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G가 담배인삼공사라는 이름을 버리고 민영화 작업에 들어간 지 햇수로 4년째. 글로벌한 영문 이름과 ‘상상력을 응원하는’ 기업 이미지 광고만이 KT&G의 민영화를 말하지 않는다. 진정 ‘민영화’된 것은 상품으로서 담배 그 자체이다. 물밀듯 들어오는 외국산 담배와의 예정된 경쟁에서 더 이상 애국심이 아닌 브랜드와 디자인으로 맞대응하기로 한 KT&G는 담배인삼공사 시절의 안이한 자세에서 벗어나 타임과 에세, 레종을 출시하여 외국 담배의 시장 점유율 확장세를 잠재운 전적이 있다.
감각적인 브랜드와 디자인, 다각적인 홍보 전략으로 거둔 성공에 힘입은 KT&G가 이번엔 세계 담배 시장의 공룡인 말보로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최근 웰빙 열풍으로 저니코틴 저타르 담배가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일시적인 트렌드에 구애받지 않는 기본 취향의 층은 엄연히 존재한다. 순한 담배를 즐기는 수요자층이 아무리 넓어도 독한 담배를 즐기는 애연가들은 항시 있는 법. 이를 겨냥하여 지난 5월에 출시한 담배가 신제품 ‘제스트’이다.
‘풍미가 있는’ 이라는 원뜻 그대로 제스트는 건강 지향의 요즘 트렌드와는 정반대로 담배의 맛과 향을 풍부하게 살린 고급 담배다. KT&G는 말보로를 피우는 젊은층을 타깃으로 한만큼 디자인에서도 젊은 감각을 최대한 살리고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슬라이드 박스형을 도입했다. 그리고 경쟁 프리젠테이션을 거친 몇 가지 시안에 대한 최종 결정을 소비자에게 맡기기로 하고 전문조사기관에 소비자 선호 조사를 의뢰했다. 구차한 부연 설명이 필요없이 소비자의 선택에 의해 최종안으로 채택되는 영광을 누린 회사는 넥스트브랜드.
넥스트브랜드는 이 프로젝트를 단순한 패키지 디자인이 아닌 일종의 BI 디자인으로 접근하고 제스트의 브랜드 컨셉트를 ‘제스트&패션(zest&passion)’으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품은 열정의 이미지를 구상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개성을 중시하는 요즘 도시 젊은이들의 열정은 육체적이기보다는 이지적인 것에 가깝다고 보고 기본 컬러를 푸른색으로 결정하였다.
전체적인 디자인 틀은 타임이나 레종처럼 브랜드명을 강조한 기존의 로고 브랜드 중심에서 탈피,심벌을 중심에 두었다. 시각문화에 길들여진 젊은이들에게 브랜드 문자 인지보다 형태 인지가 더 매력적으로 어필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패키지 전면에 그려진 알파벳 Z 심벌은 제스트의 이니셜이기도 하면서 발진과 충전의 모티브를 담은 형태라 컨셉트와도 잘 맞아 떨어졌다. 여기에 심벌의 외곽선을 그라데이션 처리, 깊은 풍미를 남기는 담배 맛의 여운을 시각적으로 전달했다. 담배 케이스를 열었을 때 겉박스와 안박스의 단절감을 줄이고자 두 개의 면이 만나는 연속된 느낌을 최대한 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스트의 로고. KT&G는 담배의 강한 맛을 즐기는 젊은층을 위해 ‘풍미가 있다’는 뜻이 담긴 영문 단어를 브랜드명으로 삼았다.
지난 5월에 출시된 제스트의 성공 여부를 지금 판가름하기는 이르다. 담배는 다른 상품에 비해 보수성이 강한 편이라 제스트처럼 파격적인 패키지 형태와 심벌을 강조한 차별화된 디자인이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다가올 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 외국 담배의 경우 기존 브랜드의 생명력이 길어서 신규 브랜드의 출현이 별로 없고 브랜드 확장이 이를 대신하는 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담배는 새로운 브랜드가 출현하면 기존 브랜드가 치이는 형국이다. KT&G는 말보로나 던힐, 마일드세븐과 같은 유명 브랜드처럼 담배의 진정한 브랜드화를 이룰 때까지 새로운 시도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어쩌면 제스트가 그 첫 케이스가 될 지 모르는 일이다. 제스트 오리지널, 제스트 마일드, 제스트 라이트, 제스트 울트라 라이트, 제스트 슬림, 제스트 멘솔이 계속해서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국내 최초로 선보인 슬라이드박스 패키지.
케이스 측면 가운데에 노출된 안박스를 밀어 개봉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담배는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에 규제와 제약이 많은 제품이다. 직접적인 제품 광고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소비자와의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패키지디자인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시장에 출시되고 있는 담배 패키지는 사각으로 그 형태가 일괄적이다. 젊은층을 타깃으로 새로운 제품 출시를 구상 중이던 KT&G는 그러한 정형에서 벗어나 젊은이들에게 강하게 어필하고 싶어 외국의 쿨Kool이라는 담배의 슬라이드박스형을 벤치마킹했다. 또한 실무자나 경영자의 의견보다는 철저하게 소비자의 선호도를 우선으로 한다는 방침 하에 소비자 평가 조사 결과로 디자인 최종 결정을 내려 젊은이들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하고자 노력했다. 이제 제스트가 출시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앞으로 그 추이를 지켜 본 후 시장 상황에 따라 브랜드 확장도 고려해 볼 예정이다.
담배 패키지디자인은 디자인 컨셉트나 타깃층을 떠나 일반적인 상품의 패키지 디자인과는 다른 특수성이 있다. 우선 경고문 비율 20%를 준수하는 법적인 규제도 그렇고 담배 자체의 속성적 제한도 큰 편이다. 담배를 피울 때마다 담배케이스를 꺼내 들어야 하니 하루 한갑을 피우는 사람이라면 산술적으로도 하루에 스무 번, 한 달이면 600번이나 패키지를 보게 된다. 따라서 담배 디자인은 싫증이 나지 않으면서 너무 밋밋하거나 진부해서도 안된다. 게다가 커피 등의 다른 기호품하고 달라 한번 디자인된 담배는 전면적인 리디자인이나 리뉴얼이 거의 불가능하다. 때문에 처음 디자인이 매우 중요하다. 그 밖에도 담배라는 제품의 속성이 밝고 긍정적인 것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하는 등 이번 제스트 프로젝트에서는 담배 패키지만의 특수성을 고려한 디자인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출처 : 월간디자인
[출처] KT&G의 제스트. 말보로에 도전장을 내밀다 |작성자 와빠시