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역사에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분 중 한 분이 사도세자다.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인해 뒤주 속에 갇혀 죽임을 당했기에, 당연히 왕위에 오른 적은 없다. 하지만 사후에라도 왕위에 올랐으니, ‘장조’가 바로 그 이름이다. 사실 세자로 있으면서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도 했었기에 왕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사도세자가 어쩌다 정신병자로 몰렸으며, 마침내 비참하게 뒤주에 갇혀 굶어죽게 되었을까.
이는 영조가 정권을 잡을 때 발생되었던 태생적 원죄 때문이었다. 영조의 전대 왕은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었는데, 왕의 생모인 장희빈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그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은 왕의 보복이 두려워 하루빨리 경종을 없애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천한 무수리의 아들 영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였다.
‘왕조실록’에는 사도세자가 10여 세 이후부터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청정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고 기록돼 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지만 점점 병세가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고 한다.
이에 영조가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 심해졌다고 기록돼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무척 엄격하고 냉정하게 대했으며, 사도세자는 그러한 영조를 매우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영조 33년 11월14일에 사도세자와 어의가 나눈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사도세자가 아픈 데가 전혀 없다고 하는데도, 어의가 영조의 명령이라면서 타박상으로 생긴 어혈을 치료하는 당귀수산(當歸鬚散)을 처방한다. 그리고 사도세자는 군말 없이 이를 순순히 따른다.
영조 31년 4월28일의 기록을 보면, 어의가 사도세자의 증상과 처방을 보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도세자는 그 즈음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상이 있었는데,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이런 증세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온담탕(溫膽湯)이라는 처방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원래 온담탕은 심담이 허약해서 깜짝깜짝 잘 놀라고 겁이 많고 잠을 잘 못자는 증상에 사용되는 처방이다. 또한 영조 38년 5월22일에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 사도세자가 평소 두려워하고 겁내는 증상을 앓았음을 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역시 사도세자의 병증을 알려주는 단서라고 할 수 있겠다.
사도세자는 영조 38년 여름에 뒤주에 갇힌 채로 굶주림과 더위에 지쳐 죽게 된다. 그런데 그 1년 전인 영조 37년의 기록들이 심상치가 않다. 영조 37년 2월25일에 신하가 사도세자에게 서류를 가져와 보고하려고 하니, 바람이 싫어 문을 열 수가 없으니 바깥에서 큰 소리로 읽어서 보고하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같은 해 3월27일에는 사도세자가 두통과 치통·복통 등이 심해서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다고 말하니, 신하들이 바람에 닿지 않게 잘 가리면 된다고 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이미 이때 사도세자는 심각한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평소 심담이 허약해서 불안공포증을 앓고 있었던 사도세자의 병증이 극한으로 치달았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 주위에 사도세자처럼 시험이나 중요한 발표 등을 진행할 때 심약하고 겁을 많이 내는 증상을 호소하는 분들이 제법 많다. 이럴 때 한의약 치료를 받으면 상당히 많이 호전되니, 주치한의사와 상담해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