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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군사저널 2005년 11월호 시사포커스
국가와 훈장
정부의 책임
김영삼 정부 시절, 원로작가 황순원은 문화의 달을 맞아 정부가 주는 은관문화훈장을 거부한다고 문화체육부에 통보했다. 그는 훈장 거부 이유에 대하여 특별한 이유는 없으며 개인적으로 받기 싫은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이 짤막한 거부 의사는, 언론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데까지 이슈로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뜻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훈장거부사례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고 그 이전에 연전의 이효재 교수도 5공 인사와 함께 훈장을 받을 수 없다며 국민훈장 수상을 거부한 바 있다.
이 두 사례는 별것 아닌 개인의 문제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내면적 요인이 잠재해 있다. 왜냐하면 정부가 수여하는 훈장이란 국가에 공훈이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뚜렷한 업적이 있는 사람을 가려 뽑아 수여하는 명예의 표증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훈장은 곧 국가권위의 상징이며 명예의 표상이다. 국가가 충성을 다한 국민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인 것이다.
전장에서 훈장을 받기 위하여 무공을 세우려다 숨진 군인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수없이 많다. 훈장은 개인이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는 국가가 공인한 표증이므로, 훈장 수여야말로 국민에게 국가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시혜가 된다.
그러나 훈장에 대한 부정적 견해도 만만치 않다 그 이유는 훈장의 가치나 효용성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훈장을 관리하는 정부 당국자들의 불찰과 불공정한 처사에서 발생한다.
훈장을 탈 만한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훈장을 주었다면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훈장을 수여하기 위한 공적심사 과정에서 훈장을 받을 만한 공적이 없는 사람에게, 또는 훈장을 받을 수 없는 도덕적 결함이 있거나 과거 행적에서 결정적인 과실이 있는 사람에게 훈장수여가 결정된다면 바로 국가의 훈장은 시비의 대상이 되고 불만의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국가가 오히려 훈장을 주지 않는 것만도 못한 불행이 초래된다. 결국 훈장은 받을 만한 사람이 받아야 제 가치를 보유하게 된다.
1903년, 퀴리 부부가 노벨상을 받자 프랑스 정부가 그 부부에게 레종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피에르 퀴리는 “내게 훈장을 주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과학자인 내가 훈장을 탄들 무슨 소용이겠는가.”라고 내뱉으며 훈장 받기를 거부했다. 레종도뇌르 훈장은 뛰어난 공적을 쌓은 사람에게 주는 프랑스 최고의 훈장이다.
그가 수훈을 거부한 확실한 이유는, 그의 거부의 변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어렵지만 그의 프랑스 정부에 대한 좋지 않은 심정의 표출인 것 같다. 여태껏 자기들에게 무관심하다가 노벨상이 주어지니 뒷북을 치는 정부 당국자가 미웠는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훈장의 거부는 정부 또는 정부 당국자에 대한 반발의 표출로 인식되는 것도 알고 보면 훈장의 양면성 때문이다. 훈장은 정확히 받을만한 사람을 공정하게 가려내어 주었을 때는 국가의 권위와 능률을 상승시켜 주는 탁월한 효과를 볼 수 있지만, 불공정하거나 받아서는 안 될 사람에게 잘못 주어졌을 때는 오히려 반목과 비능률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국가의 권위가 추락하는 데까지 그 폐해가 이어진다.
나폴레옹은 비교적 공정한 방법으로 훈장을 관리했지만 너무나 많은 훈장을 남발하는 바람에 많은 비판 여론에 때때로 당혹해 하였다. 나폴레옹이 달아주는 훈장은 쇠붙이나 장난감이라고 혹평하는 비평가들을 향해 나폴레옹은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훈장을 어른들의 장난감이라고 부르든 말든 그것은 당신네 자유다 그렇지만 인류를 지배하는 것은 장난감이다.”
훈장이 국가 최고의 영예의 표증인가, 혹은 한낱 쇠붙이에 지나지 않거나 어른들의 장난감인가의 여부는 결국 정부 당국자의 공적 심사 결과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훈장의 공정한 관리는 정부의 책임이다.
훈장의 수여는 헌법과 상훈법에 의거하여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결정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상훈의 운영은 대통령의 통치 영역 가운데 주요 부분의 하나이다.
훈장제도의 발전과 효과
우리나라 훈장의 종류는 11종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훈장은 5개 등급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무궁화대훈장은 등급이 없고 건국훈장은 3개 등급으로 구분되어 있다.
오늘날의 훈장제도로 발전하기까지 우리나라의 훈장문화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우리나라의 상훈제도는 부족국가시대부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자에게 말과 노비를 상으로 주기 시작한데서 연유한다. 삼국시대에는 한걸음 발전하여 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자, 효자, 열녀, 국난 공신 등에 대하여 식읍(食邑)과 관직을 내려 후대하였다.
특히 신라의 상사서(賞賜署)는 통일 공로자와 왜구의 침략을 물리친 전공자, 국난 공신 등에 대하여 후한 상을 주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고공사(考功司)에서, 조선시대에는 공신도감(功臣都鑑)에서 개국공신과 국난 공신, 효자, 열녀, 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자 등에게 상을 주었다.
따라서 지금의 훈장과 같은 표증제도는 없었고 실물이나 벼슬을 줌으로써 지금의 상훈제도보다 훨씬 실속이 있었다.
지금의 훈장제도는 밑천이 들어가지 않으면서 최대최고의 효과를 얻게 하는 마법과도 같은 신비한 제도이다. 쇠붙이 하나로 죽고 살고, 또 웃게 하고 울게 하는 초능력을 소유한 신기(神機)라고도 과장할 만하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지금의 훈장제도의 효시는 조선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개칭한 뒤 광무 4년 1900년 4월 17일 칙령 제13호로 훈장 조례를 제정 공포한 데서부터 비롯된다.
당시의 훈장은 7종이었으나 1910년 일본에 의한 병합으로 인하여 그 권위와 명예가 퇴색되다가 마침내 상훈제도마저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 후 해방까지 우리나라 사람이 받는 훈장은 일본제국의 훈장뿐이었다. 매국노나 친일파들이 줄줄이 훈장을 달고 거들먹거렸던 치욕의 시대였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 독립과 건국에 공로가 있는 선열들을 기리기 위하여 1949년 4월 27일 처음으로 새로운 상훈제도가 폐지된 지 40년 만에 부활되었다.
제일 먼저 건국공로훈장령이 제정 공포되면서 잇따라 9개의 각종 훈장령을 제정 공포하였고, 1963년 12월 14일에는 새로운 상훈법을 제정하여 그때까지 각개별 법령으로 운영되던 각종 훈장령을 폐지하고 이를 새로운 상훈법에 통합하여 오늘날의 단일 법률의 모체로 개편하였다.
그 뒤에도 수차례에 걸친 상훈제도에 대한 정비 보완으로 각종 훈장 및 포장의 종류와 명칭을 각 분야별로 일목요연하게 구분하여 11종으로 확대함으로써 비로소 현행 훈장제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나라훈장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무궁화대훈장, 건국훈장, 국민훈장, 무공훈장, 근정훈장, 보국훈장, 수교훈장, 산업훈장, 문화훈장, 새마을훈장, 체육훈장
위 훈장의 포상대상은 대한민국 국민이나 외국인으로 대한민국에 뚜렷한 공적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정치적인 목적이나 정실에 의해 수여할 수 없도록 명문화되어 있다.
서훈의 추천은 각 원, 부, 처, 청의 장 그리고 국회사무총장, 법원행정처장, 감사원장, 국가정보원,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이 행하고 추천권자의 소관에 속하지 아니하는 서훈의 추천은 행정자치부 장관이 행한다.
각급기관에서 추천된 포상대상자에 대하여 공적 내용과 그 공적이 국가사회에 미친 효과의 정도 및 기타 사항을 참작, 포상여부와 훈격을 철저히 검토한 뒤 이들에 대한 공적사항을 차관회의와 국무회의에 상정하여 심의를 거친 뒤 국무총리와 대통령의 재가로써 포상이 확정된다.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이 참으로 엄격한 심사를 거친다면 하등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번번이 문제가 생기는 원인은 위의 심사과정 가운데 어느 하나를 거치지 않았거나 정실 또는 정치적 배려가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국가의 권위가 실추됨은 물론 국가질서의 혼돈을 초래케 한다고 보아야 한다.
정당한 공적심의 과정을 통과하여 받을 만한 사람이 훈장을 받았을 때 그 상훈의 효과는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다.
첫째, 상훈은 국가 발전에 선도적 구실을 수행한다. 즉 국가사회 발전에 현저한 공적을 세운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훈장은 국민들에게 강한 긍지를 갖게 하고 누구든지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하고 국가발전에 뚜렷한 공적을 쌓으면 국가로부터 응분의 보답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심리를 흡족시켜 줄 수 있다.
특히 군인에게 있어서 무공훈장은 명예를 생명과 같이 존중하는 세계에서 최고선이며 최고의 광영의 상징으로서 의미가 있다. 따라서 애국심과 충성심 고양의 매체로서 손색이 없다.
둘째, 건전한 국민정신의 함양과 상훈의 영향이 크다. 즉 정의 사회 구현과 시민의식의 정립, 건전한 사회발전을 유도하는데 상훈의 효과는 계속 확대될 것이다.
셋째, 국민 단합과 화합을 이루어 안정된 사회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다.
넷째, 해외 교민들에게 포상함으로써 국위 선양과 국가발전에 계속 공헌하게 되는 효과가 있다.
다섯째, 외국인에게 시상함으로써 외국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고 국위를 선양시키는 구실을 한다. 따라서 외국인에게의 포상은 국가이익을 얻을 수 있고 국제간의 신뢰를 두텁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신상필벌과 훈장의 추락
국가기강이 해이해 지거나 지나친 정치성과 정실에 치우치게 되면 인사정책이 문란해지면서 상훈제도 또한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은 후한서(後漢書)의 선제기(宣帝記)에 나오는 널리 알려진 글귀이다.
상을 줄만한 공훈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되, 벌할 만한 죄과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라는 의미로 국가기강과 능률을 위한 최고의 선택적 경구이다.
비단 국가뿐만 아니라 군대에서 혹은 사회단체나 학교 등 조직사회에서의 신상필벌의 시행이야 말로 실로 그 조직의 성패가 달려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신상필벌이 시행되지 않는 군대는 반드시 실패한다. 강한 군대와 전투에서의 승리는 전력과 사기가 좌우하지만 그 원동력은 신상필벌에서 나온다.
이순신 장군은 신상필벌을 엄정히 시행하여 전승으로 이끈 가장 뚜렷한 증거를 남겼다. 전투가 끝날 때마다 이순신 장군은 전공을 세운 자에게 파격적인 승진과 포상을 아끼지 않았으며 죄를 지은 자는 엄하게 벌하였다.
‘독전 범군임적불용명자처참(督戰 凡軍臨敵不用命者處斬)’ 즉 싸움을 독려하되, 적을 맞아 싸우면서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목을 벤다는 것이다.
참으로 끔찍하고 무서운 글귀이지만 이순신은 전투시마다 늘 깃발에 그 글을 써서 뱃머리에 날리면서 전투를 지휘했다. 전투가 끝나면 이순신은 명령에 불복하거나 전장을 이탈한 자들을 가려내어 가차 없이 목을 베었다.
군기확립은 필벌에서 나오지만 그 근원적 모체는 신상이다. 상훈의 공정 여부가 모든 조직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신상을 공정히 집행하면 필벌의 사유가 생길 까닭이 없다. 반면 필벌만 하고 신상을 하지 않으면 그 조직의 효율은 반감된다. 그만큼 신상은 필벌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국제공산주의가 붕괴되어 종주국 소련이나 동구권 국가들이 공산주의를 폐기하면서 새로운 탈냉전시대가 찾아왔지만, 궁핍하여 망할 것 같은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아직까지 사회주의 노선을 고수하면서 연명하고 있는 원인도 알고 보면 신상필벌 덕분이다.
주렁주렁 훈장을 상의에 달고 두 손 흔들며 만세 부르는 그 광란의 작태는 바로 신상필벌의 산물인 것이다.
배반자는 가차없이 처형하고 공적이 있는 자는 훈장을 주어 영웅으로 떠받든다. 그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처형을 면하고 영웅 되는 길밖에 도리가 없다.
훈장의 효력은 쇠붙이에서 구세주를 향해 확대된다. 북한 인민에게 있어 훈장은 곧 생명이며 구세주인 것이다. 그들이 펄펄 뛰며 흘리는 눈물은 가짜가 아니다. 그들의 눈물은 적성(赤誠)의 산물이다. 그 적성의 원천적 의미는 훈장이며 영웅 칭호이다.
그러나 북한의 신상필벌이 영원할 수 없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언젠가는 북한 집권층의 허구가 드러나면서 실체가 명백히 밝혀지는 날 북한 인민이 다닥다닥 붙인 훈장은 구세주로부터 한날 쇠붙이로 추락한다. 훈장은 진실의 바탕에서만 그 위대한 효력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도 추락하는 훈장이 있을까? 그 대답은 명료하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도 집권층의 오류로 쇠붙이와 같은 훈장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무공훈장과 광주사태
광주사태 당시 필자는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따라서 육군의 당연직 공적 심사위원장이었다. 광주의 소용돌이가 끝난 직후 참모총장 이희성과 참모차장 황영시로 부터 ‘광주에서의 폭동 진압 작전 유공 장병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도록 조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필자는 그 자리에서 ‘무공훈장은 적과 교전하여 전공을 세운 장병에게 수여하는 것이므로 무리’라고 건의하자, 총장은 ‘폭도는 적이 아닌가?’라며 단칼에 필자의 건의를 묵살하였다.
이윽고 얼마 후 필자의 책상 위에 서류뭉치를 올려놓으며 ‘조속히 공적심사위원을 소집하여 완결하도록 하라’고 말하며 독촉하는 인사참모부장 김홍한 소장의 차가운 눈초리를 맞았다. 잠깐 내용을 훑어보니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등 수없이 많은 전투 유공자 명단이 스쳤다.
이에 필자가 ‘무공훈장은 합당하지 않으며, 만약 꼭 이들을 포상하려면 보국훈장이어야 한다. ‘고 반론을 제기하자, 그는 ‘이미 무공훈장으로 결정이 났으니 서류만 완결하도록 하라는 차가운 말을 남기고 필자의 사무실에서 나갔다.
필자는 천장을 응시하며 만감에 빠지고 있다가 마침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역사에 죄인으로 각인되는 길보다 정의의 길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끝까지 필자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 다음날 인사참모부장으로부터 차장직 해임 통보를 받았다. 필자는 그렇게 하여 군복을 벗었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났다. 필자가 예측한 대로 당시 무공훈장을 주라고 지시한 장본인과 그로 말미암아 훈장을 받은 거의 대부분의 당사자들은 쇠고랑을 찼다.
기세등등하여 ‘폭도는 적이 아닌가?’라고 호령하던 그들의 모습이 법정으로 향하는 피의자의 초라한 꼴로 변해 있던 광경을 보면서 역사와 훈장의 의미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상훈법에 의하면 훈장수여 당시의 공적이 사실이 아니거나 허위일 때에는 국가에서 훈장을 회수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광주시민을 적으로 하여 수훈한 공적 내용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이미 밝혀졌으므로 무공훈장은 당연히 회수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무공훈장으로 다시 그 빛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의 무공훈장이 그대로 그들에게 계속 주어진다면, 그 무공훈장이야말로 쇠붙이로 추락하는 훈장이 아닐까. 잘못되었다고 인정할 때 그 잘못을 시정하는 일은 빠를수록 좋다.
국가기강 바로 세우기
신상필벌의 역사적 교훈은 정의의 구현과 공정성을 위해 긴요한 덕목이다. 국가가 수여하는 훈장이 권위나 명예의 측면에서 도전을 받거나 무시된다면 그 국가의 통치권자에게 필요한 정당성에 흠집이 생길 수 있다.
이효재, 황순원 두 사람의 수상 거부사건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매우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표면적 거부 이유에서부터 실질적 거부의 내면 사유를 파악하여 시정하는 노력에 정부 당국자는 인색해서 안 된다. ‘건방진 자의 반항’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반성해야 할 중요한 이유’를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난 일이지만 여기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 있다. 김영삼 정부 당시 교육부장관인 김숙희가 국방대학원 특강에서 6.25 동란을 ‘동족간의 명분 없는 전쟁’으로, 월남전 한국군 참전을 ‘용병으로의 부끄러운 참전’이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아 국군 장병은 물론 많은 국민이 분노하자 김영삼 대통령은 즉각 그를 파직했다. 그리하여 그 망언 파동은 점차 잊혀져 갔다.
그런데 얼마 후 그를 청와대로 불러들여 공직자 최고의 명예인 1등급 청조근정훈장을 수여하였다. 이를 알게 된 국군 장병은 물론 대다수 국민들은 그 훈장의 의미에 대해서 혼돈하기 시작하였다.
그 사안으로 미루어 그보다 훨씬 하급훈장을 타게 된 이효재 교수가 ‘그런 훈장이라면 나는 받지 않겠다.’고 할 만한 이유가 성립되지 않겠는가. 작가 황순원의 2등급 은관문화훈장 거부에 대해서 혹시 문화인 최고의 명예인 1등급 금관문화훈장을 받게 된 조병화 시인의 행적에 대하여 수치심을 느낀 나머지 수상을 거부하지 않았나 생각해 봄직하다.
조병화 시인은 1981년 초 전두환 정권 수립과 함께 그를 찬양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세상에 내놓았다.
국운이여, 영원하여라
새시대 새역사의 통치자
새로운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새 대통령
온 국민과 더불어 경축하는
이 새출발
국운이여! 영원하여라.
청렴결백한 통치자
참신과감한 통치자
이념투철한 통치자
정의부동한 통치자
두뇌명석한 통치자
인품온후한 통치자
애국애족, 사랑의 통치자.
온 국민의 이러한 신뢰
그 여론의 물결을 타고
새시대 새나라 새역사를 전개하시는
새 통치자
온 국민의 소망이
온 나라에 가득하여라.
보다 새로이
보다 강력히
보다 철저히
보다 공정히
보다 신속히
보다 밝게, 따뜻이
보다 공평히, 골고루
온 국민과 더불어 함께
다시 시작하는
새 질서
새 이상
새 건설
오, 대한민국이여, 사천만 국민이여
그 평화, 그 번영
그 약속, 더욱 부동하여라.
썩은 재물
씩은 치부
썩은 권세
썩은 허세
썩은 양심
썩은 위선
썩은 권위
썩은 언어
냄새나는 온갖 거래
다시는 있을 수 없는 부정 부패
말끔히 씻어 버리고.
한가족, 혹은 두서너 가족, 모여 사는 섬에서부터
8백만이 운집하고 있는 대서울까지 골고루
온 겨레가 나라 혜택 받을 수 있는
복지국가 부강한 나라, 만들려는
이 새로운 영도.
오, 통치자 여!
그 힘 막강하여라.
실로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거
이끄는 힘이 만드는 거
아, 이 새로운 영도
이 출발
신념이여, 부동 불굴하여라
영광이여, 길이 있어라
축복이여, 무궁하여라.
**1980년 8월 28일자. 경향신문 및 1981년 3월 3일 발행 兵學社의 시집 『그대 왜 거기 가 섰나』 pp.25~29 인용
위의 시는 시로서 미흡한 점이 많다. 구성과 어휘 선택에 있어서도 평소 그의 실력에 훨씬 못 미친다. 특히 전두환 개인에 대한 지나친 찬사는 벌써 시(詩) 정신에서 일탈하고 있다. 북한 시인들이 지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찬미를 무색케 할 정도로 전두환을 찬양하고 있다.
우리나라 시인 가운데 행운을 타고 유명해져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 더러 있는데, 거의 모두가 작품의 우수성에서 얻어진 결과가 아니고 권력자에 영합하여 얻어낸 보상이었다. 일부 보도매체에서 더욱 부추겨 그 유명도를 높여 준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이는 문단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지성 세계의 치부이다. 훈장별로 매겨져 있는 최고 1등급 훈장, 예를 들면 무공훈장에 있어서 태극무공훈장, 문화훈장에 있어서 금관문화훈장, 근정훈장에 있어서 청조근정훈장 등은 그 분야 정상의 권위를 상징하는 데 하나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을 골라야 한다. 또 그 공적이 훈장의 성격과 부합되어야 한다.
예를 든다면 전두환이 스스로의 권력을 작용하여 수상한 태극무공훈장은 누가 보아도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정권 찬탈의 살인행위가 어떻게 국가 최고의 무공 수훈이란 말인가.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는 책임은 정부에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정부는 국가기강을 바로 세워 국민에게 애국심과 충성심이 폭죽처럼 솟아오르게 영단을 내려 주었으면 한다.
따라서, 전두환의 태극무공훈장뿐만 아니라 광주 사태 진압군 지휘관(하나회 장성급에 한함)의 무공훈장 또한 회수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노무현 정부에게 주어진 책무 가운데 하나임을 밝혀둔다.
별첨 - 그후의 조치된 내용
나는 광주사태 당시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직에 재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연직 공적심사위원장으로 광주사태 유공장병 공적 심사를 맡았다. 그 심사 과정에서 나는 무공훈장 수여를 반대했는데도 절차를 무시하고 무공훈장이 수여되었었다 그러므로 법적으로 하자가 있어 사실상 원천무효가 된다. 내가 반대한 이유는 광주시민이 폭동을 일으켰다 해도 적이 아니므로 전투공적이 아닌 국가 질서를 유지한 공로이기 때문에 보국훈장이 적법하다고 주장하였다.
상훈법에 의하면 무공훈장은 '적과 교전하여 적을......' 이라는 무공훈장 수여 대상자를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무공훈장이 주어지면 광주시민과 국군이 영원히 적과 아군으로 편가르는 사태가 역사에 각인되므로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그대로 무공훈장으로 확정했다. 그후 나는 그 일로 말미암아 육군본부 지휘부의 회유를 뿌리치고 스스로 군복을 벗었다. 전역 후 전업작가로 창작에만 전념하는 한편 군사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나는 법규와 절차를 무시해서 주어진 무공훈장 삭탈을 위해 정부에 건의서를 제출하는 한편 일간신문의 시론 또는 월간 군사전문지에 부당성을 지적한 글을 계속 기고하면서 국회 의원회관 강당에서 특강을 하는 등 노력하였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은 제머리 깎기에도 벅찬 탓인지 당위성만 강조하다가 흐지부지해버렸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 전두환의 태극무공훈장을 비롯 그때 잘못 주어졌던 무공훈장 모두를 삭탈하였다. 이로써 광주시민은 적의 굴레로부터 벗어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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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훈장의 의미를 되세기는 좋은 글 잘 읽엇습니다 . 훈장하면 저는 제일먼저 떠오르는것이 이북 사람들의 가슴에 주렁주런 매달고 군이건 민간이니건간에 가슴 전체를 약장이 아니라 정장으로 덮고나오는 코매디같은 것이 생각나 참으로 돈 안들이고 사람 부리는 김정일의 간교한 놀음에 고소를 금치 못하였습니다. 선배님의 광주사태의 훈장 거부로 옷을 벗은 것은 우리 나라의 남발되는 훈장 놀음에 경종을 울리는 개기가 되였슴을 생각게 함니다. 세월이 흘러도 부당한 훈장은 박탈하는 제도는 올은 일입니다
상훈의 공정성은 국가기강과 직결됩니다.
국민 사기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전두환이 자기 권력으로 최고 무공훈장을 차지한 것은 세기의 웃음거리가 아니겠습니까.
그 훈장을 노무현이 삭탈했습니다.
광주사태는 그 자체가 겨레의 비극이었습니다.그 비극을 빌미로 12.12군란의 정치군인들이 무공훈장을 나누어 가졌다는 것은 분노 이전에 웃음거리죠.문제의 하나회 정치군인 박준병의 충무무공훈장도 삭탈 당했습니다.
재미있는 역사소설을 보는 상황전개 입니다.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이 글이 다시 주목 받게 되었다.
정부 당국에서 사실 확인 전화를 받았다.
나는 진실임을 다짐하고 이 내용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진다고 답했다.
@요나 어제 일임.
삭제된 댓글 입니다.
내 글은 언제나 Free이니 나와 상의가 필요 없죠.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오래 살고 볼 일 ^^.
참고자료 - 상훈법 제13조 (무공훈장)
무공훈장은 전시(戰時)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에서 전투에 참가하거나 접적(接敵)지역에서 적의 공격에 대응하는 등 전투에 준하는 직무수행으로 뚜렷한 무공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며, 이를 5등급으로 한다.
[전문개정 2011.8.4] [[시행일 201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