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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길 따라 한양으로 가는 길에
태조 이성계로부터 대한제국에 이르는 518년 동안 공식적으로 27명의 임금이 배출된 조선왕조 500년
주상 전하의 공식적인 후계자는 모두 31명이었고 처음에는 모두 세자 저하로 불렀고, 27명의 주상전하 중에서
6대 단종, 8대 예종. 24대 헌종, 25대 철종은 세자가 없었다.
네 분 제하고, 임금 23명에게서 세자 31명이 배출했지만, 정치적이던 건강상 이유이던 13명은 왕이 되지 못한 채 죽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세자가 되었다 해도 늘 좌불안석(坐不安席) 바늘방석이었던 시절
초대 세자이면서 최초의 폐세자인 이방석을 필두로
양녕대군, 사도세자, 소헌세자, 효명세자
양녕대군은 세자 싫다고 옷을 벗어던졌고
사도세자는 폐위되어 뒤주 속에서 처참한 생을 마감했고
소헌세자는 독살로 추정되고
효명세자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 영조의 아들 효창세자, 사도세자의 아들 의손세손,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 역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구중궁궐속 암투나 권력에 대해서 죽이건 살건 내가 관여할바 아니기에 왕족이 알아서 할 문제고...
*도성에 도착해서 세자마마와 호위무사와 함께 주상전하는 뭔가를 보고 계시는군요
고려시대 마음씨 좋은 양반 동네에 땅 한뙤기만 있어도 그럭저럭 먹고살만했을 텐데라고 생각도 해보지만
권문세도가들이 너무나 많은 땅을 가져 일반인들은 바늘하나 꽂을 땅이 없었고
조선시대 때는 양반이 아니면 죽음을... 하늘이 머리 위에 있지만 천날만날 허리 굽혀 일만 하느라 하늘이 어찌 생겼는지 모르게 살았을 것 같다.
제가 조선시대때 머슴이었다면 이 시간에 짚으로 새끼 꼬고 있거나, 물레방앗간에 가 있거나 둘 중에 하나였을 것...
13번 국도에 자리하는 5,18 민중 항쟁 사적지
영암 신북 버스 정류소
지음님이 가지고 오신 곰탕 먹은지 얼마 안 되는것 같은데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면 왜 이리 배가 고픈지...
이곳 인근에서 점심 겸해서 자장면집을 찾아간다.
신북면 어느 중국집에서
인근 마을 이장님들의 모임이신데 서울까지 간다고 하니
행여라도 저녁에 잠잘 곳 없으면 각 마을 이장을 찾아서 마을 회관을 사용하자고 하면 대부분 허락을 해주니 그렇게 하라고
귀띔을 해주신다.
끝에 스마일 하고 웃는 포스터 아래 마을 이장님께서 "소아암 돕기 후원을 해도 되냐"시며 10만원을 건네주신다.
고마운 이장님께 배꼽 인사드리고
소아암 돕기 후원금 10만원 받아 들고
"월출산 천왕봉에 달이 뜨면 "의 영암군을 지나며
오라는 이도 반겨주는 이도 없지만, 삭힌 홍어향 가득할 것 같은 나주땅으로
인근으로는 온통 드넓은 영암이나 나주의 벌판이며 가끔 작은 산들이 스치듯 지난다.
나주시 왕곡면 신원저수지에서 하루가 끝나간다
고독한 싸움
이 길에서 나를 이길 수 있을까
거리에 대한 부담감 없이 즐긴다지만 그래도 머릿속은 온통 거리에 대한 부담감이나 꼬마 미더덕 형제들 생각뿐
발끝으로 와닿는 감촉은 지옥의 문턱에 서있는 착각마저 들 것 같다.
천리길 알고는 두 번 다시 오지 못 할길
알고는 두 번 다시 못 가는 길
나주시에 들어서니 삭힌 홍어 향기가 가득하고
밥상에 올라오는 음식들 중에서 시간이 지나면 상하는 음식이 있는가 하면 발효되어 맛있는 음식이 되는 것들도 있죠
그중에 대표적인 홍어와 김치죠
이삼 년 묵은 김치와 돼지고기의 만남이나, 삭힌 홍어와 김치.... 이런 생각하면 벌써 코끝이 짜릿해져 온다
우리나라 10대 평야인 나주평야가 자리하는 영산강 (김제(호남), 예당, 안성, 논산, 나주, 여주, 김포, 상주, 김해, 철원평야)
5 대강 큰 강 이면서 바다로 직접 흘러드는 낙동강 525km. 한강 494km. 금강 397km, 섬진강 223km. 영산강 155km이 있으며
호남정맥 용추봉과 새 자봉 그사이 주전자 봉에서 발원한다. 하지만 최장 발원지는 황룡강이며
황룡(黃龍)
용(龍)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동물이나 사람들은 끊임없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여러 가지 모습의 용을 만들었고,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능력을 부여했으며 또 그렇게 믿게 만들어 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해 용왕은 싫든 좋든, 잘나고 못나고 음력 5월 중순에 아홉 마리의 용을 낳는다고 한다.
태어난 용은 각자의 장점을 살려 비를 내리고, 물을 좋아하고, 불을 좋아하고, 싸우기를 좋아하고, 울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승천하지 못한 용이 있는 반면 절대군주를 상징하는 황룡이 있다.
서해 용왕이 목포를 거처 영산강이 흐르는 나주시에서 방향을 북으로 헤엄쳐 오르니 그곳이 바로 황룡강이며
발원지는 입암산 갓바위봉이며 장성땅을 오롯이 지나 광주시 송대동에서 영산강에 합류하는 60km의 이름 있는 강이다.
나주역 인근
음력 7월 7석 밤하늘의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은하수 다리가 이렇게 생겼을까?
멋진 다리 위에 견우와 직녀가 보이고
홍어 나라 나주는 진산인 금성산 아래 자리를 잡았고 앞으로는 영산강이 흘러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역이다
나주시청 방향
이곳에서 향교로 가느냐 아니면 금성관이나 나주 읍성이 있던 동문지로 가느냐...
그동안 지나며 향교 구경은 배 터지게 했으니 나주 금성관과 읍성을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나주는 홍어와 배 그리고 나주평야가 유명하죠
그리고 함께 유배를 왔으나 이곳 나주에서 한분은 목포를 지나 흑산도
한분은 영암을 지나 강진으로 유배를 가셨던 정약용 형제가 있었고
또 고려 현종 때 거란군을 피해 개성에서 천안, 공주, 논산, 익산, 정읍 그리고 노령을 넘어 나주까지 몽진 오신 현종
현종을 반겨주는 이는 없고 온통 죽일 듯 달려드는 지방 호족들 때문에 몸고생 마음고생 이마저만 아니셨죠
그의 곁에는 보디가드 지채문 장군이 있어 안전하게 피할 수 있었는데...
고려 거란 전쟁을 짧게 살펴보면
거란 전쟁 1차는 서희의 외교력 때문에 서북지역에 강동육주를 설치하였고
2차 전쟁은 양규라는 걸출한 장군이 있었고 (고려 거란 전쟁 참고)
3차는 우리나라 3대 대첩 중 하나인 귀주대첩이 있어 향후 100년 동안 거란이 고려에 들어오지 못했다.
귀주대첩이 한산대첩이나 살수 대첩에 조금 가려있기는 하지만
이순신의 한산대첩은 이후에도 전쟁이 계속되었고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은 비록 수나라는 무너졌지만 당나라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다르다 단 한방으로 더 이상 거란이 고려에 까불지 못하게 했으니
단한방의 카리스마를 보여 주신 강감찬 장군이시다
조선초기 나주 목사가 건립한 관청인 금성관 망화루
고려 때 나주로 몽진온 현종을 욕하는 이는 별로 없다,
이유는 거란과의 결사 항전을 위한 몽진이었고 후사가 없어 어떻게든 살아서 왕조를 이어가야 했지만
조선시대 도망의 귀재라 불린 선조는 광해라는 후사가 있었음에도, 신립이 한강 방어선인 탄금대에서 전투에 패하자
살기 바빠서 압록강 건너기 전 의주까지 몽진길에 올랐던 인물이다.
신라시대나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대 일반인들이 하루 평균 30km 조금 더 걸었는데
선조는 가마 타고 하루에 40km 정도로 도망갔던 분이니 가마꾼들은 그야말로 녹초가 되었을 것 같다.
그리고 치욕적인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이마가 깨지도록 삼고구고두례를 했던 무능한 인조
조선 말기 고종까지... 전쟁이 나면 어디로든 도망갈 수 없는 나라구조인지
요즘 고려 거란전쟁을 꼭 보는데 2차 거란전쟁의 영웅이셨던 양규가 온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를 하면서 더 이상
보지 않은 역사극이다.
금성관 비석군들
이들 중에 금성 토평비는 동학 농민 운동 때 나성의 수성군들이 동학군과 싸워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고
저짝에 멀리 맞배지붕아래 금성관 편액의 글씨는 조선 후기의 명필가 원교 이광사가 썼다고 하는데... 꼭 확실한 건 아니다.
그렇다고 가정하에 보러 왔으나 야간이라 금성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까치발로 서서...
나주 읍성 동정문
축조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성종 때 나주목으로 승격한 것으로 보아
인근의 전주와 함께 주요 지방도시였던것으로 생각해 보면 고려시대 이전 혹은 고려시대 때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동정문
삼남길에 있어 나주에 들러 향교를 찾을 것인가 금성관이나 읍성의 동정문을 찾아 길을 열어갈 것인가 궁리를 했지만
향교는 공자를 찾는 유생들이나 들락날락 했을 것 같아 민초들이 들고 나던 길을 찾아본다.
조선시대의 대부분 읍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에 만들었으며 성 배후에는 금성산과 금성산성을 두고 있다
웅장한 자태의 읍성은 차가운 날씨와 함께 외롭게 서 있으며, 훗날 나주에 다시 온다면 꼭 다시 찾아 주위를 살펴보고 싶어지는 곳이다.
노안면에서 자고 새벽길에
나주 금성관과 읍성을 돌아보고 노안면으로 들어와
아침에 영암에서 곰탕을 사들고 오셨던 친구 지음님이 60km 지점인 노안면 인근 진행 방향에 주막을 예약해 주셨다 해서
두 분은 방에 들어가 발바닥 물집 치료하느라 정신이 없으셨고
잠시 눈 붙이고 밖으로 나오니 달은 어제 보다 작아졌다
다리벽에 삼남길이란 빛바랜 안내판이 한 장 붙어있고
내동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길을 찾아가며
동네를 지날 때 소리 없이 간다고 해도
똥강아지의 귀는 피할 수 없으니
노안면 유곡리 현애마을
마을은 온통 소 축사와 돼지 농장이라 역겨운 돼지똥 냄새로 숨 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대단한데
돈사 때문인지 빈집도 많고 귀신 나올 것 같지만 돼지 똥 냄새 때문에 귀신도 이런 곳은 피할 곳이다.
이런 곳은 얼른 지나야 만수무강 건강에 좋으니, 현애마을에서 차한데 겨우 지나갈 정도의 시멘트길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나주땅은 끝나고 빛고을 광주시 땅으로 들어선다.
서광산 톨게이트가 자리하는 연산 육교를 지나 광주시 광산동의 평동 저수지를 찾아간다
이곳에도 삼남길 이정표가 보이고
평동 저수지를 돌아가며
무릎은 아프고...
송산 유원지 방향
광주시 지평동 율재를 지나
민규 님은 졸음에 겨워 힘들어하시고
타키님은 아직 그런대로 걷고 계시고
저는 두 분을 보며 오늘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 좋다고 계속 갈 수도 없고
모든 결정은 두 분이 스스로 하시도록 마음 편하게 해 드린다.
지평동에서
어디 가서 따뜻한 것 한잔 했으면 좋으련만
장성군 삼계면 구황산 동쪽 계곡에서 발원해 흘러온 평림천을 건너면 황룡강으로 가는 송산 유원지가 나오고
송산 유원지로는 볼일이 없어 광산구 임곡동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길고 지루하던 밤은 어둠과 함께 물러가고
알고는 못 올 길 그 길은 천리길이라
무거운 배낭에 하루에 60km는 만만하게 볼거리가 절대 아니다.
본량동을 지나
임곡교를 건너
잠이 모자랐던 민규님이 많이 처지는 모습에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민규님 "몸은 어때하며" 물어보니
여기서 그만두려고 하신다.
"그래" 다음에 천리길 할 때 좀 더 가볍게 해서 오라"라고 말씀드리고
애써 잡았던 마음의 끈을 놓아 드린다.
서로가 돌아가는 길에 뒷모습은 보는 게 아니라며 애써 고개를 돌려 민규님을 보내드리고
광주 임곡동에서 민규님은 집으로
임곡동은 조선시대 선비의 표상이셨던 조광조 선생이 한양에서 정읍의 노령을 넘어 이곳에서 광주를 지나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로 가셨다.
조광조 선생은 (1482-1519년 ) 조선 중기 학자로서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들의 공을 삭제하는 위훈삭제 등 개혁을
단행하다가 중종 14년에 훈구파의 모함을 받는 기묘사화로 능주면 남정리에 유배되었다가 1개월 만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12월 20일) 당한다.
한양에서 전라도 땅으로 유배를 왔으나 반기는 사람은 없고, 이제나 저제나 해배가 될까 하여 밤, 낮으로 방문을 열어두고 지냈다고 한다.
선생은 "선비는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치지 않고, 얼어 죽을지언정 겻불은 쬐지 않는다"는 선비의 표상이시니...
성종 때 학자인 김굉필이 무오사화 때 붕당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평안도 회천에 유배 생활을 할 때 조광조 나이 14세 때 김굉필의
가르침을 받은 인물이다
이제 장성땅으로
비 올듯한 날씨 이제 타키님과 둘이서 걷게 되는데 광주땅을 뒤로하고 황룡강을 곁에 두고 장성땅으로 들어와
민규님이 집으로 가니 동료가 없어 그랬나 급격히 무너지는 타키님
북일면을 지나며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타키님은 뒤에 많이 쳐져있어 기다렸다가 걸어가길 반복하며
백양사역에 가야 오늘 일정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 타키님께 양해를 구하고 먼저 진행해서 주막집이 있는지 알아볼겸 진행한다.
타키님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오세요
백양사역을 2km 남겨 두고 길가에 승용차가 한대 서더니 가는 데까지 데려다주시겠다고 하신다.
운전자분께서 가다가 서글퍼 보였던지 차를 세우신모양이다. 정중하게 사양하고
백양사 역으로 진행
백양사역에서 만나는 안내판 (오늘은 53km)
타키님이 이곳에서 그만두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오늘 하루동안 민규님과 타키님 두 분이 그만두시겠다고 하니 저의 리딩에 문제가 있었나 싶어 잠시 며칠간 일정을 돌아본다.
천천히라도 같이 올걸 그랬나 이 생각이...
이제 혼자 가야 하나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느 식당에 들러 밥 먹고 나와 타키님께 숙소를 잡아주고 새벽에 일어나 걸어갈 수 있으면 나오라 전하고
그대로 꼬구라진다.
새벽 2시 무렵 타키님께 연락을 하니 일어나 준비 중이시다.
그만두고 집에 갈 때 가더라도 오늘 점심때까지 걸어 주시겠단다.
고마운 분... 백양사역에서 두 팔 벌린 안내판 따라가다 보면 조금 당황스런곳이 나타나는데
비는 간간이 내리고
갈재 정상 방향
길은 철조망으로 막혀있고 그 안에 안내판이 서있다.
이 정도였으면 이곳에 진입하기 전에 새로운 안내판을 만들어 오지 못하게 했으면 좋으련만
화살표는 저짜로 가라고 쓰여있으니
이정표에 붙어있던 저짝이 이짝이니
예전에는 이길로 지나다녔지만 철조망이 가로막으니 바로 옆 잡풀을 뚫는 수밖에
대략 200m 후답자분들께서는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름에 오면 고생 좀 할듯하다.
철조망으로 인해 찾는 사람들도 없는지 잡풀이 무성하고
잡풀 지역을 지나면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마을로 가는 임도길이 나타난다.
타키님은 비록 그만두셨지만 오늘 오전까지 가는 데까지 같이 걸어 주시겠다며
찐한 의리를 보여주신다.
어느 누구의 글인지 길가 바위에 음각되어 있는 비석
글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훼손이 심하다.
어지간하면 읽어 보겠구만....
노령(갈재)으로 올라가는 초입의 사각정자 길은 노령으로 이어지고 길은 아주 좋다.
갈재를 지나면 정읍시의 임압땅인데
갈재길이 문경새재처럼 호남인들이 다니던 옛길이라 21년도에 국가 명승지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샘터가 있다고 했으나 지난가을에 떨어진 낙엽으로 인해 물은 없고
노령 아래 쌓아놓은 돌은 노령을 정과 망치로 뚫으며 남은 돌을 여기에 버린 모양이다.
노령(蘆嶺) 고개
갈대가 많아서 갈재라 불렀고 노령이라 부르는 곳
어디에도 물가에서 자라는 갈대가 있을 곳이 못되는데, 지난 가을날 이곳을 찾았지만 갈대는 구경도 못해 늘 의문점이 있던 곳
단단하고 거친 바위를 뚫어 길을 낸 노령고개이지만 소 달구지가 지나기에는 조금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가 고등학교 때 배운 태백산맥이니 소백산맥이니 그리고 차령과 노령산맥이라 부를 때 그 노령이 이곳이다.
1903년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가 만든 지리학 논문에 담긴 내용이 산맥 명칭이죠
많지 않은 산꾼들이야 산줄기 개념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방송에서는 대부분 산맥이라 용어를 쓰는데 언제쯤 바뀔지...
참고로
백두대간(幹)이라 함은 줄기를 뜻하고, 산경표(山經表)는 산줄기를 표시한 것이고
산경도는 산줄기로 강의 유역으로 구분하여 생활과 수계의 밀접한 관계 즉, 하천 유역과 생활 밀착형이라 보면 되고
산맥도라 함은 지반과 지질구조 땅밑의 구조 산지구분 개념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이고개를 넘으면 남도의 비릿한 바다 향기를 더 이상 맡을 수 없으며
대신에 김제평야의 소똥향기가 대신한다.
장성현감 홍병휘의 불망비
"그대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노라"쓰여 있는 걸 봐서 홍병휘 현감께서 대단한 인물이셨던 걸로 보인다.
조선시대 때 이곳은 산적들의 소굴이라 많은 인명이 죽거나 다쳤고, 유배객들이 이곳에 서서
언제 다시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갈까 눈물 꽤나 흘렸을 곳이다.
정자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다 차가운 기운에 벌떡 일어나
갈재를 넘으면 전북 정읍이니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앞에 소복 입은 여자가 산발한 머리부터 들이밀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곳에서 걷는 시간이며
갈재를 오르고 내리는 길은 소 달구지 한대 지나갈 정도로 길이 좋으나 정상은 조금 애매하다.
영남대로에 나는 새도 쉬어간다는 문경 새새가 있다면 이곳은 갈재가 있다.
비는 잠시 그쳤고 노령을 넘어오니 호남선1914년에개통된 옛 철길이 보이는데 컴컴한 입구는 막혀있고
아름다운 탐방로라는 입간판만 서있다
비 오는 날 이런 시간에 노령에서부터 전설의 고향 한편 찍는 기분이 드는 건 뭘까
뒤돌아 보니 타키님이 소복입은 귀신처럼 보인다.
군령마을의 노거수와 군령마을
노령 아래 군령마을이며 수백 년 된 당산나무가 마을 입구에 서있고
군령마을은 산적들이 너무 들끓어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군대를 주둔했던 곳이다.
자세한 내용은 읽어 보시고
입암저수지 방향으로 가면 좋겠지만 거대한 만리장성 같은 장벽인 기차선로가 있어 저수지 구경도 못하고 지난다.
방향을 천원역으로 옮겨가며
새벽비를 맞으며 정읍시 입암면 하평리 마을을 지나
입암 사거리에서
이곳에서 타키님은 밥 사주러 오시는 깽이님을 만나러 정읍역으로 가시고
이제 한양까지 혼자이던가
오늘 하루는 참 서글픈 하루가 될 것 같다
호남선인 천원역 자리인데 지금은 폐역으로 뒤로 돌아가봐도 아무것도 없고
까막눈이라...
손화중 장군 생가터
동학 농민운동 지도자 손하중 장군이 태어난 곳
지금은 스레트 지붕만 대신한다.
정읍시로 넘어가는 초산고개에서
우리나라 10대 강인 동진강(50km) 최장 발원지가 있는 정읍천이다
서해바다에 산다는 용왕이 금강과 만경강 그리고 동진강이 흐르는 평야를 한데 묶어 드넓은 들판을 만들어 놓다고 하는
동진강은 상류의 발원지를 두 곳으로 볼 수 있다. 첫째 동진강 본류인 호남정맥길에서 분기되는 만경강 남쪽지맥(모악지맥)에
자리하는 전북 정읍시 산외면 상두리의 국사봉 남쪽지역을 동진강 본류 발원지(47km)로 보며,
두 번째 또 하나인 정읍시 내장동 내장산 국립공원의 까치봉을 최장 발원지(50km)로 본다.
정읍하면 동진강이요! 동진강 하면 동학 농민운동이 떠 오를 정도로 대단한 동진강
동진강 유역은 금강(논경평야)- 만경강과 함께 김제(호남) 평야를 이루며 무엇보다 고종 31년(1894년) 동학혁명이 된
주 무대 이기도 하다
정읍의 동학혁명은 고부군수(정읍시 고부군은 두승산 아래 자리하는 군이름) 조갑병이 만석보를 쌓고 수세를 너무 많이
거둬들이면서 촉발된 농민혁명이다.
들이 넓고 곡식이 많이 난다고 해서 모두가 배 부른 건 아니다. 김제와 만경평야에서 나는 쌀은 김제나 정읍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나라의 것이었다. 가을철 쌀수확이 모두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세금 공출로 탐관오리만 배가 불렀으며 이에 농민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1894년 고종 31년에 전봉준을 필두로 봉기한 갑오 농민 운동, 만석보를 허물고 들불처럼 일어나 농민 혁명이다
동진강에서 꼭 찾아봐야 할 곳은 만석보 비석과 백산면의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라는 곳이니, 동진강을 이야기할 때 동학이란 말이 떠오른다.
동학도 동학이지만 지금은 배가 고프니 어디 가서 밥은 먹어야겠고
강을 건너 향교로 찾아가는 길에 깽이님과 타키님을 만나서 장모님 뼈다귀 해장국집인가 살벌한 이름의 국밥집에 들어가서
장모님 뼈다귀를 먹고 나온다.
정읍 성황산 아래 자리 잡은 정읍향교과 붉은 홍살문
향교는 고려나 조선시대 때부터 공자나 유학자분들을 모신곳이기에 제사를 지내며 인근의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하기 위해
설립되었고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를 지급받아 머슴일을 시켰으나 갑오경장 때 개혁으로 근대 교육이 보급되면서 교육적 기능은 폐지되었다.
조선시대 흥선대원군 시절 서원 1천개중 47개만 남기고 모두 폐지되었듯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양반들의 일탈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과 500년 정도의 은행나무가 서있고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 향교에 공자를 모시는 사당을 두고 유학을 장려했는데
대성전에는 공자를 가운데 두고 동, 서쪽에 맹자와 네 성인 주자와 송나라 때 유학자 네 분을 모셨고
신라시대 설총을 비롯 우리나라 유학자 열여덟 분을 함께 모셨다
참고로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며
향교와 유교
학문인가 종교인가 구분이 안되며 꼬장 꼬장한 양반 할배들은 중앙의 임금님보다 뒤에 앉아서 더 큰소리쳤던 시절
후학을 키우거나 양성하면서 공자를 받든 시절
뒤에서 너무 큰소리를 치시니 임금님께서 앞에서 큰소리쳐보라며 한자라 줄라치면 곧 죽어도 뒷방에서 공자만 받드신 선비들
요즘 같은 21세기에 수백 년 전의 인물을 윤리적 맹목적 교육의 대상으로 하기에 다소 거리가 좀 멀어 보인다.
사람들에게 공감을 갖기에도 거리가 멀어진 듯하고 요즘 들어 조상님께 제사도 잘 안 지내고, 친인척과의 거리는 물론이고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도 자주 안 찾는 세대에 전통과 예절을 명목으로 포장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낡아버린 유교
공이 많이 들어간 자식은 잘 안 풀리고
공이 안 들어간 자식은 잘 풀리는다는데
조선시대 47만 자라는 유교경전을 모두 익혀야 했던 시절 공부이외 하는 일은 모두 실패로 보았던 시절,
그 교육이 지금 유교의 폐해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유교 경전 47만자는 효경, 논어, 맹자, 주역, 서전, 시경, 예기, 주례, 춘추좌전이 있는데 이중에 춘추 좌전은 중국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하나라, 은나라 시절이 지나고 춘추 전국시대를 뜻하는데 춘추좌전의 글자수는 19만 6천 자가 넘어 가장 많고,
효경은 1천9백 자 정도 되니 가장 적다.
매일 읽고 외워도 수년이 걸리는 방대한 량이니 간추려서 본다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다섯 글 자 정도일 것 같고
팔만대장경의 5천2백만 자 글자를 압축하면 마음(心)이란 글자만 남는다고 하니, 유교는 인의예지신만 알면 될 것 같다
다음길인 태인면으로 넘어야 하는 말고개
향교를 지나면 지척에 두고 있는 고개다
이제부터는 서울로 향하는 1번 국도 따라가면 되는데 예전의 왕복 2차선 국도길로 가야
비는 오락 가락 하고
북면사무소도 지나고
태인에서 기다린다던 깽이님과 타키님이 찾아와 주셨고
하늘이 곧 무너져 내릴 기세다.
국가하천 동진강
국가하천이란? 국가 보존이나 경제상 중요한 하천으로써
1, 유역면적 200㎢ 이상의 하천
2, 다목적 댐의 하류 및 댐이나 저수지의 배수로 인해 영향을 미치는 하천
3, 인구 20만 이상의 도시를 관류하거나 범람구역 안의 인구가 1만 이상을 지나는 하천
4, 상수원 보호구역, 국립공원,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 문화재 보호구역 생태 습지구역을 지나는 하천
5, 그 외 범람으로 피해가 일어나는 하천이다.
만석보나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라는 백산까지 모두가 동학농민 운동과 관련이 있어 한번 찾아보면 의미가 큰 강이다.
태인면사무소
이곳에서 하염없이 기다리시던 깽이님과 타키님은 집으로 돌아가시고
피향정
고운 최치원 선생이 세운 건물로써 "연꽃향기가 퍼져 나간다는 뜻인가?
한때는 커다란 연못이 곁에 있었을텐데 "어찌하여 연못은 없고"... 허허벌판만 보인다
동학농민 운동이 있기까지 꼭 알아야 할 주요 인물인 조병갑이 이곳 태인에 첫 발령을 받은 곳이고
이후에 이곳에서 동진강 건너 고부군수로 가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 군수로서 마른오징어도 쥐어짜면 물이 나온다는 철칙을 가진 인물이다.
피향정 안에 모셔진 영세 불망비도 보이고
옛 1번 국도 고개 넘으면 정읍시 감곡면 서남권 추모공원이다.
이제 정읍을 벗어나는가!
이제는 김제시 금산면으로 들어와
김제땅은 땅이 넓은 만큼 축사가 많아 가축 분뇨 공장만 40개 정도이며, 처리 과정에서 나오는 냄새는 말도 못 할 지경이다.
돼지는 사람의 10배, 소는 50-60배를 싼다고 하니 그 많은 배설물을 처리하려면 처리 공장도 많아야 하고
주위로 강이나 하천이 맑지 못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우리 사람에게는 약 500만개의 땀구멍이 있고 우리 국토에는 국가하천 63개(최근에 하나 늘어남) 지방하천 3772개
대부분 물은 오염되어 가고 있다 보니 앞으로 어찌 될지 어느 누구도 장담 못한다.
산 좋고 물 좋은 경북의 오지인 영양이나 청송으로 갈 수밖에 없는 시절이 곧 찾아올 것 같다.
참고로
닭은 매달 1억 2천 마리가 도살되며 평균 수명은 겨우 한 달 정도이다.
돼지는 하루 5만 마리가 도살 평균 수명은 5-6개월
전국에 2천8백 돈사에서 키우는 돼지는1,132만 마리정도이고
소는 2024년도 기준으로 년간 백만마리 도축되니 하루에 2천700마리가 도살되며 평균 수명은 2년 전국에 9막 가구에서 약 350만 마리가 길러지며 한국 농촌경제를 지키는 축이다
위의 가축은 전국 71개 도살장에서 희생되어 우리들 밥상에 올라오는데
얼마 전 개 식용 금지법이 국회를 통과하였는데 개는 얼마나 죽기에 식용으로 금지했을까
개는 년간 52만 마리가 식용으로 판매가 되는데 하루에 1천4백 마리 정도가 식용으로 만들어졌다.
김제시 금산면 원평에 들어와
노거수 아래에 한때는 주막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주막은 조선말까지 전국에 12만 개였으니 저곳에도 분명 그러했을 것 같고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비
한일 합방에 항거하며 자유와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1919년 3,1일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독립운동 선언서가 김제에 전달되어 배세동, 전도명, 전도근 등 3월 20일 원평장날을 기해 거사하기로 결의
오후에 시장의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독립만세를 이치자 수백 명의 군중이 호응하며 독립만세를 벌였다
원평천을 건너
동진강으로 흐르는 원평천 최장 발원지는 모악산 정상 넘어 김제시 금구면 오봉리 상복산과 매봉산 중간으로 흐르는
두월천이며 두월천은 대율 저수지에서 잠시 쉬었다가 김제시 월봉동에서 원평천과 합류하는데 약 3km가량 더 길다.
원평천 따라 내려가다 보면 벽골재 중수비가 나오는데
중수비
중수비는 태종 15년 당시 수군도 만호였던 김제 사람 박 초가 썼으며 비문은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진다.
내용은 김제 군명의 연원, 고적에 기록된 벽골제의 규모와 유역
태종의 치수 의지, 각급 공사 주체와 인력 규모, 공사의 난 이점, 제방의 제원과 세부 안공 시기가 정리되어 있으며
중수비는 원래 신털미산 정상에 있었으나 1980년에 유적을 정비하면서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글씨는 마모가 심해 남아있지 않다
벽골제(碧骨堤) 한자로 풀이하면 푸른 뼈로 만든 둑이란 뜻
못둑을 축조할 때 말의 뼈를 묻으면 자연재해가 있어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어느 도사의 말씀에 따라
많은 말을 죽여 그 뼈를 제방 안에 넣었는데 말뼈의 인에서 나온 푸른빛으로 제방이 푸르게 보인다고 하여
뒷날 벽골제라 불렀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그리고 벼가 많이 나는 골이라 하여 벼 골이라 불렀는데 한자로 옮기면서 벽골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벽골제가 완성되면서 호남(浩南)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호남평야가 자리하는 곳으로 만경강과 동진강이 서해 바다 새만금으로 흐르고
만경강의 지류인 전주천과, 원평천과 고부천이 동진강에 합류하며 그 세력을 함께 한다.
동진강과 만경강을 담은 새만금은 전체 길이 33,9km
1991년 11월에 착공되어 2010년 4월 17일 완공된 2조 9천억이 투입된 국내 최대의 토목 공사다
연간 237만 명의 인력과 91만 대의 건설 장비가 동원
경부고속도로(418km) 4차선을 13m 높이로 쌓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토사가 바다로 투입되었다.
공사 당시 평균 수심 34m 초당 유속 7m
새만금 평균 넓이 290m 높이 36m 세계 최장에 달하는 새만금은 2010년도 세계 기네스북에 올라 있으며
우측의 새만금 담수호 개발지구는 여의도 면적의 140배(축구장 37만 개)의 간척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나
23년도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를 하면서 나라 망신을 다 시킨 곳으로 기억된다.
1번 국도 4차선 옆으로 난 옛 도로 따라 이동하며
5시 50분 혜봉사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저녁 예불시간이라 범종 소리가 너무 처량하게 들리고
해는 넘어가고 배는 또 고프고
집 생각도 나고
나도 집으로 가고 싶지만 주상전하와 독대를 해야 하기에 부득이 올라가야...
금구향교 고려 후기의 향교로 붉은 홍살문이 있고 그 안으로 영세 불망비가 도열해 있다.
금구향교와 영세 불망비들
만화루 공자의 만물화생에서 따온 말씀이며 "도(道)로써 만물이 교화된다"는 뜻?
날아갈듯한 팔작 기와지붕아래 편액 글씨는 정조 때 태인현감으로 부임한 조항진의 글씨인데
글자란 내가 알아보면 별로인 글이고 초등학생이 그린 듯 쓴 글은 명필이고 그런 것 같다
삼한시대부터 자리했다는 금구면의 내력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한 해를 정리해야 할 시간인데
올해도 이렇게 마지막날 길바닥 생활을 하고 있으니
전주시 쑥고개 인근에서
1번 국도 4차선 옆 마을버스 승강장에서 노숙하려니 차 다니는 소리에 초저녁에는 비몽사몽으로 국내 여행하는 꿈을 꾸다가
언제 잠들었는지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짐을 챙겨 길을 나선다.
새해 첫날부터 길바닥에서 노숙하고, 올 한 해도 무탈하고 건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2024년 1월 1일 새벽 3시 30분 밝은 별빛을 벗 삼아 올해 첫걸음을 이곳에서 시작하며
풍남문
조선시대 전라 감영의 소재지로써 전주성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출입문이 있었으나 모두 소실되고
지금은 남쪽의 풍남문(豊南門) 하나만 남은 출입문이다
전주에 오면 꼭 봐야 할 전주향교, 이목대, 경기전, 풍남문이다
전주시 덕진구로 발길을 옮기며 전주의 콩나물 국밥으로 해장하는데
콩나물에 북어를 넣어서 그런지 비린네가 나서 국물만 조금 떠먹고 일어선다.
만경강이 흐르는 삼례교를 건너며
삼례에 가면 좀 쉴 수 있겠다 싶었지만 이른 시간이라...
만경강은 전라북도 북부에 있으면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 분기봉에서 옛 백제 최후의 방어선인 금남정맥 길 따라
소태정 휴게소에서 오름길 한번 오르면 700 고지까지 약 4km 정도 진행하다가 정맥길을 버리고 서남쪽 밤재로 내려서야
한다.
만경강 줄기 따라 우리나라 10대 평야 중 가장 큰 김제(호남) 평야가 자리하니 만경강은 짧지만 그위상은 실로 대단하다 할 수 있는 강이다.
참고로 우리나라 10대 평야로는 김제(호남) 평야. 예당, 안성, 논산, 나주, 여주, 김포, 상주. 김해. 철원 평야가 있으며
그중에서 김제평야(호남)는 전체 넓이의 30%을 차이하며 가로 50km 세로 80km 전체넓이는 약 3,500㎢이다
완주군 동상면 소양면 산 164번지가 만경강 발원지의 주소이며, 완주군 밤재에서 시작하여 완주-전주-김제- 익산-군산
-새만금 사업으로 가로막은 서해 바다까지 대략 80km 정도 흘러간다.
만경강을 이루는 산줄기들
만경강 북쪽은 영조 때 만들어진 산경표(山經表)에는 금남정맥길이 전북 진안의 조약봉을 거처 운장산-대둔산- 계룡산을
지나 금강의 하구가 아닌 내륙의 충남 부여 부소산으로 향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농업기반이 되는 10대 강의 금강 감싸 안을 것을 포기하고 호남의 금강과 조선시대 풍수터인 계룡과 옛 백제의 수도
였던 부여의 부소산으로 이어가게 만들었다고 보인다.
이후 조선 철종 때 만들어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금남정맥길의 금만봉(싸리봉)에서 옛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로 가지 않고
익산으로 향하는 남당산-미륵산-봉화산-금성산-장계산 거처 군산의 금강하구로 산자분수령을 이어간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란? 산은 스스로 물을 나누는 분수령이란 뜻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를 말한다. 백두산에 사는 호랑이가 지리산까지 가는 동안 발에 물 한방
울 묻히지 않고 간다는 백두대간길
만경강 아래로는 호남정맥 묵방산에서 분기하는 만경강 남쪽 지맥길이 모악산을 거쳐 멀리 새만금 사업을 한 김제시
진봉면 심포항까지 이어진다.
*대한민국 최고의 호남평야는 동진강과 만경강이 있어 가능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무렵에 수탈의 목적으로 간척화가 된곳
신년 일출이 떠 오르는군요
꼭두새벽부터 나왔지만 일출이 이제 만천하를 밝히니
몇 가지 소원도 빌어보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
왕궁면 왕궁초등학교
전라북도에서 전주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익산땅에 들어와서
익산은 전라선, 장항선 호남선이 있어 교통의 중심이기도 하다
익산시의 옛 이름은 이리시였는데 익산군과 통합하면서 익산시로 불렀고
왕궁면은 예전에 왕궁이 있어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왕궁마을
길가에 자리 잡은 조형물
주인장 허락 없이 들어가지 못하고 사진도 찍지 말라는 살벌한 경고문이 있었지만
철조망도 없고 대문도 없어 도로가에서 한 장 담아본다.
왕궁저수지로 오르는 길에 본 임도길
지방에 사람이 없으니 임도길은 고라니 녀석들이 뛰어놀기 좋고
1920년대 왕궁저수지가 만들어진 때 이곳 의 부호였던 송 아무개란 분이 만든 함벽정(주위의 푸른빛이 감도는 맑은 물을 그려 암벽이란 이름을 사용)이다
멋지기는 한데... 이런 거 만들지 말고 독립자금이나 크게 보내 주시지
왕궁저수지
설날이라며 깽이 어머님이 만들어 주셔서 깽이님이 가지고 오신 설날 떡국
한상 받아 들고 보니 그 맛이 고향에 계신 어머님 솜씨와 비등하시다.
다 먹고 나니 뭔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깽이님! 먹다만 공깃밥이라도 한 그릇 더 가지고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들지만... 새해 첫날 생각지도 못했던 밥상을 받고 보니 서울까지는 굴러가도 갈 것 같다.
길이란 언제나 발끝에 먼저 와있고
길게 걸을 때는 눈보다 발이 즐거워야 만사가 걱정 없는데
대부분 눈으로만 보기에 발이 불편해지고 그 이후에는 급격하게 무너진다.
물집... 미더덕... 발바닥이던 발가락이던 하나, 둘 자리 잡고
그리고 형제가 되어 형제의 발란이 시작된다.
어지간해서는 미더덕 형제를 이길 수 없다.
금강의 남쪽 울타리 격인 마루금을 지나며
익산시 여산면 동헌
조선시대 여산 고을의 수령이 없무를 보던 관아로 전국적으로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은 건물이며
엣 모습을 간직한 조선시대 지방 관청 건물이다.
발길은 이제 충청도를 지척에 두고 있고
전북을 지나 이제 충청도 땅으로 들어와
오늘 저녁대까지 딸기나라 논산시 거의 끝부분을 지나야 하는데
어디서 잠을 잘꼬
휴대폰 배터리는 깽이님이 충전해 주시기로 했으니 길바닥 생활을 못 면할 것 같다.
다음 편은 마지막 동궁마마를 찾아갑니다.
첫댓글 아~ 이제 논산시로 진입하시는군요^^
근데요. 우리 충청도에서는 떡국에 밥 말아 먹고 그러진않는데...
떡국 넉넉히 가져갔는데 밥이 그리우셨었나 봅니다.
담에 또 지원하게 되면 밥은 필수로 챙기겠습니다.
방장님 가시는 길엔 역시 소아암돕기 지원~
방장님 내공 외공... 따를자 없네요.
걸음하시느라 고생하셨구요. 소아암돕기 앵벌이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려 거란 전쟁 이야기는 공부좀 해야할 듯 어렵기만 합니다.
다음 마지막 동궁마마 만나러 가는 길도 기대해 보며.
편안한 밤 되세욤.
배고파 보지 못하신 깽이님
떡국에 밥 말아 먹었으면...
무사히 한양가서 주상전하 독대하면 좀 잘하라카이소.... 올해도 무탈한 걸음 응원합니다
주상전하 만나러 갔더니 전화질하고 있더군요
아무말도 못꺼내고 왔습니다.
제가 없어서 분명 더 편하신 걸음이셨을테지요..
혹 달고 가셔서.. 더 피곤하진 않으셨는지..
내내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ㅋㅋㅋ
언젠가 조용히..
머리 풀어 헤치고..
하얀 소복 곱게 차려입고..
슬며시 따라 가 보겠습니다!!ㅋ
모두 집으로 가시고 난 다음 외로워 죽는줄 알았어요
다음에 또 오세요
삼남대로 천리 길 2부 요소 요소 역사에 대해 잘읽어보고 있습니다
함께 하신분들 추운날씨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무탈한 발걸음 이어가시길 기원합니다
많이 배울 수 있는길이라 많이 보고 배우고 왔습니다.
지맥길 안전한 발걸음 되시기 바랍니다.
방장님의 길은 끝이 없고 방장님의 식견 또한 무량한 듯합니다.
늘 그러하듯 후기를 통해 많이 배웁니다.
다만, 약간의 이견이 있어 몇 마디 보태오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1. '산자분수령'이 산경표의 원리라고 믿어왔지만, 이는 과도한 해석입니다.
조선 시대의 지리 인식을 한마디로 압축한 개념이 '산자분수령'이라면
이에 대해 논의하는 글이 당연히 고문헌 어딘가에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산자분수령'이라는 말은 산경표에조차 쓰여있지 않습니다.
아울러 제가 여암 신경준 선생께서 남기신 문집을 원문으로 읽어보아도 이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김정호 선생이 제작하신 대동여지전도의 표면에 적혀있을 따름입니다.
게다가 이 말이 지도의 제목도 아니고, 글(발문)의 주제도 아닙니다.
문맥 속에 들어있던 이 한 마디를 잘라낸(탈맥락화) 다음,
그 문장과는 상관 없이 이러저러한 상상을 덧붙여
조석필님께서 자의적인 해석을 달아놓은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의가 있으신 분은 한문 원전에 정확히 근거하여 저와 논의하십시다.)
그렇죠
대동여지도 표면에 겨우 한 줄 적혀 있지만
20세기에 들어 급격하게 생긴 등산객들에게 파급 효과는 엄청 크다고 볼 수 있죠
@배병만 대동여지도가 아니라,
대동여지도를 압축하여 한 장의 목판으로 만든 '대동여지전도'입니다.
이 '산자분수령'을 하나의 철학적 원리 내지 무슨 신념 같은 것으로 여기면서
신비화해 온 우리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일본의 지질학에 맞서 우리의 이론이 필요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만들어 놓으면
이건 맹목적인 애국심을 이용한 상술에 불과하게 될까 우려됩니다.
이론은 이론으로 차분히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2. 대동여지도에는 금남정맥이 군산을 향하도록 그려져 있다고 하셨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대동여지도에는 금남정맥이라는 개념 자체가 적혀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대간, 정간, 정맥이라 하는 개념들의 출처는 산경표이기 때문입니다.
대동여지도는 조선의 지리 인식을 도면에 구현한 결과물이지
무언가를 새롭게 정의하거나 어떤 이론을 주장하는 글이 아닙니다.
대동여지도가 실제에 맞게 산줄기를 그린 것이라고 할 때,
금강기맥이 그려져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를 두고 일부의 사람들이 금남정맥을 새롭게 설계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욕심이지
산경표의 내용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조선 철종 때 만들어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금남정맥길의 금만봉(싸리봉)에서 옛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로 가지 않고
익산으로 향하는 남당산-미륵산-봉화산-금성산-장계산 거처 군산의 금강하구로 산자분수령을 이어간다
글의 문맥을 조금 이해 하셔야겠습니다.
@배병만 제 이해가 짧은 모양입니다.
산자분수령은 김정호 선생이 쓰신 글에 나오는 한 마디이고요,
그것도 무슨 '원리'가 아니라 그냥 "산이 분수령으로부터"라는 뜻인데
여기에다 온갖 생각들을 쏟아부어서 하나의 원리로 만들어냈다는 말입니다.
물론 산경표에는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은 말이지요.
3. '산자분수령'은 지도의 원리도, 전통적인 지리 인식도, 산줄기 체계에 대한 철학적 근거도 아닙니다.
원문을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는데, 원문은 이렇습니다.
(앞부분 생략)
山自分水嶺 南北逶迤 爲燕脂峰小白山雪寒等嶺 鐵嶺一枝 東南走起 爲道峰三角 而漢水經其中
(해석: 산은 분수령으로부터 남북으로 구불구불 이어져 연지봉 소백산 설한 등의 재가 되고,
철령의 한 갈래가 동과 남으로 달려 일어나 도봉과 삼각이 되니 한수가 그 가운데를 지난다.)
(뒷부분 생략)
여기서 '분수령'은 고유명사입니다.
'분수령'은 대동여지도를 비롯하여 고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산 이름이고,
백두산정계비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흔히 생각하시는 것처럼 '산은 저절로 물을 나누는 고개(마루)가 되고'라고 쓴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그렇게 읽기에는 상당히 억지스럽습니다.
山自分水嶺 南北逶迤 爲燕脂峰小白山雪寒等嶺 鐵嶺一枝 東南走起 爲道峰三角 而漢水經其中
이글은 아마도 백두산을 국토의 조산(祖山)으로 표시하였고 한양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산 줄기를 표현한 모양입니다.
즉,백두산과 한양을 조선의 산천 체계의 중심이라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겠죠
@배병만 네, 그렇습니다. 역시 방장님의 생각이 옳으십니다.
한문 문법에서 '自'는 영어에 'from'의 뜻입니다. 즉, "산이 분수령으로부터 남북으로 구비구비..." 이렇게 문장이 이어나가는 겁니다. '비롯된다'로 읽어도 되고요.
만약, 흔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산은 스스로 물을 나누는 마루가 된다'는 말을 한문으로 쓴다면
이렇게 됩니다. "山者 所以分水 乃終 成爲經幹" 그러나 이렇게 바꾸어도 그 다음 말과 어울리지 못합니다. 결국 그 뜻이 올 자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分水니 合水니 하는 말은 흔히 쓰던 일반명사입니다. 分水嶺도 마찬가지이고요.
이것을 풀어서 무슨 문장인 것처럼 만들어 쓰려고 하니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수령이 곧 백두산이니 이 말은 즉 조선의 산은 모두 백두산에서 비롯된다는 뜻이고, 산이 물과 함께 양과 음의 관계를 이루면서 흘러 내려간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어야 김정호 선생이 쓰신 이 글 전체를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팔개 역시 친구님
한문 원문을 줄줄 읽으시니
그나저나 다음달 시산제때 꼭 오셔야 합니다.
아셨죠
음악이 차분한게 좋네요..
음악 들으며 정독하고 갑니다.
3부도 기대하겠습니다^^
음악이 조금 경망스럽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3부 는 쓰고 있는데 머리가 따르지 못하는군요
나주시청앞에 태조왕건 2째부인 비석이 있습니다
2015년도인가 나주에 찜질방 있는걸루 알고 갔는데 없어서 전화기박스에서 잠시 2시간 잔기억이..얼마나 춥던지
그때나주 금성산으로해서 홀로산행한 기억이...
2024년도 트렌드가 "함께하면 길이된다" 인데... 딱맞는 스타일인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자본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도 토나올것 같습니다.
다음주 미주님과 지리산에서 봐요
셋째날, 새벽에 걸었던 길이 현애마을이였군요.
정말로 참기힘든 냄새가 심했던 곳...😇 졸면서 걸으니 가장 힘든 구간이었습니다. 냄새,차가운 공기,졸음 삼종세트 ㅠㅠ ㅋㅋ🤯
대단합니다.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