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 김정운
동물들은 상처가 생기면 병이 나을 때까지 꼼짝 안합니다. 먹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있습니다. 상처가 아물면 그때서야 엉금엉금 기어 나옵니다. 그 하찮은 동물도 몸에 작은 상처가 생기면 그렇게 끝없이 외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바쁘고 정신없을수록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도 좀 적게 만나야 합니다. 바쁠수록 마음은 공허해집니다.
외로워야 성찰이 가능합니다. 고독에 익숙해져야 타인과의 진정한 상호작용이 가능합니다. ‘나 자신과의 대화인 성찰’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가지는 심리학적 구조가 같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에 익숙해야 외롭지 않게 되는 겁니다. 외로움의 역설입니다
‘나는 고독하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여자의 화장은 남자와 별 상관없다. 오히려 다른 여자들 때문에 화장한다는 대답이 많았다.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여자들보다 더 멋지게 보이려고 화장한다는 것이다. 한국보다 화장에 훨씬 둔감한 영국 여인네들 이야기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 화장하지 않는다.
수용소나 정신병원의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무대 뒤, 즉 배후 공간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숨을 공간이 없다.
한국남자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회적 역할을 떨어내고 차분히 앉아 생각할 수 있는 배후공간이다. 뒤로 돌아설 수도, 그렇다고 마냥 앞으로만 달리기도 두려운 이 땅의 사내들은 매일 밤 지하로 내려간다. 그곳에는 화장을 수시로 고치는 여인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룸살롱이 죄다 지하에 있는 거다. 왁스(화장을 고치고)
‘그리움’은 그림, 글과 어원이 같다. 모두 ‘긁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긁는 다는 것이 뾰족한 도구로 대상에 그 흔적을 새기는 행위라고 할 때, 활자의 형태로 긁는 것은 ‘글’로 선이나 색을 화폭 위에 긁는 것은 ‘그림’이라는 말로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를 마음속에 긁는 것은 ‘그리움’이 된다.
막연한 그리움이 현실 속에서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변할 때 생기는 심리적 반응은 ‘설렘’이다. 행복의 기준은 바로 이 설렘의 유무다. 그저 느긋하고 여유로운 상태는 행복이 아니다. 금방 지루해진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설렘이 동반된다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 된다. 사랑에는 그리움과 설렘이 동반된다
남에 의해 바뀌면 참 힘들다
인간은 눈이 두개다. 그 두 눈이 얼굴 가운데로 몰려 있는 사람은 그리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눈이 몰려 있는데, 거기에다가 눈 크기마저 단춧구멍만 하면 진짜 무서운 사람이다. 유명인의 예를 들자면, 남희석이나 신동엽 같은 이들이다.
반대로 눈이 얼굴 양쪽으로 펴져 있는 사람은 편하다. 까다롭고 힘들었던 경험은 별로 없다. 이런 내 기준은 동물의 세계에도 그래도 적용된다. 초식동물은 눈이 좌우로 멀리 떨어져 있는 반면, 육식동물은 가운데로 몰려 있다. 초식동물은 사방을 경계하느라 그렇다. 가능한 한 멀리, 그리고 넓게 관찰하고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육식동물은 그럴 필요가 없다. 먹잇감에 집중하고 응시할 뿐이다.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는다
아침부터 밤까지 스마트폰, 컴퓨터, TV 모니터만 들여다본다. 그리고 내 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 외눈의 카메라로 기록한 세계가 더 정확하고 진실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디든 놀러가면 꼭 이렇게 외친다. “와, TV에서 본 것하고 똑같네!” TV에서 봤으니까 진짜라는 이야기다. 아, 이건 순서가 완전히 뒤바뀐 거다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스스로 세상을 해석할 수 있어야 불안하지 않다. 그래야 제대로 사는 거다. 돌아다닐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보고 다녀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의 두 눈으로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것이 존재의 기반이다
오십 중반이 넘도록 장가 못 간 내 친구는 세상의 모든 여자를 오직 ‘예쁜 여자’와 ‘못생긴 여자’로 나눈다. 장담컨대 그 녀석은 죽을 때까지 혼자 살 거다. ‘내편 - 네 편’의 이분법은 존재가 불안한 이들의 특징이다. 자신의 위치를 정하고 반대편에 적을 만들어야 자신의 존재가 확인되는 까닭이다
경우의 수가 두개뿐이면 반드시 극과 극을 달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홀짝보다는 가위바위보를 해야 중간에 안 뒤집어진다. 선택의 폭이 넓어야 세상을 보는 눈이 관대해진다. 심리학적으로 자유란 ‘선택의 자유’를 뜻한다. 주어진 콘텍스트에서 주체적 선택의 범위가 넓어야 행복하다
한국 사회가 온통 분노와 적개심에 가득 차 있는 까닭은 매번 말도 안 되는 이분법을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요즘 기존의 여당, 야당과는 다른 새로운 당이 나왔으면 하는 기대가 큰 이유도 네 편 - 내 편, 보수 - 진보의 이분법적 강요로부터 이젠 제발 좀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재미’의 복원이다. 사는 게 재미있어야만 이분법적 시선을 상대화하고 객관화할 수 있다. 사는 게 재미있어야 다른 이야기에 관대할 수 있다.
일본과 독일의 공통점은 두 나라 사람들은 정확하다. 그들이 만든 물건은 믿을 수 있다는 거의 맹목적 신뢰가 전 세계 어디에나 존재한다. 왜 그럴까?
두 나라 모두 ‘기차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기차 때문에 독일, 일본 사람이 그렇게 정확해지고 성실해졌다는 이야기다.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다.
독일의 이체에나 일본의 신칸센을 타보면 정말 세계 최고 수준이다. 또한 이들의 각종 열차는 나라의 구석구석을 커버한다. 자가용이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기차시간은 절대 어겨선 안 된다. 독일, 일본이 시계를 그렇게 잘 만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기차 시간의 핵심 이데올로기는 통제다. 기차 시간은 정확히 지켜져야 하고 예측 가능해야 한다. 단 몇 초의 오차만으로도 엄청난 사고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그네스 발차나 조수미가 매번 ‘기차는 8시에 떠난다’며 슬프게 노래하는 거다.
다 쥐 때문이다. ‘그 쥐’를 말하는 게 아니다. 컴퓨터의 마우스다. 한국 사회가 이토록 소통이 힘든 사회가 된 까닭은 바로 그 마우스 때문이다. 인간 의식의 진화 과정은 마우스 사용 전과 후로 나뉜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주체적 삶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을 관심의 대상과 목표가 있어야 주체적 삶이다. 우리가 젊어서 했던 ‘남의 돈 따먹기 위한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다
자아실현은 공부를 통해 구체화된다. 공부야말로 가장 훌륭한 노후 대책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 사회를 겪고 있는 일본이나 다른 서구 국가들이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내린 고령화 사회 대책은 공부다.
자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으로부터의 자유free from’와 ‘~을 향한 자유free to’ 무엇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의 소극적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도피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질그릇을 만들기 위해 물레는 돌리는 데 방해가 된다며 자기의 새끼 손가락을 잘라버리는 조르바식 자유가 진정한 자유다. 추구하는 바가 분명해야 한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