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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의식주의 운반수단으로 사용하던 배낭(Backpack)이 일상생활 용품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등산복이 일상복과 학생복으로 바뀐 것처럼 배낭 또한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배낭(背囊)의 사전적 의미는 ‘물건을 넣어 등에 질 수 있도록 만든 주머니’다. 원래 등산. 캠핑. 백 패킹목적으로 고안되었으나 지금은 언제 어디에서 누구나 애용하는 범용성(凡用性)을 지닌 가방처럼 되어버렸다. 전통적인 학생가방은 자취를 감추고 책가방은 배낭으로 변했다. 여성들은 손가방(핸드백)대신, 직장인들은 서류가방 대용으로 배낭의 용도가 바뀌어 가고 있다. 잡다한 용품과 노트북, 태블릿, 충전기, 케이블, 마우스. 책 등의 휴대 수단으로 배낭을 애용하고 있다. 이런 잡다한 용품으로 가득 찬 배낭은 사무실이나 작업실 역할까지 대신하는 디지털시대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시내 중심가에서 고급정장차림의 샐러리맨이 배낭을 메고 다니는 풍경은 조금도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권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직자들조차도 서류가방 대신 배낭을 메고 청사를 출입하며, 엄숙한 분위기의 법정을 출입하는 변호도 서류배낭을 메고 출정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백 팩 형태의 가방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 학생. 직장인. 여성. 중 노년층까지 배낭의 인기에 동참하고 있다. 연령과 계층. 신분과 직업을 뛰어 넘어 일종의 국민배낭(가방)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행장은 실용사회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빠른 사회변화 속에서 앞으로 어떤 유행이 생활 속에 파고들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배낭을 사용해본 사람들이라면 손에 들고 다니는 거추장스런 가방보다는 스마트폰사용이 자유로운 등짐이 인기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가방은 휴대나 운반이라는 본래의 기능 외에도 사회적인 부(富)의 과시와 허세의 의미가 보태졌다. 특히 여성들에겐 부(富)의 과시로 변질되기도 했다. 유럽산명품 손가방 하나에 적게는 수 백 만원에서 천만원대에 이르고 있다. 루이비통. 샤넬. 프라다. 앳드로. 버버리. 구찌. 크리스찬 디올. 천만원대를 호가하는 에르메스 등 그 가격은 천정부지로 높고 상상만 해도 기가 질린다. 웬만한 서민들의 전세 값에 버금가는 돈이다. 이중 몇몇 브랜드는 FTA체결 후 값이 떨어지기보다는 가격이 더 오르고 있다 한다. “누구는 명품 가방 들고 다니더라.”고 부러워하면서 명품구입에 마이너스 통장까지 만들어 쓰는 사람도 있는 것이 오늘의 세태이고 보니 명품가방에 비하면 배낭은 값이 저렴한 실용성 위주의 용구라 할 수 있다. 시대도 변했고 시대가 변하다보니 모든 생활용품이 기능과 편의성위주로 변해가고 있다. 전통적인 가방은 편의성 때문에 손에서 등으로 옮겨졌다. ‘손보다는 등’에 짐을 지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등짐문화의 원조가 된 전통적인 용구로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조선조 때 보부상이 쓰던 봇(褓)짐이나 전통적인 운반구인 지게가 유일하다. 지게는 서양식 금속제 프레임 팩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고유의 등짐도구였으며 우리민족의 생활사 속에 자리 잡은 용구이자 우리민족의 수난사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 남한산성. 북한산성 등 외침을 막기 위한 축성공사에서도 요긴하게 쓰인 것이 지게다. 식수공급시설이 미비하던 시절 산동네까지 물 운반수단으로 쓰던 북청물장수들의 식수운반 도구도 물지게였다. 한국전전쟁 당시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던 험준한 고지위로 탄약상자나 주먹밥을 저 올린 것도 한국노무자들의 지게였다. 지게의 효용을 모르는 미군장교가 거추장스런 지게는 버리고 어깨에 메고 운반하라고 명령했으나 가파른 고지를 작대기로 균형을 잡고 포탄을 저 날라 미군장교를 경탄하게 했다. 가난하던 시절 서울역이나 남대문시장에서 지게 하나로 품을 팔아 가족들의 생계를 돕던 용구도 지게였다. 오늘날 지게는 관광기념품 판매장에서 장식용구로 만들어져 외국인이나 고생모르고 자란 세대들의 노리개가 된지 오래지만 우리겨레의 눈물과 땀이 담겨있는 용구다. 배낭은 등산할 때 쓰이는 등에 메는 용구를 말하며 배낭을 뜻하는 외국용어는 영어권에서는 륙색(rucksack). 또는 백팩(backpack). 줄임말로 색(sack)이라고 부른다. 독일어권에서는 룩자크(rucksack)라 부른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니쿠사쿠로 발음한다. 한국전쟁 중 배낭은 피난보따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1.4후퇴 때 니쿠사쿠 메고 부산으로 줄행랑을 쳤다’는 등 한때는 일본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수년 전까지만 해도 륙색을 그렇게 불렀다. 내게도 니쿠사쿠하면 수십 년 세월 저편에 선하게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시절 니쿠사쿠를 메고 벚꽃 만발한 우이동계곡이나 월미도로 원족(遠足)을 갔던 일. 1950년 6월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 니쿠사쿠에 미숫가루. 주먹밥. 삶은 계란. 옷가지 등을 챙겨 넣고 무학여고 뒷산으로 피난 갔던 일이 떠오른다. 이처럼 니쿠사쿠는 한국현대사의 격변기에 요긴한 용구였다. 등산을 알기 전 어린 시절에 메었던 니쿠사쿠가 훗날 평생을 따라다니는 애물보따리가 될 줄이야 그때는 미처 몰랐다. 등산의 첫걸음은 ‘배낭과 등산화로부터 시작’ 된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배낭은 등산가들에게 중요한 기본 장비다. ‘부실한 배낭 멘 훌륭한 등산가는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등산복보다 먼저 장만해야 할 필수장비가 배낭이다. 좋은 배낭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즐거움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배낭은 몸에 편하도록 잘 꾸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배낭을 꾸리는 것이 잘 꾸리는 방법인가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몇 년 정도 등산을 한 사람들이라면 산행 용도에 따라 적어도 두개 정도의 배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편치 않다고 말하며 수시로 배낭을 바꾸는 사람들도 많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이든 메어서 몸에 착 붙어야하고 무게가 골반 뼈 위에 걸쳐져 다리로 집중되어야 한다. 이제 배낭은 “용구(gear)에서 의류(Wear)의 개념”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말은 배낭을 메었을 때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착용감이 좋아야한다는 것을 뜻 한다. 일반적으로 배낭을 고를 때 기준은 일단 메어본 뒤 등에 착 달라붙고 짐 무게가 어깨와 엉덩이 쪽에 골고루 분산돼 불편하지 않는 것을 선택해야한다. 물론 색상이나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여기에 치우치지 말고 기능적인 면을 고려하는 안목이 중요하다. 값비싼 브랜드라 해도 착용 시 자신의 체형에 맞지 않는 배낭은 좋은 배낭이 아니며, 기능이 우수한 배낭이라 할지라도 배낭을 잘못된 방법으로 꾸린다면 매우 불편한 고생보따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짐 꾸리는 요령과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짐 꾸리기는 등산의 기본기술이다. 일반인들이 등산학교에 처음 들어오면 첫 번째 수업이 배낭꾸리기 부터 시작한다. 지금은 기능이 뛰어난 배낭이 보급되고 있어 짐 꾸리기에 노력을 덜해도 되는 편이지만 예전의 배낭들은 그 기능이 조악하기 이를 데 없어 패킹요령이 우선했다. 내가 메고 다니던 배낭 중 가장 못마땅했던 최악의 배낭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키슬링’이라고 말하고 싶다. 키슬링을 메고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포터 이상의 중노동이 요구되는 하중의 노예가 되어야했기 때문이다. 등산이 주는 즐거움 보다는 공사판의 중노동에 버금가는 힘든 노역이 키슬링 메기다. 키슬링(Kissling)은 스위스 그린델발트의 요하네스 키슬링이라는 사람이 고안한 배낭이다. 뚜껑이 없고 짐을 많이 넣을 수 있도록 옆으로 길게 퍼진 형태의 배낭이다. 범포지 소재를 쓴 이 배낭은 큰 주머니가 양옆으로 달려있다. 숲길이 많은 우리나라 산악 지형에서는 옆길이가 길어 나뭇가지에 걸리는 일이 많아 적합하지 않다. 면 범포를 소재로 사용하여 방수가 취약한 단점과 많은 용량을 수납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 반면 등짐을 졌을 때 등판과 멜빵의 구조적 취약성으로 인해 요통을 유발하기 쉬운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80년대 초반 까지만 해도 하중훈련으로 이 배낭을 많이 사용했다. 특히 전통 있는 대학산악부에서 대물림으로 애용했으나, 시대의 흐름으로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혐오스런 기억이 담겨있는 키슬링이지만 젊은 날 땀에 찌 들린 추억이 깃든 고생보따리다. 전국의 산길을 누볐던 무거운 키슬링은 폐기했지만 평생을 져야할 또 다른 키슬링이 기다리고 있다. 그건 ‘고달픈 삶’이라는 이름의 백 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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