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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성사에서 본 신학자 박형룡
박정신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 역사학)
머리글--박형룡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박형룡은 우리 기독교 안팎에서 널리 알려진 신학자이다. 오른 쪽에서 보든 왼쪽에서 보든 그는 ‘큰 신학자’이다. 그의 삶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과 함께 하였고, 그가 산 시대의 여러 민족적 과제를 껴안고 울고 기도했던 믿음의 사람이자 이 땅의 기독교 신학의 초석을 깐 인물이다. 특히 우리의 현대사에 대한 여러 인식의 차이가 있고, 그리고 이 땅의 기독교가 여러 교단과 교파로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에서 그를 보는 시각이 교단과 교파의 수만큼 서로 다를 수가 있다. 그렇기에 그를 학문적으로 인식하려는 그 자체가 교단이나 교파의 ‘정치’에 매도될 수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박형룡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장성만의 『박형룡의 신학 연구』이래 그렇게 활발하지 못했다. 김재준이나 안병무의 신학에 대해서는, 칭송하던 비판하던, 활발한 논의가 있어왔는데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박형룡의 후예들’에게 책임도 물어야할 것이지만 아마도 ‘학문적 논의’를 거부하고 있는 그의 신학 자체에도 그 원인이 있지 않은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에 ‘한국개혁신학회’에서 박형룡의 신학을 큰 주제로 삼아 학문적으로 심도 있는 논의를 하고 있다. 때 늦은 감이 있으나 박형룡이라는 ‘큰 신학자’에 대한 논의를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 학술모임에서 그의 신학에 대하여 여러 시각과 여러 수준에서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면서 말이다.
우리의 우려는 이렇다. ‘교회 안의 학인들’ (in-house scholars)이 교단이나 교파의 벽을 넘어, 교단이나 교파의 ‘신학 장벽’을 넘어, 아니 교단이나 교파의 ‘정치’를 넘어 ‘자유로이’박형룡을, 박형룡의 신학을 논의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러한 소박한 역사학도의 생각을 가진 우리는‘교회 안의 학자들’이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문적 논의를 ‘교회 밖의 학인들’이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지성사의 전통에서 박형룡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신학자인지를 보고자 하였다. 우리의 지성사를 자기 성찰적으로 읽어온 역사학도로서 말이다.
박형룡의 신학을 본격적으로 논의한 장동민은 “박형룡의 생애와 신학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세 가지 구성요인을 염두에 두라고 한 제안을 우리는 중히 여긴다. 첫째,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미국에가 공부한 박형룡과 그의 신학을 논의함에 있어 마땅히 “미국적 배경과 한국적 배경”또는 “아시아적 배경”을 고려하여야 한다. 둘째, 선교사들로부터 받은 “19세기 복음주의” 신앙과 미국에서 접한 “프린스턴 개혁주의” 신학과의 “긴장”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리고 셋째, 그가 산 역사의 콘텍스트와 이어지지만 근본주의자로서 문화변혁에의 욕구, 그의 좌절과 패배감 따위를 읽어야한다. 다시 말하지만 장동민은 “
“자기 의 (義), 분리주의 성향, 문화적 패배주의, 반지성주의 등이 그의 후기 신학의 특징을 이룬다....이러한 후기 박형룡의 모습은 자신에 찬 초기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어떤 학인이나 사상가도 ‘섬’ (an island)이 아니다. 그가 산 시대나 사회와 동떨어져서 잉태되는 것도 그리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박형룡과 그의 신학도 그가 산 역사와 이어서 이식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래서 우리는 우리 지성사의 흐름에서 박형룡을 읽어보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기 성찰적 우리 지성사를 인식하고, 그래야만 박형룡의 자리도 온당하게 찾아주게 되고, 그래야만 박형룡의 신학을 넘어서 신학을 학문의 세계로 견인할 수가 있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1. 우리 전통 지성사의 구조: 유교 교조주의와 중화주의
역사란 갈등과 긴장의 마당이다. 오랜 인류역사를 일별하면 역사가 긴장과 갈등으로 이어져 있고 또한 긴장과 갈등을 통해서 발전한다는 것을 쉬이 알게 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계급 간 투쟁으로, 헤겔은 ‘생각’(Idea)사이의 경쟁으로, 토인비는 도전하는 세력과 응전하는 세력의 엉킴으로, 신채호는 ‘우리’(我)와 ‘저들’(非我)의 쟁투로 역사를 인식하고 있다. 예수도 의와 불의의 싸움으로 인간의 역사를 보았다. 그렇다, 인간의 역사는 다른 계급이나 신분, 다른 생각들, 다른 민족과 인종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이었고 갈등이었다. 언제 인간의 역사에서 평화로운 때가 있었는가. 우리의 역사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 다른 부족사이에, 다른 신분과 계급사이에서, 다른 지역사이에서, 다른 생각과 이념 간에, 그리고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과 긴장하고 경쟁하며, 갈등하고 쟁투해온 역사이다.
이러한 갈등과 긴장의 역사에서 우리는 ‘교조주의’의 횡포를 읽는다. 긴장과 갈등의 역사마당 한 가운데 있는 이들이 자유로운 토론이나 논의를 통한, 이를테면 합리적이고 공평한 절차를 통한 힘겨루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리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힘이 있는 이들’이 ‘힘이 없는 이들’에게 굴복을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이럴 때 ‘힘 있는 이들’의 생각이나 이념이‘정통’이나 ‘정학’(正學)이 되고, ‘힘없는 이들’의 생각이나 이념은 ‘이단’이나 ‘사학’(邪學)이 된다. ‘힘’과 이데올로기가 항상 함께 간다. ‘힘 있는 이들’은 그들의 ‘힘’을 갖게 하고 유지시켜주는 질서를 더욱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이 가진 생각을 정통으로 또는 정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이에 도전하거나 일탈하는 행위와 행위자들을 이단으로 또는 사학으로 단죄하고 물리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억압한다. 바로 여기에 ‘교조주의’가 싹 터 자라게 된다.
교조적 엘리트들은 다중을 우매화시키고자 한다. 다중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깨어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도 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교육을 시킨다면 오로지 그들의 ‘정통’이나 ‘정학’만을 교육내용으로 한다. 다중을 그들이 만든 이데올로기나 ‘율법’에 가두고자 한다. 다중 가운데 어떤 이가 ‘정통’이나 ‘정학’에 대항하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이들은 두려워한다. 교조적 엘리트들의 ‘정통’과 ‘정학’이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이해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역사에 ‘혁명’이라고 기록된 것은 모두 이 교조적 엘리트들의 기득권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인 도전이고 승리인 동시에, 그들이 내세운 ‘정통’과 ‘정학’이라는 ‘교조’에 대한 이념적 도전이자 승리인 것이다. 프랑스대혁명도 그러했고 동학농민혁명운동도 그러했다. ‘교조주의’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함, 바로 그것이 해방이자 혁명이다.
주제와 좀 빗나가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미국의 ‘건국 이야기’와 거기서 잉태된 독특한 미국지성사를 읽어보자. 유럽 사람들이 오기 전 아메리카에는 인디언이라는 토착민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건국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이들이 아니고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 가운데는 투기꾼들, 모리배, 협잡꾼들, 해적들과 약탈자들도 있었고 이런저런 범법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도 미국의 ‘건국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아니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억압을 벗어나 신앙의 자유를 찾아온 이른바 퓨리턴들 (the Puritans)이었다.
이들은 ‘옛 대륙’ 유럽에서 “이질적 성분을 지닌 이들” (heterogeneous)이라고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억압을 받고 천대받던 사람들이었다. 유럽에서 누리지 못한 신앙의 자유를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누리고자 갈망해 온 이들이었다. 자기들이 믿는 신앙을 자유로이 믿고 행할 수 있는 사회를 ‘새 대륙’아메리카에 세우고가 하였다. 애급인 유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아메리카로 찾아온 것은 폐쇄와 억압의 ‘옛 유럽’을 버리고 개방과 자유의 “새 이스라엘”을 건설하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고 이들은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민의식’을 가진 이들은 옛 대륙 유럽 각지에서 여러 색다른 기독교를 아메리카로 가지고 왔다. “이질적 성분을 지닌 이들”의 잡다한 기독교가 미국이라는 한 나라에 웅거하여 “하나의 종교 모자이크” (a religious mosaic)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은 폐쇄와 억압의 유럽에서 해방된 이들답게 “더 나은 삶, 더 나은 종교” (a better kind of life and the better kind of religion)를 가져보겠다는 이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나와 다른 이들의 ‘이질적 성분’을 인정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도 자기들의 ‘이질적 성분’을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나 어느 집단 (이나 교파) 또는 어느 개인도 ‘자기가 믿는 바’를 멸시하거나 억압하지 못하는 틀을 만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교분리’인데 “미국인의 삶의 원칙” (the axiom of the American way of life)으로서 헌법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종교문제에 있어서 어떤 개인과 집단의 압박이나 제재가 없는 그야말로 “자유방임의 낙원” (a paradise of laissez faire)이 되었다. 그래서 치열한 신학논쟁은 있지만 ‘이단’이네 ‘정통’이네 하며 상대방을‘정죄’하는 일은 드물고 있다고 하여도 치열하지 않다.
우리의 지성사 (우리의 일반 역사도 그렇다)는 이와 다르다. 교조주의와 반교조주의의 갈등의 역사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만치 ‘다른 생각,’‘다른 이념’ 또는 ‘다른 신념’에 대한 틈을 주지 않는 세력과 이에 반항하는 세력사이의 긴장과 갈등의 기록으로 넘쳐난다.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와 이른바 신진사대부세력은 ‘억불숭유’ (抑佛崇儒)를 왕조창건의 기치로 내걸고 구세력과 결탁한 불교를 억압하고 신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조선사회를 재구성하려했다. 이른바 ‘유교화’(Confucianization)의 시작, 더 정확히 말하면, 유교의 교조화의 시작이다. 유교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유교가 ‘정통이념’이 되었다. 신유학 이외의 생각과 가르침은 ‘사학’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유교 교조주의가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는 유교 안에서 조차 서로를 ‘이단’이니 ‘사학’이니 하며 서로를 정죄하게 되었다.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상대방을 정죄하였다. 이를테면 유교 교조주의자들은 같은 유학자라도 다른 학파나 정파에 소속된 이들을 정치적으로 처단하고 사약을 내리기도 하였다. 17세기에 유명한 ‘예송논쟁’ (禮訟論爭)이 바로 그 좋은 보기이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예송논쟁은 조선 후기 현종과 숙종 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 비에 대한 조 대비 (인조의 계비)의 복상기간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의 논쟁으로 시작되었다. 단순한 왕실의 전례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율곡학파와 퇴계학파의 학문적 대결, 서인 (후에는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짐)과 동인 (후에는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짐)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이어져 서로가 ‘사설’이네 ‘이단’이네 하며 사약을 주고받았던 사건이다. 교조적 유교주의 엘리트들의 권력투쟁이 이들이 정통이념으로 내세운 유학 (주자학)의 적통을 서로가 잇고 있다고 논쟁하며 서로를 거세하려고 피를 흘리며 싸운 사건이다. 같은 유학자이면서도 학파가 다르면 학문적 논쟁에 그치지 않았다. 서로 증오하고 서로 제거하려했으며, 서로 죽이어야했다. 교조주의의 무서운 역사를 이 ‘예송논쟁’에서도 읽는다.
유교 교조주의가 빚은 또 하나의 불행을 우리는 정약용과 그의 집안의 역사에서도 읽는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으나 단지 정통 유교와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는 그 이유 하나로 교조적 유학 세력에게 저주 받고 비참하게 죽어갔다. 19세기 초의 일이다. 신유박해니 기해박해니 하는 서학 (西學) 탄압으로 정약용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정약종, 이승훈, 이벽, 권일신과 권철신 형제와 같은 이들은 유교에 노예 된 닫힌 사회에서 죽어갔다.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라고 말한 정약용과 같은, 자유를 목말라했던 이들은 유교 ‘정통’에, 유교 교조주의에 ‘아니오’라고 말했다 하여 귀양을 가고 죽어갔던 것이다.
전통시대에는 조선은 중국과 문화적 또는 지정학적으로 아주 가깝게 있었다. 20세기 초까지 조선은 이른바 중화주의 국제질서 안에서 중국의 ‘우산’아래 있었다. 이 질서가 문화주의적, 이를테면 유교주의적 질서이었기 때문에 조선은 정치적, 문화적으로 ‘중국 지향적’ (Sinocentic)이었다. 조공행위를 다른 시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조선의 유교적 지배 엘리트들 (양반들)은 이 행위를 통하여 중국의 정치, 사회, 심지어는 문화와 종교를 비롯한 모든 분야의 제도와 관행을 거의 무차별적으로‘수입’하여 ‘유교화’와 ‘중국화’에 앞장섰다. 그 결과로 조선의 유교 지배 엘리트들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나아가서는 문화적으로 중국을 모방하고, 중국 것을 숭앙하는 무리가 되었다
조선의 유교적 지배 엘리트들은 여러 수준에서 중국의 지배 엘리트들과 매끄러운 관계를 만들고 이 관계를 조심스레 유지해 나감으로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오래도록 안정을 도모하여 왔다. 이로는 과정에서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오로지 중국만을 쳐다보고 그들의 정치적 움직임에 예민한 무리가 되었다. 그들의 의식 또한 중국 중심이 되었고, 그들의 학문도 ‘선진 중국 학계’의 여러 경향에 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지적 고민이 우리의 논의가 되고, 중국의 학문적 토론이 우리의 논쟁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 역사의, 우리 지성사의 ‘한계’를 중국 중심질서에서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우리 지성사에 깊게 뿌리 내려가지 쳐 간 중화주의의 ‘해독’을 읽게 된다. 자기들이 가진 유교를 교조화 시킨 조선의 유교적 지배 엘리트들은 ‘유교 교조주의에’ 이‘중화주의’를 접목시켰다.
일본 전통시대 지성들도 중화주의적 국제질서에 속하여 있었지만 그들은 조선의 지성들과는 달리 좀 더 독자적이고, 좀 더 민족적이었다. 아마도 지정학의 시각에서 볼 때 중국과 인접해 있던 조선과 달리 일본은 중국과 ‘상대적으로 멀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토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시대의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까 (藤原)가 “나는 중국에서 태어나지도 조선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 대신에 오늘의 일본에 태어났다”고 선포한 것처럼, 일본 지배 엘리트인 무사계급은 강한 ‘자기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들은 유교를 “중국에서 가져 온 것,” 또는 “바깥 것”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이런 이유에서 또는 어떤 다른 이유에서건 일본 전통시대 지성들은 유교에 얽매이지도 중화주의에 매몰되지도 않았다. 일본 전통 지배 엘리트들이 ‘탈 중화주의’의 길을 갈 때 우리의 전통 지배 엘리트들은 중화주의라는 늪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2. 기독교, 우리 전통 지성사의 틀을 넘어
기독교가 이 땅에 온 것은 19세기 말이다. 조선이라는 유교사회였다. 아무리 유교질서가 흔들렸다 해도 교조적 유교가 사회의 밑바탕에 깊게 깔려있던 때였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신분과 계급을 갈라놓고 유교주의자들만이 관직에 올라 생산계급을 멸시하고 천대하고 있던 사회였다.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고 여자를 천대하였다. 나이 많고 적음을 구분하고 나이 적은 이들을 차별하였다. 이러한 수직적 사회에서는 양반집안의 남자로 태어나 유학 공부를 하고 과거시험을 쳐 관직에 오르는 삶이 유일한 ‘성공의 길’이었다. 그 밖의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멸시당하고 무시당하고 천대받았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은 이가 되어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된다. 유교 교조주의자들인 양반들은 유교의 가르침,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유교’와 다른 생각이나 이념을 용납하지 않았다. 다른 생각, 다른 이념이 퍼지면 그들의 자리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이 유교 교조주의자들이 천주학과 천주교신자들에게 가한 여러 차례의 박해가 그러했고 19세기 서세동점의 물결이 드셀 때도 그러했다. 이른바 척사위정 (斥邪衛正) 세력이 좋은 보기이다. 닫혀 진 나라의 문이 열려 바깥세상과 교섭이 있을 경우 기존질서가 흔들리게 되면 자기들의 자리가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문호개방을 반대한 세력이 바로 교조적 유교주의자들이었다. 닫힌 사회에서, 수직적 사회질서에서 자기들의 자리를 지키고자 한 이들이다. 나라가 위태롭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권력과 이권이 위협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들어온 기독교는 수직적 유교질서와 맞서게 되었다. 교조화된 유교와 유교적 신분사회에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선포하며 뿌리내리고 가지 쳐 뻗어나갔다. 수직적 유교질서에서 천대받던 무리들, 그리고 유교 교조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불만을 가진 무리들이 기독교로 개종해 오기 시작하였다. 이 초대 기독교인들은 조금도 굽힘이 없이 정통 유교주의와 맞섰다. 제사를 비롯한 유교적 관행과 관습, 그리고 신분차별과 성차별에 대한 초대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단호했고 자못 전투적이었다. 그 한 보기를 따와 보자.
“조선의 (유교) 스승들은 여자는 남자보다 못하다고 가르쳤다. 기독교는 이를 정면으로 부인함으로서 충동이 있게 된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가르치는데 우리는 또한 이에 동의하지 못한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불평등과 차별의 유교제도와 습속에 대하여 타협적이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이들은 유교의 가르침과 이에 터한 질서를 ‘사악한 것’ (the evil) 또는 ‘이방의 것’ (heathenism)으로 간주하고 적극적으로 맞서 바꾸기를 선포한 무리들이었다. 당시 기독교로 개종한 한 양반의 고백도 흥미롭다.
“넉 달 전 이 사랑방 (예배처소)에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교인들이 모여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나는 기분이 매우 언짢아 똑바로 앉았지만, 얼마 후 나도 무릎 꿇기 시작했는데, 부끄러운 마음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하나님은 나에게 믿는 마음을 주신 것이다. 내 친구들은 내가 미쳐 버렸다고 말하면서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러나 참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미쳐버린 징조가 아니다. 사실 나는 양반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는 양반으로, 또한 어떤 이는 상놈으로 만드시지 않았다. 인간들이 그러한 구분을 지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드시었다.”
예수를 믿은 후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만드셨다는 양반의 고백에 더하여, 위세 부리던 양반이 천대하고 멸시했던 상놈과 부녀자들과 함께 자리하여 무릎 꿇고 예배한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모습이다. 세상 친구들의 조롱을 우습게 여기고 세상 것을 초월하여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추구하겠다는 결단도 읽을 수 있다. 특히 이 글에서 우리는 양반과 상놈을 구분하여 차별하는 유교제도를 ‘인간이 만든 제도’라고 규정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자 한다.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한 것은 유교 교조주의자들이 절대화한 것을 상대화한 행위이고 그렇기에 파기해도 된다는 신념을 나타낸 것이다.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파기할 수 있다는 이들의 소망과 믿음이 담겨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의 율법을 대하듯이 조선의 초대 기독교인들은 ‘율법’이 된 유교제도, 습속 그리고 관행을 ‘인간이 만든 것’으로 하찮게 보았던 것이다. 우리의 초대기독교인들은 이처럼 유교 교조주의에 맞섰고 그래서 이 질서에 눌려 지내온 이들이 줄지어 이 종교공동체에 들어와 놀라운 성장을 하게 된 것이다.
3. ‘신학자 박형룡,’ 우리 지성사에서 그의 자리
우리의 지성사에서, 그리고 우리의 기독교역사에서 흥미를 끄는 것 가운데 하나가 유교 교조주의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이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어 성장하게 되었는데, 성장하게 되면서 우리교회 안에 ‘교조주의’가 나타난 현상이다. 기독교가 성장하게 되어 제도화되고 이 공동체 안에 ‘이권’과 ‘권력’이 생겨나게 되었다. 교회의 수도 늘어나고 선교학교와 교회기관이 늘어나게 되어 일자리가 생기고 그래서 이권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자리들’은 교권을 가진 자들이 채우게 된다. 교권이 교회의 성장과 이어진 것이라면 우리교회의 교권은 자연히 서북지방에서 나오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일찍이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린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에서의 기독교 성장은 선교초기부터 두드러졌다. 장로교의 경우 교회의 3분의 2가 서북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서북지방 중심이었다. 최초의 근대대학인 숭실대학을 비롯한 여러 선교학교들이 평양을 중심한 서북지방에 설립되었다. 최초의 목회자 양성기관인 평양신학교가 서울이 아니라 평양에 세워졌다는 것도 서북지방의 교세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1907년에 설치된 독노회 (獨老會)를 비롯한 그 이후의 전국규모 교회행사와 모임이 ‘모든 것의 중심’인 서울이 아니라 평양에서 빈번히 개최되었다. 서북지방의 두드러진 교세는 당연히 이 지역출신 교회지도자들의 교권 장악을 낳게 하였다.
권력은, 그것이 국가 권력이든 교회 권력이든, 권력 가진 이들의 이데올로기를 교조화 하는 경향이 있다. 조선시대 지배계층인 양반엘리트가 정통 이데올로기였던 유학과 ‘공생의 관계’ (a symbiotic relationship)를 이룬 것처럼, 서북교권도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한국교회 ‘중심 신학’으로 교조화 시키고 이와 공생관계에 들어섰다. 성경무오설, 축자영감설과 같은 보수적 근본주의 선교사들이 전수해 준 그 신학이 ‘정통’이 되었다. 이것이 서북신학이고 이것이 한국교회신학이 되었다. 어떤 이가 이 신학에 의문을 갖거나 비판하면 양반 엘리트들이 정통유학에 의심을 가진 이들에게 그러했듯이, 막강한 서북교권이 나서 ‘단죄’하였다. 1934년 장로교총회에서 이 서북교권의 신학에 도전하는 이들이 제소된 사건이 있었다. 목사 김영주가 모세의 창세기 저작을 부인했다는 것과 목사 김춘배가 여성에 대한 성서의 기록에 관한 논의가 문제가 된 것이다.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에 뿌리를 둔 보수적 근본주의라는 서북교권의 정통신학에 대한 고등비평에 기댄 도전은 총회의 ‘정죄’로 억압되었다.
신학자 김재준의 글들은 항상 서북교권의 정통신학에 의해 배척당한 것은 너무나 잘 아려져있다. 해방이후 교단의 분열도 이 근본주의신학을 교조화한 교권의 억압과 이어져있다. 아직도 우리 기독교에서는 교권싸움이 신학싸움으로 이어지고 이는 또한 정통이네 이단이네 하는 싸움으로 이어지고 있다. 교권을 가진 이들이 교조주의의 늪에 깊이 빠져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한국 기독교 안에서 이루어진 근본주의 신학의 교조화가 이루어지는 과정 한 가운데 박형룡과 그의 신학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1953년 9월 2일 장로회 신학교 교장 취임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 敎會의 神學的 自我意識의 發現에 呼應하여, 韓國敎會神學의 確立에 挺身할 것이다. 韓國敎會 神學의 確立이란 決코 우리가 어떤 神學體系를 創造함이 아니라, 使徒的 傳統의 正信仰을 그대로 保守하는 神學, 우리 敎會가 七十餘年 前 創立되던 當時에 받은 그 神學을 우리 敎會의 永久한 所有로 確立함을 이름이다.“
그렇다. 박형룡의 ‘신학’은 새로운 진리를 찾아 나선 신학자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 학인도 아니다. 그는 이미 구한말 서양선교사들이 전해준 정통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학을 한국교회의 “영구한 소유로 확립”하려 했던 교의주의자요 이를 한국교회의 교조로 만들려고 온몸을 던진 투사였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박형룡은 줄곧 서양 선교사들에게 오래 전에 받은 정통 칼빈 신학을 그대로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고 말해 왔다.
우리는 ‘옛 신학’을 보수하려는 박형룡의 태도가 자못‘전투적’이었다는 사실에 주복하고자 한다. 그가 지켜야할 ‘정통’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통」 (Orthodoxy)이라는 말은 「옳은 의견」 (Orthodoxos)이라는 말이다. 다수인, 혹은 주권자에게 채용, 혹은 우세를 얻었거나 말았거나 「옳은 의견」이면 정통신앙이다. 참으로 「옳은 의견」이란 여럿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 뿐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진정한 전통은 오직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비정통이란 무엇인가?”고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아주 명쾌하다. 그의 말을 따와보자.
“이미 정통의 계념이 천명된 지금에 와서 비정통을 정의하기는 용의할 것 같다. 전통과 틀리는 것은 다 비정통이라고 단언하여도 잘못될 것은 없을 것이다....그런데 비정통이란 말은 다른 말로하면 곧 이단이다.“.
우리는 그의 신학의 내용을 따지면서, 그리고 성서의 구절을 여기저기서 따와서 어느 부분이 옳고 어느 부분이 그르다고 판단하는 자리에 있지 않다. 그것은 성경신학자들과 조직신학자들의 몫이다.
우리는 다만 신학자 박형룡의 지성구조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두 따옴에서 분명해 지는 것은 장동민이 지적한 것처럼, “한국적 배경”에서 잉태된, 다시 말하면 유교적 교조주의 전통과 이어지는 우리 지성사에 나타난 교조주의적 ‘흑백 이분구조’를 박형룡에게서 읽는다. 장동민은 이렇게 맗나다.
“척사위정을 외치는 수구파의 유학자들이....유교의 성리학을 정학 (정학)이라 하고 그 외의 양명학이나 불교 혹은 서학 등을 사학 (사학)이라고 부르며 이단시 하였다....(이들은) 정통과 이단의 이분법을 그 당시의 상황에 적용시킨 것이었다. 박형룡(은)...척사위정파에 속하지 않았지만. 박형룡에게서 이러한 구분이 뚜렷한 것은 유교적 전통의 영향도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렇다. 박형룡에게는 모든 것을 단순화 시키는 경향,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는 경향,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지성구조, 그리고 복음주의 신학 안에서도 다양한 생각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 하지 못하는 자기 확신이 용해 (fusion)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박형룡과 그의 신학이 권력 (교권)과 이어져 끊임없는 분파와 그 분파 사이에 적대감을 낳게 되고, 이러한 현상은 연합하지 못하는 오늘의 교회로 자라게 한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 지성사에서 박형룡을 읽으면서 우리가 주목하는 현상은 그가 ‘미국주의,’ 특히 남부 백인들의 ‘미국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유교 교조주의적 엘리트들이 중화주의에 매몰되었던 현상과 흡사하다. 보기를 들어 흑인 민권운동가로 많은 이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는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박형룡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한번 보자. 그는 극우 보수기독교문서 (Christian News, 1968년 4월 15일)를 길게 인용하고 있다. 그의 ‘현대신학비평’에 말이다. 킹 목사는 “불신앙자로 알려지고 많은 공산주의자들과 결탁하여 공산주의 운동을 원조하는데 많은 시간을 쓰고 「비폭력 (非暴力)의 사도 (使徒)라」는 외식적 칭호 아래서 미국의 여러 거리들에 폭동과 방화를 충동함에 시간을 보내는 인물”로 보였다. 미국의 남부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시각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미국의 이런 국우 기독교 흐름을 고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박형룡에게는 미국 부통령을 지낸 험프리 (Hubert Humphrey)는 “과격한 자유주의자,” 반전가수 조안 바어스 (Joan Baez)는 “우명한 무신론자 민속가수”로 보였다.
우리의 지성사의 흐름에서 읽은 박형룡은 유교 지배 엘리트들이 전통시대에 유교적 교조주의적 틀이나 전통시대 중화주의 늪에 빠져 있었던 것처럼 또 하나의 교조주의, 이름을 달리한 또 하나의 중화주의에 빠져 있다. 그것은 기독교 교조주의 이고 남부 백인에 기댄 미국주의이다.
꼬리글
신학자 하비 콕스는 “율법”이란 “이어받은 규례에 무비판적으로 우리를 붙들어 매는 것,” 다시 말하면 “과거에의 속박”이라고 정의하면서, 율법이란 “문화적 기대와 관습에 순종하도록 우리를 몰아대며, 우리를 대신하여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을 통해,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방법으로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복종을 강조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루돌프 불트만은 율법을 “이 세상의 기준”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렇다 유교적 교조주의도, 우리 교회의 근본주의라는 교조주의도 권력이나 교권을 가진 이들과 합세하여 민중이나 교인들에게 ‘복종’을 강요하며 억압하였다. ‘나의 믿는 바’를 ‘다른 이들’이 간섭하고, 선택하고 그리고 통제하려고 한다. 이것이 율법주의이고, 이것이 교조주의다.
우리는 교권가진 자들의 율법을 통한 통제, 교조화 된 정통신학과 교리의 억압을 “이 세상의 기준”이라고 규정하고 “복음”으로 “자유 함”을 추구한다. “역사 속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로운 결정을 내리도록 이끄시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자유와 책임을 원하시는 분,” “소망 가운데 장래를 보여주시는 분,”이분을 만난 사람들은 “인간을 미성숙”하다며 들이대는 율법이나 교조주의라는 “관례와 전통”에 “노예”되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이들이다. 교권주의자들이 교조화한 신학이나 율법이 단 하나의 진정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믿지 않을 자유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의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비 콕스는 말하고 있다. “인간은 율법 없이 살 수 없다. 그러나 율법이 그의 (삶에) 결정적인 요인이 될 때, 그 인간은 이미 참다운 인간이 아니다.” 우리의 지성사에서 박형룡을 읽으며 오늘 우리의 모습을 성찰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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