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이냐, 주체적 글쓰기냐
― 마광수 연세대 국문과 교수 재임용 탈락사건으로 본 '대학'이란 공공성의 역역에서의 글쓰기
1.
줄기차게 '성에 대한 자유로운 담론'을 이 사회에 내놓으며 화제를 몰고 다녔던 작가이자 연세대 국문과 교수인 마광수 씨가 심각한 몸과 마음의 상태에서 '투병' 중이라는 갑작스런 소식이 전해진 것은 2002년 9월경이다. 그가 앓고 있는 질병에 내려진 의학적 진단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증후군이 동반된 중증 우울증'이라고 한다. 그는 지금 자폐 증상, 대인공포증, 거식증, 무망감, 극도의 불안과 수면장애, 지병인 신경성 위염의 악화, 약물과다 복용으로 인한 간 기능 저하 등 몸과 마음이 두루 피폐해져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신동아』기자인 이나리는 마광수 교수의 재임용 탈락사태와 관련해 빚어진 사건을 취재, 보도하며 글의 앞머리에 "심한 우울증으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마광수 교수. '즐거운 사라' 사건으로 구속된 이래, 12년을 하루같이 정체모를 불안과 싸워왔다. 이제 그는 천신만고 끝에 복직한 학교에서 또다시 내침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다 마침내 표현할 수 있는 능력'마저 잃어버린 한 20세기 한국 예술가의 슬픈 초상."이란 글을 붙이고 있다. 이나리, 「검열 공포가 내 인생을 갉아먹었다」, 『신동아』 2002년 10월호) 그 발단이 연세대 국문과 교수들로 구성된 학과 인사위원회에서 결정한 교수 재임용 탈락 사건에서 비롯됐다는 것도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마광수 교수의 재임용 탈락은 "학문적 능력과 업적 항목에서의 평가를 근거"로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들로 구성된 "국문과 인사위원회"에서 내려진 것이다. "국문과 전체 교수회의는 학과 인사위원회의 결정에 동의한다는 결론을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이 모든 과정은 회의록에 기록되고 그 회의록은 전체 교수의 학인을 거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이것은 연세대 국문과 학과장인 김철 교수가 2000년 9월 30일에 '마광수 교수 휴직과 일련의 사태에 관한 국문학과장의 의견'이라는 문서 형식으로 작성해 국어국문학과 홈페이지 게시판에 발표한 것이다. 마광수 교수의 휴직 이후 "자신과 국문학과 교수들에게 가해진 언어적 폭력과 비방"이 극에 달하고 "근거없는 날조와 악의적 왜곡을 바탕으로 특정한 개인과 집단을 마음대로 조롱하고 매도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적 반론을 담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마광수 교수 재임용 탈락사태'의 진상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 '사태'에 관해 알려진 것은 마광수 교수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대부분이었는데, 재임용 탈락 결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당사자의 상세한 반론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전체적 진실을 파악하고 균형잡힌 생각을 갖는데 매우 유용한 경험이었다.) 마광수 교수는 즉각 "나는 교수이자 작가인데 왜 논문만 따지고 시와 비평을 쓴 업적은 인정하지 않느냐"고 이의를 재기했고, 이에 대해 인사위원회 측은 "마교수는 학자 및 연구자로 임용된 것이지 작가로서 임용된 것이 아니므로, 작품은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교수 자격 부적격이라는 판정을 번복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 사태를 국외자의 처지에서 지켜보면서 대학교수의 글쓰기의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각주가 딸린 논문과 비평적 글쓰기에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가, 논문만을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하는 현재의 논문중심주의의 제도적 관행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다양한 형태의 인문학적 글쓰기, 이를테면 신문이나 잡지 등에 쓰는 저널리즘 비평이나 단행본으로 출판되는 문학작품에 붙는 해설비평 등 실질적인 문학의 수용자들에게 영향을 갖는 비평적 에세이들은 논문형식의 정형과 질서를 엄밀하게 따르지 않은 글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학술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인가, 진부하고 타성적인 형식주의를 답습하는 논문형식의 글쓰기가 사고의 유연성과 다양성, 그리고 창의성을 담아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단지 "학문적이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학술적 가치와 업적을 인정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들에 대해 두루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이 글에 대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 글은 몸과 마음 공히 심각한 실존적 위기에 빠진 마광수 씨에 대한 감상적 연민에서 자극되어 나온 글이 아니다. 물론 마광수 씨의 재임용 탈락사건이 글쓰기의 본질에 대한 나의 관심을 새롭게 환기시켰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밝혀 두지만, 이 글은 사회적 소수의견의 창의/제안자라는 행로를 걸어온 한 특정인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옹호/변호하려는 글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수의 임용과 탈락이라는 사회적 직업/신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한 사립대학교의 교수업적 평가시스템이나 그 교수집단의 권력 행사에 따른 정당성을 비판하고 문제삼기 위한 글도 아니다. 나는 우리 시대의 글쓰기의 형식의 당위성과 가치는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형식주의에 깊이 침윤된 것으로 보이는 구태의연한 논문 형식의 글만이 학술적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제도적 관행은 과연 정당한가를 묻고 싶다. 지금-여기의 현실에서 반향된 잡종적 글쓰기, 다양성·복잡성·현장성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비평적 에세이들에 비해, 서구적 근대주의에서 비롯된 합리주의·객관주의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논문적 글쓰기만이 언제나 학술적이고 학문적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 제기를 하고 싶다. 바로 이런 점들을 중심에 두고 논의를 펼쳐볼 생각이다.
2.
마광수 씨는 무오류의 인간이 아니다. 어떤 사람도 완격한 인격체로 존재할 수 없다. 다만 참다운 지식인이라면 저 자신의 말과 행동, 정치사회적 욕망과 선택들을 돌아보는 끊임없는 자기반성적 행위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을 향하여 나아갈 뿐이다. 마광수 씨가 "학문적,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교수"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바로도 마광수 씨는 분명히 한 인간으로서 보통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한계와 단점을 분명히 갖고 있다. 그렇다고 그 한계와 단점들이 유능한 대학교수이고, 문제적 작가이자 대중적 저술가로서 쌓은 업적과 성과들을 뒤덮을 만큼 크다고 보지는 않는다. 마광수 씨가 한국사회의 통념적 가치기준으로 볼 때 비전형적 대학교수, 비전형적 지식인이라는 판단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는 매우 "튀는 사람"이다. 그의 말과 실천적 행위들(다양한 저술, 방송활동 등) 역시 매우 "튀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비상한 관심과 비난의 표적이 되곤 했다.
하지만 그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성담론의 자유화, 실용적 쾌락주의에 대한 옹호, 탐미주의를 통한 평화 추구, 문화적 국수주의의 배격과 잡종문화의 지향성 등은 그의 열린 상상력과 자유주의의 바탕 속에서 숙성되고 다듬어진 것들로서 우리 사회의 중요한 정치사회적 함의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마광수 씨는 은폐되어 있던 성담론을 사상의 자유시장에 상장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온 사람으로 기억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애써 덮어두고 싶어하는 문제들을 들춰내며 우리 안에 있는 도덕적 위선과 가식의 금도(襟度)를 건드리며 문제제기를 해온 그가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완강한 봉건적 성윤리에 갇혀 있는 보수주의자들에게는 그가 성도덕을 문란하게 만드는 철딱서니 없거나 '변태주의적 작태'를 벌이는 뻔뻔스런 존재로 비치고, 그와 함께 한 사회 안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마광수 씨의 처지에서 보면 한국 사회는 수구적 봉건논리와 유교적 도덕이라는 몇 겹으로 된 위선의 탈을 쓰고,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의 자유에의 용기를 억압하는 사회이다. 그는 간행물윤리위원회, 검찰, 각종 종교단체, 시민단체 등에 둘러싸여 있고, 그의 말-살이와 글쓰기는 끊임없이 '감시'되고 '검열'당한다.
마광수 씨가 2000년 6월말에 재임용을 위한 서류와 업적물로 에세이집 『자유에의 용기』, 문화비평집 『인간』, 장편소설 『알라딘 신기한 램프』(전 2권) 등 단행본 3종, 「소설에 있어서의 일탈미에 대한 고찰」 등 논문·기고문 6편, 2편의 단편소설과 일간지 연재 장편소설 1편, 시 8편 등을 제출했을 때, 국문학과 인사위원회는 '학문적 능력의 결함'을 이유로 재임용 불가의 결정을 내렸다. 이것은 마광수 씨가 제출한 것들은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허접스러운 잡문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내렸다는 뜻이다. 연세대 국문학과 학과장인 김철 교수는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전제 하에 "마교수가 학자로서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단정짓는 근거로서 마교수가 제출한 단 한편의 논문마저 너무나 형편없는 것이어서 "만일에 이것을 논문이라고 부르고 이런 것을 쓰는 사람을 학자나 교수라 부른다면, 그것은 이런 명칭과 호칭에 대한 모욕이고 조롱"이라고 과격한 어조로 주장한다.따라서 마교수의 재임용 탈락 결정은 "인사위원회의 고유한 권한이며 지켜져야 할 권위"의 행사이며, 여기에는 "명백한 비리나 불법, 혹은 부당한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주적인 토론과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판단, 그리고 주어진 권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결정"임을 주장한다. 김철 교수가 작성한 「마광수 교수 휴직과 일련의 사태에 관한 국문학과장의 의견」은 매우 격앙된 어조로 일관하고 있는데, 이는 아무 절차적·법적 하자가 없는 이 정의로운 결정을 두고, 이 결정에 참여한 교수들에게 가해진 외부의 "부당한 모략과 음해", 그리고 "어처구니 없는 비방과 언어적 폭력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한 개인"의 분노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가 "마광수 사건을 통해 본 글쓰기의 문제"라는 것이 하나의 토픽으로 『사회비평』에서 다루어진다는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사회비평』의 한 편집위원 앞으로 보낸 사신에는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함부로 말하고 그것으로 누가 어떤 피해를 입는지는 전혀 무감각한 인간들 때문에 저는 죽음보다 더한 치욕과 모욕의 시간들을 보냈"다고 쓰고 있다. 행간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정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은 "이 나라에 아무 애착이 없"다고 쓰고 있다.
나는 논문실적이 없고 따라서 학문적 능력의 심각한 결함을 드러냈기 때문에 교수 재임용 불가판정을 내린 교수 인사위원회나, "마교수에 대한 부적격 판정에는 학문적 이유 외에 다른 배경이 있다"며 학과 홈페이지 등을 통해 격렬히 항의하고, 마교수 부적격 판정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교수들을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고, 국문과 학생회 이름으로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문제에 대한 백서'를 펴낸 마교수의 재임용 탈락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측에 대해 어느 편이 옳다고 말할 입장에 있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마광수 씨의 자유주의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글쓰기의 방식과 학술논문만을 중요 연구 업적으로 인정하는 제도화된 학술 권력의 경직된 평가기준이 정면으로 상충된다는 데 있다. 우선 마광수 씨의 글쓰기는 "논문만이 학술적 업적으로 독점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제도적 관행"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바가 있다.
3.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앎"을 좇는다. 장자는 말한다. "지식은 접촉에 의하여 생긴다. 지식은 사려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지식을 가진 사람이 모르는 것에 대한 것은 마치 흘겨보는 것과 같다.(知者, 接也 ; 知者, 謨也 ; 知者之所不知, 猶 也. 庚桑楚 810)" 오늘날 앎의 행위는 많은 경우 책을 통해서 전수된다. 특히 "진리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는 고전과 원전이라는 불리는 책들을 읽고 연구하고, 그 아는 바를 논문이란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드러내 보인다. 논문이란 무엇인가. 범박하게 말하자면 대학사회 안에서 유통되는 논문이란 학술적 주제를 담은 논증적 담론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그것은 "서구적 합리성이 근대를 거치면서 스스로의 형식적 체계를 갖춘 것"으로 일종의 제도화된 글쓰기이다. 인지·해석·논증을 서론·본론·결론의 구도 아래 구축하는 글쓰기. 이러저러한 각주와 참고문헌이 따라붙고, 연구사 비판과 연구방법이 적시되는 글쓰기. 이미 굳어진 형식의 통제에 순응하는 글쓰기. 그렇다면 "아카데믹하고 현학적인" 논문 형식의 글쓰기만이 학술적 가치와 의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글쓰기인가, 라는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논문중심주의로 이루어지는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을 하고 있는 김영민 씨는 논문이란 글쓰기가 미시적인 통제와 지배의 전략의 산물이라고 단언한다.
문화적 예속 상태에서 자율적 비판 및 선택의 권리를 망실해버린 채 맹목적으로 따라야만 했던 논문이라는 글쓰기는, 우리가 의식하든 말든, 처음부터 이 땅의 정신적 자원들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가장 미시적인 지배의 '전략'(실제 이 전략의 입안자가 있든 없든 관계없이)으로 기능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논문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학계의 일각에서 조심스럽게, 혹은 격렬하게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찍이 김현·조동일·김용옥 등이 타율적 강박으로 주어진 틀을 깨고 나아간 그 길을 김영민·권성우·강준만·이왕주·김진석 등이 따라가며, 논문이 학술적 권위와 가치를 독과점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형편이다. 김영민 씨는 "논문이라는 글쓰기의 형식이야말로 줏대 없이 학문을 이 땅의 지식인들을 묶어두는 가장 원형적인 차꼬"라고 단정한다. 김영민의 과격해 보이는 주장은 논문중심주의 글쓰기가 자생성과 주체성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타당하다. 서구에서 이식된 형식성의 체계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논문적 글쓰기가 언제나 복잡현묘한 우리 현실의 문제들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벌이 "사회적 권력과 재화, 명예를 독점"하는 하나의 권력의 표지이자 신판 신분제가 되는 우리 사회에서 대학은 권력의 재생산집단으로 기능한다.(학벌이 한국에서 유별나게도 "사회를 움직이는 메커니즘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은 한국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다. 학벌이 그 자체로 부정적일 까닭은 없다.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것이다. 그것이 비판받는 것은 단 한번의 페이퍼 테스트로 결정되는 학벌이 본디 그것을 얻는데 들인 총비용보다 비합리적으로 더 큰 사회적 가치를 획득하고, 학벌에 토대를 둔 기득권 집단의 수탈구조를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 때문이다. 국제 사회에서는 "부도난 어음보다도 못한"(홍성욱) 서울대 졸업장이 한국사회에서는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 우리 사회에서 공정한 게임의 룰보다 학벌을 통해 만들어진 인적 네트워크가 사회적 기회의 획득에 부당하게 유리한 힘으로 작용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그것이 사회의 공정함 게임의 룰을 심각하게 해치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사회적 갈등과 여러 폐해가 학벌사회, 혹은 학벌주의에 대한 유력한 비판의 근거가 된다. 학연에 기초한 인적 네트워크가 저 유럽의 한 사회학자가 말하는 사회관계 자본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공의를 심각하게 일그러뜨린다는 점에서 학벌중심사회에 대한 비판은 정당성을 얻는다. 김동훈, 『한국의 학벌, 또 하나의 카스트인가』, 책세상, 2001)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서 논문은 대학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패스포드이며, 대학과 대학 밖의 세계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을 만들고 대학의 권력을 세세년년 독점화하는데 기여하는 첨병의 역할을 한다. 어느 대학교의 인사위원회가 "당신은 대학교수인데도 논문을 쓰지 않았다, 당신은 대학교수의 직분을 수행할 능력의 부재를 드러낸 것이다, 당신은 더이상 대학교수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되니 그 직위에서 해임하겠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학의 인사위원회의 규정에 따른 공의로운 결정이며, 대학 인사위원회에게 부여된 고유한 권한과 권위의 행사임에는 틀림없다. 따라서 아무 절차적·법적 하자가 없는 이 결정에 제삼자가 나서서 옳다 그르다라고 하는 것은 "부당한 모략이며 음해"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논문만이 학술적 가치와 의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사고와 행위에 대한 눈꼽만치의 자성(自省)과 자경(自警)조차 찾아볼 길 없는 독선과 허위의식에 깊이 감염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논문이 학문의 가치를 독과점하고 있는 오늘의 현상이 곧 그것이 앎[진리]의 최고 단계의 형식적 실현임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삶의 끝은 있지만 앎의 길에는 끝이 없다. 다시 한번 장자는 말한다.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으나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으니 위태로울 뿐이다.(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 以有涯隨无涯, 殆巳, 「養生主」 115)"
4.
한국에서는 '에세이'와 '미셀러니'의 개념이 뒤섞여 사용되어 모두 다 '수필'로 통용되고 있다. 그래서 '에세이적 수필'이 갖고 있는 문학적 품격과 위상이 평가절하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미셀러니가 에세이보다 격이 낮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격조 높은 논술적 담론이나 문화비평 등일지라도 그것에 '논문'이나 '비평'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고 '수필'이라고 해놓으면 사람들이 우선 얕잡아본다는 뜻이다.(중략) 그러므로 우선 나는 '수필'과 '에세이'의 명칭을 구별해서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수필(隨筆)'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씌어진 글'이라는 뜻이므로 미셀러니에 가깝다. 또한 미셀러니는 '잡다하다'는 말에서 온 것이므로 '잡문(雜文)'의 의미와도 통한다. 일상생활에서 느낀 감상의 파편들을 논리적 포장이나 가식적 수사 없이 솔질하게 털어놓은 것이 바로 '수필'인 것이다.(중략) 요즘 들어 '담론(談論)'이란 말이 자주 쓰이고 있는 것은, 과거에는 아카데믹하고 현학적인 글을 이른바 '논문'이라고 부르며 격이 높은 글로 간주하고, 에세이를 논문보다 격이 낮은 글로 간주하던 풍조에 대한 반성의 결과라고 본다. '논문'이라고 하면 서론·본론·결론의 격식을 갖추고 일부로라도 잡다한 각주(脚註)들을 집어넣어 실증적인 틀에 맞추는 글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글쓴이가 무엇을 말했는가에 있지, 그가 얼마나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했는가를 드러내는 데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앞으로는 설사 학위논문이라 할지라도 에세이의 형태를 갖추는 게 더 좋다고 본다. 형식이나 논리로 억지 허세를 부리다 보면 속 빈 강정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마광수 씨의 주장은 비교적 온건하다. 일반적으로 논문은 "격조높은 논술적 담론"이거나 "아카데믹하고 현학적인 글"로 간주된다. 그렇다라도 "형식이나 논리로 억지 허세를 부리다 보면 속 빈 강정"이 된다는 그의 주장에서 어떤 과격함의 혐의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마광수 씨의 주장은 너무나 지당한 말이다. 지금-여기의 우리의 삶과 전면적으로 소통되지 않는 논문중심주의를 줏대 없이 숭상하고 따르는 학자들을 "형식숭배주의", "병증", "기지촌 지식인"이라고 싸잡아 비판하는 김영민 씨보다 덜 과격하고, 강단비평가들이 "학술논문의 권위와 논문중심주의에 대한 '수동적 인정'과 '냉소적 경멸'이라는 복합적 느낌"에 빠져 있다고 말하는 권성우 씨의 가치중립적인 태도보다도 온건하다.
어떤 집단이 마광수 씨의 글쓰기가 논문이 아니라 주로 잡문에 집중되어 있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심각한 "학문적 능력의 결함"이 있다고 판단한다면 이는 글쓰기에 대한 근본적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다시말해 논문 쓰기는 곧 학문 행위이고 잡문 쓰기는 비학문 행위라는 경직된 이분법적 가치 태도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렇다면 잡문(雜文·미셀러니)과 논문의 차이는 무엇인가. 논문을 논문 되게 하는 것은 그 체계와 형식일 터이다. 논문은 발생학적으로 서구의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학문적 전통에서 비롯된 글쓰기이다. 논문에게 부여된 권위가 있다면 바로 서구의 학문적·역사적 전통이 만들어준 권위일 것이다. 논문만을 유일무이한 학문적 가치를 실현시키는 글쓰기로 떠받드는 것은 서구 추수주의와 서구의 학문적 방법과 체계에 대한 예속상태에 함몰될 위험성이 없지 않다. 잡문은 잡된 글쓰기의 결과물이다. 그것은 "학문과 예술, 논문과 창작, 인식과 표현, 논리와 감성의 접경지대에 놓인 독특한 글쓰기의 양식"이다.(권성우는 대학교수이면서 현장비평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글쓰기 행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평소에는 현장비평 행위에 매진하다가, 대학제도가 요청하는 학술적 조건을 채우기 위해서 가끔씩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상당수 강단비평가들의 유력한 글쓰기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세에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투철한 자부심과 독립심보다는, 대학제도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과정을 통해 한편으로는 직업적 안정성을 도모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비평가로서의 활동도 원만하게 수행해보려는 비평가의 이중적 심리가 배어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권성우는 비평활동이 학술적 연구의 항목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연구논문을 요구하는 대학제도의 규범에 순응하면서 아울러 우리 삶의 진실과 소통하고 현실의 생생한 리듬을 담은 현장 글쓰기를 병행하는 많은 강단비평가들의 사례를 적시하고 있다. 권성우, 앞의 책) 공공성의 영역[현실·객관적 정황]에서 사적 영역[나·나-됨]으로 밀고 들어오는 억압이나 규정성의 힘과, 거꾸로 사적 영역에서 공공성의 영역으로 뻗어나가는 반발하고 저항하는 힘[충동·의지]이 길항하는 자리에 참다운 나-됨은 실현된다. 생성즉존재(生成卽存在)를 체현한 나-됨의 규정성은 안/밖, 주체성/객체성의 그침없는 회통(會通)을 통해서 발현된다. 타자성과 성명한 차이를 체화한 그 자리, 사유하는 주체 속에, 그 탈식민성의 존재에 정체성이라는 것이 깃든다. 나-됨을 추구하는 것은 객체성들을 한손에 틀어쥐고 전체 속의 부분이라는 원근법 속에서 자기정체성을 찾고 구축하는 행위이다. 글쓰기는 그것의 구체적 실천의 한 양태이다. 나-됨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제도화·타성화된 글쓰기에 빠져 있는 것은 의식과 정신을 식민성에 담그고 있는 글쓰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정체성의 망실이며 객체성에로의 매몰이고, 필연적으로 자기비하·자기모멸로 이어진다.
마광수 씨의 글쓰기는 나-됨에 대한 투철한 자각 위에서 비전형적·탈형식적 글쓰기를 추구한다. 이것은 "잡된 글쓰기"가 "평가절하" 되고 있다는 학계의 가치기준을 알면서도 "논리적 포장"이나 "가식적 수사"를 멀리 하고 실질을 따르는 일관된 그의 고집스런 글쓰기의 태도에서도 입증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는 타성화·제도화된 글쓰기를 체질적으로 거부한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기왕에 굳어진 형식을 답습하는 것을 거부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때그때의 느낌과 사유를 자유로운 형식으로 풀어내는 "잡된 글쓰기"이다.
한국사회는 "제국/식민지, 1세계/3세계, 개발/재개발, 중심/주변"의 대립항 속에서, 전자가 후자를 지배·규정하는 가운데 서서히 후자에서 전자에로 중심이동을 하고 있다. 한 젊은 과학사학자가 지적했듯이 "이런 공고한 이분법적 범주가 한국사회의 설명에 잘 들어맞지 않는 만큼 한국사회 그 자체가 이러한 범주들을 불완전한 것으로, 불안정한 것으로, 그리고 인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홍성욱 씨에 의하면 지금-여기 한국사회는 잡종(雜種·hybrid)의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다. 잡종인간·잡종학문·잡종개념이 발호하는 지금-여기의 현실에 맞는 글쓰기의 양식은 "형식적 단순화의 전범"이며, 그래서 "복잡한 인간의 다양한 경험을 하나의 경직된 스타일 속에 담을 수 있다는 독선적 태도"에 빠진 논문보다는 오히려 잡종적 글쓰기가 현실적 정합성을 더 머금고 있을 수도 있다(김영민).
5.
씌어진 모든 것들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정신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리라.
글쓰기는 피의 유혹이다. 글쓰기는 피의 쾌활함의 분출이다. 나는 여기까지 써온 것을 눈으로 훑어 읽는다. 내 고요한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렁임을 느낀다. 그것은 기쁨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기쁨이다. 나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낄 줄 아는 오감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 너무 좋다. 내면에서 조용한 흥분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이 기쁨은 내가 살아 있음을 실감으로 되돌려 준다.
나는 논문의 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부여된 지나친 권위와 가치의 독과점화, 논문의 특권적 지위를 우려하는 것이다. 진리는 논문 속에 있지 않다. 현실을 역동적으로 변혁하는 힘은 논문에서 나오지 않는다. 유동하고 변전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길을 가는 논문은 개념적 지식의 무덤이다. 다시 한번 묻자. 논문이냐, 주체적 글쓰기냐. 단순화하면 논문이든, 주체적 글쓰기든 둘 다 '무엇을 말하는 것'이다. 둘이 언제나 상극(相剋)인 것은 아니다. 형식이 굳어지면 필경 그것은 내부로부터 해체된다. 형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잡종적 글쓰기도 이미 있는 형식을 해체·확장한 뒤 새롭게 만들어진, 아직은 미약한 형식의 글쓰기일 뿐이다. 그것은 다시 새로운 형식의 굳은 매혹을 향해 몸을 밀고 나아간다.
문제는 지식인의 허위의식이다. 형식의 정합성은 그 '무엇을 말하는가'의 정합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바깥에서 주어지는 불변의 가치가 아니다. 어느 쪽이 오늘의 현실의 다양성·복잡성·현장성을 담아내는 글쓰기냐. 서구의 근대주의 정신사에 바탕을 둔 제도화·형식화된 논문이냐, 복잡현묘한 지금-여기의 현실의 지형에 온몸으로 부딪쳐 주체적으로 문제를 길어내고 사유를 풀어내는 잡종적 글쓰기냐. 우리는 지금 그 물음 앞에 벌거벗은 채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