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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 기슭에서부터 서남으로 뻗어 인왕산 기슭을 끼고 한강변으로 이르며, 서울 4대문의 하나인 서대문 “즉,,(돈의문(敦義門)이 있었으므로 서대문이 라 하였다, 1944년 10월 서대문구에서 마포구가 나누어졌고 1979년 10월에는 은평구가 나누어졌다, 현저동의 독립공원을 조성하여 독립문(獨立門)을 옮기고 서재필(徐載弼) 박사(博士)의 동상(銅像)을 세우고 영빈관(迎賓館)의 하나인 모화관(慕華館)을 일제 때에 철거한 것을 한식목조 건물로 복원하여 독립운동 선열(先烈)의 위패(位牌) 봉안소(奉安所)로 이름을 독립관이라 하였고 형무소(刑務所)가 있던 곳을 서대문 형무소(刑務所) 역사관으로 하였다, 신촌의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그리고 서대문 네거리에 적십자 병원과 충정로 1가에 삼성재벌(三星財閥)계열의 고려병원이 있다,
@ 유래 동명 순서
(1) 1)남가좌동 2)북가좌동 3)천연동
(2) 4)냉천동 5)옥천동 6)영천동 @ 독립문 7)대신동
(3) 8)대현동 9)신촌동 10)봉원동 11)북아현동
(4) 12)연희동 @ 연희고지 13)창천동 14)충정동 15)미근동
(5) 16)합 동 17)현저동 18)홍제동 @ 홍제천 19)홍은동
① 남가좌동(南加佐洞) 북가좌동(北加佐洞) 천연동(天然洞)
☞ 남가좌동은 맑은 물에서 사는 가재가 많이 잡히는 지역이라 가재울 이란 음(音)이 변하여 가좌동이 되었다, 남북으로 나뉘어 남가좌동, 북가좌동으로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훈련도감(訓練都監)에서 실시하는 군사들의 무예(武藝)를 시험하던 곳이다, 남가좌동은 북한산의 자갈이 모래로 변한 것이 있다하여 모래내 밭, 이라는 이름도 내려오고 있다, 남가죄동은 1~2동으로 구분 되어 있다,
☞ 북가좌동 1동 사무소 주변의 연희방(延禧坊) 가좌동(加佐洞) 2계(契)라는 행정구역의 명칭에서 2계말, 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 백련사는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5년 746년에 진표 대사가 창건하여 정토사(淨土寺)라 하였는데 음이 변하여 경텃절이라 불러 그 절 아래쪽 마을을 경텃말, 이라 불렀다, 또한 선조의 제7왕자인 성군의 손자 화산군 오위도청(五衛都廳府) 도청관이 었던 행적(行蹟)을 기록한 비 신도비(神道碑)가 있어 거북골, 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성산천(城山川)을 사이에 두고 연희동과 마주하고 있는 모래시장 주변은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한강(14km)으로 흐르는 개울은 세검정의 맑은 물이 홍제원 부근에서는 모래 밑으로 스며들어 웬만큼 비 때가 아니면 물대신 모래뿐인데 서모래내라 불렀다,
오늘날 성산동 부근의 모래 하류를 가리키는 성산천은 바로 모래내의 한자인 사천(沙川)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하류 쪽에는 홍수 때 마다 상류로부터 흘러내린 모래와 자갈들이 쌓여, 지난 66년 시장으로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모래시장 일대는 온통 모래사장이었다, 때문에 이곳에서는 다른 농사가 되지 않아 뽕나무와 호박 등을 심는 게 고작이었고 60년 대 초부터는 쓰레기장 노릇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강과 어귀를 대고 있는 하류의 성상천은 1백 년 전까지만 해도 수량(水量)이 많아 새우젓 배가 마포강을 따라 지금의 사천교까지 올라와 물건을 팔고 돌아가곤 했다고 전한다,
모래나가 오늘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5, 16현명 이후 지금의 명지대와 충암고 자리에 있던 옮메기 공동묘지를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일 때에 불어 닥친 개발붐덕분이다, 인적이 드물었던 이곳에 64년 처음으로 신촌 ~ 모래시장간 시내버스가 운행됨으로써 인구와 함께 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홍제천 까지의 넓은 벌판이 있는 마을을 벌말, 이라 하고, 사천교 서쪽과 가좌역 뒤편에 박씨들이 모여 살았으므로 박촌말 이라 하였다, 현재 북가좌동은 1~2동으로 구분 되어 있다,
☞ 천연동은 1914년 지역의 구역을 새로 정할 때 구한말까지 불러워 오던 이판동 일부와 석교동 일부를 각각 합해서 이룩된 동으로 당시 옛 부터 무학재(毋岳峴)를 오가는 관원(官員)들을 맞이하고 보내는 행사장(行事場)으로 사용하던 천연정(天然亭)이 있었기 때문에는 붙여진 동명이다,
② 냉천동(冷泉洞) 옥천동(玉泉洞) 영천동(靈泉洞) 대신동(大新洞)
☞ 냉천동은 금화산(金花山)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무학산(毋岳山) 지맥(支脈)으로 약수(藥水)가 많이 나왔으며 경기대학교 북쪽에 찬우물골이 있었다, 특히 쌍우물 (냉천동 72, 69번지 사이)이 있었는데 과거(科擧) 보러가던 사람이 마시고 가면 급제(及第)한다는 속설(俗說)이 있었다 한다,
☞ 옥천동은 인왕산 밖의 안산(鞍山)에서 시작하아 지금의 영천(靈泉)시장을 지나 마포(麻浦)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가는 개울이 있었는데 이 지역에서 맑은 물이 모여 옥폭(玉瀑)가되어 옥같이 맑은 물이 흘렀다 하여 옥포정 이라 불리워진 것이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없애고 옥천동으로 바뀌었다,
☞ 영천동은 모화관(慕華館)(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 있는 동네라 하여 관동(館洞)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독립공원 뒤 산 꼭대기에서 악박골의 약수가 위장(胃腸)에 효험(效驗)이 있는 신령(神靈)스런 물이라 하여 영(靈)자를 붙여 영천동의 이름이 지어졌다, 조선조 숙종(肅宗)때 판서 이재(李縡)가 살았기 때문에 냉천동, 천연동, 옥천동 일대를 이판당골 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모화관 앞의 뜰은 무사(武士)들의 과거시험장으로 그 시험에 장원한 사람에게 향연(饗宴)을 배풀어 이곳을 장원정(壯元亭)이라 하여 그 일 때를 장원정골, 이라 불렸다, 안산(鞍山)에서 흐른 물이 적십자(赤十字) 병원(病院)으로 흐르는데 영천시장이 끝나는 의주로변에 돌다리가 있어서 지금의 교남동과 영천시장 주변을 돌다리골 이라 불렸다, 모화관은 일제에 의하여 철거 되었다가 1992년 8월 15일에 복원(復元)되어 현저동 101번지 독립공원으로 옮기면서 명칭(名稱)을 독립관이라 하였다,
※ 독립문(獨立門)=종로구 교복동 대로(大路) 한복판에 서 있는 독립문은 고종 건양 원년 1896년 11월에 독립협회의 서재필(徐載弼)등이 주동이 되어 건립한 것이다, 파리의 개선문을 본 따서 설계된 독립문은 청국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의 상징이었던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버리고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그 자리에다가 세운 것이다,
설계(設計)는 러시아인 시바진이 담당하였다, 영은문의 주초(柱礎)는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어 지금도 독립문 앞에 놓여 있었는데 성산대로 건설로 서북(西北)쪽 약 70m로 1980년 1월 1일 서대문구 현저동 941번지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독립문지(獨立門址)라고 새겨진 표지판을 매설(埋設) 그 위치가 길이 보존 되도록 하였다,
☞ 대신동은 경기도 고양군 대현리(大峴里)와 신촌리(新村里)의 일부로서 대신동은 금화터널을 지나면서 성산로 좌우 및 금화터널 남쪽에 위치한 동으로 1962년 12월에 신설(新設)될 때 대현동의 大자와 신촌동의 新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 지역은 금란 여자중 고등학교 이대부속초등 중, 고등학교등이 있는 교육지이며 학교 건너편은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다,
③ 대현동(大峴洞) 신촌동(新村洞) 봉원동(奉元洞) 북아현동(北阿峴洞)
☞ 대현동은 조선시대에는 대현동과 미근동지역 이였는데 그중 대현(大峴) (아이고개, 또는 애오개)에 비하여 큰 고개의 뜻으로 아현동(阿峴洞)과 신촌사이의 고개를 일컫는데서 유래 되었다, 미근동은 고개 북서쪽 럭키 아파트 주변에 위치하여 망건, 당줄, 감투 등을 만드는 집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의 말로 망건당골이라 하다가 미근동으로 변했으나 이제는 대현동 지역에 포함되었다, 대현동에 자리 잡은 이화여자대학교(梨花女子大學校)는 1886년 단 한명의 학생을 받아들여 개교하였던 것이며 1887년 고종황제로 부터 이화라는 칭호를 하사 받았다고 한다,
※ 국철 신촌역은 (대현동 74-12번지) 1920년 12월에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기차역으로 서울역보다 5년 먼저 지어진 건물입니다, 구 신촌역사의 철거 논란이 있었으며 2004말 문화재로 등록되어 철거위기는 넘겼으며, 2004년 10월 시민들이 교외선의 추억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서울역~신촌~능곡~송추~의정부~청량리~용산~서울역등을 거치는 서울야경 순환열차코스를 개발하여 주 1 - 2회 운행하고 있다
☞ 신촌동은 조선 초기에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터를 물색할 때에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밝은 경기좌우관찰사(지금의 도지사)인 하륜(河崙)의 주장과 여러 신하들의 여론에 따라 신촌동 일 때를 돌아보고 갔으나 좁아 도읍지(都邑地)로 정하지 못하고, 그 때부터 새 도읍의 터라하여 새터말 이라 한 것이 한자로 신촌(新村)이라 하였다 이곳 연세대학교 자리는 조선조 정조(正祖)가 퇴위(退位)후에 기거하던 연희궁(衍禧宮)(정종(定宗)이 퇴위 뒤 살던 집)이 있었다고도 하고 연희동에 있다고도 한다,
신촌 독수리로 상진 되는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신촌동 134번지)는 안암골 호랑이라고 상진 되는 고려대학교와 더불어 사학(私學)의 명문이며, 특히 연고전이나, 고연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914년 미국 기독교 관리 아래 언더우두가 YMCA 안에 대학부를 설치한 것이 시초이며 1918년 4월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연희전문(延禧專門)이라 칭하였고 1957년 세브란스 의대를 합병하여 연세대학교라 개칭하였다,
☞ 봉원동은 안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하여 봉원동 23번지 불교(佛敎) 태고종(太古宗)의 본사(本寺)인 봉원사(奉元寺)의 이름에서 유래되었고 이 절을 새절이라 하여 그 아래 마을을 새절, 아래골, 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 안산 정상의 동쪽 봉우리에는 무악(毋岳) 동봉수대(東烽守臺)가 1994년 8월에 복원하여 서울시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근교의 옛 지명으로 이화여자대학교(梨花女子大學校) 정문 동쪽 큰 고개를 넘어서 이루어진 마을은 망건(網巾), 당줄, 갓 등을 만드는 자들이 있어서 망건동골, 이라 하였다,
연세대학교에서 봉원사로 넘어가는 고개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어머니 영빈이씨(迎賓李氏)의 무덤인 수경원(授慶園)이 있었는데 사람이 다니면 낮아지므로 다니는 것을 금지하려고 벌고개(“즉,,벌현(罰峴)라 하였다, 수경원은 1966년에 서오능(西五陵)으로 옮겼다, 안산(鞍山) 무악 서남쪽 기슭 신사동에는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3년 889년에 도선선사(道詵禪師)가 창건(創建) 하였다는 봉원사(奉元寺)가 있다,
☞ 북아현동은 아현동과 역사를 같이 하는 동네로 대현(大峴)이라는 큰 고개와 만리동 고개 사이의 작은 고개를 아이고개, 아현(兒峴)이라 하였는데 아(兒)자가 아(阿)로 변하여 동명으로 바뀐 것이다, 아이고개의 뜻은 아이 시체(屍體)가 넘는 고개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다른 해석을 하는 이야기도 있다, “즉,, 신촌 로타리에서 큰 고개를 넘으면 또 고개가 나오는데 돌이 많아 힘이 들어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넘어 아이고개라 하던 것이 애오개 가 되었다고 한다,
안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이 이곳을 흐르는데 여기에 가교(架橋)가 놓여 있어 그 다리를 늑교(勒橋)란 뜻으로 굴레방다리 라고 하였다, 북아현동은 아현동의 북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현재 북아현동은 1~3동으로 구분 되어 있다,
중앙여자고등학교 자리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를 위(謂)정이 두 살 때 죽어서 묻은 의령원(懿寧園) “즉,, 애기능이 있어서 그 안쪽 마을이라 하여 능안(陵安) 이라고 하였다, 의령원은 1949년 4월에 서삼능으로 옮겨졌다,
북아현 3동 북쪽의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을 복주산골(*복주산(福主山) 또는 복주골 이라 불렀고 백상빌딩 뒤편에는 넓은 바위가 있어서 넓은 바위골 이라 하였다, 그 옆에 우물이 있어 대현고개를 넘는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이 우물물이 피부병에 좋다하여 두께우물, 또는 명수(命水)우물 이라 하여 이 주변을 명수우물골, 이라 하였다 북아현 3동에서 경기대학교로 넘어가는 고개를 금화장(金花場)고개 라 하였는데 호랑이가 나올 만큼 울창하였다 한다,
④ 연희동(延禧洞) 창천동(滄川洞) 충정로(忠正路) 미근동(渼芹洞)
☞ 연희동은 조선초 양주땅 이었던 이곳은 태조가 신도읍지를 찾고 있을 때 무악재 아래에 위치한 북쪽에 나지막한 상봉우리가 있고 동쪽으로 산맥이 뻗어있는 명당(明堂)터라 하여 하륜(河崙)등이 도읍지로적극 천거 했을 만큼 좋은 지역이며 연희동이란 동명은 현재 연세대학교가 있는 자리로 추정되는 연희궁의 이름에서 연유된 것이라 한다, 연희궁은 조선 2대 임금인 정종에 아우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기거하던 궁을 세종이 상왕을 위해 새운 궁궐이다,
연희궁의 위치는 연세대학교 자리가 되지만 일선에서는 우정스포츠센터 뒤쪽 연희입체교차로 부근이라 전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정자동 염동 궁동 음월리라 부르던 지역으로 일제 때 경기도에 속하다가 다시 경성부에 속하여 연희정이 되었다,
연희1동 지역에 숙종의 빈 장희빈(張禧嬪)의 친정집 연희동 105~8이 있는 아래에 연희정 이라는 정자(亭子)가 있어 이 마을을 궁굴 또는 장자말, 이라 하였다, 연희 시민아파트 앞 고개를 대궐재 고개, 라 하였는데 당시 매우 험하였다, 한다, 연희 3동 자리(우정 스포츠 뒤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큰말, 연희 2동 사무소 주변의 마을을 윗말 이라 하였고 연희 A지구 아파트 근처에 청치마 입은 여인의 세도(勢道)를 부려서 청치마골, 이라 하였다, 성산회관 뒤쪽 밤나무 있는 고개를 밤 고개라 불렸고 연희 2동 대림 아파트 고개를 너무 험하고 넘는데 오래 걸린다하여 한 달 고개, 라 하였다, 현재 연희동은 1~3동으로 구분 되었다가 시 조례의 의해 2007년 다시 1, 2동으로 되었다,
※ 연희고지(延禧高地) 연희동은 서쪽에 있는 높이 88m, 86m, 104m의 능선 일명 104고지라고도 부른다, 휴전선 부근의 전방에나 있을 법한 산 이름인데 서울 복판에서 지어진 까닭은 한국전쟁 때(9,28 수복당시)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이곳에 주둔한 인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 창천동은 안산 서남쪽에서 흐르는 개울이 봉원사쪽에서 흐르는 봉원천과 합류하여 서강(西江)으로 흘러가는 창천(滄川)의 개울 이름을 따서 동명이 되었다, 신촌이라는 이름으로 대학문화와 지역문화가 어우려지는 곳이기도 하다, 신촌로타리 지역에서 강화(江華), 인천(仁川), 마포(麻浦)로 가는 사람들이 쉬어 가는 곳으로 주막(酒幕)거리, 라 하기도 하였다, 창천동 사무소가 있는 산은 서북쪽이 트여 바람이 분다하여 바람 산 이라고 하고 노고산동(老姑山洞)에서 창천동으로 넘어오는 고개 주변에 갓을 만드는 집들이 많아 갓방고개, 라 하였다,
☞ 충정로는 옛날의 권정승계(權政丞契) 조판부사계, 노첨정계(계는 옛날 행정구역의 명칭)등의 이름으로 보아 고관들이 많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한다, 형제우물골은 잔톨박이 고개 바로 아래쪽 충정로3가 300번지에 형제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인창중 고등학교가 위치한 곳에 팔각정골이 있었는데 이곳에 마을이 현성되면서 부르던 이름이다 일제 때 죽첨(竹添)이라는 일본사람의 이름을 따서 죽첨정이라 하던 것을 1946년에 민영환(閔泳煥)의 시호(諡號)를 따서 충정로 법정동 1~3가가 되었다,
☞ 미근동은 일제의 강점 이후 서울의 동 구획을 개편할 때 글자가 바뀌어서 오늘까지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일제 이전에는 한성부 서부 반송방 노첨정계의 미동(尾洞)과 수근답계 근동(芹洞)에 속한 곳 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1914년 4월 1일 서울의 186개 동을 대대적으로 개편할 때 미동과 근동에서 한 글 짜 씩 취하여 동명을 만들면서 미(尾)를 미(渼)로 바꾸어 미근동(渼芹洞)이라 생소한 이름이 생겨났다,
미근동의 당초 어원이 된 이름이 일대가 미나리 밭이었으므로 근동(芹洞)이라 불렸는데, 이곳의 미나리 밭은 매우 넓어서 지금 충정로 부근에서 합동, 의주로 부근까지 근동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또 미동이란 이름은 이곳에 인가가 많았으므로 소의문 밖에 시장이 형성되어 시전골목이 생겼는데 이 근처는 그 시전의 끝머리(꼬리) 부분에 해당 되므로 미동(尾洞)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현 경찰청건물 북쪽 미근동 31번지 부근에 큰 우물이 있었는데 가뭄이 와도 마르지 않아 꼬리가 있는 것 같다하여 초리우물, 또는 미정(尾井)이라 하였는데 미(尾)자가 미(渼)자로 바꾸어진 것이다,
⑤ 합동(蛤洞) 현저동(峴底洞) 홍제동(弘濟洞) 홍은동(弘恩洞)
☞ 합동은 마포강으로 부터 어물(魚物)이 집결되는데 특히 건어(乾魚)와 조개가 항상 공급되므로 조갯골을 한자로 표시하여 합동(蛤洞)이 되었다, 옛 지명으로 충정로3가와 중림동(中林洞)에 걸쳐있는 마을로 형제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형제 우물골이 였고, 애오개 아래쪽 동아일보 근처에 놋그릇 공장이 있어서 유기전골, 또는 바리전이라 하였다, 또 충정로 전철역 자리에 조그만 한 돌이 많이 있다하여 잔돌박이 고개 라 하고 의좋은 맹인(盲人) 부부가 살았는데 정답게 다니는 모습이 남원(南原)에 춘향(春香)이와 같다하여 춘향이 고개라 하였다,
☞ 현저동은 조선 말기에는 서부 반송방(盤松坊) 지하계의 모화동이라고 하였는데 일제가 1914년 4월 1일 동명을 바꿀 때 무악재고개 밑의 마을 이란 뜻으로 현저동(峴底洞)이란 이름이 생긴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사신의 머물었던 마을로 모화현(慕華峴)으로 부를 때도 있었다, 무악재를 모래 바람이 부는 고개라 하여 사현(沙峴)이라고 하고 조선조 영조가 부왕 숙종의 능이 있는 명능(明陵)을 이 고개에서 바라보고 추모하였다하여 추모현(追慕峴)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해방 후 동명을 정비할 때 이곳은 일제 때 이름 그대로 된 것이다
현저동 홍제동 봉원동 일대에서 걸쳐있는 고개를 무악재라 부른다, 독립문에서 바라보면 왼쪽 봉우리가 말의 안장 “즉,, 길마와 같다하여 안현(鞍峴) 또는 길마재라 하기도 한다, 이것은 산의 모양이 길마와 같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 산을 한자로는 안산(鞍山)이라고 쓴다, 안산 꼭대기에 사방에 횃불로 변방의 사정을 알리는 봉수대가 있어 봉화재, 라 하였고 무악재 마루는 험하여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이 고개를 넘으려면 사람들이 모여서 넘는다 하여 모아재, 라 불렀다, 무악재는 (無學峴 또는 無鶴峴)등의 이름으로 불렸는데 조선조 태조의 한양 천도 때 하륜(河崙)과 관련된 유서 깊은 곳이다,
※ 서대문 형무소자리 1988년부터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 독림공원을 조성하고 1992년 8월 15일 제47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공원을 개원하였다, 또한 이곳은 과거 일제 강점기에 서대문 형무소가 있던 자리이다, 해방 후에는 우리 정부가 교도소(矯導所)나 구치소(拘置所)로 사용하였다, 1987년 정부는 이곳에 있던 서울 구치소를 경기도 의왕시로 옮기고 과거 서대문 형무소자리를 사적으로 지정하여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하였다,
동남쪽으로 약 350m 지점에 있던 영빈관(迎賓館)의 하나인 모화관(慕華館) 건물을 일제 때에 철거되었던 것을 독립공원 내에 한식목조 건물로 복원하여 독립운동 선열의 신위를 봉안할 독립관(獨立館)으로 하였다, 또한 독립문은 종로구 교복동, 동남쪽 70m에 있던 것을 성산대로 건설로 1980년 1월 1일 이곳 현저동 941번지로 본래의 석재(石材)를 사용 옛 모양 그대로 하고 영은문의 주초(柱礎)는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어 독립문 앞에 놓여 있다,
☞ 홍제동은 조선조에 중국사신이 드나드는 중요한 육로(陸路)에 위치하여 사신(使臣)과 여행객(旅行客)들이 머물던 홍제동 304번지에 홍제원(弘濟院)이 있어서 이름이 유래된 곳이다, 홍제원은 숙소(宿所)로 쓰이고 약(藥)을 제공하는 곳이다, 널리 베푼다는 뜻으로 처음에는 홍(洪)자를 쓰다가 홍(弘)으로 바뀐 것이다, 또한 홍제천이 있어 사천이라 하였고, 홍제4동 일대에 청련사 절로 들어서는 길목이라 하여 절골, 이라 하였고, 서대문 세무서 동쪽을 안말 절골 과 안말, 사이를 간디골, 이라 불렀다, 홍제동은 1~4동으로 구분 되어 있다가 시 조례의 의하여 2007년 1개동이 폐쇄되었다,
홍제동 296번지 밭에 신라 말기의 유물(遺物)인 오층석탑(五層石塔)이 있었는데 지금은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이 부근에는 일 찍기 사현사(沙峴寺)라는 큰 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문화촌 아파트 뒤쪽은 논밭골 삼화교통 종점(終點)이 있는 곳은 춘영골 거기서 세금정 쪽으로 외상골, 홍제1동 사무소 뒤쪽을 거능골 홍제1동 현대 아파트밑의 마을을 말터골 이라 불렸다,
※ 홍제천(弘濟川) 종로구 평창동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흐르는 한강의 제1지류로서 길이 14km의 하천 모래내, 사천(沙川)이라고도 하며 세검정 맑은 냇물이 홍제원 부근에서는 늘 모래 밑으로 스며들어 버리므로 모래내라 불렀다, 홍제천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전쟁이 끝나자 많은 여인들이 청(淸)나라로 끌려갔다, 그중 심양으로 끌려갔던 조정 사대부집 여자들이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미 오랑캐에 더럽혀진 부인들을 다시 맞아들여야 하는 조정의 고민도 대단히 컸을 것이다, 이에 인조가 영을 내려 “홍제원의 냇물(지금의 모래내인 듯)에 목욕을 하고 서울로 들어오며 그 죄를 묻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그런 후에 ”그녀들의 정조 문제를 거론하는 자가 있으면 엄단하겠노라,, 고 하였다,
☞ 홍은동은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은평면(恩平面) 홍제외리(弘濟外里)지역이란 뜻에서 홍은동의 이름이 지어졌다, 옛 지명으로 홍은2동 사무소 아래 S자로 굽어진 곳에 홍수(洪水)가 나면 넘치는 곳을 수마동굴 이라 하고 무악재에서 백련사로 향하는 마을을 백련사골, 스위스 그랜드 호델 옆 홍은동 현대 아파트 자리는 빨래터까지 치마를 널어놓은 형상에 비유하여 치마바위골, 이라 하였다, 이 바위를 깍아 돌을 쓰게 되어 돌산, 또는 돈산, 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보다 서쪽에 천수답(天水畓)이 있어 논골, 이라 하고, 홍은사거리에서 녹번동(碌磻洞)으로 가는 고개에서 자연동(自然銅)과 산골(*접골약에 씀)이 났으므로 녹번 고개라 부른다, 현재 홍은동은 1~3동으로 구분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