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
O.안바일러 지음
박 경 옥 옮김
제1장
러시아 평의회의 선구
1. 평의회의 개념
‘평의회’(council)라는 말을 보통 사용할 때는 ‘협의하는 것’(counseling)을 목적으로 하는 대표자회의라든가 의회, 위원회 등으로 이해되며, 그것은 시정(市政) 고문위원회, 추밀원, 공장위원회, 이사회 등과 같은 협의체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업무와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이 특수한 역사적, 정치적 개념으로 쓰일 때에는 대개 혁명적 상황에서 나타나서 군인이나 수공업자, 노동자들과 같은 사회의 하층계급을 대변하는 대표기구라는 뜻으로 쓰인다. 1)
이 개념은 이 연구와 관련시켜서만 보더라도 다소 융통성 있게 쓰여서, 하나의 원형(原形)이 되는 ‘평의회’로부터 도출되어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양태들 모두를 일컫는다. 로젠베르그는 중세의 도시 콤뮨, 스위스의 농민 칸톤, 북아메리카의 초기 집단정착촌, 1871년의 파리콤뮨, 그리고 러시아 소비에트가 모두 공통요소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 다른 역사가는 평민회를 로마제국의 합법적 기구로 인정한 기원전 287년의 호르텐시우스법에서 평의회의 이념이 최초로 역사상에 나타났다고 보았다. 그러나 또 다른 사상가들은 그 개념을 17세기 영국의 군인평의회나 1871년 프랑스혁명 당시의 파리 콤뮨과 같이 좀더 최근 역사에서 보여지는 제대로 규명된 양태에만 적용하도록 한정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평의회’에 대한 일관된 기준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용례상의 혼란은 주로 러시아 소비에트라는 특수한 역사적 현상에 대한 역사적 선구와 모델을 애써 찾아내려는 데서 기인한다. 사가들은 모델을 찾는 가운데 과거의 비슷한 기구들에서 소비에트와 같은 조직 원리와 혁명적 경향을 발견하고는 그 기구들을‘평의회’로 분류했다. 이런 식으로 평의회 개념은 러시아와, 그리고 그후 1918년 독일혁명에서 나타난 하나의 구체적인 양태를 말하는 이외에 다른 시대에도 적용되는, ‘틀잡힌 기본적 형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포괄적인 평의회 개념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견해차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포괄적 개념을 적용할 때는 다양한 개별적 양태들이 그것을 야기한 여러 가지 역사적 조건과는 분리되어, 원형을 구성하는 몇가지 아주 형식적인 공통 특성으로 환원되어 버리는 점을 반드시 유의해야 한다. 포괄적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지속적 발전을 이룬 한시대를 다룰 때라야 의미있을 것이다. 이 말은 현대를 다룰 경우 고대나 중세 역사에서 나타났던 것들을 제쳐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평의회 개념의 일반적인 특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종속적인 또는 억압받는 특정한 사회계층과의 연계
② 형태면에서의 급진적 민주주의
③ 혁명적 기원
‘평의회 이념’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평의회가 가진 이러한 내적 경향은 개인들을 직접적이고도 폭넓게 그리고 무제한적으로 공공 생활에 참여하게 한다. 그 이념이 집단에 작용하면 혁명적 변혁 의지를 가진 대중들의 자치정부라는 이념이 된다.
평의회의 이념은 “대중들이 봉건적 혹은 중앙집권화된 권력을 타파하려 할 때마다 힘을 발휘했다. 이는 부르조아의 발흥 당시 봉건제도에 대한 투쟁이나 그후 사회적 해방을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에서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한 평의회들은 세가지의 기본 형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 평의회=콤뮨=‘민중’ 스스로가 국가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조직한 것(예 : 1871년의 파리 콤뮨)
② 평의회=혁명위원회=일정기간 동안 혁명적 투쟁을 지도하기 위한 기구(예 : 영국혁명
당시의 군인평의회)
③ 평의회=노동자위원회=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구(예 : 1848년의 뤽상부르위원 회)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매우 유동적이다. 이 세 가지 형태 중 어느 한가지 형태만으로는 러시아 평의회의 성격을 규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러시아 평의회는 노동자위원회로서, 혁명위원회로서, 그리고 국가 권력으로서의 평의회라는 세 가지 유형이 함께 복합적으로 발전해 왔다.
러시아혁명 과정에서 형성된 소비에트는 다른 역사상의 모델들과 직접적인 연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판명될 수 있다. 그래서 소비에트 역사를 연구하는 데서 보통 소비에트의 선구라고 일컬어지는 여러 가지 기구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만일 여기에서 그것들 가운데 몇몇을 고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승하는 사회 집단이 역사적으로 유사한 시도를 하게 된다는 것을 보려는 것 뿐이다. 즉 소비에트와 역사적으로 닮은 요소들과 유사한 조직 형태가 존재했다 할지라도 1917년 이전의 평의회 이념이 역사적 전통으로 계속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평의회의 특징적 성격들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모델들을 놓고 비교해 보는 것보다는 그것들 개개의 구체적인 정치적, 사회적, 사회심리적 배경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실제로 존재한 평의회와 그 뒤에 전개된 평의회의 이데올로기는 명확히 구분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자꾸 현실을 뒤로 하고 멀리 떠나서 이상적인 평의회체제를 만들려하기 때문이다. 칼 마르크스는 콤뮨에 대한 해석에서, 또 레닌은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이론에서 현실과는 분명히 대비되는 이상화된 형상을 그려냈다. 이 연구의 목적 중의 하나는 이러한 괴리에 주목하고, 또한 평의회운동의 실제 역사와 그에 수반되는 이데올로기를 비교하는 것이다.
2. 역사적 선구들
근대 서구 유럽에서 일어난 세 혁명 즉 17세기 영국혁명, 1789년의 프랑스혁명, 1848년 혁명에서 모두 앞에 서술한 바와 같은 평의회의 원형적인 특성을 가진 혁명적 기구가 나타났었음을 볼 수 있다.
군인 평의회의 한 유형이 영국혁명의 그 유명한 ‘정치운동가들’(agitators)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1647년 봄, 크롬웰 군대의 병사들은 그것을 해체하려는 의회의 기도에 반발해서 사병들의 이해를 대변해 줄 수 있는 대변인들-정치운동가-을 임명했다. 그리고 각 연대에서 사병이나 하사관들 중에서 두 명을 뽑아 ‘군사 총평의회’를 구성했다. 이 평의회는 1647년 6월 4일 뉴마켓의 벌판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자신들이 ‘영국 자유민’군대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선포했다. 이러한 정치운동가의 존재는 군 내부의 민주적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들의 노선은 급진적 대중 지도자 죤 릴번(John Liburne)의 노선에 가까웠다. 그들은 군대 고위 사령관들과의 협상을 혁명적 방향으로 끌고 나가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곧 충돌이 일어났고, 1648년 1월 총평의회는 해체되었으며 대의제도 철폐되었다. 이것이 적당한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혁명적 독재 정부’를 형성하려는 시도는 일시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동안에 형성되었던 파리 콤뮨은 혁명적 부르조아와 쁘띠 부르조아의 정치 조직이었다. 이것은 1789년부터 1794년에 걸쳐 일어났던 봉건제도에 대항하는 부르조아 혁명 운동 가운데에서 그러한 “계급적 성격을 가장 순수하게 드러낸 형태였다. 19세기에 나타났던 콤뮨은 급진적 민주 운동의 모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의 몇가지 특성들에 비추어 러시아 평의회의 선구로 보아도 무방하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의 콤뮨 운동은 국민회의 선거를 위해 설정했던 60개의 파리 선거구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선거구 자체가 제3신분의 자치 기구로 되었으며, 그 중에서 혁명적 자치 평의회인 콤뮨이 구성되었다. 콤뮨은 파리로부터 일시에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모든 지역에서 혁명적 자치 평의회가 생겨났다. 초기에는 선거권을 가지고 있던 유산 부르조아가 앞장섰으나 선거권이 없는 시민들의 압력이 강해지자 자치 평의회는 점차 급진적으로 되었다. 1790년 4월에는 파리 선거구 대신 48개의 구역(section)을 설정하여 거기서 선출된 대표자들이 파리 콤뮨 총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 구역들은 정치 클럽이나 시민들의 위원회와 함께 혁명 운동의 실질적인 중심이 되었다. 그들은 보통선거제도를 도입, 실시했고 자체 경찰을 두었으며 군대에 제복을 공급하거나 작업장을 세우는 등 경제 활동을 수행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콤뮨은 인민 주권의 실제적 대표기구였으며 동시에 혁명적 상설 여론 조성 집회로서 쉬지 않고 회의를 가졌다. 1792년 8월 10일 쟈코뱅당이 계획한 쿠테타로 구(舊)파리 콤뮨은 전복되고 급진적인 구역의 대표자로 구성된 혁명적 콤뮨으로 대치되었다.
1793년 쟈코뱅당의 지배가 확립되면서 구역은 정부에 의해 설립되어 정부의 요구에 직접적으로 부응하는 위원회들의 영향으로 점차 정부 권력의 기구, 그리고 테러의 도구로 변했다. “그에 따라 구역과 혁명적 자치 행정기구는 말살되었다.” 로베스피에르가 암살되고 반동세력이 득세하면서 구역과 이에 기반을 둔 콤뮨은 점차 중요성을 상실했다.
파리 구역은 급진적 직접 민주주의의 표현이었다.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은 언제나 책임을 져야 했으며 소환에 응해야 했다. 당면한 정치적 전략적 필요에 의해 수정되기도 했지만 콤뮨에서 구현된 직접 민주주의는 혁명적 전통의 핵심 원리로 면면히 이어졌다.
뤽상부르궁에 그 본부를 둔 이후에는 ‘뤽상부르위원회’(Commission du Luxembourg)로 불려졌던 ‘노동자들을 위한 정부의 위원회’(Commission du gouvernement pour les travilleurs)는 ‘노동자 위원회’로 분류할 수 있는 평의회 형태에 속한다. 그것은 1848년 2월혁명 기간중 노동자들의 압력을 받아 정부 법령으로 파리에서 창설되어 실행위원회와 협의회(commission and parliament)를 두었다. 거기에는 노동자 클럽에서 선출된 대표들 뿐 아니라 고용주 측의 대표들과 루이 블랑(Louis Blanc)을 위시한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참여했다. 뤽상부르 위원회는 정부의 법령에 의해 창설되고, 명목상 노동자와 고용주 양측의 대표로 구성되었지만, 고용주 측의 불참으로 계속적인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파리 노동자들이 바라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대변하는 기구로 되었다. 6월 봉기 후 뤽상부르 위원회는 해체되었다.
비록 실효를 거두진 못했지만(파리에서 10시간 노동, 지방에서는 11시간 노동제를 규정했던 정부의 법규는 폐지되었다.) 뤽상부르 위원회는 노동운동 사상 중요한 것이었다. 칼 마르크스는 뤽상부르 위원회의 활동에 아주 비판적이었지만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이라는 19세기 혁명의 비밀이 유럽무대 위에 펼쳐진 것” 이라고 믿었다.
3. 이론적 선구자들
러시아 평의회의 역사적 선구들에 대해 앞서 말한 것들은 상당한 정도로 이론적 선구자들에도 적용된다. 러시아와 여타의 나라들을 막론하고 19세기 주요 사회주의적, 무정부주의적 사상가들에 의해 주창된 정치적 혁명적 개념들과 사회에 대한 청사진 등에서는 평의회 이념의 여러 요소들이 드러나지만 이들 사이에 직접적인 역사적 연계는 없다.
1917년 이후의 볼셰비키 체제를 예시(豫示)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념 및 그 반대파가 펼친 평의회에 대한 순수 이론은 사회적 개혁 즉 마르틴 부버가 말한 사회의 ‘재구성’(restructuring)에 투신한 사람들에게는 당면의 문제로 되었다. 국가 통제로부터의 해방, 협동적 생산자 집단의 자치정부, 지방 콤뮨들의 자치권 등은 19세기 초의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로부터 프루동(Proudhon), 바쿠닌(Bakunin), 마르크스, 엥겔스, 크로포트킨(Kropotkin), 그리고 여러 종류의 생디칼리즘과 많은 나라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정당에 이르는 유럽 사회주의의 기본적 관심사였다. 거기서 러시아 평의회 체제와 형태나 구조 면에서 놀랍게도 닮은 요소가 흔히 발견되지만 그것의 중요성이 과장되어서는 안된다.
이들 중에서 프루동과 바쿠닌 두 사람의 이념에 대해 언급하겠다. 프루동은 마르크스와 반대 입장에 서긴 하지만 마르크스를 제외하면 19세기의 가장 창조적인 사회주의자였다. 프루동의 견해는 흔히 러시아 평의회와 직접적으로 관련되기도 하고 그것의 성립에 결정적이었다고도 한다. 바쿠닌은 반드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프루동보다 훨씬 더 무정부주의적인 원칙들을 혁명적 행동에 연결시키면서 후일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혁명적 과정에 대한 놀랄만한 통찰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피에르 죠세프 프루동(1809~1865년)의 방대한 저작은 최근의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반(反)권위주의의 핵심’을 담고 있으며 그의 무정부주의적 사고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만 국한하지 않는 “기본적 인본주의적 태도의 표현”이었다. 프루동의 반(反)억압주의적(libertarian) 입장은 그의 정치적 경제적 견해를 결정지었다. 그는 사유재산제를 인정했고 생산자 노동조합(producert associations)에 기초한 공평한 사회 질서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지대와 화폐가 소멸되면 계급 착취의 기반인 국가권력과 그에 부수되는 관료제 및 경찰제와 함께 붕괴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생적 경제 집단들이 법을 제정하여 스스로 통치할 수 있을 것이다,
1863년 프루동은 가장 적절한 정부 형태는 광범위한 자치권을 가진 최대 다수의 소규모 집단들로 구성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언명했다. “내가 25년동안 전개한 경제 사상은 농업 . 공업 연합체(agricalt uralindustrial federation)로 요약될 수 있다. 나의 모든 정치 사상을 유사한 방법으로 요약하면 연방제 혹은 지방분권제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프루동은 미래 사회를 공산주의적으로 중앙집권화하려는 마르크스의 정치 구상을 구 절대주의의 한 변형이라고 비판하고 의식적으로 그에 맞섰다.2) 마르크스주의와 프루동주의의 대결은 제1차 인터내셔널을 분열, 해체시키기에 이르렀고, 이러한 양상은 50년 후 러시아에 다시 나타났다. 프루동의 생산자의 직능조합(producer's corporation) 에 기초한 자치-정부 국가 개념은 공장 소비에트에서 명확해지는 ‘생산자들의 민주주의’ 이념과 분명히 관계가 있다. 이런 견지에서 프루동은 평의회 사상의 선구자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소비에트 성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는 밝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소비에트 체제에서 그 내재적 활력을 앗아가 버린, 레닌이 단행한 국가와 경제의 중앙집권화는 마르크스의 프루동에 대한 뒤늦은 반론인 셈이었다.
미하일 바쿠닌(1814~1876년)의 사상과 행동은 권력과 그것의 구현체인 국가의 모든 원리를 맹렬히 반대하는 데에 집중되었다. 바쿠닌은 1868년 국제 동지 연맹(the Alliance International Brothers) 강령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혁명은 처음부터 국가와 모든 국가 기구를 근본적으로 철저히 파괴해야 한다. 모든 의무 부과와 직접, 간접세 징수가 중단되고, 군대, 관료제, 경찰제도, 성직자 제도는 해체될 것이며, 사법제도, 기존의 모든 법률, 법률의 시행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바쿠닌은 러시아에서의 거대한 농민 봉기와 서구 유럽에서의 도시 노동자들에 의해 농촌 지역으로까지 확산되는 혁명을 꿈꾸었다. 그는 대중들의 자발적 행동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참모’들이 배후에서 민중들의 체계화되지 않은 잠재력을 혁명적 이념과
이어주기를 바랬다. 그는 바리케이트를 치고 대치 중인 지역, 시가전 중인 지역, 그리고 도시의 여러 구역에서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된 혁명 위원회 형성을 제안했다. 대표들은 구속력 있는 명령을 받게 될 것이고 대중에 대해 책임을 지며 그들의 소환에도 응해야 한다. 이 혁명적 대표들은 다른 반란의 중심부와 즉각적으로 연합할 수 있는 혁명적 콤뮨으로서 조직된 ‘대치 지역 연합’(federation the barricades)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농촌에서는 가장 활동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혁명적 농민 위원회가 기존의 촌락 행정기구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혁명은 기존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혁명적 국가’를 탄생시킬 것이다. 그 국가는 “혁명 이전의 국경이나 민족적 차이를 무시하고 같은 원칙에 기반을 두고 봉기를 일으킨 나라 전역을 포괄하는, 혁명대표들에 의해 상향식으로 운영되는” 것이다. 국가의 목적은 “민중들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공 봉사를 위한 행정부” 가 되는 것이다.
바쿠닌은 자치 평의회 의원을 선출할 혁명적 위원회를 형성할 것과 사회를 피라미드식으로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 그 피라미드식 조직이란 “밑으로부터 상향식으로 구성된 자유 연방(free federation), 그리고 공업과 농업 부문의 노동자 연합에 입각한 것으로, 처음에 작은 공동체에서 출발하여 공동체 연방이 지역 연방으로, 지역 연방이 국가 연방으로 또 그것이 국제적 형제애를 도모하게 되는” 조직이다. 이러한 제안은 실로 놀랍게도 뒤에 나타난 러시아 평의회 체제의 구조와 유사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러한 주장은 보편적 타당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볼셰비즘의 이론과 실천에 미친 바쿠닌의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에 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많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추종자들이었던 볼셰비키들은 바쿠닌을 계속 논박했으며, 무정부주의와의 어떠한 연관성도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단순하지만은 않다. 레닌의 1917년 혁명과 그 이후 소비에트 국가체제의 전개는 바쿠닌의 역할을 중요한 것으로 보게 했다. 한편 바쿠닌은 마르크스의 권위주의적, 중앙집권적 행동 원리들 속에서 장래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민중해방을 시작할 공산당지도자들”의 독재 위험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약속했던 민중해방에 의한 국가의 철폐는 무기한 연기될 것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쿠닌의 혁명을 위한 실천적 프로그램은 러시아 혁명 당시 레닌과 볼셰비키들의 노선 전략과 분명히 연관을 가지고 있다. 바쿠닌은 도시 노동자들과 무장도 불사하는 선전 활동반들이 농민들을 근본적 개혁에 참여토록 유도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그는 지도자들의 권위주의적 행동 원리에 대해 근본적으로 불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 대중 봉기는 소수의 혁명적 음모가들에 의해 이끌어져야 한다고 분명하게 인정했다. 혁명은 모든 기존의 기구들을 제거해야 하는 것, 즉 ‘분쇄해 버리는 것’ 이라는 그의 계속된 역설은 1917년 레닌의 혁명적 어휘 속에서 불변의 공식이 되었다.
혁명의 자발적 전개와 단위 조직을 만드는 대중들의 능력을 인정한 바쿠닌의 사상은 후에 일어난 소비에트 운동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직접적인 지적 연계는 발견되지 않는다. 바쿠닌은 마르크스와는 달리 항상 사회적 투쟁의 현실에 밀착되어 있었으므로 혁명의 구체적 양상을 예견할 수 있었다. 러시아 혁명 기간 동안의 평의회 운동은 그것이 비록 바쿠닌 이론의 결과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형태나 진행과정이 그의 혁명적 개념이나 예측과 통하는 점이 많았다. 1917년 레닌의 무정부주의적 편향은 평의회에서 구체화된 경향들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리하여 평의회 운동에서는 레닌과 바쿠닌의 근본적 차이가 겉으로 보이는 연관성이나 유사성으로 말미암아 잠시 가리워졌다.
4. 칼 마르크스와 1871년의 파리 콤뮨
1871년 파리 콤뮨과 마르크스의 그에 대한 해석은 비록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파리 콤뮨이 소비에트의 형성과 초기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았다고 하더라도, 러시아 평의회의 선구들 중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어쨌든 그것은 소비에트에 대한 볼세비키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현상을 왜곡하는 이데올로기에 반해 평의회라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이었던 파리 콤뮨은 맨 앞에서 지적한 이 양측면이 함께 전개된 첫 번째 사건이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실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바로 파리 콤뮨에 대한 마르크스의 해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일면적으로만 현실과 일치했다. 그것은 레닌이 러시아 소비에트들을 마르크스의 국가와 혁명 이론에 결부시키려할 때 그 둘을 연결시켜 준 교량이 되었다.
1871년 파리 콤뮨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여파와 그리고 파리의 공화주의적 혁명적 전통의 분위기 속에서 탄생되었다. 군인평의회 체제에 앞서 나타났던 국민 방위군(National guard) 중앙위원회가 콤뮨을 선포하는 데에 앞장섰다. 가장 하위 조직인 대대의 클럽들은 군단 평의회 의원을 선출하고 각각의 군단 평의회에서는 세명의 대표를 뽑아, 육십명으로 구성되는 중앙위원회에 보냈다. 게다가 중대의 대표들은 총회를 구성하고 한달에 한번씩 모이기로 규약을 정했다. 하지만 언제라도 모든 대표들은 소환될 수 있었다.
1871년 3월 18일 베르사이유 궁에 진을 치고 있던 띠에르(Thiers)의 정부군과 국민방위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국민방위군이 승리했다. 중앙위원회는 자신들이 세력면에서 우월함을 발견하고 본부를 파리 시청으로 옮겼다.
위원회는 임시기구로 자처했기 때문에 합법적 정부라고 할 수 있는 콤뮨에게 서둘러 책임을 넘겨주었다. 얼마 동안 여러 정치 클럽들이 대혁명의 전통 속에서 혁명적 방법으로 형성된 콤뮨울 위해 선전활동을 폈다. 그리하여 1871년 3월26일로 발표된 콤뮨 선거를 위한 기반이 조성되었다.
콤뮨 선거에는 유권자의 47퍼센트인 23만명이 참여했는데, 대부분 노동자와 쁘띠 부르조아였고 부르조아는 일부밖에 참여하지 않았다. 선출된 콤뮨 대표들 중에는 25명의 노동자와 7명의 성직자가 있었고, 이들은 의사, 법률가, 저널리스트 등의 지식인 출신 30명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나머지는 소상인, 수공업자 등이었다. 25명의 노동자 중 단지 13명만이 제 1 인터내셔널의 구성원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프루동의 추종자였다.
콤뮨 내의 정치적 분파는 그 성원들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결정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계충 출신들과 마찬가지로 분열되었다. 처음에 콤뮨은 주로 인터내셔널 구성원과 프루동 추종자들로 구성된 ‘사회주의자’ 소수 집단과 ‘블랑키주의적 자코뱅파’의 다수 집단으로 분열되었다. 다수집단은 주로 혁명적 클럽들과 국민 방위군 중앙위원회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다. 소수파는 정치적 분야에서는 자유로운 콤뮨들의 연방제를, 경제적 영역에서는 생산자들의 노동조합을 옹호한 반면 다수파는 중앙집권적 자코뱅 지배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차이는 모호한 점이 많고 모순으로 가득차 있는 콤뮨의 성명서들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실제 문제 처리에 있어서도 외부 조건의 압력으로 중간 노선을 택하곤 했다. 여러 추세, 입법 조치, 선전 발표문, 그리고 실천적 활동 내용을 가지고 콤뮨의 강령과 같은 것을 재구성하기란 힘들다.
가장 분명한 것은 새로운 국가의 기반으로 공화주의적 자치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콤뮨의 대의를 해칠 지도 모를, 프랑스에서 특히 첨예화되어 있는 수도와 지방간의 자연적 반목을 완화시키고 지방의 불신을 가라 앉히기 위해 콤뮨은 하나의 국민적 조직으로 파리와 모든 프랑스 콤뮨들의 자유로운 연방이 구성되기를 바랬다. 그와 비슷한 정도로 번번히 표명되었던 또 다른 원칙은 민원 봉사 관료를 소환에 응해야 하는, 선출된 민중 대표가 대신 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자치 의회 의원들은 여론에 의해 끊임없이 통제 받고, 감독 받고, 비판 받으며 소환될 수 있고, 그들의 의무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나 사회 문제는 성명서에서 간헐적으로 다소 모호하게 다루어졌을 뿐이다. 제빵 도제의 야간 작업철폐, 공장 내에서의 벌금 금지 등과 같은 몇가지의 사회 개혁을 도입하고, 소유주들이 내팽겨져 버린 작업장이나 공장을 노동자들이 차지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초기 사회주의적 이념을 실현하고자 했던 법령들은 명확한 사회주의적 강령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파리 콤뮨은 겨우 두달 동안 지속되었다. 4월 초 몇몇 지방 도시에서 일어난 봉기가 진압되자 수도는 고립되어 버렸다. 1871년 5월21일 정부군이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고, 피비린내 나는 시가전이 5월28일 까지 계속되었다. 많은 사상자와 투옥, 사형선고 등은 프랑스 노동운동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 콤뮨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프랑스 역사 속에서의 위치 보다는 국제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에서의 사적 위치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현실과는 너무나 괴리되어 버린 콤뮨 신화를 창조했다. 마르크스는 콤뮨이 붕괴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자본가 계급과 그들의 국가에 대항하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은 파리에서의 투쟁으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당장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새로운 출발점을 이룬 것이다.
이러한 예언이 사실이 된 것은 마르크스 자신의 역할 때문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국가와 혁명 이론은 시종 일관된 논리를 편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의 언명들, 특히 미래 사회주의 사회의 형태에 관한 것은 당면하고 있는 정치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으며 부차적으로는 전술적 목적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레닌이『국가와 혁명』(State and Revolution)에서 1847년의 초기 마르크스로부터 후기 엥겔스에까지 이르는 상층되는 저작들을 바탕으로 완벽한 이론적 체계를 세우고자 했던 시도는 주로 그의 새로운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의도된 지나친 단순화로 귀결되었다. 그러므로 소비에트와 볼세비키 평의회 체제의 정통 선구자들 가운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소련의 국가 이론에서 늘 다루었던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1848년 『공산당 선언』에는 혁명 기간 중의 프롤레타리아의 과업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부르조아로부터 점차 모든 자본을 빼앗고, 국가 즉 지배계급으로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의 손 안에 모든 생산수단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의 정치적 우위를 수단으로 사용할 것이다. 2년 뒤 혁명이 실패한 후 마르크스는 새로운 혁명적 봉기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차서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유산계급이 권좌에서 쫒겨날 때까지, 최고 권력을 장악하여 한 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민족들에게서 프롤레타리아 연합이 적어도 주된 생산력을 그들 손에 쥐게 되는 시점에 도달할 때까지 혁명을 계속하는 것이 우리의 과업이다.
1848년부터 1850년 사이는 마르크스가 혁명에 대해 낙관을 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아직 초기 단계에 있던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적 생산 방법을, 그리고 아직 미약한 노동계급에게서 사회 혁명을 위한 지도력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정치 권력의 장악 그리고 “소유권과 부르조아 생산조건에 대한 전제적 침탈 방법에 의해서” 새로운 사회는 형성될 것이다.
‘지속적인 혁명’의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노동자 당의 ‘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과의 연계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3) 1850년 3월 「공산주의자 연맹에 보낸 중앙국의 교서」(addvess of the central authority to the Communist League)에서 마르크스는 평의회 이념에 관한 그의 최초의 업적으로 기억될 기본적 혁명 전략을 제시했다. 이 논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투쟁기간 동안 그리고 투쟁 후, 기회 있을 때마다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의 요구 사항을 부르조아 민주주의자들의 요구와 발맞추어 진척시키고.....
새로운 공식적인 정부를 수립함과 동시에 그들 자신의 혁명적 노동자 정부를 세워야 한다. 그것이 자치 행정부와 자치 평의회의 형태가 되건, 노동자 클럽이나 노동자 위원회의 형태가 되건 간에. 그리하여 부르조아 민주주의 정부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잃게 될 뿐 아니라 애초부터 노동자 대중 전체를 기반으로 수립된 기구에 의해 감시와 압력을 받아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더 나아가서 노동자들의 무장과 프롤레타리아 방위군 창설을 요구했다. 프롤레타리아 방위군은 “선출된 지휘관들과 그들 자신의 참모 본부를 갖추고 국가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세운 혁명적 자치 평의회의 명령에 따른다.”
마르크스가 제시했던 자치 평의회, 노동자 클럽 및 유사 기구들은 사실상 혁명을 지속시키고, 부르조아 정부와 함께 일종의 ‘이중정부’(dy-archy)를 구성하기 위한 혁명 위원회이다. 이것은 1917년 2월 혁명 이후 ‘노병평의회’(the workers and sodiers councils)의 역할에 대한 실로 놀랄만한 예견이었다. 그들은 임시정부와 대치하면서 그들 자신의 지배를 관철시키려 했고, 독립적 노선의 혁명 정책을 추구했다. 더욱이 또 다른 이유 때문에 1850년 마르크스의 혁명적 프로그램은 흥미를 끈다. 부르조아 중앙 정부에 반대하는 혁명적 자치 평의회를 요구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중앙집권적 국가에 반대하는 지방 자치 정부의 옹호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르크스 자신은 이러한 명쾌한 해석을 강력하게 반박했다. 그는 같은 서간에서 공산주의자 연맹 내에 노동자 클럽들의 중앙 조직을 둘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프로그램의 핵심은 연방 공화국을 주장하는 민주적 슬로건에 반대하고 강력한 중앙 권력에 찬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은 이론의 여지없이 국가 당국의 수중에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자치제의 자치권이라든가 자치정부와 같은 민주주의적 공론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마르크스는 혁명적 자치 평의회를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수 있는 맹아가 아니라, 혁명을 진전시키기 위한 정치 투쟁에서의 임시 기구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사회의 근본적 변혁은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중앙집권화된 권력을 통해 오로지 위로부터 달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술적 이유로 내세운 지방적 혁명기구와 프롤레타리아 중앙집권주의에 대한 요구 사이에는 모순이 여전히 남는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알지 못했는지 그러한 모순을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1871년 파리 콤뮨에 관해서도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고 1917년의 레닌도 같은 처지였다.
마르크스는 콤뮨 봉기를 예견하지도 그것에 대비하지도 못했다. 1870년 9월 공화국 선포 후, 그는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신체제를 뒤집어 엎고 “파리 콤뮨을 세우는 것”은 “지독하게 어리석은 짓”이라고 경고했었다. 그러나 막상 혁명이 터졌을 때는 지체없이 콤뮨 편에 섰다. 콤뮨이 좌절된 후, 파리 콤뮨의 주장은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내용이 담긴 1871년 5월 30일자로 마르크스는 자신이 썼던 인터내셔널의 「프랑스 시민전쟁에 관한 서간」(Adress Concering the Givil in France)을 인터내셔널 총평의회가 발표하도록 설득했다. “이렇게 하여 마르크스는 1871년 파리 콤뮨을 자기 것으로 했다. 콤뮨 반란이 정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마르크스의 작업이 아니고 보면 참으로 묘한 역사 진행이었다.” 고 로젠베르그는 적절한 논평을 했다. 1871년의 「서간」과 그와 관련하여 뒤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말한 것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승리를 거둔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는 구(舊) 국가 기관과 지배계급의 기구를 파괴 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1872년 『공산당 선언』신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특히 파리 콤뮨으로 해서 분명해진 한가지 사실은 노동계급은 단순히 기존의 국가 기관을 장악한 상태로 머물 수 없고 그것을 그들의 목적에 맞게 운용해야 한다.”
② 군대, 경찰, 관리는 시민군, 그리고 언제라도 관직에서 쫒겨날 수 있고 그들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대표들로 구성된 노동자 대중의 자치정부로 대치되어야 한다.
③ 이러한 전제로부터 의회주의와 권력 분립에 대한 반대가 도출된다. ‘통합된 실체’(cooporate entity)가 모든 입법, 행정, 사법 기능을 통일적으로 처리한다. “보통선거는 의회를 통해 민중을 대표하고 억압할 지배계급의 성원을 3년 혹은 6년에 한번씩 결정하는 데 이용하기보다는 마치 고용주가 개인적으로 그의 사업을 위해 노동자, 감독관, 경리직원을 선택할 수 있듯이, 콤뮨을 구성하는 민중에게 봉사해야 한다. ......콤뮨은 의회가 아니라 행정, 입법 업무를 동시에 처리하는 기구가 되어야 한다.”
④ 콤뮨 형태의 국가는 분산되어 있는 자치체의 지방 자치 정부들을 기반으로 하지만 피라밋 형태로 연맹을 이루어 통합된다. “콤뮨 제도가 파리와 그밖의 중심지에 도입되자 생산자들의 자치 정부가 있던 지역에서 조차 구(舊) 중앙 정부는 무너지게 되었다. ......
콤뮨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당연히 지방 정부 역할을 하는 것이 되고 이제는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린 국가 권력에 더 이상 대항하지 않게 된다. ......민족의 통일은 파괴되지 않고 오히려 콤뮨 체제를 통해서 조직될 것이다.”
⑤ 콤뮨 국가는 사유 재산 철폐, 생산수단의 사회화, 전반적인 계획에 따라 경제를 통제하게 되는 공산주의, 즉 계급없는 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 내에 이미 싹트고 있는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1875년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이에는 혁명적 변혁의 시기가 존재한다. 거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나타나게 되고, 그 동안에는 국가란 단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일 뿐이다.” 마르크스가 죽은 뒤, 엥겔스는 파리 콤뮨 20주년 기념 「서간」신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독일인들은 뒤늦게야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이 주는 신선한 충격을 경험했었습니다. 자 , 여러분, 당신은 독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파리 콤뮨을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입니다.” 엥겔스가 한 이말은 사실상 마르크스주의가 파악한 파리 콤뮨의 핵심적 표현이었다. 마르크스가 1871년 「서간」에서 썼듯이 파리 콤뮨을 모델로 했던 국가란 “그 구조 하에서는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가능한 정치적 구조를 가진 것으로 마침내 드러났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그리고 계급 없는 사회와 ‘국가 소멸’을 향한 이행 단계의 구체적, 역사적 형태였다.
파리 콤뮨의 실제 역사와 마르크스의 서술 사이의 피상적인 비교만으로도 그의 콤뮨에 대한 서술은 단지 부분적으로 실제와 일치할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그의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콤뮨의 어떤 특성은 강조하고, 다른 특성은 지나쳐 버리거나 재해석함으로써 그의 역사와 혁명 개념에 꼭 들어 맞는 이상화된 ‘마르크스주의적 콤뮨’을 창조했다. 마르크스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콤뮨을 부당하게 자기 식으로 해석했다고 비난받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바쿠닌은 마르크스는 혁명적 사건에 대한 강렬한 인상으로 사회주의자 인터내셔널에서 그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이전의 그의 견해와는 상반되는 콤뮨의 프로그램을 자신의 것으로 채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서간」에 표현된 혁명에 대한 견해와 마르크스의 초기 정치 이론들을 일치시키기란 쉽지 않다. 마르크스 자신도 이러한 모순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콤뮨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연방주의적인 경향을 국가에 대한 그 자신의 중앙집권적 개념과 결합시켜 보려고 시도했었다는 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마르크스도 부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생산자들의 자치 정부’는 구 국가권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며 국가가 새로이 통합됨으로써 자치 정부와 중앙집권주의간의 갈등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 모순을 해결하였다.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후에 레닌은 더욱 두드러지게 콤뮨의 반(反) 중앙집권적 경향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콤뮨의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적 측면, 즉 기존 부르조아 국가의 ‘파괴’ 및 전통적인 의회주의와의 차이 등을 강조했다. 마르크스는 콤뮨의 형식적 특성 즉 관료제의 철폐 및 유권자의 대표 소환권 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콤뮨과 그 후의 평의회를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의 유일한 형태로 받아들이기 위한 근거로 삼았다. 1945년 이후에야 비로소 ‘인민민주주의’를 가장한 이러한 형태의 변형이 받아들여졌으며, 1956년 소련 공산당 20차 전당대회 이후 또 다른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인정되었지만 모델로서 소비에트를 버리진 않았다.
마르크스의 콤뮨에 대한 해석은 제2차 인터내셔널에 참여한 사회주의 정당들에게는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의미도 갖지 못했다. 그것은 1917년 볼세비키 혁명, 소비에트 국가 체제의 성립 및 다른 사회주의 정당들에 대한 볼세비키의 이데올로기적 투쟁 등을 통해 부각되었다. 마르크스의 견해는 레닌주의자들의 정부 이론과 실천을 위한 강력한 논거가 되는 한편 볼세비키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볼세비키들이 본래의 마르크스주의를 왜곡시켰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다양한 저작들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마르크스가 콤뮨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원형(原形)이라고 불렀을 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볼세비키들은 절대 다수가 적대 계급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체제의 무제한적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한 반면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보통, 평등 선거를 들어 콤뮨의 민주적 특성을 강조했다. 트로츠키가 카우츠키와의 논쟁에서 마르크스는 콤뮨의 일반적 민주적 특성이 아니라 노동자 정부라는 계급적 내용을 강조했다고 쓴 것은 틀림없이 옳았다. 다시 말하자면 마르크스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와 다수 민중의 소수 ‘착취자’에 대한 지배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하는 것도 옳다. 마르크스주의자 진영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논쟁에 결론을 내려준 요소는 1871년 파리 콤뮨의 정통적 계승자라고 자처하는 볼세비키 소비에트 국가의 존재이었다.
< 출처 :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 / 지양사 / 1986 / p.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