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에 불암산에 오르니 / 전성훈
도봉구 창동 주변에는 서울의 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서울의 영산(靈山)인 종갓집 북한산을 중심으로 북한산 줄기를 이어받은 늠름한 도봉산, 도봉산 자락에서 의정부방향으로 한 획을 긋는 사패산, 의정부 시내를 가로 지르면 만나는 수락산, 수락산의 발치에서 다시 솟은 불암산, 이른바 “불수사도북”의 이름을 가졌듯이 이들 5산은 한 지붕에서 지낸다.
불암산(佛巖山)은 높이 508m로 큰 바위로 된 봉우리가 스님의 모자를 쓴 부처의 모습 같다 하여 불암산이라 부르며 필암산 또는 천보산이라고도 한다.
일기예보에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상태가 좋다기에 아침 일찍 대문을 나선다. 평소 겨울철에는 오전 8시 전후 햇볕이 나고 하늘도 맑은 편인데 오늘은 뿌연 잿빛 하늘이다.
창동역에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상계역에 내려 불암산 입구에 도착하여 약수터에 가니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약수터를 폐쇄한다는 알림 문구가 적혀 있다. 재현고등학교를 지나면 만나는 남근석, 바위 모양이 남성의 물건을 닮아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아낙네들이 빌었던 곳이라고 한다.
남근석을 지나 정암사 계곡을 따라 오른다. 여름이면 제법 물이 많이 흐르던 계곡인데 물이 흐르지 않고 조잘조잘 시끄럽게 노래하던 새 소리도 들리지 않아 적막하다. 산을 찾은 사람들이 눈에 띠어 이곳이 깊은 산중이 아니라 서울 근교 산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계곡을 한참 오르다 만난 입석대(立石臺), 운치 있는 모습은 아니지만 서울대공원 부근의 선바위처럼 바위가 뾰족하게 서 있다. 입석대를 지나 한참 올라가면 간이쉼터다.
쉼터 가는 길 목제 계단을 세며 한 계단씩 오르다보면 어느 틈에 숫자를 잊어버린다. 한 번도 제대로 계단 숫자를 세어 본 적이 없다.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평상심을 잃어버린 탓인 것 같다. 간이쉼터를 벗어나 바위에 오른다. 커다란 거북이 기어가는 모습 같아 거북바위로 부르는 곳에 도달하면 앞이 탁 트여 도봉산과 북한산 그리고 제2롯데 월드까지 보인다.
정상에 오르지 않고 옆으로 돌아서 석장봉 주변 다람쥐광장으로 간다. 제법 널찍한 광장에는 벤치가 있다. 의자등받이에 기대어 따뜻한 차에 초콜릿을 먹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주말이면 라면과 막걸리를 팔던 아주머니가 안 보인다. 터줏대감 노릇하던 고양이가족도 눈에 띠지 않는다. 건너편 불암산 정상에 사람들이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강아지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온다. 먹을 것을 찾는 모양인데 녀석 몰골이 형편없어 한동안 산에서 지낸 모습이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보금자리를 벗어나면 본래 모습과는 달리 낯선 모양으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불암산을 오르며 제일 기뻤던 순간은 20년 전 딸이 대학입학시험에 합격했다고 전화했을 때였다. 구식 애니콜 전화기에 들리던 딸의 들뜬 목소리, 그 당시 회사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나를 위로해 준 전화였다.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반면에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어느 해 추석 무렵이었다. 평소처럼 불암산을 오르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쏟아지더니 안개가 자욱이 끼었다. 늘 다니던 익숙한 산길임에도 불구하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의 짙은 안개로 길을 잃었다. 아무 곳도 보이지 않아서 한동안 오도 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안개가 걷히자 길을 살펴보니 낭떠러지 가까이 서 있었다. 별다른 사고를 당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계절은 세월 따라 변하고 바뀐다. 예년처럼 올해도 한 걸음씩 봄이 다가온다. 우한폐렴의 공포로 일상생활이 무너진 탓에 봄소식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오는 봄을 만끽할 수 있도록 두려움을 털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봄날을 맞이하고 싶다. (2020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