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 적응기
용두로 이사와서 보니 전에 살던 사람들이 놔 두고 간 냉장고 하나 세탁기 두 대가 있었다. 모두 다 LG가 아니고 GoldStar도 아니고 금성이었다. 냉장고는 한 번 열었다 하면 악취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고 욕실에 있는 세탁기는 전원만 들어오고 움직일 줄 몰랐다. 집앞 수돗가에 있는 세탁기를 행여나 하고 돌려봤더니 탈수 단계에서 세탁기가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요동을 쳤다.
동묵이가 와서 함께 냉장고를 밖으로 들어내 왁스로 물청소를 했다. 하룻동안 냄새를 뺀 다음 전원을 넣어보았더니 이것도 세탁기와 다를 바가 없이 참을 수 없는 소음을 냈다. 냉장고라기보다는 무슨 오래된 공장의 기계와 같았다.
인터넷을 뒤져 보았더니 대형폐가전 수거무료서비스라는 게 있어서 욕실에 있는 세탁기와 냉장고는 가져가라고 입력했더니 이주 수요일날 가져간다고 했다. 대한민국이라는 난장판에서 이런 건 어쭈 아주 잘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동묵이만 고무장갑도 안 끼고 냉장고 청소하느라 헛심만 썼네. 막걸리 한 잔.
LG서비스에 연락을 해서 밖에 있는 세탁기의 탈수 고장을 고쳐달라고 했더니 나는 연수원에 출근해 있는데 기사 혼자 와서 고치고 갔다. 출장비 포함해서 고치는 비용 62,000원. 중고 사는 거보다는 훨씬 적게 들었다. 막걸리 크게 두 잔.
이제 문제는 냉장고이다. 고민 끝에 두규 형한테 전화를 했다. “형, 나 중고 냉장고 한 대 사 줘요.”
두규 형 아무 말도 않고 “그러자” 막걸리 크게 석 잔.
금요일 섬진강변 한옥에서 홀로 일주일을 보낸 두규 형이 순천 집으로 주말을 쉬러(?) 갈 때 간전면사무소 앞에서 두규 형을 만나 산을 넘어 순천으로 중고 냉장고를 사러 갔다. 요한이네 할인마트 또 그 옆에 영성중고가구점이 있었다. 이건 또 뭔가. 중고 가게는 모조리 기독교 계통? 내가 인터넷을 뒤져 찾아본 중고가게는 은혜중고가전이었다. 요한, 영성, 은혜…. 그래 맞다. 신상품을 살 수 없는 가난한 또는 홀로 사는 인생들에게 중고처럼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요한이 복음을 내려 영성을 우리에게 주시어써 은혜로운 생명을 얻으리라. 믿솨옵니다. 결국 영성중고가전점에서 삼성냉장고 쓸 만한 것을 22만 원에 샀다. 구례까지 운반 비용 3만 원 추가. 총 25만 원을 두규 형이 카드로 긁었다.
냉장고의 전원을 넣기 전에 락스로 냉장고의 내외부를 박박 닦았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전원을 넣어도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아주 조용했다. 두규 형에게도 은혜와 영성이 복음처럼 내려오기를. 쥔집 아주머니가 준 감자, 된장, 김치를 넣고 담양 형락이 형님이 주신 김치 한 통, 문철이가 준 감자, 양파, 청국장, 고추, 양파를 냉장고에 넣으니 마음이 여간 뿌듯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사람은 좀 갖추고 살아야 해.
다음날 아침 7시에 일어나 압력솥에 밥 짓고, 오뚜기 3분 육개장에 감자를 썰어 넣고, 고추장을 풀고, 텃밭에서 청양고추, 파를 넣고 끓여 내서 냉장고의 문을 아주 익숙한 듯이 열어 작년 겨울 김장김치를 꺼내 아침을 후다닥 먹어 치웠다. 그 3분 육개장이라는 것도 아무것도 넣지 않고 그냥 끓이면 조미료 냄새 때문에 절반도 먹지 못했을 것이다. 삶이 역겨워 죽겠는데 먹는 것까지 역겨우면 어찌 살아가겠는가. 담배를 한 대 피워물고 변기에 앉아 잠깐의 명상을 즐겼다. 삶은 나만의 것이면서 또 나만의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스쳐간 모든 생명체들의 인연과 연기와 분투와 인내 끝에 이 짧은 이승의 시간들이 내게 온 것 아니겠는가. 고맙다. 고맙습니다. 내 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 모든 사물들이여. 복음으로 영성으로 은혜롭게.
첫댓글 아멘...
냉장고, 막걸리 석잔이면 넘 헐하지 않나요~ㅋ
좀 갖추고 사니 행복 하시것네요.
갑자기 부러운 생각이 드는건 왜지...?
나는 김치 냉장고도 있는뎅~ㅋ
아아주 크은 걸로 석 잔입니다 ㅎㅎ
동생네 냉장고를 바꾸면서 쓸려면 쓰라기에 울집 냉장고를 돈주고 버리고 10년 넘은 양문형 냉장고를 받아 쓰는데 제발 냉장고좀 바꾸자고 남푠을 졸랐더니 멀쩡한 냉장고를 왜 바꾸냐고~ㅠㅠ
이젠 포기하고 기냥 쓰는데 급 부끄러워 집니다...ㅠㅠ
냉장고의 용도는 음식물 상하지 않게 하는것인데 멀쩡한 냉장고를 바꾸고 싶었던 맘~~
그거 욕심이라는거 정신 바짝들게 해 주시는글~^^
감사합니다...^^
20년 넘은 선풍기도 잘 돌아가고 있고~
옛것이 튼튼하긴 하더라구요~^^
가지고 있는것이 이렇게나 많다는걸 감사히 생각하겠습니다...꾸벅...
예, 저도 예전엔 자동차도 2만 Km 정도 뛰면 새걸로 바꿔치우곤 했어요.
지금은 20만 Km도 "이거 잘 나가네"하며 타죠.
집이 어딘지 알면
지나 가다가 슬그머니 맛난것을 놓고 올것 같은 마음이...
하찮은거라도 나누고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아침입니다^^
소박한 글을 읽어선지
흐음....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것도 차고 넘친다는 생각이...감사합니다..
잘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먼 얼어디질 중고를 25마넌씩이나.. 성, 너무 갖춘다 진짜. -_- ;;;
냉장고가 너무 잘 돌아가서 진짜 얼어 뒤지겄다야 ㅋㅋ
글이 재미있어요. 나도 오뚜기3분 육개장 사서 이것저것 넣고 먹어봐야쥐.
출근 앞두고 아무런 준비가 안 돼 있을 때만 그리 해요. 가능하면 가공 음식은 들지 마세요.
곧 교회 나가겠다
영성교회로 소개해 줄까?
요한은혜복음교회를 하나 맹글자. 장날에만 예배 보기로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