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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몽사이트
유 병 근
01
기차가 연달아 가고 있다. 꽁지에 풍선을 매단 기차 너머로 구름이 일다가 멀리 가곤 했다. 기차와 구름은 전에 없던 이름표를 달고 있다. 기차가 이마에 매달려 있다.
02
한 소나기 지나고 너럭바위 발치에 웅크린 메아리를 듣는다. 한 소나기 지나고 잡힐 듯 떠 있는 무지개 속에 새소리가 있다. 아무도 듣지 않는 길에 새소리가 멀리 떠 있다.
03
이마의 미열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미열을 닮은 불그스름한 꽃 한 송이, 이마를 짚은 손바닥이었다. 책상에 손바닥을 털었다. 책상에 꽃이 피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04
낭떠러지 끝에 어쩌다 발을 삐끗거렸다. 나뭇가지 하나를 움켜잡았다. 이상하게도 그때, 나뭇가지 끝에 낯선 길이 하나 매달렸다. 길이 등을 내밀며 어부바, 어부바했다.
05
어디 다녀오겠다고 떠난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를 기다리다가 머리가 센 나는 어디 다녀오겠다고 떠난 반세기 전의 그를 감감한 들길에서 허수아비처럼 팔 벌리고 있다.
06
벽 그림에서 향내가 난다고 벽 그림 속으로 가고 있었다. 낭떠러지길이 벽에 걸려 있었다. 국화꽃 같은, 난초꽃 같은 것이 낭떠러지 꼭대기에 안개처럼 가만 걸려 있었다.
07
아파트 놀이터에 의자가 앉아 있다. 세발자전거가 쉬었다 가는 의자,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굴리다 가는 의자, 아무도 없는 저녁엔 훌라후프 혼자 별빛 헤아리며 앉아 있다.
08
잘 모르는 길에 잘 모르는 사람이 오다가 가고, 잘 모르는 나무가 아득히 솟아 있고, 잘 모르는 산기운이 천천히 내려오고, 잘 모르는 소리가 잘 모르는 곳으로 기울고 있다.
09
누가 물을 술이라 한다. 누가 술을 물이라 한다. 물도 술도 아닌 구름 한 자락, 누가 구름을 물이라 한다. 누가 구름을 술이라 한다. 술에 술 타고 물에 물탄 세월이라 한다.
10
횡설수설에 꽃이 핀다고 횡설수설했다. 어쩌다 꽃은 보이지 아니하고 낯선 길이 멀리서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다. 낯선 길에게 가서 중얼중얼, 횡설수설하다가 돌아섰다.
11
바람이 언덕을 핥고 있었다. 비스듬히 쓰러지는 나무를 핥았다. 나무 등걸에 기웃하게 걸려 있는 바다를 핥았다. 조금 더 가팔라진 바람 부는 바닷가 언덕이었다.
12
강아지가 한 마리 강아지를 따라 간다. 길가에는 민들레꽃도 피지 않고 민들레가 피던 자리에 작년의 개미자리가 피어 있다. 강아지가 한 마리 개미자리 꽁지를 물고 있다.
13
죽순을 먹고 내 몸에 자라는 대나무를 본다. 비가 오면 비에, 눈이 오면 눈에 젖은 대숲에 매달리는 참새를 본다. 내 몸에 부리를 닦는 저녁무렵의 음표를 본다.
14
한 권의 책은 한 권의 책속에 둥지를 튼다. 둥지 속에 들앉은 문장 몇 줄이 알을 깐다. 책갈피를 들춰 알을 꺼내는 손바닥을 방금 낳은 알들이 손바닥의 손금을 쪼아댄다.
15
나무아미타불 염송을 하는 사이 꽃을 머리에 인 상여가 가고 있다.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 아득한 안개 속을 가고 있다. 자꾸 시드는 안개를 지나 나무아미타불이 가고 있다.
16
등을 내미는 길바닥에 그냥 업힌다. 갈림길 어디에서 주춤거리는 걸음을 깔고 앉는다. 신발을 벗어 먼지를 턴다. 먼지처럼 날아가는 아지랑이 하나 문득 눈에 들어왔다.
17
남쪽과 동쪽이 애매하다. 동남쪽 아니 남동쪽이라며 우기고 있다. 서로 우기는 애매한 방향이 어긋난다. 버드나무 우듬지에 구름처럼 아득한 까치둥지 하나, 흔들리고 있다.
18
흐린 하늘인지 개인 하늘인지 어림잡을 수 없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길은 길 위에 떠 있다. 허공이 된 길에 매달린 꽃망울 같은 것, 피는 듯 마는 듯 떠 있다.
19
결명자를 볶고 메밀을 볶아 두루 섞는다. 결명자가 메밀이고 메밀이 결명자이다. 암수 구별이 없는 자웅동체를 좀 어리둥절하지만 후라이팬에 골고루 다시 길들인다.
20
댓글에 어긋나고 카톡에 어긋나는 갈림길에서 신호를 기다린다. 아무데서나 오지 않는 신호와 아무데서나 가지 않는 신호 사이 눈치 없는 강물 혼자 덧없이 흘러간다.
21
솔방울이 몇 개 떨어져 있다. 품에 안은 씨알을 다독이고 있다. 비 그친 땅에 솔방울이 몇 개 더 떨어져 있다. 금방울 은방울소리보다 으늑한 소리의 태몽을 꾸는 솔방울.
22
모임이 끝난 자리에서 아직도 모임은 진행 중이다. 식당으로 가는 길은 2층에 있고, 꽃바구니의 꽃 한 송이도 2층으로 올라가고 있다. 모임이 끝난 자리를 쓸고 있는 꽃을 본다.
23
댓글을 읽는데 댓글이 나오지 않는다. 숨어 있던 댓글이 다시 나온다. 요즘은 이상하게 날이 저물고 난데없는 기침이 몇 번 터진다. 저녁놀 속의 새 두 마리 댓글에 날고 있다.
24
나뭇가지에 능금을 달다가 떨어트리고 다시 단다. 높이 매달린 능금이 나를 빤히 굽어보고 있다. 날아가던 굴뚝새가 굴뚝 언저리에 앉아 굴뚝에 부리를 가만 문지르고 있다.
25
복사꽃이 무성한 나무를 본다. 두 그루 아니 세 그루인 나무는 언덕에 서 있다. 넓고 푸른 호수가 가로 놓인 호수 너머로 길이 또 있다. 언젠가 그 길을 간 적도 있다.
26
발코니에서 마늘을 널어 말리는 그녀를 본다. 그녀는 갑작스레 마늘냄새로 가득 찬 발코니가 된다. 발코니가 둥둥 떠오르고 나는 발코니에 매달린다. 내 몸이 마늘냄새가 된다.
27
유리컵 속의 바람은 유리컵만한 얼음덩이였다. 얼음을 꺼내다가 손가락을 살짝 베이었다. 투명한 얼음 속에 빨간 피 한 방울. 화폭에 떨어진 핏방울은 한 점 그림이 되었다.
28
멀리 뜬 바다가 눈짓을 한다. 파란 바다 위에 파란 하늘이 내려와 멱을 감는다. 나도 옷을 벗는다. 새가 날아가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바다가 조금 더 멀리 떠 있다.
29
장마가 지나간 길은 눅눅하다. 눅눅한 길에 선다. 마른 걸레를 파는 가게를 지나간다. 내 안의 길이나 부지런히 닦으라 한다. 꼽꼽한 길과 말랑한 길과 팽팽한 길을 번갈아 간다.
30
공원에 앉은 의자는 아직도 공원에 앉아 있다. 비가 오면 비에 젖고, 바람이 불면 바람에 부대끼는 의자가 된다. 누가 그 의자에 가서 앉는다. 앉은 자리에서 비바람이 된다.
31
거울을 보고 거울이라고 하는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의 거울이 웃고 있다. 들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거울 속에 있다. 웃음 한쪽을 꺾어 거울에 가만 문질러보는 거울을 본다.
32
창밖에 수런거리는 소낙비소리를 듣는다. 꽃망울 무늬를 닮은 방울을 매달고 있다. 방울소리를 들으러 창문에 기대선다. 어느새 비는 창문에 자라는 꽃나무 방울이 된다.
33
어제도 방안 구석을 바구미가 지나갔다. 한 사내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갔다. 바구미처럼 몸을 웅크린 사내는 조금 뒤 바구미가 되어 보리쌀 틈새로 까맣게 지나갔다.
34
물을 건너간 바람은 물이 되어 둥둥 떴다. 물 위에 핀 빨간 꽃잎을 바람이 흔들고 있었다. 미처 모르는 꽃잎의 어떤 것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바람이 되어 물을 건너갔다.
35
누가 동전을 쥐어주는데 받지 않았다. 동전의 개수만큼 근심이 생긴다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꿈속에 생시가 있고 생시 속에 꿈이 있다는 말을 꿈속에서 듣고 있었다.
36
들판에 하얀 허수아비가 서 있다. 허수아비 팔에 참새가 앉았다 간다. 나락을 까먹고 배부른 참새에게 팔을 벌리고 선 허수아비는 해가 얼추 기울도록 새를 보고 있다.
37
허방이었는지 어둠이었는지 좀 아득했다. 아무도 없는 길에서 아무도 알 수 없는 신호를 들었다. 아무도 없는 데서 양파 까듯이 아무도 알 수 없는 텅 빈 신호를 듣고 있었다.
38
잠 속에 오는 헛것은 잠을 베고 잔다. 빗속에 오는 헛것은 비를 베고 잔다. 잠도 비도 아닌 것이 수시로 지나간다. 시간의 수레를 타고 가는 듯 마는 듯 어제 일이 지나간다.
39
나뭇가지에 바람이 오다가 슬그머니 가고 없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와 나란히 길을 가는데 바람이 없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까치가 바람이 사라진 길에 날아가고 있다.
40
창문에 자라는 별을 본다. 새벽은 구름을 걷어내고 날이 밝아 온다고 창문에 한두 개씩 별을 옮겨 심었다. 별의 종알거림을 따라 잠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별이 참새다.
41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 것이나 되는 듯 맨 바닥을 기어간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잡으러 나도 맨 바닥을 손바닥 닳도록 긴다. 기다가 손 탈탈 털고 먼 허공에 눈을 판다.
42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만이 낙엽 아니다. 세상의 바닥으로 떨어진 처지는 세상의 발바닥에 찍히고 밟히는 하잘 것 없는 낙엽이다. 날지도 못하는 망가진 길이라는 이름이다.
43
비가 오다가 햇볕이 난다. 햇볕이 나다가 비가 온다. 꽃눈을 시샘하는 바람이 가파르고 바람을 시샘하는 꽃눈이 가파르다. 갑은 을의, 을은 갑의 기선잡기놀이가 가파르다.
44
낙동강 둑길에서, 어쩌면 낙동강 둑길 아닌 둔치에서 네 이름을 적었다. 물에 잠긴 둥근 달을 적었다. 달 속에 너는 있고 너 속에 달이 있다며 달이 된 네 이름을 찾아 불렀다.
45
이것은 연필이고 이것은 공책이고 이것은 지우개니라. 누가 나에게 둥근 달을 보여주고, 또 누가 나에게 구름 한 덩이 끌어와 보여주고, 구름에 젖은 팔월공산을 그리라 한다.
46
바퀴벌레 한 마리 기어가다가 등을 웅크렸다. 가만히 등을 누르자 굴러가는 바퀴벌레는 발바닥에 주렁주렁 바퀴를 달았다.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아이들이 대여섯 오고 있었다.
47
캄캄한 막장에 얼굴 처박는 얼굴이 있다. 어디서 달이 뜨는 듯 지고 있다. 나를 옭아매는 끈이 달빛처럼 수런수런 풀리고 있다. 다 풀린 뒤 고리만 남은 달 혼자 가고 있다.
48
몇 마장 길을 걸었으나 남은 길이 없다. 바람이 불었으나 남은 바람이 없다. 남은 것이 없는 틈새로 남은 것이 없는 꽁지 짧은 길이 빈 둥지를 틀고 있다. 까치집이 보였다.
49
그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 손사래 치는 길에 그가 서 있다. 그가 거니는 길목 하나가 아득하게 오고 있었다.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는 그의 한 마디는 들리는 듯 들리지 않았다.
50
길을 가는데 애매한 길이 오다가 사라졌다. 사라진 길을 가는데 사라진 길 위에 또 다른 길이 오고 있었다. 양 갈래로 곧게 뻗은 전에 본 듯한 두 길이 어부바, 등을 내밀었다.
첫댓글 돌.아.버.리.겠.다
오른쪽으로 돌면 왼쪽으로, 왼쪽으로 돌면 오른쪽으로 비틀어주면 곧 낫습니다. (돌파리 의사 의 진단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