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Kelly Princess of Monaco
출생 - 1929년 11월 12일 미국의 펜실베니아, 필라델피아
사망 - 1982년 9월 14일 모나코 몬테 카를로에서 53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
그레이스 켈리는 1929년 11월 12일 아버지 죤.H.켈리의 3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녀는 유년 시절은 필라델피아에서 보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건축 사업이 매우 성공하여 유복한 가정에서
잘 자랐다. 그녀의 가족들은 화목하게 잘 자랐으나 그녀의 외부가 약간의 동성애 끼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학창시절에 수학점수가 매우 낮았기 때문에 베닝턴 대학에서 그녀가 입학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미국의 예술 아카데미에 다니게 되었다. 그녀는 그 중에서도 외모가 뛰어났었다.
그녀의 외모가 프로듀서 델머트 만의 눈에 띄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22세의 나이로 '14 시간'이라는
영화에 작은 역할을 맡았다. 다음 해, 그녀는 영화 '하이 눈' 으로 인해 톱 스타가 되었다.
그리하여 1955년 25살의 나이로 제 2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그레이스 켈리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손꼽히던 남배우들과 파트너로 일하면서 많은 염문을 뿌리기도 하였다.
그와 중에 1954년 그녀는 작은 공국 모나코를 방문하게 된다. 그 때, 그녀는 모나코의 레니에 왕자를
처음으로 만났다.
레니에 왕자는 그레이스 켈리를 보는 순간 매우 기품있고 우아한 그녀의 모습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모나코 공국에는 왕비감을 물색하고 있었기에 레니에 왕자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였다.
그레이스는 매우 매너있고 편안한 레니에 왕자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그들의 만남은 매우 짧았다.
영화제에 초청받은 레니에 왕자는 그 곳에서 그레이스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레니에 왕자는 그녀에게 구애를 하였고 그녀는 갈팡질팡하였다. 그녀는 명성을 택하느냐,
결혼을 택하느냐에서 고민을 하던 도중, 1956년 개봉된 '상류 사회'라는 영화에서 레니에 왕자가
선물한 12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보임으로
그녀는 레니에 왕자의 청혼을 승낙하였고 그녀는 1956년 영화계를 은퇴하고 은막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둘은 성대하고 모두에게 관심을 받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던 그레이스 켈리는 엄격한 왕실에 잘 적응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레니에 공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는 소문까지 퍼졌고. 약간의 우울증의 증세도 보였다.
세간의 관심은 그녀에게는 매우 심각한 스트레스였다. 그와중에 그녀는 케롤라인,알베트 그리고
스테파니를 낳았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으로 인해 관광수입이 매우 늘었고 프랑스와의 합병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로 인해 작은 공국이였던 모나코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레이스 공비는 이제 은막 위에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인기는 그대로 유지하였고 왕비 자리도 잘 해냈다.
하지만 문제는 막내 스테파니 공주였다. 스테파니는 성장하면서 여러 스캔들과 왕족이 해서는
안될 행동을 하고다녀서
매일 언론의 메인을 차지하였고, 그로인해 그레이스와 레니에 공은 스테파니를 꾸짖는게 일상이였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아끼던 자식은 스테파니 공주였다고 전해진다.
그레이스 켈리는 시내로 나가고 싶어하였다. 왕실의 일원으로 여기저기 스케줄에 끌려다녔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이 때 막내 딸 스테파니가 그레이스의 기분 전환을 시켜주기 위해 차를 몰고 파리 시내로 갔다.
서커스를 보고 오는 길에 몬테 카를로 부근에서 운전하던 그레이스가 스테파니와 교대를 하자고 하였다.
스테파니는 운전석에 앉고 차를 몰다가 사고가 났다. 스테파니 공주는 가벼운 부상을 입었지만,
그레이스 공비는 숨지고 말았다. [훗 날, 스테파니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본명은 그레이스 패트리시아 켈리(Grace Patricia Kelly). 우아하고 고상한 매력의 대명사로서, '영화계의 공주'라는 별칭을
전혀 무색하게 만들지 않는 여배우다. 내적인 정열과 외적인 차가움 사이의 패러독스를 체현한 켈리는 알프리드 히치콕이
선호한 이상적인 금발 미인이기도 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브로드웨이에 먼저 발을 디딘 켈리가 첫 출연한 영화는 <14시간>(1951). 이 단역을 시작으로 그녀는
프레드 진네만의 <하이 눈>(1952), 존 포드의 <모감보>(1953)에 출연하면서 할리우드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뒤 히치콕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스타덤에 오른 그녀의 다른 대표작들로는 <상류 사회>(1956), <백조>(1956) 등이 있다.
그녀는 히치콕과 세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그 첫 번째 작품이 바로 <다이얼 M을 돌려라>이며, 두번째 작품 <이창>에서
제임스 스튜어트의 상대역을, 그리고 다음해에는 <나는 결백하다>에서 캐리 그랜드와 짝을 이뤄 출연했다.
모나코 왕자와 결혼 뒤 은막에서 은퇴했던 켈리는 62년에 히치콕의 <마니>(1964)에 주연을 맡으면서 할리우드로 돌아올
것이라고 공표했다. 하지만 모나코의 국민들은 공주가 도둑 역을 맡는 것도, 그리고 숀 코너리와 로맨스에 빠지는 역을 연기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고 한다. 결국 나중에 켈리는 그 프로젝트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고 결코 다시는 연기 세계로 돌아오지 못했다.
1982년 9월 14일 모나코에서 자동차 사고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