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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 등정기
2010년 2월21일 일요일 노포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아침9시 출발한 인천공항 가는 우등 시외버스는 경부고속도로 칠곡휴게소와 천안삼거리휴게소에서 쉰 뒤 신갈 분기점에서 영동선으로 갈아타고 이어서 경인고속도로와 인천대교를 달려 나타난 공항 터미널 출입문 바로 앞 플랫폼에 가뿐하게 정차한다.
몸뚱어리만한 시커먼 솔트렉 카고백을 9개를 짐칸에서 들어내어 카트에 나눠 싣는다. 짐은 25㎏을 초과하지 않아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심 끝에 짐을 꾸렸다. 내용물은 이렇다. 45리터 배낭, 허리 쌕, 침낭, 다운재킷(우모복)과 오버트라우저(방풍, 방수복), 여벌옷과 내의, 양말, 모자, 보온두건, 선글라스, 방한마스크, 발라크라바(얼굴가리개), 목수건, 방한장갑, 사이클 장갑(손가락 나오는 장갑), 등산화, 운동화, 등산스틱 한 벌, 칫솔, 치약, 수건, 손수건, 선크림(자외선 차단), 립밤(입술보호), 휴지, 사진기, 헤드램프, 배터리, 필기구, 수첩, 소형아미나이프세트, 시계, 진통제, 소금, 생생우동 10개, 햇반 10개, 플라스틱 소주 200㎖ 10개, 사탕 몇 봉지, 초콜렛엿 몇 봉지, 그리고 특별히 황태 특대 한 마리를 넣었다.
힘이 거의 안 드는 반자동 카트는 끄는 맛이 있는지라 요리조리 재미삼아 몰고 다닌다. 대한항공 카운터에 가서 탑승수속과 수하물을 탁송하고 있는 데 눈에 확 띄는 주황색 카고백을 가진 송 선생님이 합류한다. 72세인데도 무척이나 정정하시다. 등정회원 10명이 다 모인 것이다. 시간이 남아 1층 식당코너로 가서 자장면 한 그릇 하면서 긴장을 푸는 의미에서 소주를 몇 잔 곁들었다. 오후 4시경에 출국장으로 이동하여 보안검색과 출국심사를 마치고 마침내 장도(長途)에 오른다. 오후5시20분. KE651 편 코리안 에어.
방콕 도착하니 현지 시각으로 2.21. 오후8시20분, 시차는 한국 대비 -2시간 . 면세구역 안에 이리저리 다녀 보다가 눈에 드는 게 없어 탑승게이트 근처로 옮겨 술 코너에서 맥주를 주문한다. 안주로 닭고기가 좋을 것 같아 같이 시킨다. 배낭에서 소주를 꺼내 맥주와 섞는다. 처음에 세 명이던 것이 마칠 무렵에는 여섯 명으로 늘었다. 종업원이 와서 뭐라 뭐라 하는 데 현지 말이라 알아듣지는 못해도 눈치를 보니 소주를 마시는 것에 대해 주의를 주는 것 같다. 마침 나이로비로 떠나는 비행기의 보딩패스 체크가 개시되는지라 자연스레 자리를 뜬다.
야간열차, 심야버스가 있듯 22일 0시 방콕 발 나이로비 행 야간비행기 KQ861편은 시커먼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양주가 오징어 비스킷 육포와 함께 하면서 등받이가 직각인 의자에 직각으로 앉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밤과 씨름하고 새벽녘에 의자 밑바닥에 누워 곯아떨어지고 착륙을 알리는 멘트에 다시 일어나 해장으로 다시 한 컵씩 갈라 마시자 2병의 시바스 리갈은 바닥이 빈 채 아프리카의 재활용품으로 남았다. 9시간 동안 인도양을 건너가는 동안 한자리에 꿈쩍 않고 잠을 청하는 게 고역인 기내(機內) 현실을 감안하면 제 살 깎아 먹는 이런 자해요법이 필요한 것이라고 자평하면서 비행기를 빠져나온다.
2.22. 아침 6시다. 한국시간으로는 12시, 시차가 -6시간이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고 집합하여 대장님의 훈시를 듣는다. “우리의 구호는 ‘해피 투게더’입니다. 한 사람도 정상에 못 올라가는 일이 일이 없도록 우리는 서로 아끼고 협조해야 합니다. 모두 등정에 성공하여 함께 행복한 것이 이번 산행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마랑구 게이트, 만다라 헛(Hut 산장, 대피소를 말함), 호롬보 헛, 키보 헛, 한스마이어 동굴, 길만스포인트, 우후루피크- 이것이 킬리만자로 등정의 핵심 코스입니다. 산장마다 하루나 이틀 머물면서 원기를 회복하고 고소 적응을 하고 국제적인 등정 체험을 하게 됩니다. 모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지나친 음주나 음식섭취는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나이로비공항.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접한다. 벌써 냄새가 다르다. 보다 가공하지 않은 자연의 냄새가 제일 먼저 다가와 코를 타고 쏙 들어선다. 사람에게 나는 체취도 적도의 태양처럼 진하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는 호미니드(인류의 조상)의 고향이자 인류의 요람이며, 인류 최초의 공동체가 출현한 무대이자 최초의 문화가 꽃핀 현장이다. 또 인류가 최초의 도구를 만들고 최초의 언어를 말한 장소이며, 인류 최초의 예술적 표현이 공연된 극장이기도 하다. 바로 이곳에서 플라이스토세의 변이가 일어나 우리 조상들이 유라시아와 세계로 퍼져 나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아프리카인이며,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근원과 연결을 회복해야 한다.」(분노의 지리학. 하롬 데 블레이)
마중 나온 사랑아프리카여행사 김정학 사장이 다가와 인사를 나누고 나이로비 국제공항 터미널 플랫폼에 주차한 도요타 중형버스로 안내한다. 우리가 짐을 옮기려 하자 손 사레를 치며 말린다. 대기하고 있던 운전수와 인부가 다가와 짐을 옮긴다.
나이로비란 마사이어(語)로 맛있는 물, 차가운 물이라는 뜻이다. 케냐 중남부의 해발고도 1,676m의 고원에 있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마사이족, 키쿠유족의 거주지였는데 도시로서의 나이로비의 역사는 100년 정도인데 인도양 연안의 몸바사에서 우간다의 빅토리아호 연안을 연결하는 철도건설을 위해 1896년 이곳에 전진기지가 설치되었다. 1899년 나이로비까지 철도부설이 완공되었고 그 후에도 기지로서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지방의 행정기관들도 마차코스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졌다. 기후의 쾌적함과 원활해진 교통조건 때문에 백인 입식자(入植者)들은 나이로비를 중심으로 ‘화이트 하일랜드’라는 광대한 지역을 형성하여, 동아프리카의 중심적 대도시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차가 나이로비 공항을 빠져나오기도 전에 우리는 깊이 잠들었는데 덜컹 하고 차를 대는 소리에 눈을 떠니 시내에 있는 한국식당(Han Kook Restaurant) 정원 안이다. 소고기 곰국 비슷한 회색의 스프를 회원들 모두는 밥에 말아 김치와 함께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한국 사람인 식당 사장님은 출타중이라 여행사 김 사장이 대신 설명하는데 나이로비에서는 한식 취급하는 곳은 이곳 밖에 없다 한다. 농아들을 전부 종업원으로 고용했다는 이야기에 국경을 넘은 인간애를 떠올린다. 마랑구 게이트가 있는 모시까지 가는 길이 워낙 멀어 지체할 수 없다는 채근에 우리는 서두른다.
인구 280만 명의 나이로비 시내는 무척이나 붐빈다. 마침 출근 시간대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데 대개는 걸어 다니고 화물트럭 짐칸을 개조하여 사람들이 타도록 만든 차가 눈에 자주 띈다. 버스가 가끔 보이는 데 KBS라고 표시되어 얼른 눈에 각인되는 데 뒤에 알아봤더니 ‘케냐버스서비스’라는 말의 이니셜이란다. 차들이 보통 많은 게 아닌데 달리는 차들 틈으로 사람들은 여유 있게 큰길을 마구잡이로 건너다닌다. 아까 지나온 시내 중심가에서는 새카만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들과 원피스나 투피스의 정장차림의 멋진 가발을 쓴 매력적인 여자들이 거리를 채우고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여유로운 모습과 비교하면 대조적이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이야기 하자면 뚱뚱한 사람이든 마른 사람이든 걷는 품새가 아주 힘차고 날렵하고 보폭이 크며 옆에 서 있으면 바람소리가 일 것 같은 빠른 속도감이 난다. 이번에는 청년이 도로가를 뛰는 모습이 보여 유심히 보았더니 이건 영상물에서 자주 보았던 프로 육상선수 포즈와 영판이다. 양팔을 활달하게 움직이며 힘 안들이고 바람처럼 달려간다. 큰 키에 발달된 하지, 기름기 적은 몸매, 좋은 심폐-초원을 달려온 조상들의 내림인 모양이다. 아프리카인의 대다수는 지구상을 걸었던 최초의 인류로부터 내려온 직계자손이라서 그럴까.
나이로비 시내를 빠져나오자 도로 폭은 줄어들고 포장이 드문드문 끊겨가다가 마침내 비포장 일색이 된다. 남쪽으로 뻗은 이 도로는 2차로인데 동아프리카 지구대를 따라 아무런 장애물 없이 직선으로 머나먼 지평선의 끝까지 이어지는 장관이다. 지나는 곳 모두가 끝없는 초원이요, 광막한 대지다. 견문이 좁아 그런지 이렇게 너른 초원을 본 일이 없다. 마르고 키 큰 우산처럼 생긴 나무가 초원을 지배하는 주종인데 엄브렐라 아카시아 (또는 테이블 트리)라고 한단다. 초목 사이로 가끔 집들이 보이고 목뼈가 툭 튀어 오른 마른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오늘 여정은 케냐 수도 나이로비(Nairobi)에서 국경도시인 나망가까지 163㎞, 나망가(Namanga)에서 탄자니아 아루샤까지 123㎞, 아루샤(Arusha)에서 모시(Moshi)까지 78㎞ 도합 364㎞를 가야한다. 우리나라 고속도로 같으면 4시간 정도 걸리겠는 데 비포장 길이고 케냐-탄자니아 국경에서 출국심사와 입국심사를 받아야 하고 사온 점심도 먹어야하는지라 8시간 정도 걸리겠다고 한다.
마침내 국경도시 나망가-차들이 출입국심사를 기다리느라 즐비하고 국경초소와 사무소 건물이 서있고 거리에 사람들이 많아 우리나라 읍내 도심을 방불케 한다. 수속을 밟기 위해 차를 세우자 토착민 여자들이 대여섯 달라붙는다. 짐승의 뼈와 돌을 갈아 만든 수제 목걸이와 팔찌, 자그만 목 공예품, 조각, 짐승 이빨- 아주 새롭고 신기한 물건에 가격을 물어보니 한 개에 5달러에서 1달러 정도 하는데 묻기가 겁날 정도다. 파는 사람이 값을 한번 제시한 후 사는 사람이 값을 정해보라하면서 자꾸만 채근을 하며 여럿이서 동시에 달려들어 손에 있는 물건을 내미니 누구 것을 사야할지 난처하기 이를 데 없다.
화장실을 가야겠다 싶어 물어보니 출입국사무소 뒤편에 있다하여 찾아가니 남자가 돈을 받고 있다. 얼마냐고 물어보니 1달러를 요구해 급한 볼일인데 싶어 꺼내주고 화장실에 들어서니 하얀 사각 자기에 구멍이 뻥 뚫려있고 가장자리에는 가로 줄이 죽죽 나있는 발판이 있고 뒤쪽 벽에 잡아당기는 줄이 있는 물탱크(하이 탱크)가 붙어있다. 화장지는 아예 없고 물이 가득 담긴 플라스틱 용기를 잘라 만든 물통이 전부였다. 나중에 등산을 마치고 돌아올 때 다시 여기를 들렀더니 정확하게 알아듣는 사람 덕에 5인이 1달러면 된다하여 조를 맞추어 가니 지키는 여자가 있어 돈을 건네니 어찌된 영문인지 안 된다고 했다. 1달러 아니냐고 했더니 가지고 있던 새 지폐를 가리키면서 그걸 달란다. 돈을 바꿔주면서 일행은 폭소를 터뜨리고 시원하게 볼일을 보았다. 케냐 출국수속을 마치고 국경을 넘어 탄자니아 입국수속을 잠시 만에 마쳤다. 이제 탄자니아다.
탄자니아는 1945년 이후 영국의 신탁통치령이던 탕가니카와 1890년 이후 영국의 보호령이던 인도양의 섬 잔지바르가 1964년 합병조약을 성립함으로써 통합하고 국호를 두 나라의 머리글자를 합성하여 만들었다고 한다.(TAN+ZAN+IA) 동아프리카 대지구대가 지나가며 면적은 94만5천㎢(남한의 9배)인데 이중 초원이 40%, 산림지대가 38%를 차지한다. 인구는 4천만명, 새로운 수도는 도도마(구 수도는 다르에스살람), 행정구역은 26개주, 공용어는 스와힐리어와 영어이고, 킬리만자로, 세렝게티, 응고롱고로 등 자연공원 15개와 아프리카에서 제일 큰 빅토리아 호수, 인도양의 항구 다르에스살람과 잔지바르 타운과 펨바 섬이 유명하다.
나망가를 지나 탄자니아로 들어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 사바나(열대초원)에 그 사람에 그 소에. 지난 우기에 도로가 많이 유실되었는지 곳곳에 공사 중인 곳이 많아 직선의 도로에서 가끔 우회하는 길로 들어서 돌아가는데 등산을 마치고 올 때 미끄러운 우회로에 넘어진 차도 보았다. 달려가던 버스가 이면도로에 주차하면서 점심을 먹자한다. 아무 것도 없는 초원 한복판에서 점심을 먹는다. 가시나무와 가시 풀만 퍼렇게 돋아있는 공터에 아무렇게나 쪼그려 앉는다. 김밥 도시락을 먹고 있는 데 주변의 마사이족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 다섯을 이루는데 형제나 남매인 것 같다. 김밥을 나눠주니 잘 먹는다. 아이들은 순해 보이고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눈이 맑고 예쁘다.
마사이족은 케냐와 탄자니아 경계의 가시나무가 많은 초원에 거주하는 주민을 말하는데 평균 173 cm의 큰 키에 고수머리, 단정한 용모에 암갈색 피부가 특징이란다. 땅바닥을 파서 지은 반원형의 낮고 작은 진흙집에서 생활하며, 일부다처제로 남자들을 중심으로 몇 가족이 마을을 이루어 100∼200마리의 소, 그리고 염소 ·양 ·당나귀 등을 사육한단다. 농경은 하지 않으며, 소의 생혈(生血) ·젖 ·고기를 식용한단다.
달리던 차가 도시에 들어선다. 아루샤라고 한다. 아루샤는 한눈에 봐도 무척 큰 도시 같았다. 마침 학교 수업이 끝났는지 학생들과 행인들이 거리에 가득 하다. 아주 많은 상점들이 도로를 따라 늘어서 있는 데 그 중에 가장 많은 것이 자동차나 농기구 생활품 수리점이다. 한집 건너 한집이고 또 많은 게 우리말로 하면 구멍가게. 펩시콜라나 코카콜라 표시를 해 놓은 곳인데 이것도 상당히 많다. 뒤에 들으니 이곳은 모시와 함께 킬리만자로의 관문도시이며 서쪽의 응고롱고로와 세렝게티 국립공원으로 가는 관문도시라고 하였다
나이로비에서 아루샤까지는 A104번 도로를 따라 정남으로 내려왔고, 아루샤에서 킬리만자로 등산 도시인 ·모시까지는 A23번 도로를 따라 정동으로 나아간 버스는 모시 시내에서 철도를 따라 나있는 길을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다가 검은 철문이 있는 황토색 집으로 머리를 틀자 자동장치보다 빠르게 문이 열리고 수위가 인사를 한다. 여기가 스프링랜즈호텔(SPRINGLANDS HOTEL)
출입문을 빼고는 나갈 수 없는 성채로 된 유럽식 호텔의 정원은 열대수목( 알로카시아는 알겠다)으로 꽉 차 녹색공간의 시원함이 바로 느껴지는데 화단사이 사이에 걸어 다닐 수 있는 보도가 나있다. 정원에는 곳곳에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어 자연스럽게 휴식을 취하고 담소를 나눌 수 있게 되어있다. 짐을 내리고 정원에 모여앉아 숙소배정과 일정을 설명 듣고 2인 1실의 2층 숙소로 향한다. 동부 아프리카의 광활한 대지가 눈이 감감할 정도로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보이는 베란다가 정말 일품이다.
호텔 방은 정말 구식이다. 빛바랜 갈색 천으로 된 1인용 침대 2개가 놓여있고 천장에서부터 늘어뜨린 하얀 모기장이 묶여있고 조그만 장롱과 책장 같은 보관대, 화장실은 안쪽에 샤워꼭지가 한개 붙어 있고 세면대와 좌변기가 있다. 변기는 한국제보다 훨씬 크고 높아 우리가 볼일을 보기에는 발이 바닥에서 떨어져 벌렁 올라탄 것 같이 상상된다. 샤워를 하는 데 물이 나오다 안나오다 한다. 등정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여기에 하룻밤 묵었는데 이때도 똑같이 비누칠을 하고나서 물이 안 나와 방을 같이 쓴 이 사장은 단단히 화가 나서 벌거벗은 채 수건만 겨우 가리고 정원을 지나 호텔 프런트까지 용감하게(?) 걸어가 항의하던 일도 벌어졌다.
정원에서 맥주를 나눠 마시고 있는데 건너편에 말끔히 씻은 젊은 백인이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맥주 한 병을 손에 쥐고 있어 송 선생님이 영어로 ‘너 참 행복하게 보인다’ 며 말을 거니 자기는 현역 미군인데 킬리만자로 정상 등반을 마치고 오늘 내려왔단다. 휴가를 내어 미국본토에서 왔다는 이 병사는 늙은 사람이 말을 걸어도 뒤로 제치고 앉아 친구 대하듯이 하는 터라 공손하지 않다는 한국식 평을 받았다. 간단한 뷔페식 저녁식사를 마치고 여흥으로 맥주를 마시며 즐기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2.23 빵과 소시지 차와 과일로 아침을 때우고 8시가 좀 지난 시각에 출발한다. 마랑구 게이트까지는 우리 버스로 40분쯤 걸린다니 여유가 있다. 모시 시내에 가다가 구멍가게에 들러 콜라와 물을 사고 가이드와 포터 몇 사람을 태우고 경사가 심한 도로를 올라가자 무성한 열대우림 사이로 드문드문 주택과 가게와 숙박시설이 눈에 들어오고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공원 안내판이 있고 A자 형태의 공원관리사무소가 보인다. 여기가 마랑구 게이트(Marangu Gate). 킬리만자로의 동남쪽 끝에 있는 나들목이다.
킬리만자로는 케냐와 접한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주에 있는 가로30㎞ 세로50㎞의 동남방향으로 형성된 세계최대최고의 휴화산으로 탄자니아 국립공원 중의 한곳이다. 우후루피크(또는 키보봉이라고도 함)가 정상(summit)이며 높이는 5895m(19710피트), 아프리카대륙의 최고봉이며 아프리카의 지붕이라고 한다. 구름이 산의 중심부를 가리고 있는 때가 많고 구름위로 하얀 만년설이 쌓인 날카로운 끝이 잘린 원뿔 형태의 거대한 산으로 저고도의 열대우림(정글)과 중고도의 초원(사바나), 수목한계선 너머 황무지(무어랜드), 돌과 모래와 현무암 화산재로 덮인 급사면 산악지대(알파인 디저트), 빙하로 덮인 정상(아이스 캡)으로 구분된다. 1889년 독일의 지리학자 한스 마이어와 오스트리아의 산악인 루드비히 푸르첼러가 키보산 정상에 최초로 등정하였다. 또한 11㎞ 떨어진 마웬지(5149m)산은 케냐산(5199m)에 이어 아프리카 제3봉으로 1912년 독일의 지리학자 프리츠 클루테가 최초로 올랐다.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는 여행사의 안내에 따르면 마랑구루트, 마차메루트 등 6개쯤 된다. 등산하기 좋은 시기인 성수기는 1~2월, 8월, 그리고 10월 이후라 한다. 킬리만자로는 빛나는 산, 하얀 산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마랑구 루트는 편도 32㎞(왕복64㎞)로 보통 고소 적응 휴식 1일을 포함하면 5박6일 코스로 편성되어있다.
4. 호롬보산장 출발 키보산장 도착 휴식 후 야간출발 무박
5. 길만스포인트- 우후루피크 정상 -원점회귀 하산- 키보산장 -호롬보산장 도착 1박
킬리만자로 전문 여행사인 '자라 탄자니아 어드벤쳐스(ZARA TANZANIA ADVENTURES)' 에 따르면 이 코스는 코카콜라 루트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제일 쉽고, 제일 짧고, 가장 인기 있는 루트(the 'Coca Cola' Route is Kilimanjaro's easiest, shortest and most popular route)라는 데서 연유한단다. 또 다른 이름은 'Tourist Route'
차에서 내린 우리는 화장실에도 가고 주의사항도 읽어보고 사진도 찍고 기다리니 국립공원 관리사무소로 가서 입산수속을 하잔다. 우리도 사람들의 기름때가 묻어 반들반들한 입산자 명부에 볼펜으로 각자 여권번호와 직업 나이 주소 등을 차례대로 적어 넣고 기다린다. 이곳에서 산상의 각 산장 산막을 예약하고 숙박료, 안내료, 포터료, 입산료, 구조용 보험 등을 포함한 모든 요금을 지불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한국대인 우리뿐만 아니라 슬로베니아대도 길가에 앉아 수속절차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이곳저곳 둘러보기도 한다. 게이트 입구에는 산악공원지정 기념비, 개척자 등의 이름이 적힌 역사적인 기념물과 루트안내, 등산 주의사항을 게시한 안내판이 즐비하고 관리사무소 맞은 편 건물은 기념품 가게가 들어있다.
입산 절차가 끝나고 한사람씩 통과하게 되어있는 통문(通門) 앞에 이르니 책상 앞에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군인이 앉은 채로 지켜보고 있다.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냥 있는 품이 경비용도 질서계도용도 아닌 어중간한 지킴이 같다고나 할까. 근데 이 등산로는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가는 길이고 짐을 진 포터들은 차량통행 도로를 따라 별도로 가는 것이 이 공원의 규칙이란다. 고소 걸음으로 해발 1800m부터 걷는 것이 다소 어색했지만 가이드는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고 아주 천천히 걸어간다. 우리는 일렬로 천천히 그 뒤를 따른다. 그런데 포터들이 다니는 길에서 부드럽고 생기 넘치는 노랫소리가 들려와 물었더니 ‘킬리만자로 송’이란다. 이 노래는 킬리만자로 정상을 오르기 전에 부르면 오르는데 실패한다는 속설이 있단다.
“킬리만자로/ 킬리만자로/ 킬리만자로~ ~/킬리만자로/ 리맘레푸사나”
통문을 지나 우림 속으로 빠져드니 등산로를 빼고는 너무 울창하여 숲 내부는 전혀 보이질 않는다. 빗물이 흘러내린 흔적이 있는 하얀 공간들이 길처럼 보일 뿐이다. 등산로는 1~2m 폭으로 화산재 같은 붉고 폭신한 흙으로 덮어 마치 붉은 카펫을 깔은 것처럼 걷기에 아주 편하며 우수가 가로지르는 구배가 낮은 곳에는 길을 잘라 나무나 돌을 사용하여 수로를 만들어놓았는데 셀 수없을 정도로 총총하게 있다. 뿐만 아니라 길의 양옆에 나무를 덧대고 흙 쌓기라든가 배수로를 잘 가꾸어 놓아 평소에 얼마나 정성들여 길을 다듬는지 알 것 같다.
숲은 짙은 그림자를 드리워 내내 시원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포터들이 다니는 큰길과 마주치는 지점까지 오니 이곳이 점심을 먹는 장소라고 한다. 마랑구 게이트와 만다라산장의 중간지점인데 각각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곳이라고 적혀 있다. 아침에 호텔에서 미리 받은 점심 도시락을 꺼낸다. 비닐 주머니에 빵과 크로케, 닭고기 조각, 망고주스, 과일과 탄자니아 땅콩이 들어 한 끼 식사로는 넉넉했다. 갑자기 숲에서 시커먼 몽구스 한 마리가 나와 어슬렁거린다. 와따~ 크기도 하고 검기도 하고. 실물로는 처음 보는지라 감탄사 연발이다.
훤하게 트인 산비탈 위에 지은 만다라 헛(Mandara Hut)에 닿은 것은 오후 3시30분. 마랑구에서 4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맞닿은 초록지붕 끝의 각이 예리한 돛 모양의 산막이 식당 건물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데 태양광 발전을 위한 솔라 셀(solar cell) 판이 지붕에 붙어 있다. 해발고도가 2720m로 거의 백두산 높이인 이곳은 약간 찹찹한 기운만 돌아 열대지역에 있음을 실감한다. 포터들이 져다놓은 카고백을 들고 배정된 산막에 들여놓고 자유시간을 갖는다. 서쪽으로 산을 등대고 숲을 잘라내어 산 아래 초원을 향하여 열린 산장을 지어놓아 안정감과 전망이 뛰어나다. 공동식당 외에도 조리장, 화장실, 세면대 시설이 되어있고 산막 1동에는 4명이 잘 수 있는 구조로 잠자리에는 매트가 깔려있다.
발전기의 용량이 모자라는지 식당에 해가 져도 불이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켠다. 그리고 각자의 헤드램프가 밝혀지고. 산에 들어와서 처음 대하는 식사자리라 흥을 돋우는 소주가 나왔지만 전날의 과음으로 인해 술이 들어가지를 않는다. 뜨거운 물에 탄 코코아를 몇 잔 마시고 본 메뉴인 크림스프와, 햇반에 명란젓과 김치로 한 그릇 비우고 나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빵과 과일, 현지 음식들이 연이어 조리되어 나왔으나 별로 손이 가지 않는다. 쿡의 얼굴이 밝지 못하다. 현지에서 조리한 음식은 잘 안 먹고 자기들 보따리에서 꺼낸 음식과 하얀 코리안 위스키만 쫄쫄 빨아대고 있으니 말이다. 식곤증이 몰려와 사람들의 눈꺼풀이 내려가고 심지어 조는 사람까지 나온다. 자연스레 해산한다.
코고는 경쟁이라도 하는 듯 3명이 돌아가며 아주 높은 음으로 숨이 끊어질 듯 아슬아슬 코를 곤다. 카페인 섭취가 많았는지 깊은 잠이 들지 않고 자꾸만 깬다. 오줌이 채여 밖으로 나가 일을 보면서 하늘도 본다. 맑고 깜깜한 하늘에는 빼곡한 틈도 보이지 않고 시퍼렇게 번쩍이는 별로 가득 찼다. 아! 어딜 봐야 하지요? 이곳저곳 머리를 돌려보지만 아는 별자리는 많은 별 틈에 숨어버렸는지 찾을 수 없다. 보다 지쳐 젖힌 고개를 바로하고 산막으로 돌아간다. 한 시간 간격으로 눈이 떨어지는데 빛은 쉬 찾아오지 않고 머뭇거리며 저쪽 인도양 바다 위에 머문다.
2.24. 5시 어스름 새벽에 일어나 뒷정리하고 산책하다가 동쪽으로 난 식당 입구 베란다에 서서 빛이 피어나는 아득한 지평선을 향하여 집중한다. 뭉게뭉게 탐스럽게 피어오르는 구름사이로 빛이 퍼져 나오더니 불쑥 떠올라 버리는 해. 올라오는 기미도 잠시, 솟아오르는 뜸들임도 용틀임도 없다. 근데 멈칫거리지 않고 순간적으로 분출하는 그 장면이 백미다. 연신 사진기를 터트려보지만 빛만 빛날 뿐 주변 정경과 인물은 컴컴한 실루엣만 남길 따름이다.
8시50분 아침식사와 등산준비를 마친 우리 일행은 산장 아래로 난 호롬보 가는 길에 들어선다. 청명하고 선선한 아침 기운에 새소리, 풀과 나무와 꽃과 숲의 냄새가 간질이며 오감을 드높인다. 분화구 갈림길을 지나니 숲은 사라지고 평평한 공터가 나온다. 여기는 사방이 다 트여 있고 하얀 눈을 뒤집어쓴 킬리만자로와 마웬지가 선명하다. 포토 존. 사진 찍는 곳이다. 산과 초원 구릉을 배경으로 독사진과 모두어울림 사진을 박는다. 포즈를 취하니 이 사장이 이렇게 말한다. “사진기를 정면으로 보지 마세요. 고개를 목표 배경이 있는 방향으로 약간 돌리고 눈은 힘을 주지 말고 특정한 곳에 머물지 않도록 부드럽게 허공을 헤매고, 사진에서 위협적이고 불리한 부분인 배를 감추기 위해 찍히기 직전에 배에 힘을 주고 힘껏 밀어 넣어야 합니다.” 참 현실감이 넘치는 명강(名講) 이구먼. 그대로 해본다.
배가 아프다. 만다라 헛에서 분말 코코아를 뜨거운 물에 타서 설탕을 듬뿍 넣고 여러 잔 마셨는데 여기에 우유를 타서 마신 것이 화근이다. 고소에 견디려면 뜨끈뜨끈한 차에 설탕을 넣어 많이 마시라는 충고에 따라 산에 들어서자마자 다른 차보다 입에 맞아 계속해서 코코아를 마셨다. 우유를 소화시키지 못하는 속을 잘 알고 있으면서 욕심에 균형 잡힌 영양섭취 차원에서 분유를 넣은 것이다. 그런데 은신처가 많은 밀림은 다 지나버리고 훌떡 까진 민머리에 앉은뱅이 가시나무 덤불만 숭숭 있는 밋밋한 구릉에서 더군다나 길은 원을 그리며 완만하게 이어지고 있어 어떤 지점에 앉아도 100% 노출이라. 속에서는 이제 최악의 전쟁양상을 띄니 무조건 길에서 벗어나 대초원을 향해 달려간다. 길에서 멀면 시력이라도 떨어져 잘 안보이겠지 싶어서다. 한참 달려가 약간 꺼진 지형에 닿아 길을 바라보니 오고가는 사람들의 통행이 더 많아진 것 같다. 그러나 더 이상의 인내는 더 큰 불행을 자초한다. 낮은 덤불에 등을 대고 앉아 배낭으로 측면을 가리고 모자를 벗고 머리를 숙이고 신속하게. 오래 있으면 안 된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정리. 원위치로 돌아간다. 노랗던 하늘이 파란 하늘로 변한다.
카멜레온이 이렇게 작은 줄 몰랐다. 손바닥에 놓인 것을 보니 손가락크기만한 덩치다. 큰 것 수컷은 70㎝ 크기도 있다는데 이건 아주 작다. 호롬보로 오르는 등산로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영국대 팀의 가이드가 나무에서 집어내어 일행들에게 보여준다. 나도 지나치다가 연두색 고운 이 동물에게 입술을 대는 시늉을 하니 모두가 와 하고 웃는다. 등산을 마치고 내려 올 때도 비슷한 지점에서 카멜레온을 집어 보이는 것을 보니 주변에 흔하게 사는 모양이다. 이 동물의 가장 큰 특징은 튀어나온 큰 눈이다. 잘 듣지 못하기 때문에 이는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눈을 각기 독립적으로 180도를 움직여 한 번에 두 개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어 먼 곳에 있는 먹이도 식별할 수 있다고 하며, 그 유명한 색 바꾸기는 주변에 맞추어 자신의 색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싸움에서 승리하거나 항복할 때 감정적인 색을 내며, 짝짓기 상대 결정을 위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도 색을 바꾼다고 한다.
여기서는 일렬로 다니는데 오르내리다가 마주칠 때에는 쟘보(JAMBO), 쟘보를 연발한다. 영어로 치면 ‘하이(Hi)’, 우리말로는 ‘안녕하세요.’다. 포터들은 지겹지도 않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쟘보! 그러다 보니 우리도 쟘보에 중독되어 현지인이나 외국인이나 아무한테나 쟘보를 연발한다. 그리고 많이 쓰는 말이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 이 말은 영어로는 No Problem, ‘문제없다. 염려마라. 자신 있다. 한다. 할 수 있다’라는 긍정의 뜻이다. 어딜 가나 다짐을 할 때에는 하쿠나 마타타!다. 한번은 포터들이 짐을 지고 앞서나가면서 우리가 길을 비켜주지 않으니 ‘짐이요’하는 말을 하기에 깜짝 놀라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만다라산장에서 호롬보산장까지는 5시간쯤 걸리는데 그 중간에 식사를 할 수 있는 휴식지점에 12시에 도착했다. 구릉의 제일 높은 곳인데 여기서는 광활한 초원이 펼쳐져있고 너른 공간에 기다란 나무의자와 탁자가 몇 군데 놓여있다. 간이 화장실도 보인다. 대낮이라 햇볕이 따갑고 그 열기로 인해 땀이 나고 목이 마르고 약간 어지럽다. 쿡과 포터들이 이곳에 먼저 와서 점심식사를 준비해놓아 우리는 쉽게 끼니를 때울 수 있었는데 빵과 스프 과일 같은 소찬이다. 차려주는 점심도 제대로 못 먹던 김여사는 드디어 나무의자에 길게 누워 두통과 구토증을 호소한다. 고소증세가 오는 모양이다. 이 대장이 챙겨보지만 꼼짝을 못한다. 우리는 이런 일이 벌써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한다. 대장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걷게 하면서 후미에 갈 테니 칩 가이드 아우구스토에게 먼저 가라고 지시한다.
칩 가이드 아우구스토는 이름에서 보듯 세례를 받은 가톨릭을 믿는 올해 32세로 신발 크기가 300㎜가 넘고 키는 178㎝ 정도 되며 뚱뚱한 것처럼 살이 많은데도 군살이 안 보이는 건장한 청년이다. 군용모자 비슷한 캡을 쓰고 항상 반바지를 입는 그와 개인사를 이야기하다보니 초등학교에 다니는 12세의 아들과 8세의 딸이 있는데 아내와는 몇 년 전 이혼하였다 한다. 부부는 몹시 사랑하여 떨어지길 원치 안했는데 장모가 재산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 반 강제로 이혼을 시켰단다. 가이드로 나선지 10년 정도 되었고 정상에는 200번 정도 올랐다고 한다. ‘너의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뒷날 물어봤더니 보석세공사가 되겠다며 지금 2년 과정의 전문교육을 6개월째 받고 있다고 하면서 눈을 빛내었다. 보석이 많이 나느냐고 물었더니 아루샤주에 보석광산이 있다며 에메랄드, 루비, 가넷(석류석), 사파이어, 문스톤(월장석), 탄자나이트 등 그곳에서 나는 보석 이름을 들며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는 금반지에 사각의 루비를 박은 반지를 보여주었다. ‘한국에 가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길이 밋밋한 구릉을 따라 오른쪽으로 휘어지는 마지막 언덕에 서니 킬리만자로 하얀 모자와 호롬보의 A자형 산막들과 녹색의 초원에 빨갛고 노란 텐트가 물결을 이루는 정경이 안개가 걷히면서 드러난다. 사진을 찍고 이제 얼마 안 남았다고 서로 격려하며 어질하고 나른한 몸을 부추기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사기꾼의 특성을 이 사장이 사례를 들어가며 열변을 토하는 바람에 모두가 크게 웃으며 걷다보니 고소현상은 정말 씻은 듯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법의 장치가 아무리 여물고 빠져나갈 틈이 없어보여도 돈 떼어먹는 사기꾼에게는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단다. 결국 안 갚으면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일반적인 공통성이 집이나 전화번호를 자주 바꾸고 재산이 없으며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술을 안 마시는 부류에는 노름꾼도 해당된다며 세속 진리를 계속 설파하는 덕에 아주 유쾌한 기분으로 산장 바로 밑에 있는 얕은 계곡의 다리를 건너 여러 동의 산막과 식당을 가로질러 「HOROMBO 3720M AMSL」 표지가 있는 곳에 어려움 없이 도착한다.
호롬보 산장으로 오르고 나니 내일은 쉬는 날이라 모두 축제 분위기다. 우리 ‘해피 투게더’ 팀은 6인1실과 4인1실 산막(Lodge) 2동을 배정 받고 포터들이 날라 온 짐을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고 휴식을 취한다. 가을날처럼 써늘한 오후의 따스한 햇볕이 내려쬐는 산막 앞에 자연스레 모인다. 카고백 바닥에 든 플라스틱 소주가 기다렸다는 듯 설렁설렁 나온다. 각자 소지한 스텐 컵에 소주를 가득 채워 ‘킬리만자로 무사등정을 위하여’ 선창하는 건배사에 힘차게 ‘위하여’를 복창하며 고소에 긴장한 속을 달랜다. 채우고 들이붓고 또 채우면 또 들이붓고. 손과 입이 자동이 되어 순식간에 소주 한 되를 비우니 머리가 어리어리해지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혀는 곡선을 지향한다.
떠드는 소리에다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왔다. “아니 이게 누구야 쿡 대장(나중에는 정상 등반 때 칩 가이드를 함) 찰스씨 아닌감” 술을 한 컵 권하고 그것도 모자라 4홉들이 3개와 특대 황태, 오징어, 비스킷을 안주로 내주는 대 선심을 썼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산중에 아무리 돌아다녀도 술이 어디 있으며, 한국산 황태와 오징어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구하니 말이다. 다음날 아침에 술이 덜 깨어 화장실을 찾지 못해 왔다 갔다 하는 데 마침 찰스가 보더니 어딜 찾느냐고 해서 영어로 “화장실 어디냐” 했더니 잘 못 알아듣고 물 나오는 데를 가리키기에 고개를 흔들며 보디랭귀지-엉덩이를 툭툭 쳤더니 바로 알아보고 친절하게 문 앞에 까지 데려다준다. 그러면서 엄지손가락을 치밀며 미스터 위스키!(Mr. Whisky). 소금 먹은 사람이 물 선다는 말 맞지.
찰스는 「월간 산 1997년 8월호」에 안중국 기자가 ‘월간山 킬리만자로 트레킹 참가단’에 동행 취재한 내용에 나오는 인물이다. 당시 7월1일부터 등반한 이들의 칩 가이드가 찰스 므로소(Charles Mrosso)씨다. 당시 나이가 33세. 26살 때부터 가이드 생활을 했으며 그때 벌써 킬리만자로를 100번 정도 오른 셈이라고 써 있다. 2010년 지금 그의 나이가 46세. 영겁회귀란 말이 있다. 13년의 세월이 어찌 영겁과 비교하겠냐마는 우연 치고도 우연이며 인연 치고도 인연이 다시 그 킬리만자로에서 마주친 셈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벌이느냐 하면 그때 당시 참가단 16명중에는 지금 우리 대장인 이상배씨가 참가했고 찰스가 가이드 대장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사람 고 김영기씨- 산을 좋아하고 산악스포츠를 좋아하다 불의의 사고로 몇 년 전에 타계한 산과 공직의 친구이다- 그가 참가했다는 것.
2.25. 호롬보에서 위스키 파티를 연 다음날은 고소적응을 위한 휴식과 편안한 산책을 하는 한가한 날 이었다. 일찍 잠든 탓에 캄캄 새벽에 일어나 산장주변을 헤매다가 만난 구회장은 아침 산행을 하잔다. 약속을 하고 다시 산막에 들어와 깜박 자고나니 약속시간은 지나버렸다. 혼자 아침산책을 하기로 하고 산장에서 길을 따라 오르니 마웬지산 가는 길과 키보산장으로 곧장 가는 삼거리가 나와 왼쪽 키보로 난 넓은 길을 따라 간다. 이제 갓 솟은 태양이 먹장구름을 뚫고 찬란한 빛을 토해내는 동쪽 지평선을 등 뒤에 두고 시퍼런 물이 들 정도로 파란 하늘을 마주한다. 높이가 5~6m까지 자란다는 선인장같이 생긴 ‘키네시오 킬리만자리’가 여기저기 자리 잡은 습지를 지나 물이 쿨쿨 흘러내리는 도랑을 건너 키 낮은 수목들이 드문드문 난 초원의 구릉에 천천히 눈을 감고 오른다. 고산에서 저절로 피어난 가는 바람이 스치며 산뜩한 가을을 맛보이고, 거대한 킬리만자로가 한점의 가림도 없이 광야의 넓은 뿌리에서부터 하얀 눈 모자를 쓴 꼭대기까지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에 멈춰 섰다. 아 대자연! 바로 이런 것이 대자연이로구나. 눈 속에 머릿속에 가슴속에 꼭꼭 밀어 넣는다.
기다란 외바퀴 수레가 내리는 도중 몇 군데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이게 뭐하는 데 쓰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보았으나 종내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키보에서 몸이 회복되지 않은 사람이 누워서 네 사람의 포터가 사방에서 잡고 밀고 내리던 일종 구급용 수레다. 수레에 탈 때에는 먼저 침낭을 깔고 그 안에 들어가 누우면 버클로 고정하고 뒤에 배낭이나 개인용품을 싣고 뛰듯이 밀고 가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
새벽에 고도 4070m 최후의 샘터가 있는 쉼터 근처까지 가서 킬리만자로를 맘껏 본 덕에 종일 느긋하다. 아침 식사 후 계획대로 마웬지산 쪽으로 트레킹을 하러 나갔다. 푸른 구릉과 용암이 흘러내린 골짜기 위로 까마득히 솟은 마웬지산은 높이가 5149m로 7~8개의 돌출된 바위벽들이 공룡의 등처럼 울룩불룩 볼 때마다 붙었다 떨어졌다하며 모양이 조금씩 달라지는 게 아주 신기하다. 마웬지는 반영구적인 얼음을 보유하고 있으며 계절에 따라 설빙(雪氷)도 보유한단다. 고도 4000m 지점인 제브라 록(얼룩말 바위) 쉼터에서 쉬다가 다시 출발, 마웬지 헛-키보 헛 갈림길 위의 제일 높은 지점의 고도 4300m 구릉에 닿았다. 이곳은 마랑구 루트 최고의 전망대로 보이는 데 왼쪽의 킬리만자로 오른쪽의 마웬지가 아무런 막힘없이 환하게 보인다. 산중에 폭 박혀있는 키보산장 건물 모습도 조그맣지만 또렷하게 보인다. 이곳에서는 실제 거리상으로는 상당히 먼데도 바로 눈앞에 서있는 것처럼 뚜렷하게 보이는 까닭은 공기가 맑아 시계(視界)확보공간이 넓어 먼 거리도 가까운 곳으로 착시(錯視)를 일으키게 한다고 이 사장께서 설명해준다. 그래서 킬리만자로나 마웬지가 지척이었구나.
동판(銅版)으로 만든 추모비가 바위에 붙어 있는 곳이 있어 사진을 찍고 읽어본다. 영어로 된 이 글을 해득해보니 이런 뜻이다.
로레타를 추억하며
티카의 불타는 나무들에서 세렝게티 평원에 이르기까지,
달의 산들로부터 킬리만자로의 눈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는 그녀의 대지였다.
- 가족과 친구들이 세움
1931년 1월29일에 출생하여 1979년 4월29일에 세상을 떠난 로레타(Loretta)라는 이 여자 분은 아프리카를 무척이나 좋아했으며 여행을 많이 다녔던 모양으로 오죽하면 킬리만자로가 눈앞에 가득한 이곳 언덕에 추모 동판을 세워주었겠는가? 이분은 죽어서도 무척이나 행복하겠다. 이러한 동판을 이 아프리카의 최고봉 밑에 세워 줄 정도로 그녀를 애틋하게 기리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여유와 마음씨를 지닌 가족과 친구들이 있으니 말이다.
마웬지 헛을 가고 싶어 돌아내릴 때가 되어 정국장님이 대장께 건의했으나 완곡한 표현의 ‘불가’가 돌아와 그 생각을 접고 마웬지 삼거리를 눈감고 쑥 지나버린다. 제브라 록의 바위에 기대어 따스한 햇볕을 맘껏 쪼이고 씩씩하고 빠른 걸음으로 하산을 재촉한다. 올라갈 때와는 판이하게 고소를 내리는 하산은 맘껏 속도를 내어도 지장이 없었다. 산에 들어와서 한번도 씻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면서 물이 흐르는 좋은 장소에서 알탕 좀 하자고 모의를 한다. 그러나 초원에서 그런 장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산막에 닿으니 알탕 생각이 간절한 차에 출입금지 경계를 표시한 밑으로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한 것을 듣고 발이나 씻으러 가자며 합의를 하고 슬금슬금 다가간다. 그리고, 훌떡 벗어버린다. 귀찮게 바지 걷고 소매 걷고 하느니 차라리 다 벗어버린다. 지리산 중산리 계곡과 비슷한 모양새인데 얕지만 3700m 고도에 이러한 냇가가 있다는 게 정말 멋있다. 가시나무 뒤로 들어가 근질근질한 몸을 얼음같이 차가운 물에 잠시 적시고 펀펀한 돌 위에 올라 수건으로 닦는다. 진짜 시원하고 깔끔해지는 것이 둥둥 날아다닐 것만 같다. 옆에서 발을 씻던 대원이 건너편 산막에서 외국인들이 웃으며 쳐다본다고 하여 얼른 수건으로 가리며 옷을 주워 입는다.
2.26. 고소 현상인지 밤에 잘 때 코를 많이 골더라는 말을 전해 듣고 속으로 ‘나도 코를 곤단 말인가’ 하고 약간 심각해진다. 속이 안 좋아 간밤에 두 번 일어나 화장실을 들락거렸으나 아침이 되어도 쉽게 안정이 되지 않는다. 일본 구마모토에서 온 등산대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짐을 정리한다. 오늘 짐은 키보산장에 올라가야 하며 산막을 비워야 한다. 내려올 때 자는 산막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8시30분 호롬보를 출발하여 사우드서킷 갈림길을 지나 마지막 샘터가 있는 쉼터에 11시 가까이 되어 도착, 화장실에도 가고 물도 마시면서 쉰다. 초원이 끝나자 풀하나 없는 황무지가 나타나고 지나온 길보다 훨씬 넓어진 흙길이 이스트 라바 힐을 따라 끝이 보이지 않는 직선으로 벋어있는데 차츰 경사가 심해졌다. 라바 힐의 안부라고 하는 새들(saddle)에 닿으니 현무암 너덜이 있는 오른쪽에 점심식사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우리뿐만 아니라 포터와 우리를 앞질러간 외국대의 사람도 식사를 하고 있다. 배낭에서 크로케와 빵, 옥수수 삶은 것, 닭고기, 주스, 땅콩이 든 점심도시락을 꺼내어 꾸역꾸역 입에 넣어 씹는다. 물 밖에 먹히지 않지만 억지로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 먹는다. 그래도 먹으면서 옆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하니 컨디션이 좀 나아지는 것 같다.
정지작업이 끝난 택지 공사장 같은 끝없는 황무지 등산로는 이제 고도를 급격히 높인다. 숨이 가쁘고 두통과 어지러운 증세가 점점 심해지고 한낮의 햇볕은 전신을 쪼아댄다. 이제 이야기 하는 것도 힘들고 개인차에 따라 대열도 완전히 늘어져 뒤에 오는 사람도 앞에 가는 사람도 까마득히 떨어져 간다. 그러나 구 회장은 속도를 점점 높여 키보의 마지막 급경사 오름길을 여유 있고 힘차게 올라선다. 나도 그 뒤를 따라 ‘폴레폴레’를 잠시 망각하고 휘적휘적 올라버린다. 드디어 ‘KIBO 4750M AMSL’. 키보산장 표지가 있는 마당 한복판에 선다. 호롬보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까마귀도 아닌 것이 독수리도 아닌 것이 떠올랐다가 날개 짓 없이 하늘을 유연하게 날다가 사람 근처에 내려 저벅저벅 걸어 다니다가 또 날아오른다. 아주 씩씩한 모습에 독수리부리를 가진 험상궂고 예리한 안면, 쫙 드러낸 넓은 가슴팍, 새카만 이 새가 키보산장에 오르니 엄청 많다. 이름을 알 수 없다. 킬리만자로 공중지킴이라 할까.
쉴 곳을 찾다가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바위동산에 올라 털썩 앉으니 속력을 낸 탓인지 머리가 팽그르르~ 심한 두통과 함께 속에서 울컥 구토가 치미는 걸 느낀다. 아하~ 고소증이로구나. 심한 두통 탓에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오직 쉬고 눕고 자고 싶다. 뒤에 올라오는 사람들도 대부분 상태가 좋지 않다. 배정된 산막 막사에는 일본대의 남자 두 사람이 우리와 함께 입실했는데 부자간이다. 10명이 다 모여 있기는 여기가 처음이다. 각자 짐을 정리하며 야간등반 준비를 마치고 휴식을 한다. 오후5시에 저녁식사하고 쉬다가 밤11시30분에 등정을 시작한다면서 야간 등정 때에는 고소증 예방약인 다이아목스(아세타졸 아마이드)를 나눠주니 그때 바로 먹으라고 한다. 두통이 점점 심해지고 한기가 들어 진통제를 꺼내 먹고 두꺼운 재킷을 껴입고 침상에 들어 침낭을 뒤집어쓴다.
등산학교 교재에 나와 있는 고소 적응방법 즉 고산병 예방요령을 나열하면
1. 물을 많이 마신다.(1일 2~3ℓ) 2. 심할 경우 고소 약을 3000m 이후 계속 먹는다. 3.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머리를 항상 따뜻하게 한다. 4. 부지런하되 천천히 움직인다. 5. 잠자리는 따뜻하고 포근하게 하고 수면제는 사용하지 않는다. 6.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즐겁고 유쾌하게 팀워크를 위해 노력한다. 7. 왕성한 식욕을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술과 담배는 피한다. 8. 컨디션이 좋지 않을 경우 저소로 내려와 휴식하고 다시 고도를 높인다. 9. 증세가 심하면 즉시 하산하여 치료하고 위급하면 산소를 호흡시킨다.
이 중에서 제일 많이 강조되는 것은 머리를 따뜻하게 하기위해 모자나 두건을 항상 쓰고 다녀야 하며(잘 때에도 써야한다) 목욕이나 세면을 하지 말라는 것이며, 물을 많이 마시고 음식섭취를 많이 하라는 것이다. 고소에서 소모되는 열량은 보통 때의 2~4배 정도이니 그럴법하다. 그리고 동작(걸음)은 지속적으로 하되 아주 천천히 하라는 것이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왼쪽 가슴에 심한 통증이 온다. 문질러도 소용이 없다. 심장에 오는 통증이다. 어째서 이럴까 하고 원인을 찾다보니 재킷에 있다. 재킷을 벗어버리고 나니 금방 통증이 사라진다. 재킷이 몸에 너무 맞아 평소에도 약간 졸리는 느낌인데 고소에서는 기압이 낮아 몸과 심장은 확장되는데 옷은 그대로 있으니 심장이 제대로 뛸 수가 없어 통증이 온 것이다. 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얼굴과 손발도 퉁퉁 부었고 눈도 많이 튀어나왔다.
오후5시가 되어 일어나 식당으로 가서 뜨거운 코코아와 스프 곡류를 마시고 먹고 밖으로 나가 웃고 떠들며 카드놀이 하는 포터들 옆에 서서 구경하다가 시간이 있으니 미리 산에 한번 올라가보자는데 뜻이 모인다. 세 사람이다. 별 준비 없이 맨몸으로 키보산장을 벗어나 지그재그로 난 화산모래 언덕을 서서히 오른다. 길만스포인트까지 갈수 있지 않겠냐며 모두 자신만만하다. 진통제 탓인지 몸은 고산증세에서 벗어나 안정되어 있다. 몇 바퀴를 감아 올랐는지 셀 수가 없을 정도의 갈지자 길을 1시간동안 휘적휘적 오르니 카시오시계의 고도가 5000m를 넘어선다. 오천미터 초등(初登)의 순간이다. 아무리 치켜 올려다봐도 화산재 모랫바닥만 보이고 끝은 안 보이는 곳인데 어쩌다 바위가 하나씩 툭 튀어나와있다. 조그만 바위마다 이름을 다붙여도 지리산 봉우리 숫자보다 적은 것 같다. 왼쪽끄트머리 큰 벽에 쑥 들어간 부분이 있어 다가가 오줌을 눈다. 그리고 돌을 세우고 둘레를 잔돌로 반원(半圓)을 만들며 둘러싼다. 우리가 왔다 간 표적을 만든 것이다. 같이 온 정 국장님, 구 회장님 두 분께도 오줌 누는 의식을 거행케 한다. 이곳의 기압은 어느 정도 될까하여 기압계로 돌렸더니 560헥토파스칼(hp). 0.5기압 정도다. 항상 1기압 하에 있던 신체 평형이 고소에서는 무너지는 것이 당연하다. 산소 포화도도 훨씬 낮아져 호흡이 곤란하고 두통이 심해질 터이고. 우리는 심야 등반을 위해 오줌 표적 설립과 오천미터 고도 도달로 만족하고 온 길을 되돌아 내렸다.
11시가 넘자 일행은 산장 마당으로 집결한다. 오후에 심한 고소증세를 보인 송 선생님은 이 이상 가기 힘들다고 하다가 저녁식사 때 조 사장이 가져다 준 라면을 자시고 휴식을 더 한 뒤에 기운을 차려 등정에 동참하신다. 생명의 위협에 맞서는 진정한 용기다. 그 와중에 일본대의 남자 한사람이 몸이 안 좋은지 외바퀴 수레에 오른다. 그 부인 되는 사람은 잘 내려가라고 한 다음 산을 오를 준비를 한다. 남편이 위급해서 내려가는데 부인은 따라가지 않고 산을 오른다며 혀를 끌끌 차는 사람도 있다.
고소를 걷는 방법에 대한 설명은 마랑구 게이트에서 시작하여 오늘 등정 디데이시간까지 강조된다. ‘숨 한번 쉴 때 한걸음 정도 옮기는 (지겨워서 짜증이 날 정도로 느린) 속도로 걷되 대열은 되도록이면 종대로 일렬을 지어야하며 서지 않고 계속 걸으며 맨 앞서 가는 가이드를 절대 추월할 수 없다는 철칙을 지켜야한다’는 것이다. 정상등정을 위한 오늘 야간 등반 시에는 졸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스와힐리어로 폴레폴레(Pole Pole) 즉 ‘천천히’라는 말이 산에 들어서서 나올 때까지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이 인사조로 할 정도로 대단하게 강조되는 고소에서의 행동방식이다. 이러한 낙관적인 느긋한 자세야말로 고소를 극복하는 기본이 된다고 모든 가이드나 여행사는 강조하고 있다.
헤드램프, 등산스틱, 다운재킷은 필수, 여권과 지갑은 본인이 소지하고 물이나 간식을 넣은 배낭은 2인1개로 가이드에게 주어도 좋고 원한다면 본인이 짊어지고 가도 된다하여 나는 배낭을 직접 챙기기로 했다. 키보산장으로 오를 때부터 가이드의 숫자가 1명에서 4명으로 늘어나 있는 상태라 대열의 앞과 뒤 중간에 촘촘하게 들어가 등반대원을 보호한다. 밤11시 40분에 출발. 지그재그로 난 벼랑에 붙는다. 폴레폴레 폴레폴레, 하쿠나마타타 하쿠나마타타. 우리는 이렇게 구호를 붙이며 잠과 희박한 공기와 고도와 싸우며 지그재그난 무시무시한 황무지 벼랑을 야반에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지겨우면 영어로도 하면서. Slowly, Slowly, No stop, No sleep.
캄캄 밤중에 화구벽은 한없이 멀다. 아무리 가도 또 그만큼 멀어져 있다. 우리의 대열은 원칙을 아주 그대로 지키는 가이드들이 포진하여 있는 터라 뒤에서 오던 영국대, 슬로베니아대, 일본대에 추월당한다. 이제 뒤에는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키보에서 출발한 모든 팀이 우리를 앞서 지나간 것이다. 점점 느려지는 대열의 움직임에 짜증 섞인 말이 튀어나온다. 한마디로 말하면 ‘갈 수 있는 사람은 조금 빨리 가자는 것’이다. 5000m를 넘어 급경사 비탈을 비틀거리며 올라 한스마이어 동굴에서 휴식한다. 추월해 간 등정대 몇 팀도 이곳에 모여 휴식하고 있는지 넓은 공간인데도 앉아있는 머릿수가 빽빽하다. 동굴주변에서 조금 떨어져 컴컴한 구석에 반쯤 드러누워 휴식하다가. 나는 대장이 몹시 지쳐있는 것을 보고 내가 좀 앞장서면 되지 않겠냐는 듯 칩 가이드에게 ‘고어헤드’ 하면서 신호를 보냈지만 대장은 몹시 언짢아하며 나무란다. 고소 경험이 없는 사람이 무조건 앞장서서 빨리 가기를 독촉하면 위험하다는 말이었다. 김 여사의 고소증세가 심해지면서 한스마이어 동굴을 조금 지난 지점에서 대열은 지체와 정체를 거듭한다. 대장의 신랄한 채근에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지 한 두 걸음 나아가다 서고 또 서고 하다가 종내에는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짚고 서버린다. 대열에 비상이 걸리고 증세가 없는 사람도 점점 힘들어한다. 대장은 김 여사와 행동을 함께 하겠다며 뒤로 쳐지면서 찰스에게 일임한다.
바위 너덜이 있는 곳에 이르면서 대열에 혼란이 온다. 가이드 들이 고소증세가 심한 이들을 일대일로 보호하면서 앞설 리더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우리 중에 고소증세가 없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며 대열을 재구성한다. 컴컴한 바위너덜은 절벽이다. 근처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는 지형파악이 안되어 무작정 나아가는 도리 밖에 없다. 꼭대기가 멀지 않은지 사람들의 실루엣이 어둠에 잡히고 움직임과 말하는 소리가 들려 있는 힘을 다해 바위 절벽을 통과한다. ‘이제 다 왔겠지’ 하며 올려다봐도 앞이 막히고 그래서 다시 오르면 또 막히고. 그러다가 페이스를 놓쳐버렸다. 무리하게 힘을 쓴 것이다. 비틀거리며 나아가다보니 앞에 사람형상이 있다. 일본대 후미 가이드다. 바위 절벽 앞에서 심하게 비틀거리는 모습을 본 그가 위험하다며 몸을 잡아 세운다. 다시 정신이 돌아온다. 물을 꺼내 마신다. 그 와중에 옆에 있던 여자 가이드가 나에게 물을 좀 나눠 주란다. 물 한통을 주어버린다. 감사의 표시였다.
you are now at GILMANS POINT. 5681M. AMSL.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헤집고 바위사이에 자리를 잡는다. (AMSL은 above mean sea level, 해발고도), 2010. 2. 27. 06:10. 해가 오른다. 금빛 광채가 동쪽 평원의 끝에서 환하게 눈부시다. 아! 아! 아!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감격의 절규다. 검은 밤, 검은 하늘, 검은 구름, 검은 광야를 불쑥 뚫고 일어선다. 그 힘찬 이글거림, 생명의 기운이 아프리카를 뒤흔든다.
눈부심의 감격도 잠시, 오른쪽에 세계최대의 분화구를 두고 비틀비틀 우후루를 향하여 나아간다. 하얀 눈이 얼어붙은 길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아이젠을 가져와야 되는 건데. 고소증세가 점점 심각하게 나타나 정신은 아련히 가물가물하고 호흡은 너무 가쁘고 다리는 흔들흔들, 평지는 그래도 몇 분을 가지만 약간 오르막이 나오거나 장애물에 걸리면 제자리에 서서 쉰 다음 몇 걸음을 간다. 분화구 안쪽을 우회하는 구간을 벗어나니 하얀 설빙(雪氷)에 반사된 빛이 무수한 바늘이 되어 눈을 찌른다. 주능선이다. 배낭에서 선글라스를 간신히 꺼내 눈에 걸친다. 군데군데 눈이 녹은 틈으로 해안가의 몽돌을 닮은 검붉은 화산석이 끝없는 너덜절벽을 이루고 있는 곳을 지나니 다시 설빙의 급경사 오르막. 그 꼭대기가 정상인 우후루피크인가 싶어 있는 힘을 쏟아 올라선다. 그러나 이 얼음봉우리는 스텔라 포인트(5756m). 마차메 루트에서 오른 등산로와 만나는 삼거리 지점이란다.
다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눈부신 설빙 능선을 오른다. 왼쪽으로 거대한 얼음기둥-만년설이 몇 백 미터씩 늘어서 있는 거대한 빙하지대가 나타났다. 아~ 아~ 아~ 아~아~ 이 대자연을, 이 대자연을 나는 보았다. 아프리카 적도에서. 눈으로 들어오는 것 모두가 끝도 없이 펼쳐진 만년설의 연속이다. 하얀 눈이 두껍게 쌓여 높고 깊고 장엄하고 거대한 얼음 성채가 되었다. 창날과 붓과 조각기둥의 갖가지 형상을 지니고 눈에 다가온다. 눈이 감긴다. 고소 탓도 있지만 그 찬란함과 하얀 눈부심에 도저히 눈을 똑바로 뜨고 지날 수가 없다. 이 광경을 어찌 겉으로만 보랴? 속속들이 집어넣자.
내리는 영국대(뒤에 대장이 그렇게 말해 주어 알았다) 소속의 사람들이 지나치면서 괜찮으냐고 묻는다. 비틀거리며 걷는 품이 불안한 모양이다. 대답을 할 수 없다. 말이 나와야 하지. 그냥 지나칠 뿐이다. 그들은 어찌 그래 생기가 있는지 부러울 따름이다. 엉거주춤 선다. 다 왔다. 더 갈 곳이 없는 평평한 곳에 엉거주춤 선다. 이제 어째야 하나. 그냥 누가 지시하기를 기다린다.
UHURU PEAK TANZANIA 5895M AMSL.
나무를 깎아 만든 기둥을 화산석 사이에 박고 나무판자를 붙여 음각하여 글씨에 노란색을 먹였다. 아프리카대륙의 최고봉 킬리만자로 정상 우후루. 스와힐리어로 자유를 뜻한다고 한단다. 모든 정신을 놓아버린다. 오직 자유를 위해서. 자유, 자유, 자유~
촬영을 한다고 포인트 팻말 앞에 서란다. 안내판 끝이 머리에 닿을 것 같아 고개만 근근이 빙하 쪽으로 젖힌다. 다리는 땅에 붙어버려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앉았다가 다시 섰다가 이래저래 찍고 정상 포인트를 떠난다. 빙판길을 몇 걸음 비틀거리며 걷다가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분화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평평한 화산암에 벌렁 드러눕는다. 시퍼런 하늘에 이글거리는 적도의 태양이 눈을 찔러온다. 눈을 감는다. 수마(睡魔)는 기다렸다는 듯 하얗고 텅 빈 무아로 몰아간다. 죽음도 무아(無我)지.
비몽사몽간에 고함소리를 듣는다.
“빨리 일어나세요. 갑시다.”
명령을 들은 뇌는 짜증 섞인 투정을 뱉어내면서 몸을 바로 세운다.
그러나 ‘퍽’ 소리를 내며 넘어져 버린다.
등과 뒤통수가 순간적으로 순차적으로 얼음바닥에 충격된다.
머리 속에서 뭔가 번쩍 빛나다가 정신이 아득해진다.
여기는 육지가 아니다.
2010. 2. 27. 07:40.
남위 3도 4분 33초, 동경 37도 21분 12초, 해발고도 5,895m
킬리만자로 정상 우후루 피크(Uhru Peak)
이렇게 머문 것이다.
(후기)
나는 가이드 짜루의 손에 끌려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에서 펄펄 내리는 싸락눈을 맞으며 길만스 포인트의 절벽 화산재 길을 미끄러지며 쏟아져 내려왔다. 키보산장이 빤히 보이는 큰길 가까이 왔을 때 가이드 아우구스토와 프랭키가 먹을 것을 들고 마중 나왔다. 그 자리에서 배낭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4홉 소주 한 병을 꺼내 주스폭탄주를 만들어 자축하였다.
그 때 해가 다시 얼굴을 보였다.
키보산장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머물다가 호롬보산장을 향하여 햇볕 포근한 널따란 내리막길을 따라 절뚝거리며 천천히 걷는다. 왼쪽 발목을 삐었던 까닭이다. 끝없는 황무지를 지나 키 낮은 나무숲이 나타나자 너무나 아늑함에 나도 모르게 스르륵 눈을 감고 졸기도 한다. 끝이 안 보이는 너무나 멀고 지겨운 광야와 초원이다. 올라갈 때에는 전혀 힘 부침이 없이 쉬엄쉬엄 갔는데 내려올 때에는 많이 지치고 긴장도 풀려 졸리고 흐느적거린다. 이 사장과 신 회장님과 함께 초원지대에 들어와서 쉰다. 큰 아파트단지만큼 넓고 평평한 공터가 길가에 있어 어디에서 쉬어야 하나 고민이 될 정도다. 배낭에 기대어 다리를 뻗고 앉았다가 등이 땅바닥에 스르륵 닿고 종내에는 대자로 벌리고 누워버린다. 그리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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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증세로 인해 많이 고생을 했다. 고도를 내리니 두통이나 어지러움이나 구토증세는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자외선에 많이 노출되어 몰골이 형편없이 변했다. 나는 상대적으로 증세가 약했지만 귀 바퀴의 껍데기를 한 벌 벗겨내어야 했고 시계를 찬 왼 팔목은 화상자국이 시커멓게 남았으며 얼굴은 벌겋게 탔는데 그중에서 콧등은 뚜렷하게 표가 날 정도로 새카맣다. 다른 이들은 입술이 심하게 트고, 얼굴 뿐 아니라 목과 가슴팍의 셔츠 열림 삼각부분까지 몇 번씩 피부껍데기가 벗겨지는 일이 생겼다. 불난 집에서 뛰쳐나온 사람들 같은 행색이다. 모자와 목수건, 얼굴가리개, 선 크림과 립밤(입술크림)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강조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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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해피 투게더’ 킬리만자로 트레킹대원은 모두 열명이었는데 모두가 정상에 오르는 커다란 영광을 누렸다. 이 모든 것이 이번 트레킹을 기획하고 이끈 이상배 대장의 탁월한 리더십과 경험, 노심초사 염려해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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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는 높이가 19710피트 되는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의 최고봉이란다. 서쪽 봉우리는 마사이어로 ‘응가제 응가이(Ngaje Ngai)’ 즉 신(神)의 집이라고 불린다. 그 서쪽 봉우리 정상에는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가 있다. 도대체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은 무엇을 찾고 있었던가? 아무도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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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양쪽이 넓은 거대하고도 높은 킬리만자로의 네모진 꼭대기가 햇빛을 받아 믿을 수 없을 만큼 희게 빛나고 있었다. 순간 해리가 가고 있는 곳이 바로 저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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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이 지구 온난화 때문에 거의 다 녹아 내렸다는 기사가 지난 주 관심을 끌었다.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으로 유명한 만년설 빙하가 1912년 측정 때에 비해 85%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특히 2000년 이후 26%가 감소할 정도로 녹는 속도가 빨라 10~20년 뒤에는 전설로 남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환경의식이 남다른 우리 언론도 크게 다뤘다.
킬리만자로 만년설은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에서 온난화의 대표적 피해 사례로 들어 더욱 유명해졌다. 온난화 경고 포스터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흔히 아는 것과 달리 '부적절한 사례'라는 비판이 많다. 빙하 전문가들의 공인된 연구에 따르면 킬리만자로 만년설은 극지 빙하와 달리 대기온도 변화,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는다. 그보다 적도(赤道) 태양열에 직접 노출돼 기체로 승화하는 것과 새로운 강수(降水)가 얼어붙는 비율에 따라 늘거나 줄어든다. 급격한 해빙은 지속적인 강수량 부족 때문이라는 결론이다.
"그것도 온난화 영향"이라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킬리만자로 만년설은 100년 전부터 줄어들기 시작해 1880년~1953년에 이미 66%가 감소했다. 그런 만큼 1970년대에 본격화한 온난화와 연결 짓는 것은 비과학적이라는 평가다. 지금의 만년설 상태는 1만1,000년 전과 비슷하게 되돌아간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이에 따라 일부 환경론자들도 "과학적 근거가 없는 선정적 주장은 지구 온난화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막는다"고 우려한다. <킬리만자로의 눈>의 그릇된 상징 효과에 마냥 기대는 것은 어리석다는 지적이다.」
(한국일보 기사, 강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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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등산의 목적을 어디에 두는가. 이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Unknown) 새로운 대상지를 오르고, 등반고도(Altitude)와 난이도(Difficulty)를 높여 나가고, 더 큰 어려움(Hardship)과 위험(Danger)을 극복하는 등 여러 한계 영역을 극복하는 것’이 등산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산악인의 태도는 점차 등반의 공간과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등산교재에 나와 있는 기본이지만 아주 중요한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