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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 [Clinton Eastwood ]
생년월일 : 1930. 5.31
출생지 : 미국
신 장 : 193cm
학 력 :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 경제학
프로필 :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 프란시스코 태생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2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
1930년 5월 31일 샌프란시스코 출생. 오클랜드 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벌목장 인부를 비롯하여 수 많은 직업을 전전한 후에 육군에 입대했다가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다.
54년부터 단역배우로 출발하였는데, 58년에 TV의 인기 서부극 시리즈 <로하이드(Rawhide)>에 주연은 아니지만 고정배역으로 발탁이 되어 제법 인기를 얻었다. 64년에, 기존의 헐리우드식 서부극과는 전혀 다른 서부극을 구상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세르지오 레오네(Sergio Leone) 감독의 초청으로 로마로 가서 <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를 찍었다. 그저 돈벌이를 찾아 총솜씨를 파는 떠돌이 총잡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황량하고 거칠은 서부의 어두운 모습을 강렬한 폭력 묘사와 함께 선보인 이 작품은, 그 신선한 감각으로 전세계를 휩쓸었다. 그 후 그는 이런 스타일의 이른바 '마카로니 웨스턴(스파게티 웨스턴)'의 영웅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고, <석양의 무법자(For A Few Dollars More)>, <석양에 돌아오다(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 후 그는 서서히 이미지의 변신을 꾀하는데, 68년에 처음으로 현대의 주인공이 된 수사액션 영화 <석양의 만하탄(Coogan's Bluff)>이 인정을 받자 자신을 얻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이미지를 재창조하여, 71년에 <더티 해리>를 대히트 시킴으로써 마침내 달러 박스(Dollar Box)에서 1위에 올랐다.
71년에 자신의 제작사인 맬파소 프로덕션(Malpaso Production)을 차려 직접 제작과 감독까지 겸하는데, 첫 감독 작품인 <어둠속에 벨이 울릴 때(Play Misty For Me)>가 대성공을 거두어 그는 스타로서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파이어 폭스>에서는 서스펜스 넘치는 현대 공중전을 무난히 연출했고, <페일 라이더>에서는 고전 웨스턴을 리메이크했고, <추악한 사냥꾼>에서는 <아프리카의 여왕>을 찍을 때의 존 휴스턴 감독의 내면 세계를 다룬 본격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했다.
92년에는 자신의 출세작이었던 웨스턴 <용서받지 못한 자>를 연출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해 제작자, 배우 겸 감독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누리면서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남우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93년에는 볼프강 페터젠 감독의 드릴러 영화 <사선에서>에 출연,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난도의 액션 씬들을 말끔히 처리해냈다.
한때 자기가 살던 카멜 시에서 사업을 하려다 시장이 방해하자, 직접 시장에 출마, 당선되기도 했던 그는 여러 작품에서 공연한 여배우 손드라 록크(Sondra Locke)와 사랑에 빠지면서, 25년간 결혼 생활을 해온 조강지처와 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손드라와도 88년에 헤어졌고, 제인 브롤린이라는 여배우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서부극의 영웅 그리고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로 유명한 배우 겸 감독, 태어나다
193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1948년 오클랜드 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벌목장 인부, 소방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였다. 1949년 해군에 입대한 그는 인생에 있어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을 겪게 된다. 첫번째는 앞으로 아내가 될 매기 젠슨을 만나게 된 것이고 두번째는 비행기 사고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이다.
제대한 뒤 공부를 계속할 것을 결심하고 로스엔젤레스 시티 대학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한다.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오디션을 보고 합격한 후, 1954년부터 배우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스트우드가 통나무를 지고 가는 모습이 강인해보여 합격했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로 강인한 모습을 지닌 이스트우드였다.
웨스턴 영화의 인상 팍구긴 무법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처음에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트럭 운전을 하면서 단역 배우로 영화에 출연해 연기 경력을 쌓았다. 그후 몇 년 동안 영화와 TV의 단역을 전전하면서 일정한 수입을 얻게 되자 메리 젠슨과 결혼한다. 이스트우드는 59년 TV 시리즈 <로하이드(생가죽)>에 처음으로 주연으로 출연한다. <로하이드>(1959∼1966)는 소떼를 모는 카우보이들의 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 그는 강인한 남성의 이미지를 보여주게 되고 이후 그는 '서부영화'하면 대중들이 그를 떠올리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마카로니 서부극 <한 줌의 달러 (A Fistful of Dollars)>와 <황야의 무법자 (For a Few Dollars More)>, <석양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로 국제적인 스타로 떠오른다. 악당을 두려워하지 않는 비정한 서부 사나이로 대변되는 이스트우드의 이미지는 지금까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더티 해리 시리즈의 막나가는 형사
서부극의 영웅이었던 이스트우드는 서부극이 쇠퇴하자 돈 시겔의 <더티 해리 (Dirty Harry)>(1971)에서 강력 경찰로 이미지를 쇄신하게 된다. <더티 해리>는 그의 마초적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각인시켰다. 매그넘으로 범죄자들을 무차별 사살하는 거친 형사 '더티 해리'는 아직도 대중들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이스트우드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후, <더티 해리> 시리즈는 큰 인기를 끌어 1988년까지 5편의 시리즈로 만들어지게 된다.
감독으로 나서게 된 클린트 이스트우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시겔 감독으로부터 감독이 되라는 권유를 받게 되고 이에 그는1971년 맬파소 프로덕션이라는 제작사를 차린다. 맬파소 프로덕션을 통해 그는 1973년 사이코 스릴러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Play Misty For Me)>로 감독 데뷔해 이후부터는 감독과 배우로 활동한다. 자신이 주연으로 참여하기도 한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는 중년과 노년에 이르는 성찰의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후,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배우보다는 감독으로서 명성을 쌓았다. 감독으로서 그는 돈 시겔이나 세르지오 레오네 등 함께 작업했던 감독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두 감독의 방식은 이스트우드의 절제된 연기 스타일을 만들었고 그의 영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건틀릿>(1977), <브롱코 빌리>(1980), <파이어 폭스>(1982), <페일 라이더>(1985) 등을 감독하였고, 재즈 뮤지션 찰리 파커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버드>(1988), <추악한 사냥꾼>(1990) 등에 이르러서는 감독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절제된 스타일의 대표작은 93년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작 <용서받지 못한 자 (Unforgiven)>이다. 그의 감독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용서받지 못한 자>는 서부영화를 결산하는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는 영화를 떠나 잠시 외도를 하는데, 1986년부터 2년간 카멜시(市)의 시장 직을 역임한다. 이후, <사선에서 (In the Line of Fire)>(1993)에 배우로서 출연하였고 <퍼펙트 월드>(1993),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The Bridge of Madison County)>(1995), <앱솔루트 파워>(1997),<미드나잇 가든 (Midnight in the Garden of Good and Evil)>(1997)를 감독하여 흥행에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특히,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선 잔잔하고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담하게 연출, 메릴 스트립과 직접 로맨스 그레이 커플을 연기하기도 하여 한국 팬들을 감동시켰다.
재즈에 대한 그의 열정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데 만약 배우, 감독, 제작자로서 성공하지 못했다면 뮤지션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이다. <버드>(1988) 이후 그는 다시 재즈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드는데 그것은 <미드나잇 가든>이다. 약간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가진, 특히 쟈니 머서가 만든 재즈 음악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영화였였다. 이 영화를 비롯하여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의 감독 데뷔작 <어둠속에 벨이 울릴 때> 부터 <미스틱 리버>까지 영화에 사용되는 음악을 직접 선곡했다.
팔방미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배우면 배우, 감독이면 감독, 게다가 자신이 만든 영화의 음악 작곡까지. 영화에 관한 한 이만한 팔방미인도 많지 않다. 할리우드 최정상의 배우임과 동시에, 지난 40년간 모든 영화인들과 영화팬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그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배우이자 감독, 제작자. 영화계의 거장이자 우상으로 모든 부문에서 작품성, 흥행성을 인정받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게다가 그는 아직 열정적으로 영화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1993년 그가 감독한 <용서받지 못한 자>는 아카데미 9개 부문에 올라 작품상, 감독상, 최우수조연상, 최우수편집상 등 4개 부분을 석권하고, 감독협회상, 골든 글러브 감독상, 전미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최우수조연상, 각본상, 뉴욕영화평론가협회 최우수 조연상 등 그 해 모든 상을 휩쓸었다. 1994년 깐느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한 그는 <추악한 사냥꾼>, <버드>, <페일 라이더> 등을 깐느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경쟁부문에 진출시켰다. 그 중 <버드>는 주연상과 음향상과 골든 글러브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2003년, 영화배우협회가 수여하는 평생공로상과 미국음악계에 기여한 공로로 행크 어워드를 수여받은 그는 2000년, 뉴욕비평가협회가 수여하는 평생공로상과 케네디 센터 명예상을 수상하기도했다. 1999년에는 '피플스초이스 어워드'가 선정하는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배우 후보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전에도 이 상을 다섯 차례나 수상한 경력이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1930~ )
영화배우, 감독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 프란시스코 태생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2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를 '감독'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배우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스타'라고 불러야 할까요?
영화인중에서 감독겸 배우로 1인 2역을 하는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물론 '채플린'이나
'우디 알렌'처럼 '자신의 영화'를 철저히 만드는 팔방미인의 '영화인'은 예외로 치고
'로버트 레드포드' '워렌 비티' '케빈 코스트너'처럼 배우 출신이면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사람들도 있고, '존 휴스턴'이나 '시드니 폴락'처럼 가끔 배우로 출연하여
'명연기(?)'를 보이는 인물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자기 고유영역이
있고 다른쪽 '외도' 정도를 가끔 할 뿐입니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배우로서 '최고스타'의 자리를 오래 누린 인물이었고,
감독으로서도 '거장'의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그를
배우보다는 '감독'으로 부르는게 마땅할 정도로 그의 '스타'로서의 지위는 오히려
부속품같은 존재처럼 되고 있습니다. 그 '분기점'은 1992년 '용서받지 못한 자'를
연출했을 시점부터입니다. 62세의 '노장배우 겸 감독'의 인생은 그렇게 달려졌으며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을 실감하게 하였습니다.
193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청년시절
훤칠한 키의 매끈한 미남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원조 TV 세대'들, 즉 60년대에
TV를 보던 세대들에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젊고 잘생기고 키큰 꽃미남 목동으로
기억되었습니다. 바로 '로하이드'라는 서부를 배경으로 한 '외화' 때문이었습니다.
7년간 217에피소드가 만들어진 장기 인기외화 로하이드는 힘찬 채찍질 소리와
'로렌 로렌 로렌....'으로 시작하는 프랭키 레인이 부른 주제곡으로도 유명한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꽤 오래도록 인기를 누린 외화였습니다. 여기서 젊은 목동으로 출연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처음 우리나라에 이름을 알리며 인기를 모았습니다.
"서부극의 스타가 되다"
외화 시리즈의 미남청년이었던 그는 몇년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치렁치렁한
망토를 몸에 두르고 시가를 물고 말을 타고 나타났습니다. 바로 너무나도 유명한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카로니 웨스턴 서부극의 원조작품이자, 엔니로 모리꼬네의
'방랑의 휘파람'으로 유명한 '황야의 무법자(Per un pugno di dollari 영어제목은
A Fistful of Dollars)'이었습니다. 이 황야의 무법자는 기존 정통웨스턴의 틀을 깨고
추악하고 탐욕적인 마초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지저분한 변칙 서부극'으로
이탈리아에서 만든 작품이었지만 세계적인 히트를 하였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후 소위 '무법자 3부작'이라고 불리우는 '석양의 무법자(Per qualche dollaro in più
영어제목은 For a Few Dollars More)와 '석양에 돌아오다(일명 좋은 놈 나쁜 놈
추악한 놈)'에 연달아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주1 : 무법자 3부작의 정확한 우리나라 개봉제는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석양에 돌아오다(부제 속 석양의 무법자)'입니다. 하지만 SKC비디오에서 잘못된
제목으로 출시되고 EBS에서 이용관 교수의 틀린제목 해설과 시네마데끄의 잘못된
상영제목 등으로 3편을 '석양의 무법자'라고 부르는 오류가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소위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는 '석양에 돌아오다'라는 제목으로
불리워야 개봉제와 일치하는 정확한 제목입니다)
미국의 TV배우가 이탈리아 영화를 통해서 스타덤에 오르자 다시 미국으로 '역수출'되는
현상이 발생하였고, 그렇게 미국에서 출연한 첫번째 서부극이 바로 '9인의 무뢰한
(Hang'em High)'입니다.(9인의 무뢰한은 개봉제, 블로그의 별도 리뷰 참조바람)
이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많은 서부극에서 활약을 해온 '총잡이 스타'로 활동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무법자 3부작과 9인의 무뢰한 외에도 '황야의 스트렌저(High Plains
Drifter 73년)' '사나이 조 키드(Joe Kidd 72년)' '무법자 조지 웨일즈(Outlaw Josey Wales)'
'페일 라이더' 등입니다. 존 웨인의 뒤를 이어 '서부극'의 국민스타의 탄생이었습니다.
"거칠고 난폭한 형사 더티 해리의 탄생"
총은 서부에서만 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클리트 이스트우드는 새로운 '형사캐릭터'를
통해서 70년대 가장 인기를 모은 '형사시리즈 영화'에 주인공으로 우뚝 섰습니다.
바로 해리 캘러한 형사를 연기한 '더티 해리'시리즈 입니다.
1971년 돈 시겔 감독이 연출한 '더티 해리'는 다혈질의 형사가 사회악이 되는 범죄자를
무자비하게 소탕하는 '현대적 액션 형사물'의 원조격이 되는 작품으로 스튜디오형 고전영화
시대가 끝난 70년대 '현대 액션물'로서 폭발적 인기를 모았던 작품입니다. 1편인 더티 해리를
시작으로 2편 '이것이 법이다(Magnum Force)' 3편 '집행자(The Enforcer)'
4편 서든 임팩트까지 고스란히 우리나라에 개봉되어 인기를 모았습니다.
돈 시겔 감독과 그의 인연은 1968년 '석양의 맨하탄(개봉제, 원제는 Coogan's Bluff)'를
통하여 맺어졌는데 이후 더티 해리를 통해서 대박을 터뜨렸고, 이후 79년 '알카트라즈 탈출'
에서도 호흡을 맞추었습니다.
더티 해리는 '무법자 시리즈'와 함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출연한 영화속의 가장 성공적인
'캐릭터'이자 흥행작이 되었습니다.
"감독으로서 역량을 발휘하다"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탄생은 비교적 빠른 1971년 '어둠속에 벨이 울릴때(Play Misty
for Me)'라는 스릴러영화에서 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감독 주연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지방방송국의 인기 DJ로 출연하여 사이코같은 스토커 여성에게 시달리는 주인공을 연기했습니다.
첫 감독작품임에도 으스스한 화면 분위기와 음산한 연출로 굉장히 성공적 감독데뷔를 하였고,
보통 '스타'출신의 감독이 몇 번의 습작외도에 그치는데 반하여 그는 이후 꾸준한 속도로
연출을 겸하여 적어도 2-3년에 한편씩을 연출을 계속 하는 '감독'으로서의 활동력을
보였습니다. 물론 이후 그가 감독하는 대부분의 영화들에 그는 직접 '주연'을 맡으면서
스스로를 아주 멋지고 완벽한 주인공으로 자주 꾸미는 '자뻑영화시대'를 한동안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황야의 스트렌저'나 '페일 라이더' '아이거북벽'같은 영화는
그의 '자아도취' 소위 자뻑된 모습이 절정을 이룬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그는 미국 최고의 '흥행스타'로 자리매김하였고, '감독겸업'은 그런 그의
스타로서의 모습을 좀 더 돋보이게 하는 '보조역할'이상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영화를
감독하였지만 그건 엄밀히 말하면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위한 도우미역할이었습니다.
"진정한 거장으로 거듭나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배우나 스타로서의 지위보다 더 중요하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1992년에 만들어진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영화를 통해서입니다.
그 전에 이미 1988년 음악가 '찰리 버드 파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버드'가 칸 영화제에
소개되면서 어느덧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배우보다 '감독'으로서의 위치를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50대 후반으로 치닫는 나이에 여전히 '헐리웃의 중심 스타배우'로 활약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서히 '제 2의 영화인생'을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헐리웃 최고의
머니메이킹 스타가 감독으로 연출작을 들고 칸 영화제를 향한다.... 이건 굉장히 획기적인
일입니다. 더구나 '버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출연하지 않고 연출만 담당한 영화였습니다.
이후 역시 호평을 받았던 '추악한 사냥꾼(White Hunter, Black Heart)'을 감독,주연했고,
드디어 1992년 그의 인생의 전환기가 된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가 등장했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퇴물 총잡이가 돈을 받고 창녀를 괴롭힌 악당은 처단하는 이야기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에서 전설적 악명높은 총잡이 '머니'를 연기했는데 기존의
여러 서부극들과는 달리 말도 제제도 못 오르고 나이가 들어서 총도 정확히 못 쏘고
두려움에 벌벌 떠는 총잡이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시가를 입에 물고 여유롭게 적을
사살하는 귀신같은 솜씨의 마카로니 웨스턴의 스타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미국을 상징하는 서부의 영웅 '존 웨인'이 6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강하고 정의로운 영웅을
연기하며 '허상'에 갇혀 있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서
그야말로 진솔한 고백을 한 셈입니다. 서부의 총잡이는 낭만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그냥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추악한 인간이며 때론 겁에 질리기도 하고 만화같은
총솜씨를 가지지도 못한 한 인물에 불과했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아카데미 감독상을 안겨주었고,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수상하여 '걸작 서부극'반열에 올랐습니다. 25년동안 헐리웃에서
가장 잘 나가는 '비싼 스타'였던 클리트 이스트우드가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 상을
받는 획기적인 영화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 그 이후~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에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몇 번 '스타배우'로서의 지위를 보여주었습니다.
대통령 경호원역으로 출연한 '사선에서'는 1억불이 넘는 흥행을 기록하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출연한 영화의 역대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고, 1993년에는 케빈 코스트너를 주인공으로 하여
'퍼펙트 월드'를 완성하여 70년대 이후 처음으로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1995년에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감독겸 주연을 하였습니다.
그의 '진품연출'이 제대로 다시 나타난 영화는 2003년 작품인 '미스틱 리버'입니다.
어린시절 친구였던 세 남자가 등장하여 어떤 사건에 얽히게 되는 진지하고도 심도있는
드라마 미스틱 리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무르익은 연출이 잘 나타낸 걸작이었고,
숀 펜, 케빈 베이컨, 팀 로빈스 등 베테랑 배우들의 명연기가 잘 조화되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수상하였습니다. 70세가 넘은 노감독의 구수한 연출로 만들어진 볼만한 미스터리
드마라였습니다.(별도 블로그 리뷰 참조바람)
2004년에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라는 휴먼 스포츠 드라마를 연출하여 다시금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휩쓸었습니다. 촉촉한 감동을 주었던 이 영화에 직접 출연까지 하여 노익장을 과시한
그는 함께 공연한 힐러리 스웽크에게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겼습니다.
2005년 3월에 열린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70대의 노감독이 시상대에 올라 90대의 어머니를
소개하는 장면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70이 넘는 나이에도 그는 '자랑스런 아들'로서
시상대에 선 것이었습니다.
70대가 되어서 더욱 왕성해진 그의 활동은 2006년 같은 소재의 두 편의 전쟁영화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나란히 발표하여 활동력을 과시했습니다. 비록 배우로서의 활동은 2000년대
들어서 많이 주춤하고 있지만, 감독으로서는 정말 활발한 활동을 보인 셈입니다. 2008년에도 그는
'체인질링'이라는 감동적 실화드라마와 '그랜 토리노'라는 범죄드라마를 통해서 찾아왔습니다.
현재 체인질링이 먼저 개봉되었고, 2009년 2월에 그랜토리노도 소개가 됩니다.
어느덧 80을 바라보는 이 노구의 감독은 그랜 토리노를 통해서 모처럼 4년만에 배우로 복귀하였으며
체이질링에서 140여분에 달하는 긴 영화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연출했습니다.
두 편 모두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랜 토리노는 주간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는 영화인으로서 이룰 것을 다 이룬 화려한 인생이었습니다.
'스튜디오 고전영화 시대'가 끝나는 60년대에 등장하여 '현대영화의 원조격 스타'로 자리매김하며
TV외화속의 잘 생긴 청년으로, 마카로니 웨스턴의 총아로, 다혈질 열혈형사로, 1967년부터
'머니메이킹 스타 베스트 10'에 올라 20번 이상 베스트 10에 포함되는 최고 흥행배우로 이름을
날렸고, 감독으로만 30여편이 넘는 연출을 하였고,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역임했고,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차례 받았고, 제작자로서, 영화음악 작곡가로서도 폭넓게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행정가로서 '시장'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랜 토리노는 그의 마지막 역작이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저는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아버지의 깃발'등이 발표될 때 늘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는 여전히 좋은 작품을 계속 발표했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빛이 나는 그의 영화인으로서의 삶, '스타'라는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영화인'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그의 인생이 더욱 값져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선정한 그의 출연작 베스트 10
1. 황야의 무법자
2. 석양의 무법자
3. 석양에 돌아오다
4. 어둠속에 벨이 울릴 때
5. 더티 해리
6. 용서받지 못한 자
7. 밀리언달러 베이비
8. 무법자 조시 웨일즈
9. 사선에서
10. 미지정(그랜 토리노를 위해서 남겨둔 한 자리)
개인적으로 선정한 감독으로서 그의 연출작 베스트 10
1. 어둠속에 벨이 울릴 때
2. 무법자 조시 웨일즈
3. 용서받지 못한 자
4. 버드
5. 퍼펙트 월드
6. 밀리언달러 베이비
7. 미스틱 리버
8. 아버지의 깃발
9. 체인질링
10. 미지정(그랜 토리노를 위해서 남겨둔 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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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분때문에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읍니다.개인적으로 본인 감독의 아이거 빙벽(초기작으로 평은 좋지 않았지만) 과 브라이언 g 허튼 감독의 독수리 요새도 재미있게 보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