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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 5온이 본래 실체가 없음을 여실히 아시고, 중생의 모든 고통과 액난을 벗어났느니라-
반야심경은 260자에 불과하지만 불교사상의 진수(眞髓)를 담고 있기 때문에 각종 불교행사 및 법회 시에 널리 봉독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이, 이 경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고, 전체 내용을 함축하고 있으므로, 오늘 법회에서는 이 말의 뜻을 심도 있게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1. 조견(照見)
조견이란 ‘비추어 본다’는 뜻입니다. 희미하게 알 듯, 모를 듯 아는 것이 아니라 대낮의 햇살아래 방안의 먼지 알갱이들까지 드러나 보이듯 확연히 깨달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조견이란 근본까지 꿰뚫어 안 것을 말합니다. 그 깨달음의 내용이 5온개공(五蘊皆空)입니다.
2. 5온(五蘊)
불교에서는 일체의 만법을 5온(五蘊), 또는 5음(五陰, 5취(五聚)라고 하는 데, 구체적으로 색온ㆍ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을 말합니다. 온(蘊)이란 ‘싸 모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인데, 같은 종류의 법이 서로 화합되어 모여 있기 때문에 이르는 말입니다.
이 5온의 분류법은 12처설ㆍ18계설 등과 더불어 인생을 주로 하여 일체의 만법을 이에 모두 섭입(攝入)하여 분류한 것인데, 특히 심(心)과 심소(心所)에 중점을 둔 것입니다.
(1) 색(色, 물질, 사물, 육체)
색온이란 우리의 육체까지도 포함한 모든 물질적인 것을 총칭하는 말로서.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6경(색ㆍ성ㆍ향ㆍ미ㆍ촉 법)을 총괄해서 가리키는 객관세계 그 자체를 뜻합니다.
(2) 수(受, 감수작용, 감각인식)
수라는 것은 6근(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을 통하여 느끼고 받아들이는 고수(苦受: 불쾌감)ㆍ락수(樂受: 쾌감)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쾌감도 불쾌감도 아닌 감정) 등의 감수작용을 말하는 것이니, 수온이라 할 때에는 이러한 모든 감수작용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지금 향기로운 꽃 한송이가 당신 앞에 있습니다. 그 꽃을 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만져보기도 한다면 당신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정한 느낌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렇게 5관을 통한 감수작용, 느낌을 수라 합니다.
(3) 상(想, 표상작용, 지각)
상이란 위의 감각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상념의 작용을 말함이니, 상온이란 이러한 것의 총칭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에는 그것을 바로 인식하기 전에 그것을 마음속에서 먼저 인식하기 마련인데, 이를 상(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외부에 있는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느낌을 받고, 대게는 그 느낌의 좋고 나쁨에 따라 좌우됩니다. 그런데 이 수라는 것은 한번 받아들이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뇌에 저축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대개 스스로 잊어버렸다고 생각하고 하지만 사실은 머리 깊숙이 저장되고 있습니다. 마치 강의나 대화를 녹음하면 필요할 때마다 그때 그 소리를 생생하게 다시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저장된 기억이 불쑥불쑥 솟아나오는 것은 모두 표상작용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4) 행(行, 의지작용, 인식의 능동작용)
표상작용이 일어나면 이때부터 나라는 인간, 나라는 고집이 스며들고 이해관계와 연관되면서 일정한 가치판단이 내려지게 됩니다. 멋진 시계를 보면 가지고 싶다는 마음,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은 마음 등은 자신의 이해와 결부되어 있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싫고 좋음, 소유하고자 하거나 배척하려는 어떤 의지가 일어나는 것을 행이라 합니다. 인식의 능동작용이 행입니다.
행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그 일어난 생각 때문에 입으로 말을 하거나 몸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그래서 5온 가운데 업(業)의 근원이 되는 것은 바로 행입니다. 행은 업을 짓기도 하지만 동시에 업보를 소멸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행의 근원인 이해관계를 떠나면 과보를 짓지 않습니다. 어떠한 행동이리라도 이해에 걸림이 없으면 업이 되지 않는다는 이치는 그 때문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업으로 방향을 바꿔 봅시다. 인생살이에서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업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업에는 업보(業報) 업력(業力) 업장(業藏)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업보란 어떤 행위로 인해 받게 되는 과보이며,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 업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업보는 업력에 의해 나타납니다. 업의 힘이 강하게 끌어당기는 이유는 숱하게 쌓아온 업의 모임, 업장에서 나타나고, 업장은 다시 그 근본인 행의 쌓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애연가들이 담배를 끊지 못한 채 습관에 끄달리는 것 또한 업 때문입니다. 담배를 한 대 두 대 피우던 행위가 쌓여 업장이 됩니다. 이로 인해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 업력이 일어나고 그에 끄달려 다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업보입니다. 이것이 계속되면 폐암 등, 각종 질병을 불러 일으켜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업은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데, 이를 신구의(身口意) 3업이라 합니다.
첫째, 몸으로 짓는 업에는 살생, 투도, 사음의 3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이 다른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축적된 업입니다. 인간은 먹고 살기위해서 다른 생명을 죽이는 업연을 지어왔습니다. 살생도 습관입니다.
폭력을 일삼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주먹질이 앞서고, 총칼을 많이 다루다 보면 그 또한 습관이 되어 버립니다. 자신이 자각하지도 못하는 새, 다른 생명을 보면 저도 모르게 죽이려고 하는 것은 다 살생업에서 오는 것입니다.
도둑질이나 남의 물건을 탐하는 일도 몸으로 지어온 습이고, 사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말로 짓는 업에는 거짓말, 꾸밈말, 두 가지 말, 거칠고 상스런 말 등, 4가지가 있습니다. 욕이 습관화 되면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입에서 욕이 뛰어 나옵니다.
셋째, 생각으로 짓는 업에는 탐심과 성내는 마음인 진심, 어리석음의 치심이 있습니다. 간단히 이야기 하면 탐심이란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어서 일어나는 만족한 마음,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이고, 진심이란 그와 반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일어나는 노여움, 괴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탐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의 이치란 알고 보면 이런 것입니다. 이처럼 탐심과 치심으로 눈멀게 하는 근본원인은 어리석음, 치심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5) 식(識)
앞의 것처럼 감각기관을 의지하지 않고 다만 그들이 인식한 것에 대해 비교ㆍ추리ㆍ추억 등의 작용을 식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우리가 어떤 소리를 들었다면 듣는 것만은 이식(耳識)이지만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인가? 남자의 소리인가? 여자의 소리인가? 등을 경험에 의해 분별ㆍ인식하는 것을 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5온의 분류법은 12처설ㆍ18계설 등과 더불어 인생을 주로 하여 일체의 만법을 이에 모두 섭입(攝入)하여 분류한 것인데, 특히 심(心)과 심소(心所)에 중점을 둔 것입니다.
위의 5온설이 우리의 심법(心法)에 중점을 둔 만법의 분류법임에 대하여, 12처설은 색법(色法)에 중점을 둔 분류법입니다. 이 12처(處)를 12입(入)이라고도 하는데, 12처라 하는 것은 6근과 6근에 대경(對境)이 되는 6경을 합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적활동을 일으키는 우주 인생의 만법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크게 나누어 분류한다면 주관적인 요소는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의 6근을 벗어날 수가 없고, 객관적인 요소는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의 6경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눈이 모양을 대하고, 귀가 소리를 대하고, 내 마음이 대상을 대하며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18계설이란 위의 12처설에 심법(心法)을 추가하여 색ㆍ심 양면을 다 포함하여 일체만유를 구분한 분류법입니다. 계(界)하는 말은 종족(種族)의 뜻과 본생(本生)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먼저 종족의 뜻은 18계의 제법이 그 자성에 있어서 각각 다르다고 하는 것이요, 다음 본생의 뜻은 이들은 곧 모든 심적 활동을 일으키는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18계란 곧 위에 말한 12처에 인식작용의 주체인 6식(六識)을 포함한 것으로, 곧 안근(眼根) 내지 의근(意根)의 6근(六根)과, 색경(色境) 내지 법경(法境)의 6경(六境), 안식(眼識) 내지 의식(意識)의 6식(六識)을 합한 18가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감각기관인 6근이 그 대상 경계인 6경을 대함으로써 일어나게 되는데, 그렇다면 6근이 6경을 대할 때 ‘이것은 이렇다, 저것은 저렇다’하는 등의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데, 그 주체가 6식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감각기관인 6근과 그의 대상인 6경과 인식주체인 6식과의 세 가지가 합쳐졌을 때에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결코 우리의 심적 활동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6근과 6경은 다른 것이 자명하지만 6식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6식이란 별개의 체(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일심(一心)이 6근을 통하여 그 대상 경계인 6경을 대하여 심적 작용을 일으킬 때, 즉 우리의 일심이 안근을 통하여 색경을 대함으로써 심적작용을 일으키면 안식이 되고, 이근을 통하여 성경을 대함으로써 심적 작용을 일으키면 이식이 되고, 이렇게 하여 6식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3. 5온개공(五蘊皆空)
부처님은 5온이 공하다(五蘊皆空)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부처님은 5온이 공(空)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5온(12처ㆍ18계 포함)은, 그 어느 것도 항상하는 것이 없고, 끊임없이 변해가기 때문입니다. 인식기관을 통한 느낌(受)도 항상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 좋던 것이 다른 때에는 싫어집니다. 상(想, 표상작용)이나 행(行, 의지적 행동)도 식(識, 분별작용)도 죽 끓듯이 변하므로 믿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5온개공(五蘊皆空)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공(空)이란 범어 슈냐(Sunya)의 음역으로, 결코 어떤 물건이 있다가 없어진 상태나, 텅 빈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일체법(모든 존재)은 인연생기(因緣生起)하는 것이므로, 시간적으로 무상하고 공간적으로 무아(無我)여서 결코 변치않는 영원의 고정된 실체나 자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기는 곧 공(空)인 동시에 현상계의 유(有)이며 이것이 또한 중도(中道)이기도 한 것입니다.
인간은 변화 속에 살면서도 변하지 않는 그 어떤 것을 인정하려 하고, 그것을 찾아 수많은 노력을 해 왔습니다. 유한한 인생을 한탄하고 영원한 행복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았고, 도교에서는 신선이 되고자 했고, 기독교인은 영생하는 천국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 속도가 아무리 느려도 0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변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시간의 개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개념 속에서 불변하고자 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부처님은 우리의 번뇌는 존재가 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변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데서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자! 이제 모든 존재가 변한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경주 남산이나 토함산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인 듯 하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풍상을 거듭하면 산은 허물어지게 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맥이 히말리아 산맥인데, 예전에는 바다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바다가 산으로, 산이 바다로 변화해 왔고, 또 앞으로도 변화해 갈 것입니다. 지금도 알프스 정상을 오르면 조개껍데기와 같은 수백만 년 전의 바다생물의 화석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구의 연령이 45억년이라고 하는데, 수십억 년의 세월 속에서 수백, 수천 번의 변화가 거듭되어 온 셈입니다. 이러한 변화란 몇 백, 몇 천만년에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인간의 평균수명과 비교해 보면 마치 고정불변인 것처럼 보이지만 지구의 입장에서는 수시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시각을 돌려 우리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를 살펴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육안으롷 보이지 않을 뿐 세포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어 갑니다. 외관만 보면 한편의 세포가 죽는다 해서 내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른 한 편의 세포가 생성된다 해서 내가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세포의 부단한 생멸의 과정 속에 인간의 성장과 노화가 진행되어 갈 뿐입니다.
재미있는 비유가 있습니다. 목욕탕에서 사워를 할 때, 누구나 상쾌한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피부의 바깥표면에 숨어있던 세균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아마도 샤워기의 물줄기가 노아의 홍수처럼 여겨질지 모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한여름의 무더위로 온 몸이 달아올라 땀이 비 오듯 솟을 때가 있습니다. 땀이란 몸속의 노폐물이 열과 함께 몸 바깥으로 방출되는 현상이지만 노폐물에 있던 세균들에겐 어떨까요? 이번엔 지진이나 화산폭발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구표면에서 일어나는 홍수나 화산폭발 등의 재해란 것도 인간의 입장에서 두려운 일일 뿐입니다. 지구 차원에선 마치 때를 벗겨내듯 잠시 움쩍거린 기지개와도 같은 신진대사의 한 작용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항상 자기중심적, 혹은 인간중심적인 테두리에 젖은 관념으로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아상(我相)ㆍ인상(人相) 타파가 강조되는 까닭도 이 때문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보면 지상에선 비가와도 구름위에 찬란한 햇살과 뭉개구름이 노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의 생각이란 구름 밑의 좁고 어두운 생각일 뿐입니다. 이는 마치 신체에 기생하는 세균들의 소견인양 지구상에서 인간 또한 자기본위의 좁은 소견과 무지에 빠져 불변하는 것이 있다고 믿는 셈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크기와 무게에 관계없이 다 변합니다. 개인이 생과 사를 거치는 중에도 사회는 변화하고 발전해 갑니다. 사람이 태어나 죽고, 한 사회의 흥망이 거듭되는 속에 인류 전체의 역사는 앞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또한 인류의 역사는 끝이 있다 해도 우리의 지구는 계속 변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 또한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45억 년의 지구 나이는 우주의 역사와 비교하면 아주 보잘 것 없습니다. 또한 우주적 관점에서는 이러한 태양의 생성꽈 소멸도 수없이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므로, 지구의 생성과 소멸은 의미조차 가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고정불변의 관점에서 보면 중세시대에 천동설(天動說)이 신봉되듯, 그릇된 관념에 빠지기 쉽습니다. 중국에선 예부터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를 중화(中華)라 해서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인도나 이스라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이 세계의 전부인 줄 알지만, 우물 밖으로 나오면 넓고 넓은 세계의 진면목에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지식이나 교리를 통한 설명으로는 깨닫기 어려운 법입니다. 스스로 우물 밖으로 차고 나올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이 세계는 끊임없이 변해 갑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세계의 변화를 감지 못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즉 매우 빠르게 변하는 경우와 매우 느리게 변하는 경우입니다.
뜰 앞의 라일락, 목련꽃을 보면, 꽃봉오리가 맺혔는가 하면 어느새 활짝 피어 있고, 또 어느새 시들어 꽃잎이 흩날립니다. 육안으로 늘 지켜보아도 크는 소리나 피는 모양을 포착할 수 없습니다. 성장 속도가 매우 느린 탓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VTR로 1000분의 1초의 순간포착이 가능해진 탓에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식물의 움직임도 식별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대보름날의 쥐불놀이 광경은 아름답습니다. 캄캄한 밤하늘을 향해 불씨를 담은 통을 힘차게 돌리다 보면 불꽃은 보이지 않고, 어느새 동그란 원만이 빙글빙글 도는 듯이 보입니다. 이처럼 너무 빠른 속도로 움직여도 그 변화를 느끼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결국 변화를 느낀다는 것은 우리들 육체의 일정한 한계범위에서의 일입니다. 이 범위를 벗어나면 거의 감지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빛깔은 ‘빨주노파남보라’의 일곱 가지만은 아니나, 우리의 육안으로 감지할 수 있는 파장이 빨강에서 보라까지라고 합니다. 빛의 파장이 너무 길거나 반대로 짧은 경우, 가령 적외선이나 자외선은 엄연히 존재하지만 육안으로 식별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짧은 순간일 지라도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느낄 수 없는 순간적 변화를 찰나무상(刹那無常)이라 합니다. 아무리 거대한 크기의 태양일지라도 매 초단위, 혹은 일만분의 1초 동안에도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찰나무상을 올바로 터득해야 상견(常見)ㆍ단견(斷見)으로 치우치지 않게 됩니다. 얼음을 보고 항상하리란 상견, 얼음이 녹아 물이 되면 얼음이 사라졌다고 보는 단견은 변화를 모르는 생멸관일 따름입니다.
반면 작은 변화들이 일정기간 쌓인 후, 그 형태가 변하는 한차례의 크나큰 벼화를 일기무상(一幾無常)이라 합니다. 지구환경의 파괴, 지각변동, 사회의 대변혁 등이 이에 속합니다.
이 세계의 제 현상을 무상의 관점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물질세계 우주는 성(成)ㆍ주(住)ㆍ괴(塊)ㆍ공(空)하고, 생명계 육신은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를 겪으며, 인간의 정신현상 의식은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합니다.
4. 도 일체고액(度一切苦厄)
도 일체고액이란 ‘일체의 모든 고통과 액난을 벗어났느니라.”’라는 뜻입니다. 도(度)란 바라밀을 의미합니다. 곧 도피안(到彼岸)을 뜻합니다. 피안의 반대말은 차안(此岸)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고통의 세계이며, 피안은 일체 고통이 없는 파라다이스입니다.
일체고액에 대해서 경전에서는 4고(四苦)와 8고(八苦)를 들고 있습니다. 육신에 따르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가 4고이고, 여기에 정신적인 고통 4가지를 더해 8고가 되는 것입니다.
첫째, 애별이고(愛別離苦)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 연인과 헤어지는 것,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친구 간에 이별이 있고,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같이 일하지 못하는 고통도 여기에 속합니다.
둘째가 원증회고(怨憎會苦)입니다. 미운 사람과 같이 일해야 하는 것, 보기싫은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애별리고보다 원증회고가 사람의 피를 바짝바짝 마르게 하고 더 고통스럽습니다. 고부간에 갈등을 안고도 같이 사는 경우, 원수처럼 서로 으르렁대는 부부간에도 헤어지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바로 이런 고통 속에 가슴을 태우는 것들입니다.
서로 미워하는 사람과 얼굴을 맞대며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겪어보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구불득고(求不得苦)입니다. 얻고자 하는 것이 잘 안 얻어질 때의 고통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얻고자 하는 것아 있습니다. 요즘 무주택 서민들의 꿈은 한결같이 내집 마련입니다. 철마다 오르는 전세값 대느라 돈 얻으러 다니는 일도 뜻대로 안되기 일쑤고, 돈을 못 구해 싼 방을 구하려 해도 터무니없이 치솟은 방값 앞에 억장이 무너지는 이들에겐 집이라도 한 채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더욱 큰 괴로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입자들 중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 자살까지 하는 사태가 속출하는 형편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지나치면 괴롭기 마련이고, 혹은 병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합니다. 하물며 나쁜 일이야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땅투기를 전문적으로 하던 사람이, 역시 투기로 먹고 살던 한 친척이 사놓은 땅이 자신이 투기한 땅보다 몇 갑절 더 오르자 배가 아파 끙끙대다 몸져눕기까지 했다는 애기는 충분이 잇을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많이 가졌건 적게 가졌건 구불득고로 인한 괴로움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입니다.
네 번째가 5음성고(五陰盛苦)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신이나 주변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상대의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혹은 지위나 재물이 계속되기를, 지금 누리는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자신이 처한 상황이 고통스러우면 그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지만, 자신이 만족하고 있는 처지는 변화되기를 바라지 않는 게 인간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한 사회의 변화를 놓고서도 안정과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은 저마다 그 처지가 다르다는 점에서 각각의 주장이 다 일리가 있는 법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며, 그래서 고통이 오는 것, 이것이 5음성고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온갖 번뇌가 마치 죽 끊듯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6근(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과 6경(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이 서로 만날 때 6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순간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계속 기억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당신을 욕했다 칩시다. 그 쇠를 듣는 순간 당신의 마음속에 화가 치밀어 일어날 것입니다. 그 순간이 지났다 해서 그 욕설과 당신의 울분이 쉽사리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과 수근 거리는 소리만 듣게 되도 자기 욕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다시금 화가 치밀 것입니다. 그 뿐인가요? 그가 없더라도 어디선가 ‘내 욕을 하고 있겠지’하는 울화가 과거ㆍ현재ㆍ미래에 걸쳐 시시때때로 당신의 기억 속에 떠올라 마음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래서 6근과 6경이 만나는 36가지의 경우를 과거ㆍ현재ㆍ미래로 각기 계산해서 종합하면 108개의 번뇌를 이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번뇌가 어찌 108가지만 되겠습니까? 108 번뇌란 말 속에는 번뇌가 한없이 만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래서 8만4천 번뇌라고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생살이가 이렇게 고통스럽다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불교가 만약 인생은 고(苦)라고만 이야기한다면 불교는 하나의 철학이나 사상에 지나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이 고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과 안락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는 위대한 철학이자 고등종교인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다름 아닌 바로 ‘조견 오온개공’입니다. 5온이 공한 것을 확연히 깨달으면 일체의 모든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세속과 불교의 차이가 있습니다. 세속의 종교나 사상. 철학에서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그게 구원받은 것을 피안으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불교는 그 반대로 5온에, 즉 나라는 게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이 바로 피안으로 건너감입니다.
‘나’라는 것은 사실 모든 고통의 원인입니다. ’나‘가 있다고 여기므로, 소유하려 하고, 욕심을 부리며,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그러나 ‘조견 오온개공’해서 ‘나’라는 것이 없이 그저 텅빈 ‘공(空)임을 알게 되면, 그 땐 일체고액이 다 사라집니다.
‘나’라는 게 고통을 당하고 행복을 겪은 것인데, 그 ‘나’라는 게 사실 알고 보니 본래 없는 것이니, 그래서 이런 것을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합니다. 전도몽상이란 ‘잘못 알고 있었다’라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어두워서 새끼줄을 뱀으로 알고 두려워 했는데, 낮에 해가 밝아서 자세히 보니 새끼줄임을 알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조견 5온개공 도 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에 대해서 설명을 해 드렸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5온이 본래 실체가 없음을 여실히 아시고, 중생의 모든 고통과 액난을 벗어났느니라.”
[참고문헌]
알기쉬운 반야심경, 법륜강의, 중앙불교교육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