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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손에 든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렸다. 지금 시간쯤이면 집에 도착했을 지도 모른다. 공중전화 수화기를 드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는지 신호음이 가는 소리를 듣자 땀이 조금씩 배어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세 번 만에 받으며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철렁하며 들려왔다.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를 확인하는 순간 난 안도와 흥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접니다. 구일병입니다. 놀러가도 되겠습니까?'
말을 얼른 해버리고 난 다음, 아차 했으나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잘 넘겨주었다.
'오세요.'
그녀 혼자 사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문 앞에 서성이는 내 손을 잡고 살며시 안으로 끌어 주었는데 난 마치 어둠의 절정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부엌과 조그만 다락이 딸려있는 방이었다. 창에는 커튼이 쳐져 안과 밖을 구분짓고 있었다. 방에 편안한 자세로 앉자 그녀는 차를 내왔는데 향이 은은했다. 마치 양수국씨를 닮은 듯 무리가 없었다.
그녀는 말을 별로 하지 않았고, 서둘지도 않았다. 서둘 필요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면에서 연장자다웠다. 차를 들며 편안해진 난 찾아올 때 미리 찾아들었던 서먹서먹함이나 불안감을 차츰 떨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약간 사시적인 눈길은 이럴 때 참 부드럽게 느껴졌다. 무릎을 꿇은 채 앉은 그녀는 시종일관 잔잔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차 한 잔을 다 마시고 나자 여유가 생긴 나는 그녀가 혼자 사는 방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원래 차분했던 것이다. 제일 먼저, 구석에 조그맣게 자리한 앉은뱅이 책상과 그 위로 보기 좋게 꽂혀 있는 책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언뜻 봐도 난삽하지 않았으며 일매진 내용들로 한결같은 그녀의 마음가짐이 엿보였다. 어릴 때 책을 가까이 접한 후로 난 읽을 책이 마땅히 없을 경우는 먼 친척집도 마다 않고 빌리러 다녔다. 비록 낡은 책이 대부분이긴 했어도 조그만 삼단 책꽂이에 책들이 빽빽이 꽂힌 것을 보노라니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잡기에 능하지 못한 성격은 아마 그 때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위로 형만 형은 밥숟갈 놓자 밖으로 나가서는 때되어 찾으러 갈 때까지 동그란 유리구슬이고 네모낳게 접은 딱지고 간에 골목 안을 휩쓸다시피 다녔지만, 그런 형을 따라 몇 번, 아니 늘 따라나서 보지만, 좀체 뜻대로 되지 않던 난 어느 순간인가부터 책으로 눈길을 돌렸나 보았다. 그 책들은 날 심심치 않게 해주었고 어린 시절, 비록 혼자 노는 시간이 많아 주위를 근심 어리게는 했어도 난 충분한 자양분을 이미 그 때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난 별명이 거의 없는 것으로 기억하지만, 꽤 가까운 친구들로부터 '영감'이라는 별명을 무안스럽게 얻기도 했다.
책상 위에 볼펜으로 뭔가 적어놓은 노트가 보였는데, 들어설 무렵부터 그대로 둔 점으로 미루어 아마 그녀는 글쓰는 취미가 있는 것 같았다. 혼자 사는, 그것도 미혼의 여성이 혼자 사는 방을 둘러보는 것은 사실 뽄새가 별로 좋지 않은 법이라 난 책상 위에 펼쳐진 노트에서 그만 시선을 거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쓰시던 중 같은데요?'
대답대신 그녀는 조그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별 말을 하지 않은 채 다 마시고 난 찻잔을 들고 부엌으로 조용히 나갔다. 갑자기 얼굴이 확확거리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노트 좀 봐도 되겠습니까?'
'봐도 돼.'
부엌에서 가만히 찻잔을 닦던 그녀가 말을 살며시 놓았다. 난 이미 그것의 의미를 가늠하지 못 할 정도로 귓불이 달아올랐고, 앉은 채로 미적거리며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작가의 작품들은 모두 먼 원시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아뜰리에에 들어서면서 얼핏 본 낡은 각목을 쌓은 위에 각가지 짐승들을 형상화한 조그만 벽화에는 과거 원시인들이 남긴 암각화의 인상을 깊게 심어주었다. 난 여기 오기 전 날 우연히 도서관에서 암각화가 새겨진 그림이 들어있는 세계 미술 화보라는 책을 통해 그런 작품들을 보았었다. 그 순간 난 이 작가와 사전 교감이 이루어진 것 같은 기분좋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작가는 작품의 세계에 대해 묻는 나의 질문에 컨틴뉴스라는 짧은 영어 단어로 압축해주었는데, 그것은 아직 명확히 정의 내리고 싶어하지 않는 혼돈의 세계로 여겨졌다. 그는 최근 뭔가 허전한 것이 창작 행위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전혀 느낄 수 없다며, 한동안 작품활동을 접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벽에 걸린 '법구경'(가제)은 그 말을 들은 후 묵직함이 없이 겉만 핥아낸 것 같이 가벼워 보였으며, 허리가 반쯤 접힌 채 두 명씩 짝지워 세워진 인간 군상들의 가슴에는 창같은 네모난 구멍이 모두 숭숭 뚷려 지금 작가의 심경처럼 속에 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같이 처량해 보였다. 조각들의 소재로 철보다는 동을 선호한다는 작가는 작업할 때마다 만져지는 철은 너무 차가운 소재라 싫고, 동은 만지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따스함이 좋아 즐겨 사용한다고 했다....그녀의 작품들은 근접해도 만져지지 않는 그러나 현실에 분명히 존재하는 부조리한 세계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뭔가 정화되지 않은 채 남은 불미스러운 찌꺼기같은 여진들이 작가의 몸을 감싸고 있는 듯 싶었으며, 그로 인해 작가는 부단히 구속받는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접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말에서 이미 바닥이 드러난 채 끝을 보이기 시작하는 말라버린 우물과 같이 그의 창작혼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안타까움이 역력했다...원시 시대를 돌아보면 항상 노천명 시인의 사슴처럼 아련한 법인데, 그 때는 참으로 한가했고 자유스러웠으며 단순했다. 걱정이 없었고 굴벽에 새겨진 암각화는 놀이의 연장에 다름아닌 순수 그 자체였던 것이다. 지금 작가는 그 때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현대 노동에서 소외받아 방황하고 있는 노동자들처럼 작가 또한 예술로부터 철저히 소외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구원의 문제로 논의 방향이 전격적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심각한 장인 것이다. 작가는 이 가을 새로운 작품 세계를 확보하기 위해 몸부림에 가까운 몸살을 지금 앓고 있는 것 같다. 가까운 시일 내에 생명력이 용솟음치는, 치게 하는 작품들을 접하게 되기를 바라며 전람에 가늠한다.'
대학 노트 세 장 분량으로 누구라도 알아보기 쉽게끔 정서되어 있었다. 등을 돌린 채 열심히 자기 글을 읽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나 보았다. 어느새 들어온 그녀는 조금전과 같이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차분하게 앉아서 글을 읽고 난 뒤의 어색해하는 나를 다정하게 맞아주었다.
'미술에 대한 조예가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괜찮아.'
미술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고 했다. 이것마저 없으면 단조로운 삶밖에 남지 않을 것 같아 몇 년 전부터 마음 먹고 시작했는데, 찾아간 갤러리나 아뜰이에에서 만난 작가와 나눈 이야기, 찍은 사진들이 모여 제법 의젓한 미술비평가 자리를 잡았다며 이야기 도중 간간이 웃었다.
이게 적당한 일이라면 시작하지 않았을 그녀같았다.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접근해야 하며, 그런 만큼 뒤에 쥐어지는 보람이 여간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밝은 미소를 짓는 그녀였지만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도 약간 미흡한 점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것은 그런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자료들을 누군가 마음이 맞을 지인에게 보여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글을 참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전 미술에 대해 문외한입니다만, 적힌 글을 보고 아, 이렇게 그림과 조각을 우리 삶과 연관시켜 보게 되는구나 하는 느낌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마워. 난 내 글보다도 내가 작품들을 제대로 보긴 보는 건지 그것이 항상 궁금해.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마땅히 없는 데다, 작가들은 동류가 아니면 그런 부분에 대해서 대화를 깊게 안 하려 들거든. 그런 부분에 대해 선뜻 묻기를 싫어하는 내 소심함도 없잖아 있고. 감상평은 그 다음이야. 우선 내 시선 안으로 작가의 작품이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돼. 흔히들 그러잖아. 작품은 먹는 것이라고. 소화가 기분좋게 되면 배가 꽉찬 포화감으로 천천히 감상을 기록하고, 그리고 마무리를 해. 그러면 나의 미술 기행은 일련의 여정을 끝내고 내 책상 책꽂이에 이렇게 착착 쌓이지. 요즘은 이게 일이야.'
표정이 점차 밝아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나에게 여러 가지 생각이 얇게 겹치며 지나갔다. 그러더니 별안간 왜 오게 됐는지 그 목적을 상실한 사람처럼 허둥됐다. 뭔가 생각의 실마리를 놓친 사람처럼 말이다.
그런 내 꼬락서니가 재미있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일전에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배문자씨의 우스꽝스런 얼굴을 보고 자지러지게 웃던 것과 같이 큰 소리로 난데없이 웃기 시작했다.
'불편하면 나갈까?'
그녀는 한참 웃고 나더니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며 나갔다. 난 잠시 동안 뭉쳐있던 긴장을 풀기 위해 그녀가 없는 틈을 타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방은 참 따뜻했다. 눈이 슬슬 감기더니 잠이 오려는 것 같았다. 여자가 혼자 사는 방은 향내가 났다. 그것도 은은한 쟈스민 향이었는데 그녀의 없어도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팔 베개를 하고 누운 채 천정을 향해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했다. 눈꺼풀을 몇 번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는 동안 천정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앞이 서서히 흐려지며 스르르 눈이 감겨들었다. 엉덩이 밑으로 누군가 따뜻한 손을 포개준 것처럼 포근했고, 발바닥에서는 지근거리는 열이 치받힌 채 조금씩 나른한 듯 스멀거리며 아롱거렸다. 흰색 망사 커튼 너머로 밖이 희미하게 보였는데, 가끔씩 지나가는 행인들의 말소리가 아른했다. 찌푸둥한게 오랜만에 눈이 올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비라도 내릴 것이다.
용기를 내어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주 토요일이었다. 퇴근을 위해 사복으로 갈아입으려 중대 내무반으로 가려고 막 사무실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누군가 등뒤를 톡 치는 것이 느껴져 돌아봤더니 그녀였다.
'교육대에 필요한 비품들이니 받아두세요.'
하며 큰 대봉투만한 크기의 비닐에 가득 담긴 물건을 전해주었는데, 그녀의 손끝으로 조그만 쪽지도 같이 넘어왔던 것이다. 일도 다 끝난 시간에, 그것도 나른한 주말의 퇴근 시간대에 기분 잡치게 하려는 건지 일을 시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돌아봤을 때 조그만 안경너머로 뻗쳐진 그녀의 손길은 이상야릇했다. 얼른 쪽지와 물품을 받은 난 그 길로 교육대로 가서 쪽지를 부리나케 확인하고 시간을 내리라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이렇듯 짧은 시간 내에 곁으로 다가올 줄은 오히려 내가 의외였다.
의식이 가물거리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고 있는데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왔다. 소담스럽게 생긴 소반에 소주 한 병과 은박지에서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안주감으로 보이는 걸 들고 그녀가 살며시 들어왔다.
잠시 일상 밖의 이야기를 나눈 뒤라 술자리는 어색하지 않았다.
'기분 나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약간 들떠 있었다. 조금전의 시간을 만회하고 싶었다. 술이 한 두 잔 들어가면서 취기도 올랐지만 난 여기서 모험을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어차피 찾아올 무렵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니까. 한편 나이 살 좀 먹었다고 나를 수월하게 다루는 그녀를 보니 그 역시도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여겨졌다.
난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면 조금도 지체하지 않는다. 술상을 조용히 옆으로 밀어놓은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살며시 끌어당겼다.
고등학교 다니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시험이 많던 우리들에게 위로랍시고 던져주던 선생님의 말씀이다.
'문제를 놓고 답안을 결정할 때는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을 찍어라. 그리고 설령 시간이 남아 한 번 더 훑어보더라도 명확하게 틀리지 않으면 앞에 적은 답을 고수해라. 그러면 많은 실수를 줄일 것이다.'
그녀의 입이 조금 벌어지며 방금 마신 술에서 조금 더 숙성된 것 같은 뜨거운 향기가 달콤하게 흘러나왔다. 그녀가 보았다던 법구경을 끄집어내어 한 번 보고 싶었다. 입안의 혀는 매끄러웠다. 동봉된 사진에는 미로가 잔뜩 그려져 있었고, 하단에는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신비한 나무 세 그루가 그려져 있었지. 허리를 감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엷은 옥구슬 구르는 소리가 조그맣게 조금씩 들려왔다. 미로는 잘 만 하면 빠져나갈 수 있게 되어 있어 결코 미로라 할 수 없었다. 목덜미의 가는 선을 타며 아래로 반드시 눕혔다. 신비한 나무를 보았을 때 이 여자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녀의 가슴속으로 손을 넣으며 나 역시 생각해보았다. 물컹한 것이 방망이질하듯 뛰는 게 느껴졌는데, 손끝이 차가웠던 것일까, 움칠하며 허리를 다리로 부드럽게 감아왔다. 가슴은 조각처럼 황량하게 뚫려 있지 않았다. 대신 보드라운 유방위로 유두는 힘차게 뻗어 있었고, 다리를 감은 채 그녀의 허리가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난 아까 말하던 도중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그 순간 무엇을 놓쳤을까. 아직 혀가 그녀의 가슴 위를 천천히 돌고 있을 때, 하복부로부터 껍질이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우리가 허물을 모두 벗을 무렵, 생각이 날 지도 모른다. 아마 이 여자는 그 작가를 끔찍이 위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 어쩌면 그 나무는 내 중심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몸이었는지도 모르고, 팔을 힘차게 뻗어 올린 남자 셋이 하나의 미로같은 여자를 바라본다, 는 생각이 명확하게 들면서 내 몸은 용감하게 직립한다.
이제 미로 속으로 뛰어 들어가도 되겠다. 그 전에 그녀의 뜨거운 숨결과 그 호흡에 맞춘 듯 부드러운 손길이 내 몸을 그 미로로 천천히 이끌고 갔다. 제목을 묻는 내 말에 간단히 법구경을 소재로 만들었다고 했어. 법구경은 따뜻한 내용으로 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그녀가 안내해준 곳으로 들어간 몸이 그걸 충만하게 느끼고 있는 걸 보니까 말이다. 어쩌면 법구경 속의 미로속에서 길 찾기를 하는 것으로, 실제 난 가보지 못했지만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아 발걸음을 빨리 해야할 것 같았다.
몸이 밑으로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몸 곳곳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마치 산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나무는 여전히 서 있다. 미로도 여전히 열려있다. 사진 속에서 본 그림이 어지럽게 돌고 있다. 난 아직 미로속에 있는데, 나갈 길을 찾지도 못했는데, 그림이 돌고 있다. 길 찾을 생각을 말아야할 지도 모른다. 황량하게 뚫린 가슴을 여전히 놀라 팔딱거리는 내 가슴으로 채웠다. 그림이 도는 사이 나무가 떨어지려고 한다. 안된다. 아직 길도 찾지 못했는데. 뜨거운 불길이 나무를 홀랑 태워버린다. 우지직 옆에서 낙엽 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다 타 버린 것이다.
'미안해.'
대답대신 술상 위에 놓여 있던 잔을 아직 미진한 채 열이 남아 있는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밖에 비가 오는 소리가 타닥타닥 들려왔다. 볼 일을 다 본 사람은 그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 창으로 부딪쳐오는 빗소리가 정겹다. 차라리 아무 일도 없었다면, 비가 오지 않았다면, 그러면 그러는 사이 무슨 일이 세상에 벌어졌을까. 그래서 비가 왔던 것인가.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옆으로 돌아누운 그녀의 등을 보며 살며시 밖으로 나왔다. 이런 때 어떤 놈은 욕을 한바탕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라질.
화창한 날이었다.
누군가 또 제대를 하느라 위병소가 떠들썩했다. 다소 날씨가 추웠지만 그런 것에는 다들 아랑곳하지 않았다.
군대를 제대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신나는 일이다. 그것은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파릇파릇한 생명력을 지닌 채 무한대의 영역으로 거침없이 나아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동안의 생활이 학교 교육과 군대라는 좁은 울타리 내에서의 속박의 연속선상이었다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부대 문을 벗어나는 순간부터는 무한한 자유를 얻어 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앞으로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 이하의 턱도 없이 부당한 취급을 받지 않아도 되고, 물론 당분간이겠지만-그래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서 생활이 안정될 기반을 잡기까지는 적은 시간이 아니다-아침 늦게까지 잠을 늘어지게 잘 수 있는 것을 의미하며, 가고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아니 그 무엇보다 내가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추운 겨울로 접어들며 전역하는 기간병들의 숫자가 불어나면서 교육은 좀체 끊어지는 일이 없이 연이어 진행되었고, 그 동안 내무반에서 관리만 하던 영묵이 어쩐 일인지 강당쪽의 교육 진행을 맡고 싶다고 해서 덕분에 난 햇빛이 잘 드는 텅 빈 내무반 안쪽에 앉아 혼자 텔레비젼을 보거나 편하게 누워 지내는 일이 잦아졌다.
사실 진작 이러고 싶었지만 성격이 소심한 대신 은근히 자신의 몫을 챙기는 영묵이라 냉정하게 잘라서 말하기가 싶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무실로 배속받은 후로 사무실에서 궂은 일하며 지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축구 연습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아지면서 유독 편한 운동복으로 부대 안 어느 곳에서 쉴 때마다 뭔가를 끙끙대며 들고서는 얼굴이 벌개진 채 어디론가 가는 영묵을 겸연스럽게 만나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당에서 교육 준비를 마치고 잠시 짬을 내어 교육대 내무반에 들어와 보면, 텔레비젼을 털어놓은 채 담배를 피우며 편히 쉬고 있던 영묵을 쳐다보아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이 되는 오전 중 가장 한가한 시간이다. 교육대 일을 진행한 후부터 우리는 거추장스럽게 중대 내무반에 가서 옷을 갈아입지 않아도 되었다. 업무 비중이 높은 관계로 중대 인사계가 안 올라와도 좋다는 허락을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무반 한 쪽에 마련된 조그만 방에 들어가서 부대 안에 들어와서 읽으려고 넣어 온 형으로부터 온 편지를 옷에서 꺼내 조금전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왕이면 여유를 부리고 싶어 전역병들이 자고 개켜놓은 모포 한 장을 길게 깔고 남은 모포에 상체를 기댄 채 더러누웠다. 편지를 읽다보면 텔레비젼 소리로 밖에서 누군가 갑자기 들어오거나 부지불식간에 걸려올 내부 전화벨 소리를 놓칠 것 같아 텔레비젼은 끄기로 했다.
편지는 형의 깔끔한 성격답게 깨끗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형식이 보아라
모두들 잘 계시니. 전화로 하기에는 말이 길어질 것 같고,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아 편지를 쓰기로 했다. 오랜만에 쓰는 편지라 앞 뒤 맞지 않는 내용이 있더라도 양해바라겠다.
부대 생활은 잘 하고 있겠지. 늘 차분한 성격이라 잘 하리라 믿는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이곳은 어찌된 일인지 엉망이다. 일전에 너에게 말했다시피 이미 사표를 낸 곳이라 일어난 사건과 관련해 몇 가지 조사만 받으면 되리라 생각했던 내 생각에 착오가 생겼다.
결국 모든 일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게 되어있는 모양이다. 이 참에 너에게도 충고 하나 하는데 사필귀정은 생각보다 의외로 일찍 찾아올 수도 있음을 항상 명심하기 바란다. 철들고 나서 바라보는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이전에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처럼 공사 전체가 발이 묶이게 된 것은 어느 시공사 직원의 자살이 원인이 되긴했지만 곧 이어 닥친 감사와 맞물리면서 의외로 일파만파로 번지며 모든 것이 엉망으로 치닫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민간공사가 아닌 관공사라 모두들 어떻게든 수습을 해보려고 이 추운 겨울에 분주하게 여기저기 백방을 뛰어 다니지만 원체 자주 일어나는 일들이라 이번만은 빠져나올 도리가 없어 보인다. 나 역시 시공사 직원에게 술값조로 받은 몇 십만원이 덜미가 되어서 올라왔지만, 그것마저도 그 직원의 업무 노트에 이름까지 기록된 채 남아 있을 줄 누가 알았겠으며, 더한 것은 그 친구가 왜 죽었는지 아직 의아하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답답해지는 쪽은 물론 이곳 현장 사람들이다. 너도 알다시피 원래 건설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냐. 말 그대로 짧은 시간내에 복잡한 설계도대로 건물을 지으려다 보니 제시간 안에 공법대로 진행되는 것은 얼마되지 않고, 모두 변칙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는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도록 과정이 잡혀 있었던 터라, 관행대로 일을 벌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들의 초조한 심정은 말로 해서 무엇하겠나 만은 그래도 내 일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소 상세하게 밝히지 않을 수 없어 여기 조금 밝혀둔다.
너 도면 없이 공사한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이 있니? 좀 더 이야기한다면 확정된 도면은 없고, 임시로 나온 한 가지 일에 대해 여러 가지의 도면이 나딩구는 채 공사를 해야 한다면, 그 누구도 어떤 도면이 정본이라고 확인해주지 않는 채 말이다. 그래놓고 공기가 늦어지면 늑장부린다고 엄포를 놓고, 서두르다 보면 흔히 발생하게 되는 부실 시공에 대해서는 악착같이 찾아내선 약점으로 활용하는 온갖 악의에 찬 비리와 부조리들이 혼잡스럽게 뿌려져 있는 곳이 이 땅의 건설 현장이다.
나로선 누구의 편을 들어줄 입장이 못되었다. 일이 급한 줄은 내 임무니까, 그것으로 내 급여를 받게 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원래 부실한 도면을 가지고, 오랫동안 공사를 해보면 우리가 종종 못 배운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하도업체-이들은 워낙 단련되어서 그런지 중간에 일을 팽개치고 가는 나쁜 습성은 있지만 일 머리 하나만큼은 정확하게 알고 있다.-사람들조차 도면대로 공사하기 힘들다고 하는 판에 위로부터 부당한 지시대로 공사를 강행하도록 종용할 수는 없었다. 그래, 어쩌면 그까짓 무식한 하도업체 하나 제대로 주무르지 못해 공사를 추진 못한다는 것은, 그것도 이 땅에서,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아직 배가 부르거나 배짱이 없어서겠지.
부실한 도면으로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이미 지어놓고도 철거를 해야하는 상황이 많이 벌어져 현장에서 그냥 놀아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날은 참으로 따분했는데 금방 점심을 늘어지게 먹고 나온 터라 현장 바로 옆에 놓인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수 없어 깜박 졸았던 것 같다. 누군가 갑자기 툭툭 치는 듯 해서 눈을 떴는데 생판 처음 보는 사복 차림의 사람이 현장을 어떻게 들어왔는지 달게 잠든 나를 깨우고 있었다.
'이 곳 현장의 관리자 되십니까?'
'그런데요?'
'이 현장과 관계가 있는 사람인데, 말씀드려도 잘 모르실 것 같아 인사는 생략하기로 하고 작업 현황에 대해 좀 알려주실 수 있는지요?'
금방 잠이 깨긴 했지만 지나가던 어중이떠중이가 아님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요청하는데서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난 곧 바로 의자에 정자세를 취하고, 상대가 누군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상황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저도 건축을 전공하고 비록 설계회사를 거치지 않고 건설현장으로 바로 오긴 했습니다만, 제가 원칙만을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적어도 이런 큰 현장에서 도면이 확정되지 않은 채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한편으로 분노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솔직한 건축인으로서 하는....'
사실 당시 난 너무 잦은 설계 변경으로 해서 지어놓으면 허물고, 지어놓으면 허물고 하는 구태의연한 방식을 혐오하면서 지쳐있었음이 틀림없다. 상대가 누군지 모를수록 현장 쪽에 불리한 발언이나 그 반대적으로 우리의 향후 원하는 의견을 내놓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괴감을 지금에사 말하는데 떨칠 수가 없구나. 아무튼 국민의 혈세로 거둬들인 돈으로 공사를 하는 마당에 마치 돈을 물 쓰듯 낭비하는 것에는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낭비가 보다 원활한 생산성을 향한 밑받침이 된다면야 나도 할 말이 없겠지만, 밑 빠진 독으로 흘려 붓 듯 하는 데야....
마침내 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도면이 확정된 이후에 건설을 계속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과 함께 이미 지어진 건물 내부에도 부실이 많음을 은연중 내비치고 말았다. 말이 끝났을 즈음 난 어지간히 흥분했던 것 같다. 나의 형편없는 순진함에 감동을 받은 건지 상대는 그런 나에게 담배 한 가치를 건네며 자신도 그냥 가기가 미안했던지 신분을 밝히는데 곧 이 현장으로 감사 나올 감사원 제3팀 팀장이라며 어깨를 두드리고는 나갔다. 그 때까지도 난 담배 한 가치에 잠시 흥분을 달래며 일이 꼬여감을 몰랐다.
정확히 담배 한 가치를 다 피우고 발 밑에 비벼 끄려는 순간, 무전기에서 나를 찾는 소리가 급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현장은 급박하게 긴장되어 갔다. 소식을 전해들은 사무실과 시공사 직원들이 현장으로 차를 몰고 급히 내달려 오고, 급기야는 감독 총책인 단장님까지 헐레벌떡 뛰어나오는 사태가 발생했다. 난 순간 아차, 했지만 이미 일은 다 까발려진 후였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싶지가 않아 그만 적기로 하겠다. 너도 알다시피 한참 바빠야 할 난 집에서 너와 술을 마시거나 짧았지만 테니스를 같이 치기도 했으니.
무엇보다도 착잡한 것은 그로 인해 죽은 건 지 분명치 않은 자살한 시공사 직원의 일이다. 그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 살림중이었다는 것이다. 나이도 비슷한 연배라 그 친구의 결혼식에도 참석해서 행복을 빌어주었는데. 아참, 이것과 관련해서 너에게만 이야기해 둘 것이 한 가지 있다. 사실 변명이 될 것 같고, 일이 이렇게 발전할 지 몰라 그냥 숨겨두려던 것이었는데. 이 친구가 죽기 얼마 전 나에게 찾아와 건넨 돈 삼십 만원은 사실 받긴 했어도 내가 쓰지 않았다. 난 그 돈을 고스란히 봉투 채로 그 친구 모르게 그의 회사 직원들의 회식비로 사용하라며 주었다. 이런 일은 종종 있는데, 열악한 사정 속에서 일을 진행하기 위해 아랫사람들을 매몰차게 다그치는 것을 몇 번 곁에서 보았기 때문에 모른 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친구 몰래 준 것인데 난 공교롭게 되어버려 누구에게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구나.
답답한 심정 어딘 가에는 알려 놓아야겠다는 심정으로 편지를 썼다. 넌 내 동생이기도 하면서 믿음직하니 더욱 그렇게 해야만 되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여기 생활이 지금 두서없이 흘러가듯 내 편지 또한 오랜만에 쓰다보니 두서가 없는 것 같다.
얼마 안 남았지? 한결같은 인내심으로 잘 견뎌온 만큼 남은 기간 더욱 알차게 보내서 좋은 결실 맺도록 해라. 자주 편지해도 괜찮겠냐? 부모님께는 가급적 알리지 마라.
창으로 빛이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잠시 편지를 읽는 동안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아무도 올라오지 않아 편지 읽기가 편했다. 당장 뛰어올라 가서 무슨 일이든 도와주고 싶지만, 그런 마음을 형처럼 편지에 담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점심 시간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힘차게 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