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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5월 21일 테일러는 영국 요크셔의 반슬리에서 태어났다. 왕성한 활동을 하는 감리교 설교자이고 약사인 아버지와 온화하며 인내심 많은 성품을 가진 어머니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목회자들이 사역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테일러집에 모여 여러가지에 대해 대화한 내용이 어린 테일러에게는 큰 감명을 받았다. 중국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아버지는 아들을 선교사로 중국에 갈수 있도록 기도했다.
1832년 5월 21일 허드슨 테일러는 영국 요크셔주 반슬레에서 태어났다. 허드슨 테일러는 복음적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5살이 되자 두 동생을 앉혀 놓고 설교를 하곤 했다. [나는 어른이 되면 반드시 다른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선교사가 되면 중국으로 가겠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가 훌륭한 인격을 가진 신앙인이 되도록 교육에 힘을 썼다. 그러나 허드슨이 11살이 되어 학교에 다니면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는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던 그가 학교에 가서 책상 위에 엎드려 기도하면 와! 허드슨이 기도한다]하며 아이들이 비웃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학교를 그만 두었고 15살의 나이에 한 은행에 취직하였다. 그는 선배 동료들의 나쁜 영향으로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것인가 하는 생각만 하였다.
1832년 테일러는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났다.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이자 약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와 마음에 선교의 열정을 심어주려고 애썼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1832년 테일러는 영국 요크셔의 반슬리에서 태어났다. 왕성한 활동을 하는 감리교 설교자이고 약사인 아버지와 온화하며 인내심 많은 성품을 가진 어머니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목회자들이 사역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테일러 집에 모여 여러 가지에 대해 대화한 내용이 어린 테일러에게는 큰 감명을 받았다. 중국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아버지는 아들을 선교사로 중국에 갈수 있도록 기도했다. 테일러는 어린 시절에 메드 허스트의 China를 읽고 중국에 대해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1849년 허드슨 테일러는 17세에 소책자를 통해 거듭난 체험을 한 후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뜨거운 정열을 갖게 되었다. 그는 불같은 열정을 소유하게 되었다. 주님 앞에 항복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서원하고 기도로 일관했다. 그 후 선교 준비과정으로 의학을 공부하면서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훈련을 했다.
1854년 허드슨은 스물 두 살의 나이로 다섯 달 간의 위험한 항해를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가 상해에서 자리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전쟁터와 방불한 곳에서 불안감을 느꼈고 물가가 폭등하여 생필품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누더기만 걸치고 거치처럼 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무더운 여름철이 되면서는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고 심한 먼지 때문에 눈병까지 앓게 되었다. 이런 비참한 땅에서 사는 가련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복음(福音) 밖에는 희망적인 소식이 없다고 생각한 허드슨은 한차례의 전도 여행이 끝나면 쉴 사이도 없이 다음 차례의 전도여행을 준비하였다. 이렇게 강행된 전도여행은 15개월 동안 10차례 이상이나 되었다. 그 기간에 중국어 신약성경 1800권과 2000권이 넘는 전도 책자들을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중국인들은 문맹자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만큼의 책자를 나누어 주었다는 것은 테일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1857년 허드슨 테일러는 선교 본부와 불편한 관계를 계속하다가 중국 복음화 선교회를 탈퇴하였다. 그 후로부터 그는 중국 내지를 다니며 선교(宣敎)를 했다.
1858년 26살이 된 허드슨은 영적 스승인 윌리암 번즈 목사와 동역하여 꿈에 그리던 내륙지방으로 진출하였다. 이때 노예 매매가 성행하는 광동성 산두지방에 위험을 무릎 쓰고 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그 지방을 변화시켰다. 그는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온종일 복음을 전하고 저녁 때 거처로 돌아올 때는 몸이 피곤에 지쳐 다리를 겨우 끌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너댓 시간 후면 다음 날의 전도를 위해서 다시 침상에서 일어났다.
1860년 윌리엄 캐리가 선교로 나간 약 70년 후인 허드슨 테일러의 열정은 중국의 심장부 깊숙이 전해져 그는 [뱃길 닿는 곳에서만 선교해서는 안 된다. 내지로 들어가자]하며 중국 내지 선교회를 만들어 내지로 들어가서 선교를 했다.
1865년 테일러는 중국 내륙선교회를 창설했으며 지금까지 수천명의 남녀를 중국에 파송하고 있다. 중국이 공산화된 후 1964년 이름을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으로 변경했다.
1866년 테일러는 의학 수업을 마치고 아내와 자녀 16명으로 구성된 선교사 일행과 2차로 중국행 배에 탔다. 조직체가 설립된 후 1911년 1월 1일 중국내지선교회와 관련된 선교사는 968명에 이르렀다. 기금도 개인적이나 공적으로 모은 것이 아니라 오직 기도로 매달려서 했다. 그의 물질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것은 그의 사역에 간섭하시며 개입하시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천하에 알리게 되었다.
1866년 허드슨이 34살의 나이로 중국에 2차 전도여행을 갈 때는 지망선교사 16명이 동행하였다. 이들의 헌신으로 1년 만에 항주에 세운 교회당에 모이는 신자들의 숫자가 1500명이 넘게 되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개척지 양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1905년 6월 73세로 마지막으로 테일러는 중국을 방문하고 중국 호남성에서 생애를 마쳤다.
1905년 테일러는 호남성에서 73살의 나이로 열정적인 전도자의 일생을 마쳤다.
내지 선교회는 중국의 모든 성(城)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선교회가 설립 된지 30년이 경과된 1895년에는 64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중국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헌신했다.
중국으로의 부르심은 테일러에게 꿈이나 낭만이 아닌 현실적인 헌신과 준비였다. 중국인들을 주님 앞으로 당시 중국에서 기독교의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홍수전이 청(淸) 왕조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여 주도한 태평천국의 난(1850년)은 맹렬하였고 초창기의 성격을 잃고 부패한 정치적 운동으로 타락하고 있을 때였다. 이럴 즈음,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인들을 예수님 앞에 인도하기 위해 1854년(22세) 중국 땅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테일러가 병원에 실습생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아버지와 중국선교협회로부터 생활비를 부담하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 제안을 수락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가 게을러지고, 중국선교에 대한 훈련이 게을러질 것 같아 이를 거절했다.
테일러는 17세 되던 어느 날, 아버지의 서재(書齋)에서 신앙서적을 읽고 거듭남을 체험했다. 그는 책을 읽던 중 한 구절에 사로잡혔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일이라는 구절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잘 알고 있던 하나의 진리가 예전에는 그냥 흘려버렸지만 새롭게 그의 마음속에 와 닿았던 것이다.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왜 그리스도께서 죄를 속하시고 다 이루셨다고 표현하셨을까? 그는 자문했다. 다 이루었다? 무엇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인가? 그는 순간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함을 떠올리며 대속자가 죄의 빚을 모두 청산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는 당시 [이제 이 세상에 내가 할 일이라고는 다만 무릎을 꿇고 겸손한 마음으로 구주를 모셔 들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테일러는 17세가 되어서 회심하였다. 그때부터 테일러는 그의 목표를 중국 선교사로 가는 것에 맞추었다. 비록 복음 전파가 그의 유일한 목적이었지만 그는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18세 때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작은 시골의 의사 아래 공부하다가 후에 런던 병원의 수련의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테일러는 선교사역을 위해 철저한 훈련을 하며, 오직 믿음으로만 살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그러던 중 그에게 중국에 갈 기회가 다가왔다. 기독교 신앙을 고백했던 홍수전이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이 중국에서 들려오자 그는 불가피하게 의학공부를 중단했다. 중국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 테일러의 의학공부를 후원했던 중국 복음화 선교회로서는 기도의 응답인 것 같았기에, 그들은 테일러가 공부를 중단하고 즉시 중국으로 가기를 바랐다. 그리고 1853년 9월, 21세의 나이로 테일러는 중국을 향해 떠났다.
테일러는 17세에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선교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의 나이 21살에 중국으로 출발했다. 그가 중국어를 배우며 내륙 지방을 여행하며, 중국인 옷을 입고, 중국인 머리 모양을 지니고(길게 따 내렸음) 등 중국인 문화를 수용해 갔다. 이것은 기독교가 서구 문화의 옷을 걸치고 있는 동안 기독교는 자신들의 것이 아니다라고 느겼던 Taylor 당시 사람들의 전통적인 관념으로부터의 급진적인 발전이었다. 다른 선교사들은 비판했으며, Taylor와 그의 접근 방식을 조롱했었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와 파송교회는 선교 사역에 자신들의 문화를 주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교학적 원리로 세워 나가고 있는 현재의 선교원리를 세우고 있었다.
테일러는 17세에 소책자를 통해 거듭남의 체험이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뜨거운 정열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특별한 회심은 없었다. 남들처럼 뜨거운 사건도 없었지만, 그는 불같은 열정을 소유하게 되었다. 주님 앞에 항복하고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서원하고 기도로 일관했다. 그 후 준비과정으로 의학을 공부하면서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훈련을 했다. 마치기전에 중국으로 떠났다.
테일러는 내륙선교의 기지가 된 영파 지방에 옮겨 온 후 파커 박사를 동역자로 얻어 선교사역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이때 외국인 학살 계획이 세워져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곳 영파에서 동역자 다이어양을 만나 결혼하였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생긴 난민들을 돕고자 무료 급식소를 열었으며 교회를 맡아 시무하였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였다. 그는 주와 복음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한 결과 현지인 동역자들을 얻게 되었다.
테일러는 맏딸, 막내아들 그리고 헌신적인 동역자를 차례로 잃었으며 이 와중에 천진대학살 사건을 겪었다. 그는 성경 여백에다 다음을 같은 기도문을 적어 두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앞으로 1백 명의 선교사들을 추가로 더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저로 하여금 주님의 큰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소서]. 그가 기록한 이 기도문이 기독교 신문에 기사화됨으로 영국인들 안에 중국 선교에 대한 관심의 열풍이 일어났다. 가까스로 건강이 회복되자 45살의 나이로 다시 중국을 향해 떠났다.
테일러는 물질이 전혀 없는 형편에서 중국으로 떠나야 했기 때문에 기도만이 이 문제의 해결책임을 믿고, 기도로써 물질을 공급받고자 하였다.
테일러는 복음적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5살이 되자 두 동생을 앉혀 놓고 설교를 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는 웅변이 뛰어난 감리교 지방 설교자이자 약사이며, 그의 어머니는 매우 온화하고 인내심이 많은 여인이었다.
테일러는 선교 초기 6년간 (1854-1960) 에 디른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사역했다. 그 후 때를 따라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서 독립적인 전도자로서 활동했다. 그 후 마리아 다이어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원대한 선교의 계획을 세우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하였다. 같이 선교한 후 병으로 다시 고국으로 귀국 후 5년간 의 운둔 생활을 하면서 중국 성경을 개정했다.
테일러는 아버지의 능력과 어머니의 온유한 성품을 물려받았다. 그의 어머니 아멜리아가 허드슨을 임신했을 때부터 남편 제임스 테일러와 태아를 놓고 중국의 사역자로 부르시길 서원 기도하였다.
테일러는 어린시절에 메드허스트의 China를 읽고 중국에 대해 열정(熱情)을 가지게 되었다.
테일러는 여러 곳을 여행하며 많은 중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는데, 이는 그가 설교를 유창하게 잘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해박한 지식 때문도 아니라 잃은 영혼을 향한 그의 간절함 때문이었다.
테일러는 예수님만을 위해서 살고 영혼들에게 구원(救援)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고, 전도의 목표를 위해 언어, 의학, 기도훈련을 철저히 감당하였으며, 고난과 시련을 겪으며 감당한 헌신적인 전도생활을 실천하였다.
테일러는 중국 선교사로 부르는 성령(聖靈)의 음성을 듣고 훈련에 착수했다. 먼저 올바른 정신자세와 생활태도 그리고 건강한 몸을 위해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운동(運動)을 시작하였다. 잠과 음식을 절제하는 훈련을 하였다. 교회생활과 전도생활을 충실히 하였다. 중국어를 배우고 의술을 익혔다.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자 빈민촌으로 거처를 정하는 장막훈련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테일러는 선교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철저한 자기 부인(否認)의 훈련을 하였다. 오직 믿음만으로 살기 위한 노력이었다. 테일러는 [생활에서도 선교훈련을 받는다]라고 생각하고, 영국에서의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고생스러운 생활을 견디는 법을 배우기 위해 침대도 없애고 딱딱한 바닥에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식사도 가장 값이 싼 청어를 커피와 함께 삼키기도 하며, 감자 대신 콩과 쌀 푸딩을 먹고, 양배추를 식초에 절여서 먹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사역하면 내가 필요하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얻을 수 없다. 내가 의지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러므로 영국을 떠나기 전 오직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 했다.
테일러는 중국선교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사람이었다. 허드슨은 여러 선교지역에서 많은 경험을 하면서 놀라운 진리를 깊이 터득하게 되었는데 이는 선교사역을 추진시키는 원동력은 온갖 고난과 시련 속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헌신으로 북미,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호주, 뉴질랜드에 중국선교회 지부가 설립되고 이렇게 하여 한때 중국에 모여든 선교사는 1천명을 넘었다. 그가 말년에 선교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한 지방에 이르자 성문 위에서 금빛으로 내륙 은인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테일러는 중국으로 향하는 첫 항해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남았다. 하나님께 전적인 순종을 다짐하며 모든 것을 공급하실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테일러는 중국으로 향하는 첫 항해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다. 테일러는 하나님께 전적인 순종을 다짐하며 모든 것을 공급하실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테일러는 지식인들과 정식 목회자들로서는 중국의 복음화가 요원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영국의 많은 노동자들 중에서 헌신된 남녀 일꾼들을 모집했다.
테일러는 평신도 설교자이자 약사였던 그의 아버지 제임스 테일러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중국에 주목하게 된다. 그가 거듭난 후 중국 땅을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한 가지 음성을 들었다. [너는 나를 위하여 중국으로 가라.] 그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하나의 목적과 기도로 일관되어 중국으로 떠날 모든 준비를 했다.
테일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바치고 성령의 지도를 받는 신앙, 경제적 지원을 하나님께 의존하려는 신앙, 동정심과 겸손한 태도, 환경에 적응하려는 기술, 봉사에 열정적이고 낙심하지 아니하는 자세,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태도, 국내에서 교회 일의 경험, 건강을 선교사의 자격으로 규정했다.
테일러시대에 모든 선교 단체들은 사역의 범위를 섬과 연안지역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도하는 20대에 그는 중국의 내륙에까지 선교사를 보낼 수 있는 새로운 선교단체를 꿈꾸었다. 많은 사람들의 "왜 새로운 선교단체를 만들었는가? 언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입하게 되었는가? 연안지방의 사역을 마무리 하지도 못하고 왜 내륙으로 들어갔는가?"라는 질문했다. 그러나 그는 고착화된 형틀을 깨뜨렸다. 어느 주일 그는 교회에서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는 표현하길 "수백만이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동안 수천명 혹은 그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안전함을 즐기고 나오는 성도들의 모습을 도저히 처다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영적인 고뇌와 함께 해변을 거닐었고, 그때 하나님께서 나의 믿음 없음을 지적하셨고, 나는 중국의 영적인 필요와 요구에 내 자신을 다시한번 더 하나님께 헌신했다. 이것이 Taylor의 벧엘이 되었다.
테일러에게 글리너의 편집국장인 찰스버드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테일러에게 중국선교를 이야기하며, 당신이 의사공부를 중지하고 지금 당장 중국으로 들어가길 원한다면 우리는 자네를 파송할 것이라고 말했다. 1년만 공부하면 의사가 되는 터이지만 허드슨 테일러는 고민할 여지도 없이 가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1853년 9월19일 중국 선교회라는 단체의 파송을 받아 중국선교의 길로 들어섰다.
테일러와 동행하며 여행을 하던 윌리암 번즈는 테일러가 편리하고 편안하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중국 옷을 입고 다녔다.
테일러의 부모는 약제사였는데, 그의 약국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그의 친구들은 모이면 감리교회의 발전상황과 선교사역에 대해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특히 중국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테일러의 삶을 보면 때를 따라 당시 수 많은 사역자들을 만나게 됨을 볼 수 있다. 특별히 무디와의 만남은 주목할 만하다. 테일러의 도움으로 영국에서 무디의 사역이 놀라운 방법으로 해외 선교의 진전을 가져오는데 일조하였기에 중국 내지 선교회 역시 무디의 사역에서 도움을 받았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허드슨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중국으로 부르셨다는 강한 확신 속에서 선교사로서의 구체적인 준비와 훈련에 들어갔다. 허드슨에게는 중국어 사전도 문법책도 없었고, 단지 만다린어(중국의 표준어)로 된 누가복음서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사전을 만들어 가면서 중국어를 공부했다. 그는 중국에서의 고된 생활에도 대비하기 위해 푹신한 침대 같은 편안한 것을 스스로 걷어 치웠다. 실제로 그는 준비하는 동안 인간의 모든 도움을 외면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자신의 필요를 아뢰고 하나님을 통하여 공급을 받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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