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참가자는 정수환박사, 박노욱박사, 권중달 교수 내외, 장준호군, 바람님 내외분, 나의 내외 등 9명이 참가했다. 내가 진두 지휘하는 답사는 이것이 마지막 일 것이라가고 생각한다.
11시에 성주군청에 도착하여 박재관 학예사가 죽 설명을 해주셨다. 박재관님으로부터 성주군 홍보물을 받았고, 나는 그 외에 "상생의 땅 가야산"이란 책과 "성주의 전통건축물" (백영흠 저), 그리고 "새로 발굴한 성주의 구비문학"이란 책을 받았다. 그리고 성주군의 5만분지 관내지도를 한 장 더 받았다. 이들 책을 읽으면서 참으로 지방문화를 개발함에 정성을 쏫고 있는 성주군 당국자들의 열성작인 노고에 진한 감동을 받았다.
답사 대상은 성산관으로 군청 바로 뒤에 있었다. 이는 목사가 집무를 하던 내동헌 자리에 객사의 건물을 옮겨다 놓았다 한다. 원래는 현재의 성주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것이라 한다. 이 건물의 간판은 '사시헌(四時軒)으로 되어 있어 목사가 4계절 근문한다는 뜻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객사이름은 백화헌(百花軒)이라고 했다 한다. 박재관 선생으로부터 성주의 여섯 이씨가문 즉 벽진이씨, 경산이씨, 성산이씨, 광평이씨, 가리이씨, 성주이씨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고려 때 이조년의 형제가 항금을 주어 나우어 가졌는데 강을 건너다가 두 형제가 함께 강물에 황금을 던져버렸다는 형제투금(兄弟投金)의 이야기도 겸해 들었다. 이조년의 형은 억년, 만년, 천년, 백년 5형제였다고 하는 설명도 재미있게 들었다.
성산관의 서쪽에 있는 심산 김창숙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기념관이 현판을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라고 해서 유림들 사이에 왈가왈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착잡한 느낌을 받았다. 김창숙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학의 종장 곽종석을 설득해서 유림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내도록 주선하였고, 이 문건을 상해로 가지고 가서 우편으로 부치는 일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 곁에 있는 쌍충비를 둘러보았다. 이는 성주 전투에서 죽은 의병장 제말(諸沫) 정조때 목사로 추증됨)과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죽은 조카 제홍록(諸弘錄)의 공을 정조 때 포상하여 쌍충비를 세웠는 바 이 쌍충비는 진주성에도 함께 세워졌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성주성 전투는 장준호 군이 설명을 했다. 나는 경상좌우도에 대한 설명, 그리고 남명 조식의 제자인 곽재우, 김면, 정인홍등의 의병장 들이 경상 우도를 지켰기 때문에 성주성이 1592년 12월 전투에서 탈환하였음을 보충해 말했다. 그리고 장준호 군의 설명에 의하면 임진년 8월 9월, 12월 세번의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성주 읍성이 약간 남아 있는 서문터를 답사하고 성산동 가야 고분군으로 차를 타고 이동했다. 박재관씨의 설명에 의하면 현재 129기가 지정되었고, 이 중 6-7기가 발굴되었단 한다. 그리고 가야고분은 평지에 있지 않고 산록에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했다. 가야 고분군은 성산동, 용각리 수중리 고분군, 병천리 고분군 등 세지역에 있는데 합 500여기가 있다고 한다. 나는 가야사에 대한 이야기, 김유신가문의 진골편입, 임나가야 이야기, 김해가야에서 고령중심의 후기 가야연맹장세력, 전방후원분 이야기를 보충설명했다. 성산은 성주의 진산(鎭山)이며 이를 벽뫼라고 부른다는 설명도 들었다. 박물관을 건립할 계획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박물관에 어린이도서관도 함께 운영하는 방안을 생각해보시라고 조언했다. 그 길이 문화의 공간으로서 어린이가 많이 참여하도록 하는 방안임을 말씀드렸다.
점심 식사는 바람님이 소개한 왜관청국장집으로 가서 맛있게 먹었다. 성주에 있는데 왜관청국장의 원조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붐비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후 우리는 한개마을로 차를 타고 이동했다. 한개마을은 이미 올사모카페에 바람님의 소개로 사진을 올렸던 관계로 처음 보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은 성산이씨 집성촌으로 모든 사람이 24촌 이내라고한다.
우리는 입구에 있는 진사댁을 먼저 들렸다. 이곳에는 바람님의 친정부모가 사시고 있었다. 부모님이 나오셔서 우리와 수인사를 나누었다. 바람님의 어머님이 하도 얼굴이 곱고 젊게 보여서 나는 50대 후반으로 생각을 했다고 하였더니 바람님이 자기가 50대라면서 어머님은 70대라고 하셨다. 우리는 대청에 올라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성주참외와 어머님이 손수 만드신 약 감주, 그리고 포도, 딸기, 케이크 한상을 푸짐하게 대접받았다. 그리고 바람님이 울산에서 우정 빼왔다는 원두커피도 한 잔씩 마셨다.
할아버지께서 조선의 마지막 과거 시험에서 진사로 합격을 했다고 하여 진사댁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벼슬은 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한개마을은 기와집과 초가집이 함께 어울려 있었다. 한개라는 지명의 뜻은 큰 포구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이라고 한다. 한개마을은 전국에서 6번째로 지정된 민속마을이라고 한다. 전 동네의 고택이 가즈런히 잘 보존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판서 응와택, 하회댁, 한주 이진상고택, 북비고택을 둘러보며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북비고택은 사도세자의 선전관이었던 이석문(李碩文)이 영조를 말렸으나 실패를 하자 북쪽을 향해 문을 냈다는 데에서 북비(北扉)고택이라고 한다. 고종 때에 곽종석이 쓴 신도비가 묘소 밖에 서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존회 사무국장님 댁에 들러 귀중한 족보를 만들기 위해 초록한 원본 자료를 빌려가지고 왔다. 우리는 한개마을의 고택을 둘러보면서 성산이씨의 흥망성쇠를 보는 것 같아 가슴에 와 닿는 것이 많았다. 가장 늦게 지정되었지만 가장 멋진 민속마을로 만들려는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차로 이동하여 세종대왕의 왕자태실을 답사하였다. 백재관 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단종의 태실비가 선명한 것은 땅에 묻혔다가 발굴에 의해 최근에 찾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석산에 있는 태실은 우리가 언뜻보아도 명당자리인 것 같았다. 좌우에 산줄기가 들러 있고, 그 안에 마치 연꽃봉우리 같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19기의 태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바로 밑에까지 차를 타고 갔다. 예정시간보다 30분이 늦은 4시 30분에 답사를 종료하였다.
참으로 즐겁고 알찬 답사였다고 할 수 있다. 성주의 10분지 1에 불과한 내용을 답사한 것이다. 기회가 닿으면 한 번더 가보고 싶은 고장이라는 생각은 답사원 모두의 생각이었다. 우리는 오면서 단양휴게소에서 바람님의 어머님이 싸 주신 성주참외를 깍아 먹으면서 약 감주도 마셨다. 참외가 참으로 단 것을 더욱 실감했다. 진사댁에서 감주를 마시고 먹은 후라 그렇게 단줄을 몰랐다. 성주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화를 아우르는 지방문화를 잘 개발하는 대표적인 고장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재관 학예사님, 그리고 바람님의 친정부모님. 그리고 답사준비에 애써주신 바람님, 그리고 한개마을 보존회 사무국장이신 이수인님의 친절에 참으로 감동했다. 고마움을 충심으로 표합니다. 알찬 답사에 참가하신 여러분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답사 사진은 올사모 앨범에 다른 회원님께서 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