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23. 금요일. 라하브 샤니 지휘&쇼지 사야카 바이올린. 예당 콘서트홀
천재 작곡가들에게 보내는 3통의 짤막한 편지
To. 친애하는 라벨씨에게
작가 헤밍웨이가 '파리는 이동축제일'이라 명명했듯이 파리는 예술가들의 영원한 파라다이스 입니다. 당신은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그 앙증맞은 두 발로 세느강을 따라 걸으며 모국어에 앞서 뮤즈에게 음악의 언어를 배웠다는 걸......
예술가의 심장은 감각과 스타일이고, 감각과 스타일은 타고나는 것일진데, 당신은 부계로부터 관능을, 모계로부터 열정을 물려받았습니다. 오늘 저녁 연주될 작품 「스페인 광시곡」에선 당신에게 내재된 스페인 기질을 엿볼 수 있겠군요.^^
당신은 림스키코르샤코프와 더불어 관현악의 대가이자 마술사였지요. 오케스트레이션에대한 정확한 이해, 풍부한 상상력, 세련된 도회적 감수성, 청중의 반응까지 고려한 치밀한 구상!! 어느것 하나 흐트러짐없이 완벽히 계산한 프랑스인다운 교활함(?!)
이국취향과 스페인 선호 경향. 어쩌면 프랑스 작곡가라면 응당 그래야 할 것같은^^....
특이한 전통을 존중하는 맘을 품고 공연장으로 입장했습니다. 설렘과 기대는 덤으로...
역시나!!두대의 하프. 풍성한 하프줄은 숫처녀의 탐스런 금발. 보기만해도 황홀할진데 연주되면 그 이상의 관능은 찾아보기 힘들겁니다.^^
밤의 전주곡, 말라게냐, 하바네라, 축제.
아! 이래서 난 당신의 음악을 사랑합니다.
분명 오선지 위 음표가 울려퍼지는데 왜 난 시낭송회에 있는듯한 착각에 빠지는지요...
왜 갤러리를 거니는듯한 느낌인지요...
상상이 실제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이국에대한 끊임없는 동경. 오늘밤 만큼은 스페인 여행을 하지못한 아쉬움도 쉬이 달랠 수 있겠네요. 당신처럼 오직 상상으로만 오늘밤 스페인을 다녀왔습니다.
To. 친애하는 프로코피에프씨에게
18년간의 지리지리하고 씁쓸한 망명생활을 접고 고국에 오셨을 때 맘은 어떠셨어요? 당신과 나처럼...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몽상가들에겐 이념은 그닥 중요치 않을지도 모르지요...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게 곡을 쓰게 해주고, 써내려간 악보의 잉크가 마르기 전에 출판해주고, 내 펜에서 나온 모든 음표를 연주해준다면 어떤 정부든 괜찮다." 라는 당신의 천진난만한 고백을 몇차례 읽으며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모두 정말 이런 천국에서 살고 싶거든요.
그래도 순수예술마저 부르주아의 잔제로 치부하던 레닌이 가고, 포악한 공산주의자긴하지만 다행히 오페라와 발레 마니아이던 -그의 폭정과 인권유린은 잘못된 것이지만-스탈린 통치기에 귀국하신 건 그나마 다행이네요.^^
레닌 집권이 계속되었더라면...아! 정말 생각만해도 끔찍하네요. 만일 그랬다면 1938년 당신의 환상적인 발레극 「로미오와 줄리엣」초연이 가능했겠어요?!
사실 오늘밤 음악회에서 가장 기대하던 곡이 바로 당신 작품이예요. 보아하니 당신은 이 곡을 당대 최고의 비루투오소 로베스 쇠탕을 위해 작곡한거 같네요. 오늘은 파가니니 콩쿨에서 16세의 최연소의 나이에 우승한 쇼지 사야카가 연주할 건데요. 작곡가인 당신이 흡족하실진 모르겠어요. 두고보면 알게되겠죠.^^
어때요?! 굉장하지요?! 저 사실 당신에대한 당연한 예의로 음악회 몇 주 전부터 거의 매일 이 음악 들었어요. 근데 유투브론 사실 별 감흥이 없었어요. 당신의 협주곡 중 가장 인기있는 작품인데 말이죠. 그런데 오늘밤 제 컨디션이 좋아서인지, 실황에서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전율때문인지...솔리스트의 빼어난 연주인지..
정말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악장 너무 좋았어요!! 특히 2악장의 낭만적인 선율의 향연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겠지요!!!
다만...아끼는 손수건을 가져오지 않은게 두고두고 후회되요. 카타르시스의 우아한 결정체가 몇방울 떨어졌는데 값싼 휴지로 덧없이 닦아내야하다니...
당연히 커튼콜이 장난아녔어요. 만약 한평생 칠 박수의 양이 있다면, 아마도 오늘밤 여기서 거의 다 써버리지 않았나 싶어요. 그녀는 우리의 찬사에 기쁘게 화답하며 몇번이고 왔다갔다했어요.^^
여성인 관계로 잠시 연주자의 자태를 소개해도 되겠죠?! 충분히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그녀는 다소 톤 다운된 버건디 실크 사이사이 우아한 블랙 망사천을 덧덴 앳지있는 드레스를 입고, 소녀풍의 코가 둥근 도로시 블랙 슈즈를 신고 있었어요. 머리는 단정히 묵고요.^^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재능과 외모가 모두 훌륭하니 눈과 귀가 즐겁드라구요.^^
그녀가 앙코르로 준비한 곡이 주최측에서는 파가니니 작품「파이지엘로 nel cor piu non mi sento의 주제에의한 변주곡」이라 하는데 영 아니든데?!ㅡㅡ;;
아직도 앙코르 곡목을 모르겠어요...그런데 그대로 모를래요... 어쨌튼 파가니니 콩쿨 우승자다운 깔끔하고 산뜻한 기교였으니까요.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To. 친애하는 바르토크씨에게
이번애도 제 좌석은 좋았어요. B블럭 14열 2번. 이번에도 R석이었는데 지휘자 라하브 샤니가 지휘대에서 왼쪽 발을 열정적으로 구르는 것까지도 매우매우 잘 보였어요.^^
「피아노 소나타 작품번호 80& 아르헤리치의 연주. 레이블 EMI」 물론 오늘 프로그램은 아니지만...뭐 떠오르는 기억 없어요??
제 나이 25살 무렵에 이 통통 튀는 소나타를 듣고 있는데 당신이 어떠냐고 물어보셨잖아요.^^ 아! 그야말로 별세상였죠.
강렬하고 인상적인 리듬, 타악기 두드리는듯한 피아노 연주...
대범하게 흩날린 점 같은 스타카토와 거친 붓터치 같은 단 몇개의 선율로도 명작이 가능하다니......
그 시절엔 제가 얼마나 철없던지...헝가리 태생이지만 이미 오래전 서유럽 댄디가 다 된 리스트씨 뒷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녔으니...
그러한 어처구니없는 오빠부대 행각은 10대때 이미 끝냈어야하는데...^^;;
작곡의 고통을 해산하는 여인에 비유한 무슈 쇼팽의 말! 참 일리있어요. 그런데 건강한 육체에서도 어려울 작업을 당신은 백혈병이라는 최악의 상태에서
어떻게 해낸거죠? 바르토크씨는 참 독해요! 더구나 친 나치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사랑하는 고국을 떠나 뉴욕병실에서 서글픈 이방인이되어.....ㅠㅠ
당시의 막막하고 슬픈 상황이 엄숙한 분위기의 1악장과 음울한 죽음풍의 3악장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는듯 했어요. 물론 당신의 강직한 성품으로 볼 때 병마로 겪는 개인적 고통보단 조국에대한 걱정과 그리움이 훨씬 견디기 어려웠겠지요...그래도 당신은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고, 밝고 힘차게 뻗어나가는 피날레(5악장)를 통해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응원해 주시는 거 같아 감사하게 되요.
참으로 다양한 악기들이(심지어 피콜로까지!!) 주연이 되다가 어느순간 조연이 되기도 하고..
마치 우리네 인생들처럼 말예요. 확실히 노장은 다르긴 다르네요.^^
오늘밤 서울시향, 그리고 라하브 샤니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작곡가 바르토크 당신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이 좀더 장수하셨더라면...당신 머릿속 모든 심포니 선율들을 오선지에 옮기셨더라면......
이런 아쉬움이 남긴하지만, 어찌보면 굉장히 교향곡스러운 이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 완성될 때까지 당신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