년(인종 21)에 순안현으로 승격되어 독립했으며, 1259년(고종 46)에 영주로 승격했다. 조선초인 1413년(태종 13)에 영천군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영천의 별호는 구성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1895년(고종 31)에 안동부 영천군, 1896년에 경상북도 영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풍기군과 순흥군이 영천군에 합병하여 영주군을 이루었다. 이때 면의 폐합도 이루어져 영천군의 봉향면·망궐면·가흥면이 영주면으로, 두전면·호문면이 장수면으로, 적포면·권선면·진혈면(일부)이 문수면으로, 천상면·진혈면(일부)이 평은면으로, 산이면·어화면·말암면이 이산면으로 통합되었으며, 풍기군의 10개면이 5개면으로, 순흥군의 6개면이 3개면으로 폐합되었다. 1923년에 상리면·하리면이 예천군으로 이관되었다. 1940년에 영주면, 1973년에 풍기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0년에 영주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면서 영풍군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영풍군과 중심도시 기능을 담당해왔던 영주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영주시가 되었다. 시의 대체적인 지세는 북서부 시계를 따라 뻗어 있는 백두대간과 그 지맥의 영향으로 북쪽과 서쪽이 높고 남쪽과 동쪽이 낮은 지형을 보이고 있다. 북서부에는 봉황산(819m)·선달산(1,236m)·어래산(1,064m)·형제봉(1,178m)·국망봉(1,421m)·소백산(1,440m)·제1연화봉(1394m)·제2연화봉(1,357m)·도솔봉(1,314m)·묘적봉(1,148m)·자구산(784m) 등이 솟아 있다. 도솔봉으로 넘어가기 전 산세가 낮은 곳에 있는 죽령(689m)은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남부에는 박달산(577m)·봉수산(570m)·불로봉(482m)·대마산(375m) 등의 비교적 낮은 산들이 솟아 있다. 하천은 이 지역의 북서부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흐르는 남원천과 국망봉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흐르는 죽계천이 합류해 남류하면서 서천을 이룬다. 또한 북동부에서 발원한 낙화암천은 봉화군 봉화읍에서 내성천에 합해져 동남부를 흐르다가 평은면에서 유로를 바꿔 문수면 승문리 일대에서 서천에 유입한다. 이들 하천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침식분지가 발달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내륙분지이기 때문에 기온의 연교차가 큰 대륙성기후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북부지역에는 낙엽송이 울창하며, 산지에는 몇 백 년 동안 자생한 철쭉이 많다. 소백산의 정상에는 대초원이 펼쳐져 있으며 곳곳에 원추리가 무리지어 서식하고 있다. 중앙선이 시의 중앙을 북서-남동 방향으로 지나고, 경북선이 시의 남서부를 지나 영주역에 이르며, 영주역에서 영동선이 시작되어 북동 방향으로 지난다. 제천-안동을 잇는 국도가 중앙선과 나란히 달리고, 음성-울진, 영주-영천 방면을 연결하는 국도가 영동선·경북선과 나란히 달린다. 앞으로 중앙선의 복선화가 이루어진다면 영주시는 경상북도의 지하자원과 임산물·농산물의 집산지 및 유통지로서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중심시가지 중앙에 철도가 위치하고 있어 시가지 발달에 문제점을 안고 있다. 도로총길이 527.36km, 도로포장률 75%이다(2014). [포탈에서 발췌정리]
* 안동시
경북 중북부에 있는 시로 유교문화의 본고장이며 전통문화의 유산이 풍부한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다. 안동의 역사는 BC 57년 염상도사가 창령국을 세우면서 시작됐으며, 이후 고타야 · 화산 · 고창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태조 13년(930년)에 와서 처음으로 안동이란 지명을 갖게 됐다. 또, 고려 경종 5년(980년)에는 안동부(安東府)를 영가군(永嘉郡)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영가라 할 때 영(永)은 ‘이수(二水)의 합자이며, 가(嘉)는 아름답다’는 뜻으로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쳐지는 지세가 아름답다는 의미를 반영한 이름이다. 낙동강은 물산과 인물이 교류했던 곳으로, 남쪽으로부터 어류와 소금을 실은 거룻배가 강을 거슬러 안동을 지나 예안까지 이르러서 싣고 온 물건을 팔고, 내려갈 때는 안동에서 생산하는 많은 물건을 싣고 가는 교역의 중심 역할을 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풍천면 마애리의 구석기시대 유적을 비롯하여 국내 최고(最古) 목조건물 봉정사 등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들이 곳곳에 있다. 한국의 전통마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하회마을은 경주시 양동마을과 함께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행정구역은 1개읍 13개면 10개동이 있다. 시청소재지는 경상북도 안동시 퇴계로 115이다. 삼국시대 이전에 창녕국 등 소국(小國)이 있었던 것으로 〈대동지지 大東地志〉 등에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가 이곳에 진출하여 고타야군을 설치했다. 757년(경덕왕 16)에 고창군으로 개칭하고, 직령현·일계현·고구현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후삼국시대에 고려와 후백제의 각축지가 되었던 이 일대는 이 고을 호족인 김선평·김행·장길 등이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승리한 공으로 940년(태조 23)에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후에 영가군으로 강등되고, 995년(성종 14) 행정구역 개편 때 길주로 승격되었다. 그 뒤에도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1030년(현종 21)에 안동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1197년(명종 27)에 도호부로, 1202년에 대도호부로, 1308년에 복주목으로 계속 승격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복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으며, 홍건적의 침입으로 1361년에 왕이 이곳에 피난해 머물렀던 공으로 이듬해에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안동대도호부로서 경주와 함께 경상좌도의 대읍으로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1576~81, 1776~85년에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안동의 별호는 석릉·고령·화산·능라·지평·일계·고장 등이었다. 고종대의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안동부 안동군, 1896년에 경북 안동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로 감천면을 예천군에, 재산면·소천면·춘양면·내성면을 봉화군에 이관하게 되어 면적이 많이 줄었다. 그러나 1914년에 군면 폐합에 의해 예안군이 폐지되어 안동군에 편입됨으로써 면적이 다시 확대되었다. 1931년 읍면제를 실시함에 따라 안동군 부내면이 안동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63년에 안동읍이 신안동시로 승격되었다가 곧 안동시로 개칭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안동군과 중심도시기능을 담당해왔던 안동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안동시를 이루었다. 백두대간의 지맥이 시의 동·서에 걸치면서 북동쪽에는 산지를, 남서쪽에는 비교적 평탄한 침식분지를 이루어 놓았다. 시계를 따라 파리봉(497m)·산성산(845m)·두름산(485m)·사일산(649m)·계명산(537m)·화부산(626m)·산지봉(890m) 등이 동쪽에, 불로봉(482m)·갈미봉(548m)·천등산(574m)·보문산(643m)·검무산(332m)·봉화산(401m)·삼표당(444m)·향로봉(327m)·기룡산(508m)·황학산(782m) 등이 서쪽에 솟아 있다. 낙동강이 시의 중앙부를 남류하면서 안동호를 이룬 후 중심시가지를 가로질러 서류하면서 미천(眉川)·송야천(松夜川) 등을 합류하고 서부일대로 흐른다. 반변천·안기천·안막천 등도 낙동강에 흘러든다. 시를 흐르는 낙동강은 하상이 높아 평탄한 곳의 대부분은 모래사장을 이루며, 주변에 넓은 평야를 이루었다. 풍산읍과 풍천면에 이 지역의 최대 평야지대인 풍산평야가 있다. 풍산평야는 낙동강의 소지류인 상리천과 매곡천에 의해 이루어진 충적평야이다. 중심시가지는 대체로 높이 200~400m의 산지로 둘러싸인 침식분지이다. 기후는 내륙분지인 지형적 요인과 대륙성기후의 영향으로 한서의 차가 심하다. 유교문화재로는 도산서원전교당(陶山書院典敎堂, 보물 제210호)·병산서원(屛山書院)·호계서원(虎溪書院), 유성룡을 모신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 등이 있으며, 건축물로는 안동양진당(安東養眞堂, 보물 제306호)·안동의성김씨종택(보물 제450호)·안동소호헌(安東蘇湖軒, 보물 제475호)·안동김씨종택·하회원지정사(河回遠志精舍) 등이 있다.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은 2019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다른 지역의 7개 서원과 함께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포탈에서 발췌정리]
* 예천군
경북 서북부에 있는 군으로 수주촌(水酒村)으로 부르던 지역이다. 예천(醴泉)이란 <장자(莊子)>에 나오는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예천(醴泉)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는 신비의 물로서 <예기(禮記)>에는 “태평성대에 하늘에서는 단맛의 이슬이 내리고[天降甘露] 땅에는 단맛의 샘물이 솟는다[地出醴泉]”에서 비롯된 것이다. 1413년(태종 13) 보천군(甫川郡)으로 개칭했다가 1416년(태종 16) 옛이름 예천군으로 고쳐불렀다. 1896년(고종 33) 13도제 실시되면서 경북 예천군이 되었다. 동쪽은 안동시, 서쪽은 문경시, 남쪽은 의성군과 상주시, 북쪽은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백두대간의 영향으로 동북부는 산지로 이루어지고 서남부는 낙동강과 내성천이 흘러 연안에 평야가 발달했다. 경북 북부 내륙의 농산물 집산지로 발달한 교통의 중심지이다. 행정구역은 1개읍 11개면 265개리가 있다. 군청소재지는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충효료 111이다. 지금의 예천군은 옛 예천군과 용궁현이 합해 이루어진 행정구역이다. 옛 예천군은 삼국시대에 신라의 수주촌이었는데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예천군으로 고쳤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보주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안동부에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조선시대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보주군이 되었다가 1416년에 예천군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예천의 별호는 양양·청하였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 안동부 예천군, 1896년에 경상북도 예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감천면은 그대로, 북읍면·동읍면·남읍면·서읍면이 예천면으로, 제고면·유리면·저곡면이 용문면으로, 보문면·승도면이 보문면으로, 호명면·위라면·양산면·신당면이 호명면으로, 유천면·지서면·당동면이 유천면으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용궁군이 폐지되고 용궁군의 신읍면·구읍면이 용궁면으로, 북상면과 예천군 개포면이 개포면으로, 신상면·내하면·내상면이 지보면으로, 남하면, 남상면, 비안군 현서면, 문경군 영순면이 풍양면으로 폐합되어 예천군에 편입됨으로써 남쪽으로 면적이 확대되었다. 1923년에 상리면·하리면이 영풍군으로부터 이관되었으며, 1937년에 예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군 북부에 백두대간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고, 동부에 문수지맥이 있다. 북부에는 자구산(784m)·부용봉(688m)·매봉(865m)·주마산(508m) 등이 있으며, 동부에는 학가산(870m)·보문산(643m) 등이 있다. 낙동강이 군 남부에 있는 지보면과 의성군과의 경계를 이루면서 곡류하며, 그 지류인 내성천이 군 중앙부를 북동-남서 방향으로 흘러 지보면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이들 하천유역에는 소규모의 평야와 연화산(267m)·나부산(330m)·봉우재(245m) 등의 구릉성 산지가 있다. 경북선이 군의 중앙부를 동서로 지나며, 김천에서 경부선, 영주에서 중앙선 및 영동선에 연결된다. 예천은 중앙선이 부설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영주·봉화 등 광산지대에 각종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공급하는 상업·교통의 중심지로 지역경제의 요지였으나 교통축을 따라 그 기능이 인근 대도시로 이전되고 있다. 진천-영덕을 잇는 국도, 영주-포항을 잇는 국도 및 여러 지방도와 군도가 예천읍을 중심으로 군의 중앙부를 통과하고 예천-단양을 잇는 지방도가 군의 북부를 지난다. 보문면을 통과하게 될 중앙고속도로가 완공되면 내륙교통은 더욱 편리해질 것이다. 도로총길이 393.99km, 도로포장률 79.5%이다(2013) [포탈에서 발췌정리]
* 문경시
경북 서북부에 있는 시. 예로부터 서울과 영남을 이어주던 고갯길인 문경새재로 널리 알려진 지역이다. 문경새재는 '새재' 혹은 '조령(鳥嶺)'이라 하는데 높이 1,017m인 조령산을 '새도 날아서 넘어가기 힘들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석탄산업의 발달과 함께 성장한 도시이나 1987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석탄산업 정리사업으로 1989년부터 1996년까지 전국 334개의 탄광이 모두 폐광되었고, 문경시에는 1999년 개관한 가은읍의 석탄박물관만이 남아있다. 행정구역은 2개읍 7개면 5개동이 있다. 시청 소재지는 경상북도 문경시 당교로 225이다.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근기국(勤耆國:지금의 산양면 일대)이 이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56년(아달라왕 3)에 신라가 계립령(鷄立嶺)을 개척했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고대부터 영남과 그 이북을 연결하는 지역으로서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때에는 고사갈이현(高思曷伊縣:또는 冠文縣)이 설치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관산현(冠山縣)으로 개칭해 고령군(古寧郡:함창) 영현이 되었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문희군(聞喜郡)으로 이름을 바꾸고, 1018년(현종 9)에 상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후에 문경현으로 개칭했다. 조선 태종 때의 군현제 개편으로 문경현이 되었으며, 호계현(虎溪縣:신라의 虎側縣 또는 拜山城, 757년 호계현으로 개칭, 1018년 상주에 소속)이 문경으로 이관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문경새재의 중요성이 재확인되어 1708년 조령산성이 축조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안동부 문경군, 1896년에 경북 문경군이 되었다. 1914년의 군면 폐합으로 동노소면·산북면·호서남면 등을 제외한 다른 면들은 통폐합되었다. 1956년 호서남면이 점촌읍으로, 1973년 문경면과 가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 점촌읍이 시로 승격·분리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문경군과 점촌시가 통합되어 문경시라는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를 이루었다. 시의 서·북쪽은 백두대간이 뻗어 있어 산세가 험준하며 동남쪽은 100m 내외의 저산성 산지이다. 시의 중동부는 운달산(雲達山:1,097m)·대미산(大美山:1,115m)·황정산(皇庭山:1,077m) 등이 북으로 이어지며, 북부산지는 대미산에서 시작해 주흘산(主屹山:1,106m)을 거쳐 충청북도 괴산 쪽으로 이어진다. 서부는 마폐봉(馬閉峯:922m)에서 시작하여 조령산(鳥嶺山:1,017m)·조항산(鳥項山:951m)·청화산(靑華山:970m)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1,000m 내외의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문경분지를 이루며, 조령·이화령 등은 예로부터 서울과 영남지방을 잇는 교통로로서 매우 중요했다. 수계의 발달은 미약한 편으로 남부에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조령천·신북천과 낙동강의 지류인 영강이 흐른다. 옛 점촌시의 중부를 중심으로 고생대 조선계 지층의 석회암이 분포해 곳곳에 카르스트 지형이 나타나며, 이곳에서 생산된 석회암이 일대의 시멘트 공장에 공급된다. 불정동과 유곡동 일대에는 고생대·중생대의 평안계지층이 분포해 무연탄이 매장되어 있다. 경북선이 시의 남부를 지난다. 도로는 이화령을 지나 충주-서울 방면으로 이어지는 국도가 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예천·안동·김천 등과 통하는 도로가 있다. 그밖에 단양으로 통하는 지방도가 동로면·산북면·산양면·영순면을 지난다. 도로총길이 604.49km, 도로포장률은 66.9%이다(2013). [포탈에서 발췌정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한숨 자고 오후에 출발하려 했지만 오후에 비가 들어 조금 서둘르기로 하고 출발했으나 비가 당겨지는 바람에 많지않은 비였지만 중간 두세 시간 우중산행을 해야 했습니다. 영주역에 내려 예고개 가는 버슬 타기위해 역광장에서 우측으로, 사거리에서 다시 우측으로 돌아갑니다.
♤ 예고개/ 고치(古峴)
옛고개는 안동시 녹전면 녹내리와 영주시 평은면 오운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구 5번 국도와 915번 지방도로가 만나는 지점으로 서쪽으로는 안동과 대구방향으로 가는 길이고, 동쪽/북쪽으로는 봉화. 태백 방향으로 남쪽으로는 영주와 예천으로 가는 길이다. 옛고개라 불리게된 유래를 보면 과거 영주.안동.봉화 방면으로 갈라지는 고개라 하여 옛 고(古)자에 고개 현(峴)자를 써서 옛고개(古峴)라 불러왔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예고개로 변음되어 불리고 있다. 옛고개는 평은면 소재지까지 15리,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까지 15리,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까지 15리로 이 고개를 넘어 다니던 소금장수와 등짐장사꾼들이 쉬어가는 길목이었다고 전해진다.
- 예고개 삼거리 도로로 내려서서 보면 맞은편에 예고개 표지석과 버스정류장이 있고, 그 우측편에 일신쉼터 식당과 매점 건물이 있고 좌측에 닭발 음식점이 있다. 예전에는 교통량이 많았던 곳이지만 지금은 예고개 아래로 오운터널이 뚫리면서 교통량이 현저히 줄면서 거의 폐허가 되었다.
♤ 오운터널 잘록이 안부(320m)
지방도제915호선은 영주시에서는 평은면 오운리를 통과한다. 도로명은 예봉로이다. 오운리 가운데는 고도 약 300m의 예고개[옛고개]를 경계로 하여 남북 방향으로 일직선의 골짜기가 뻗어져 있는데, 이 골짜기를 따라 지방도제915호선이 통과하고 있다. 지방도제915호선은 오운리 남부에 있는 오운육교에서 국도제5호선으로 연결되며, 그곳에서 국도제5호선은 북서쪽 오운터널과 평은터널를 지나 영주 중심 시가지로 향한다. 예고개삼거리 인근에는 휴게소, 쉼터, 식당, 주유소 등이 들어서 있다. 오운터널이 지나는 잘록이 안부인 이 곳부터,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차츰 고도를 높여 약 200고지를 올라서면 월봉산이다.
♤ 월봉산(月峰山, 532.7m)/ 성안봉
우측(서편) 아래에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 성안마을이 있으므로 성안봉으로 불려지지만, 지도상 성안마을에 월봉산 광명사란 사찰이 표시되어 있으므로 월봉산으로 부르는 편이 합당할 듯하다.
- 산불감시초소와 묘지 1기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잠깐 들렀다가 돌아나와야 한다.
- 금계도로라 불리는 넓은 임도를 따라 내려서다 직진 방향에 시그날이 있지만, 우측 희미한 잡목 길로 들어선다.
♤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 금계동, 성안고개
금계동은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에 있는 마을인데 강동리는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들이 넓게 펼쳐져 있어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며 작은 하천이 마을을 감싸 흐른다. 강성동, 동막동, 금계동 등을 병합하면서 강성과 동막의 이름을 따 강동리라 하였는데 자연마을로는 강성, 점촌, 신촌, 성안, 왕머리마을 등이 있다. 강성마을은 내성천 가가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점촌마을은 강동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신촌마을은 점촌 서북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성안마을은 전에 이곳에 성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으로 성안마을에서 지곡리로 내려가는 임도이다.
- 월봉산에서 10여 분 내려서면 성안고개이고 우측으로 올라선다. 좌측 아래로 임도따라 내려서면 금계마을인데, 지맥길은 직진 방향의 수레길이다. 성안고개 임도를 건너 직진방향 수레길 초입에는 쉼터 벤치가 마련되어 있다.
♤ 선황재(380m)/ 금계도로
양회임도인 선황재는 평은면 강동리와 오운리를 잇는 고개로 우측 아래에는 강동리 금계마을이 있다. 금계도로로 내려서서, 도로를 가로질러 오른다. 선황재로도 표시되는 이 고개에서 우측으로 나가면 금계마을이고, 좌측으로 내려서면 지곡리 지신동마을로 이어진다. 이 선황재에서 다시 고만고만한 잔펀치를 오르내리며 차츰 고도를 높혀 금계산(507.1m)까지 꾸준히 올라야 한다.
- 4등삼각점(안동 421)이 있는 삼각점봉인 404.5m봉을 넘어서면 선황재이다.
♤ 영주시 평은면 지곡리
지곡리는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에 있는 마을로서 왕머리마을은 고려 제 31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머물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용암산이 위치하며 하천이 마을을 끼고 남북으로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지신동, 삼밭골, 새장골, 새마을 등이 있다. 삼밭골은 마을 앞에 있는 넓은 밭에 농사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새마을은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영주시 평은면 지곡리 지신(芝薪)마을
지신마을은 영주시 평은면 지곡리와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 경계지점에 있는 진주강씨 집성촌이다. 지곡리 지역은 조선 중기(1700년경) 무렵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영천군 천상면(川上面)에 속했으나 아직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다.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조선의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천군 천상면에 마전동(麻田洞)과 서당동(書堂洞)이 생겼는데 마전동과 서당동은 현 지곡2리 지역이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천군의 천상면과 진혈면을 통합하여 ‘평은면’이라 하고 천상면의 마전동과 서당동, 안동군 북후면의 옹천동(甕泉洞)·북광면(北光面)의 거인동(居仁洞) 일부를 편입하여 지곡리(芝谷里)를 만들었다. 이 때 지신동을 지곡1리, 마전동과 서당동을 지곡2리로 편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신마을은 ‘옹천에 살던 지포(芝圃) 강건수(姜建秀,1819-1904)가 1880년경 이곳에 입향하여 새로운 마을을 이룩하고 지신동(芝薪洞)이라 했다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마을 이름을 지곡(芝谷)이라 칭했는데 이는 강건수 선생의 호 지포(芝圃)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마을이 터 잡고 있는 곳은 송야천(松野川) 개울가 뻘(늪지)이 있던 곳이며 마을의 집들은 원래 현재보다 높은 곳에 있다가 일제 때 신작로가 나면서 아래로 내려왔다. 마을이 개척될 당시 개울가 뻘에 지초(芝草)가 무성하여 지초 지(芝) 자에 풀 신(薪) 자를 써 지신동(芝薪洞)이라 했다”고 말했다.
* 지포(芝圃) 강건수(姜建秀) *
지신(芝薪)의 진주강씨는 고구려 때 도원수를 지낸 강이식(姜以式)을 도시조로 하고, 강계용(박사공파)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강계용의 7대손 강회백(姜淮伯, 통정공파조)이 고려(1376년)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에 올랐다. 강회백의 아들 강종덕이 고려가 망하자 안동으로 낙향한 후 강종덕의 증손 강두전이 세종(1418-1450) 때 옹천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지신마을을 개척한 강건수(1819-1904)는 통정공파(通亭公派) 24세손이며, 옹천 입향조 통덕랑 두전(斗全)의 13세손으로 안동시 북후면 옥천리(玉川理)에서 태어났다. 장성하여 영남 한의학의 원천인 안동 권수환(權儒煥) 선생 문하에서 의술을 배웠다. 유학자이면서 한의사였던 지포 선생은 문장에 뛰어나고 성품이 인자하여 세인의 흠모 대상이 되었다. 그는 60세가 지나서 지신(지곡)에 새로운 마을을 이룩하고 인재양성의 꿈을 키웠다. 구한말 기울어지는 국가를 바로 잡는 길은 오직 교육에 있음을 깨닫고 금계산(金鷄山) 기슭에 지포정사(芝圃精舍)를 지어놓고 마을 청소년들과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노년을 보냈다. 이 마을 강신섭(26세손) 어르신은 “지신의 진주강씨는 모두 강두전 선조의 후손이다. 조선말 24세손 지포(芝圃) 선생께서 마을을 개척하신 후 옹천에 살던 일가 수십 가구가 이곳에 이거하여 30여 호가 사는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 437m봉/ 면계(평은면-북후면)
영주시 평은면 안을 진행해 오던 맥길은 이후 봉서사갈림 삼거리 직전 437m봉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안동시 북후면을 만나 북후면과 평은면 면계를 나누며 남서향한다. 평평한 봉우리이며 정상에서 우틀하여 나간다.
- 437m봉'에서 완만하게 100m 정도 내려서면 봉서사 갈림길이다. 좌측 아래 900m 거리에 봉서사가 위치한다.
♤ 봉서사(鳳棲寺)
봉서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의 말사로, 경북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 금계산(金鷄山) 또는 금학산(金鶴山)이라 부르는 산정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 안동의 명찰이다. 대부분의 전각이 조선 후기에 중건한 사찰이지만 봉서사에 남아있는 터를 가늠해본다면 꽤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비구니 도량으로 탈바꿈하여 특히 어린이 포교에 주력하고 있는데, 보광전, 응향각(凝香閣), 포란루, 산령각(山靈閣), 요사채 등이 남아있다.
* 안동의 사찰과 봉황 *
안동의 사찰들은 예로부터 봉황과 관련 깊은 전설을 여러 가지 지니고 있다. 봉황은 상서로운 의미를 지닌 상상의 동물로 우리네 풍습, 문양, 풍수, 전설 등 생활문화 전반에 걸쳐 자주 등장하는 상징이다. 안동에는 봉황이 머물러 사찰이 창건됐다는 봉정사(鳳亭寺)를 비롯해, 봉황이 알을 낳았다는 영봉사(詠鳳寺), 봉황이 잠시 깃들었다는 봉서사(鳳棲寺) 등의 사찰이 있다. 특히, 봉서사에는 의상(義湘, 625~702)이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도력(道力)으로 날렸는데, ‘봉황이 이곳에 내려 앉아 알을 품었다’ 하여 봉서사(鳳棲寺)라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 금계산(金鷄山, 506m)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 산약공원 북쪽에 위치한 금계산은 아담한 산이지만 『금학사』와 함께 “신라 의상대사가 종이로 학을 만들어 도력으로 날렸는데 봉황이 이곳에 내려앉아 알을 품었다” 하여 명명한 천년고찰 『봉서사』를 품고 있다. 금계산은 지리적으로 안동과 영주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있고, 산약테마공원과 인접하여 접근성이 좋아 가족단위 등산객이 많이 찾는 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웰빙시대에 편승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다.
- 정상 표지판과 대형 자연석 정상석(金鷄山/506m)이 세워져 있다. 뒷면을 보면 경상북도청년유도(儒道)회장 강일호가 세웠다고 적혀있다. 안동에서 행세깨나 할려면 유도회에 들어야 한다고 한다.
♤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 금계마을
금계마을은 옛날에 금광산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하는데 마을 안쪽 가장 높은 곳에 불가사의한 느티나무가 있어 보는 사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느티나무는 틈도 없는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바위와 한 몸이 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바위에는 금계옥대 공이산좌(金鷄玉 公李山座)무자소춘(戊子小春)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서쪽에 닭만한 금덩어리가 묻혔다는 전설이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금점(金占)을 많이 했다고 한다.
문수지맥은 금계산(507.1m)에서 면계를 서쪽으로 보내고, 영주시와 헤어져 온전히 안동시 북후면 안으로 들어서서 남서향하여 큰두무재 이후까지 이어집니다.
♤ 497m봉/ 면계(평은면-북후면 → 북후면)
금계산에서 잠시 내려서다 약간 올라 497m봉을 넘어 좌향하여 내려선다. 약 0.6km 전에서 부터 안동시 북후면과 영주시 평은면을 가르며 남서향하여 오던 맥길은, 이 봉에서 좌향하여 온전히 안동시 북후면 안으로 들어간다. 이후 큰두무재까지는 약 2km 거리를 완만하게 내려서게 된다.
- 우측편에 북후면 두산리 마점마을과 마점지, 굴암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 북후면 두산리 마점(麻店)마을
마점은 대마(大麻)를 많이 재배하여 저저미ㆍ마점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주로 고추농사가 많다. 굴암(窟岩)은 구멍 뚫린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하여 굴암ㆍ굴방우골이라 하였다. 특용작물과 담배를 많이 재배한다.
문수지맥은 큰두무재에서도 온전히 안동시 북후면 안을 남서향으로 진행합니다.
♤ 큰두무재(杜舞嶺=大杜舞峙, 333m)/ 928번지방도
큰두무재는 경북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에 있는 고개로, 928번 지방도가 이 고개를 통과한다. 예전에 안동과 봉화, 영주를 왕래할 때 주로 다녔던 고개이다. 두무재는 두뭇재로도 불리는데 옹천(甕泉)에서 두산리로 넘어오는 고개를 이른다. 고개마루에 팥배나무가 많아 바람이 부는 날이면 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듯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술청거리, 주막거리(酒幕巨里)는 굴암 동쪽에 주막이 있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옹천에서 영주로 가는 길이 두모현(頭毛峴) 혹은 두뭇재를 통과하였을 당시에는 유일한 주막거리로 흥청거렸으나 도로가 바뀌면서 쇠하여져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조선시대 때 이 고개를 넘기 직전에 있었던 옹천역(瓮泉驛)은 『세종실록지리지』에도 기록되어 있는 오래된 역원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두모현(豆毛峴)은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두모현은 『안동도회좌통지도』(안동)를 비롯하여 여러 옛 지도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또 『조선지지자료』에는 옹천동의 두무현(斗舞峴)이 한글 명칭 '드뭇제'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두모현, 두무현, 드뭇제 모두 지금의 명칭 큰두무재와 관련이 깊은 지명이다. 다만 큰두무재에서 접두사 '큰-'을 붙인 것은 연이은 두 개의 고개 중 더 길고 높은 고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큰두무재에서 약 30분 오르고 정상에서 우틀하여 내려섭니다.
♤옥산사갈림봉(430m)/ 옥산사(玉山寺)
좌측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마애약사여래좌상(玉山寺磨崖藥師如來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1호)과 전탑지(塼塔址)가 있는 통일신라 때부터 있었던 사찰인 옥산사가 있다. 《영가지(永嘉誌)》의 기록을 보면 옥산사는 조선시대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 후 폐사되었으며 1964년에 법당을 새로 지었다.
- 옥산사 갈림봉에서 잠시 내려서다 오르면 글씨 판독이 어려운 묵은 삼각점이 있는 417.5m봉이다.
♤ 옥산(561.6m) 옥산사(玉山寺)
옥산사는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사찰로 경북 안동시 북후면 장기리에 자리한다.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절 뒤에 있는 옥산사 마애약사여래좌상과 옥산사 전탑지로 미루어보건데 통일신라 때부터 있었던 듯한데 중간에 폐사되어 그 연혁을 알 수 없다. 옥산사 마애불은 조형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마모도도 높은 편이 아니며, 안동 유일의 마애약사여래불이다. 지금의 옥산사는 이 마애불이 자리한 터에서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사찰이지만, 이 자리에 마애불 뿐 만 아니라 마애불이 바라보는 곳에 전탑지도 함께 자리해 있어 예전부터 어느 정도의 사세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이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안동 지역의 고문헌에서도 옥산사의 존재를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옥산사는 산정 가까이에 위치해 와룡산을 비롯해 발아래에 안동지역의 수많은 연봉들의 풍광이 조금도 막힘없이 보이며 특히 일출이 장관이라 찾는 이들이 소리없이 늘어나고 있다.
천등산 다녀오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며, 1등삼각점(안동 11)이 있어 다녀온 보람이 있더군요.
♤ 천등산갈림길/ 면계(북후면 → 서후면-북후면)
금계산 이후 큰두무재로 온전히 안동시 북후면 안을 남서향으로 진행하던 지맥길은 천등산갈림길에서 안동시 서후면을 만나 서후면과 북후면의 면계를 따라 학가산 지나 당재갈림능선까지 서향한다.
- 직진 방향 묘지를 지나는 능선길이 천등산으로 향하는 등로다. 지맥길은 우틀하여야 한다.
천등산갈림길에서 면계를 따라 다녀오는데 왕복 2.1km, 40~50분 정도 소요되네요.
♤ 천등산(天燈山, 575.4m)/ 개목산(開目山)/ 1등삼각점
천등산은 경북 안동시 서후면(西後面) 자품리와 북후면 도촌리 사이에 있는 안동시의 명산이다. 안동시의 진산(鎭山)인 학가산(鶴駕山, 870m)과 마주보고 있는 산으로, 북쪽으로 소백산 연봉, 남동쪽으로 낙동강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천등굴과 관련한 천등산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원래는 대망산(大望山)이었는데, 의상(義湘)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능인(能仁)대사가 바위굴에서 수도를 할 때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비추어 득도를 하게 되자, 산 이름을 천등산, 바위굴을 천등굴로 각각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천등산은 개목산(開目山)으로도 부른다. 조선 초기 명재상 맹사성(孟思誠)이 안동에 소경이 많이 나는 까닭은 천등산의 기운 때문이라면서 산 이름을 개목산으로, 동쪽에 있던 흥국사 절 이름을 개목사(開目寺)로 고쳐 부르게 한 뒤 소경이 나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의상이 창건한 개목사의 원통전은 보물 제242호이다. 개목산 봉수(烽燧)에 대한 기록이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한 여러 옛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데, 홍건적을 막기 위해서 만든 개목산성(開目山城)이 있다.
♤ 봉정사
천등산 남쪽 기슭에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봉정사가 있는데,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보물 제55호인 대웅전,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과 고려시대의 3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182) 등이 있다. 봉정사는 672년 의상 또는 능인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능인 창건설에 대하여 능인이 도력(道力)으로 종이로 만든 봉황을 날렸는데, 이 종이 봉황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황이 앉은 자리’라 해서 봉정사(鳳停寺)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1363년(공민왕 12) 극락전을 중수한 이후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특히 1972년 극락전 해체 보수 때, 1363년(공민왕 12) 극락전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극락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임이 확인되었다. 이곳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과 귀여운 아기동자의 성장영화인 《동승(童僧)》(2002)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계곡에 있는 정자인 명옥대(鳴玉臺)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강학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1665년(현종 6) 건립하였다.
- 봉정사는 고려 태조와 공민왕이 다녀 갔다고 하며, 최근에는 영국 여왕 다녀 갈 정도로 아름다운 절이다.
사과 과수원으로 백현고개에 내리는데 고개에는 도로 양쪽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 백현(白峴)고개/ 구헤티/ 2차선 도로/ 사과 과수원
백현고개는 안동시 서후면 재품리에 있는 고개로, 고개 우측(북쪽)에는 고지절마을이 위치하고 있고, 좌측(남서쪽) 아래에는 백현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백현, 구헤티 마을은 학가산의 동쪽 기슭에서 천등산의 서쪽인 높은 지형에 위치한 마을로서 북후면 월전리와 고개를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다. 이 마을의 북쪽에 흰 운모석이 나는 광산이 있어서 운모를 실어 나르다가 흘려서 고개가 흰색을 보인다고 해서 백현이라 부르며, 옛날에는 구헤티라고도 하였다.
나무 사이로 운곡리가 내려다 보이고, 학가산이 보이지만 사진을 담을 만한 장소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 조운산갈림길
지맥길은 좌측으로 이어지지만, 마루금에서 우측으로 약 0.35km 떨어져 있는 조운산을 다녀온다.
- 조운산 오름은 짧지만 급경사길이다.
♤ 조운산(鳥雲山, 634.5m)/ 조골산(照骨山)
조운산은 경북 안동시 북후면 월전리와 도촌리, 신전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 아래에서 보면 송곳같이 뾰족하게 솟아있는 산이지만 정상에 올라보면 펑퍼짐한 산이다. 북쪽으로는 월전리 갈미봉으로, 남쪽으로는 자품리 천등산으로 이어진다. 『여지도서』(예안)에 조골산(照骨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골산은 본부 북쪽 40리에 있고 기우단이 있으며 동쪽의 예안 영지산(靈芝山, 지금의 도산면 분천리 영지산)에서 산줄기가 이어졌고 남쪽의 본부 학가산에서 산줄기가 멈춘다."라는 기사가 있다. 『안동도회좌통지도』(안동)에 조골산 주위로 학가산, 천등산, 봉정사, 두모현(頭毛峴, 지금의 두무재)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도 '북후면 월전동 조골산' 기록이 나온다. 다만 『조선지형도』에는 지금의 이름인 조운산(鳥雲山)으로 표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운곡고개(雲谷峴)
운곡고개는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 운곡마을에서 도촌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운곡고개 우측(서쪽)에 '운골'이 있고, 좌측(동쪽)에 '동막'이 있다. 운곡마을은 운골. 군골. 궁골이라고도 부르며 지대가 높아서 구름이 닿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문화유적으로 운학묘가 있다.
- 조운산에서 근 200고지를 가파르게 내려서서 운곡고개를 넘는다. 운곡고개에서 월전리 방향으로 살짝 넘어가보니 학가산이 멋지게 조망된다.
증 가선대부 중추원의관(贈嘉善大夫中樞院議官) 예천임공묘(醴泉林公墓)를 지납니다.
*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
중추원 의관은 고종 32년(1895) 을미개혁 때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중추원제(中樞院制)를 공포한 이후부터, 광무 9년(1905) 의관을 찬의(贊議)로 개칭하기 전까지 존재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직제로, 법률과 칙령을 심사 의정(議政)하는 기관으로 일종의 입법기관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자문 기관이었다. 의장•부의장 밑에 속하며 1•2•3등으로 나뉘고 인원은 50명 안팎이다. 자격은 칙임관•국가유공자 및 정치•법률•이재(利財)에 대한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로서 내각회의를 거쳐 내각 총리대신의 추천에 의하여 칙선(勅選)으로 임명되었다.
♤ 새터재
좌우로 수레길이 지나는 잘록이 안부이다. 서향하는 지맥길의 재 우측(북쪽) 위에 신전리 새터마을이 위치하고 있고, 재 좌측(남쪽) 아래쪽에 재품리 간리마을과 풍산천이 남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 운곡고개에서 약 20분 진행하면 493.9m봉에 오르고 여기서 잘록이 안부인 새터재로 내려선다.
♤ 경북 안동시 서후면 재품리(才品里)
학가산 아래 자품리 주민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마을에서 재주가 많고 인품이 뛰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것을 시기하여, 재품리(才品里)였던 마을 이름을 ‘놈 자(者)’를 써서 자품리(者品里)로 격을 낮추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017년 안동시의회는 조례안을 통해 100여년만에 원래 지명인 재품리로 개정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아름다운 학가산의 이름도 원래는 학가산(鶴駕山)이 아니라 학가산(鶴佳山)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또한 국사봉은 2005년 경북도민 체전의 성화 채화지였다.
♤ 무시골재
새터재를 지나 20분여 다시 꾸준히 올라서면 485.1m봉이고, 우측으로 휘돌아 8분 정도 내려선다. 학가산으로 오르는 포장도로로 0.6km를 내려서는데,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와 서후면 재품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지맥길은 직진 포장 군사도로를 따라 오르게 되는데, 갈림길 우측 '메밀단지' 표지판이 안내하는 길로 내려서면 북쪽으로 '마구실(마우실)'과 '새터'로 이어진다.
- 우측으로는 신전리 새터와 마구실(마곡)로 내려가는 아스팔트 도로가 보인다.
- 제1주차장을 지나 양회임도를 버리고 좌측 산길로 진입하여 계속 묘지길을 따라 고도를 올린다.
♤ 마구실, 마곡(麻谷)
마구실, 마곡은 새마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부터 마(麻)를 많이 재배하여 붙은 이름이다. 다른 이야기로 마고 할머니가 영등 할머니와 같이 하늘에 오르기를 기도했는데, 이때 하늘에서 신령이 나타나 등천 방법을 일러주었다. 신령이 가르켜 준대로 바위굴에서 기도하며 살았다고 ‘마구실’이라 한다.
♤ 송암 권호문(松巖 權好文: 1532~1587)
송암은 퇴계 이황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일대를 풍미했던 서애. 학봉. 백담 등과 교분이 두터웠고 학행과 덕망이 높았던 문인이며 선비였다. 평생 벼슬길을 거부하고 자연을 벗하며 살았다 하여 스승 퇴계는 그를 '소쇄산림지풍(瀟灑山林之風)이 있다' 는 인물평을 남겼다. 송암은 청성산 아래의 무민재에서 학가산을 드나들며 학가산의 3봉(三峯)과 3대(三臺)의 이름을 지었고 일생동안 학가산 사랑에 힘 쓴 인물이다. 송암 선생이 이름 붙인 학가산의 3봉(三峯)은 바위의 모습이 날카로운 창의 모습을 지녔다 하여 이름붙인 삼모봉(三矛峯), 지상의 아름다운 곳으로 신선들이 거닐며 놀았다는 유선봉(遊仙峯), 정성을 모아 안녕을 이루게 한다는 적성봉(適星峯)은 현재 학가산의 최고봉인 국사봉(國祠峯, 882m)으로 성화를 채화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삼대(三臺)는 삼모봉 동쪽 능선에 있는 학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살았다는 학서대(鶴棲臺),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거움이 있다는 난가대(爛柯臺), 그리고 예천학가산(869.6m) 북릉에 있는 거센 바람을 거닐고 다닌다는 어풍대(御風臺)를 말한다.
난가대 사각정자에서 비박을 틀 생각이었습니다. 벌려 놓은 철조망을 쇠사슬로 얽어놓았는데, 철조망을 다시 뚫고 올라서니 학가산문화환경연구소 건물이네요. 사람은 없고, 빗물 목간통도 있고, 산불감시초소도 센스있게 한쪽 창문이 잠겨있지 않았습니다. 샤워도 하고, 초소내에서 잠을 이뤘네요. 한밤중에 비까지 흩뿌리던데... ㅎ
♤ 난가대(爛柯臺)/ 산불감시초소
난가대는 안동시와 영주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난가대는 송암선생이 지은 이름으로 난가(爛柯)라는 뜻은 바둑이나 음악 등에 심취해서 시간가는 줄 모르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이 대에 오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즐거움이 있음을 의미한다.
- 제1주차장을 지나면서 좌측으로 올라붙어 철망을 만나면 우측으로 돌아내려가다 개구멍으로 통과한다.
잠을 잘 자고 다음날 아침 5시에 출발합니다.
♤ 난가대 이후 돌파
난가대 앞 사각정자에서 뒤편 중간 임도로 올라서면 있는 폐출입문 양쪽 기둥 안으로 들어서서 좌측편 돌계단길을 따라 올라서면 우측으로 잡목이 우거진 평지가 있고, 우측으로 평지를 따라 약간 나가면 펜스 밖으로 나가는 쪽문이 있다. 쪽문을 나서서 급경사 미끄러운 등로를 조심하여 내려서면, 또 다른 펜스가 앞을 막아선다. 또 다른 앞을 막아서는 펜스를 통과하기 위해, 우측 아래로 약 20m 정도 내려서면 암반과 펜스가 연결되는 곳에서 펜스 끝 부분을 밀면 바위 사이로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공간이 나와 그 곳으로 탈출할 수 있다. 부대장 경고판이 있는 철조망 막힌 곳에서 우측으로 내려서서 개구멍을 통해 임도로 내려서는 방법도 있다.
- 난가대에서 마루금은 앞에 보이는 사각정자 뒤로 올라가야하지만 kt와 군부대 철조망을 넘을 수 없으므로 방송국 가는 임도를 따라 우회길을 택하기도 한다.
♤ 학가산(鶴駕山, 882m)/ 국사봉(國祠峯)
학가산은 백두대간에서 남으로 뻗친 문수지맥에 있는 산으로 동쪽은 안동, 서쪽은 예천, 북쪽은 영주와 접해 있으며 날개 있는 사람이 학을 타고 노닐었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달리 하가산(下駕山), 하가산(下柯山)이라고도 하는데, 위치에 따라 달리 보여 예천사람은 '인문봉', 영주사람은 '선비봉', 안동사람은 '문등봉'이라고 부른다. 이 산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왔을 때 쌓았다는 학가산성이 있으며 학가산 자락 석탑리에 있는 돌무더기로 쌓은 네모난 탑에 대하여 <영가지(永嘉誌)>에는 이 산의 한 굴에 능인대사가 숨어 지내며 세속을 멀리 하였는데, 스님 1,000여 명이 부석사에서 찾아왔으나 끝내 그를 만나지 못하자 각각 돌을 모아서 쌓은 탑이라고 적고 있다. 학가산 국사봉은 안동시민들이 정신적인 진산(鎭山)으로 여겨왔으며, 고대로부터 숱한 전설과 설화가 깃들여져 있고 1,300년 전부터는 불교문화가 꽃핀 불교성지이기도 하다. 산 모양이 '날아가는 학과 같다'하여 학가산(鶴駕山)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국사봉은 학가산의 7개 봉우리 중 해발 882m의 최고봉이다. 이 국사봉은 '학의 머리' 혹은 '학 위에 탄 신선'의 모습이라고 알려져 있다. 산 모양이 '날아가는 학과 같다'하여 학가산(鶴駕山)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영주에서는 정상이 평평하게 보여 선비봉, 안동에서는 울퉁불퉁하게 보여 문둥이봉, 예천에서는 그 모습이 수려한 인물과 같다고 하여 인물봉으로 불린다. 이 국사봉은 '학의 머리' 혹은 '학 위에 탄 신선'의 모습이라고 알려져 있다. 국사봉은 학가산의 7개 봉우리 중 해발 882m의 최고봉이다. 서학가산성의 중앙에 위치하여 장군의 지휘소로 쓰였고 정상의 우묵한 바위는 난공불락의 자연 보채(堡砦) 역할을 하였으며 나라(임금)에 제사를 올렸던 곳이기도 하다. 영가지 산천 조에는 학가산 국사봉의 아름다운 조망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사실 국사봉에 올라보면 사방이 낮은 언덕처럼 보이는 조망이 뛰어난 곳이다. 국사봉은 능인굴과 함께 신라시대 능인대사가 수행하던 불교성지로 알려져 있고, 학가산 사랑이 지극하였던 송암 권호문선생은 이 봉을 적성봉(適星峰)이라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 정상에는 안동애봉산악회에서 세운 '학가산(鶴駕山) / 해발 882m' 정상석이 박혀 있는데, 고도 표시가 수정되어 있다. 남동쪽 안동시내 방향. 중앙 아래가 천주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학가산 정상으로 오르는 깎아지른 절벽이 하늘을 받쳐주는 기둥과 같다하여 천주(天柱)라 하였다.
문수지맥은 학가산 국사봉을 지난 당재 갈림능선에서 예천군 보문면을 만나 보문면과 안동시 서후면의 경계를 가르며 남향합니다.
♤ 당재갈림능선/ 이군삼면경계면(안동시 서후면, 북후면 → 예천군 보문면)
국사봉 아래 능인굴을 다녀오고, 이 갈림길에서 지금까지 안동시 서후면과 북후면 면계를 가르며 서향하여 이어오던 맥길은, 예천군 보문면을 만나 보문면과 서후면의 면계를 가르며 남향으로 이어진다.
- 암릉구간에서 로프를 잡고 내려서면 예천 학가산과 당재가 갈리는 갈림길 안부다.
♤ 예천 학가산(882m)/ 현대 지형도에 국사봉보다 0.2m 낮게 표기되어 있다
당재갈림능선에서 직진 상사바위 방향으로 약간 올라 산림청 무선중계기 시설에서 보면 300여미터 전방에 예천 학가산이다. 예천 학가산과 그 아래 어풍대를 보고 오는데 10분이면 충분하다.
♤ 당재(堂峴)
당재는 안동시 서후면 재품리 천주마을과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느리티리 마을 경계에 있는 고개로 두 마을로 이어지는 시멘트 도로가 있는데 예전에 서낭당이 있어서 당재라 부르는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당재에는 좌우를 넘는 포장 도로가 지나는데, 좌측에는 천주마을이 1.4km 떨어져 있고, 우측에는 느리티리[국가정보원 지도상 '느르치'] 마을이 0.4km 떨어져 있다.
♤ 예천 보문면 산성리 느리티리 마을
우측의 '느리티리' 지명은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이 하늘 거미가 줄을 친 형국이라 산 모양이 '느릇하다(느릿하다)'하여 '느릇'이라 하였고, 좌측의 천주마을 지명은 학가산으로 오르는 깎아지른 절벽이 하늘을 받치는 기둥과 같다하여 '천주'라 하였다.
문수지맥은 당재를 지난 이군삼면능선에서 안동시 풍산읍을 만나 풍산읍과 예천군 보문면을 가르며 서향하여 원통재(산성재) 이후까지 이어집니다. 다행히 알바주의 지점에서 천자봉님과 무한도전 화살표 표지가 안내를 잘 해주고 있습니다.
♤ 이군삼면갈림능선(560m, 예천군 보문면, 안동시 서후면 → 풍산읍)/ 알바 주의 지점
이 갈림 능선은 삼읍·면이 갈리는 갈림길(예천군 보문면, 안동시 서후면 → 풍산읍)로, 직진 방향으로도 시그날이 많이 달려있어서 무심코 진행하다 보면 능선을 벗어나 재를 넘어갈 수 있는데, 우틀하여 올라서야 한다.
- 삼면 갈림능선 안부(560m)에 올라서 우측 능선으로 오른다. 당재에서 약 20분 오르면 광산(623.5m)이다.
지맥은 원통재에서 예천 보문면과 안동 풍산읍의 군계이자 면계를 가르며 남서향으로 진행해 나갑니다.
♤ 원통재/ 산성고개/ 삼거리/ 사과 과수원
안동시 풍산읍 죽전리 관음골 마을에서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산성마을로 이어지는 고개로 정상에는 수백년은 된듯한 팽나무 한그루가 고개를 지키고 있다. 원통재 삼거리에서 남남동 방향 아래에 풍산읍 죽전리 관음절마을이 위치하고 있고, 북동 방향에 예천 보문면 산성리 산성마을이 위치하고 있으며, 북서방향 임도는 갈마령으로 이어지는 임도다. 이 고개는 북쪽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산성마을에서 그 이름을 따와 산성고개로 불렸으나. 6.25 당시 미군의 폭격에 의해 수많은 주민이 사상 혹은 실종되어 원통재로 바뀌어 부르게 되었다 한다.
♤ 산성리 미군 오폭
6•25전쟁 당시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에 미군이 폭격을 가해 주민34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미군 문서가 공개됐다. 이 문서에 따르면 미군은 51년 1월 19일 오전 6시부터 오후 7시 사이에 산성리에 공습을 가해 주민 34명이 사망하고 42명이 중상을 입는 등 모두 136명이 사상 또는 실종됐으며 가옥 69채가 파손되거나 불에 탔다. 문서는 이어 "북한군이 산성리 일대 지역을 보급과 숙박지로 이용했으며 현장에서 군용 기름과 탄약 등이 발견됐고 폭격 전에 주민에게 소개명령을 내렸다"며 "폭격은 정당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대해 유족회는 "당시 산성리에서 약 8㎞ 떨어진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에 500여명의 북한군 1개 연대가 머물렀고 신전리 주민들은 모두 소개됐었다"며 "한창 타작을 하던 산성리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폭격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경상북도의회는 2000년 1월 19일부터 사흘간 산성리 현장조사를 벌여 "당시 사망한 주민은 모두 50명이며 미군이 신전리에 주둔하던 인민군 토벌을 하려다 지형이 비슷한 산성리를 오인해 폭격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었다.
♤ 갈마령(葛馬嶺)
578m봉과 618m봉 사이 안동 풍산읍과 예천 보문면의 경계, 임도가 지나는 잘록이 안부이다.
♤ 보문산(普門山, 642.6m)/ 산불감시초소
보문산은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와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와 수계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보문산은 산 북서쪽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 절골마을에 신라문무왕 17년(677년) 의상대사가 세운 예천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보문사가 있어 더 유명하다.
- 보문산에서 내려서는 길은 삼각점이 있는 좌측이다. 산불초소와 정상 표시 사이로 난 등로는 보문사로 내려서는 길이므로 주의하여야 한다. 보문산 내림길은 예전에 산불이 났던 지역이라 심심찮게 조망이 열리고 안동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중대바위 앞 갈림 능선 이정표에서, 좌측으로 약 30m 정도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되돌아 내려와야 합니다.
♤ 중대바위(中隊岩)/ 탕건(宕巾)바우
중대바위는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에 있는 암릉으로 지맥길에서 30m 정도 좌측으로 있고 군대를 통솔하는 용맹한 장군이 투구를 쓴 모습과 흡사하여 붙혀진 이름이고 암릉아래에 중대사라는 절이 있어서 중대바위라 불린다는 설이 있다. 중대바위 발 아래에는 계단식 다락논이 있는 서미골로 이어지는 서미1리 마을이다. 중대바위를 남쪽 서미마을 사람들은 중대바우. 장군바위. 탕건바우라고도 부른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신성스럽게 받들어지는 골메기와 같은 신성물이다.
- 중대바위에 올라서서 되돌아 보면 지나온 쪽으로 학가산 정상부와 방금 전 보문산이 보이고, 가야할 방향으로 잡목지라는 507.5m봉이 보인다.
♤ 안동시 풍산읍 서미1리 마을
서미1리 마을은 서애 류성룡과 청음 김상헌 두 정승이 후학을 양성하면서 말년을 보냈고 학조대사, 김학순 등과 얽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대표적 은자(隱者)의 마을이다. 서미마을은 풍산현에서 북쪽 15리 오적산 남쪽에 있다. 특히, 서애 유성룡은 이곳 서미마을에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현재 서애가 거처했던 농환재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을 뿐더러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아 후세인들에게 아쉬움을 주고 복원을 하는데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반대로 김상헌의 흔적은 이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후 안동 소산으로 물러나 청원루(淸遠樓)에서 생활하다가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초가집을 지어 목석거만석산방(木石居萬石山房)이라 이름 짓고 은거하였다. 김상헌 유허비는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 속칭 '빗집바우' 위에 있다. 빗집바우는 김상헌 선생이 제자들을 모아 놓고 강론하던 서간사(西磵祠) 뒤쪽에 위치한다. 빗집바위 위에 세워진 단칸 팔작지붕 안에 '청음선생목석거유허비(淸陰先生木石居遺墟碑)'가 있으나, 글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은 마모가 심하여 알 수 없다. 김상헌 유허비가 세워진 빗집바위 앞면과 왼쪽 옆면에는 김상헌의 7세손 김학순이 안동부사로 있으면서 김상헌을 추모하기 위해 새긴 바위글씨가 있다. 바위글씨 앞면에는 '목석거경진중춘선생7대손본부사학순근서(木石居庚辰仲春先生七代孫本府使學淳謹書)', 옆면에는 '만석유허백세청풍(萬石遺墟百世淸風)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높은 관직에 진출한 사람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오늘날에도 판사. 군수까지 나왔고 전쟁에 나간 동리 사람들이 전사자 한명 없었다는 것은 중대바위의 영험으로 여겨 마을사람들은 중대바위를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있다.
♤ 풍산읍 신양리 신양저수지(新陽貯水池)
신양저수지는 원래는 작은 못이었으나 경북 안동 풍산읍 신양리 지역에 농업용수를 원활히 공급하기 위하여, 1987년 착공하여 1997년 준공한 만수면적 약 40,000평의 계곡형 관개용 저수지다. 등로 좌측으로 신양저수지가 보이고 그 옆으로 중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하늘 가운데는 검은 먹장구름이 얹혀져 있고, 가장자리는 맑게 개인 푸른 하늘이 트여 그야말로 햇볕은 가리고 산마루금은 살펴볼 수 있는 최상의 날씨였습니다.
♤ 산불잔해지역
2011년 4월 2일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에서 발생한 산불은 안동과 예천의 산림 186ha를 태웠다. 불은 삽시간에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와 신양리, 서미리 등으로 번지면서 민가에도 큰 피해를 줬다. 산불로 황폐해진 산림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려면 침엽수는 30년, 활엽수는 50년이 흘러야 가능하며, 생태적 회복은 100년이 걸린다.
- 507.5m봉에 오르며 산불 피해구간 엄청난 범위가 조망된다. 507.5m봉에서 백붕현 구간은 길이 보이지 않고 잡목이 많아 야간산행은 피해야할 구간이다.
중대바위에서 내려서다 임도삼거리를 만나고 임도길 좌측으로 오치고개까지 내려갑니다. 보문산에서 오치고개를 넘어 백붕현까지(약 3.7km)는 잡목으로 등로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오치고개부터 잡목숲을 헤치고 오릅니다.
♤ 오치(烏峙)고개/ 중앙고속도로 보문터널 위
오치고개는 안동시 풍산읍 신양리 오치동과 예천군 보문면 오암리 오치마을의 경계에 잇는 고개로 정상에는 이동통신탑과 면계(面界)를 표시하는 안내판과 가건물이 있다. 북쪽 보문면의 '오치마을'과 남쪽 풍산면 신양리 '오치동'에서 그 이름을 따 왔다. 특이한 점은 다른 시 군의 면에 있는 마을 이름이 똑같이 오치마을이다. 지명 유래를보면 마을 형국이 마치 까마귀가 먹이를 쪼아먹는 형국을 닮았다고 해서 까마귀 오(烏) 언덕 치(峙)자를 써서 오치라 하였는데 오티는 오치에서 음이 변한 것으로 이 오티고개의 동쪽은 안동땅이고 서쪽은 예천 오티인데 예전에는 고개마루에 서낭당이 있어 당고개라고도 하였다.
- 55번 중앙고속도로 영주와 서안동구간 보문터널 위를 지나는 오치고개이다.
♤ 이군삼면봉(501m, 안동시 풍산읍, 예천군 보문면 → 호명면)
문수지맥은 보문터널을 지나 507.5m봉 직전 삼면봉(501m)에서 풍산읍과 보문면을 가르며 지나온 지맥의 우측(북쪽)이 호명면으로 바뀌어 풍산읍과 호명면의 면계를 가르며 서남향의 ‘S자’ 형태로 진행한다.
- 507.5m봉 직전에 있는 약간의 공터가 있는 삼거리 갈림봉으로 아무런 표시가 없다.
♤ 삼각점봉(507.5m)
예전에 대봉산이었다. 오백육(506.9m)고지라는 말뚝이 박혀있다. 삼돌이님의 '문수지맥/ 대봉산 506.9m' 표지판이 오랫동안 이곳을 지키고 있었는데, 대봉산이 자죽고개 너머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최근 부뜰이운영자님이 고도를 나타내는 507.5m봉 산패로 교체하였다. 남쪽으로 '역C자' 형태로 진행하면 자죽고개 위에 또 다른 대봉산(217.5m)이 있다. 조망이 좋아 가야할 방향으로 검무산이 뾰족하게 보인다. 좌측(남쪽)으로 풍산읍 현애리 농공단지가 있는 풍산뜰이 내려다 보이고, 우측으로 예천읍내가 내려다 보이며 그 뒤로 멀리 소백산을 향해가는 백두대간 마루금도 보인다.
- 글씨가 있긴한데 자세히 식별이 불가능한 삼각점이 있다.
♤ 풍산읍 현애리
풍산읍 현애리는 풍산읍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30리 정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감애, 뱁재, 장여골, 선바우 등 네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현애리에는 한국 근현대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민족운동가이며 반침략 반독재의 화신으로 평가받는 하구(何求) 김시현(金始顯, 1883~1966) 선생이다. 경계지 산 바로 아래 위치한 후안동 김씨 북애공 종택이 그의 생가이다. 선생의 고모부는 예안의병장을 지낸 이인화 선생이며 매제는 추강 김지섭의 동생 김희섭이다. 또 속리산 문장대를 내려선 밤재 지점에 있는 의병장 운강 이강년은 이인화 선생과 처남매부 사이다. 영화 ‘밀정’이 흥행하면서 실존 모델인 의열단원 김시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는 1919년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다. 이로 인해 경북 상주에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탈옥한 뒤 상하이로 망명했다. 중국 지린으로 가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담했다. 본격적으로 무력광복 활동을 펼친 그는 군자금 마련과 단원 모집을 위해 국내외를 드나들며 거사를 벌이고 체포 투옥되는 일을 광복 때까지 반복했다. 의열단장인 김원봉은 그를 단원 가운데 가장 신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0년 김규식•여운형 등과 함께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혁명단체대표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동년 9월 의열단이 국내에 들어와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할 목적으로 폭탄을 반입하려다 발각돼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1년간 복역했다. 김시현이 항일투쟁에 얽힌 일화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923년 일어난 이른바 ‘황옥 경부사건’으로 불리는 폭탄밀반입시도였다. 영화 ‘밀정’은 이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19년을 감옥에서 보냈던 그는 1952년 백범 암살 배후로 이승만을 지목하여 저격을 모의했다. 1952년 6월 25일 류시태(당시 62세)를 통해 부산에서 이승만을 저격하려던 계획이 발각되면서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후 그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복역하다 1960년 4•19혁명을 계기로 석방됐다.
묘지 사이로 백붕현으로 내려섭니다. 백붕현 이후로는 등로상태가 좋습니다.
♤ 백붕현(白鵬峴)/ 뱁재/ 백아현
백붕현은 풍산읍 현애리 뱃재마을과 현풍지에서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백골마을로 연결되는 길목에 있는 재를 일컫는데 재가 험하고 길어서 도적이 자주 출몰하기에 백명이 모여야만 재를 넘기위해 길을 재촉한다고 하여 백아현 또는 백붕현이라 한다. 또는 백붕현은 산의 형상이 백붕이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붕새(鵬새)는 장자(莊子) 〈소요유편〉에 나오는 상상 속의 새로, 북쪽 바다에 사는 상상의 물고기 곤(鯤)이 변해서 된 새이다. 곤은 크기가 몇 천리나 된다고 하는데, 붕새 또한 등의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한다. 한번에 구만 리를 날아 오르는데 날개는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고 파도가 삼천 리에 이를 정도로 큰 바람을 일으킨다. 이 새는 살고 있는 북쪽 바다를 벗어나 끊임없이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이는 세속의 삶(곤)에서 벗어나 영적인 깨달음을 얻은 상태(붕)로 거듭나서 하늘나라(남쪽 바다)로 가려고 하는 인간을 비유하여 나타내는 이야기이다. 즉 붕새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마음껏 누리는 위대한 존재를 의미한다고 한다.
- 도로 한가운데 있었다는 작은 동산 로타리는 사라지고 없다. 좌측 밭으로 올라가는 양회임도로 올라선다.
♤ 자죽고개
우수 축산물 브랜드인 안동참마원형돼지축사를 지나 내려서면 아스팔트 포장도로인 자죽고개는 좌측(북동쪽)으로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 감애마을과 우측(남서쪽)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황지리 주막걸마을을 잇는 고개이고 좌편 인근 마을은 동막마을이다. 맥길은 정면 봉우리로 이어지는데, 아스팔트 도로따라 앞쪽 축사까지 이동하여 그 우측 묘지지대로 올라서기도 한다.
♤ 대봉산(大鳳山, 217.5m)/ 예천군-안동시 경계
자죽고개에서 20분 지난 능선산에 있는 산으로 우틀하여 내려선다. 부뜰이운영자부부님이 설치한 준희선생님 산패와 백붕현에서 보았던 안동웅부산악회의 빨간 표지판이 있는데 등로 우측에 메어져 있어서 못보고 지나칠 수도 있다.
- 대봉산을 내려서며 풍산농공단지가 가까이 보인다.
♤ 뱃재
목재계단이 있는 푹 꺼진 안부이다. 우측은 예천 호명면 직산리, 좌측은 풍산읍 현애리방향이다.
- 뱃재 이후 양회임도를 만나 우틀하여 포장도로로 내려서면 신득골고개이다.
♤ 신득골고개/ 굴뚝고개/ 수박골마을/ 식수 조달/ 팔각정자
수박골마을은 풍산읍 괴정리와 예천군 호명면 직산 1리 재궁마와 고개를 사이에 두고 경계하고 있는 마을이다. 예부터 이 고개는 번개탄을 만드는 숯 공장이 있어서 항상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굴뚝고개라 불렀으며 마을 이름은 수박을 많이 재배한다고 붙였다.
♤ 독점산(248.4m)/ 삼각점봉/ 벤치 2개
낙동강 건너 의성군 다인면과 안사면 사이에 소재한 독점산(331.4m)은 옛날 도적이 많았던 산으로 도적들이 이산을 독점하였다는 의미로 독점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전해오는데 이곳에 있는 독점산과 고도도 다르고 지역도 달라 다른 산으로 보인다. 너른 풍산뜰이 바라보이고 멀리 하회마을의 뒷산인 화산도 조망된다. 독점산은 오미1리의 뒷산으로 마을을 지나 검무산으로 향한다.
- 독점산 정상 이후부터 칡넝쿨과 잡목들로 한동안 등로가 보이지 않아 힘들었다는데 의의로 길이 좋다. 독점산에서 마을로 내려서는 등로 옆으로 죽암서실이 있고, 안동에서 독립운동가를 다수 배출한 오미1리 고택들을 지나게 된다. 예전 EBS에서 고택관련 다큐를 촬영했는데 그때 오미동 종택이 소개되었다.
♤ 안동시 풍산읍 오미1리
이 곳 산 아래 마을 문중에서 대를 이어 출중한 인물들이 나오고 마침내 한 집안에서 8형제가 소과에, 그 중 5형제가 대과에 급제하는 경사에 이르자 주위에서 이를 시기한 무리들이 역모의 지형을 우려하는 상소를 올려 어명으로 지관을 보내 조사토록 하였다. 지관이 어명을 중히 여겨 일단 혈을 끊고 후에 자세히 살피니 멀지 않은 마을에서 산혈이 끊어져 있어 역모의 징조가 아님을 아뢰니, 오히려 팔련오계(八蓮五桂)를 칭하하시며 오미라는 마을 이름을 내려 주셨다고 전해온다.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종택마을 입향조는 허백당 김양진이며, 그의 증손 김대현(1553~1602)에 이르러 풍산 김씨 대종가를 이룬다. 지금의 풍산 김씨 종택은 허백당 종택으로도 불리는데, 선조 때(1576년) 부친 김농의 명을 받아 김대현이 창건했다. 김대현은 아들 8명을 두었는데 모두 사마시에 합격했고, 그중 5형제(봉조, 영조, 연조, 응조, 숭조)는 문과에 급제한다. 이에 인조는 이 가문을 ‘팔련오계(八蓮五桂)’라 칭하면서 ‘오미(五美)’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판 멕베드가 될뻔 했다.
♤ 장판재
이 곳은 오미마을 뒷산 대지산(大枝山, 행갈) 선영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산허리로 선인들이 장기를 두었던 곳이라고 한다. 전래한 말에 의하면 아직 오미마을이 형성되기 전에 풍산김씨 10세 휘손공(徽孫公)이 하양현감(河陽縣監)으로 있을 때 안동 고산(故山)에 성묘차 왔었는데 산 너머 예천 땅 음산리에 사는 부호 박씨 노인이 찾아와 내기 장기를 제의하면서 자기가 지면 십리쯤 되는 대지산 전역을 바치고 공이 지면 타고 온 흰 나귀를 주기로 약속하고 장기를 두었다. 한판이 끝날 무렵에 박씨노인이 일부러 져주는 듯 하면서 품고 있던 한 폭의 산도(山圖)를 바치기에 사양치 못하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지산 전역이 지금의 풍산김씨 선영으로 되었는데, 대지산은 학가산 낙맥으로 원효· 의상대사가 머물다 간 길지로서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인데 주인이 될 현인을 찾아 바쳤다는 설이 있다.
- 장판재에서 우측으로 행갈마을 방향 마루금 가까이까지 밭이 올라와 있다
♤ 오미봉(187m)
장판재 장기판 쉼터를 지나 4분여 나가 잠시 올라 187m봉에서 좌향하여 내려선다. 187m봉'에는 신도시둘레길 이정표와 서래야 님의 오미봉(187m) 코팅지 표지판이 붙어 있다.
♤ 오미동도림강당(五美洞道林講堂)갈림길/ 양회임도
좌측 150m 아래에 도림강당이 위치하고 있다. 오미동 도림강당(五美洞道林講堂)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과 그의 자제 8형제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추원사와 그에 딸린 강당을 말한다. 도림강당은 1805년(순조 5)에, 추원사는 1806년에 세웠다.
♤ 대덕사갈림길(218m봉)/ 면계갈림봉(풍산읍-호명면 → 풍산읍)
이 갈림봉에서 면계는 서쪽 광석산 전망대 방향으로 이어지고, 예천 호명면과 잠시 헤어져 좌측으로 온전히 풍산읍 안으로 들어서서 남서향하여 개고개 이후 검무산에서 풍산면을 만나게 된다.
문수지맥이 개고개를 지날 때는 군계이자 면계를 잠시 떠나 온전히 풍산읍 안을 지납니다.
♤ 개고개/ 924번 지방도로/ 2차선 포장도로
경북 안동시 풍산읍 괴정리에 있는 자연마을의 한 곳인 개상골(개상곡, 체상골) 마을에 있는 고개라서 붙여진 이름으로 체상골은 지형이 체상(콩나물을 기를 때 시루 위에 걸치는 V자형 나뭇가지)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마루금은 밭 가운데를 횡단해야 해서 수로 옆 농로길을 따른다. 검무산 정상 1.4km 이정표가 있다.
검무산에서 합수점까지 약 27km가 나옵니다. 검무산 아래 모텔에서 1박 후 아침 일찍 출발해도 충분하게 용궁에서 점촌으로 나가 서울로 상경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 검무산(劒舞山, 331.6m)/ 면계(풍산읍-풍천면)/ 2등삼각점 안동 24
검무산은 경북 안동시의 풍산읍 오미리에 있는 산이다. 문수지맥은 검무산에서 풍천면을 만나 서향하면서 풍산읍과 풍천면의 면계를 가르며 지납니다. 검무산 오름은 긴 계단으로 이어진다. 산 남쪽은 갈전리이고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예천군 경계에 닿는다. 산 정상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서 산 아래를 조망하면 시야가 막힘이 없이 너른 들을 관찰할 수 있다. 검무산은 도청 신청사 조성지 동북쪽 경계 지점에 해당하는데, 일부 풍수가들은 도청의 주산 역할을 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검무산에 대한 기록은 『조선지지자료』와 『조선지형도』에서 비로소 확인된다. 『조선지지자료』에 검무산이 "풍서면(지금의 풍천면 일부) 갈전동에 있고 풍북면(지금의 풍산읍 일부)과 경계가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지역에서는 '문학산'이라고도 부른다. 국토지리정보원은 장수가 칼을 잡고 춤을 추는 형태라 하여 검무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 올라온 방향 우측 데크 계단길을 따라 경찰청 방향으로 긴 계단을 내려선다.
♤ 경북도청신도시
경북도청 신도시는 안동시 풍천면, 예천군 호명면 일원 11㎢ 부지에 2027년까지 인구 10만 도시를 목표로 조성되고 있다. 앞쪽 정면에 도청 신청사가 위치하고 좌측 앞쪽에 호민저수지가 보이며, 그 앞쪽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경북도청 신도시가 오는 2027년 완공을 목표로 현재 2단계 기반공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신도시 인구가 2만 명 수준에서 정체를 보이자 경상북도가 인구유입을 늘리고 정주 여건을 개선하고 자족도시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신도시 서쪽의 유보용지(문수지맥 지역)를 이른 바 '화이트 존'으로 조성해 바이오와 백신, 지식산업 기업을 유치한다. 또 동쪽 호민지는 대구 수성못이나 수원 광교 호수와 같이 호텔과 주상복합 등 특화단지로 조성하고 여가,문화 공간을 확충하는 2단계 사업계획을 대폭 수정했다.
경찰청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로 따라가면 됩니다. 길은 아주 좋습니다.
♤ 이군삼면봉(풍천면, 풍산읍 → 호명면)
거무산 직전 이군삼면봉에서 우측이 풍산읍에서 잠시 헤어졌던 예천군 호명면을 다시 만나 예천군 호명면과 안동시 풍천면의 면계를 따라 대체로 남서향하다 갈전리 수로를 지나 임도갈림길에서 서향하게 된다.
- 삼거리갈림봉으로 지맥길은 직좌틀한다.
♤ 거무산(226.9m)
비석없는 묘지가 등로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 우방아이유셀 아파트단지 상가식당
우방아이유셀아파트 정문 gs편의점, 상가단지 식당
- 아파트 뒤편 깨끗한 정자에서 90도 좌틀하여 아파트로 내려서는데, 중국여자가 하는 식당에서 제육덥밥을 시켜 콜라와 먹고 주먹밥도 하나 마련합니다. 어휴~ 30분 예상했는데 어찌나 느린지 시간을 오바했어요. 편의점에서 빵 3개와 콜라 한병, 식수 2병 그리고 팩소주 한병과 볶음땅콩을 안주로 담습니다. 예천 봉투를 드릴까요, 안동 봉투를 드릴까요 하고 묻네요.^^
♤ 축제의숲 산책로
도로 공사가 끝난 지점에서 맥길은 정면 야산으로 이어지지만, 인공 물길이 가로막고 있다. 이 곳에서 좌틀하여 옛날 다리 한울교를 건너 방향을 잡는다. 좌측 다리를 건너서 넓게 밀어놓은 대지를 진행한다. 예전엔 시멘트 임도가 좌측으로 꺾이는 갈림길에서 직진 방향으로 들어서면 선답자들의 시그날이 길 안내를 하고 있었다고....
좌측으로 공항 관제탑 처럼 높은 건물이 보이고, 신도시 개발예정지로 펼쳐놓은 끝없는 벌판을 횡단합니다.
♤ 시군계/면계갈림봉(146m, 호명면-풍천면 → 예천군 호명면)
옹골고개 직전 광산김씨 양간공파 납골묘에서 146m 면계갈림봉에 올라선다. 잠시 내려서다 면계는 계속 남서쪽 직진 능선으로 보내고, 지맥길은 안동시 풍천면과 완전히 헤어지고 우향하여, 온전히 호명면 안으로 들어서서 삼면경계면을 남쪽에 두고 북서향과 남서향으로 진행하여 지보면 경계를 만나러 간다.
차가 씽씽 지나는 비접골 고개에서 남은 거리가 합수점까지 21.3km정도 임을 확인하고 공사장 입구 수도관에서 비박을 틀기로 합니다.
♤ 비접골고개/ 비접곡(飛蝶谷)/ 비정골
비접고개는 금릉리와 암천리를 이어주는 927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갯마루인데 경북도청이 이전하며 도로가 거의 폐쇄되고 잊혀진 도로가 되어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농사철 농기계들 통행로로 전락했다. 예천 14km, 호명 4km도로표지판이 서있는 묵은 2차선 포장도로였는데 이제 신설도로가 지난다. 건너편 능선을 향한다.
♤ 예천군 호명면 금릉리(金陵里)
새마 동쪽에 있고, 마을의 地形이 나비가 날아가는 모양과 같이 생겼다 하여 비접골이라 하던 것이 변음되어 비정골로 불리어진다고 한다.
♤ 삼면경계면의 북쪽을 지난다./ 지보면 면계(호명면, 풍천면 → 지보면)
경북도청 이전으로 삼면경계면에 대규모 택지 조성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비접골고개와 옹골고개 중간 지점은 현재 택지조성공사로 파헤쳐져 어딘지 모를 지점에서 좌측으로 지보면을 만나 서향하고, 삼면경계면은 남쪽에 있다. 지맥길은 지보면 암천리와 호명면 한어리의 면계이자 리계를 가르며 서향하여 나간다.
♤ 한어리(閑漁里)/ 한터, 한기(閑基), 한어리(閑於里)
조선 중종 때, 지형이 마치 연꽃이 물에 뜬 형국이라고 하고 어지러운 세간을 피해 한가롭게 숨어 살면서 세월을 보낼 곳이라 하여, 韓정승이라는 이가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하며, 광산 盧氏들의 조상이 붙인 이름이라 전한다.
♤ 갈포(葛浦)/ 갈피동
예천군 지보면 암천리 갈포마을이다. 예천임씨(醴泉林氏) 세거지이며 옛날 용궁, 예천, 안동군계의 마을이다. 너리바우 북서쪽에 있고, 1872년 갈대밭을 개척하여 마을을 개척했다 하여 갈피동 또는 갈포라 부른다고 한다.
♤ 142m봉/ 면계(지보면-호명면 → 지보면)
갈포를 지난 지점 면계갈림봉인 142m봉에서 호명면과 지보면을 면계로 서향하던 지맥길은 이 봉에서 면계를 북서향으로 보내고, 온전히 지보면 안으로 들어서서 어신리와 암천리(岩川里)를 가르며 남서향으로 이어진다.
♤ 삼각점봉(200.1m)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능선 수준의 봉우리로 4등삼각점 예천 466이 있다. 삼돌이님 199.4m봉 깨진 산패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 봉우재/ 신설임도
봉우재에서 비포장 임도따라 좌측(남쪽)으로 나가면 지보면 신풍리 못안 신풍저수지로 이어지고, 우측(북쪽) 포장도로 방향은 지보면 다암저수지와 신전마을로 이어진다. 아무런 표식도 없는 고갯마루이다.
♤ 삼각점봉(233.5m)
4등삼각점 예천 464/ 2003 재설이 있다.
- 그린피아 '문수지맥 / 232.9m' 정상 표지판이 부뜰이운영자님에 의해 233.5m봉 산패로 교체되었다.
♤ 산불감시초소 → 목조건물 무인산장으로 바뀌어 있다.
산불감시초소 30m 전에서 우측 사면으로 맥길이 이어지나, 지맥 등로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감시초소봉에 올랐다가 되돌아 내려서서 마루금으로 복귀한다. 산불초소를 지나서 직진하는 능선은 불미고개를 지나서 연화산(267.3m)으로 가는 능선이므로, 직진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하는 곳이다. 지금까지 남서향으로 이어져 온 맥길은 이 산불감시초소봉을 지나면서 부터 북서향으로 방향이 바꾸어 동막고개 이후까지 이어진다.
이동통신 예천 지보 중계탑이 보이는 소화리 동막마을로 내려서서 28번 신국도가 지나는 암거를 통과하여 약간 나서면 28번 구국도가 지나는 동막고개에 도착합니다.
♤ 지보면(知保面) 소화리(所華里) 동막(東幕)고개
동막마을은 30여 가구의 남양홍씨(南陽洪氏) 집성촌으로, 옛날 주막거리에서 술을 팔던 구씨(具氏) 노파가 양지 바른 이곳에 술청을 차리니 술맛이 하도 좋아서 동쪽 주막이 있는 고개란 뜻으로 동막고개가 되었다고 하며, 이 고개마루에서 빗방울이 남쪽으로 떨어지면 낙동강(洛東江)으로, 북쪽에 떨어지면 내성강(乃城川)으로 흘러서 삼강(三江)에 가서야 상봉한다.
- 나부산 6.3km 동막고개 이정표가 있다. 우측에 보이는 양회임도를 따라 올라선다.
♤ 소나무 한그루가 서있는 247m봉/ 신설 전망데크
좌측으로 송평리. 어신리가 내려다 보이고, 우측으로 예천 지보면 소화리. 마전리 일대와 멀리 낙동강 건너편 의성군 다인면 소재 보현지맥 상 비봉산 조망이 트이고, 그 우측 멀리 점촌, 상주가 가늠된다.
♤ 우봉(279.3m)
우봉을 지나면서 북서향으로 이어오던 맥길은 남서향하다, 195m봉에서 다시 북서향하여 수레길을 따라 만촌고개까지 꾸준히 내려서게 된다.
♤ 만촌(晩村)고개/ 만의고개
'분이네 벌꿀' 농막에서 내려서면 볼록거울이 있고, 양회임도에서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우측 가까이에 만화리 만촌마을이 있다. 만촌마을은 만촌(晩村)과 방화(芳華)의 첫머리 字를 딴 만화리(晩華里)의 마을로 마내동, 만의동(晩義洞)이라고도 한다. 40여 호의 용궁전씨 집성촌으로 취락이 형성된 것은 약 150년 전이다. 처음 이름은 만의동인데, 등 너머 소화리(所華里)에 속한 들 이름인 「마느실」에서 동리 이름을 따 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만촌고개 지나자마자 작은 둠벙과 농막을 지납니다. 동남아 인부들인지 배추밭에서 서너명이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236m봉을 지나.. 임도삼거리로 내려섰다 다시 계단으로 올라서고... 우측 골짜기에 양계장이 있는지 닭 홰치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 산불초소봉(332m)/ 신설 2층 팔각정자
산불초소 옆 정상에 매년 정월 초하루 일출을 볼 수 있는 나부산(羅浮山) 제단이 있어서 나부산으로 착각하기 쉬운 곳인데, 나부산은 이 봉에서 약 1km 정도 더 진행하면 나오는 봉우리다. 나부산은 나비가 나는 형상이라하여 羅浮山으로 적고 있는데, 이곳 제단에는 '뜰 부(浮)'자 대신 '부유할 부(富)'자를 써서 羅富山으로 표기하였다.
- 전망이 두루 좋아 산불초소봉에서 북서쪽으로 진행해야 할 나부산과 그 뒤로 용궁면이 조망되고, 북쪽으로는 개포면 예천비행장과 예천읍이 가늠되고, 그 우측으로 새로 생긴 경북도청 신청사 주변 아파트촌이 보인다. 남쪽으로는 낙동강이 굽이굽이 돌아 흐르고 그 너머로 보현지맥 상의 의성군 다인면 비봉산이 높이 솟았다.
♤ 나부산(羅浮山, 333.4m)
통나무가 솥뚜껑을 이고 있는 정상 표지가 세워져 있는 나부산 정상 가운데에는 묘지 한기가 있다. 나부산은 경북 예천 지보면 마산리에 있는 산으로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이룬 문수지맥의 끝자락에 있다. 낙동강과 내성천이 만나는 지역의 동쪽 연안으로 『여지도서』에 용궁의 관아 남쪽 20리에 있으며 안동의 학가산에서 뻗어 나온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지도와 조선지형도에서도 지명이 확인된다.
- 나부산 정상에서 진행해야 할 방향으로 지맥길 멀리 용궁면 소재지가 보이고, 중앙 우측으로 회룡포가 약간 보인다.
♤ 예천군 지보면 매창2리 갱장골
지보면 매창2리 매화촌 뒷산이 나부산이다. 그 산 모양이 마치 용이 낙동강에서 놀다가 언덕에 나와서 여의주를 물고 입을 오물거리는 모양 같다고 한다. 그리고 용의 입에 해당하는 자리에서 약수가 나왔다고 하며, 용의 입안에서 나는 물은 효험이 좋아서 지팡이를 짚고 온 환자가 이 약수를 먹으면 병이 나아, 짚고 온 지팡이를 나뭇가지에 그냥 걸어놓고 갔다고 해서 그 골 이름을 쾌장골 또는 갱장골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건너편에 절이 있었는데 절 주지가 가만히 보니 절에 불공을 드리로 오는 사람은 없고 약수터에 사람들이 몰려드니 심술이 나서 약수터 관리를 소홀히 하여 약수터가 없어지고, 또한 얼마가지 않아 절도 망하였다 한다. 지금은 주춧돌과 기와 조각만이 남아 있는데 <용궁읍지>에는 용곡사라고 하고 『대동여지도』에도 실렸다. 또한 어떤 설에 의하면, 이 약수는 먼 곳에서 오는 환자는 병이 잘 낫고, 가까운 곳에서 오는 환자는 별로 효험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다 멀리서 오는 환자들이 마을 한복판으로 많이 다니니 마을사람들의 피해가 많아져서 그 약수터를 소홀히 관리하였으며, 일하는 농부들이 약수터를 식수 등으로 쓰다가 약 200년 전쯤에는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약수터가 있는 주변에는 용에 얽힌 지명이 많은데 마산리의 용포동을 비롯하여 용샘, 용소, 쌍용골, 용궁면의 회룡, 비룡산, 의성군 다인면의 용곡 등 있다. 이 용의 형상을 보자면 매창2리 뒷산의 나부산에서 살펴보면 잘 나타나는데, 용의 머리는 풍양면 쪽이고 용의 꼬리는 마산리의 용포동 뒷산이 되며 용의 등은 현재의 나부산이라 한다. 지금도 팔도지리 풍수가가 이 곳을 많이 다녀가는 곳이기도 하다.
♤ 마산고개(215m)
마산고개는 경북 예천군 지보면 마산리에 있는 마산이라는 자연마을 뒤 고개라서 붙은 이름으로, 나부산에서 계속 내려서다가 잠시 올라 갈림봉(279m)에서 우틀하여 내려서면 만나는 잘록이 안부이다. 마의태자가 경주에서 충주를 향해 낙동강과 내성천의 시물을 건너며 눈물을 흘렸다는 전설을 품고있다.
♤ 지보면 마산리(馬山里) 마산(馬山)마을
마산마을은 조선조 선조 때 호성선무원종공신(扈聖宣武原從功臣) 부사직(副司直) 밀성인(密城人) 박경운(朴擎雲)이 임란(壬亂) 때 피난지를 찾아다니다가 내성천(乃城川)과 낙동강(洛東江) 사이 산간지에 자리잡아 보니, 앞산이 나비와 같이 생겨서 나비는 꽃을 좋아하므로 마을 터를 꽃으로 여겨 화산(花山)이라고 칭하여 오다가, 100여년이 지난 후손들이 마을 주위 산이 말과 같이 생겼다 하여, 말은 용맹한 짐승이라 후손이 용맹스럽고 번창하라는 뜻으로 다시 마산(馬山)이라 개칭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당시 마을 남쪽 입구에는 삼태칠성(三台七星)의 거북과 같은 바위가 마을을 지켜주므로 재해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형체가 뚜렸하게 남아 있으며, 밀성박씨 10여대 후손들이 살고 있다. 한 때 마을 입구에는 安東張氏와 李氏가 번창하게 살다가 지금의 龍浦, 外坪, 泉香 등지로 옮겨갔다 한다.
253m봉에서 급하게 내려섰다가 다시 256개의 계단을 올라 사림봉 정상 약간 못미쳐 있는 데크 전망대에 올라 북쪽의 회룡포를 조망한다.
♤ 사림봉(256.2m)/ 전망데크
경북 예천군 용궁면에 있는 육지 속의 섬인 회룡포를 감싸고 있는 산이다. 1998년 세운 회룡대에 오르면 주변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특히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휘감아 돌아 모래사장을 만든 곳에 자리한 의성포의 절경이 내려다보인다.
- 사림봉에서 우측 장안사 방향으로 진행한다. 사림봉을 출발하여 7분여 진행하면 나오는 '적석봉 갈림길'에서 우향하여 장안사 2.3km 방향으로 진행한다. 적석봉(239m)은 좌측으로 0.11km 떨어져 있다.
♤ 회룡포(回龍浦)/ 물도리
회룡포는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용이 비상하는 것처럼 물을 휘감아 돌아간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때는 죄인의 임시 귀양지였다. 비룡산(飛龍山. 190m)을 다시 350도 되돌아서 흘러가는 「육지 속의 섬마을」이다. 맑은 물과 백사장이 어우러진 천혜의 경관을 지니고 있으며, 비룡산에는 숲속 등산로와 산책 코스가 마련되어 있다. 비룡산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면 낙동강, 내성천, 금천(錦川)이 합쳐지는 삼강(三江)이 보이는데, 깎아 지른 듯한 이곳에는 삼한시대부터 격전지로 유명한 원산성(圓山城)이 있다. 천혜의 요새로 된 토석(土石)혼축(混築)으로 된 원산성 주변에는 많은 고분이 흩어져 있으며 봉수대가 남아있다. 백제 시조 온조(溫祚)가 남하할 때 마한(馬韓) 최후의 보루인 이 곳 원산성을 점령한 후 백제(百濟)를 세웠다고도 전해지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상당기간 백제의 요세로써 삼국이 충돌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얼마나 격전지였던지 지금도 피끝이라는 언덕에는 비가 많이 오면 성 아래 마을인 성저(城底)마을에 아비규환(阿鼻叫喚)과 원혼(寃魂)의 소리가 들려온다는 전설이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온달장군이 이 성을 점령하려고 남하하다 아차성에서 전사하였다고 하나 밝혀지고 있지는 않다. 인근에는 용궁향교, 하마비, 황목근(천연기념물), 무이서당, 산택지(연꽃) 등이 있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역사적 정취가 살아 숨쉬는 이 곳 회룡포 백사장과 비룡산은 야영과 민박이 가능하다. 사람이 들어와 산 것은 조선 고종 때 예천의 아랫마을 의성에 살던 경주김씨 일가가 소나무를 베고 논밭을 개간하면서 정착했는데 그래서 의성포란 이름을 얻었으나, 의성포로 불리는 것이 의성군에 있는 것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아 예천군에서 회룡포로 고쳐 부르고 있다. 또 의성포는 이웃하고 있는 회룡마을과 함께 하나의 관광지군으로 묶여있어 회성포라고도 부른다. 2002년 KBS 인기드라마였던 가을동화의 촬영지로 준서와 은서가 어린시절을 보내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 사림재
우측은 뿅뿅다리, 좌측은 삼강주막으로 내려서는 하산로가 있다. 현위치(사림재)에서 우측으로 나가면 용포마을을 거쳐 제2뿅뿅다리를 건너 회룡포로 이어지고, 회룡대를 넘어 장안사로도 이어진다. 좌측은 생태탐방로를 따라 나가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비룡교를 건너 삼강주막으로 이어진다. 맥길은 11시방향으로 직진 용포대(제2 전망대) 방향 능선으로 오르는데, 사림재에서 용포대로 오르는 등로가 제법 가파르다.
♤ 제2전망대 전망데크
사림재에서 10분여 급경사 오르막을 올라 용포대에 올라선다. 용포대라는 정자는 없어졌고 회룡포를 바라보는 제2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 제 2전망대에서 회룡포를 감상하고 삼산삼수의 명승지 용궁면 소개글도 읽어보고, 이정표와 강변길 안내도 사이로 들어서서 1분여 올라서면 범등과 원산성이 갈리는 갈림길 이정표가 나온다. 좌측으로 내려서는 원산성· 범등 방향이 맥길이다.
♤ 면계갈림봉(지보면-용궁면)/ 범등/원산성 갈림길
좌측 범등과 우측 원산성이 갈리는 갈림봉으로, 지금까지 지보면 안을 계속 지나온 지맥이 제2전망대를 지난 범등·원산성 갈림길에서 용궁면을 만나 잠시 지보면과 용궁면의 면계를 가르며 남서향한다.
♤ 예천군 용궁면
용궁은 신라 때는 축산, 원산이고, 고려 성종 때는 용주라고 했다. 지금의 용궁은 고려 현종 3년(1012)부터 명명된 지명이다. 이름에서 보듯 용궁은 수중의 궁궐을 의미하며, 축산은 부처의 나라 인도의 천축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산은 비룡산에 있는 원산성에서 유래된 것이다. 용이 휘돌아 감으니 회룡포요. 용이 승천하는 형세이니 비룡산이라 한다. 이렇듯 옛적부터 풍수명당으로 이름난 명산대천 용궁은 문수지맥 학가산, 백두대간 운달지맥 그리고 보현지맥이 마주하고, 선달산에서 발원한 내성천, 황장산에서 발원한 금천, 태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 등 세 강이 만나 합수한다. 그 삼산삼수의 중심에 비룡산 원산성이 있다. 성의 모양이 둥굴어서 따뷔성(또아리성)이라 했다. 강이 해자를 이루는 천연의 요새로 삼국시대 백제,고구려,신라가 번갈아 가며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격전을 벌인 지리적 요충지이자 군사적 전초기지였다.
♤ 범등(174.0m) 면계(지보면 → 용궁면)/ 전망데크
범등/원산성 갈림길에서 15분여 내려서서 범등에 오른다. 범등 직전 갈림길에서 면계는 남쪽으로 흘려보내고, 지맥길은 온전히 용궁면 안으로 들어서서 서너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차츰 고도를 낮추어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만나는 삼강합수점까지 진행하여 문수지맥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범등에서 좌측으로 가면 삼강나루로 이어지는 비룡교와 의자봉, 사림봉으로 가게 되고, 지맥길은 우향하여 내려선다.
♤ 삼강앞봉(133m)/ 벤치 2개
다시 5분여 내려서다 잠시 올라서면 마지막 봉우리인 삼강앞봉이다. 발 아래로 낙동강이 흐르고 낙동강 건너편으로 삼강제방과 삼강주막이 있는 삼강리 마을이 펼쳐져 있다. 삼강리 우측 삼강교 건너 문경시 영순면 말응리쪽으로는 운달지맥의 마지막 산줄기 뾰족한 천마산이 펼쳐져 있다. 삼강앞봉을 지나 우향하여 내려서고, 급경사 내리막길의 침목계단길을 따라 강변 아래로 내려서면, 우측(북쪽) 원산성 가는 방향으로 데크 다리가 이어져 있다.
♤ 합수점 찾아가는 방법
평지에 다 내려서 합수점을 향해 직좌틀, 직진방향 데크길은 합수점을 보고 되돌아 나와 원산성-무제봉을 거쳐 장안사로 탈출하는 길이다. 삼강 합수점 가까이 가보기 위해 좌측 농로를 따라 나가서 합수점에 발을 디디기 위해 우측 잡풀지대로 약 200m 들어서야 한다. 키보다 큰 망초와 갈대, 환삼덩굴, 소리쟁이, 그령 등 잡풀이 우거져 있지만, 희미한 짐승길 흔적을 따라 들어가 삼강교 아래까지 간다. 삼강교는 문경시 영순면 원달지마을에서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를 잇는 교량으로 59번 도로가 지난다. 삼강 합수점이다. 좌측 낙동강과 우측 내성천, 그리고 내성천 좌측으로 흘러드는 금천이 만나는 곳이다.
저는 사진의 다리를 지나 원산성으로 오르고, 봉화대-부제봉-회룡대-용왕각-장안사로 나갔습니다.
♤ 삼강 합수점에서 뒤돌아 나오는 방법
합수점에서 강건너 보이는 문경 영순면 원달리 원달지의 '용화사' 근방으로 올라 삼강교를 따라 삼강나루로 가면 좋겠지만, 이 곳에서는 강을 헤엄쳐 도강하지 않고는 건널 방도가 없으니 삼강앞봉을 향하여 되돌아 나간다. 다시 잡풀지대를 걸어나와 강변 농로로 나서서 원산성 방향과 강변로를 두고 어디로 탈출할 것인가 선택하여야 한다. 나무데클 건너면 원산성 오르는 침목 계단길이고 원산성~봉수대~무제봉~회룡대~장안사 구간이다.
장안사로 가기가 시간이 빠듯하다면, 비룡교를 건너 삼강마을로 나가며 용궁택시를 불러 점촌으로 나가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삼강주막~용궁버스정류소: 택시 10분, 11,000원) 즉, 강변도로를 따른다면 15분 진행하여 비룡교 아래 '강변길(삼강~회룡포) 관광 안내도' 앞에 선다. 현위치 표시가 '야외 무대 및 광장'으로, 좌측 위로 올라서면 비룡교를 통해 삼강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사림재를 넘어 회룡포마을로 가자면, 삼강마을로 비룡교를 넘어가는 지점(야외 무대 및 광장)에서 다시 한번 선택하여야 한다. 아르방다리(뿅뿅다리) 방향 임도를 따라 진행하면, 좌측 '사림골' 따라 이어지는 생태탐방로는 조성 이후 관리가 되지 않은 듯 을씨년스럽게 남아있다. 약 100여분 전에 지났던 사림재에 다시 올라 선다. 삼강합수점에서 2km 지점이다. 용포마을 방향으로 직진이다. 임도를 따라 진행하다가, 작은 취수탑이 있는 곳에서 임도를 버리고 직진 숲길로 내려선다. 용포마을 입구의 강변길 안내도를 만난다. 강변으로 나서면, '제2뿅뿅다리' 표지판이 서있고, 뿅뿅다리에 대한 유래를 적고 있다. 예전에는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노후화되어 홍수에 떠 내려가 다시 철판 강관으로 외나무 다리를 놓았는데, 주민들이 발판 구멍 사이로 물이 퐁퐁 솟는다하여 '퐁퐁다리'라 하였는데 메스컴에서 '뿅뿅다리'로 잘 못 보도되어 이후 '뿅뿅다리'로 굳어졌다고 한다. 강변으로 나서서 이정표 우측 제2뿅뿅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좌측으로 가면 회룡대를 거쳐 장안사로 가는 길이다. 백사장을 지나 회룡포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이정표가 있는 회룡포 입구에서 좌측 강변로를 따라도 되지만, 마을 안길로 들어서서 제1뿅뿅다리 방향으로 나간다. 회룡포 표지석을 우측에 두고 강변으로 내려서면, 제1뿅뿅다리 입구다. 구멍이 송송 뚫린 철판 다리가 놓여진 '제1 뿅뿅다리'를 건넌다. 제1 뿅뿅다리를 건너면 회룡포 주차장이다.
♤ 원산성/ 띠뷔성(또아리성)
마한시대에 축성된 원산성(따뷔성, 또아리성)이 있는데 둘레가 약 920m에 높이가 평균 2m인 토석혼축산성이다. 군지에는 비룡산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원형으로 쌓았다 하여 원산성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조>에 따르면, 수주군에는 속현이 넷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난산현인바, 오늘날 문경시 산양면, 산북면과 예천군 용궁면 일대로 추정한다. 신라에서는 수주군이 북쪽 국경 근방으로서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남하한 내물마립간 세력이 낙동강 중상류 지역을 장악하고, 동해 방면에서는 형산강 유역의 서라벌 지역까지 손아귀에 넣는다. 그러나 고구려 군벌 세력 출신이던 내물마립간 이후 고구려 군사 원조에 힘입어 낙동강 중상류 지역에서 왕조를 유지하던 신라는 전통적인 종속관계를 정리하고 싶어 했다. 그때가 바로 눌지마립간 34년(450년) 신라의 하슬라 성주 삼직이 고구려 변경 지역 성주를 살해한 사건이후부터다. 450년 전후에도 고구려 남쪽 변경은 백두대간을 넘어 오늘날 경북 북부 지역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이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벽화고분과 안동시 북후면 석탑리 적석유구이다. 아무튼 신라의 대 종속 관계 청산을 전후하여 경북 북부 지역은 전쟁의 도가니속으로 빠져든다. 예천 용궁면 원산성은 이러한 신라와 고구려의 갈등속에서 신라군의 대 고구려군 전진기지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백제시대 온조가 남하할 때 이 성에서 마한을 점령하고 백제를 세웠다거나 고구려 온달장군이 이 성을 점령하려고 내려오다 아차산성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 봉수대
1997년 11월 복원한 봉수대는 예전에 동쪽의 서암산 봉수, 서쪽의 소이산 봉수, 북쪽의 가불산 봉수와 연락을 담당하는 군사요충지였다고 하는 정방형이며 높이는 2.7m이다.
♤ 사랑의 하트산 숨은그림 찾기
원산성 남문지를 지나고 봉수대에서 무제봉에 올라서서 좌틀하여 내려서면 하트산을 바라볼 수 있는 회룡대(팔각정)가 있다.
♤ 장안사
경북 예천군 용궁면 회룡대길 천상의 정기 서린 곳에 비룡이 꿈틀거리는 곳 장안사, 천년 신라에 학이 춤을 추듯 뭇 봉우리들이 힘차게 굽이치고, 구름을 담아 놓은 듯 비룡이 꿈틀거린다는 비룡산에 숲이 울창하며 정상 바로 밑에 통일신라 때 의상대사의 제자인 운명선사가 세운 장안사(長安寺)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국태민안을 염원하여 전국 세 곳의 명산에 장안사를 세웠는데, 금강산 장안사, 양산 장안사, 그리고 국토의 중간인 이곳 용궁면 용궁리 비룡산 장안사가 그 하나이다. 13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숨어있는 고찰 중 한 곳이다.
- 장안사 아래 매점에 맘씨좋은 여주인한테 용궁택시를 부탁하면 된다. 용궁버스정류소까지 8분, 1만원이다.
점촌가는 차표를 끊어놓고 바로옆 용궁순대에서 뒤풀이 하기 딱 좋다.
♤ 삼강(三江)
삼강은 내성천, 금천, 낙동강의 세 물줄기가 합류하는 곳이라서 붙여진 이름으로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맑은 물과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져 있다. 예로부터 이곳은 서울로 가는 길목으로 장사하던 배들이 낙동강을 오르내렸고, 문경새재를 가기 전에는 이곳 삼강 나루터를 꼭 거쳐 갔으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여 주막 등이 번성하였다.
♤ 삼강리
삼강리는 경북 예천군 풍양면에 있는 리로서 마을이 평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낙동강이 둥글게 마을을 감싸안아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삼강, 뱃가, 서원마, 신선마가 있는데 삼강은 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합쳐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뱃가는 마을이 낙동강 가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서원마는 마을에 삼강서원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포은 정몽주,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을 배향하고 신선마는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문화재로는 삼강주막이 있다.
♤ 삼강주막은 삼강나루의 나들이객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이용되었는데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에 충실한 집약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함께 한 유옥연 주모 할머니가 안타깝게도 2006년 세상을 떠나면서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가 2007년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새로운 주모와 함께 나들이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 용문사
예천 용문면 용문사는 870년(경문왕 10)에 두운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전설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삼한 통합의 큰 뜻을 품고 두운대사를 방문하고자 동구에 이르니 갑자기 바위 위에서 쌍용이 나타나더니 절로 가는 길을 인도하였다하여 태조는 산 이름을 용문산, 절 이름을 용문사라 명명했다고 한다.
♤ 흑응산(黑鷹山, 100m)
흑응산은 예천의 진산으로, 덕봉산의 지맥이며 산의 이름을 딴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는 흑응산성이 축조되어 있고 장군암과 기우단이 남아 있습니다. 흑응산에 토석혼축으로 축조된 흑응산성은 주성인 내성과 외성인 익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벽의 둘레는 1900m, 높이는 평균 3∼4m이고 주성의 성내지에 2개소의 우물과 1개소의 못이 원형대로 남아 있으나 군창이 있던 자리에는 농막이 세워져 있습니다. 산정에는 성황당이 남아 있고 무문토기, 신라토기조각과 지석묘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부족국가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 국사봉(國師峰, 732m)
국사봉은 국가에서 봉화대를 세웠던 곳으로 산 정상에는 제단이 있어 가뭄이 심하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이러한 연유로 국사봉에 산불이 나면 하늘에서 비가 내려 불을 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 덕봉산(德鳳山, 373m)
덕봉산은 덕봉산(德逢山)이라고도 하며 지도에는 봉덕산(鳳德山)으로 되어 있고, 지맥이 동쪽으로는 흑응산에 닿고, 서쪽으로는 석정리 뒷산으로 이어지는데 산 능선에는 고분이 많이 있다.
첫댓글 퐁라라운영자님
연 사흘에 걸쳐 문수지맥을 진행하면서 삼강합수점에서 한줄기 마무리하셨네요.
문수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한여름 습한 날씨에 진행에도 만만치 않은데 난관을 극복하면서 날머리에 선 감회가 절로 느껴집니다.
비박을 했던 자리도 상상해 보면서, 비온 뒤의 맑은 풍경들이 한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네요.^^
멋지고 시원스러운 광경에 마음마져 상큼해지는 심정입니다.
만만치 않은 장도를 진행하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방장님! 감사합니다.
계획대로, 목표한 대로 2구간에 마칠 수 있어 기뻤습니다.
사진은 218장을 담았는데 100장 뿐이 올리지 못해 약간 아쉬운 마음입니다.^^
아래 사진은 겨울철 회룡포의 모습이랍니다~
정말 무더위 3일 동안 쉼 없이 달리시는 풍라라님 대단 하십니다
여름철 하루 산행도 힘드실 텐데 그것도 나홀로 따봉 입니다
강물에 발을 담구며 피로가 풀리겠지만 상처들을 보니 힘든 여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네요
정말 수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도 지나고 나면 가장 오래동안 남는 지맥길이 될 것입니다
하트산 지금은 푸르름으로 자세히 보지 않으면 확인이 좀 어렵지만 겨울철 설산에는 너무 선명 할것 같네요
예천 오면 순대 병천 순대도 있지만 용궁순대도 먹을 만 하지요
대구지맥 담주부터 부봉지맥 아니고 부용지맥 입니다 ㅎㅎㅎ
여름철 건강 관리 잘 하시고 지맥 이어 가시기를 홧~팅 입니다^0^
와룡산선배님!
날씨 만큼은 하늘이 도왔습니다.
3일 동안 해가 난 시간은 단 2~3시간 이었다면 믿겠는지요?
둘쨋날에는 중앙 하늘은 먹장구름이 두텁게 덮혔고,
가장자리만 파란 하늘이 선명하게 보이는 현상도 겪었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첫날 학가산에서 비박하며 샤워를 할 수 있었다는게 큰 도움이 되었고요.
터지고 찢어지고 했지만 발바닥을 부직포로 때워가며 진행했습니다. 한여름에 3일은 힘들거 같습니다.
후기가 잘 팔리는 것을 보니,,,
난가대에서 지맥길을 가로막고 있는 kt와 같이 있는 군부대는 아마도 저희 국군통신사령부 56대대 m/w부대가 아닌가 싶었구요.
마지막 합수점에 이르는 방법과 나오는 방법을 이해하고 소상하게 설명해 두어 문수지맥을 앞두고 있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트산을 볼 수 있는 회룡대는 장안사까지 자차로 이동하여 10분이면 가볼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다만, 225계단인가 가파르진 않지만 계단이 있어서 80 이상 노인분들이 올라가기엔 다소 벅차답니다.
젊은이들을 위해 열쇠를 걸어두도록 조형물을 만들어 두었더군요. 감사합니다.^^
허허. 문수지맥 졸업산행기를 이틀동안 읽었습니다.
문수지맥길 많이 변했을거란 예측을해 봅니다.
작년에 우리가갈 때 한창 정비중이였거든요.
그런데 독점산(248.4m)에 산패가 안보입니다.
두번에 걸친 문수지맥졸업 축하합니다.
네 부뜰성님!
산불피해지역을 빼곤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큰 어려움 없었습니다.
한울교 이후로 엄청나게 밀어놓은 대지에 뭐가 들어설지, 문수지맥은 점점 더 편해질것 같습니다.
산패는 잘 있어요.^^
퐁라라님!!
시방같이 덥고 후줄그리한날 쌩고생이십니다.
10년전에 갔었던 문수지맥을 다시보는 맛이 새롭기만 합니다.
님의 사랑으로 자세하게 볼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반바지걸치고 가시다가 과태료 와장창 뚜드리 맞습니다.
껍데기 기스나는 건 애교로 봐 주시겠지만,
다라팍 원형보존관리법은 상당히 엄격해서 과태료가 엄청나것지요.ㅎ
무더위랑 장마철에 관리법위반 하시지 마시고,
여유로운 지맥길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비실이부부산줄기종주영웅선배님!
10년이면 정말 많이 변했겠네요. 그 시절 진행하기가 더 거칠었겠구요.
이번에 산불피해지역을 내려서다 길이 보이지않아 뾰족한 나무에 박혀 아주 위험했습니다. 그 정도이길 정말 다행입니다.^^
말씀대로 앞으로 얇은 거라도 긴바지를 입어야 할성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엔 덕산지맥 째리보고 있습니다.^^
과태료가 와장창 나왔것네요.
비실이가 만월지맥에서 당했던 과태료랑 비슷하것네요.
꼬브랑길이랑 잡목길헤메었던
만월지맥 어성전고개까지 가다가 당했던 꼬라지랑 비슷해서요.
캄캄밤중에 달려와준 택시기사 아줌씨가 생각나네요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세상이라는거 배웠던 곳이기도 하구요.
산길에서 살아있는 전설 준.희 쌤이 언제나 당부하시는 말씀 한마디.
비실이 동생아~~
지맥길은 쉬엄쉬엄 즐기면서 가거래이~
장모님왈!!
지발하고 사브작~ 사브작, 쉬엄~쉬엄, 영감탱이 말씀 잊지말구~
비실이대선배님!
과태료 납부하시느라 고생 많으셨네요.
162지맥 다 하며 납부한 과태료만 해도 빌딩하나 올렸겠습니다.^^
1.산행에 임하시는 마음가짐이 사람을 한참 생각하게 합니다.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내실있게, 풍족하게, 행복하게 산을 즐길 수 있을지 고민한다는...
2.최소한의 경비로, 최적의 조건을 찾으려는 노력에서
산과 나누는 대화의 합리적인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3.쏘맥 쏟아넣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는 난가대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비접골 고개 공사장 수도관에서 비박하는,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지혜가 돋보입니다.
저도 대간 저수령 둥근 배수구 속에서 편한 잠을 청한 적이 있답니다.
4.자죽고개 돈사 냄새는 여전한가 봅니다.
맛난 삼겹살 생각하며 참아내는 멘탈이 존경스럽네요.
5.고사목 꼬챙이에 찔린 다리 상처의 상태가 걱정이 됩니다.
회룡대에서 바라보던 하트산의 따뜻한 기운으로, 빠르게 일상을 회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산에 많이 묻힐수록 깊이 빠질수록 사람은 산을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먼저 핀 꽃이 먼저 지는 것처럼, 세상일은 속도의 문제가 아닌 듯 합니다.
서두르지 않고 알차게 산을 알아가는 퐁라라님의 산에 힘찬 응원을 보탭니다. 감사합니다.
범산선배님!
최소한 산줄기를 무턱대고 덤비지는 않고 싶습니다.^^
제가 20대 초반에 박짐 메고 다니며 등산여행을 시작했는데, 아주 거기에 딱 부합되는 종목이랍니다.
수도관에서의 비박은 일단 이슬이나 비를 피할 수 있고,
또 차양막으로 덮여 있어서 나방이나 모기가 어느 정도 막아지겠기에 걸정했습니다.
옆에 공사장을 드나드는 덤프 바퀴를 씻느 도크가 있어 고인 물로 발도 씻을 수 있었습니다.
산불재해지역을 통과하며 길이 보이지 않아 좌우로 방향을 자주 바꾸다보니 상처를 입었습니다.
나무 꼬챙이에 찔린 상처는 간밤이 탈이 나는지 새살이 돋는지 기로였던거 같습니다.
뼈를 건드려서 그런지 몹시 시끈거리더군요.
병원 안 가고 그냥 후시딘 대충 문지르는 것으로 지나갈려는지 모르겠습니다.^^
범산선배님 후기를 따라해볼려도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경지가 아닌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선배님의 후기를 읽는 행복감에 자꾸 기다려지네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와우 안동지역 문수지맥 2구간을 퐁박사님 답게 야무지고 이쁘게 걷고 오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지나가며 들른 곳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총망라해놓으셨네요. 척척박사 될 수밖에 없는 꼼꼼한 자료집입니다. ㅎㅎ
초반 점촌터미널의 상주여객 버스가 반갑고 경북 최고의 도시 안동을 두발로 다 확인하셨네요.
편안히 앉아 지난날 산행했던 기억도 살려보고 안간 산은 언젠가 가봐야겠다고 다짐도 하고
많은 것을 배웁니다.
오늘도 행복한 날 만들어가세요~
부케님!
그저 선답자님들의 산행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자료를 한 곳에 모아둔 수준이라고,,,
항상 드리는 말씀인데 공치사는 그만 거둬주셔도 될것 같습니다.^^
안동은 이제 간보기를 한 격입니다.
다음번 덕산지맥을 하며 비로소 안동의 심장부 임청각을 향하기에 거는 기대가 크답니다.
안동의 중심이 예천과의 경계로 경북도청이 옮겨져 새로운 신도시가 만들어지고 있지요.
낙동정맥 영양 석보에서 청송 진보로 넘어가는 삼군봉 아래 황장재가 영덕이 안동으로 넘어오는 고개이고요.
보현지맥과 팔공지맥까지 차례로 마무리 짓는다면 주변 시야가 크게 트일것 같습니다.
문수지맥의 마지막은 용궁버스정류장이 매우 중요하더군요.
그곳에서 문경도농통합시로 통합된 점촌터미널로 나가면 예천보다 더 상경하기 빠른 교통이 되니깐요.
욕심껏 채워 넣자니 후기가 넘 부담스러워 죄송한 마음입니다.
꼭 필요한 것만 간추려서 취하신다면 번잡스러움이 덜할 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점촌,문경,예천 오지에서 많이 걸어셨네요,
대간길이 생각나네요.
(축구)정강이 보호대 하시고 다니심이,
산행기 1편이 한 권의 책입니다.
다방면 대단하십니다.
홧팅!!
대길성님!
문경, 예천, 영주의 지붕이 대간길 맞습니다.^^
경북도청이 이전한 신도시 쪽은 지맥길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섬처럼 드문드문 남겨진 야산인데도 멧돼지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더군요.
문수지맥은 계속 다듬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힘든 지점에서 준희선생님 격려산패로 많은 도움도 받았습니다.
형님도 이제 지맥길에 접어 드셔야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