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 신령과 진정으로
말씀 요한복음 4:1-30 요절 요한복음 4:23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본문은 참된 만족을 찾아 방황했던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인생은 사막과 같이 고갈되었고 피곤하고 지친 삶이었습니다. 이런 여인을 예수님께서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심령에서 생수가 콸콸 솟아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그녀가 피곤하고 지친 인생을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이 사막과 같이 메마른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희가 오늘말씀을 통해서 아버지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삶을 회복하므로 우리 심령에서도 영생에 이르는 생수가 흘러넘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 예수님이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셨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소문과 달리 예수님이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었습니다.(2) 보통 소문과 실상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예의주시하고 핍박할 것을 아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쌔 ”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충돌을 피하시고자 유대 땅을 떠나 북쪽의 갈릴리 지방으로 가사 거기서 방해받지 않고 사역하시고자 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로 통행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 가지 루트를 통해 갈릴리 지방으로 갔습니다. 지중해쪽으로 가다가 우회전하여 올라가서 갈릴리로 가는 길이 있었고, 요단강을 건너 베레아, 데가볼리 지방으로 갔다가 좌회전하여 요단강을 건너 다시 갈릴리로 들어오는 길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루트는 예루살렘에서 바로 사마리아를 통행하여 가는 지름 길이었습니다. 1, 2번 루트는 3번 루트에 비해서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통행하는 직선 루트보다는 빙 둘러가는 길을 많이 이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행하는 지름길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아마 시간적으로 갈릴리로 빨리 가셔야 되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고, 유대인들과 충돌 가능성을 빨리 없애시고자 그렇게 하신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사마리아 여인을 도우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5,6 절을 보십시오. “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르셨습니다. 그곳은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세겜 땅이 가까이 있었습니다. 수가라 하는 동네에는 야곱이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로부터 이곳까지 약 50km를 걸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행로에 곤하여 그 우물곁에 털썩 주저 앉으셨습니다. 때는 제 육시 곧 한낮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정오 였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프고 목마르셨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습니다.(8)
7절을 보십시오. “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그 옛날 야곱을 기억하시고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백성들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한 결과 멸망당한 북이스라엘의 역사를 생각하시면서 상념에 젖어 계셨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상념을 깨며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왔습니다. 이 시간대는 물을 길으러 오지 않는 시간대였습니다. 여인들은 보통 선선한 아침이나 오후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혼자서 물을 길으러 온 것을 볼 때 사연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돕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남자들은 밖에서는 여자들과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내와도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늘의 황태자이셨고 여인은 과거가 복잡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는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슨 말씀으로 이 여인과 예수님사이의 장벽을 허무시며 대화를 시도하셨습니까? 7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 “ 물을 좀 달라 ” 이 말은 하인에게 명령하듯이 하는 말이 아니고 영어로 “ Will you give me a drink? " 로 “물을 좀 주시겠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목이 마르신 것도 있지만 여인을 도울 대화를 트기 위한 시도를 한 것이었습니다. 섬세한 여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아니하고 대화의 문을 열기 위한 접촉점은 물이었습니다. 여인은 물을 길러 왔고 예수님은 목이 마른 상태이셨습니다. 여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시며 그녀의 도움을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요청에 대한 이 여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 이러라.” 예수님의 물 좀 달라는 요청에 사마리아여자는 “ 어머 네~ 알겠사와요. 급히 드시면 체하시니...” 하면서 나뭇잎을 띄워서 공손히 드렸습니까? 아닙니다. 그녀는 “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말하였습니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율법적인 문제같이 보이지만 실상 여인의 마음에 사람을 섬기며 불쌍히 여기는 여유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물 한잔 떠 주는데 유대인이면 어떻고 사마리아인이면 어떻습니까? 여인의 내면은 피곤하고 지쳐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10절을 보십시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예수님은 부드럽고 온유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선물과 생수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님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롬6:23) 또한 예수님은 그녀에게 생수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여인의 귀를 가장 번쩍 트이게 한 것은 바로 ‘생수’(living water)라는 단어였을 것입니다. 생수란 살아있는 물이요, 그 물을 마시는 자를 살리게 하는 물입니다. 우리의 속을 참으로 시원하게 하고 기쁨과 활력과 에너지가 솟구치게 합니다. 생명력이 충만케 합니다. 성장하게 하고, 소망을 갖게 합니다. 영생을 얻게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그에게 구하면 이 생수를 주셨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여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수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깊은 지하에서 나오는 삼다수나 평창 생수 같은 물로 생각하였습니다. 두레박도 없으신 분이 어떻게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는 지 의아해 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들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 여인은 자기들에게 우물을 준 야곱을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또 수원이 풍부하여 야곱과 12 아들들과 모든 짐승들이 다 먹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1,5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시원한 물을 제공하는 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우물보다 더 시원한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니 예수님이 도대체 얼마나 큰 분 이길래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 반문하였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 야곱의 우물에서 나온 물은 마셔도 다시 목마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물이 인체에서 사용된 후 배출되기 때문입니다. 땀이나 소변으로 다 나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마름이 생기고 그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사람들은 다시 물을 마셔야 합니다. 하루에 8잔 정도의 물을 마셔야만 목마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또 목마릅니다. 그래서 밖에서 계속 물이 공급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여인은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매일 이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와야 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어떻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사람 속에 들어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그 물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몸 속에 샘이 만들어집니다. 이 샘은 마르지 않고, 거기서 계속해서 물이 솟아납니다. 와, 이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 몸 안에 샘이 생깁니다. 물론 이것은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샘은 속에서 솟아나기 때문에 외부에서 물이 공급 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샘을 가진 사람은 어디 가서든지 목마르지 않습니다. 사막에 가도 목마르지 않습니다. 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샘에서 영생하도록 생수가 계속하여 솟아나옵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력이 충만케 하며, 열매를 맺게 합니다. 어디가든지 목마른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생명력이 충만한 삶의 결과는 영생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이처럼 그 안에 샘이 되어 그것을 마신 자의 심령에 영원한 기쁨과 만족, 생명을 줍니다.
15절을 보십시오. “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 그녀는 말했습니다. “ 선생님, 그런 종류의 물이 있다면 제발 제게 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목마르지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다니지도 않게 하옵소서 ” 이를 볼 때 그녀는 목이 말랐고, 또 매일 같이 물을 길러와야 하는 삶에 대해 피곤해 하고 있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생수를 마시지 못하는 그녀는 영혼의 갈증과 곤고함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 예수님은 그녀가 영생수를 마시기 원한다면 남편을 불러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수가 너무 좋은 것이라서 그의 남편에게도 주고자 하심입니까? 아니면 많은 양을 줄 텐데 여인이 혼자 들고 갈 수 없기 때문입니까? 그녀에게 있어서 남편은 지금까지 그녀가 생수를 얻고자 했던 방편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사랑을 얻고자 했습니다. 남편을 통해 생활의 안정과 평안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남편을 통해 생명력과 행복과 참 만족을 얻고자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녀는 남편을 통해 생수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이 점에서 근본적으로 잘 못된 길을 걸어 왔음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가치관, 곧 남편을 통해 생수를 얻고자 하였을 때 얻을 수 없었던 것을 깊이 인정하고 예수님을 통해 생수를 구하도록 돕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7a절을 보십시오. “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이는 그녀의 진실된 영혼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녀가 생각 했던 남편은 그녀에게 생수를 줄 수 있는 남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남편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이 우물을 파서 후손들에게 준 위대한 야곱, 라헬을 위해 14년을 수일 같이 일한 야곱 같은 남편을 만나면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러한 남편감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길을 때 마다 그녀의 위대한 우상인 야곱 같은 남편을 꿈에서나 기대했을 것입니다.
17b,18절을 보십시오.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옳도다 ” 예수님은 그녀가 다섯 남편을 가졌던 여인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현재도 비공식적으로 어떤 남자가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한 여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여인은 놀랐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인해서 자기 앞에 있는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니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여자는 예수님을 유대인 남자로만 보았는데, 이제는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한 차원 높은 질문을 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 여자는 갑자기 화제를 예배 문제로 돌렸습니다. 이는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은 소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겉으로는 다섯 남편이나 갈아치운 부도덕한 여인으로 보였습니다. 율법적인 그 시대에도 한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는 현대판 자유 부인 같이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그녀를 손가락질하고 왕따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깊은 내면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올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올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였을 때 그를 가로 막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는 예배의 장소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성전건축에 같은 민족이라고 볼 수 없다 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을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진정한 예배 처는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여인은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21-23절을 보십시오. “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여인을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그녀가 예배할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자는 하나님에 대해, 조상들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를 예배하는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인 자기와는 아주 거리가 먼 분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가 ‘아버지’ 께 예배드려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란 어떤 존재입니까? 아버지는 자기 자녀들, 특히 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녀에 대해서 모든 것의 공급자이십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기 위해서 열심히 일합니다. 아버지는 필요하면 자녀들을 훈련시키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가 예배할 조상들의 하나님이 바로 이런 아버지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녀가 막연한 신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예배하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아버지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란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요, 예배의 대상을 가장 높은 분으로 인정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그 예배의 대상이 예배 자에게 모든 것을 공급한다는 것, 예배자의 행복과 장래, 생명 등 모든 것이 그분에게 달려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여인에게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여인은 그 아버지께서 예배를 드려야 하며, 그 분은 여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의 아버지요,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여자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여자에게 선물을 준비하여 주고자 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셨습니다. 여자는 이 하나님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아버지가 모든 것의 공급자이심을 믿고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여자에게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의 공급자가 계셨습니다. 그는 그녀의 과거의 남편들이나 야곱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셨습니다. 이런 아버지가 계신다면 여자에게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이런 아버지가 계신다면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여자는 이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해야 했습니다. 바로 지금 예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했습니다.
23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라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무소부재 하십니다. 장소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우리의 깊은 내면을 꿰뚫어 보십니다. 진정으로는 ‘진리에 기초하여’ 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진실함으로’ 곧 ‘자기의 있는 모습 그대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인은 인생의 실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인은 좋은 남편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고 싶었습니다. 그 심령에 생수가 넘치는 만족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여인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예배할 때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진실하게 나아가야 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의 도우심을 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 곧 자기 전부를 맡겨야 했습니다. 자기 생명을 맡겨야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배요, 하나님은 그런 예배 자를 찾고 계셨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배나 유대인의 예배나 모두 형식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진실은 숨긴 채 정해진 형식대로만 예배를 드렸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은 웅장하게 지어지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도, 숨은 소원도 다 감춘 채 형식적인 제사만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축복 받을 생각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 자들이나 그런 예배는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예배 자를 찾고 계셨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고자 하셨습니다.
여자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라고 말했을 때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 인생과 장래에 아무 희망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자기 인생에는 실패만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녀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 신령과 진실함으로 예배해야 했습니다. 그분은 여인에게 그리스도를 주시는 분이시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해 경배하는 삶을 살 때 그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 그녀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모든 궁금한 것을 속 시원하게 다 말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 예수님은 바로 인생들의 모든 의문과 궁금증을 해소시켜 줄 메시야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 하실 때 먹을 것을 사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여자와 말씀하시나이까? ” 묻는 이가 없었습니다. (27)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말씀을 들은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말했습니다.(28) 29절을 보십시오. “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 그녀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 근거는 자신의 행한 일들을 다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방황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목마름과 방황의 원인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녀는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외쳤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인생은 하나님 아버지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지 않을 때 사막과 같이 메마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지치고 피곤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 우리 삶에는 영생수가 흘러넘치게 됩니다. 우리가 날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는 가운데 내면에 영생하도록 생수가 콸콸 솟는 참 만족과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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