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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한국 불교사佛敎史
1. 한국 선종사禪宗史
11) 개항기開港期 일본 불교佛敎의 침투浸透
개항기開港期 일본 불교의 한국 침투는, 운양호雲揚號 사건事件에 이어 강제로 이루어진 1876년(고종 13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이를 두고 한 연구자는 강화도조약과 1877년 정토진종淨土眞宗의 포교사布敎師 파견, 이어서 이루어진 1895년 도성출입금지의 해금과 1910년 한일강제병합韓日强制倂合까지를 침략 모색기(1877~1895)로 보고, 다음 일본 불교의 교세敎勢 확장기(1895~1906)와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 아래 두려는 병합倂合 획책기(1906~1910) 등 3단계로 구분하였다.
제1기는 침략 모색기(1877-1895)로써 일본의 佛敎 宗派들이 한국에 포교사들을 파견하여 寺刹과 別院 및 布敎所를 설치하고 한국의 언어와 정서를 습득하는 시기이며, 제2기는 교세 확장기(1895-1906)로써 일본 日蓮宗의 승려 佐野前勵의 入城解禁 건의을 통하여 입성해금이 이루어지자 그것을 마치 한국 불교계에 큰 은혜를 베푼 듯 선전하고, 불교계의 저명인사들을 일본 시찰단으로 파견하는 등 불교계에 친일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전국적으로 교세를 확장해 가는 시기이다. 제3기는 병합획책기로써 1906년 11월 통감부로부터 ‘宗敎의 宣布에 관한 規則’이 발표되고, 정치권과 결탁한 일본 승려 武田範之의 使嗾를 받은 한국 불교 圓宗의 宗正인 李晦光이 일본 불교 曹洞宗과의 합병이 기도되는 시기이다. (金淳碩,「개항기 일본 佛敎 宗派들의 한국 침투 - 일본 寺刹과 別院 및 布敎所 설치를 中心으로-」.)
일본 불교의 조선 침략은 일본이 일으킨 운양호雲揚號 사건事件을 계기로 표면화 되었다. 운양호 사건은 1875년 일본 해군의 군선軍船 운요[雲揚]호가 해안 탐사를 핑계로 접근, 강화도와 영종도 등지의 민가를 불태우고, 민간인 학살과 약탈을 저지른 사건이다. 일본의 이런 과격한 행동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도움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인 1876년 강화도에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문호門戶를 개방開放해야만 했다.
조약 다음 해인 1877년, 일본의 내무경內務卿과 외무경外務卿은 일본불교의 최대 종파인 정토진종淨土眞宗 대곡파大谷派의 본원사本願寺 관장管長(불교佛敎나 신도神道 등에서 한 종파를 관리하는 우두머리, 종정宗正)에게 서신을 보내 조선 포교를 종용한다. 이에 화답하여 진종 대곡파와 일련종日蓮宗이 포교를 시작하였고, 이어 일본 내 주요 불교 종파들이 정부 정책에 호응 경쟁적으로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대곡파의 뒤를 이어 일련종이 1881년 부산에 묘각사를 세워 포교를 시작했고, 1898년에는 정토종이 활동을 시작했다. 이리해 일본의 유력한 3대 종파가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1904년 당시 일본불교에는 모두 12종단 49파가 있었는데, 1911년 한일합방 이듬해까지 한국에 포교사를 파견한 종단은 6개 종단 11개 종파였으며, 167개의 일본 사찰과 포교소가 설립되어 있었다. 1909년에 조선 통감부가 파악한 일본 사찰의 포교사 수는 102명, 신도수는 일본인이 29,900여 명이고 조선인이 13,000여 명으로 집계되었다. 당시까지 일본불교는 조선에 온 일본인을 교화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고,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포교는 부수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 232.
이후 정토종淨土宗, 조동종曹洞宗, 임제종臨濟宗, 진언종眞言宗 등이 가세하였고, 1895년 4월 일본 승려에 의해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자 조선 내內 일본불교에 대한 외경심은 더욱 더 높아진다. 자연스레 다양한 종파들이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활동을 시작, 1910년에 이르면 각 종파의 포교소와 출장소가 68개소로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일본불교 각 종파를 교학적으로 분류하면 밀교 계열 10교파, 정토 계열 7교파, 선종 계열 4교파, 법화 계열 4교파, 그리고 화엄 계열 1교파였다. 한일합방 이전까지 그들이 세운 사찰은 121개 정도였고 그 이후에 890여 개가 설립되었다. 가장 많은 사찰을 세운 곳은 정토 계열로 339개, 밀교 계열 216개, 선종 계열 213개, 법화 계열 114개, 그리고 화엄 계열 8개 순이다. 가장 활발하게 진출한 상위 5종파는 조동종 179개, 진종 본원사파 164개, 진종 대곡파 96개, 일련종 61개, 그리고 진언종 제호파 58개이다. 일본불교 각 종파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이념이 정립되도록 활동하였다. 그들의 의례가 도입되면서 한국불교 의례는 상당히 훼손되게 되었다. (김경집 /Kyung-Jib, Kim, 한국전통문화대학교,「일제강점기 한국에 진출한 일본불교의 종파별 교세현황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social status of the Japanese Buddhism sects that entered Ko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보조사상 제65집(2023.03), p. 193-221, 보조사상연구원.)
일본은 본격적인 조선 침략에 앞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이는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를 개척할 때 기독교 선교사를 먼저 파견했던 예를 따른 것이다. 종교를 앞세워 민중에게 호응을 얻은 다음 정치적 협상을 시작하는 것이 당시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통용通用되던 수법手法이었다. 이미 한일 양국에서 오랫동안 신앙하던 불교는 조선 민중들에게 유교나 기독교보다는 가깝고 익숙한 종교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일본은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써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를 개척할 때 정치적인 협상 이전에 외교적 보호 또는 협력이라는 미명하에 선교사를 먼저 파견했던 예를 본받아서 종교침략을 감행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종교야말로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필칭 종교의 본질인 희생정신이나 봉사, 계발 또는 각성 등의 구호를 앞세우고 민중에게 일단 호응을 얻은 다음 정치적 흥정을 시작하는 것이 식민지 개척에 있어서 기본적인 통례였던 것이다.
일본은 그 대상 종교로서 불교를 선택하였다. 그 이유로는 神道나 신흥종교가 그 일을 수행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교들은 한국인의 정서에는 생경한 것이었기 때문에 노력에 비해서 그 성과가 보잘 것 없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 하였기 때문이다. (金淳碩,「개항기 일본 佛敎 宗派들의 한국 침투 - 일본 寺刹과 別院 및 布敎所 설치를 中心으로-」.)
조선불교계의 고난은 1905년 맺어진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본격화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과 강제적으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를 규탄하는 대규모 항일의병운동抗日義兵運動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는데, 일제는 의병義兵들이 다녀간 사찰이나 혹은 근거지가 될 만한 사찰들을 무자비하게 부수고 불을 질렀을 뿐만 아니라, 의병운동에 조금이라도 연루連累된 스님들을 가차假借없이 죽였다.
을사조약 이후 2년간 한국 사찰은 무차별적으로 파괴되었고, 스님들은 사찰에서 쫓겨났다. 불길처럼 일어난 의병운동으로 인해 엉뚱하게도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사찰들이 초토화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이은 일본의 만행蠻行을 또 다시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힘을 결집할 만한 교단조차 없었던, 발등에 불이 떨어진 불교계는 가공할만한 일본군의 무차별 만행을 피하기 위한 자구책을 사찰 스스로 마련해야만 했다.
1905년 을사조약을 규탄하며 불길처럼 일어난 의병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는 초토화 작전을 폈다. 의병이 거쳐 갔거나 근거지가 될 만한 곳을 모조리 불살라 대항을 무력화하는 전략이었다. 이에 따라 의병의 주근거지였던 심산유곡의 산사들은 일본군의 무차별 방화로 임진왜란에 이어 또다시 가공할 훼불만행을 겪어야 했다.
천 수백 년의 전통과 역사를 간직해온 조선의 사찰들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힘을 결집할 만한 교단이 없는 상황에서, 스님들은 자신의 생명처럼 간직해온 천년고찰을 보호하려고 온갖 궁리를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의병에 협력이나 동참은커녕 거쳐만 가도 일제에 의해 사찰이 잿더미가 되는 엄혹한 현실에 출가 구도자가 사찰을 지킬 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 236.)
불교계 일각에서는 사찰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불교와 제휴하거나 일본의 종파에 귀속됨으로써 보호를 받고자 하였다. 일본불교계도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조선 사찰들이 스스로 말사로 등록해오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통감부도 ‘종교규칙’을 제정, 일본인이 조선 사찰에 대한 관리를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었다. 오랜 전통과 역사의 조선 사찰들이었지만, 일본군의 만행을 모면하려는 의도로 일본불교 종파에 등록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1905년 이후 일제가 의병운동을 탄압하면서 사찰을 방화하거나 폐쇄하자 조선불교계는 보호의 방편으로 일본불교계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심산유곡의 일부 사찰은 일본불교 종단에 가입해 일본군의 만행을 피하려 했다. 사실 이것은 일제와 일본불교계도 은근히 노리던 바였다. 전국 각지의 천여 개에 달하는 조선 사찰을 일본불교 종파의 관리 아래 둘 수 있다면 교세를 확장하는 데 더없이 좋은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 228.)
한편 그 외에도 조선불교계가 일본 불교에 대해 열등감劣等感 내지는 경외심敬畏心을 갖고 기꺼이 일본불교 종파의 관리를 청원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조선에서는 불교가 수백 년 간 억압받아 승려가 비천한 신분으로 전락한 데 비해, 일본에서는 불교계가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선망하고 자연스럽게 일본불교에 호감을 갖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조국에서 멸시받을 바에야 일본불교 종파일망정 거기 소속되어 대우받고 사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할 법도 하다. 더구나 일본불교나 조선불교 모두 석가모니의 제자라는 동질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 237.)
일제강점기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 교수를 지낸 에타 도시오(江田俊雄, 전 동국대 교수)는 그의 저서『 조선불교사의 연구 』 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불교에 조선포교의 효과를 현저하게 하기 위해서 조선의 사찰과 승려를 이용하고자 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와 함께 조선불교측도 천시 받는 현재의 처지를 벗어나 관민官民으로부터의 착취와 약탈을 면하고자 일본불교의 보호를 얻으려 했다. 정치적인 보호, 병합의 기운과 병행해서 일본 불교에서도 보호, 병합의 기운이 크게 움직였던 것이다.(강석주 · 박경훈 공저, 『불교근세백년』 민족사, p. 38.)”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하였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일신의 영달을 위한 친일이 자행되었다. 이 같은 현상은 당시 불교계 일각에 민족의식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그들을 책망할 수 있을까?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전국의 사찰 관리를 위해 궁내부 소속의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를 원흥사元興寺에 설치했었다. 원흥사는 전국의 수사찰首寺刹인 대법산大法山으로 지정되었으며 대한제국 황실의 원당願堂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승려들은 불교 통할기관인 원흥사가 존속되기를 바랐지만 원흥사는 별다른 성과 없이 2년 만인 1904년 폐지된다. (동대문 밖 현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건립된 원흥사는 1910년 서울 도성 내에 각황사가 설립될 때까지 대표 사찰 역할을 맡게 된다.)
다행히 1906년 2월 이곳에 화계사華溪寺 스님 홍월초(洪月初, 1858∼1934)와 봉원사奉元寺 스님 이보담(李寶潭, 1859~ ?) 등이 중심이 되어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가 설립된다. 초대 회장은 홍월초가 맡았다. 그러나 이때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후라 일제 통감부의 간섭을 받던 시기로, 일본 정토종淨土宗의 지원과 권유, 개교사開敎使 이노우에 겐진[井上玄眞]의 도움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선 불교계는 이노우에의 영향을 받는, 그리하여 일본색 짙은 불교연구회에 그 관리가 넘어가게 된다.
일본 정토종이 조선에서 새로운 불교를 포교하고자 하였던 것은 조선에는 이미 불교계에 교단이라는 것이 소멸하였기에 교단의 문제를 회복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포교활동으로 인하여 조선불교가 백성들 가운데 새롭게 접하게 되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조선불교인들이 깨어나기 시작했으며, 고종의 통치에 새로운 사상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은 더 이상 불교를 탄압할 수 없으며 도성 출입이 해금된 이상 조선 불교계를 정치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시대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진관 지음,『佛敎淨化 先驅者! 청담대종사의 실천불교사상연구』초롱, 2013, p. 13.)
한편 또 다른 목적이 있었으니 1906년 무렵은 근대식 학교를 짓는다는 명목으로 사찰을 강탈하려는 시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더구나 사찰에 속한 토지와 밭을 학교에 부속시켜 달라고 학부學部(교육 행정을 맡았던 기구)에 청원하였다. 사찰은 물론 사찰에 속한 재산까지 빼앗으려고 한 것이었다.
이때 동대문 밖 원흥사도 같은 운명에 처한다. 사사관리서가 폐지되면서 폐사廢寺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때 홍월초와 이보담 등이 나서 불교연구회를 조직하고 명진학교明進學校(현 동국대학교)를 세우므로 해서 폐사를 막게 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일본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이를 계기로 전국 사찰이 겪고 있던 재산 유실을 막을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한국불교 근대화에 활용하게 된다.
불교연구회는 서울에 세운 명진학교의 분교와 같은 형태로 지방 주요 사찰에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의 설립을 추진했다. 1906년에 해인사가 명립학교를 세웠고, 통도사가 명신학교, 범어사가 명정학교, 대흥사가 대흥학교 등 8개 사찰이 학교를 개교했다. 1907년에는 전주 위봉사가 봉익학교, 경북 대승사 · 김용사 · 남장사 등 6개 사찰이 협력해 경흥학교를 세워 나갔다. 이리하여 사찰 재산을 지키면서도 승려 교육을 위해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는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불교연구회는 1906년 관이 전국 각지에 공사립학교를 세우면서 부족한 재원을 인근 사찰의 재산을 강탈해 충당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고 그 재산을 승려 교육을 위한 학교 설립으로 유도해 상당한 성과를 낳았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 241.)
이들은 정부가 공사립학교를 세우면서 부족한 재원을 사찰에서 충당하려던 시도를 막고, 선진적인 불교 교육기관을 설립 수행자들에게 신학문을 교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적 교육과 출판 등을 통해 불교의 위상을 되찾고 조선불교의 사상적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지만, 일본 승려의 지시를 받게 되는 등 어쩔 수 없이 그들의 감독 하에 놓이게 되었다.
개화기 불교 교학에 기초를 마련한 측면이 있었지만 조선 불교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더구나 종지宗旨를 정토종淨土宗으로 선포하고 조선 불교를 일본 정토종에 합병시킬 계획을 세우는 등 문제가 드러나자 이러한 노력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승려들의 반발이 빗발치자 이들은 불교연구회 회장직과 명진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종단의 재건이 불투명한 때에 홍월초스님 중심의 불교연구회는 일본불교계의 영향을 받으면서 근대적인 인재 양성을 위해 처음으로 학교를 세웠는데, 학교는 종단과 함께 만고풍상을 겪으면서도 많은 인재를 양성하며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덕을 높이 기릴 일이다. 그야말로 백년대계를 세운 것이다. 비록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홍월초 · 이보담스님 등 불교연구회는 한국불교 근대사를 개척하는 매우 귀중한 불사를 했던 것이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 221.)
이들이 여론에 밀려 사퇴하자 다음 불교연구회 회장 및 명진학교 교장에 취임한 이가 이회광(李晦光, 1862~1933)이다. 1907년 6월 25일, 전국 사찰 대표자 50여 명이 모여 총회를 열고, 당시 제방에서 신망이 높았던 이회광을 회장과 교장으로 선출한 것이다. 이회광은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19세에 설악산 신흥사神興寺로 출가 구족계를 받고 전국을 돌며 수행하였으며, 당시는 고성 건봉사乾鳳寺 주지였던 보운긍엽寶雲亘葉의 법을 잇고 그곳에서 강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이회광의 법명은 사선(師璿) 또는 유선(有璿)이고, 회광(晦光)은 그의 법호였다. 강원도 양양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집안의 자세한 내력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회광이 출가한 이후 33세(1894) 때까지의 행적은 조선 말의 스님 범해각안(梵海覺岸, 1820~1896)이 편찬한 《동사열전(東師列傳)》의 〈회광강백전(晦光講伯傳)〉에 간략히 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회광은 설악산 신흥사 설허(雪墟) 문하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후 전국 각처를 돌며 내전(內典)과 외전(外典)을 두루 섭렵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보운긍엽(寶雲亘葉) 선사의 조실에 들어가 법맥을 이으며 환성지환(喚醒志安)의 9세 법손이 되고 휴정(休靜) 선사의 13세 법손이 되었다. 이회광이 환성의 법맥을 이어 홀로 강당을 열었을 때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몰려온 학승(學僧)들 때문에 그는 1년 내내 한가한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그는 전국의 여러 명산과 대찰에 주석하면서 안거도 게을리 하지 않은 청정한 수행승이기도 했다.
이렇듯 학식과 수행에 탁월했던 이회광을 두고 범해 스님은 《동사열전》에서 “전국의 학인들은 풀덤불을 헤치며 스님의 가풍을 우러러 몰려들었고, 봄에 사향노루가 산속을 지나가면 풀이 절로 향기로워지듯 인품의 향기가 남았다”고 평했다. 이회광은 33세 때(1894) 강원도 건봉사에 주석한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그때까지는 조선의 대강백으로서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다. 지방의 대사찰에서 학승을 교육하던 이회광이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은 것은 20세기 초 불교연구회 회장과 명진학교의 교장직을 맡으면서였다. (윤기엽尹紀燁 /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이회광」)
조선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하게 된 이회광이 취임하고 1년 뒤인 1908년 3월 6일, 이회광을 비롯한 각도 사찰 대표 52인이 모여 원종圓宗을 설립한다. 뚜렷한 종지宗旨도 종명宗名도 남아있지 않았던 불교계는 종단의 재건을 열열이 염원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스님들의 원력이 결집된 결과가 바로 원종이다. 일본 정토종淨土宗의 영향에서 벗어나, 조선의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그리고 조선불교의 전통을 잇는 종단을 거사적擧寺的으로 일으켜 세운 것이다.
앞서 불교연구회가 명진학교를 비롯해 전국 사찰에 학교를 세우며 교육을 통해 종단 재건의 초석을 놓았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정토종의 지원을 받아 ‘정토’를 이념으로 삼고 있었고, 이름도 불교연구회로 종단이라 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원종은 ‘조선불교가 선 또 는 교의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참선 · 간경 · 염불 · 주력까지 두루 닦는다’는 통불교의 원융무애한 전통을 계승한다는 취지로 종단 명칭을 정하고 전국 사찰을 총괄하는 종무국(宗務局)을 설치했다. 원종은 명확한 종지를 천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불교의 원융적 전통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 최초의 종단이었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 246.)
12) 원종圓宗의 창종創宗과 임제종운동臨濟宗運動
고려 때까지 다양했던 불교 종단은, 조선 초 태종에 의해 11종宗에서 7종으로 통합되었고, 다시 선교 양종으로 합쳐졌다가 오랜 억불정책으로 인해 해체되어 사라지고 만다. 그러던 것이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내정 장악을 위해 통감부가 설치되고 나서야 조선불교는 기지개를 펴고 원종圓宗이라는 교단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300여 년 만에 다시 태어난 원종은 애초에 조선 승려들의 완전한 자각에 의한 자주적인 종단은 아니었다. 더구나 1910년 일본 조동종이 맺은 ‘연합 맹약’ 등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이용된 측면도 있었다.
뜻있는 스님들이 결집해 창종한 원종은 그러나 기반이 허약했다. 워낙 오랫동안 종단 없이 깊은 산사에서 개별적으로 살아왔던 스님들이라 종단에 대한 소속감이나 통일된 규범의식을 갖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원종은 조선불교의 원융무애한 통불교의 전통을 잇는다고 원종이라 이름 짓긴 했지만, 조선 불제자들을 묶어세울 뚜렷한 종지를 제시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조선불교계를 묶어세울 핵심 교의를 정립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당시 적지 않은 사찰들이 일본 종파에 가입해 일본불교 말사의 간판을 내걸고 있는 실정이었고, 일본 종파를 쫓아 정토니, 임제니 하는 종지를 내세우며 조선불교의 전통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 248.)
그러나 전국 50여 개 사찰 대표자들이 모여 창립한 원종을 정부 당국은 인정해주지 않았고, 창립한 지 반년이 지나도록 인가를 해주지 않았다. 이에 당황한 이회광은 인가 문제를 풀기 위해 1908년 10월 일본 조동종 승려인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1863~1911)를 원종 고문으로 추대한다. 이회광은 인가의 주무관서인 내부의 장관 송병준(宋秉畯, 1858~1925)과 일진회一進會 회장 이용구(李容九, 1868~1912)가 추천하는 다케다 한시를 오로지 인가를 받기위해 고문으로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당시 다케다와 가까웠던, 조동종 조선 포교의 책임을 맡고 있던 송병준과 시천교侍天敎 교주였던 이용구 등은 단지 매국 친일파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23세에 동학에 입도하여 손병희와 함께 해월의 고제(高弟)가 되었던 이용구(李容九)는 동학혁명 과정에 붙잡혀 투옥되었다가 곧 사면되어 동학을 진보회라 고치고 송병준의 일진회에 통합하였다. 1905년 손병희가 동학의 전통을 이어 천도교를 포교하자 이에 맞서 시천교(侍天敎)를 창설, 교주가 되었다. 일진회 회장을 맡아 한일합방을 제창하면서 총리대신 이완용과 소네 통감에게 ‘한일합방 건의서’를 올리는 등 배교ㆍ매국에 앞장섰다. 후계자가 되지 못한 데 대한 앙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김삼웅, 오마이뉴스,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원주에서 관졸들에게 체포돼.)
일본 승려 다케다 한시는 원종 이외에도 친일 단체인 시천교의 고문과 일진회 상담역도 맡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조선을 내왕하다가 청일전쟁의 빌미를 마련할 목적으로 몰래 낭인들을 이끌고 동학에 들어가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을 부추기기도 하였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도 가담하는 등 일제의 첩자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또 우익 조직인 흑룡회黒龍会 결성에도 참여하여 한일합병韓日合倂에도 개입하였다.
이회광은 구한말 일본 제국주의의 첨병노릇을 한 다케다 한시의 실체를 모른 채 고문으로 위촉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불교의 정통이 선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같은 선종 계열인 조동종曹洞宗과 손을 잡으려 한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정부 당국의 인가를 받고자 하는 열망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정부 당국의 인가는 결국 떨어지지 않았다. 일본불교 종파들의 감언이설과 친일파들의 온갖 회유에도 불구하고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이회광과 조선 불교계는 이 허들[hurdle]들을 뛰어 넘을 힘이 없었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원종 또한 그 출발부터가 친일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임인년 1902에는 일본의 조동선종(曹洞禪宗)이 조선개교를 시작 한 뒤 조선불교를 그 산하에 두려고 했다. 이러한 계획을 세운 것은 다께다(武田範之)다. 그는 1889년 조선으로 와서 각 지방을 돌아보고 귀국했다가 1895년에 다시 와서 그 해 민비(閔妃) 암살사건에 연류 되어 광도(廣島)에 투옥되었다가 그 다음 해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906년에 그는 정부 관헌의 원조를 얻어 다시 들어와 친일파 이용구(李容九)의 소개로 조선불교 원종총무원의 대종정인 이회광(李晦光)을 만나서 조동종과 조선불교의 선의 공통점을 들어서 합병을 설득시키니, 이회광이 경술년(1910) 가을 합일합방 직후에 일본 동경으로 가서 일본 조동종과 조약 7조를 체결했다. (정태혁鄭泰爀, 한국불교의 새 인식『한국불교융통사』정우서적, p. 324.)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이 있고 5년 후인 1910년에는 8월 22일에 조인되고 8월 29일 발효된 합방조약合邦條約이 발포發布된다. 그리고 38일째 되는 날인 1910년 10월 6일, 조선 원종과 일본 조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일불교동맹조약韓日佛敎同盟條約’을 체결한다.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에 종속시키려는 작업에 본격 돌입한 것이다. 이는 조선 불교의 중앙기관이었던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 원장 이회광이 교단 지도부나 사찰 대표자와는 아무런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일으킨 하나의 사건이었다. 일본 조동종과 맺은 ‘조동종맹약曹洞宗盟約’에는 조선불교를 그들과 통합시키려는 노골적인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一. 조선 전체의 원종 사원(寺院)대중은 조동종과 완전하고 영구히 연합 동맹하여 불교를
확장할 것.
一. 조선 원종종무원은 (일본)조동종원(曹洞宗院)에 고문을 위촉할 것.
一. 조동종무원은 조선 원종종무원의 설립인가를 얻게 하는 알선의 노력을 취할 것.
一. 조선 원종종무원은 조동종의 포교에 대하여 상당한 편리를 도모할 것.
一. 조선 원종종무원은 조동종무원에서 포교사 약간 명의 인원을 초빙하여 각 수사(首寺)
에 배치하여 일반 포교 및 청년 스님의 교육을 촉탁하고 또 조동종무원이 필요하여 포
교사를 파견할 때에는 조선 원종종무원은 조동종무원이 지정하는 땅의 수사(首寺)나
사원에 숙소를 정하여 일반 포교 및 청년승려 교육에 종사케 할 것.
一. 이번의 동맹 체결은 쌍방의 뜻이 맞지 않으면 폐지, 변경 혹은 개정할 수 있음.
一. 이번의 동맹체결은 관할처의 승인을 얻는 날로부터 그 효력이 발생함.
(오경후(한국불교선리연구원 선임연구원),「민족불교 성지 선학원 역사를 되짚다,
④ 조동종 맹약이 남긴 것들」.)
맹약 전문全文의 끝에는 조선 원종 대표자 이회광과 일본 조동종 대표자 히로쓰 세쓰조[弘津說三]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조약을 체결한 상대방은 조동종 관장管長(종정宗正)인 이시카와 소도우[石川素童]가 아닌 조동종 종무원 총무總務 히로쓰 세쓰조였던 것이다.(源弘之,《근대조선불교의 한 단면》龍谷學報 9 집, 1974). 이는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이회광이 조동종에 부속되는 것을 반대하고 연합의 형식만을 고집하자, 명목상은 동등한 자격의 연합처럼 하면서 급을 낮춰 총무와 조약을 체결하게 만든 일종의 사기극이었다. 관장인 이시카와가 주무관청의 내락內諾을 받고 은밀히 꾸민 짓으로 이회광은 종교적 굴욕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강석주 · 박경훈 공저, 『불교근세백년』 , 민족사, p. 43.)
맹약 7개조는 대체로 근대화에 앞선 일본 조동종이 아직도 전근대적인 조선 원종의 인가와 포교, 교육을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이 조항들은 자존심 상하는 점이 있긴 하지만, 두 종단의 교세와 종무의 수준을 고려할 때 원종에게 득이 되는 고무적인 맹약으로 볼 수도 있다. 특히 ‘조동종이 조선 원종 종무원의 설립 인가를 알선해줄 것’이라는 조항을 세 번째에 넣었다는 것은, 원종이 창립 이후 숙원이었던 인가 문제에 얼마나 큰 기대를 갖고 있었는가를 알게 해준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p. 262~263.)
조동종과의 연합을 성사시킨 이회광은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연합 맹약을 추인 받고자 전국 사찰을 순방한다. 그러나 일본 조동종의 원종에 대한 인가지원 등 유리한 3개 조항만 알리고, 조선불교의 자존심이 걸린 나머지 조항들은 비밀에 부친다. 이는 나중에 크나큰 파장을 불러 오는데, 원종-조동종 연합의 진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분위기는 돌변하게 된다. 조선 불교계 입장에서 이 맹약은 조선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팔아넘기는 매종賣宗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맹약 7개조를 털어놓고 원종이 인가를 받고 조선불교가 발전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자고 이해와 협조를 구했어야 했던 것이다.
조선 불교계는 이에 자극 받아 진진응陳震應, 박한영(朴漢永, 1870~1948), 한용운韓龍雲 등이 주축이 되어 1910년 10월 5일, 광주 무등산無等山 증심사證心寺에서 회의를 열기로 결의한다. 결국 열리지는 못했지만 1910년 12월 무렵 임제종문臨濟宗門을 표방하는 스님들이 모여 승려대회를 개최하였고, 이듬해인 1911년 1월 15일 순천 송광사松廣寺에서 ‘조동종 맹약 규탄 대회’가 열린다. 거기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조선 불교의 전통이 임제종臨濟宗에 있음을 천명闡明하면서 송광사에 임제종 임시종무원을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임제종 관장管長으로는 선암사仙巖寺의 김경운金擎雲 스님을 선출하였으나 그가 연로하였으므로 한용운韓龍雲이 대리를 맡기로 한다.
1911년 2월에는 석전石顚 박한영, 진진웅, 김종래陳震應, 장금봉張錦峰 등 300 여명의 호남의 고승들이 모여 총회를 열고, 조선 임제종을 설립하는 취지서를 채택하고 임제종 창종을 선언한다. “조선의 선종은 태고太古이래로 임제종의 법맥을 이어왔으므로 임제종이 정당하다.”는 취지였다. 박한영은 “조선불교의 연원이 임제종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조동종과 연합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면서, 조선의 선종은 돈오를 주장하고 조동종은 점수이므로 맞지 않다고도 했다. 이것이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와는 합병할 수 없다는 자주의식의 발로이자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임제종운동臨濟宗運動”이다.
이처럼 근세 조선불교계에서 어떤 이는 정토를 칭하며 진종에 귀의하고, 또 어떤 이는 원종을 설립해 조동종과 연합 맹약을 체결하며, 어떤 경우 일본 임제종에 귀속되는 등 다양한 흐름이 나타난 것은 모두 자기 집안의 전통과 역사를 잊어버리고 주관도 없이 남의 주장을 따르거나 남의 세력에 의지한 데서 나온 현상이다. 경허 스님은 몇 년 전에 이 점을 가장 우려해서 ‘자기 집안 정신을 체득하지 못하는 승풍’을 질타하며 결사운동과 선방 재건을 통해 종지를 선양하고자 애썼던 것이다.
당대에 조선불교의 전통과 역사에 밝았던 강원의 강사들과 선원의 선사들은 원종 지도부가 자신의 종지와 법맥도 모른 채 일본 조동종에 의탁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조선불교의 정신과 법통을 팔아먹는 매불매종 행위로 비쳐졌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임제종 지도부는 결집하게 되었고, 이들의 지향은 조선불교의 전통과 법맥을 지키려는 호법운동이었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p. 270~271.)
1912년에는 하동河東 쌍계사雙磎寺에서 제2총회가 열리고, 임제종의 종지를 널리 드날릴 것을 결의하였다.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는 처음 송광사 제1차 총회에 초청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임제종 참여에 대해 소극적이었으나, 임시종무원을 범어사로 옮길 것을 약속하자 마침내 합류하게 된다. 이로써 임제종은 창립 수개월 만에 호남과 영남을 포괄하게 되었고 원종과 당당히 맞서는 조직으로 커지게 되었다.
임제종이 이렇듯 짧은 기간에 영호남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진 데에는 당시 새로워진 수행 풍토와 더불어 청년 승려들의 활약이 뒷받침되었다. 시작은 원종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하고 일본 불교로의 통합을 저지하기 위함이었지만, 북쪽의 원종과 남쪽의 임제종이 대립하는 이른바 ‘남임제南臨濟 북원종北圓宗’이라는 구도가 성립된 것이다.
첫째, 무엇보다 경허스님이 영호남을 오가며 결사와 선방 재건을 통해 종지와 선풍 진작의 씨앗을 뿌려 놓았기 때문이다. 범어사의 예에서 보듯이 이렇게 형성된 선풍은 좋지 체득과 종풍 선양을 본분으로 인식하는 수행승들을 상당수 배출해 호법운동이 일어날 기풍을 조성 했던 것이다.
둘째, 임제종 운동의 지도부에는 경운스님을 비롯해 ‘남진응 ․ 북한영’ 이라 불리던 당대 조선불교계 최고 대강백들이 중심에 서 있었고, 만해의 추진력이 결합되어 있었으니 금상첨화였다. 경전과 역사에 해박한데다 말이면 말, 글이면 글 모두에 능한 대강백의 주장은 누가 보더라도 설득력이 있었다.
셋째, 임제종은 의협심과 활동력을 갖춘 청년 승려들을 집중적으로 조직화해 운동의 동력으로 삼았다. 대표 경운스님도 연로하다는 이유로 청년 만해를 대리로 내세워 청년 승려들의 애국심과 정의감으로 뜨거운 가슴에 불을 붙였던 것이다. 이 방략은 나중에 만해가 자평했듯이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근대 불교 청년운동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임제종 운동을 통해 각성되고 인연을 맺은 청년 승려들은 이후 3.1 운동과 사찰령 철폐운동, 만당 조직과 같은 항일운동의 중심 동력으로 발전하게 된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p. 272~273.)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이러한 조선 불교계의 노력은 오래 가지 못한다. 1911년 6월 3일 사찰령이 발포發布되었고, 뒤이어 7월 8일 시행규칙施行規則이 공포公布됨에 따라 원종과 임제종의 싸움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사찰령으로 인하여 두 종명은 저절로 사라졌고, 30본산제本山制가 실시되면서 모든 사찰들이 총독부의 관리 체제로 재편再編되게 되었다. 그러나 원종-조동종 맹약 사태는 다음 몇 가지 의미를 남겼다.
첫째, 한국불교를 점령하기 위한 일본의 점진적 노력에 의한 가시적 성과, 둘째,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병합시킨 점, 셋째, 한국불교의 독자성과 자주성 회복을 위한 계기가 된 점, 넷째, 민족불교 수호를 위한 임제종(臨濟宗) 운동과 그 정신을 계승한 선학원(禪學院)의 설립이다. (오경후(한국불교선리연구원 선임연구원),「민족불교 성지 선학원 역사를 되짚다, ④ 조동종 맹약이 남긴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