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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세계를 바꾼 어느 물고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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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자 마크 쿨란스키
칼럼니스트이자 전문 작가. 현재 뉴욕 거주. 어업이나 어부들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으며, 환경 문제에도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자신도 젊었을 때는 몇 년간 어선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는 다년간 신문과 잡지에 많은 글을 기고해 오고 있는데, 잡지 「뉴욕 타임즈 매거진」「내셔널 지오그래픽」등에 글을 썼으며, 「오더본」「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에 정기적인 기고를 하고 있다. 또한 「음식과 술」이라는 잡지에 음식의 역사와 관련된 칼럼을 싣고 있다. 저서로 『섬으로 이루어진 대륙 : 카리브 해의 운명 탐구』『선택받은 소수 : 유럽 유태인의 부활』등이 있다.
▣ 역 자 박광순
1955년에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고, 청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범우사, 기린원 등에서 편집국장 및 편집주간을 역임했고, 현재는 저술가 및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인간의 마지막 진화, 호모 노에티쿠스』『헤로도토스 역사』『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갈리아 전기』『역사의 연구』『트로이의 부활』『아틀란티스의 유산』『사막의 반란』『우리 신화의 수수께끼』등 다수가 있다.
▣ Short Summary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구의 발견, 대구 때문에 벌어진 16세기와 20세기의 대구 전쟁,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집단 이주와 노예무역,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 그리고 국가 경제 발전에 물고기 한 종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던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 준다. 대구를 둘러싼 다양한 인간 군상의 치열한 생존 이야기와 더불어 다양하고 맛깔스러운 대구 요리법도 소개하고 있다.
▣ 차 례
1. 어느 물고기 이야기
환상적인 대구의 세계
대구는 어떻게 진화했는가
대구와 신대륙 발견
1620년 식민지에서는
노예 무역과 대구 산업
전 세계에 알려진 대구 전쟁
2. 한계
몇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
마지막 두 가지 아이디어
대구 덕분에 식민지를 벗어나다
세 차례의 대구 전쟁
3. 마지막 사냥꾼들
그랜드뱅크스를 위한 진혼곡
위태로운 바다의 자연 회복력
스페인 선단에 대항하여
캐나다 선단에 대항하여
환상적인 대구의 세계
소금에 절인 물고기는 그냥 말리는 물고기보다 좀 더 오래 보존된다. 또한 오래 갈수록 수출하기도
쉽다. 따라서 최초로 대구를 소금에 절인 바스크인은 국제적인 무역 시장을 형성할 수 있었다. 바닷
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 정도로 일조량이 풍부한 지중해에서 소금에 생선을 절이는 기법은 새로
운 아이디어는 아니다.
그러나 12세기 냉장고가 출현할 때까지 소금에 절인 대구는 하나의 기적과 같았다. 대구는 다른 절
임 생산보다 오래 보존 될 뿐만 아니라 맛도 더 좋다. 일단 말리거나 소금에 절인 뒤 물에 담가 적당
히 복원시키면 냉동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도 수많은 사람의 기호에 맞을 정도이다. 결국 싱싱한 물
고기를 거의 맛볼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값싼 고단백 영양식이었다.
한편 카톨릭 교회는 바스크인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교회는 성교(性交)와 고기 먹는 것을 금지
하는 금식일을 강조했으나 것찬겄 음식을 먹는 것은 허락했다. 물고기는 찬 물에서 잡기 때문에 뜨
거운 음식으로 간주되는 고기와는 별개였다. 따라서 금식일의 모든 금요일과 40일간의 사순절, 그
리고 종교 달력에 표시된 많은 다른 날들에 대구를 먹었다. 이는 거의 반년간 대구를 먹은 셈이므로
대구는 기독교의 규율을 지키는 신화적인 십자군이 된 것이다.
이 많은 대구를 어디서 잡는지 절대 말하지 않았으나 최근에 편지 한 통이 발견되었다. 편지의 당시
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공로로 큰 갈채를 받고 있었는데 브리스틀 상인들은
콜럼버스가 상인들이 이미 아메리카에 갔다 온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단언했다. 결국 아메리
카 대륙은 콜럼버스 이전에 대구를 잡는 바스크 상인들이 이미 발견했었으나 콜럼버스는 스페인을
위해 전혀 새로운 세계라고 계속 주장해왔던 것이다.
대구는 어떻게 진화했는가
대구는 지방질이 3%이고 18%이상이 단백질이며 대구를 말리면 고기의 80%가 수분으로 증발되기
때문에 80%이상이 단백질이 된다. 또한 대구는 버릴 것이 거의 없다. 심지어 머리 부분이 몸뚱이 보
다 맛있으며, 부레(공기를 넣었다 뺐다 해서 깊이를 조정하는)는 튀겨 먹거나, 정화제, 접착제로도
쓸 수 있다. 알은 날것이나 연기에 그을려 먹고, 암컷의 생식선, 수컷의 이리, 즉 정자를 먹는다. 위
장과 내장과 간도 모두 먹고, 간유도 비타민이 풍부해서 높이 평가받는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껍
질은 가죽으로 가공할 수 있으나 아이슬란드인은 불에 구워 버터와 함께 아이들에게 먹였으며 뼈는
시큼해진 우유 속에 넣어 부드럽게 만든 다음 먹었다. 그리고도 남는 기관이 있다면 이는 좋은 비료
인 것이다.
대구는 맛있을 뿐 아니라 쉽게 잡힌다. 얕은 물을 좋아해 위험을 무릅쓰고 약 55미터 이상 잠수하는
일이 드물어서 약 36.5미터 이하에서 흔히 발견된다. 또한 알을 낳기 위해서 해안선에 가까운 더 얕
은 물로 이동하여 따뜻한 산란 장소를 찾기 때문에 쉽게 잡을 수 있다.
대구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곳, 북아메리카 근해에서는 멕시코 만류가 래브라도 해류와 교차하
는 곳, 영국제도 스칸디나비아, 러시아 근해에서는 북극 해류와 만나는 곳에서 떼지어 사는 바다 생
물을 먹고산다. 일부 과학자들이 어부들이 대구를 발견하는 곳을 관찰함으로써 기상패턴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사실상 대구는 일관되게 난류와 한류의 가장자리를 쫓는다. 멕시코
만류가 북극의 그린란드 해류와 만나는 북아메리카 뱅크에 유럽의 그 어느 곳보다 더 많은 대구가
살고 있다. 이것이 바스크인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어부들에게 훨씬 더 좋은 뉴스는 102센티미터 짜리 대구 암컷이 3백만 개의 알을 낳을 수 있다는 사
실이다. 10인치 더 길면 9백만 개의 알을 낳을 수 있다. 대구는 20년 혹은 30년까지도 살 수 있지만,
다산(多産)을 결정하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크기이다.
대구와 신대륙 발견
포르투갈인도 역시 북아메리카를 탐험하며 해도(海圖)를 그리고 있었다. 1502년에 제작된 지도에
보면, 뉴펀들랜드가 것포르투갈 왕의 섬겄임이 나타나 있고, 1500년에 가스파르 레알(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에 도착했다고 주장하는 뱃사람)이라는 사람이 뉴펀들랜드에 와서 이곳을 테라 베르
데, 곧 그린랜드라고 명명했다.
한편 영국은 북아메리카가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대구는 아이슬란드에서도 많이 잡혔기
때문에 대구잡이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15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키가 달린 쌍돛대 케치(근
해용 종범선)들이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21개 섬으로 이루어진 화산군도, 아이슬란드와 영국 사
이에 있다)로 향했다. 이것은 당시 최고의 어선이었을 뿐만 아니라 20세기까지 아이슬란드인은 자
신들의 수역에 그만한 성능을 지닌 어선을 띄우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산 대구에 대한 권리를 둘러싸고 영국과 독일 한자 동맹 사이의 마찰이 점차 심
해져 갔다. 상대는 자체적으로 해군을 육성해온 한자동맹이었고 영국은 영국답지 않게 단기간 전투
를 벌인 뒤에 아이슬란드 어장에서 철수했다. 영국은 더 이상 아이슬란드가 필요하지 않았다. 뉴펀
들랜드 어장이 개발됨에 따라, 영국 서부 지방에서 주요 어항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북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소금이 부족해 절이지 않고 말리기만 한 월동용 물고기밖에 생산하지 못했
는데, 이것을 것스톡피시(stockfish)겄라고 불렀다. 이 말은 겨울철마다 물고기를 꼬리끼리 묶은 뒤
'장대(stock)'에 걸어 말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늘어나는 시장에 1년 내내 공급할 수 있는 대구를 생산하고 싶었고, 북유럽같이
서늘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금 절임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는 겄그린(green)것이라고 불렸는데 말린
물고기 보다 자연 상태에 가깝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소금을 아끼기 위해 영국인들은 소금에 약간 절인 후 말린 건대구를 고안했다.
이는 '록피시(rockfish)'라고 불리었다. 바위투성이의 해안에서 말렸기 때문이다. 록피시는 스톡피
시보다 더 사랑 받았고, 더 비싼 값에 팔렸다. 왕립 수산회사의 한 회계사가 1682년에 소금에 관한
책을 펴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국의 수산회사들은 몇 세기 동안 소금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1620년 식민지에서는
유럽인의 세계는 16세기가 경과하는 동안에 두 배로 확대되었다. 그 세계가 외견상 텅 빈 미지의 영
역으로 보이자 유럽인들은 열정적으로 탐색 작업에 나섰다. 영양가가 풍부한 가공한 대구를 식량
삼아, 일부는 금을 찾아 남아메리카로, 일부는 대구를 찾아 북아메리카로 갔다.
이 결과로 1621년 영국 청교도인들은 종교박해를 피해 북아메리카의 플리머스로 오게 되었는데 대
구를 통해 얻게 될 이익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오자마자 굶주려 죽어가고 있었다. 당시
열 척의 영국 배가 뉴잉글랜드 바다에서 수익을 올리며 대구를 잡고 있었고, 다음 해에는 37척의 배
가, 1624년에는 50척의 영국 어선이 고기잡이를 했다. 청교도인들이 눈앞에 대구를 두고도 굶어 죽
은 것은 아마 낚시 도구를 많이 가져오지도, 사용법도 잘 몰랐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곧 청교도인들은 어업기지를 건설하여 대구를 팔아 스페인산 소금을 수입하고, 1638년에는
토르투가(아이티 북방 먼바다의 섬)에서 소금을 싣고 와서 영국정부가 외교를 통해 해결할 수 없었
던 소금 문제를 무역을 통해 해결했다.
당시 대구가 얼마나 많았는지는 1629년 청교도인들의 고등 형사 법원에서 대구가 문장(紋章)으로
사용되었고, 1640년에 존 스미스가 6만 마리의 대구를 팔아 부자가 되어 유명해졌을 때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는 세계 시장에 30만 마리의 대구를 수출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뉴잉글랜드인은 독립적이고 부유하며 독점에 분개하는 장사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 농장 주인들이 보호받는 안정된 시장에서 번영하는 동안, 뉴잉글랜드인은 자유무역 자본
주의로 부유해지고 있었다. 18세기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이라는 자본주의에 의한
독창적인 저서에서, 뉴잉글랜드의 어업을 칭송했다. 스미스에게 어업은, 개인에게 자유로운 상업환
경을 제공해줄 경우에 경제가 얼마나 번영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였다.
노예 무역과 대구 산업
17세기 노동 집약적 작물 산업인 설탕 전략은 노예 노동으로 인건비를 줄이는 것이었다. 수확 때는
16시간 이상 일하는 강노동으로 소금과 단백질이 필요했다. 그러나 농장주들은 카리브 해의 작은
섬들로 운송되는 수십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따로 농작물을 재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사탕수수 재배공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며 더불어 카리브 해 지역에서는 식량이 거의 생산되지
않으므로 뉴잉글랜드에서 들여오는 염장(鹽藏) 대구가 최선이었다.
염장 대구는 상품으로 아주 까다롭기 때문에 서툴게 가른 물고기, 기후 조건이 나쁠 때 말린 물고
기, 소금기 많은 물고기 등 팔리지 않는 염장 대구는 서인도제도의 차지였다. 사실상 것서인도겄라
는 말은 소금에 절인 대구 중 가장 품질이 낮은 것의 상품명이었다.
뉴잉글랜드인은 상륙한 지 25년 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벌써 삼각무역을 하고 있었다. 가장 좋은 물
고기는 항상 스페인에 팔았고, 포도주와 과일, 철, 석탄 등을 수입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서인도제
도로 가서 가장 값싼 대구와 소량의 스페인 상품을 팔고, 설탕과 당밀, 담배, 목면, 소금 등을 사들
였다. 그 배는 지중해와 카리브 해산 상품을 싣고 보스턴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들은 정박할 때마다
돈을 벌어들였다.
다음 단계의 삼각무역으로는 아프리카 노예로부터 시작되었다. 1645년 세네갈 서쪽 해상에 있는 제
도에서 아프리카 노예를 사고 이들을 바르바도스에서 판 다음, 포도주와 설탕, 소금, 담배 등을 싣
고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뒤이어 소금에 절인 대구를 선적하기에 이르자 노예, 대구, 당밀이 상업적
으로 연결되었다. 오늘날까지 서아프리카에는 소금에 절인 대구와 것스톡피시겄 시장이 존재하고
있다.
전 세계에 알려진 대구 전쟁
1848년에 일어난 미국 독립 혁명은 놀랄 만큼 성공적인 혁명이었다. 혼란과 폭력 상태에 빠지지도
않았고, 독재로 흐르지도 않았다. 혁명을 지지한 이들은 상업적인 이해 관계가 달린 매사추세츠의
중산층 상인들이었다. 이 가운데 누구보다 영향력이 컸던 존 애덤스는 경제적인 체제로서 식민지주
의를 신용하지 않았다.
한편 18세기 전반 동안 영국인은 급성장하는 아메리카 식민지가 왕으로부터 벗어나려 하긴 하겠지
만 결국에는 대영제국 안에 그대로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영국 왕이 깨닫지 못한
것은 혁명 지도자 등이 근본적인 목표에 초점을 맞춘 실용주의자들이라는 점과 당밀과 대구와 차는
단순히 불화를 초래하는 성가신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영국은 얼마간 융통성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글로스터에는 세관원조차 없었으며 프랑스령인 서인
도제도와의 무역도 허용하였다. 그러나 식민지는 모국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영국도 이 사실을 알
고 있기 때문에 북아메리카의 독립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이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기 위
해 1733년 카리브 해의 영국 식민지 이외의 지역에서 사들인 당밀에 무거운 수입 관세를 부과하는
당밀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프랑스령 서인도제도로부터 당밀은 암거래되어서 오히려 대
구·당밀 무역은 더욱 활발해졌다.
결국 1760년에 영국은 모든 당밀에 세금을 부과하는 사탕법을 시도하였으나 식민지에서는 여전히
암거래로 버텨내고 있었다. 이에 자극 받은 영국은 그 다음해 인지조례를 제정해, 처음으로 식민지
인에 관세가 아닌 직접세를 부과했다. 둘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처음으로 글로스터에 파견된 세관원
은 습격을 받거나 몸을 숨겨야만 했다.
이후 영국은 손해를 본 상품을 왕실에 변상할 때까지 식민지 민중을 굶기려고 1774년에 보스턴 항
구를 폐쇄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식민지의 잉여 식료품이 너무 많이 생산되어 발생한 것이었는데,
마블헤드에서 대구가 공급되고 찰스턴에서 쌀이 공급되었으며, 볼티모어에서 밀이 공급되었다. 코
네티컷에서는 양떼를 몰고 오기까지 했다.
영국과 식민지와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3년이 지난 1778년에 파리에서 협상을 시작했다. 국경 문제
와 영국에 대한 채무 이행 문제, 어업이 주 문제였는데 그 중에서도 어업 문제가 가장 까다로웠다.
노예 제도가 영국령 서인도제도에서 1834년에, 프랑스령 앤틸리스 제도에서 1848년에,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제도에서는 1849년에 폐지됨으로써 북아메리카의 대구 어업은 대단히 큰 타격을 입었다. 2세기 동안 카리브 해의 노예 시장에 덤핑해 왔기 때문에 북아메리카산 대구는 질적인 조정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구의 수요가 가장 많은 시장은 언제나 지중해 지역이었다. 이 지중
해 연안 국가들은 19세기에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런데도 북아메리카인은 이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뉴펀들랜드와 래브라도, 노바스코샤는 거의 전적으로 생계를 고기잡이에 의
존하고 있었지만 질이 형편없어, 잡은 물고기의 대부분을 보스턴이나 카리브 해 지역에 팔았다.
서인도제도 시장이 쇠락함에 따라 뉴잉글랜드에서는 내수 시장이 성장했다. 소금에 절인 대구가 미
국 군대의 주식이 되었고, 글로스터는 남북 전쟁으로 큰돈을 벌어들였다.
7. 몇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
대구를 잡는 일은 경제적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다. 무엇보다도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북극
바람이 물보라를 얼려 버릴 때에도 북대서양으로 나갔다. 그럴 때에는 밧줄들이 약 30센티미터 두
께의 얼음 기둥으로 변하기도 한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이 얼음으로 무거워져 배가 불안정해지면
배가 전복하지 않도록 도끼로 얼음을 떼어내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손을 보호해 주는 합성 소
재가 있지만 최근까지 어부들은 니퍼, 곧 목면 안감을 댄 두꺼운 고무 장갑을 꼈다. 그것은 불편하
지만 만일 끼지 않으면 손가락이 30분 내에 자신도 모르게 얼어 버릴 수 있다.
대구잡이 어부들의 가장 큰 적 중 하나는, 특히 라디오가 발명되기 전의 안개였다. 대구 어장은 난
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걸핏하면 안개가 낀다. 2.4미터 짜리 배의 중앙부에서 배의 선두
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짙게 낄 때도 있다. 형체 없는 잿빛 안개 속에서 표류하는 어부들은
다른 배들이 듣고 충돌을 피하도록 뿔피리를 불거나 호각을 불었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것은 도리선 어부들이다. 17세기에서 1930년대까지 일반적으로 대구잡이에는
모선(母船)인 스쿠터와 두 명 혹은 한 명이 탈 수 있고 갑판이 없는 6미터 짜리 소형 보트인 도리선
이 사용되었다. 도리선 어부들은 서로 경쟁 관계에 있기 때문에 종종 자신들이 발견한 어장으로 몰
래 떠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많은 도리선 어부들이 안개 속에서 모선(母船)인 스쿠터를 찾아 망망대
해를 떠돌며 물에 빠져 죽거나 굶어 죽거나 갈증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그들은 배가 물고기로 가득
찰 때까지 고기를 잡으려 했다. 물고기를 많이 잡을수록 도리선은 점점 위험해져서 때로는 도리선
에 물고기를 너무 많이 실어 배 옆쪽으로 파도가 들이칠 경우, 물이 약간만 고여도 물고기와 어부들
이 그대로 가라앉기도 했다.
여러 나라들 가운데 맨 먼저 프랑스에서 어업을 현대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815년에 프랑스 새 정부는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황폐화된 어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도록 보조금을
주기로 결정했다. 존 애덤스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잘 훈련된 상비해군을 유지하는 것보다 훌륭한
선원을 기르는 원양 대구 선단에 보조금을 주는 것이 훨씬 싸게 먹혔다.
프랑스인은 뉴펀들랜드 대구잡이 어선에 저인망 라인이나 세트라인 혹은 불토우라고 불리기도 하
는 주낙을 장착했다. 그때까지 북대서양 전역에서 대구를 잡은 주요 기술은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손낚시였다. 프랑스 정부가 어부들에게 물고기 65마리 당 10프랑씩 엄청난 보조금을 주어 주낙 어
업을 장려했는데 이 낚싯줄 가운데 일부에는 10만개나 되는 낚싯바늘이 매달려 있었다. 이런 작업
은 몇 십 명의 어부와 다섯 척의 도리선 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19세기에 주낙에 대한 논란이 커져 갈 즈음에 환경보호주의보다는 내셔날리즘이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보조금이 제공되는 기술에서 파생되는 남획의 가능성보다는 프랑스가 보조금을 줌으로써 야
기되는 불공정한 경쟁 문제로 영국령 북아메리카, 즉 뒷날의 캐나다가 분노를 터뜨렸다.
어부들은 그물이 물고기를 차단해 다른 수역으로 옮겨가게 될까봐 그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또한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주낙에 반대한 주요 이유는 그것이 불공정하고 비민주적인 행위이기 때문이었
다. 주낙은 많은 양의 미끼를 사들일 수 있는 자본을 요구하기 때문에 미끼를 마련할 수 없는 사람
은 끼여들 틈이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장에 일하는 어부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이 모두 주낙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충분한 공간이 없어 항상 서로의 낚싯줄을 방해했을 것이다.
19세기에는 유행병처럼 자연이 지닌 불굴의 힘을 믿었다. 자연은 필연적으로 어떤 생명체의 문제든
다 해결할 수 있는 경이로운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1883년에 전 세계의 주요 어업 국가들이
대부분 참가한 가운데 국제 수산업 박람회가 런던에서 개최되었는데 겁남획의 경향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자연 스스로 공급이 감소되는 것을 점검할 것이다.겂라는 주장이 다수였다. 또한 1885년 캐
나다의 농수산부 장관은 캐나다 정부가 프랑스처럼 수산업에 지원해야 한다는 정치적 주장을 펴기
위해 겁영국 해안에서 해마다 엄청나게 물고기를 잡아 어획량이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영국의 어
장은 고갈의 징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겂라고 했다.
당시 세계 대구 시장에서 캐나다의 가장 큰 경쟁자인 노르웨이가 자망(刺網)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자망은 해저 약간 위에 고정되는 그물이다. 이것은 배드민턴 네트와 약간 비슷한데 해저에 사는 물
고기가 여기에 걸려들면 머리부터 빠져나가려 하다가 결국 자망에 목이 걸려 죄어진다. 어부들은
날마다 그물을 끌어올려 물고기를 떼어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종종 그물이 고정된 곳에서 이탈
하기도 해서 대양을 떠돌며 계속 물고기를 잡고, 마침내 너무 무거워지면 해저로 가라앉는다. 이로
인해 것유령 그물겄은 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떠돌아다니며 스스로 물고기를 잡을 수도 있다고 한
다.
8. 마지막 두 아이디어
19세기 중반에 증기 기관이 발명되고 나서 1백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대구 어업계에 범선의 시대
는 끝났다. 북아메리카 바다가 유럽인에게 개방되자, 대구 어업의 성격이 극적으로 변했다. 배가 엔
진 동력으로 움직이게 됨에 따라 해저 바로 위에 펼쳐진 그물을 끌어당기기 때문에, 뉴잉글랜드인
이 것저인망 어선겄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가 되었다.
일단 범선과 노선이 동력선으로 대치되자, 어업의 규모가 거의 무한대로 확대될 수 있었다. 트롤망
을 갖춘 증기선은 범선보다 6배 이상의 어획고를 기록하고 있었다. 1890년대 이르러 북해의 어자원
이 이미 고갈의 징후를 보이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반응은 환경보호가 아니라 더 멀리 풍부한 어장
을 찾아 아이슬란드 근해로 향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예상 밖으로 대구 시장의 황폐화였다. 엄청난
양의 물고기가 정기적으로 뭍으로 운반됨에 따라 생선값이 폭락한 것이다. 대구의 과다 공급은 경
쟁자끼리 먼저 시장에 내놓으려고 가공의 질을 떨어뜨린 것이다.
대구의 양이 증가하자 가장 큰 문제는 생선을 신선한 상태로 시장에 공급하는 것이었다. 네덜란드
에서는 일찍이 16세기부터 구멍을 통해 바닷물이 순환되는 수밀(水密) 어창, 즉 것활어조(活魚槽)
겄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17세기에 영국 조선업자들이 활어조를 배에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물
고기가 가득 들어차거나 철렁거리거나 산소가 부족하면 활어조의 치사율이 올라간다. 그래서 심해
에서 잡힌 대구나 링 혹은 다른 대구과 물고기들은 활어조에서 생존할 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증기 기관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영국인은 산소량이 유지되도록 펌프로 물을 퍼
올리는 활어조로 실험을 했다. 그리고 증기 기관으로 철도가 생겨, 뭍으로 운반된 물고기를 내륙 시
장으로 빨리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의 항구들은 철도가 서는 주요 지점이 되었다.
이즈음 클라렌스 버즈아이라는 바닷물에 양배추를 넣은 뒤 북극 바람을 쐬어서 겨울 내내 싱싱한
야채를 먹는 법을 발견했다. 이후 연구를 계속한 결과 선풍기와 얼음, 소금물만 있으면 생선을 싱싱
하게 보관할 수 있음을 알아내어 1925년에는 것제너럴 해산 식품회사겄를 설립했다. 대구 어업이
중대한 기로에 서 있을 때 버즈아이의 냉동 기술이 도입되어 소금에 절인 가공 처리된 대구는 시장이 계속 축소되고 있었다.
또한 1921년에는 뉴잉글랜드에 생선을 가시 없이 저며내는 기계가 도입되었고, 9년 뒤에는 그 기계
가 설치된 128개의 공장이 가동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오는 찌꺼기를 사들여 어분(魚粉)을 만
드는 공장도 역시 늘어나고 있었다. 일단 냉동 기술과 생선 저미는 기술이 결합하게 되자, 것가시를 발라낸 물고기겄가 주요 제품이 되었다.
냉동 기술은 또한 해산 식품회사와 어항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냉동 생선은 어디에서나 살 수 있었
고 물고기는 어디에서나 가장 값싸고 흔한 식품이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세 가지의 기술 혁
신, 고성능 선박과 예인망과 냉동 기술이 결합되어 탄생한 거대한 것공선(工船)겄 덕이었다.
그러나 어부들은 서서히 걱정하기 시작했고 1949년에 북서 대서양 어업을 위한 국제위원회가 구성
되어 과도한 어획 행위를 규제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기술은 더 많은 어획량을 요구하여 길
이가 137미터 이상이며, 수용 능력이 4천 톤 이상, 6천 마력 이상의 디젤 엔진 한 쌍으로 움직이는
것공선겄이 점보 제트기도 삼킬 수 있을 만큼 넓게 펼쳐진 저인망을 끌어당겼다. 트롤러가 하루 24
시간 내내 움직이며 4시간에 한 번씩 거대한 그물을 끌어올렸다.
이렇게 그물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면, 해저는 사막으로 변한다. 헤엄치는 물고기는 어느 것이고
다 이 거대한 그물에 잡히며 오직 그물코보다 작은 물고기만 도망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부들
은 말한다. 일단 대구가 그물의 뒷벽 구실을 하면 그물코가 아무리 커도 어떤 물고기도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수세기 동안 해왔듯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바닥층의 색깔이나 바다새들이 모
여있는 곳을 살피는 게 아니라 적의 잠수함을 찾기 위한 수중 음파탐지기나 정찰기가 물고기떼를
찾고 있다. 일단 레이더에 포착된 지역에서는 물고기뿐만 아니라 그 부산물까지 잡아 올려 그 지역
을 깨끗이 청소할 수 있다.
9. 세 차례의 대구 전쟁
유럽측 북대서양의 어자원은 2차 세계대전이 계속된 6년 동안 물고기를 거의 잡지 않아 그 이후와
는 전혀 다른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1944년에 아이슬란드가 독립해 새 국가를 세우자, 영해를 3마일
로 한정시킨 1901년의 영국과 덴마크의 협정이 무효가 되었다. 550년 동안 방치된 채 식민지 지배를
받아온 아이슬란드인은 그들의 유일한 자연 자원인 대구 어장을 잘 관리해서 그것을 통해 현대 사
회를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국가 건설을 위한 중요한 조치는 1950년 4월에 취해졌다. 아이슬
란드는 옛 조약을 폐기하고 영해를 해안선에서 4마일로 확대시켰다. 지금 기준에 비추어 보면 소박
한 주장이지만, 바다는 만인의 것이라는 개념이 국제법의 원리로 널리 주장되던 1950년만 해도 이
는 대담한 조치였다.
1945년에 근해의 석유 생산을 보호하고자 한 미국의 의도로 국제법의 새로운 개념이 나타나게 되었
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이 대륙붕의 광물 자원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때까지 어느 나라도 대륙붕을 소유한 적이 없었다. 대구와 대부분의 다른 상용 불고기는 주로 대
륙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대륙붕은 어업과 아주 큰 관련이 있었다.
1971년 3월, 아이슬란드는 1972년 9월 1일부로 영해를 50마일로 확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유
럽 경제 공동체의 파트너인 영국과 서독이 이에 격렬하게 항의하고, 국제법을 위반했다며 이 문제
를 중재해 달라고 국제 사법 재판소에 요청했다. 국제 사법 재판소의 판결이 내리기도 전에 대구 전
쟁이 커졌다가 그 문제가 해결되기에 이르렀다.
이유는 1958년부터 아이슬란드 기술자들이 것트롤망 와이어 절단기겄를 연안 경비대 함정에 모두
장착했기 때문이다. 이에 5천 달러 짜리 그물이 망가지고, 그 안에 잡힌 물고기들은 모두 사라졌다.
1년 간의 전투기간 동안, 84척의 트롤선 - 69척의 영국 배와 15척의 독일 배 - 이 그물을 잃었다. 트
롤선들은 그물을 보호하기 위해 짝을 지어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는데 어획량은 평소의 절반으로 줄
었다. 또한 거친 바다에서 바싹 뒤따르다가 여러 척의 트롤선이 충돌하기도 했다.
영국과는 달리 아이슬란드는 전(全) 경제가 어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어업은 그 나라 국민을 중세의
빈곤 상태에서 지금의 풍요로운 상태로 끌어올리는 기적을 일으켰다. 역사적으로 양국은 서로 호의
를 느끼고 밀접한 동맹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아이슬란드는 자신들의 유일한 자원을 양보할 의사
가 없었다. 나토가 대구 전쟁 중반기에 이러한 회원국 사이의 갈등을 우려해 영국이 한발 물러서도
록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영국이 50마일의 영해를 인정하고, 그 대신 작은 영국 트롤선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타협했다.
50마일 영해에도 불구하고 1974년에 아이슬란드 대구 자원이 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아이슬란드 영
해에서 잡힌 물고기 가운데 큰 대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것은 어자원 재
생산 능력이 감소된 것이다. 1975년 아이슬란드는 대구 자원이 줄어들어 보호를 위한 이유로 영해
를 다시 2백 마일로 확대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자국 바다에 1백 마일의 배타적인 지구를 설정하겠
다고 고집했다. 1976년 유럽 경제 공동체가 공개적으로 영국의 요구를 거부하고 2백 마일 영해를 설
정해 아이슬란드와 한창 협상 중인 영국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1976년에 아이슬란드가 2백 마일 영해를 인정받은 뒤, 대부분의 국가는 2백 마일 영해를 선언했다.
전 세계에서 유명한 어장 중 약 90%가 적어도 한 국가의 해안에서 2백 마일 이내에 있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 정부는 영해의 넓이뿐만 아니라 자국 선단의 어획량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1년에 소금에 절인 대구를 2천 톤까지 가공했으나 최근에는 단지 3백 톤 내지 45백 톤을 가
공할 뿐이다. 더 높은 가격, 더 적은 물고기와 어부, 이것이 아이슬란드 어업의 새로운 비결이었다.
어업 부문이 아이슬란드 경제를 움직이고 있지만, 정부는 이미 어부의 숫자를 노동 인구의 5% 정도
로 줄이고 있었다.
10. 그랜드뱅크스를 위한 진혼곡
불가피하게도 아이슬란드와 뉴펀들랜드는 서로 비교된다. 뉴펀들랜드에는 아이슬란드의 2배에 가
까운 50만 명이 살고 있지만, 두 곳 모두 북대서양의 섬이고 크기도 비슷하다. 땅이 척박하여 경제
는 전적으로 대구 어업에 의존하였으며, 연안에서 작은 보트를 타고 일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
후까지 저개발 식민지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아이슬란드는 독립 공화국이 되기 위해 덴
마크와 관계를 단절했고 뉴펀들랜드는 영국과의 관계를 끊고 캐나다의 주가 되었다.
1977년 2백 마일 영해가 설정되자, 캐나다 정부는 이를 계기로 뉴펀들랜드인이 어업으로 생존해 나
갈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조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경계선 문
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타격을 받았다. 이들은 5백 년 동안 이 어장에서
일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스페인은 일인당 물고기 소비량이 서방 세계에서 가장 높지만 스페인 해
안선의 2백 마일 안에는 훌륭한 어장이 거의 없다. 어느 유럽 공동체 국가보다 큰 어선단을 보유한
스페인은 유럽 공동체에 의해 매년 그 할당량이 감소되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캐나다와 미국 그리고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2백 마일 영해를 환경보호 조치로 보지 않고, 자국의
어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보았다. 캐나다 전역에서 근해 어업이 새롭게 번영하는 동안, 연안 어
부들은 어획량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 원인이 근해의 저인망선이 물고기들이 알
을 낳기 위해 해변으로 이동할 수 없을 만큼 대구를 많이 잡는 데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연안 어부
들이 관리 기관에 호소했으나 정부는 연안 어업이 아니라 근해 어업에 투자를 했기 때문에 그것이
성공을 거두도록 하는 데 정치적 우선 순위를 두어야 했다. 연안 어자원이 줄어들자 연안 어부들과
어부조합, 트롤선 노동자, 해산 식품회사, 정부의 논쟁이 격렬해졌다.
결국 1994년 1월, 일시적 금지령이 발표됐다. 노바스코샤 남서부를 제외한 캐나다의 대서양 대구 어
장을 모두 폐쇄하기로 한 것이다. 그 옛날 캐보트의 선원들이 양동이로 대구를 퍼 올렸다고 전한 지
5백 년이 지나지 않아 어부들이 그 많던 물고기를 모두 잡은 것이다.
11. 위태로운 바다의 자연 회복력
격감된 대구 자원이 다른 나라에서 당당히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이 낙관론을 고무시켰다. 1989년에 노르웨이 정부는 대구 자원이 줄어든 것을 깨닫고 어업을 제한했다. 실업률이 23%에 이르
렀으나 어자원이 아직 상업성이 있을 때, 알을 낳을 수 있는 큰 물고기들이 남아 있을 때 이런 조치
를 취했기 때문에 대구 어군이 안정되었고, 몇 년 뒤부터는 그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노르웨이의 어업이 위기에 처하자 정부는 막대한 돈을 들여 양어장을 만들었다. 비용이 많이 들었
지만 야생 새끼들을 양어장으로 옮겨 크고 두꺼워질 때까지 키우는 데 성공했다. 대구는 잘 훈련되
어 먹이를 줄 때 모여들기도 하고, 질병에도 강하고, 떼지어 사는 군집성이 있어서 양어장에 적격이
었다. 또한 산 채로 시장에 내놓을 수도 있다. 양식장에서 자란 대구는 1년 안에 두 배로 성장하지
만, 인공으로 부화된 대구는 네 배로 성장할 수 있다. 크기가 다산(多産)을 결정하기 때문에, 양식장
에서 길러 바다에 풀어놓으면 대구 자원이 다시 회복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질병에 대한 저항력도 없고 약탈자를 피할 줄도 모르며, 사냥 기술이나 먹이 찾는 기술도 부
족하고, 알을 낳기 위해 해안으로 이동해야 하는 시기, 물의 온도 변화 탐지 능력을 상실한 대구는
야생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런 결함을 지닌 물고기가 번성하고 어쩌면 주류를 형성할지도 모를 일이다.
한 종(種)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 가운데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어떻게 그 다양성, 즉 종이 세상을 살
아가며 생명을 위협하는 많은 것들에 적응할 수 있게 해주는 넓은 범위의 유전 형질을 유지할 것인
가 하는 것이다. 확인할 길이 없는 과학자들로서는 오직 격감되어 얼마 남지 않은 '노던 스톡'들
이 한 때 수백만 마리의 유전자 웅덩이에 나타났던 넓은 범위의 특징들을 완전히 그대로 지니고 있
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남획은 점차 세계적인 문제가 되어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의해 확인된 물고기 종의 약 60%가
완전히 고갈되거나, 지나치게 개발된 것으로 분류되었다. 현재 전 세계 어장의 90%가 2백 해리 어
장으로 폐쇄되어 있어, 어부들은 새로운 종을 발견하기 위해 수심이 더 깊은 곳을 뒤지고 있다.
인간은 자연과 진화를 인간의 행위와 별개의 것으로 보고 싶어한다. 저기에 자연 세계가 있고, 여기
에 인간이 있다. 그러나 인간 역시 자연 세계에 속해 있다. 만약 그가 사나운 약탈자라면, 그것 또한
진화의 일부분이다. 인간이 죽여 대구와 다른 종들이 생존할 수 없다면,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어떤
것이 그것들을 대신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실용주의자인 자연은 끈질기게 적응할 수 있는 종을 찾
고 있다. 그러나 바퀴벌레가 증명하듯이, 자연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들은 언제나 우리의 흥미를 끌
지 못한다.
12. 캐나다 선단에 대항하여
각국 정부는 어부와 어항이 사회적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고, 어자원을 축적하기 위해 프로그
램을 만들어 선단의 규모를 줄이면서 보조금을 주고 있다. 전직 어부들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가 별
로 없기 때문이었다. 선진국 가운데 아이슬란드만이 어업이 경제에 크게 공헌하리라 기대하고 있는
데, 그 나라조차 어부들의 숫자를 줄이려 하고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가 198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어선이 움직이는 데 920억
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한편 총소득은 7백 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차액의 상당 부분은 어부
와 조선업자들에게 제공되는 정부 보조금으로 메워졌다. 한편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1990년
대 초에 이르러 유럽 연합의 12개국은 어업 보조금으로 연간 약 5억 8천만 달러를 썼고, 노르웨이만
이 약 1억 5천만 달러를 지출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곤경에 처한 수산업에 신용(信用)으로 190억 달러를 제공했다고 한다. 물론 그 대부금의 상당 부분은 결코 회수되지 않을 것이다.
글로스터 항구에서 몇 마일 떨어진 바위투성이의 뉴잉글랜드 해안선을 따라 여행자들이 '고래구
경'을 하러 나가기로 계획을 잡아 놓고 있다. 한때 고래를 사냥해 많은 돈을 벌었던 이 울퉁불퉁한
해안에서, 관광시즌 동안 고래 관람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고래를 구경시키는 배의 선장들은 대개
실직한 어부들이다.
고래를 사냥하는 사회의 생활과 그것을 구경하는 사회의 생활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수백만 개
의 알을 낳는 물고기는 새끼를 놓는 포유동물인 고래보다 멸종되기가 더 어렵다. 그러나 1천년 동안
대서양산 대구를 사냥한 결과, 우리는 포유동물보다 멸종시키기 더 어려운 물고기인 대구를 멸종시
켰고 자연은 오락과 교육을 위한 전시장으로 전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