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트렌드 세터 신여성의 헤어와 패션
흑백의 사진이 촌스럽기 그지없지. 무슨 유행이냐고 하겠지만, 삼국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유행이라는 것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개화기 때부터 여성의 교육과 사회 진출이 시작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이른바 '신여성'들은 당시 지식인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패션 리더들로서 헤어와 패션의 유행을 선도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활동했던 쟁쟁한 경력을 가진 소유자들이었다.
유행의 흐름 중에서 헤어와 관련되어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바로 우리나라 개화기 이후의 단발령과 파마의 도입이다.
댕기머리나 쪽머리가 가장 일반적이었던 조선시대 말, 서양 문물의 유입으로 우리 조상들은 단발령의 국가정책에 의해 머리카락을 잘라야 했다.
그러나 최익현이 "내 머리를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강하게 저항했을 정도로 반발했던 것은 머리카락은 부모로부터 받은것이기에 소중한 것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머리카락에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단발령과 새로운 문화의 물결
우리나라 개화기 때 있었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갑오경장 때 내려진 단발령이었다.
고종 32년인 1895년 11월 왕은, "국민들에 앞서 내가 먼저 단발하니 백성들은 내 뜻을 받들어 만국과 병립할 수 있는 대업을 성취케 하라"고 선포했다.
이에 유림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이 이렇게 반발했던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머리카락은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의 일부이기에 이를 삭발하는 것은 반인륜적이라는 생각과 머리카락에 종교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찬성을 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머리치장과 관련해 머리카락에 신적 세계가 존재했던 것으로 믿는 것을 미신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도들은 대부분 머리 깎기를 원했다.
신여성의 양장과 퐁파두르 헤어스타일
개화기 남성들의 머리모양은 1895년 단발령에 의해 강제적으로 변화되었는데, 여성들은 전통 한복에서 개량 한복과 양장의 보급에 따라 점차적으로 변화되었다.
신여성은 개화기 때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여성의 시초는 미국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1900년 귀국했을 때양복을 입었던 박에스더이다.
1896년 미국 오하이오 위스리안 대학을졸업한 하란사도 양복을 입고 귀국하여 여성의 지도자적 역할을 했다.
이들 신여성들은 서양 선진국의 발전된 문화를 소개하였다.
그밖에 당시 진정한 패션 리더로 알려진 진명여학교 여교사 에밀레 황은 이름까지 서양식으로 개명하고 양장을 입고 다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개화기와 이후의 트렌드 세터들은 대부분 서구 문물과 지식을 직접 접할 수 있었던 유학파여성들이나 왕실 여성들, 외교관의 부인 등 상류계층 여성들과 전문직에 종사했던 여성들이었다.
1895년 단발령 이후 고종황비인 엄비는 고종과 마찬가지로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양장을 입었다.
1899년 윤치호는 유학에서 돌아와 양복을 입었고 그의 부인 윤고려에게도 양복을 착용하도록 했다. 이시기의 상류층은 각국 공사를 초청하여 파티를 열었는데, 이 때 부인들이 양장과 모자를 쓰고 참석했다고 한다.
1907년 최활란은 일본에서 유행하던 '퐁파두르' 헤어스타일을 하고 양말에 구두를 신고 검은 통치마를 입고 귀국하여 화제가 되었다. 일본어로'팜프도어'라고도 하는 퐁파두르가 한 데서 시초가 되어 유행되었다.
우리나라에 일본여성들과 신여성에 의해 유입된 퐁파두르 스타일은 일부 학생들에 의해 잠시 유행하다가 너무 이색적인 헤어스타일이라고 하여 수그러들고 트레머리가 유행했다.
트레머리는 앞에서 옆 가르마를 타서 갈라 빗고 머리 뒤에 넓게 클수록 보기 좋은 것으로 여겨 머리심을 넣고 겉에는 머리를 입혀서 크게 틀었다고 한다.
한편, 신여성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1919년경이라고 전해진다.
현재'신여성'이 라고 하면 긍정적인 의미로 여겨지지만 그 시대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신여성은 단발머리(그래서 '모단 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에 양장을 입고 구두를 신을 만큼 멋쟁이 아가씨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신여성들은 윤심덕, 김일엽,김명순, 나혜석 등이 있다.
이들 신여성들은 시대들 너무 앞서 갔기 때문에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여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다.
단발머리 미인, '모단 걸'
1929년 정금숙. 김금도 같은 기생들이 일본 유학에서 귀국하면서 단발머리를 하고 와서 화제가 되었다.
단발머리는 1920년대 서양 여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 가르손느 스타일(Garconne Style)에서 비롯된 헤어스타일로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말까지 단발미인, '모던 걸(현대, 즉 'moden girl'이라는 뜻과 '모단'이라는 두가지의 의미를 지닌 용어였음)'이라는 용어가 생길만큼 신여성들과 여학생들 사이에서 대유행을 했다.
당시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는 모던 걸의 대표적인 여성이었다. 1937년부터 퍼머넌트가 크게 유행하면서 서구적인 헤어스타일이 완전히 자리잡게 되었다.
'퍼머넌트'의 도입
1936년 4월호 월간지 <여성>의 표지에 파마를 한 신여성이 등장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는데, 퍼머가 이 땅에 정착한 시기는 1936년경이다.
당시 미용실은 서울의 화신 백화점 내에 잇던 '오엽주 미용실'이 유일했는데, 오엽주는 최초의 미용사로 기록되었다.
'전기열로 머리카락을 지지고 볶는다'고 하여 전발이라고도 불리었다.
당시 파마를 하는 여성은 신여성들이었는데 많이 개화된 그들조차도 파마를 한 후에는 놀라움과 두려움 때문에 저녁 무렵까지 기다렸다가 인력거를 타고 귀가했다고 전해진다.
오엽주가 보여준 파마넌트 스탕일은 단발령만큼이나 놀라운 역사적 사건이었고, 우니나라 여성의 라이프스타일을 변화시켜 한국 헤어스타일의 역사를 다시 쓰는 데 공헌을 했다.
과거 우리나라 여성들은 주로 머리를 땋아 올려 장식했고,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거나 펌을 하는 미용법은 전혀 개발하지 못했다.
1908년에 고등여학교령이 공표되고 여성들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주어진 후, 신여성과 여학도라고 불리는 지식인 여성들이 등장하면서 헤어와 패션에 일대 개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25년대부터 단발과 퍼머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특히 비싼 파마를 하는 여성들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또한 양장의 착용에 따라 그에 맞는 헤어스타일로 단발과 파마가 유행하게 되었다.
서구식 패션과 헤어스타일에 따라 화장법과 기타 미용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이와 같은 여성들의 미용 개혁에는 한국 최초의 미용사 오엽주가 있었다.
그녀는 1903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으며, 평양여고를 거쳐 일본에서 유학한 신여성이었다.
오엽주는 일본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했으나 그녀의 개성적인 외모 때문에 주인공의 역할은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왜 영화배우에서 미용사로 눈을 돌렸는지 정확히 전해지진 않지만. 신여성들의 미용 수준이 현저히 떨어져 있음을 알고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진고개에서 미장원을 운영하고 있는 일본인 미용사 하라야마의 제자가 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일본이 운영하는 미장원만 있을 뿐 한국인이 운영하는 미장원이 없었다.
이 때에는 오엽주가 화신미장부를 창설하기 전이었으며 하라야마의 제자로 있었던 1925년경에는 제법 인기가 높아져 마침내 독립을 하기에 이른다.
1933년 3월 그녀는 화신백화점 내에 화신 미장부를 열었으며 이는 한국인이 최초로 운영한 미장원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장원은 상류층이 이용하는 곳이었고 잘 알려지지 않아 미장원을 오픈한지 1년 동안 단 2명의 손님 밖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점차 그녀의 소문이 퍼지면서 대부분의 신여성들과 상류층 여성들이 출입하는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후 화신백화점에 화재가 나면서 오엽주는 1939년 종로에 엽주미용실을 오픈했다.
우리나라에 이른바 '파마'(당시 광고에는 파마넌트로 표기됨)로 불리는 퍼머넌트가 도입된 것도 이 때였다.
오업주가 성공하자 미장원과 양장점들이 갑자기 많이 등장했다.
그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장원에서 미용실. 헤어샵. 살롱 등 세련된 이름으로 변화해왔고 그와 함께 미용 기술도 눈부시게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